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pKOSTA-UT

Thanksgiving 휴가 기간 (25-27일)동안
Utah 에서 gpKOSTA를 합니다.
gpKOSTA는 지역의 학생들 leadership training program 입니다.

Utah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몰몬들이 ‘성지’로 여기는… 몰몬의 주(state)입니다.

정말 영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야말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알고 나서…
제 마음 속에서는 깊은 부담과 애정이 생겼었습니다.

대도시가 아니므로,
많은 resource를 접할 수도 없고,
한국 사람들이 많아서 좋은 Korean Christian community를 구성할 수도 없고,
학생들도 잠시만 있다가 떠나기 때문에 정착해서 학생들을 복음으로 섬길 여건도 열악하고…
게다가 주위의 몰몬들에 의해 intimidate 될만한 환경.

이번엔,
제가 그쪽에서 organize 하는 것을 KOSTA contact person이 되어서 돕고,
가서 강의도 하고 여러가지로 섬기게 됩니다.

현지의 학생 준비위원들이 정말 열심히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 정말 얼마나 제 마음을 깊이 움직였는지 모릅니다.
퀄리파잉 시험을 앞두고도 대표로 섬긴 자매님을 비롯해서…
힘든 중에도 교회들을 다니며 홍보하고,
fundraising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참석을 독려하고…
그리고 기도하고.
새벽 시간이 되도록 함께 전화를 붙들고 기도하면서 고민하고…

하나님께서 Utah의 이 소중한 형제 자매들을 향해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저는 알수 없지만,
이분들이 이번 gp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기대를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gpKOSTA는,
보통 지역마다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의 지역교회, 캠퍼스 모임의 리더들을 훈련시켜주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지역 모임인데요…

KOSTA를 섬기는 제가 보기에,
gpKOSTA에 ‘투입’되는 분들은… 정말 KOSTA가 가진 최고의 resource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령 이번에 함께 가서 말씀으로 섬기실 간사님들은
그분들이 제게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제가 그냥 믿을만큼 제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하는 분들입니다!
다들 소중한 thanksgiving 기간에 가정을 포기하고(^^) 학생들을 섬기려는 마음으로 가시죠.

불과 40여명의 학생들이 모이는 수양회를 위해서,
KOSTA의 ‘드림팀’이 투입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낭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합니다.

눈에 보이는 파급효과로 봐서야…
대도시에서 사람들 많이 모으고,
찬양팀 빵빵하게 조직해서 집회 하는 것이 훨씬 더 크겠지만요…

이렇게 resource가 낭비된다고 보여질만큼
하나님께서는 각 지역의 학생들 한사람 한사람에 말 할 수 없이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모르지요,
이번에 섬기게 되는 형제 자매님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들을 더 행하실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잠깐 시간을 내어서… 30초만이라도 gpKOSTA/UT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http://gp.kosta.ws 로 가시면 자세한 정보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롤러 코스터를

롤러 코스터를 타는 것은 재미있다. 물론 그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for example, 우리 어머니^^)

롤러 코스터를 탈때 느끼는 머리 뾰쪽 서는 느낌은 일종의 무중력감이다. 중력과 함께 낙하를 하기 때문에 잠간동안이나마 중력을 경험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중력감을 느끼는 다른 event가 있다면, 고층빌딩에서 자살하기위해서 낙하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롤러 코스터는 재미로 타지만 아무도 자살을 재미로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롤러 코스터는 안전함을 믿지만, 자살은 한번 떨어지만 끝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불완전한 롤러 코스터도 이렇게 재미있게 탈진대,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인생의 롤러 코스터는 어떠한가?


생을 살다보면 승리의 순간과 절망과 패배의 순간을 모두 경험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만 확실하다면, 나는
절대로 안전하다! 그러므로 내가 빠른 속도로 높은 고지를 올라가고 있건, 가장 낮은 곳을 지나고 있건, 정신없이 빙빙 공중회전을
하고 있던 간에… 이것을 통해 내게 제공해주시는 하나님의 blessing들을 기대하고 그것에 흥분할 수 있다.

만일 up & down이 없는 롤러코스터라면 그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up & down이 없는 인생이라면 그것이 순탄할수는 있겠으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짜릿함은 없겠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즐기자!

