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를 마치면서

1.
내가 박사과정을 할 때,
내 지도교수의 그룹은 우리쪽 분야에서 늘 leading group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다보니 학회에 가서 내가 발표를 하고 나면, 내게 와서 여러가지를 묻고 하는 사람들이 늘 있었다. 나는 그러면 괜히 우쭐해지고 기분이 좋아지곤 하였다.

HP에 와서,
학회에 가면, (내가 발표를 하기도 하였고, 함께 간 다른 사람이 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우리 그룹에서 한 일에 관심을 표현했다.
작년에 어느 학회에서 내가 발표를 한 후에는, 말 그대로 나와 이야기하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기도 했다.
사람들과 만날 약속들이 바빠서 10분 15분을 쪼개가며 사람들을 만나고 그랬다.

2.
이번 학회에 와서 보니,
이 학회는 내 관심사 (그리고 우리그룹/회사의 관심사)와 그리 잘 맞는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발표를 하고 사람들과 interaction을 가지려 했지만 사람들이 신기해 하기는 하는데 당장 자신의 일차적 관심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대화의 진전이 없었다.
학회에서 말하자면 별로 바쁘지 않게… 이렇게 할일없이 보내는건 참 오랜만이었다.
덕분에 많이 쉬기는 했지만, 학회가 재미있지는 않았다.

3.
이 학회에는 유난히 대학원생들의 발표가 많았다. 회사나 연구소에서의 발표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실제 현장에서 필요한 것을 다루는 실제적인 논문은 매우 드물었다. 그 가운데 솔직히 말해서 많은 것들은, 논문을 쓰기위한 연구들인 것 같아 보였다.
그 연구를 통해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다거나, 어떤 현상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을 해낸다거나, 아니면 아예 생산현장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실제적 접근을 했다거나 하는 것이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발표들을 보고 있자니까, 바로 몇년전 내 모습이 보였다.
내가 대학원생일때, 정말 thesis를 쓰기 위한 연구를 했던 것. 큰 그림을 머리속에 담지 못한 채 그저 사소한 것에 매달렸던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를 알리고 좀 떠보려고 했던 것.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얼마나 예전의 나와 다를까. 부끄러웠다.

4.
이전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학회에 익숙하다가,
혼자 ‘쓸쓸한’ 학회에 있다보니…
‘백마병’에 물들어 있던 내 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등에 있는 왕자를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치 자신을 향해 환호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백마.
학회에서 내게, 내 연구 결과에 주목했던 사람들의 다수는,
내 affiliation이나, 내가 속한 그룹의 명성, 단순히 내가 그런 그룹에 속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가 얻을 수 있었던 advantage로 인한 연구 성과 등을 보며 내게 접근 했던 것이었다.
사실 그 가운데 내 contents가 얼마나 된다고…

이번 학회를 통해서,
학문적으로, 많은 것을 배운 것 같지는 않지만…
내 자신에 대해, 내가 하는 일에 대해, 공학에 대해,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성전 미문의 거지

사도행전
3: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본문에서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거지를 손을 붇들어 일으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면서부터 걸을 수 없었던 이 성전 미문의 거지를 베드로와 요한이 우리가 지난번에 성경공부시간에 보았던 것 처럼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이야기를 하니 성전 미문의 거지가 일어나 걷게 된 장면입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이 이 성전 미문의 거지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성전을 늘 들고 나오다 보면, 늘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장소에 앉아 있는 이 거지를 사람들은 보면서 이 사람을 향해서, ‘아 불쌍하다’ ‘참 안됐다’ 하는 반응으로부터 자기 자녀에게 허리를 구부려 귓숙말로, ‘너도 죄 지으면 저렇게 돼’ 라고 타이르는 반응, 혹은 그냥 피하는 반응 등 다양한 반응을 보였겠지만 이 사람은 이미 꽤 유명한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장애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지던 그 시대에, 이 거지는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어떤 피해야할 예로 여겨졌을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갑자기 걷게 되었습니다. 아니, 그냥 걸었던 것이 아니고 뛰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것은 그냥 단순히 신기한 일 정도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인지는 알수 없으나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존의 파라다임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에 의해 이렇게 되었다면 이 사람이 죄의 문제가 해결 되어야 이런 일이 일어 나는 것일테고, 죄는 하나님만이 사하실 수 있는건데… 아니… 무슨 선지자도 아니고 스스로 그렇게 claim하는 사람들도 아닌 두사람의 어부가 이런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 났으니 당연히 사람들은 이 두 사람을 주목했겠지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자신에게 사람들의 주목이 집중되는 것을 적극적으로 거부합니다. 아니 질색을 합니다. “아니 도대체 왜들 이러십니까, 이게 무슨 일입니까”
왜 그랬을까. 아니 그냥 일단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고 그런데 이런 내가 사실은 예수의 제자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 했더라면 어떤 의미에서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요. 사실 이거 참 많이 우리가 생각하는 거지요. 나중에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서 노벨상을 받는 자리에서 사실은 내가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 얼마나 멋있겠느냐. 교회에서 이런 설교도 많이 듣고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아주 질겁을 합니다. 아이고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아마 이 사람들이 이렇게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이 사람들에게는 그야말로 ‘예수가 꽉 차 있었’던 것이었을 것 같습니다.

