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가 주는 의미

주일 예배는,
내가 생각하기엔… celebration 이어야 한다.
주일(일요일)을 안식일(토요일)을 대신하여 기념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면서 서로 감격했다고…
주일의 예배는 바로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 예배는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는 의미로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과 같은 그런 개념이 아닌, 정말 승리의 주님을… 비록 현재의 삶에서 모든 것이 승리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더라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
주일 예배는 설교를 듣고 교육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물론, 설교를 통해 도전을 받고… 양육을 받고… 공급을 받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를 통해서 별로 공급을 받지 못해도, 정말 celebration이 되었다면 주일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교만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사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매일 말씀 묵상하고, 성경공부 하고, 개인 성경연구 하고… 하는 일들을 한 10년 정도 하고나면…
왠만한 설교를 가지고는 ‘공급’을 얻지 못한다!
너무나도 자주… 아침의 QT 말씀이 설교 말씀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주일 예배가 정말 celebration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조건이 있어야 할까. 내 생각에는 두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다.

1.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정말 ‘celebration’ 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물론… 구원 얻는 백성으로서의 기쁨이다!

저 아무것도 없이… 한시간 내내… 서로 인사하고 부둥켜 안으면서… 우리 주님께서… 죽음의 모든 사슬을 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내게는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은 정말 다릅니다! 라는 고백이 함께
이루어 져야 제대로 주일예배가 드려지는 것일 것이다.

2. 함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지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서로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정말 다른 사람의 영적,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재정적 상태에 대해 깊은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섬기며…
내가 아끼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하여 금식을 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배가 될 수 있다.
만일 이런 것이 정말 있다면… 설교가 그날 ‘꽝’ 나도… 찬양을 부르는 도중에 마이크 사고가 나도, 함께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개개인이 아닌 ‘우리’로서 celebration 하는 감격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나보다 훨씬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 찬양을 해도, 나보다 훨씬 설교를 못하는 사람이 설교를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타일의 기도를 해도… 정말 그 예배가 하나님께 올려지고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주일 예배를 점검해본다.

나는… 정말…
입만 살아 있는… 말만 살아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임에 분명하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따른다는 것

내가 믿음안에서 여태껏 어떤 기간을 통해 깊이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 (나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을 쓰자면 매우 많다.

Steve Chang 전도사 (지금은 목사)
이준행 전도사 (지금은 목사)
김인수 교수
Francis Schaeffer
Jams I Packer
대천덕 신부
John Stott
김교신 선생
홍정길 목사
Martin Lloyd-Jones

또.. 누가 있나…
그런데…

가령 Francis Shaeffer의 예를 들자면,
나는 어떤 사람의 신앙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여부를 Francis Shaeffer의 입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판단할 정도였다.
거의 2-3년 동안 그 사람의 책을 탐독하면서 그 사람이 제공해주는 frame으로 성경을 읽고, 그 사람의 말을 철저히 따랐다.

김교신의 경우에도,
참 철저하고도 열심히 김교신의 생각과 신앙에 동의했었다.
책을 읽으며,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으며… 때로는 신학 논문을 찾아 읽으면서 까지 김교신에 심취했었다.

한때는,
대천덕 신부님 계열(?)의 대전의 작은 기도모임에 가면서…
성령운동에 참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리고 대천덕 신부님이 이야기하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에 완전히 푹 빠져서 그 관련된 책들을 모아 읽고, 그쪽 계열 뉴스레터(?)도 받고… (통일논단 이라고 하는…) 하여간 그랬다.

한국에서 남서울 교회에 1년간 다니면서는,
홍정길 목사님의 설교에 홀딱 빠졌었다.
정말 단어 하나하나에 빠져서 어떻게 하면 저런 설교가 나올 수 있을까 감탄했었다.

한동안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부흥 등에 심취했었다.

흥에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을 나름대로 찾아다니며… 책을 읽으며… 로이드 존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유일한 사상이 있다면 로이드 존스가 가졌던 standard였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내게 그런 사람이나 사상이나 조류는… 없다.

어찌보면 안타까운 일일 수도 있으나…
가만 생각해 보면 참 다행이다.

