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3)

우선,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변혁하시는 하나님이실 수 있다.
이것은 전통적(?)으로 창조-타락-구속이라는 framework에서 세상을 변혁(transformation)시키는 복음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리차드 니버 역시, 이것을 변혁자 그리스도 (Christ, transforming culture)라고 하여 중요한 분류로 사용하였다.

이 입장은, 사실 소위 ‘개혁주의적’ 기독교 세계관을 이야기할때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이 입장을 잘 설명해준 책,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타락-구속”의 원제는 Creation regained 이다.
다시 말하면, 구속은 창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따라서, 창조때 주어진 문화명령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의 체제, 문화 등을 변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이해하는 것이다.

‘온 세상에 하나님의 주권을’ 이라는 모토가 매우 어울리는 입장이다.
정치, 경제, 사회, 학문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해야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정치, 하나님의 뜻대로 펼쳐지는 경제 등등을 강조하는데, 그 변혁을 이루는 주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적 영역에만 신앙을 가두는 이원론의 극복이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선한 창조의 회복을 강조한다.

성경에서는 느혜미야 같은 사람이 이런 입장을 대변하는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고, 역사적으로는 뭐니뭐니해도, 윌리엄 윌버포스 같은 사람이 이 입장이 표방하는 영웅이다.

음…
내가 사실 대학-대학원때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는 이게 다인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여기에는 몇가지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우선,
이 입장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주로 ‘리더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인것 같다.
80년대 개혁주의적 기독교세계관을 비판할때 많이 이야기했던 것이, 변혁 모델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적용 가능한 모델로 보여지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그 입장을 이야기하고 소개했던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리더’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세상 삶의 치열함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었던(?) 대학교수들이 주로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그러다보니 이론적 구호로부터 더 이상 전개되지 못하는 한계가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또한,
80-90년대 그렇게 ‘변혁’을 외쳤던 그 당시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 뭐 하고 있나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이들은 많은 경우에, 세속화 라는 거대한 물결에 속수 무책으로 휩쓸리게 되었던 것 같다.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인식했지, 그 세상이 우리를 집어 삼킬만큼 강한 위력을 가지고 있음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사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또…
이런 변혁의 입장은 흔히, ‘승리주의’ 혹은 ‘정복주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령…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어야 해. 그런데 악한 세력이 동성 결혼을 찬성하려고 해. 그러니까 우리가 세를 더 모으고 정치적 promotion을 통해서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법을 만들자.

뭐 이런 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에 권위(authority)를 갖기 보다는,
힘과 number of votes로 세상에 권세(power)를 가지려고 하는 시도이다.

기독교가 개독교라고 욕먹게된데는 이런 background가 다분히 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2)

깨어진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건 내가 강의등을 할때 많이 차용하는 스토리이지만 여기 한번 또 써본다.

아마 2003년엔가 eKOSTA에 썼던 글에서 나는 처음 쓰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니 벌써 내가 여기저기서 우려먹기 시작한지 10년도 더 지난… ㅎㅎ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해적선을 타고 있는 사람들인지 모른다.
심하게 망가져있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위의 해적선 비유에서, 나름대로 고민하면서 살고 있는 해적선원이 한사람 있다고 하자.
이 해적선원에게는 어떤 가능한 option들이 있을까?

뭐 그냥 교회에서 흔히 듣는 말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해적선에 너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은, 그 해적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해적선에서 사랑이 꽃피우도록 사랑하라.
해적선에서 복음의 영향력을 나타내어라.

음….
뭐 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막상 ‘해적선’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좋으신 말씀’일 뿐이다.
아주 아주 shallow 하고 superficial한.

그냥 일반적으로 좋은 말씀에 머물것이 아니라면…

나는,
크게 세가지의 viable한 option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대체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나? 라는 질문에 답을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사는 모습 (1)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논의가, 나는 그렇게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그 이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세계관’이라고 하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여야 한다.
그런데, 흔히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이야기를 할때에는, 세상과 복음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 그것을 한정시킨다.