인생과 말과 행동의 모든 목표가 예수님을 높이고 그분의 이름을 전하고 그분의 삶을 따라서 사는 데에 집중 되어 있는데, 갑자기 자신이 높아지게 되니 도무지 어떻게 이것을 참고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이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절절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내가 주목받다간 예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에 심각한 장애가 있겠다는 생각에 아주 질색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순간 우리의 이름이 높여지고 우리가 주목 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전전긍긍해 합니까? 퀄리 파잉 시험은 내가 잘 보려나, 결혼은 잘 할 수 있으려나, 다음주 시험은, 직장은, 논문 쓰는 것은… 결국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내게 attention을 주려 하지 않는데 나는 그것을 아주 desperately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어 내기 위해 아둥 바둥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 삶 속에서 그것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우리가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롭겠습니까?
그 대신 내가 아닌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내 삶의 영역에서 나를 ‘높이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필요에 맞게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내가 할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이지요. 사실 하나님은 그저 그분 자체로 영광스러운 분이시니,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드러나도록만 하면 됩니다. 괜히 내가 그 앞에서 치장을 할 필요가 없는 거지요.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천박하게 가릴 뿐입니다.

저희 딸 민우는요, 때로 정말 멋진 그림을 그리고 나선 엄마 아빠에게 쪼르륵 그 그림을 들고 옵니다. 엄마 아빠가 잘 그렸다고 칭찬해 주면서 한번 안아주길 바라면서요. 글쎄요 그 칭찬이라는게… 잘했다고 말하면서 한번 꼭 안아주는 거지만 민우는 그걸 얼마나 좋아하는 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민우는 엄마 아빠를 몹시 사랑하거든요. 엄마 아빠의 주목을 받는 것이 그 무엇에도 우선하거든요.

언젠가 영광스럽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충만히 회복되는 그때, 우리 하나님께서 꼭 안아주시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고, 다른 누구의 인정보다 내 인정을 더 갈망하는 네 마음 내가 안다 하시는 거 모습을 정말 저는 매일 꿈꿉니다.
그것이 베드로와 요한을 베드로와 요한 되게 했고, 그들이 전한 예수님을 참으로 예수되게 했고,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를 참으로 우리되게 할 것입니다. 세상의 싸구려 거지 가치관에 의해 휩쓸리지 않는

===

벌써 몇년전에….
어디에선가 짧게 나누었던 이야기인데…
학회에 와서 사람들의 발표하는 모습을 보며,
또 학회에 와서 발표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내 모습을 보며,
이 내용이 다시 생각났다…

구두쇠가 되기

나는, 대단히 부자집에서 성장하지는 않았지만 돈이 쪼들리는 환경에서 자라지도 않았다.
때문에 대학, 대학원에 다니는동안 돈이 없어서 크게 고생한 기억이 없다.
따라서 절약을 한다는 것은 주어진 용돈을 아껴서 사고 싶었던 CD player를 사는 수준이었다.

대학교를 다닐때, 한달에 13만원정도를 학교에서 받았는데 (10만원 장학금 + 3만원 학교 내 아르바이트) 이 정도면 그 당시 꽤 넉넉한 것이었다.(그게 벌써 20년전 일이니…)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닐때도 학교에서 매달 돈이 나왔고, 그 후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때는 더 넉넉하게 되었다.

미국에 와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면서 나는 아주 다른 경험을 하게 되었다.
처음 미국에 와서 얼마 동안은 지도교수를 잡지 못해서 한국에서 받는 국비유학장학금(정말 얼마 안준다!)에 의지했어야 했었고, 또 지도교수를 바꾸는 중간 중간등에는 늘 돈이 모자랐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경제적인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때로 (솔직히 말하면 너무 자주) 양가에서 경제적인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학교에서 받는 생활비로 생활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참 많이 아껴야 했다.

