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에 관하여 (7)

때로 고난의 기간은 짧을수 있지만,
자주 고난을 내면에서 process 하는 기간은 매우 길수도 있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을 통해 얻어진 열매가 무엇이다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 가벼운 행동이 아닐까 싶다.

마치 오래 뼈를 고와 곰탕을 끓여내는 과정과 같이,
좋은 한약을 오래 달이는 과정과 같이,
하나님께서 삶에 허락하신 어려움을 깊이 곱씹으며 성장과 성숙의 열매로 삼는 일이 필요한 것 같다.

때로 그런 과정중에 하나님께서는 전혀 예측하지 못하던 선물을 주시기도 하시는 것 같다.
하나님 성품의 진국이 오랜 시간에 걸쳐 흘러 나오는 것이다.

고난에 관하여 (6)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 중,
애매한 고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자주 본다.
좀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만난 존경하는 믿음의 선배들은 모두 애매한 고난을 깊게 경험한 사람들이고, 그 고난을 매우 건강하게 승화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삶의 현장에서 애매한 고난을 겪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경우엔,
하나님께서 너무하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한 믿음의 사람에게 연속적으로 어려움을 주시는 일들도 보았다.

고난은,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믿음을 구체화시킨다.
그리고 다른이들의 고난에 대한 말할수 없는 compassion을 갖게한다.

훌륭한 spiritual leader들에게 고난의 경험이 있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다.

고난에 관하여 (5)

고난을 겪으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도 있지만,
그 고난을 통해 쓴 뿌리만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다.

증오, 복수심, 모멸감, 패배감만을 갖는 일들을 본다.

물론 많은 경우에는,
맺어져야 할 건강한 열매들과, 지금 언급한 부정적 쓴 뿌리가 섞여 있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무서운 경우는,
부정적 쓴 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고난의 열매로 치장하고 포장하는 경우이다.
고난을 통해 자신이 성숙한 것 같이 훗날 이야기 하지만 막상 성숙했다기 보다는 쓴뿌리만을 마음 속에 갖게 되는 것이다.

고난을 겪는 중에,
고난을 다 겪고 난 후에,
건강한 조언과 가이드를 받으며 그 일들을 건강하게 곱씹을 기회가 있다면 이런 일들을 많이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고난에 관하여 (4)

어제 글에서 세종류의 고난에 관하여 언급했다.

첫번째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이다.
두번째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당하는 박해에 의한 고난이다.
세번째는, 억울하게 당하는, 피해자로서의 고난이다.

그런데,
가끔 고난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당황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고난 당하는 사람이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내용에 관하여 전혀 잘못 이해하고 대응하는 것이다.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잘못인데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받는 박해라던가,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이라고 생각하는 일들이 가장 흔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고난의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묵상하지 않아 잘못된 진단을 하게 되고,
결국 그 고난을 통해 얻어져야할 귀한 열매들을 놓치게 되는 일들을 보곤 한다.

고난을 겪으며,
그 일이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그 고난을 깊이 ‘묵상’하면서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고난에 관하여 (3)

고난에는 세종류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번째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겪게 되는 어려움이다.
두번째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당하는 박해에 의한 고난이다.
세번째는, 억울하게 당하는, 피해자로서의 고난이다.

명백하게 자신의 잘못으로 고난을 겪는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어려움을 주심으로 잘못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기회를 주신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복음과 하나님나라를 위해 당하는 박해에 의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멋진 고난이다.
이 고난의 열매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세번째 억울하게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처한 상황보다 그 사람을 더 사랑하신다는 중요한 sign이 된다.
성공이나 명예나 부 권력보다 그 사람이 더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그런 일들을 허락하시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고난에 처해 있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내 잘못은 없었나 하는 것을 돌아보게 되지만… (또한 돌아보아야 하고)
일차적으로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향한 무한한 사랑을, 마치 하늘 문을 여시고 폭포수를 그 사람의 머리에 쏟아붇는 것 같이 부으신다. 때로 그 고난의 가운데에 있는 경우엔 그 사랑을 fully appreciate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조금만 객관화시켜서 보면 – 보통 시간이 지나면 객관화가 가능하게 된다. – 그 사랑의 하나님이 전체 상황의 배경임을 볼수 있다.

첫번째 종류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감사한다. 그 사람의 성숙에 대한 소망 때문이다.
두번째 종류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감격한다. 그 사람의 헌신으로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세번째 종류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흥분한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당신의 사람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고난에 관하여 (2)

사랑하는 사람들을 말씀 안에서 섬기는 일을 하다보면,
정말 귀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그런데,
삶의 어떤 영역에서 자신의 것을 꽉 붙들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을 멈추어버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마음속에 가지는 안타까움은 말로 다 할수 없다.
고집스럽게 붙들고 있는 그것을 놓는다면 정말 자유로와질텐데,
세상이 감당할수 없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숙해 나갈 수 있을텐데,
그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도무지 저런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하시지 않는지 안타까울때가 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포기하신게 아닌가 하는 답답함마저 들기도 한다.
(물론 나 자신을 보면서도 그런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그런의미에서,
건강하게 자라는 당신의 자녀에게 그분께서 주시는 어려움은 하나님의 말할수 없는 사랑의 표현인듯 하다.