그런의미에서,
흔히 이야기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담론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기독교 셰계관’의 아주 일부분을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전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좀더 넓은 의미로 기독교 셰계관을 다루려면,
사물의 본질, 궁극적 실재 등등이 다루어져야 하고,
당연히 신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계시의 본질, 고통의 문제… 뭐 정말 다양한 이야기들이 다 함께 다루어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존에 창조-타락-구속으로 정리되는 세계관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식의 논의는,
기독교 세계관 논쟁이라기 보다는, 복음과 세상이 interact 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은 리차드 니버가 ‘그리스도와 문화’에서 접근한 것처럼, 이것은 기독교 윤리에 대한 discussion이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discussion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시리즈의 글을 생각하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title을 쓰지 않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앞으로 몇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이 기독교 윤리에 대한 지금 현재로서의 내 생각을 좀 정리해볼 생각이다.

최근에, 동부의 어느 교회에서 강의를 하나 하도록 부탁받고 그것을 준비하면서,
아…. 이거 90분짜리 4-5시간에 나누어서 강의할 기회가 한번 주어진다면, 나름대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좀 더 잘 정리해서 풀어볼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었다.

뭐 나는 사실 기독교 윤리, 기독교 세계관 이런 것에 전문가가 전혀 아니므로…
나 같은 사람이 풀어낼 수 있는 것에 무슨 새로운 것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나는 세상 속에서 사는 사람이므로,
신학자, 철학자들이 하는 이론적 사변적 고민보다는 더 application oriented된 이야기는 풀어내볼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희망적 생각을 좀 해본다.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5)

마지막으로,

이번에 휘튼에 간 것은 2년 만이었다. 

작년에 과일회사에 다니면서 아예 conference 자체를 참석할 수 없었으니…

그런데,

휘튼 구석구석은 정말 내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곳에서 만나는 분들도 참 익숙하고 반가웠다.

한국에서 유명한, 나보다 연배도 위 이신 목사님께서 내게 먼저와서 인사를 청하시기도 하셨다. (완전 민망… 죄송….)

뭐 그도 그럴 것이 96년부터 휘튼에 매년 갔으니…

여러분들과 반갑게 인사도 하고, 늘 그렇듯이 섬기는 사람들 보면서 감동도 받고, 군데군데 모여있는 학생들보며 뭉클하기도 하고…

뭐 그렇게 지내고 밤을 꼬박 새우고 목요일 새벽에 ORD 공항으로 왔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허억.

이거… 너무 내가 모든 것이 익숙해져 있다.

이렇게 많이 편하고 익숙하면, 편하고 익숙한 것에 감추어진 blind spot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인데.

오래 코스타를 섬겨오면서 이렇게 그냥 편하고 익숙해져 버렸다면…

그래서 화들짝 위험하다고 느꼈다면… 

– 코스타가 바뀌어야 하는가

– 내가 바뀌어야 하는가

– 둘 다 바뀌어야 하는가

– 내가 코스타를 떠나야 하는가

글쎄….

내게는 무거운 숙제이다.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4)

뭐 하루 반짝 참석해놓고 이래저리 길게도 쓴다고 뭐라고 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서두,

뭐 내 블로그니까 내맘이다. ㅎㅎ

어제 글에 이어서…

이번에는 집회 자체는 거의 참석하지 못했고,

공동대표 모임, 간사 모임에 좀 참석했고, 몇분들과 이야기를 좀 나누었고, 그리고 중보기도실, 서점 등 다니면서 오랫만에 뵙는 분들 인사다닌게 전부였다.

코스타와 관계된 여러가지 기사들, 사건들, 그리고 facebook이나 다른 포스팅들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들을 해 보았다.

집회 직전에,

문창극 총리후보를 support하는 성명서를 낸 어르신 목사님들도 그 자리에 계셨고,

그것을 보면서 저분들과는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다고 열받아하는 사람들도 그 자리에 계셨다.

그중 어떤 분은, 아예 설교 시간에 보수적 정치적 발언을 하시기도 하셨고,

그걸 보고 엄청 열받은 강사님도 계셨다.

그 두가지의 정치적 입장을 놓고 보았을때,

내가 나름대로 가지는 정치적 입장은 비교적 뚜렸하다.

한국 선거에 투표한 적이 많지는 않았지만, 내가 처음 선거권을 받은 이후 

92년 대선부터 최근 대선까지 늘 한쪽 후보만을 위해 투표했다.

