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사는 죄 (4)

그러나, 바쁘게 사는 것에 의미는 부여해야 하겠고, 그리고 그것을 미화할 필요가 있으므로…
나는 자꾸만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많이 바쁘지만, 그 속에서 깨닫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바쁘게 사는 속에서 사는 의미를 자꾸만 정당화하려 한다.

그렇게 하니, 당연히 매우 efficient하게 일을 하고,
일을 하는 측면에서는 successful하다.
그러다보면, 성공과 능력을 우상으로 추구하는 것은 더욱 심화되고,
그렇게 하는 속에서 내 영혼이 병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바쁘게 사는 것에서 주는 건강한 유익이 있다.
(언제 다른 기회에 이것에 관해서도 좀 정리를 해보려 한다.)

그러나,
바쁘게 사는 것 자체가 주는 해악이 크다는 것,
쫓기며 살도록 나를 drive하는 ‘system’은 타락으로 인한 distortion이라는 것,
사랑할 여유가 없이 사는 것은 죄라는 것 등을 기억하며 사는 것은 참 중요한 것 같다.

마치 늪에 빠진 사람과 같이,
바쁜 생활 속에 자꾸만 함몰되어가는 속에서,
이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는 건강한 영적 break-through가 필요한 것 같다.

동성 결혼에 대한 내 입장 (4)

8.
나는,
세를 과시하고 정치적인 이익집단이 되는 것은, 복음이 세상을 섬기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복음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만 물량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복음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은, 사랑의 섬김에서 나오는 authority이다.
세를 불려서 나오는 power가 아니다.
물론, 정치적인 방법을 통해서, 복음적 가치를 펼쳐나가는 노력을 해야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복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가지는 사랑의 authority의 강력한 support를 받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 저 사람들은 그래도 우리를 깊이 사랑하고 있어…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 genuine한 authority를 가져야 한다.

적어도 지금은,
미국도 한국도, 교회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 대해 사랑의 authority를 잃어버렸다.
그러니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agenda를 가지고 목소리를 높여도, 그저 비난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동성애에 대해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동성애에 대해서 나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옳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로부터 많이 배우고 싶다.

미국에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이 일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에게 어떤 말씀을 하시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좀 더 듣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침을 좀 줄이고, 더 많이 들어야 하지는 않을까.

동성 결혼에 대한 내 입장 (3)

6.
그리스도인들이, ‘혼인’의 궁극적 authority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세속국가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혼인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국가가 그것을 인정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다시 말하면 교회가) 그것을 인정했기 때문인가.
나는 Catholic 신자는 아니지만, 혼인을 ‘성사(sacrament)’의 일부로 보는 Catholic의 입장에 주목해본다.
만일, 정말 동성결혼을 교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면,
교회가 스스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혼인관계를 authorize하는 유일한 기관임을 천명하고,
세상에서 인정한 혼인관계와는 또 다른 차원에서 교회에서 인정하는 혼인관계가 있음을 이야기해볼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 밖에서 혼인관계에 대한 내용을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고 믿는다면,
교회 안에서는 오히려 세상과 다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기회이다.

허나… (약간 핵심에서 벗어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심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아니다. ㅎㅎ)
교회에서 결혼관계 세미나라고 해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결국은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세상이 하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행복한 가정생활이라는 것을 성경의 text로 정당화하고 있을 뿐.
복음주의 교회가 결혼에 대해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행복한 가정생활’, ‘성공하는 자녀로 키우는 자녀교육’ 밖에 없으니….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혼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 하나님께서 맺어주시는 가정이 어떤 nature를 갖는 것인가 하는 것,
부부 갈등의 해결을 너무 shallow하게 추구하기에 앞서, 그 갈등 중의 부부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
뭐 이런 이야기들은 정말 교회에서 듣기 어렵다.

문제는,
shallow한 happiness를 추구하는 교회 문화 속에서,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혼인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세속사회에서 하고 있는 ‘행복한 결혼생활’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에,
진정한 결혼에 대하여 제대로된 논의를 펼쳐낼 수 있는 신학적, 목회적, 실천적 근거가 대단히 빈약하다는데 있다.

7.
만일, 동성결혼이 정말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행해 핏대를 올리고 소리를 지르기 이전에,
세상이 그렇게 흐르도록 만든 교회의 문제를 솔직하게 바라보며 회개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다루어내시는 방법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선포해나가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생각이 부재한 상황.
교회론에 대한 이야기, 선교론에 대한 이야기, 이것들이 그냥 다 엉망진창이니…
십자가 깃발 들고 거리에 나가서, 얼굴 빨개져라 목청 높이는게 그리스도인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참 부끄럽다.

