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게 사는 죄 (1)

나는 바쁘게 산다. -.-;
음… 뭐 그냥 average 직장인들보다는 좀 바쁘게 산다.

그런데,
그렇게 바쁘게 사는 것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내 삶에, 무엇보다 내 영혼에 red flash와 함께 사이렌이 울리고 있다.

몇번에 나누어서,
내가 빠져 있는, 바쁘게 사는 죄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이번주는 더 바쁘기 때문에, 짧게 글을 쓸 예정이다. ㅎㅎ

우선,
좀 더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나는 내가 바쁜 정도보다 훨씬 더 마음의 여유가 없다.
실제 바쁜 것 보다 더 쫓기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물론, 내가 하루 8시간 직장생활하고 사는 것은 아니다.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하는 날이 자주 있다.
집에 와서도 일을 놓지 못하고 지낸다. 결국 밤 늦게까지 일과 관련된 이메일들을 하다가 밤 늦게 잠자리에 든다.

그렇지만,
나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쉽게 relax하지 못하는 듯 하다.
계속해서 긴장된 상태로 지내기 때문에 늘 쫓기는 마음으로 산다.

요즘 나는,
마음의 조급함이 나를 갉아먹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고 있다.
바쁜 것이 아니라, 조급한 것이 문제이다.
My problem is not being busy, but being hurried.

이번 출장에서 느낀 것들 (4)

여러 나라의 여러 회사를 다루다보면,
일을 잘 하는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 일을 잘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두루 만난다.

함께 일하다보면 정말 분통이 터지는 경우를 많이 겪기도 하고,
야… 이 회사는 참 일 잘한다… 그렇게 감탄하는 경우도 아주 가끔 있다. ^^

그런데,
전반적으로보아,
business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기독교 사역자들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질이 더 낫다. -.-;
(좀 심한… 너무 단정적인 표현이지만… 뭐 그렇다. 나도 역시 양쪽에 다 속해있다고 보고 있고, business/engineering을 하는 나와, 기독교 사역을 하는 나를 비교해보면… business/engineering을 하는 내가 훨씬 더 질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 Business를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성실하고, 훨씬 더 정직하다.
기독교 사역자들은… 일도 대충하고 땡땡이를 치면서… 주님께 신실하다는 식으로 자기기만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 기독교 사역자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정말 mission에 부합하는 일인가를 묻지 않은 채 뺑뺑이만 열심히 돌면서 자신은 열심히 산다고 자기 기만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business 쪽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기만에 빠져있을 여유가 없다. 자기반성을 철저하게 하지 않으면 그냥 망해버리기 때문이다. -.-;
물론, 충분히 자기반성을 하지 못한채 어느정도 유지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얼마 버티지 못한다.

2. Business를 하는 사람들이 더 mission과 goal에 잘 align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과 연관이 되는 것이겠지만, business 쪽에서는, 끊임없이 왜 이 일을 하는가, 정말 이렇게 하는게 충분한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계속 반성을 해야하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군살이 적다.
반면, 기독교 사역은, 아주 쓰잘데기 없는 것을 오래 하면서도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오래 버틸 수 있다.

3. Business를 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수준의 ownership을 가질 줄 아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일을, 지나치게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겠노라고 오바하거나,
그렇다고 나몰라라… 누군가가 하겠지… 하면서 땡땡이를 치면… business 쪽에서는 “개박살”이 난다. ㅎㅎ
반면, 기독교 사역자들 중에서는, 양쪽 극단에 속한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난다.

4. Business를 하는 사람들은 적절한 수준의 risk-taking을 할 줄 아는 경우가 많다.
소위 ‘믿음으로’ 무모한 시도를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조건 안전빵으로만 갈수도 없다.
자신과 자신의 organization이 가진 core competency와 market에 대한 분석등을 잘 해서, 적절하게 대응하기위해서는 적절한 수준의 risk-taking이 꼭 필요하다.
소위 ‘너무 믿음이 좋아’ 피곤한 교회의 일꾼들이나… ‘조용하고 참하고 성실하게 주어진 일을 하는’ 교회의 일꾼들에게서 이런 balance를 보기란 참 어렵다.

나도 나름대로,
소위 ‘사역자들’을 많이 알고 있고 (목사님들과 평신도 사역자들 모두…) 나도 스스로를 평신도 사역자라고 여기며 살고 있지만….