이 블로그에서 자주 드러내고 쓰지만, 나는 어떤 특정 정치집단은 매우 싫어한다. (한국도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

그러나,

이런 세팅에서 이번에 더욱 많이 고민하게 되는 것은…

과연 이렇게 다른 정치적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안에서 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내가가진 정치적 입장이,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유일한 신앙적 입장인 것 같아 보인다 하더라도 

(사실 나는 그런 입장을 갖는 것은 일종의 오만일 수 있다고 본다.)

적어도 반대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가진 신앙 자체를 일단 받아줄수는 없는 걸까? 

꼭 저 반대쪽 ‘빨갱이’ 혹은 ‘꼴통’을 쳐부수고 쓸어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적어도 코스타 세팅에서는,

양쪽의 분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한이 있더라도, 

양쪽의 분들을 다 모시고 우리가 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고백하도록 하는 시도를 해봐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것은 코스타 세팅에서 해잴 수 없는 무모한 시도일까?

정치적 입장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충분히 가질 수 있느 것이지만,

그런 정치적 입장은 신앙의 하위 개념으로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똘레앙스를 갖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일까?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3)

딱 하루 있었는데도,

이런 저런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들이 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코스타의 대선배님과의 대화였다.

저녁집회 시간에, 저녁집회를 다 빼먹고, 그분과 열띤 대화를 하느라 시간을 다 보냈다.

그것도 꼬박 서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선배님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다.

지금 최근 코스타의 방향 대로라면, 지역교회의 보수적인 목회자들이 자신의 교인들을 거기에 보내는데 우려를 하는 수준이 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오는 어떤 어떤 강사를 보니, 내가 거기 갈 자리는 아니구나 하고 느낄만 하다. 적어도 일정부분의 balance가 필요하다. 적어도 지금은 balance가 많이 깨어진 것 같아 보인다.

내 항변을 정리하면 이렇다.

우선, 지금 방향과 강사 선택에 있어서 어느정도의 balance는 이미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기계적인 balance를 추구하려고 들다보면 운동성을 놓쳐버릴 가능성이 있다.

또한, 지금 소위 그 ‘보수적인 목회자 그룹’의 color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는 판국이다. 바로 그런 이유때문에 코스타운동에 함께 하지 않는 젊은 그룹도 있다.

적어도 지금 현재는, 보수적 목회자 그룹이나 개혁적 젊은 그룹 양쪽이 보기에 모두 다 불편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취해야만 하는 position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양쪽 중 어느 한쪽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보수적 목회자 그룹의 눈치만을 보거나, 개혁적 젊은 그룹의 눈치만을 보고 있자면 코스타만이 해 낼 수 있는 역할을 놓치게 된다.

가령 86년에 코스타를 시작할 당시, 그 당시 ‘보수적 어르신들’이라고 할 수 있었던 교단 정치 목사들을 코스타 운동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것은 그분들과의 balance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로서는 젊은 개혁그룹이였던 신복음주의자들이 이 운동을 시작했고 일으켰고 때로는 날카로운 날을 세워가며 목소리도 높였다.

왜 그런데 지금은 그런 생각이 적용될 수 없다고 보시느냐?

음…

뭐 내 블로그이니까, 당연히 내 주장을 더 길게 썼다. ^^

그분의 말씀과 생각에도 물론 깊이 고려해보고 생각해볼 내용이 있었다.

나중에는 나도 약간 목소리가 커지고 톤이 높아지도록 열띠게 이야기를 했는데,

생각해보면 한참 선배님이신 그분께 버릇없지는 않았는지 후회와 반성이 된다.

그분과의 대화를 한지 3주가 지났는데도, 그 생각이 계속 내 머리에 남아있다.

코스타는 얼마나 ‘날카로움’을 확보하는 것이 가능할까.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2)

코스타를 섬기는 사람들이 매년 100명 수준은 되지 않나 싶다.

강사, 찬양팀, 어린이코스타 교사, 간사 등등.

그중,

그 사람의 생일이 언제라는걸 알만큼 가까운 사람들은 대충 간사 + 일부 강사님들정도가 아닐까.

그 수를 따져보면 40명 수준?

매년 놀라는건데,

유난히 코스타 집회 기간에는 이 섬기는 사람들의 생일이 많다.

금년에도 따져보니…

적어도 3-4명 정도의 생일이 그 기간에 겹쳐있다.