(내일 또 계속)

동성 결혼에 대한 내 입장 (2)

4.
나는, 동성애 자체를 성경이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세속국가에서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가령, 나는 성경이 살인이나 전쟁을 지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세속국가에서 군대를 가지고, 전쟁을 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는 것 같이 말이다.
혹은, 국가권력이 ‘사형’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살인을 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세속국가가, 그 국민들이 행복을 추구를 보호하고 support하는 차원에서 그렇다.

좀 삼천포로 잠깐 빠지자면…
개인적으로, 나는 ‘국가’라는 institution을, 성경이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의미에서, 아나뱁티스트 전통의 생각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그래서, 국가가 저지르는 전쟁이나, 국가가 실행하는 사형과 같은 것 역시, ‘악’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 이것에 대한 논의는, 동성 결혼과는 별개의 문제이므로 언제 기회가 될때 따로 써보려 한다. (이런식으로 미루어둔 글쓰기 주제들이 한두개가 아닌데… ㅋㅋ)

나 개인적으로는, 동성애자들에게 civil union이라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적절한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하면 ‘결혼’ 혹은 ‘부부’라는 것의 전통적 견해를 manipulate하지 않고도 동성애자들에게 동등한 혜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은 그것 역시 차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국가나 정부는, ‘부부’라는 이름을 그들에게 허락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이 그걸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건, 내일의 글에서 다루어 보겠다.)

5.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을, 세속국가에서 이야기하려면, 좀더 세속국가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소통해야 한다.
그냥 그게 죄라는둥, 그렇게 하면 에이즈 걸린다는 둥… 논리도, 개연성도, 사실에 근거한 치밀함도 부족한 것을 가지고 들이대는 방식은 결국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만 “돌아이”로 만든다.
동성애 반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돌리는 글의 내용을 잃어보면… 많은 경우 완전 가관이다. 사실에 대한 왜곡과 과장, 논리의 비약, 과잉일반화 등이 넘쳐난다.
동성애에 대한 이슈를 이야기하려면, 그 이슈에 대해 적어도 조금은 공부를 해야 하지 않을까…

(내일 또 계속)

동성 결혼에 대한 내 입장 (1)

내 마음은 온통 휘튼에 가 있지만,
지난 주말을 거치면서 미국과 한국 모두에서 난리가 난 이슈에 대해 간단히 내 생각을 정리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생각은, 당연히 바뀔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다. 아직은 나도 잘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아서…)

1.
기본적으로, 나는 동성애에 대해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text에서는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요 아래 쓰는 내용을 읽으면, 그래서 너는 동성애를 지지하냐… 뭐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까봐… 먼저 이렇게 천명해 놓고…)

2.
그러나,
나는 동성애에 대해서, 다르게 성경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동성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이 물론 있지만, 그것을 가지고 따발총을 쏘아대는 식으로는 반응하지 않으려 한다.

성경에 권위를 두고 그것에 submit하는 것은 건강하고 좋은 것이지만,
성경의 어떤 해석에 권위를 두고 그것에 submit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나는,
혹시 먼 시간이 지난 이후에, 동성애를 반대했던 사람들이 대단히 그것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게 될 가능성을 닫아놓지 않고 있다.

3.
비록 동성애에 대해서 나름대로 내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것이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싸워야하는 가장 중요한 이슈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걸 가지고 너무 열받아 하거나, 낙심하거나, 혹은 좋아하는 것은 지나친 에너지 낭비가 아닐까 싶다.

그리스도인들의 핵심적인 싸움이, 지나치게 contemporary해지면, 자칫 그 문제에 함몰되어 더 큰 것을 잃게되곤 한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도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다.

신학적으로 너무 급하게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지지하려는 근거를 찾아, 상대를 공격하려 하는 것 보다, 좀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이 동성애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었나?
적어도 지금 어떤 사람들에게는, 교회의 message가 그런 것처럼 생각되는 형국이다.

바쁘게 사는 죄 (3)

이렇게 쫓기며 살다보니,
필요이상으로 긴장하며 살게된다.

그래서,
일을 놓을 수 있는 시간 중에는, 다른 것에 힘을 쏟을 여유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 사랑할 여유가 없다.

내가 사랑을 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은,
그 사랑을 하는 일 자체를 내가 성취해야하는 task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족을 사랑하는 것, 어려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돕는 것을, 해야하는 중요한 당위로 여기고 check list 혹은 to-do list에 그것들이 올라가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내게, 너무나도 자주, 누릴 수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책임감과 부담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더욱 introvert가 되어가는 것 같다.