어떤 한 사람의 설교에,
어떤 한 사람의 주장에,
어떤 한 사람의 역사에 대한 평가에,
어떤 한 사람의 삶에,

내가 믿고있는 하나님에 대한 평가를 모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나를 위험한 사람으로 만들었었나 하는 것을,
지난 내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다.

어떤 한 사람의 삶과 사상과 가치와 주장에 어느 기간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유익을 취하는 것은 매우 좋을 일이지만,
그 사람만을 내 삶과 신앙과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것 만큼 내 안의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일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돌이켜 보면,
내가 스스로 fan이되어 열광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그 주장들 가운데 매우 많은 부분은…
그저 그 사람의 생각이거나,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만 적용되었어야 할 사상이거나,
매우 제한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거나,
심지어는 오류/잘못 임을 점차로 배워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에 심취해 있을 당시에는 주변에서 내게 무엇이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태백에게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미국에 20세기에 왔고, 지금은 21세기 이니… 두 세기에 걸친 미국 생활 동안 한국이 많이 변한것은 틀림없으렷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심한 과정의 말인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을 들어보면 그것이 전혀 과정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이태백’ 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참 꿈을 꾸며 이상에 부풀어 있어야할 나이에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어떤 것이 될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사도행전에 나온 것 같이 ‘은과 금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이들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선뜻 이것에 대한 대답을 섯불리 열거하기 이전에 어떤 것들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1. ‘예수 믿고 (현세적, 물질적) 복 받아라’

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아닐 뿐더러, 실제 그러한 현세적 복을 잃어버린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로 사탕발림을 하려 한다면 복음은 정말 천박한 원색의 룸살롱 광고 찌라시 정도 이상의 attention을
얻지 못할 것이다.

2. 열심히 살아서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말을 돌려서 해서 그렇지, 사실 이건 ‘성공해라’ 라는 말이다. 이들이 성공이 싫어서 그러고 있는 사람들일까. 성공을 억지로 피해서 이태백이 되었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비복음적인 말에 이들이 거짓 위로라도 받을 것을 기대해 볼수 있으련만.

3. 지금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거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사실 나라도 그렇게 얘기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만 참아라.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풀어주실 테니.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앞에 두고 도박이라도 하자는 건가.

……

어설픈 좌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이태백들 가운데 다수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이다.
경쟁 사회 속에서 낙오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메시지들을 강단에서 계속 선포하며…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들만 이야기 해왔지 않았는가.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야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고지를 점령하자고.

그런데 우리가 이들 이태백들에게 ‘우리에게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근본적으로 내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 이 세상을 바라보는 frame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20년 뒤,
텅텅빈 한국의 어느 예배당에서 나와 내 아내가 예배를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태백들의 박탈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품어줄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고 싶다.

이상주의자의 변절

나는,
내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해왔고,
다른 이들도 나를 그렇게 보아왔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이상주의자임에 자부심을 느껴왔고 그 ‘순수성(?)’을 지키려 많이 노력했었다.

그런데,
요즈음, 내가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의 한계와 벽을 많이 실감한다.

1. 적어도 내게있어, 이상주의는 교만함과 tightly coupled 되어 있었다.
특히 신앙적 이상주의의 경우에 그랬다.
하나님 안에서의 순수함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좋으나, 내가 가지고 있는 ‘dogma’를 ‘옳은 이상’으로 설정해 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나 자신을 포함한)을 정죄하였다.
그 교만함은 다시 내 이상주의를 강화시키는 positive feedback 으로 작용하고, 결국은 나와 내 생각과 내 행동에 파과적 효과를 가져오는 듯 하다.

2. 이상주의는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킨다.
현실적으로 어떤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이유가 있는데, 적어도 내가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는 그 복잡한 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는 (over-simplfying) 문제가 있었다.
내가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고,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다.
마치 내가 제시하는 어떤 문제 하나만 해결되면 그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그렇게 상황을 설정해 버리는 오류를 종종 범해왔음을 본다.