나는,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애매한 고난 당하는 것을 보면,
특히 그 사람의 성숙의 초기단계에서 그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한편 마음속으로 아파하면서도, 한편 마음 속에 기대를 갖는다.

아!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말 작품으로 만들고자 하시는구나.

고난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고난에 관하여 (1)

막 태어난 어린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상한 돌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막 어린 그리스도인을 벗어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애정은 그 이전 단계에 경험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깊다.

뿌리깊은 내면의 문제들을 다루시기 위해,
삶의 전 영역을 그분의 선하심 앞에 아름답게 정렬시키기 위해,
그 과정에서 베푸시는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shake-up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최근,
내가 사랑하는 어떤이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

마음을 면도날로 도려내는 것과 같이 아프지만…
기도하면서 마음에 주시는 잔잔히 흐르는 평안을 발견한다.

나름대로 며칠간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고난에 관한 단상들을 몇번에 나누어 적어보려 한다.

MIT를 용서하다 (final)

내가 쓴 이 글이…
그저 한 패배자의 글로 비추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결국 꽤 괜찮은 연구결과를 내며 졸업을 했고,
이제는 꽤 괜찮은 직장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MIT를 용서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내게 가져다준 보상이 결코 아니다.

MIT가 내게 준 선물은,
그 과정이 가져다준 열매가 아니라,
그 과정 자체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를 발견하게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품으셨던 하나님이었다.

숲에서 나와 숲을 보는 것 같이…
이미 5년전 졸업을 한 그 학교에 다시 가서…
그토록 고통스러워했던 나를 다시 보며…
이전에 그렇게 선명하게 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었다.

66동 지하 계단에서 울며 기도할때,
학생회관 컴퓨터실에서 거의 패닉 상태로 정신없이 지도교수를 알아보고 있을때,
내게 fair하게 다가오지 않는 상황에 맞서 싸우다 지쳐서 터벅 터벅 기숙사로 걸어가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나를 포근히 감싸고 계셨다.

내가 학위를 받는 것에 몰두하고 있었을때,
내가 성공과 명예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있었을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아 좌절하고 있었들때,
하나님께서는 그보다 훨씬 더 큰 계획으로 나를 묵묵히 붙들고 계셨다.

그저 시간이 좀 남아 오후 시간을 할애해서 잠깐 학교에 들어보았을 뿐인데…
이번 학회에서는,
하나님께서 전혀 예측하지 못한 큰 선물을 내게 주셨다.

MIT를 용서하다 (6)

MIT에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용서했다.
내가 MIT를 다시 걸으며… 경쟁 속에서 힘들게 싸우고 있는 교수들, 학생들, postdoc들을 보았다.
MIT가 영예를 가져다 줄 것을 기대하며 admission office의 설명회를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았다.

내가 그렇게 마음 속에 두고 용서하지 못했던 사람들…
교수들, 동료들, 선배와 후배들…
결국은 그 system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몸부림치던 동료 피해자들이었다.

관용과 사랑이 들어가야 할 자리를 남겨놓을 여유를 갖지 못한 채,
성취와 성공을 향해 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 만들어 놓은 피해자들.

물론 어그러진 system 속에서 행하는 타인에대한 가혹함이…
‘나도 피해자다’라는 말 만으로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 피해를 입으며 힘들게 박사과정을 지낸 나로서는… 그들을 용서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MIT를 용서하다 (5)

나는 내가 MIT에 있는 동안,
내 능력에 비해 내가 저평가받는다는 사실이 무척 억울했다.

영어때문에 저평가 받는 것이 억울했고,
나를 인정해서 믿고 밀어주는 지도교수가 없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그래서 나는 늘 인정받는 것에 목이 말랐다.
나보다 못한 연구 결과를 가지고 포장을 잘 해서 ‘뜨는’ 사람들을 보면서 경멸했다.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있었던 열등감과 질투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간 저렇게 떠서 앙갚음을 하리라는 독기로 가득차 있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게도…
졸업을 1년 반정도 앞둔 시기에,
하나님께서 내 눈을 열어 그렇게 많이 망가져 있는 나를 보게 하셨다.
아침 QT 시간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집요하게 말씀하시는 것에 나는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었다.

참 많이 마음이 아팠었다. 그렇게 심하게 망가진 나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고, 그것을 알면서도 그것으로부터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또 마음이 아팠다.

지금은 그럼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롭게 되어 빠져 나왔나.
글쎄… 선뜻 대답에 자신이 없다.

그러나,
최소한… 그 어리석음과 탐욕에 매달려 허덕이던 나의 모습을 다시 반추해 볼 수 있었다.
나를 그렇게 몰아넣은 환경, 그리고 그 환경 속에 그저 동화되어버린 나…
나는 그것들을 용서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