사랑할 여유가 없이 살아가는 것은 죄이다.

@ 정말 정신 없이 살긴 하는 모양이다. 이 시리즈 글의 제목에 타이포가 있다는걸 이제야 알았다. ^^

바쁘게 사는 죄 (2)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쫓겨 살게 되었을까?
가만히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기억하는 한 늘 그랬던 것 같다.
성공과 성취라는 것에대한 강박으로 인해, 계속 나를 채찍질하고 그 성취를 향해 돌진하는 것을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어린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국민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봤던 시험에서, 한 문제를 틀려서 그때 가졌던 수치심과 난감함을 지금도 명확히 기억한다. (나는 자연 과목 문제에 나왔던 그림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늘 성공과 성취가 아니면 수치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내 존재 가치는 늘 내 functionality와 연관이 있다고 여겼고,
나름대로 여태껏… 그 functionality에 충실하며 살아왔다.

유능함이 선이다 라고 explicit하게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 생각 깊은 곳에는 결국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니,
유능하지 못한 내 모습을 내가 용납할 수 없고, 그래서 죽어라고 목매며 유능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상태에서,
쫓기지 않는 마음을 갖기란 불가능하다.

쫓기며 사는 내 마음의 깊은 곳에는,
유능함을 우상으로 여기는 죄가 있는 것이다.

바쁘게 사는 죄 (1)

나는 바쁘게 산다. -.-;
음… 뭐 그냥 average 직장인들보다는 좀 바쁘게 산다.

그런데,
그렇게 바쁘게 사는 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내 삶에, 무엇보다 내 영혼에 red flash와 함께 사이렌이 울리고 있다.

몇번에 나누어서,
내가 빠져 있는, 바쁘게 사는 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번주는 더 바쁘기 때문에, 짧게 글을 쓸 예정이다. ㅎㅎ

우선,
좀 더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나는 내가 바쁜 정도보다 훨씬 더 마음의 여유가 없다.
실제 바쁜 것 보다 더 쫓기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물론, 내가 하루 8시간 직장생활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하는 날이 자주 있다.
집에 와서도 일을 놓지 못하고 지낸다. 결국 밤 늦게까지 일과 관련된 이메일들을 하다가 밤 늦게 잠자리에 든다.

그렇지만,
나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쉽게 relax하지 못하는 듯 하다.
계속해서 긴장된 상태로 지내기 때문에 늘 쫓기는 마음으로 산다.

요즘 나는,
마음의 조급함이 나를 갉아먹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
바쁜 것이 아니라, 조급한 것이 문제이다.
My problem is not being busy, but being hurried.

이번 출장에서 느낀 것들 (4)

여러 나라의 여러 회사를 다루다보면,
일을 잘 하는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 일을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두루 만난다.

함께 일하다보면 정말 분통이 터지는 경우를 많이 겪기도 하고,
야… 이 회사는 참 일 잘한다… 그렇게 감탄하는 경우도 아주 가끔 있다. ^^

그런데,
전반적으로보아,
business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 사역자들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질이 더 낫다. -.-;
(좀 심한… 너무 단정적인 표현이지만… 뭐 그렇다. 나도 역시 양쪽에 다 속해있다고 보고 있고, business/engineering을 하는 나와, 기독교 사역을 하는 나를 비교해보면… business/engineering을 하는 내가 훨씬 더 질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 Business를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성실하고, 훨씬 더 정직하다.
기독교 사역자들은… 일도 대충하고 땡땡이를 치면서… 주님께 신실하다는 식으로 자기기만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 기독교 사역자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정말 mission에 부합하는 일인가를 묻지 않은 채 뺑뺑이만 열심히 돌면서 자신은 열심히 산다고 자기 기만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business 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기만에 빠져있을 여유가 없다. 자기반성을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그냥 망해버리기 때문이다. -.-;
물론, 충분히 자기반성을 하지 못한채 어느정도 유지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얼마 버티지 못한다.

2. Business를 하는 사람들이 더 mission과 goal에 잘 align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연관이 되는 것이겠지만, business 쪽에서는, 끊임없이 왜 이 일을 하는가, 정말 이렇게 하는게 충분한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계속 반성을 해야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군살이 적다.
반면, 기독교 사역은, 아주 쓰잘데기 없는 것을 오래 하면서도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오래 버틸 수 있다.

3. Business를 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수준의 ownership을 가질 줄 아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일을, 지나치게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겠노라고 오바하거나,
그렇다고 나몰라라… 누군가가 하겠지… 하면서 땡땡이를 치면… business 쪽에서는 “개박살”이 난다. ㅎㅎ
반면, 기독교 사역자들 중에서는, 양쪽 극단에 속한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난다.