3. 이상주의는 종종 all-or-nothing의 approach로 가게된다.
소위 ‘혼합’이라는 것을 견디지 못하므로… 조금이라도 그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경우에는 신랄한 비판만을 남긴채 아예 발조차 담그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경우 결국 그러한 비판은 내가 아래에 쓴… ‘비판쟁이’를 양산하는 mechanism으로 작용한다.

4. 이상주의는 자주 사랑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기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대상이 너무나도 많다.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한다든지,
교회를 비판하면서 정작 그 속에서 당장 눈물을 뿌려 섬겨야할 영혼들을 생각하지 않는 부조리를 흔히 보게 된다.
가령… 교회가 타락했다고, 모든 교회의 문을 다 닫고 때려부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에는 그 안에 있는 영혼들이 너무 귀하다.
정말 한 영혼 한 영혼을 향한 눈물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을 더럽혀가며 현실과 싸우는 노력이 있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상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열거한 내 결점들을 보면서… 어쩌면 여태껏 견지해왔던 스타일의 이상주의자로부터는…
내가 변절을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나는 절망한다

요즈음 인터넷의 ‘젊은 세대’를 보면… 대략 두부류로 나누어 지는 것 같다.

첫번째 부류는,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미국의 Northeastern liberal들과 매우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중도 혹은 중도 좌파의 성향을 가지고,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이며,
윤리적으로는 비교적 건전하고 (적어도 표방하는 자세로는)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이다.
이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낙관적이고, humanitarianist 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부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무당파,
문화적으로는 매우 개방적,
윤리적으로는 구속을 싫어하고,
종교적으로는 무신론보다는 무심론(無心論:관심이 없음)에 가깝다. 때로 다신론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I don’t care’가 이들을 표현하는 key point이다.

나는 이 시대의 이런 흐름들에 절망한다.
적어도 현재의 성향이 5-10년정도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는 지금의 유럽교회만도 못해질지도 모른다.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그 이유에 대한 분석이야 이미 많이들 되어 있으므로 내가 따로 여기에 늘어놓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듯 보이나…
정말 더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앞으로 5-10년 이내에 이런 trend를 뒤집을 가능성이라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큰 일을 행하신다면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보기엔 매우 희박하다.

내 딸 민우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born-again Christian 친구와의 fellowship을 누리며 인생의 계획을 나누느라 밤을 새우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절망한다…

누가복음 7:31-32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비판쟁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려면 그 열매를 보라고…

나의 경우엔, 나에게서 깊은 신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특히 최근으로 들어올수돌 더?) 많이 …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 같다.

비판이 갖는 건강한 순작용이 있고,
특히 어떤 사안의 경우엔 비판이 아니고는 도저히 스스로 정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경우도 있거니와 (그 비판의 수용여부는 물론 별도의 문제이다.)
비판이 때로 어떤사람의 ‘시각’ 자체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 사람을 ‘비판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교회’ 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비판할 거리들을 늘어놓는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일반적인 우주적 교회이건 간에.

어떤 이들은,
‘요즈음 학생들’ 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핏대를 세우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세속의 가치관에 물들어버려 소망이 없다는 둥, 비지성적이라는 둥…

이 ‘어떤 이들’에는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다.
나도 매우 ‘비판쟁이’이니까 말이다.

비판쟁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고…
그래서 너의 personal한 삶에서 그 이슈가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을 하고 보면… 그냥 대화가 막힌다.

비판하는 이야기는 늘 구체적이기 보다는 추상적이고,
개인적 dimension에서의 적용이 빈약하다.
비판을 하며 가르치는 주제로는 이야기거리가 쌓여있지만,
그것을 위해 섬기는 action은 극도로 빈약하다.