국가보안법 폐지가 나와 무슨 상관이람?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자신과 다른 생각 모두를 적으로 만들어 버린다는데 있다.

저쪽이 죽어야 내가 산다.
자신의 적을 무찌르는 것이 내 존재의 근거가 된다.

쳐부수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나도 한때 이걸로 전국 웅변대회에 나가 상도 받았었다. 괴수 김일성을 이땅에서 몰아내자고 이 연사 힘차게 부르짖습니다~ -.-;

아마 나와 같은 열살짜리 꼬마애 하나는… 비슷한 시기 북쪽에서 남조선 괴뢰정권을 무찌르고 미제의 각을 뜨자고 웅변을 했겠지.

…..

국가 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인터넷 등에서 읽어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자세는 ‘증오’이다. 빨갱이에 대한 증오.

자신의 부모가 그 빨갱이들에 의해 죽창에 살해당하고, 그 빨갱이들이 쏜 포탄에 의해 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사실 그 ‘증오’를 털어내기란 쉽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건… 그 전쟁을 겪지 않았던 사람들까지고 그 ‘증오’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철저하게 실행되어왔던 ‘이데올로기 교육’ 탓이다. 아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부터, 빨갱이를 때려잡는 것이 인생의 목표로 세뇌당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떨쳐버리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일게다.

내가 내 스스로를 평가해 보면,
‘자유’라는 가치와 ‘평등’이라는 가치 가운데… ‘자유’라는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억압과 빈곤으로 내몰았던 레닌 식의 공산주의를,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증오한다.

그러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갔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를 증오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임을 스스로 자임했던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

그리고,
그 우스꽝스러운 독재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논리를 가지고…
국가보안법을 지켜내고자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조소를 보낸다.

어설픈 ‘자유주의자’로서,
도무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국가보안법을 신주단지처럼 지키고 있는…
자칭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들을 보면… 우습다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주신 존엄함을 빼앗아 갈수는 없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이건, 국가권력이건, 국가보안법이건 간에.

한국의 신문을 읽으며 참 마음이 답답하다…

The Passion of Christ –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상상력?

대히트를 친 영화

The Passion of Christ 영화에 대한 평가가 대단하다.
교회에서도 그 시리즈의 설교가 계속되고, 그 영화를 기초로한 성경공부 교재들이 나오는가 하면 전도용으로 이 영화가 사용될 기대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것을 자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영화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참 잘 만들어진 영화인가보다.
나는 보고 싶지만… 여태껏 여러가지 사정이 되지 않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이 영화의 대 성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위 ‘거룩한 상상력’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보이는 반응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고난을 매우 생생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뇌와 고난등을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내가 어릴때 부터 들었던 말은,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소설을 글로 읽으면
머리 속에서 각종의 상상을 해 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다채롭고 다양한 장면들을 그려낼 수 있는데, 일단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모든 상상력을 죽여버려 스토리가 입체적이지 못하고 단편적이 된다는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 소설 ‘소나기’를 TV 방송에서 단편 드라마로 보고나서의 내 느낌이 바로 그랬다. 그전엔 그 소설 속에 나오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 시골의 풍경 등이 이전엔 입체적이고 다채롭게 머리속에 그려졌었는데, 그 TV 방송을 보고 난 후에는 모든 등장
인물들이 해당 배우들로 고정되어 버렸고 모든 장면들이 매우 평면적으로 축소되는 경험을 했다.

혹시 The Passion of Christ 영화에 대하여 이런 우려는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거룩한 상상력

성경공부 훈련을 받다보면 성경을 읽을 때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이야기를 듣게된다. 성경의 상황과 인물들에 대하여 때로는
감정이입을하고, 때로는 논리적 분석을 하고, 때로는 상황을 상상해 냄으로써 성경의 내용을 더 사실적(graphic)으로
머리속으로 그려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매우 자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된다는 제안이다.

예수님을
10년쯤 믿은 고학력의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몇번이나 묵상했을까. QT, 성경공부, 설교, 기타 다른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적어도 일년에 2-3회 정도는 이 내용을
접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20-30회 정도 같은 내용을 묵상했다는 이야기인데…

소나기와 같은 소설을 10년에
걸쳐 20-30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도 그냥 가볍게 읽는 것이 아니고 밑줄도 그어가면서, 고민도 해가면서, 내
삶에 적용도 해 가면서, 소설을 읽기 전과 읽은 다음 기도도 하고, 따로 노트도 작성하고.

