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3)

5.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행동했는가를 따라가며 모범으로 삼으려는 시도는, 어쩌면 스토리를 잘 못 읽는 것일수도 있을 것 같다.
오히려, 그런 아브라함과 계속 동행하시면서, 오래 참으시면서, 많은 인생의 굴곡을 겪어 가시면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선지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으로 바꾸어나가시는 하나님의 스토리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는 이유는,
아브라함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아브라함을 불러내셔서 동행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6. 성경에 계속 나오는 믿음의 조상들의 이야기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읽는 것이 더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브라함-이삭-야곱 등등의 이야기를 읽어가면서는,
세대가 지나갈수록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사람들에게 어떻게 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여주시는지 하는 것에 주목하여 읽으면 유익이 크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할때,
그런 위대한 인물들의 하나님 이라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과 계속 동행하시면서 그 삶의 스토리 안에 개입하셨던 그 하나님…
이제는 그 하나님이 나와도 동행하신다..

라는 방식으로 이해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잘 읽어내려가면,
pluralistic society 속에서 하나님나라 백성됨이 무엇인지 하는 것에 대해서도 더 많은 insight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2)

3. 아브라함은 대단한 믿음의 결단을 한 것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기로 한 구체적인 배경이 성경에 다 나와있지는 않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르기로 한 것은, 큰 믿음을 가지고 창조주를 따르기로 결심했다기 보다는,
여러신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을 따르다가 결국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믿음의 본질이라는 것이 자신의 security로부터 detach되는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신 것이다.

4. 아브라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나간다.
처음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제사를 지낸것,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것 등등 모든 행동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한 창조주로서의 신앙고백이었다기 보다는,
그저 자신이 섬기는 신에대한, 그 당시 통용되던 방식으로 충성을 보이는 행위였을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은 꽤 엉성하고 허술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소돔과 고모라 사건 후에는 상당히 깊은 회의/depression/혼란 가운데 있었던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계속 동행해가면서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워나간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수준까지 하나님을 이해하고 알게된다.

나는 아브라함을 이렇게 읽는다. (1)

벌써 몇주 지나긴 했는데,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묵상 본문이었다.

몇년 전, 아브라함을 성경 본문을 공부하면서 참 여러가지를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다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읽으며, 내가 아브라함을 읽는 방식을 좀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1. 나는 아브라함을 ‘위인’으로 보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아브라함은 ‘나’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었던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과 communicate하시면서 그 사람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그 믿음의 내용을 잘 demonstrate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우리를 대표할만큼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그 믿음의 본질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믿음의 조상이었다.

2. 아브라함은 하나님에대한 사전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 지방에서 살았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이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이 ‘다신교적 상황’에 놓여있었음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애굽을 하는 백성들에게,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 출신이라고 이야기하는 background에는, 아브라함이… 그저 다른 사람들이 다 하듯이 다원주의적, 다신교적 상황에 있을때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이런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지식은 대단히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처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따르겠다고 결심했을 때에도, 어쩌면 그저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따르기로 했을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0)

여기 담긴 생각들을 좀 더 제대로 잘 풀어내려면,
적어도 20-30번에 걸친 시리즈의 글을 써야만 될 것 같은데…

음…
사실 도저히 그럴만한 여유와 시간이 없어 대단히 주마간산 격으로 정리해 보았다.

사실 여기에 comment나 댓글, 질문 같은 것들이 좀 달리면 그것을 계기로 생각을 좀 더 발전시키거나 elaborate 해보려고 생각을하고 있었는데,

글이 별로 였을까… 별 comment들이 없어서 그냥 이렇게 대충 마무리를 해보고자 한다.

이 세가지 관점을 조금 더 정리해서 표로 만들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이 관점들이, 적어도 지금 이 시대에 어느정도 relevancy를 가지는 입장들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적어도 지금은 어디에서 강의를 하거나 설명을 할때 이런 frame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언급할 것은,
이 관점들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어느 사람의 삶 속에 세가지 요소가 다 존재할수도 있고, 세가지중 일부만 존재할수도 있다.
또, 어느 사람이 살아가면서 인생의 phase마다 다른 존재양식을 가질수도 있다.
가령 젊을때는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변혁시키시는 하나님의 mode로 살게된다던지 하는…

뭐 아직은 내 생각이 덜 무르익었다고 생각하므로…
앞으로 몇년 후에 이 framework이 어떻게 변하게될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9)

이 세번째 유형을 염두에 두고 살아갈때 기억해야하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다.

우리 존재의 목적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 존재의 기능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멈추는 것이 합당하다.