4. Business를 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수준의 risk-taking을 할 줄 아는 경우가 많다.
소위 ‘믿음으로’ 무모한 시도를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안전빵으로만 갈수도 없다.
자신과 자신의 organization이 가진 core competency와 market에 대한 분석등을 잘 해서, 적절하게 대응하기위해서는 적절한 수준의 risk-taking이 꼭 필요하다.
소위 ‘너무 믿음이 좋아’ 피곤한 교회의 일꾼들이나… ‘조용하고 참하고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하는’ 교회의 일꾼들에게서 이런 balance를 보기란 참 어렵다.

나도 나름대로,
소위 ‘사역자들’을 많이 알고 있고 (목사님들과 평신도 사역자들 모두…) 나도 스스로를 평신도 사역자라고 여기며 살고 있지만….

리더의 위치를 자처하면서 리더쉽의 전문성이 없는 사역자,
자기 기만에 빠져있는 사역자,
게으른 사역자,
자기 욕망을 위해 공동체의 비효율성을 manipulate하는 사역자,
무모한 사역자,
무능한 사역자…

등등을 참 많이 만난다.
꽤 큰 교회 목사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엄격하게 말하면, 이야기를 나눈다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기본적인 리더쉽에 대한 이해도 없는 걸까…. 하고 놀라는 경우도 있다. -.-;

모든 사역자가 다 형편없는 것은 물론 아니고,
모든 business/engineer들이 다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business와 관련해서 만나는 사람들과 밤 늦게 까지 일하다가 그 사람과 나름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하고 나면…
스스로를 ‘주의 종’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도 이런 진솔한 대화를 하는 것이 왜 그리도 힘들까… 하는 질문을 할수밖에 없다.

@ 제가 아는 한, 이 블로그에 들어오시는 목사님이나 전임 사역자들이 몇분 계신데… 뭐 표적 글쓰기 이런거 당연 아닙니다. ^^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분들이야 저랑 말도 잘 통하고,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죠. ㅎㅎ

이번 출장에서 느낀 것들 (3)

나는,
일반적으로 내가 하는 일 속에서 나름대로 만족을 느끼고 있는 편이다.
뭐 100% 만족스러운 일이야 당연히 세상에 없으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이 너무 많이 힘들지 않다면, 그냥 그 속에서 만족을 찾고 성실하게 살아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하는 일 가운데 정말 내가 몸서리치게 싫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내가 ‘갑질’을 하도록 요청받는 다는 것이다.
내 윗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cover하기 위해서, 그 손실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일을 하려 할때, 때로는 내가 그것을 수행해야하는 위치에 있을 수 있다.
나는 정말 그런 상황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싫다.
당장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수 없이 들만큼 싫다.
그래도 어떤땐, 그걸 이를 악물고 하게 된다.
(물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내가 그것을 어떻게든 막거나 우리 회사 내에서 반론을 펴서 방향을 바꾸거나 하지만… 그 damage가 크지 않을 경우에는, 더 큰 damage를 그 회사에 떠넘기는 것을 추후에 막기 위해서 그냥 갑질을 하기도 한다.)

이번에 한국에서 두개, 일본에서 내게의 회사와 meeting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주로 technical한 일을 했으므로, 함께 data를 검토하고 process condition을 바꾸어서 실험하고… 뭐 그런 일을 했지만,
일본에서는 주로 business 관련되 discussion을 많이 했다.
일본 회사에서 제시한 가격을 거의 절반까지 후려치는 일도 했고, 말을 잘 듣지 않는(?) 회사를 ‘길들이는’ 일도 했다. -.-;

돌아오는 길에,
간사이 공항의 라운지에서 이런저런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에게 publish해야하는 report도 정리하고, 각종 meeting notes들도 팀에게 돌리고…

그러다가 문득,
이번에 내가 ‘갑’이라는 사실을 attentive하게 인식하면서 조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했던 것들을 다시 쭉~ 돌아보니…
어허…. 완전히 내가 갑질을 했던 point들이 몇군데 있었다.

한국 사람들과 이야기할때에는, 한국말(존댓말)로 대화를 하면서 좀 조심했었는데,
일본 사람들과 이야기할때에는, 영어로 하면서 거의 그 사람들에게 호통치는 식(yelling at them)으로 이야기했던 일이 많았다.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제대로 보려면,
무의식중에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된다.

내가 소위 갑질을 하지 않겠다고 노력하며 사람들에게 nice하게 대했던 것은…. 그저 코스프레에 불과했던 것이었나.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깊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많이 뒤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