New Job Transition (5)

한 이틀, 일종의 볼멘 불평을 했었다.
사람들이 내게 요구하거나 칭찬은 하지만, 나를 위로하지는 않는다고 ^^
그리고 내가 그런 관계들을 초래한 것이긴 하지만.

어제 오후,
한국 시간으로 꽤 이른 시간인데,
내가 아끼는 후배 하나가 갑자기 카톡 전화를 해왔다.
내 블로그를 읽고선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했다고.
아침 매우 바쁜 시간중에 잠깐 짬을 내어서 전화를 한 것이었다.
이 친구는 내가 얼굴맞대고 만나서 이야기한지 3-4년은 족히 된것 같은데 말이다.

참 고마웠다.

하나님께서 뒤통수 한대 치시는 것 같았다.
짜샤, 괜히 어줍잖게 불평하지 말아라. 괜히 잘난척 하면서, 뭐 지가 위로 그런거 안 받는 사람인척 하는데, 그거 임마 꼴불견이야. -.-;

참내…
하나님은 내게 한번도 친절하신적이 없었다. 늘 이런식이다. 참… ^^

New Job Transition (4)

내가 만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의 90% 이상은, 내게 무엇인가를 요구하는 사람들이다.
무슨 일을 해라, 무슨 이메일을 써라, 무슨 얘기를 해달라, 무슨 조언을 해달라, 도와달라, 이거 하지 말아라…
회사에서도 그렇고, 만나는 크리스천들도 거의 대부분 그렇다.
(뭐 불평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그리고, 또 약간의 다른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일은 잘 했다. 이런거 해줘서 고맙다. 네가 그렇게 해주는게 참 좋다… 뭐 이런 식.

그런데,
정말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은 정말…. 정말…. 정말… 별로 없다.
(이건 내 잘못도 클거다. 내가 내 자신을 그렇게 positioning 한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제 글에 쓴것과 같은 그런 탄식의 기도를 할때에는,
하나님께서는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잘 한 일을 칭찬해주시는 것도 아니고,
그저 조용히 나를 꼭~~ 안아주신다.

어떤 상황의 개선을 요구하는 요청도 없고,
뭔가 설명하고 설명을 듣는 대화도 없고…
그저 그분이 말 없이 나를 꼭 안아주시고는 그저 가만히 있어 주시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예전에 이런 경험이 있을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잘 몰랐다.
그런데 이번에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하나님께서는 그 상황에서 그저 나를 꼭 안고 위로해주시는 것이었다.

아주 깊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면,
한 10년 정도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위로같은거 받지 않더라도 힘든 것을 견뎌가며 살아갈 수 있다. ^^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이런식으로 나를 꼭 껴안고 위로해주셨던 것이 한 10년쯤 전이었던 것 같다.

New Job Transition (3)

1.
내가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할때였다. 여러가지가 좋지 않았다. 실험실에서는 선배들이 고압적인 자세로 후배들을 부렸고, 성경공부등을 참석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일은 많았고, stress를 컸다.
게다가 아직 어린 신앙의 나로서는 삶의 여러부분이 신앙으로 잘 통합되어 있지 못해서 여러가지로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날, 선배로부터 모진 구박을 받고나서 였던 것 같다. 정말 무척이나 서러워서, 실험실에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한숨을 크게 쉬면서 하나님… 하고 하늘을 향해 조용히 내뱉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포근함이랄까 그런 것을 느꼈다.
여전히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든데,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는데, 내 마음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안함이 찾아왔다.

2.
그 후에도, 살면서 어려운 일들을 겪었다.
어떤 것은 정말 아주 가볍고 유치한 것이었지만, 어떤 것은 정말 크고 어렵고 심각한 것이었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다 한번씩, 탄식과 같은 짧은 외마디 기도속에서 나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경험을 했었다.

3.
한주 전에 lay-off 통보를 받고, 마음이 당연히 힘들다.
어찌 마음이 힘들지 않겠는가.

4.
어제 저녁에,
저녁을 먹고 하이디를 산책시키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보통은 그렇게 짧게 산책을 한다거나 운동을 할때에도 나는 주로 audio book을 듣거나 강의 같은 것을 듣곤 하는데…
어제는 오랜만에, 한동안 잘 듣지 않았던 복음성가 앨범 하나를 들었다.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
조그마한 탄식을 내 뱉었다.

참 오랜만에, 정말 참 오랜만에,
그 평안이 마음을 뒤덮었다.

(내일 계속)

New Job Transition (2)

레이 오프 당한 것을 이곳에 쓸까 말까 많이 망설였다.
그것은 두가지 이유였다.

첫번째로, 앞으로의 과정이 다소 힘들게 전개될 경우 (새로운 job을 찾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경우)
뭔가 계속 awkward 해질 것에 대한 염려였다.
사람들이 내게 job search 어떻게 되어가느냐고 묻는 것을 다들 조심스러워할테고.. ㅎㅎ
나도 뭐 계속 still looking 이라는 대답하는 것도 뭔가 뻘쭘하고.