우리가 무엇을 변화시키려하는 것 보다는,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며 세상의 빛이 되는 것으로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사실 이 관점은,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에서 볼때 매우 make sense 한 부분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선언되었고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면 어떨까 하는 질문을 가지고 그것을 표현해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은 최근에는 N T Wright이 이런 얘기를 매우 많이 한다. 그 사람의 표현에 따르면 What if God is running the show? 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Already but not yet 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과 가장 잘 align되는 유형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렇지만,
이 관점을 가지고 살아갈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격리주의’ 이다.
세상과의 대비가 중요한 요소인만큼, 세상과의 분리 혹은 세상으로부터의 격리가 부작용으로 나타나게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8)

세번째 유형에서 살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불러내시는 하나님” 이시다.

이 유형에서 생각하는 바는 이것이다.

세상의 타락은 매우 극심하다. 그 어그러진 정도가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고치려고 하는 노력 자체가 무의미하다. 세상에 들어가서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도 환상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서 세상에 밝히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이다.

음…
뭐 이런 관점은 결국은 Amish 사람들을 생각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맞다. Amish 생각하는 바가 결국은 그것이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 Amish 방식이 “틀린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Amish 같은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고도, ‘대안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의미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킬까?
솔직히 그건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세상을 향해서, ‘기준’이 무엇인지를 broadcast하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그 백성들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 백성들의 삶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러한 방식은,
Christopher Wright이 이야기하는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과도 align되는 것이고…
적어도 나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역할이었다고 생각한다.

‘공동체’가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하다보면, 결국 우리의 존재의 양식의 기본 단위는 개인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이고,
개인은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가치있고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될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7)

이런 두번째 유형은,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믿음의 선배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해당된다.
그 외에도 흑인 노예들, 한국 초기 교회 성도들도 역시 이런 유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도무지 사람(들)의 노력으로는 바뀔 것 같지 않은 상황,
그런 상황 속에서 그저 하늘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

이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기다림’ 혹은 ‘하나님을 신뢰함’이 되겠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 상황을 초월하는 초월자가 계시고, 그분이 우리 하나님 이심을 믿는 것이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대로,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이런 유형이 더 relevant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빈익빈 부익부가 계속 심화되어서, 경제는 발전하지 않아… 청년 실업은 증가하고 있고,
세상의 화려함이 더욱 심해짐에 따라 상대적 박탈감은 증가되는데,
그 체제 속에서 ‘노예’로 살거나 아니면 그 체제의 낙오자가 되도록 강요받는 상황.

장래가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버렸고,
생명보다 돈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세상.

이런 세상 속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상황 속에서 suffer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열리고, 홍해가 갈라지기를 기다리며 부르짖는 것.
그래서 초월, 신비, 고난 등의 개념들이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주의할 것은, ‘패배주의’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우리는 suffer할 수 밖에 없다고 하여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결코 패배하시지 않는 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어야 한다.

우리의 삶도 의미가 없고,
우리는 그저 낙오자이고 실패자일 뿐이라는 패배주의적 생각은,
이 두번째 유형이 잘 못 제시되었을때 생기는 독소일 수 있겠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6)

소위 ‘사막의 교부’라고 불리우던 사람들은,
초기 기독교의 신비주의자(mystic)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을, Eugene Thacker는, 그 당시 대부분의 신비주의자들이 나왔던 Alexandria에서 찾고 있었다.

Alexandria는 당시 상당히 발전된 도시였다.
여러가지 학문이 발달했고, 기술이 진보했으며, 여러 사상과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물론 로마 제국의 중요한 거점 도시로서 경제적인 풍요도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일종의 ‘벽’ 혹은 ‘한계’를 느끼고 ‘신비’를 찾아 사막으로 나갔다는 것이다.
Eugene Thacker는, (이 사람은 허무주의자이다. 전혀 종교적이지 않은)
자신의 학생들에게 이 사막의 교부들이 추구했던 신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학생들의 눈이 반짝이는 것을 경험했다고 했다.
어쩌면, 지금 사람들의 상태가… 사막의 교부들이 Alexandria를 버리고 신비를 추구했던 그 상황과 비슷한 것일까.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묵상을 많이 하다보면,
결국은 신비 혹은 초월이라는 하나님의 속성과 대면할수 밖에 없다.

그런 초월적인 need가 지금 더 크다는 것은,
지금의 상황이 어떻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싶다.

나는 기독교에서 신비 혹은 초월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신비 혹은 초월이 적절한 균형을 잃어버린 신비주의나 초월에의 추구가 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또한 생각한다.

이 두번째 견해에 관하여 조금 더 생각해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 해보았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5)

두번째로 생각해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 이시다.