리더의 위치를 자처하면서 리더쉽의 전문성이 없는 사역자,
자기 기만에 빠져있는 사역자,
게으른 사역자,
자기 욕망을 위해 공동체의 비효율성을 manipulate하는 사역자,
무모한 사역자,
무능한 사역자…

등등을 참 많이 만난다.
꽤 큰 교회 목사님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엄격하게 말하면, 이야기를 나눈다기 보다는 일방적으로 그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기본적인 리더쉽에 대한 이해도 없는 걸까…. 하고 놀라는 경우도 있다. -.-;

모든 사역자가 다 형편없는 것은 물론 아니고,
모든 business/engineer들이 다 뛰어난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business와 관련해서 만나는 사람들과 밤 늦게 까지 일하다가 그 사람과 나름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는 경험을 하고 나면…
스스로를 ‘주의 종’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도 이런 진솔한 대화를 하는 것이 왜 그리도 힘들까… 하는 질문을 할수밖에 없다.

@ 제가 아는 한, 이 블로그에 들어오시는 목사님이나 전임 사역자들이 몇분 계신데… 뭐 표적 글쓰기 이런거 당연 아닙니다. ^^ 그냥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분들이야 저랑 말도 잘 통하고,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죠. ㅎㅎ

이번 출장에서 느낀 것들 (3)

나는,
일반적으로 내가 하는 일 속에서 나름대로 만족을 느끼고 있는 편이다.
뭐 100% 만족스러운 일이야 당연히 세상에 없으므로, 지금 내게 주어진 일이 너무 많이 힘들지 않다면, 그냥 그 속에서 만족을 찾고 성실하게 살아가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하는 일 가운데 정말 내가 몸서리치게 싫은 부분이 있다.
그것은, 내가 ‘갑질’을 하도록 요청받는 다는 것이다.
내 윗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cover하기 위해서, 그 손실을 하청업체에 떠넘기는 일을 하려 할때, 때로는 내가 그것을 수행해야하는 위치에 있을 수 있다.
나는 정말 그런 상황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싫다.
당장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수 없이 들만큼 싫다.
그래도 어떤땐, 그걸 이를 악물고 하게 된다.
(물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내가 그것을 어떻게든 막거나 우리 회사 내에서 반론을 펴서 방향을 바꾸거나 하지만… 그 damage가 크지 않을 경우에는, 더 큰 damage를 그 회사에 떠넘기는 것을 추후에 막기 위해서 그냥 갑질을 하기도 한다.)

이번에 한국에서 두개, 일본에서 내게의 회사와 meeting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주로 technical한 일을 했으므로, 함께 data를 검토하고 process condition을 바꾸어서 실험하고… 뭐 그런 일을 했지만,
일본에서는 주로 business 관련되 discussion을 많이 했다.
일본 회사에서 제시한 가격을 거의 절반까지 후려치는 일도 했고, 말을 잘 듣지 않는(?) 회사를 ‘길들이는’ 일도 했다. -.-;

돌아오는 길에,
간사이 공항의 라운지에서 이런저런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에게 publish해야하는 report도 정리하고, 각종 meeting notes들도 팀에게 돌리고…

그러다가 문득,
이번에 내가 ‘갑’이라는 사실을 attentive하게 인식하면서 조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했던 것들을 다시 쭉~ 돌아보니…
어허…. 완전히 내가 갑질을 했던 point들이 몇군데 있었다.

한국 사람들과 이야기할때에는, 한국말(존댓말)로 대화를 하면서 좀 조심했었는데,
일본 사람들과 이야기할때에는, 영어로 하면서 거의 그 사람들에게 호통치는 식(yelling at them)으로 이야기했던 일이 많았다.

어떤 사람의 됨됨이를 제대로 보려면,
무의식중에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하는가 하는 것을 보면 된다.

내가 소위 갑질을 하지 않겠다고 노력하며 사람들에게 nice하게 대했던 것은…. 그저 코스프레에 불과했던 것이었나.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깊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많이 뒤척였다.

이번 출장에서 느낀 것들 (2)

일본 사람들은 참 특이하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과 같은 ‘아시아’사람들이니, 한국 사람들과 비슷하려니 생각하고 대하면 실수를 하기 십상이다.

그중 하나는,
이 사람들은 그렇게 ‘빨리빨리’하는 것을 잘 못한다.
대신 한번 해야하는 방법이 주어지면, 그것을 철저하게 잘 따른다.

일본 사람들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그저 몇십년씩, 심지어는 그보다 훨씬 더 길게 변하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
사실, 일본의 대도시가 아닌, 중소도시의 거리를 걷다보면, 70년대 한국의 모습을 만날때가 있다.