비판의 소리들을 다시 분석하여 또 다시 반문하고 캐물어보면,
이들의 비판 역시 ‘들은것’ 일뿐.. ‘체득한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위해 섬기는 크기가 그리고 기도의 크기가 그것에 대한 비판의 크기보다 항상 더 커야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어떤 개인이건, 단체이건,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이 시대의 젊은이이건, 목회자이건… 누구건 간에.
그리고 내가 섬기지 못하는 중에 비판의 생각이 혹시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내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그 생각을 스스로 정화시키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비판쟁이’의 모습을 자꾸만 갖는 것을 보면,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을 내가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가슴을 칠 일이다…

빌립보서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누가복음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원리적 기도와 관계적 기도

다른 사람들이 인정을 할른지 하지 않을른지는 모르겠으나,
예수님을 처음 믿으면서 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나는 ‘모범생’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내 기도가 ‘올바른 기도’여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지내왔던 것 같다.
소위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으려 했고…
‘내 뜻 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도록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내 스스로 많이 되뇌었다.

그리고, 그렇게 ‘원리적’기도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했는지 모른다. 바로 저런 사람들 때문에 기독교가 욕먹는 거라고.

그런데,
요즈음 나를 바라보면서,
내가 스스로 ‘원리적 기도’를 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세가
‘관계적 기도’를 막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민우가,
어떤 장난감을 가지지 못해 몹시 마음이 상해 있을때,
그것을 나와 나누지 못한 채…
그저 ‘원리적’으로…
그 장난감 욕심을 내는 것이 합당하지 못하다는 당위와 자신의 욕심 사이의 간극(gap)을 나와 이야기하지 않은 채 스스로 메우려고만 한다면…
나는 무척이나 마음이 상할 것 같다.

일단,
민우의 생각이 정리되어있지 않아도 좋으니…
나와 이야기하면서 ‘원리’ 혹은 ‘정답’을 찾아가기를 원하는 것이 아빠된 마음이다.

내가… 하나님을 정말 내 ‘아버지’로 생각한다면,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해야한다는 ‘당위’를 앞세우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대회를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내가 혼자 다 고민해서 하나님과는 전혀 상의도 하지 않은 채… 정답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다면…
그것이 ‘원리적 기도’이기는 하겠으나…
‘관계적 기도’는 아닐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겐… ‘관계적 기도’의 강조가 필요한 것 같다.

참된 ‘관계적 기도’를 하게 되면 결국은 ‘원리적 기도’를 하게 되지만,
‘원리적 기도’를 반복한다 해도 ‘관계적 기도’를 하지는 못한다.

KOSTA/USA-2004를 다녀와서

지난 한주동안 코스타에 다녀왔습니다.
이번이 여덟번째 코스타였으니… 이제는 제법 여러가지 일에 익숙해지기도 할만도 한데… 여전히 제게는 새로운 깨달음과 많은 숙제거리를 제공해준 코스타 였습니다.

1. 이번에 사실 저는… 제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많은 기도를 하지 못한 채 코스타에 참석했습니다.
이 말은… 예를 들면… 마라토너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연습을 별로 하지 못하고 참석을 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가수가 콘서트를 하면서 노래 가사를 외우지 못한 채 무대에 선다는 것 이상으로 ‘엽기’임을 압니다. 그래서 더더욱 제겐 마음의 부담이 큰 코스타 였습니다.

2. 그와는 달리 코스타에 현지에서 기도는 대단히 energetic 했었습니다. 그 기도가 얼마나 powerful 했던지… 영적으로 매우 둔감한 제게조차도 그 힘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3.
코스타의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사람가운데 하나로서, 제가 성실하게 코스타에 임하지 못한 여러가지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여러군데에서 프로그램이 원래 의도하지 않은대로 진행되는 것이 감지되었고, 전체 집회를 비롯해서 곳곳에서 발을 동둥 구르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 일의 대부분은 ‘기획’의 미숙에서 나타난 것들이었습니다.

4.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100명에 가까운 사람이 새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60명에 가까운 해외 선교 헌신자들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치유’를 경험했다고 고백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죄를 기도중에 쏟아내는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저도, 그 와중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면서… 그저 눈물을 펑펑 쏟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번은 집회 중에 맨 뒤에 서서 눈물을 흘려서… 제 신발이 젖을 정도로 울었습니다.

5. 매년 코스타를 섬기면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준비하는 사람의 미숙함과 그 부족한 그릇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실속’을 챙기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이번 코스타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던 것 같습니다.