나는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 유형이 훨씬 더 relevancy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가령, 소위 ‘악덕기업’에 취직해서 다니는 40대의 직장인을 생각해보자.

뭐 해적선 선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사람을 보면서는, ‘악덕기업’에 다닌다고 뭐라고 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우선, 이 사람이 그런 악덕기업에 다니지 않고는 할 수 있는 다른 skill set이 별로 없을 수 있다.
20대부터 배우고 해온게 그건데… 뭐 다른 일을 새롭게 하기가 어렵다.
이직을 해보려고 해도, 같은 업종에 있는 다른 회사들의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다들 악덕기업들이다. 심지어는 사장이 독실한 기독교 장로라고 알려진 회사들을 포함해서…
게다가 가족 생활비,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 교육비, 등등을 결국 이 악덕기업에서 주는 월급으로 살고 있다.  노예와 같이 사는 것 같아, 때려치고 싶다가도, 가족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기 쉽지도 않다.

이런 사람에게…
너는 믿음이 부족해서 그 악덕기업에 다니고 있는거야…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성경에서 나오는 예를 들어보자.
출애굽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상당히 야속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홍해가 갈라지기 전까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것 이외에는.

체제를 개혁하는 일도, 개선하는 일도…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을 때가 많다.
그리고 도무지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변화가 있지 않고는, 그 체제가 변하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이럴때 하나님은,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도록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하는 일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상황을 견뎌야 하는 것이다.

(다음주에 계속)

– 사실 이 유형에 대해서는 금년초에 ‘초월적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총 12번에 걸친 시리즈를 쓴 적이 있다. 거기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으므로 이 시리즈에서 다시 길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몇가지 포인트만 간략하게 더 써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4)

변혁의 방법을 취할 경우,
다분히 ‘타협’을 불가피하게 해야할 경우가 있다.

몇년전 코스타 저녁집회에서 어떤 강사가 하셨던 설교중, 엘리야와 오바댜라는 설교가 있었다.

엘리야는, 우리가 다 잘 알듯 아합-이세벨 체제내에서 ‘광야에서 외쳤던’ 선지자였다. 바알 선지자와 대결해서 승리하기도 했던.
반면, 많은 사람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오바댜라는, ‘궁내 대신’이었다.
사실 악한 왕이었던 아합왕 체제에서 궁내 대신이었으니, 그리고 바알숭배를 자행했던 시대의 고위 관직지였으니…
이 사람은 그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많은 타협을 해야만 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오바댜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려내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체제 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그 체제에 남아 있으면서 그 체제를 변혁시키는 일은 이렇게 타협을 요구할 경우가 많다.

그런 사람들은 변절자일까?
과연 어느 선까지 타협하는 것이 적절한 것일까?
그렇게 타협해가다가 결국은 세상의 ‘시대정신’에 정복당해버리지는 않을까?

변혁자들이 고민할수밖에 없는 문제들이다.

그리고 또…
사실 변혁자로서의 삶을 살려고 할때,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꾸준히 그리고 오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수 있다.
당장 전체 체제를 바꿀 수 없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그 악한 system에 조금씩 crack을 만들어 가고 변화를 이루어가는 일에는 정말 오랜 시간이 필요할 수 있다.
변혁자의 가장 위대한 예로 이야기되는 윌리엄 윌버포스가 그러지 않았던가.
젊은 시절 회심 이후 노예제도 폐지에 평생 자신의 정치 일생을 걸고 살았고 결국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 법이 통과되는 것을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
흔히, 작은 것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변혁자들을 밖에서 보면서는…
저게 무슨 의미가 있어… 라고 이야기할수도 있지만,
사실 깨어진 체제 속에 들어가 있다보면, 큰 체제를 당장 변화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그 안에서 조금씩 고통받는 사람들을 돌보며 살아갈 일들이 참 많이 있다.
정말 작은 일들에 의미가 있는 것들이 참 많다.

변혁자들이 또한 생각해야할 또 다른 면은,
세상의 어그러짐을 바로잡으려 할때에는, 그 바로잡는 그 노력으로 인해, 매우 자주, 다른 왜곡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대기업이 남미의 어느 나라에 공장을 지어 어린이 노동착취를 하고 있다고 하자.
의로운 그리스도인들이 그 대기업에게 그 노동착취를 해소하라고 탄원도 하고 시위도 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로 그 악덕 대기업은 어린이 노동착취를 개선하기 보다는 그 공장 자체를 닫아버리는 결정을 할 수도 있다.
어린이 노동착취라는 문제는 해결(?)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가난한 나라에서 그나마도 있던 일자리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이다.

변혁자는 그런의미에서, 이상주의자로 남아있기 대단히 어렵다는게 내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