일본 식민지 시대에 일본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70년대 한국에 남아 있었는데,
그 후 한국에서는 그 모습이 없어진데 반해, 일본에는 그것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2차대전 직후의 일본의 모습을 물론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일본의 구석 구석에는 내가 사진이나 영화등에서 보던 옛날 일본의 모습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이 사람들은 이전 것을 휙~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하지 않는 듯 하다.

일본의 이런 모습은,
내구성이 좋은 일본의 제조업을 키워냈다. 그래서 reliability가 중요한 산업에서 일본은 여전히 세계 최고를 자랑한다. (자동차, 기계 등등)

그렇지만,
‘빨리 빨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현대의 consumer electronics의 경우에 일본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대신 빨리빨리를 잘 하는 한국이 일본에 비해 우위에 있는 것들이 많다.

당장 나만 하더라도,
내가 하는 project를 하는데 있어서, 일본의 어떤 회사와 꼭 일을 하고 싶었다.
그 회사의 기술이 워낙 좋고, 내가 이미 그 회사와 관계도 맺고 있어서 함께 일하는데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국 회사가 3개월 내에 하겠다고 하는 걸, 이 회사는 1년 반이 걸린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한국 회사가 3개월에 내어놓는 것은 처음에는 문제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일본 회사가 1년 반만에 내어놓는 수준에까지 다다르려면 1년 반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릴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한국 회사는 당장 3개월 이내에 무언가를 내어놓고, 거기서부터 improve 하겠다고 이야기하는 반면,
일본 회사는 1년 반후에 완벽한 것을 내어놓을 때 까지는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다고 하니…
나 같은 입장에서는 당연히 한국 회사와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뭔가 바꾸지 않으려는 일본의 문화는,
일본을 제조업 강국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이제는 그것이 일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게다가,
일본이 10여년전 부터 노령화 사회가 되면서,
사회 전체적으로 ‘nimble’ 한 모습이 더 약화되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더 보수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한국이 노령화 되면서… 비슷한 길을 걷게 될까?

이번 출장에서 느낀 것들 (1)

이번에도 아시아 출장을 다녀왔다.
사실은 이번에는 출장 기간 내내 몸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아 좀 힘이 들었다.

Mers의 나라인 한국에 다녀왔으니,
그거 걸려 온거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만 하지만,
열이 있기나, 기침을 하거나 하는 등의 증상은 사실 전혀 없고,
다만 그야말로 몸이 무겁고, 소화가 잘 되지 않고, 많이 지치고… 뭐 그런 증상이었다.

예전에는,
출장을 가면 현지시간으로 밤 12시 넘어서 까지 일하고,
새벽 3-4시면 시차 때문에 잠이 깨어서…. 그때부터 또 일하고…
아침 식사 전에 1시간 정도 뛰고, (이게 시차 적응에 도움이 된다.)
그렇게 했었는데,
이전 그런게 잘 되질 않는다.

이번에 출장을 가면서는,
운동하고, 시간이 남으면 혼자서 호텔 방에서 기도나 묵상도 하고… 그러겠다고 결심을 했으나,
몸 컨디션이 따라주지 않아 운동도 별로 못하고, 호텔에선 골골 잠을 자게되고 말았다.

사실, 출장 전에 한동안 좀 일이 많기도 했고,
이번 출장은 사실 ‘실패’할 가능성이 많은 출장이었으므로 마음에 부담도 큰데다,
출장 초반에 몸을 혹사하다보니 탈이 난 것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께서,
감사하게도 내게 허락해주신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체력’이다.

나는 다른 이들보다 체력이 좋아서 잠을 별로 자지 않고도 그렇게 힘들지 않게 견딜 수 있었다. 대학때 한참 열심히 공부할때는, 하루에 한두시간씩 자면서 일주일을 버틴적도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할만큼 공부가 재미있기도 했었다. ^^

그런데 이제는 “겉사람이 후패해 감을 느끼는” 피크가 지난 나이가 되고보니,
그게 더 이상 잘 되지 않는다.

너무 무리하지 않아야,
몸이 제대로 작동하는 것을, 어쩌면 난생 처음 경험하면서 사는 셈이다. ^^

이제는 체력 좋은 것으로 승부해야할 나이는 지난 것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뭔가 좀 더 지혜롭거나, 인격이 훌륭하거나, 풍부한 경험을 통한 통찰이 있거나…
뭐 그래야 하는 나이인 것인데…

음….
그런 경지에 다다르기엔 멀었고,
몸이 의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이에는 다다르게 되었으니…. -.-;

지혜에 대하여 (7) –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

앞에서 언급했지만,
지혜는 결국 여러 단편적 지식들을 통합해 내는 틀을 제공해준다.