것은 아마도… 코스타를 준비하며 섬기는 저같은 사람이야 말로 정말 하나님의 touch가 필요한 사람들이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섬김위에 당신의 은혜로서 넘치게 하셨던 것 같습니다. 마치 작은 간장 종지위에 나이아가라 폭포가 쏟아지는 것
같은…

6.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섬김의 부분을 더 연구해서 채우는 일들은 계속 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코스타를 섬기고자 하는 열망을 더욱 주시는 것 같습니다.

7. 특별한 일이 없다면, 내년에도 저는 코스타에 참석 하겠지요. 참석해서 하루에 3-4시간씩 자면서 땀 범벅이 되어 뛰어다니겠지요. 또 다시 눈물을 펑펑 쏟으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겠지요.
그러나, 내년에는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8. 그리고… 아마도… 제가 좀 더 나은 모습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은 코스타 기간 중이 아니고 코스타가 끝난 후의 제 삶의 모습에서 더 잘 드러나게 되겠지요.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부)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의 사회 내에서의 선행 – 이 시대 기독 지성인들의 할 일
권오승

최근 필자 개인의 모습과 우리 공동체 여러 지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의 모습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놓고서는 매우 열심히 기도도 하고 고민도 하고 나름대로 체계적인 생각의 틀도 정리해 나가는데 반해 ‘세상’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적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 민족, 선교, 세계를 위해 하는 중보기도는 주로 ‘면피용’의 구색 맞추기 식의 기도일 때가 많고 대부분의 기도는 우리 개인의 지극히 작은 문제들 – 이성 친구 문제, 가족 문제, 장래 진로 문제, 인간 갈등 문제, 학업의 문제 -로 채워지고 있다. ‘과연 이 사람이 내 짝이 될 수 있습니까’(이건 그래도 좀 낫지. ‘꼭 이 사람하고
짝이 되게 해 주세요’가 사실 대부분이다.)의 기도 제목으로는 수십일 ‘작정 기도’를 하면서도 북한의 굶어 죽어 가는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한끼 금식기도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 믿음의 현 주소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필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사도 바울의 고차원적 신앙의 모습이 함께 떠올라 몹시 괴로워진다.

우리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많은 일들을 ‘가이사의 것’으로 여기고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는 것을 경박한 것으로 여기거나 터부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1992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지체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있는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스스로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였을 전형적 모습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 1997년 대선을 예로 들지 않은 것은 현 대통령의 치적이나 업적 등이 아직 쌓여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은 대통령 선거는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상관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하여 기권을 하거나 별 생각 없이 그날 기분에 따라 아무 후보나 선택한 사람이다. 또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그 당시 상태로 만족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해서 집권당의 후보를 선택한 사람이다. 또 다른 유형으로는 모 후보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 후보를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우리가 남이가’의 투철한(?) 지역감정으로 자기와 출신 지역이 같은 후보를 지지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기준으로 선택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감봉을 당하는 등 경제적인 아픔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파송한 수많은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보내오는 선교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을 감당하지 못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러 가지 사회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에 대한 아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참고로 이 글을 통해 특정 정치 집단을 비난하거나 지지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명백히 하고 싶다.)