그리고 아주 훌륭한
감독이 만든 소나기 영화를 봤다고 생각해보자. 그 영화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우아, 저기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잠결에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는 소년의 표정이 저렇게 그려졌구나… 하면서 무뤂을 치고 감탄을 하고
그럴까. 몇 장면에서는 ‘그래 저런건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감독이 참 잘 그렸네’ 할 수 있겠지만 영화 자체가 그렇게도
충격이겠는가.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나는, 나를 포함한 현대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방식이
어쩌면 지나치게 피상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성경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내가 기억도 나지않는 어린시절, 아마도
성경을 읽어온지 30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정기적으로 QT도 하고 성경공부도 한것은 약
15년 가량 되었다.

그런데도 헐리우드의 한 액션배우가 만든 영화를 보면서 그 내용이 너무나도 새로와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 것이 정상적일 것인가.


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멜깁슨의 ‘거룩한 상상력’에 의해 사실적으로 그려졌으니 내 마음에 이미
가지고 있던 그분에대한 사랑이 다시 마음속에 새겨져 눈물이 흐를수도 다시 묵상에 잠길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고뇌가
너무도 새로와서, 주님의 고난이 너무도 새로와서 ‘영적 quantum junp’를 경험했다면… 한편 감사한 일이겠으나 한편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성경을 제대로 읽자.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정말 그 내용을 내게 보이시도록 기도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성경을 읽자. 그저 한 종교의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보이신
내용으로 읽자. ‘내가 아는 누구’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골수와 관절을 쪼개는’ 말씀으로 읽자.
혹시라도 성경이 그렇게 읽혀지지 않는다면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밥을 굶으며라도 그 말씀이 내게 그렇게 다가오도록 바래야
할일이 아니겠는가.

The Passion of Christ 영화를 본 후,
그 내용을 보면서 다시 감사하고 감동하는 기쁨이 있어야하겠으나, 혹 조금이라도 내가 이미 ‘알고’있던 성경의 말씀이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축소되는 것 같은 그런 답답함을 경험할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으니… 나 스스로 그 영화를 쉽게 보러가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4년 9월호에 실렸습니다.

주일예배가 주는 의미

주일 예배는,
내가 생각하기엔… celebration 이어야 한다.
주일(일요일)을 안식일(토요일)을 대신하여 기념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면서 서로 감격했다고…
주일의 예배는 바로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 예배는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는 의미로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과 같은 그런 개념이 아닌, 정말 승리의 주님을… 비록 현재의 삶에서 모든 것이 승리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더라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
주일 예배는 설교를 듣고 교육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물론, 설교를 통해 도전을 받고… 양육을 받고… 공급을 받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를 통해서 별로 공급을 받지 못해도, 정말 celebration이 되었다면 주일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교만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사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매일 말씀 묵상하고, 성경공부 하고, 개인 성경연구 하고… 하는 일들을 한 10년 정도 하고나면…
왠만한 설교를 가지고는 ‘공급’을 얻지 못한다!
너무나도 자주… 아침의 QT 말씀이 설교 말씀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주일 예배가 정말 celebration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조건이 있어야 할까. 내 생각에는 두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다.

1.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정말 ‘celebration’ 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물론… 구원 얻는 백성으로서의 기쁨이다!

저 아무것도 없이… 한시간 내내… 서로 인사하고 부둥켜 안으면서… 우리 주님께서… 죽음의 모든 사슬을 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내게는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은 정말 다릅니다! 라는 고백이 함께
이루어 져야 제대로 주일예배가 드려지는 것일 것이다.

2. 함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지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서로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정말 다른 사람의 영적,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재정적 상태에 대해 깊은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섬기며…
내가 아끼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하여 금식을 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배가 될 수 있다.
만일 이런 것이 정말 있다면… 설교가 그날 ‘꽝’ 나도… 찬양을 부르는 도중에 마이크 사고가 나도, 함께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개개인이 아닌 ‘우리’로서 celebration 하는 감격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나보다 훨씬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 찬양을 해도, 나보다 훨씬 설교를 못하는 사람이 설교를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타일의 기도를 해도… 정말 그 예배가 하나님께 올려지고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주일 예배를 점검해본다.