옷가게중에서, 옷에 약간 하자가 있는 것들이나 반품이 된 것만을 모아서 파는 곳이 있다. 이런 가게에서는 옷을 아주 황당하게 판다. 그중 어떤 상품은 다소 황당할만큼 많이 하자가 있는 것도 있지만 잘 고르면 하자가 그리 크지 않은 (가령 주머니의 깊이가 너무 얕다던가, 단추 사이의 거리가 조금 균일하지 않다던가)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다.

처음 이런 가게에서 옷을 사러 갔더니, 가게는 지저분하고, 저소득층 사람들이 가득했다. (어떤 특정 인종, 어떤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약간 무섭기도 했고 서럽기도 했다.
그렇게 5-6불짜리 청바지를 하나 사가지고 오면서 3-4불짜리 카푸치노를 하나 사서 마시기도 했다. (어휴.. 정말… 얼마나 개념이 없는 짓인지…)

그런데,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보면 나는 절약을 하려고 노력도 했고, 실제로 절약을 하기도 했지만 절약이 몸에 배지도 않았고 정말 절약을 어떻게 하는지 알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조금 아끼다가도… 전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사치품이나 기호품 등을 사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 당시로서는 내게 사치였던 한국 음식점에 가서 먹고 싶은 것을 자주 먹는 다던가, 값비싼 오디오를 산다던가, 매일 값비싼 음료를 사먹는 다던가 하는 것과 같은.

지금은 그럼 절약을 더 잘하고 있을까.
적어도 10년전의 나보다는 그런 것 같다. 절약을 한답시고 폼만잡거나, 한쪽에서 절약하면서 다른 쪽에서 펑펑쓰는 것 같은 잘못은 이제는 그리 자주 범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정말 검소하게 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아직도 나는 참 멀었다.
꽤 많은 월급을 받으며 살고 있지만 늘 돈이 모자르다.

현재는, 내가 먹는 것,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사는 것, 생필품을 사는 것, 옷을 사는 것 등등을 모두 포함해서 하루 평균 10-12불 수준으로 살고 있는데 (하루 평균 식비 5-7불, 내가 밥을 사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그리 불편하지 않다. 하지만 너무 자주 절제하지 못하고 쓰지 말아야 할 돈을 쓰기도 한다.

검소한 삶, 절약하는 삶은 훈련이자 훈련이 필요한 습관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렇게 검소하게 살면서도 인색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도 역시 훈련이 필요한 습관인 것 같다. 그건 또 다른 글에서 한번 얘기해봐야 할 것 같다)
아직도 너무 자주 씀씀이를 절제하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참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하나님과 가족들에게 미안하기도 하다.

그러나 절약을 해야한다는 당위만 있고 요란하기는 했지만 실제 검소한 삶을 살지도 못했던 10여년 전의 나를 생각하면서 그래도 시간을 통해 이나마 성장시켜주신 하나님께 참 많이 감사한다.

그리고,
좀 더 훈련과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서…
검소하면서도 인색하지 않은 삶의 자세가 몸에 잘 배었으면 좋겠다.
앞으로의 삶을 통해 나를 좀 더 성장시켜 주실것을 기대한다.

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이유 (마무리)

내가 왜 start-up company를 하느냐…
몇가지를 정리해서 써보려고 했는데…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혹은 이 가운데 헛된, 잘못된 이유들을 없을까.

아마 내 앞에 펼쳐진 adventure를 하나님과 동행하여 해 나가면서 그 해답들을 더 찾아야 할 듯 하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의 조언과 충고,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린다.

참고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구체적인 과정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HP Labs의 우리 그룹에서 어떤 특별한 기술을 개발을 했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flexible한 플라스틱 필름 위에 전자회로를 쉽고 빠르고 싸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이 일을 하면서 Iowa에 있는 그 당시로는 작은 어떤 회사와 함께 일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회사는 이제는 직원 수백명 수준의 회사로 커졌고, 얼마전에는 유럽의 주식 시장에 상장도 했다. (미국 시장에 상장하는 것은 제약이 많아 더 힘들다고 한다. 당분간은 유럽시장에서만 거래될 예정이다.)

그러면서, 그 회사의 설립자이자 CEO, 우리 그룹의 리더, 그리고 우리 그룹의 사람들 몇몇이 함께 회사를 만들어서 이 일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모았다. (주로 우리 그룹 리더가 주도를 했었다.)

그렇게 결정한 데에는, 내가 지난 몇번의 글들을 통해 기술한 “가치”의 문제가 있었고,
HP는 지금 우리가 개발한 기술을 바로 상용화 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지금 우리 기술의 시장은 기껏해야 수천만불 크기 정도인데…  총 매출 천억불 수준의 회사가 뛰어들기엔 지금 현재의 시장 크기가 너무 작다는 것이다.