대통령 선거에서 바른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매우 잘 정립된 생각들이 있어야 한다. 각 후보에 대한 도덕성, 정책(공약), 제시된 비전,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맥, 정치적 노선 등을 그리스도인의 시각과 관점으로 바르게 평가하는 식견과 안목, 통찰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안보 (통일), 외교,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답’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그 전체가 기록된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에 있어 유일하고 정확 무오한 규준임을 믿는다. – We affirm the authority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 Scriptures in their entirety as the only written word of God, without error in all that it affirms, and the only 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 그저 개인적인 ‘뜨거움’만으로
해결되어지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의 부패가 무섭도록 심각하게 진행되어온 지난 50여 년 동안 교회의 양적 팽창이 거의 경이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할 때, 그저 ‘불길 같은 주 성령’의 찬송을 부름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이 해결되어지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특히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은 더욱 그러한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구조 조정’을 담당할 사람들은 사회의 opinion leader가 될 지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적 병폐 속에서 개인적 ‘거룩’을 아무리 잘 실천하려 하여도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 죄악을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탈세를 하는 상황에서 그 기업의 물건을 애용하며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 탈세에 대한 책임을 일부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탈세로 인해 특정 계층을 위한 정당하지 못한 소위 ‘비자금’이 조성되고 결국 그러한 검은 돈은 국민 경제를 어둡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므로 그 피해자는 결국 소비자가 되고 만다. – 특히 이러한 피해는 소외된 계층에 집중되기 쉽다. 결국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역동적 경건의 행위에 역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지론’(사회의 높은 자리를 정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저지론’(사회의 기반을 파고들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미답지론’(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적은 분야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등이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해야하는 일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의(righteousness)의 목표와 근거, 방법과 수단 등을 잘 알기 위해 노력하고 공부,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배들은 불행하게도 성경적 근거를 가진 정의의 모습들을 구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실체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설정해 놓지 못하고 있다. 그 일은 바로 우리 세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성경공부와 묵상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 ‘백성들의 눈물을 씻기시는’ 하나님은, 친일의 잔재들이 청산되고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기고 80년 광주의 눈물이 씻겨지고 IMF의 아픔이 치유되는 그런 세상을 우리를 통해 이루길 원하신다.

물론 지성 사회의 복음화(전도)는 지성인들의 주된 몫이다. 그것을 등한히 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에게 그들에게 허락하신 ‘지성’의 대가를 요구하신다.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작성한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의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심판주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종, 종교, 피부색, 문화, 계급, 성(性) 또는 연령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천부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서로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우리는 등한시하여 왔고, 또는 종종 전도와 사회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 대하여 뉘우친다.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 참여가 곧 전도일 수는 없으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정치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한다. 이 두 부분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교리와, 이웃을 위한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필수적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부정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것을 공박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의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행17:26,31 ; 창18:25 ; 사1:17 ; 시45:7 ; 창1:26,27 ; 약 3:9 ; 레19:18 ; 눅6:27,35 ; 약2:14-26 ;
요3:3,5 ; 마5:20 ; 6:33 ; 고후3:18 ; 약2:20)

“We affirm that God is both the Creator and the Judge of all men. We therefore should share
his concern for justice and reconciliation throughout human society and for the liberation of men from every kind of oppression. Because mankind is made in the image of God, every person, regardless of race, religion, color, culture, class, sex or age, has an intrinsic dignity because of which he should be respected and served, not exploited. Here too we express penitence both for our neglect and for having sometimes regarded evangelism and social concern as mutually exclusive. Although reconciliation with man is not reconciliation with God, nor is social action evangelism, nor is political liberation salvation, nevertheless we affirm that evangelism and socio-political involvement are both part of our Christian duty. For both are necessary expressions of our doctrines of God and man, our love for our neighbor and our obedience to Jesus Christ. The message of judgement upon every form of alienation, oppression and discrimination, and we should not be afraid to denounce evil and injustice wherever they exist. When people receive Christ they are born again into his kingdom and must seek not only to exhibit but also to spread its righteous world. The salvation we claim should be transforming us in the totality of our personal and social responsibilities. Faith without works is dead.” (Acts17:26,31 ; Gen.18:25 ; Isa.1:17 ; Psa.45:7 ; Gen.1:26,27 ; Jas.3:9 ; Lev.19:18 ;
Luke6:27,35 ; Jas.2:14-26 ; John3:3,5 ; Matt.5:20 ; 6:33 ; 2Cor.3:18 ;
Jas.2:20)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부)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한다
권오승

어느 목사님의 글 가운데 ‘고려는 불교의 타락으로 망했고,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했고, 만일 이제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때문이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가 이 사회에 대해 그 책임을 다 하고 있지 못한데 대한 자책의 변이었으리라.

최근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의 지도적인 모 목사님의 각종 부정(?) 사례들이 TV 방송에 보도된 것을 접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인즉 그 목사님의 축재 수준이 수십억대에 이르고 교단 내의 선거에서 일인당 수백만원에 이르는 돈을 뿌리며 부정 선거를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불륜도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 그러한 보도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필자에겐 더욱 더 큰 충격이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낮은 도덕적 수준을 비난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구원은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교리를 내세우며 방어해왔던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 방어전술이 얼마나 먹힐수 있을 것인지하는 생각에 약간의 패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100%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은 필자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신념이다.)