그래서, 지혜를 갖추면, 지식 습득이 더 쉬워진다.

그런데, 단편적 지식의 통합은 결국,
그 모든 것을 엮어내는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면 당연히 더 쉽다.

나는,
오랫동안 신실하게 신앙을 가져온, 그리 많이 배우지 못한 노인에게서 지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지적 능력의 차이가 있기도 하고,
경험이나 배움의 기회의 차이가 있기도 하기 때문에,
대학입학시험 커트라인을 정하듯이 지혜를 재단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사람이 진리를 정말 깨달았다면,
그 사람이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가상의 상태와 비교해 보았을때,
비교할 수 없이 지혜로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으로 진리에대한 깊은 깨달음과 그것에 자신을 던져 사는 삶이 없이도,
진리에 대한 지식을 모으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에 이르지 못한다.

잠언에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거룩한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내가 보기엔 히브리문학적 표현으로 앞의 구절과 뒤의 구절이 같은 것을 의미하는 반복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 거룩한 자를 아는 것) = (지혜의 근본 = 명철)
뭐 이런 도식인 것이다.

여호와를 아는 것(Yada)는, 부부과 성관계를 하는 것과 같은 앎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그렇게 여호와를 아는 것이 결국 사람을 진리와, 지혜로 이끈다는 것이겠다.

나는,
지혜를 잃어버린 현대의 기독교가 안타깝다.

지혜에 대하여 (6) – 복음의 인격성이 가져다 주는 지혜

진리를 비인격적으로 대하면, 진리가 ‘지식’의 영역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진리가 인격적이 되면, 진리가 ‘지혜’로 우리를 이끌게 되는 것 같다.

인격은, 다분히 다중적이다.
어떤이의 인격을 기술할때, 그것을 수학 공식이나, 도표나,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으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fact의 조합이 인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인격체와의 관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 관계가 깊으면 깊을 수록, 그 인격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비인격적 진리는 그 대상화 관계를 맺을 필요가 없다.

복음이 이야기하는 진리는,
“하나님”이라는 인격에 담겨져 있다.
그래서 그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필수적이다.
그저 하나님에 대한, 혹은 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한 객관적 자료를 모으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따라서 진리에 제대로 머물 수 없다.

진리가 사람을 지혜롭게 한다고 했을때,
그러므로 진심으로 지혜로워지려면,
그 진리이신 인격체와 관계를 맺을때만 가능하다.

어떤 종류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많은 지식을 보지만, 그들로부터 흘러나오는 지혜를 보기 어려울때가 있다.
나는 그들이, 진리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하기 보다, 비인격적 지식으로 대하는것이 그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복음의 인격성을 간과했을때,
우리가 취득하는 것은 지혜에 이르지 못하는 지식에 머무르고 만다.

지혜에 대하여 (5) – 리더들의 지혜 없음의 난감함

지혜란, 결국 integration이라고 생각한다.
integration이 잘 되어있으므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하는 지를 아는 것이다.

나이가 40, 50… 심지어는 60, 70이 넘어서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가야하는가 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삶의 결정을 혼자서 하지 못한다거나,
충분히 handle할 수 있을만한 위기가 닥쳤을때 그것을 전혀 다루어낼줄 모르는 사람들이… 사실 정말 많다.

어쩌다 저렇게 되었을까….

적어도 내 관찰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integrate하려는 시도를 별로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심지어는 박사학위를 받고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도 있다.
책도 많이 읽고, 책을 쓰기도 하고, 남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무슨 의미인지 하는 것을 통합하지 않아서 그 지식들이 job function을 할때는 유용할 수 있으나, 막상 자신의 인생을 운행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리더들에게는 특히 지혜가 더 많이 필요하다.

어떤 모임이나 단체의 지도자가,
지혜가 부족한 것을 본적이 있는가.

정말 완전 난감해진다.

분명히 이 시점에서는 어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데,
미적거리고 있어서… (혹은 완전히 딴 소리를 하고 있어서…)
왜 그런지를 살펴보면 그 시점에 자신이 나서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사실 조차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게 뭐 동네 조기축구회 같은 수준이 아니라… 아주 큰 회사 조직에서도 이런게 발견된다. 완전 깜놀이다…

말하자면, 어떤 insight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 리더의 지혜없음으로 인해, 그 조직원들은 많은 고통을 겪어야한다.