이 일을 하면서, Iowa의 그 회사가 주도가 되어,
HP로부터 기술 사용 계약을 맺었고,
미국 육군 연구소에서 제공하는 연구비를 받았다. (앞으로 2년동안, 그리고 1년 더 연장 가능)

그래서,
처음 2-3년 동안은 내 월급은 미국 육군 연구소 연구비에서 나오게 된다.
지금과 같은 나쁜 경제 상황을 감안하면 매우 안정적인 수입원인 셈이다.

그 이내에 기술을 더 개발시켜서 실제 대량생산 상용화를 하여 시장에 내놓고, 대외 투자도 더 받고… 그리고 아마도 상장도 하고… 해서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는다는 것이 현재의 계획이다.

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이유 (6)

나의 inadequacy를 인정해 보고 싶었다.

Do I really have what it takes?
늘 내가 내 자신에게 물어보는 질문이다.

어떤 일을 할 때, 과연 내가 그 일을 감당해낼 만한 능력이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과연,
훌륭한 연구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좋은 network을 갖고, 인격으로 학생들을 키우는 그런 교수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학문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기여를 하면서 현세와 후세에 큰 영향을 키치는 학자가 될 수 있을까.

나는 과연,
corporate world에 들어가서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인간 관계를 맺고, 내 career development를 하고, 내 조직에 긍정적 기여를 하는 그런 직장인이 될 수 있을까.

아마…
많이 stretch 하면,
다시 말하면 내 삶의 다른 많은 영역들을 희생해가면서 (가족, 말씀사역, 내 인격 수양 등) 노력을 하면 그것에 매우 근접하게 갈 수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과연 그것이 내가 가진 competency일까.
나와 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면서 노력해야만 내가 그 goal들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내 competency는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그 goal들을 이루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유치원에 입학하면서 부터,
단 한번도 나는 inadequacy를 인정해 본적이 없었던 것 같다.
늘 나는 할수 있다. 나는 더 잘 할수 있다….
그리고 그런 drive는 어떤 의미에서 잘 먹혔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모든 것들을 잘 cultivate해 나가는 삶을 살기 위해…
나는 내 inadequacy를 인정하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최근의 career choice를 내린 또 다른 이유이다.

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이유 (5)

재화보다는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문화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내가 함께 일하는 사람들, 함께 회사를 하는 사람들이 물론 내가 생각하는 가치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작게 시작하는 회사의 일원으로서, 그 회사가 추구하는 가치를 만들어가는데 좀 더 의미있게 기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그저 cost 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
기술(technology)은 선전효과나 자기 자랑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통해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가치,
기업이 단지 이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을 넘어 가치를 창출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는 가치,
많은 돈을 소유하여 그 돈을 잘 굴려서 돈을 버는 것보다, 땀흘려 성실하게 일하여 돈을 버는 것이 더 의미있는 일이고 정당한 일이라는 가치,
열심히 일한 사람들이 그들에게 합당한 정도의 보상을 받아야 하고, 그보다 더한 보상을 받는 것은 부정직이요, 그보다 덜한 보상을 받게되는 것은 사회적 부조리임을 인식하는 가치…

이러한 가치들을 가지고도 회사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다섯번째 이유이다.

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이유 (4)

적어도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교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내 꿈은 교수였다.
그리고 어쩌면 교수가 되는 과정을 그래도 나름대로 잘 밟아왔고 어느정도 성취도 했다.
실제로 교수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시점에서 교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첫째,
꿈이 없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에 동참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현재는 한국도 미국도 모두 (한국은 더 심하지만) 공대를 졸업한 사람들에게 어떤 ‘꿈’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껏 졸업해야 취업에 목매야 하는 상황. 공대를 졸업했다는 사실이 좌절이고 절망이 되는 상황, 자신이 좋아하는 공학의 이상을 현실에 다 팔아 넘겨야 살아남는 상황.
내가 교수가 되어, 내가 길러낸 사람들을 그렇게 꿈이 없는 세상으로 보내는 일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누군가는 그 일을 해야겠지만… 내가 내 제자들에게 진정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르치며, 이 연구와 노력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 줄 수 없는 현실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둘째,
적어도 현재 학교에서 하는 소위 ‘뜨는 분야’의 연구는,
지극히 선정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경향이다.
자신의 연구 성과를 멋지게 포장하여 과대 선전하고,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약속하여 연구비를 따고, 그 돈으로 학생들을 고용해서 학생들의 싼 노동력으로 연구 결과를 짜내는.
물론 그렇지 않은 교수님들도 계시지만, 실제로 ‘뜨는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떤 연구와 발명이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지, 그것이 사람들을 어떻게 이롭게 하는지, 진리를 밝혀내는데 어떤 기여를 하는지 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가치들은 그저 조소거리가 되어가고 있고, 얼마나 멋져 보이는지, 얼마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지, 얼마나 많은 연구비를 따오는지, 얼마나 많은 publication을 내는지 하는 부차적인 것들을 더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환경 속에서 교수가 된다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기만이자 무책임한 선택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다고 교수가 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교수 지망생들이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로 교수를 하려고 한다는 것은 비극이지만,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엄청난 consequence들을 academia가 짊어지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는 정말 교수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분들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이미 교수가 되었거나 교수 지망생들도 있고.