지난 3월 24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또 살펴보자.
‘아말렉작전.’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聖戰)이 북풍유도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기독교 장로인 권영해(權寧海)전안기부장은 스스로 이 특급비밀작전의 이름을 짓고 지휘봉을 잡았다고 털어놓았다. 아말렉족은 사막지역에서 거주하던 고대유목민족. 이집트를 탈출하는 히브리족을 공격했다가 모세가 훗날 후계자로 지명할 정도로 총애했던 여호수아에게 크게 패했다. 무찔러야 할 적(敵)의 상징이 바로 아말렉족이 되고 말았다.
-( 중략 )-
윤씨 기자회견을 아말렉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뭡니까.(신부장검사)

윤씨 기자회견은 각 당의 지나친 대북연계활동에 대한 경종이자 좌익세력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구약성서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내세워 아말렉족을 물리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모세)가 부하들(여호수아)을 시켜 좌익세력(아말렉족)을 물리치려 한 상황과 유사하지 않습니까.(권전부장)

대통령 선거전 와중에 특정후보(당시 김대중후보․DJ)를 비방하는 허위 기자회견이 좌익세력과의 전쟁입니까. 당신은 결국 구여권을 여호수아로 내세워 DJ를 아말렉으로 삼고 싸운거 아닙니까.(신부장검사)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권전부장)
신부장검사와 권전부장은 몇시간 동안 아말렉논쟁을 거듭했다.

-( 중략 )-

밤샘 조사는 오전 4시에 일단 끝났다. 조서에 대한 확인과 몇군데의 수정작업이 뒤따랐다.
이어 오전 4시40분. 조사실에 수사관 1명만 남은 것을 확인한 권전부장이 화장실로 들어갔고 5분 뒤 요란한 파괴음과 함께 비릿한 피냄새가 문 밖으로 퍼져 나왔다.

위의 기사는 한국에서 각종 선거가 있을 때 마다 대표적 부정선거의 방법으로 사용된 소위 ‘북풍’ 혹은 ‘공안 정국’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 책임자였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에 관련된 기사이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책임자는 기독교 장로였다. 주위에서 대형 부정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그 사건의 핵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 이제는 별로 충격으로 받아들여 지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터질 때 마다 기성세대를 비난하며 손가락질 한다. 그리고 이 세대를 한탄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다. : 과연 앞으로는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리 세대가 저 자리에 서면 그런 일이 없게 될 것인가.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도 여전히 남을 위해 사는 것 보다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같이 배고프고 힘들 때 내배부터 채우려 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함께 커가는 것 보다는 내가 크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돈에 연연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큰집에 살기를 좋아하고 좋은 차 타며 좋은 옷 입는 것을 내 희생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것이라거나 민족과 시대와 역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 자신의 편안함과 부요함에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 우리는 과연 영적인 순결함을 지켜나갈 수 있겠는가.
과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부정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환경에서 나만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그 부정한 ‘체제(system)’을 대항하여 싸울 힘과 용기와 동기(motivation)가 자연스럽게 나를 인도하겠는가? 우리도 이 상태로 그 자리에 가면 전혀 시대와 역사를 복음으로 바꿀 힘이 없는 나약하고 부정(不貞)한 세속적 그리스도인(worldly christians)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썩어가는 세상에 대해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못한 것만이 책임이 아니라 (물론 그 역할 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그 썩어가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청년적 열심이 무엇을 향한 열심이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하루 하루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 우리 삶의 목표와 소망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의 힘이 아니고는 우리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타협하지 않고 지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이
시대를 타락으로 이끄는 주범들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믿는 복음과 같은 복음을 믿었던 일제시대 청년 김교신이 부르짖었던 슬로건이 생각난다. ‘조선을 성서위에’. 우리는 이 시대와 민족과 역사를 성서위에 세우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