두번째로, 혹시라도 내가 비교적 빨리 job을 찾을 경우,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 깊은 실망을 주게될 것에 대한 염려였다.
쟤는 저렇게 빨리 일이 풀리는데 나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뭐 이 블로그 독자들이 많지는 않으니 (대부분의 애독자들은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이고 ㅎㅎ)
그냥 이렇게 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연속되는 글로 계속 쓰게될지는 모르겠지만, job search가 진행되면서… 또 현재 job을 wrap-up 하면서 하게되는 생각들을 가끔 한번씩 써보게되지 않을까 싶어 시리즈로 일단 잡아보았다.

New Job Transition (1)

내가 지금 일하고 있는 이 팀에 들어왔을때,
정말 되어있는 일이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product를 1년 이내에 만들어야 한다고.
게다가 매우 limited budget으로.

거의 불가능해보이는 일이 주어졌고,
내가 맡았던 primary task는 이 팀에서 3-4년동안 노력했는데 한번도 성공해보지 못한 task였다.

그리고,
6개월안에 뭔가 의미있는 진척이 있지 않으면 이 팀이 다 없어진다고…

그로부터 2-3개월만에 내가 맡았던 일에 매우 중요한 break-through가 만들어졌다.
독일에서 했던 중요한 실험이 성공했다.
순식간에 팀의 분위기가 바뀌었고… 그러부터 1년후 우리는 결국 우리가 만들어내고자 했던 sensor를 만들어 내었다.

처음 우리 팀에 join 했을때,
적어도 나 때문에 우리 팀이 모두 망하지는 않도록 해야한다는 큰 부담이 있었고,
그 후에는 내가 맡은 일들이 늘어가면서, 내가 조금만 삐끗하면 팀 전체가 골로가게되겠다는 중압감이 컸다.

그럼에도, 지난 1년 9개월여동안에, 정말 많은 일들을 이루었다.
내가 해낸 일도 스스로 자랑스럽고, less-than-ideal 환경에서 일을 이루어낸 것도 뿌듯하다.

어쨌든,
이 회사에서 새롭게 해보고자했던 내 나름대로의 실험은,
(적어도 내게는) 의미있는 실패로 끝나게 되는 것 같다.

지난 월요일,
회사에서 우리팀 전체를 다 lay-off 시킨다는 news를 들었다.
한달동안 하던일을 wrap-up하고, 우리 lab 전체를 다 close한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product 개발을 사실상 다 끝난 상태에서 일을 접게 되어서 나름대로 다행이다.

이제 열심히 job search 중이다. ^^

The Sent – 내 묵상 (15)

내 개인적으로,한때 대단히 missional하게 살고자 노력했던 기간이 있었다. (지금도 사실 여전히 그렇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정말 missional한 것일까 하는 진지한 의문과 고민이 생겼다.

내가 무슨 기독교 사역을 열심히 하고 하지 않고에 관련된 질문이 아니었다.
정말 내가 하나님께서 하고계신 큰 그림과 align되어 살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질문에 가깝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며 아주 힘들고 지루한 전도과정을 거치고, 어려운 사람을 말씀으로 돕고, 내가 경험한 하나님을 나누고, 삶의 터전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려고 애쓰고…
게다가 말씀 묵상과 기도 열심히 하려고 하고…

이런것들 다 열심히 하는데, 과연 이게 missional 한 것일까,
과연 이게 영속하는 가치 (lasting value)에 충실한 삶인걸까, 그렇지 않으면 그냥 나는 열심히 사는 종교인인걸까.

금년은 코스타 30주년 이었지만, 내 개인적으로도 코스타에 처음 참석한지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나름대로 내가 코스타를 섬겼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조금 더 크게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왔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며, 나는 하나님 나라 백성 답게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었다.

늘 그렇듯이,
여전히 내 고민은 큰데 해답은 멀게 느껴진다.
아마 계속해서 더 깊은 생각과 고민을 해보아야 할 듯 하다. 어쩌면 해답이 주어지지 않는 고민을 하는 긴장 속에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더 많은 생각들이 있지만, 일단 이 시리즈의 글은 이정도에서 마무리를 해보는게 좋겠다.

자, 이제 컨퍼런스에서 무슨 가르침들이 있었는지 한번 본격적으로 배워봐야겠다.

The Sent – 내 묵상 (14)

Chris Wright은 구약학자이다. 복음주의 구약학자 (Evangelical OT scholar)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하나님의 선교 (Missio Dei) 개념을 복음주의로 가지고 온 것은 대단히 brilliant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그러한 개념에 깊이 공감하고 동의한다.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서술했던 것과 같이, 구약시대 백성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신약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premise가 달라졌다.
구약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전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었던 반면,
신약은,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이 되셔서 그것을 성취하신 시대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일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일이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일인건가?
(물론 하나님 나라 백성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서두…)

사실 사도행전이나, 기타 서신서에 드러난 신약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 하는 것을 드러내려 했다기 보다는,
이미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전하려 했던 것 같아 보인다.