적어도, 내게는, 2008년의 context 속에서,
공대교수가 되는 rational들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네번째 이유이다.

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이유 (3)

훌륭한 사람들과 일하면서 배우고 싶었다.

나는 지금 내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참 좋아한다.
나는 이들과 일하면서 engineer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 깊이 알 수 있었다.
다른이들을 배려하고 세우면서도 탁월함을 가질 수 있음도 보았다.
당장의 이익보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도 배웠다.

이들과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일 감사했다.
내가 가진 것들로 이들을 섬기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세번째 이유이다.

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이유 (2)

짜여진 틀이 아닌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고 싶었다.

중학교때 그래도 공부를 잘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수학을 재미있어 한다는 이유로…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한 이후,
나는 한번도 하나님의 active한 인도하심을 따라 내 삶을 운행한 적이 없었다.

물론, 어느 학교로 진학을 할 것인가,
박사를 어디에서 받을 것인가,
박사를 받고 어느 직장에 갈 것인가 등등의 고민과 기도가 있었지만…

대학때 공부 잘 했으니, 미국의 소위 ‘좋은 학교’로 박사 받으러 유학 왔고,
거기 졸업했으니 ‘좋은 직장’ 잡아서 커리어 쌓고… 그러면서 연구자로서 명성도 쌓고… 논문 많이 쓰고… 학회에서 이름 날리고…

그저 고민하지 않고 계속 가면 가게되는 그런 길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으로서,
내 삶의 운전대를 진정으로 주님께 맡겨드리고 그분이 운행하시는 것을 한번 구경했던 적이 있었던가.
이제 나이 40이 된 이제껏,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나의 주님과 동행해온지 20년이 되어가는 이제껏, 과연 그런 적이 있었던가.

하나님께,
하나님 과연 이렇게 틀에 박힌 길이 아닌 길로 간다 해도 여전히 주님께서 나의 주님이시지요. 이런 속에서 주님의 active 하면서도 dynamic한 인도하심을 따라간다면 그것만한 blessing이 없겠지요.
그렇게 기도했다.

이것이 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두번째 이유이다.

내가 start-up company를 하는 이유 (1)

후배들에게 해줄 말을 갖고 싶었다.

내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 후,
내 마음 속에서 한번도 떠나지 않은 소망은,
내가 나의 삶을 통해 후배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게되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살아온 길을 후배들에게 보여주며,
내 실수와 실패, 내 성공과 성취를 통해 후배들이 살아갈 길을 보여주고 밝혀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 내 소망이었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각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 나의 후배들 – 이제 막 대학생이 되었거나 대학원생이 된 이들, 혹은 그보다 더 어린 이들 -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른다.
심하게 세속화 되어 있는 세대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살고 있다. 내가 그 나이에 꾸었던 세상과 사회를 향한 꿈도, 자기 자신에 대한 소망도, 자신의 삶을 던질 가치도 발견하지 못한 채… 그저 ‘생존’과 ‘성공’에 매달려 사는 모습들.
물론 그렇지 않은, 훌륭한 후배들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이야 나로부터 배울 사람이 아닐테고.

지금 내가 세속화된 세대를 살고 있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생존과 성취에 매달리지 말고 가치를 위해 모험을 선택하라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대의 세속화에의해 정복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인데…

MIT 졸업하고 HP labs에서 연구 잘하고 논문 잘 쓰고… 어디 교수되었고… 잘 풀렸다.
나는 이것이 그들에게 impact를 주는 life story가 될 것 같지 않았다.

내 삶의 context 속에서 나름대로 ‘모험’을 했던 경험이 있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후배들에게 모험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나의 이 경험들을 통해,
후배들에게 내 삶으로 해줄 story를 갖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새로운 회사에 join 하는 첫번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