확률적으로는 40명 중, 그 한주에 생일이 들어있는 사람이 0.8명 정도 있어야 한다. (40명 / 52주)

그런데 4명이라는건, 확률의  자그자치 다섯배나 되는 거다.

흠… 이건 참 흥미롭다. 매년 그렇다. 

그리고 그렇게 생일이 그 주에 끼어 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10년 넘게 자기 생일을 코스타 집회기간중에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네 생일… 내가 더 많이 복되게 해줄께.

네 소중한 섬김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 정말 그건 네게 큰 선물이 될꺼야.

이 사람들의 섬김이 참 복되다.

….

개인적으로,

내 아내, 내 아버지, 내 동생의 생일이 모두 7월 첫째주에 몰려있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생각을 하게된지도 모르겠다. ^^

아, 물론 그렇다고 이 기간에 생일 있지 않은 사람은 별로 섬기는거 아니라는건 아니다. ㅎㅎ

이 기간에 생일 있는 사람이 더 섬기는 거라는 얘기도 아니고. ㅋㅋ

KOSTA/USA-2014 Chicago Conference 마친 단상들 (1)

이번 Chicago conference는 수요일 하루만 갔다 왔으므로, 무슨 ‘후기’어쩌구 쓸만큼 충분히 conference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래서 ‘후기’라고 시리즈를 달수는 없을 것 같고, 그저 ‘단상들’이라는 시리즈로 몇가지 생각들을 써보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전히 코스타만이 하고 있는 일들이 있다.

(나는 물론 다른나라 코스타는 잘 모르므로, 미국 코스타가 하고 있는 일들이다.)

1. Counter-cultural한 복음의 내용을 다루는 대중집회.

금년의 주제는 정말 완전히 그런 쪽으로 갈데까지 간 집회라고 할수 있을 것 같다.

‘약함’이라…

약함이라는 주제를 정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대중집회로 하는 다른 모임, 운동, 집회가 얼마나 있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정말 인기 없을 주제들을 코스타에서는 계속 다루어 왔다. 그리고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 인기없는 주제들을 계속 더 다룰 예정인 듯 하다. ^^

대중집회를 하면서 이렇게 하는건 정말 무리가 따르는 일이다. 대중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대중에게 잘 이해시키기도 여럽고, 게다가 이런 주제를 제대로 전달한 대중적 speaker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스타를 계속 이 무모한 일들을 하고 있다.

2. 복음주의 우파와 복음주의 좌파가 한자리에 모이는 자리.

한국사회는 정치적 이념에 따라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다. 그리고 그 분열은 한국 복음주의권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서로 상대를 ‘적’으로 생각하고 소멸시키려 달려들고 있다 

그런데 코스타에는 이 두 그룹이 다 온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기로는 그렇지만 코스타에서는 너무 양극단에 치우친 분들은 강사로 모시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물론 서로 불편해한다. ^^

그래도 그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인다는 것이 내게는 참 감동인다.

3. ‘고리타분’한 옛날식 고지식함이 순수함으로 남아 있다.

여전히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섬기는 가치를 소중하게 여긴다.

여전히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가지 자원을 ‘낭비’해가며 섬기는 일들을 당연하게 여긴다.

여전히 기도, 말씀, 그런게 다른 어떤 technique 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4. 평신도 사역에 대한 강조가 계속되고 있다.

대형교회는 대형교회대로, 중소교회는 중소교회대로… 점점 평신도들은 목회자들의 야망을 충종하기위한 도구가 되어버리고 있다.

소위 ‘목회비전’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야망을 채우려는 목회자의 도구 말이다.

정말 복음에 반응해서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사역의 주체가 되는 평신도를 보는 일이 참 쉽지 않다.

코스타에는 아직 그것이 살아있다.

5. 하나님 나라 복음에 대한 강조가 있다.

이분법적 이원론으로… 죽어서 천당가는 구원을 강조하는 그룹도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노력으로 점진적으로 이 땅을 유토피아를 만들어보자는 자유주의적 그룹도 아니다.

예수의 삶과 선포와 죽음과 부활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가져왔음을 믿고 선포하는 그룹이다.

사실 건강한 하나님 나라 신학에 바탕을 두고 이렇게 지속되는 운동이 얼마나 되는가.