내가 책을 건성으로 보아서 그런진 몰라도,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이 문제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리차드 헤이스의 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를 읽겠다고 작정만하고 읽지 못한지 벌써 몇년이 되어가고 있다. 이런 문제와 연관시켜서 좀 더 공부를 해보아야겠다.

The Sent – 내 묵상 (13)

매일성경의 QT 본문이, 요즘 계속 출애굽기이다.

아무래도, 내 관심이 The Sent 와 관련된 생각들에 많이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관점으로 이 본문을 읽게 되었는데…
나는 이번에 출애굽기 말씀 묵상을 하면서, 매우 새롭게 refresh 된 것이 있다.

그것은, 구약 백성에게 주어진 율법의 목적이 결국은,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나게 하려는 것,
정결의식, 종교예식, 사회적 질서, 개인적 윤리 등등에 대한 것의 목적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려는 것 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들로 하여금, 너희가 노력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으라고 명령하지 않으셨다.
혹은 너희가 노력해서 이집트에서 탈출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여리고성을 함락시키는 것도, 광야에서 먹을 것을 공급받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홍해를 가르고,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고, 율법을 주고, 싸움에서 이기게 하고, 자식을 낳게 하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먹을 것을 주고…
이 모든 것은 내가 다 하겠다.
너희는, 너희가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으로, 온 세상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도록 하여라.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인격적이신 하나님, 질투하시는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

우리가 해야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보여주고 이야기하는 일이다.

agenda를 관철시키는 것도 아니고,
우리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어떤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을 공격해가며 종교적 열심을 표출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어떻게든 이런 이야기가 좀 이 주제를 통해서 풍성하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자… 이제 내 생각을 좀 적당히 정리해 보았으니,
이제는 집회의 설교와 강의 file들을 한번 들으며 배우는 걸 시작해 볼까나… 생각중이다. ^^

아직 한두번 이 주제와 관련된 글을 더 쓸 예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The Sent – 내 묵상(12)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missional함을 회복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key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미움을 버리는 것. 그리고 미움을 회개하는 것.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을 먹고 있는 것이 기독교가 지나치게 개인화되어서 공적신앙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할수도 있다.
기독교의 윤리가 땅에 떨어져서 욕을 먹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건강하지 못한 신학 때문에 기독교가 어그러져있다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별로 이야기되지 않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세상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증오와 분노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그 안에서 기독교도 자유롭지 못하다.

신학적으로도,
미라슬라브 볼프의 포용과 배제와 같은 책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은데,
그 책을 언급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어투에는 비꼼과 비난과 미움이 가득한 것을 발견하곤 한다.
볼프의 사상을 우리 상황에 비추어서 신학적으로 좀 더 잘 살펴보는 노력을 하는 것도 매우 가치있는 일일 것 같다.

기독교의 리더들부터,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미워하는 일을 회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자신에게 그런 미움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내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미움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 앞에서 무릎꿇어 회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로부터 물론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conference에서,
혹은 대중적 기독운동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함께 깊이 회개하는 일이 빠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을 다루시는 아주 흔한 방법은, 그 백성의 회개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비난하는 방법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70년이 다 찼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의 죄가 여전히 관영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 기도를 했던 다니엘의 기도가 크리스천 리더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The Sent – 내 묵상 (11)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크리스천들의 관점이 심하게 polarize 되어 있다.
모두가 진영논리에 사로잡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심하게 비판/비난하고 있다.

코스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거의 매년, 저런 사람이 강사로 온다면 나는 다시 코스타 오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양쪽 진영에서 모두…)

이건, 코스타로 보면 대단히 큰 challenge이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이건 코스타의 문제라기 보다는 한국교회의 문제이다.
보수적인 사람들도, 진보/개혁적인 사람들도, ‘저쪽’ 이야기는 모두 틀렸다고 이야기하는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있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한 하나님의 선교를 제대로 풀어내면 이것을 통합해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구령의 열정, 사회에 대한 책임의식, 전통적 가치에 대한 존중, 새로운 도전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 등등을 잘 풀어낼 수 있는 좋은 framework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The Sent 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너무 쉽게 한쪽의 손을 들어줘버리게되면, 힘들지만 붙들어야하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게된다.

지금 20,30대의 청년들이,
보수적 복음주의자와 진보적 복음주의자를 함께 만날 수 있는 자리는,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미국) 코스타가 거의 유일하다. (arguably)

나는
지금 20,30대의 청년-학생들을 보면서,
무엇보다도 이들이, 심하게 polarize되어 있는 상태로부터 벗어나, 통합적인 복음을 아는 사람들로 자라나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야기하는대로,
크리스찬들이 나누어져 있으면, 정사와 권세잡은 자들이 여전히 세상을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세상의 왕되신다는 중요한 표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이 통합되는 것 (에베소서에 나온 것 같이)이다.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을 가르던 벽이 허물어지고,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되는 것이다.

agenda를 aggressive하게 이루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내려는 자세가 아니라,
사랑 (혹은 loving-kindness)의 자세로서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세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