회사 조직의 리더라면,
회사의 기술, profit, 사람관계, business transaction, 시장 forecast 등등에 대해 지식을 가질 뿐 아니라… 그것들을 ‘통합’해 내어야 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자신으로부터 plan이 나와야한다.
그냥 여러가지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독교 공동체의 리더라면,
복음의 본질, 세상, 사람, 성숙, 양육, 예배, 봉사, 선교, 훈련, communication 등등에 대한 단편적 지식 뿐 아니라, 그것들이 통합된 형태의 지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도움을 줄수도 있고,
건강한 ‘vision’을 제시할수도 있다.
건강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심지어는 어떤 분야에 공부와 훈련과 경험도 많이 했지만… 실제 상황에 맞닥드렸을때 거의 무기력에 가깝게 반응하는 것은 이런 통합된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지식이 있는지 지혜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판별식은 다음과 같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한 분야의 지식과, 다른 분야의 지식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가령, 회사 조직의 리더라면,
회사의 기술과 재정이 어떤 관계인가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회사의 사람들을 다루는 것과 시장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풀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헤없는 리더들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기를…

지혜에 대하여 (4) – 경험이 지혜를 제한할때

나는 Plasma processing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편 불행이기도 하고, 한편 다행이기도 한데…

내가 박사를 받은 분야는,
말하자면 충분히 mature한 분야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론이 거의 다 완성이 되었고,
사실 나는 그 분야에서 마지막으로 이론적인 부분을 정리한 일단의 사람들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다.
(아니…뭐.. 내가 뭐 대단한 일을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분야에서 더 이상 ‘모르는 것’이 그리 많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불행은, 그렇기 때문에 이 분야가 엄청 새롭게 뜨는 그런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다행은, 그렇기 때문에 나는 plasma processing에 대해 아주 통합적인 체계를 잘 갖게 될 수 있었다.
내가 석사과정을 할 때에는… plasma는 어려워… 그런 그냥 trial-and-error로 때려잡을 수 밖에 없어… 이렇게 생각하던 것이 많았는데,
이제는 processing의 결과도 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주 어렵다고 생각되던 process들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런데,
현장에서 일을 하다보면…
이 바닥에서 오래 있었던 사람들을 만난다.
이 사람들로부터, 매우 자주, 아주 유용한 경험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지만…
또… 너무 자주… 이 사람들이 내가 경험바에 의하면 이런거야… 라고 우기면 대책이 없게 되기도 한다. -.-;

말하자면,
내가 파리 날개를 떼어보았는데, 귀를 먹더라는 것이다.

차라리 현장 경험이 없다면, 좀 더 논리적으로 설명해줘서 도움을 줄 수도 있을 텐데,
자신의 경험과 그것을 부실하게 integrate 한 것을 가지고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경험이 올바로 integrate 되지 않을 때, 경험은 오히려 지혜를 가로막는 것이 된다.

사실 이런 것은,
기독교 세팅에서 많이 발견된다.

배우자 기도 리스트 놓고 기도했더니 기도가 응답되더란다.
40일 금식기도 했더니 아들이 서울대 가더란다.
집을 팔아 교회 건축에 헌금했더니 사업이 컸단다.

뭐 좀 극단적인 예를 들었지만,
사실 이런 이야기는 QT sharing 모임같은데 가면 너무 흔하게 듣는다.
말하는 사람은 감격해서 눈물도 흘리고, 듣는 사람은 아멘으로 화답하는데…
막상 내용은 이상하고…

경험이 반드시 지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integration 없는 경험은 지혜를 제한한다.
종교적 세팅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지혜에 대하여 (3) – 경험은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가

대개 현자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리자면,
백발에 인자한 미소를 띈, 도인과 같은 모습이다. -.-;
혈기 왕성한 20대의 젋은이로부터 지혜를 구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과연 경험은 사람을 지혜롭게 하는가?

내 생각은, not necessarily 이다.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한가지 예화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책상 위에 있는 파리를 향해 소리를 치며 책상 옆을 탁 쳤다.
파리가 휙 날라갔다.
이 사람이 노트에 적었다. “파리는 큰 소리를 잘 듣는다”

그 후에 파리를 잡아서, 날개를 떼어버렸다.
그리곤 책상에 놓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이번에는 파리가 날지 못했다.
이 사람이 노트에 적었다. “파리는 날개를 떼면 귀를 먹는다”

파리 날개를 떼어서 소리를 지르는 경험을 아무리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올바른 방법으로 통합해내지 못하면,
그 사람의 경험은 오히려 잘못된 생각을 build up 하는데 사용되고 만다.

올바른 통합(integration)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험은,
오히려 어떤 사람을 말이 통하지 않는 고집불통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