그런데…

위의 다섯가지가 모두 동시에 이루어지는 집회, 운동이 코스타이다.

코스타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갈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시점에서, 코스타는 유효하다.

그것을 위해 헌신할만하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10)

이번에 나는, 내가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하도록 많이 요청을 받았다. ^^

내 아내는 내가 이번에 인디 다녀온 사진들을 보더니, 참 많이 신났네~ 라며 나를 놀렸지만, 

(뭐 사실 신났던 건 사실이긴 하다 ㅎㅎ)

그렇지만 여러가지일로 참 큰 부담들이 있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말씀을 준비하는 과정이 내게는 고통스러웠다.

현장에 가서도, 뭔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그런데 특히 지금까지 내게 큰 부담으로 남아 있는 것은,

목요일 저녁 전체 기도모임 인도였다.

나는 그날 저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초청하는 calling을 하라고 부탁을 받았다.

가면서, 간사들이 시키는건, 내가 physically 불가능한게 아니라면 다 하겠다고, 두말 다시 토달지 않고 무조건 기꺼이 하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고 갔던 터여서, 그것 역시 SURE~ 하며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정말 그건 내게 큰 마음의 부담이었다.

집회 내내, 복음의 기본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내용이, 적어도 전체 집회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터였다.

결국 나는 뜨거운 찬양의 시간이 끝난 후에 무대에 올라가, 약 10분이 좀 안되는 길이로 짧게 ‘복음을 소개’하고 그것에 응답하라고 초청을 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내 개떡같은(!) 초청을 통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고 일어섰다.

그중에는, 자신의 남자친구가 신앙이 없는데 지금 코스타에 데리고 왔다고 이야기하며 나와 상담을 했던 여학생의 그 남자친구도 있었다. (나는 악수례 시간에 그 남자친구를 꼭 껴안아 주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내게 남아 있는 큰 마음의 부담은,

내가 그렇게 짧게 소개한 복음의 내용에, 정말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빠져있었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heart가 잘 담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처럼 뒤끝 길고 소심한 사람에게는….

이런거 정말 오래 간다. -.-;

아, 결국 내가 복음을 짧게 설명하고자 했을때 할 수 있는 수준이 이정도 밖에 안되는 것이었구나…

코스타를 섬기면서 늘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어가시는 방법은 내 사역의 완벽함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내게 많은 것을 보게 해 주셨고,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주셨고, 많은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셨고, 참 많이 울게 하셨고, 많이 뉘우치게 하셨다.

또 다시 하나님께 많은 빚을 졌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9)

복음의 능력과 영광이 많이 망가진 시대에 해야하는 중요한 일은 다음의 몇가지가 아닌가 싶다.

1. 

그 복음의 능력과 영광을 좀 더 경험한 세대가, 포기하지 않고 그 스토리, inspiration, standard, passion을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에게 성실하게 전하는 일이다.

그것이 그 다음 세대의 변화를 guarantee 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그 세대에게 pace setter가 되어, 신앙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줄 뿐 아니라 보여주는 일을 해야 한다.

2. 

깊이있는 연구와 사색을 통해, 깊이있는 통찰의 열매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

은 이들이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큰 흐름이 없을 때에는 오히려, 더 깊이 있는 소수에 집중하며, 그들이 깊이있는 통찰의 열매를 맺도록 사람들을 세워야 한다.

이렇게 맺어진 통찰의 열매들은, 혹시 후에 있을 다른 ‘부흥의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부흥의 시대가 얼마나 부정적인 부작용 없이 건강한 영향력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이런 침체기에 이루어진 통찰의 열매들에 의해 좌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3.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이 망가져 있음을 뼈아프게 아파해야 한다.

이대로 괜찮다. 그냥 여기서 열심히 하면 된다. 는 식으로 기준을 낮추지 말고,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지내고 있는 이 시대는, 하나님 나라 백성됨의 영광이 현저하게 compromise 된 시대라는 것을 반복해서 우리 자신에게 remind 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우리가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기준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전히 KOSTA는 지금 우리에게 유효하다. 의미가 있다.

이런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학생들을 보며 참 많이 울었다.

그 학생들을 섬기는 간사들을 보며 역시 많이 울었다.

그 학생들 손 붙들고 이야기하는 강사님들에 깊이 감동을 받았다.

계속 더 엎드려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계속 하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