나는… 정말…
입만 살아 있는… 말만 살아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임에 분명하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따른다는 것

내가 믿음안에서 여태껏 어떤 기간을 통해 깊이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 (나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을 쓰자면 매우 많다.

Steve Chang 전도사 (지금은 목사)
이준행 전도사 (지금은 목사)
김인수 교수
Francis Schaeffer
Jams I Packer
대천덕 신부
John Stott
김교신 선생
홍정길 목사
Martin Lloyd-Jones

또.. 누가 있나…
그런데…

가령 Francis Shaeffer의 예를 들자면,
나는 어떤 사람의 신앙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여부를 Francis Shaeffer의 입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판단할 정도였다.
거의 2-3년 동안 그 사람의 책을 탐독하면서 그 사람이 제공해주는 frame으로 성경을 읽고, 그 사람의 말을 철저히 따랐다.

김교신의 경우에도,
참 철저하고도 열심히 김교신의 생각과 신앙에 동의했었다.
책을 읽으며,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으며… 때로는 신학 논문을 찾아 읽으면서 까지 김교신에 심취했었다.

한때는,
대천덕 신부님 계열(?)의 대전의 작은 기도모임에 가면서…
성령운동에 참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리고 대천덕 신부님이 이야기하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에 완전히 푹 빠져서 그 관련된 책들을 모아 읽고, 그쪽 계열 뉴스레터(?)도 받고… (통일논단 이라고 하는…) 하여간 그랬다.

한국에서 남서울 교회에 1년간 다니면서는,
홍정길 목사님의 설교에 홀딱 빠졌었다.
정말 단어 하나하나에 빠져서 어떻게 하면 저런 설교가 나올 수 있을까 감탄했었다.

한동안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부흥 등에 심취했었다.

흥에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을 나름대로 찾아다니며… 책을 읽으며… 로이드 존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유일한 사상이 있다면 로이드 존스가 가졌던 standard였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내게 그런 사람이나 사상이나 조류는… 없다.

어찌보면 안타까운 일일 수도 있으나…
가만 생각해 보면 참 다행이다.

어떤 한 사람의 설교에,
어떤 한 사람의 주장에,
어떤 한 사람의 역사에 대한 평가에,
어떤 한 사람의 삶에,

내가 믿고있는 하나님에 대한 평가를 모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나를 위험한 사람으로 만들었었나 하는 것을,
지난 내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다.

어떤 한 사람의 삶과 사상과 가치와 주장에 어느 기간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유익을 취하는 것은 매우 좋을 일이지만,
그 사람만을 내 삶과 신앙과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것 만큼 내 안의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일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돌이켜 보면,
내가 스스로 fan이되어 열광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그 주장들 가운데 매우 많은 부분은…
그저 그 사람의 생각이거나,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만 적용되었어야 할 사상이거나,
매우 제한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거나,
심지어는 오류/잘못 임을 점차로 배워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에 심취해 있을 당시에는 주변에서 내게 무엇이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상주의자의 변절

나는,
내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해왔고,
다른 이들도 나를 그렇게 보아왔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이상주의자임에 자부심을 느껴왔고 그 ‘순수성(?)’을 지키려 많이 노력했었다.

그런데,
요즈음, 내가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의 한계와 벽을 많이 실감한다.

1. 적어도 내게있어, 이상주의는 교만함과 tightly coupled 되어 있었다.
특히 신앙적 이상주의의 경우에 그랬다.
하나님 안에서의 순수함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좋으나, 내가 가지고 있는 ‘dogma’를 ‘옳은 이상’으로 설정해 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나 자신을 포함한)을 정죄하였다.
그 교만함은 다시 내 이상주의를 강화시키는 positive feedback 으로 작용하고, 결국은 나와 내 생각과 내 행동에 파과적 효과를 가져오는 듯 하다.

2. 이상주의는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킨다.
현실적으로 어떤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이유가 있는데, 적어도 내가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는 그 복잡한 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는 (over-simplfying) 문제가 있었다.
내가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고,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다.
마치 내가 제시하는 어떤 문제 하나만 해결되면 그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그렇게 상황을 설정해 버리는 오류를 종종 범해왔음을 본다.

3. 이상주의는 종종 all-or-nothing의 approach로 가게된다.
소위 ‘혼합’이라는 것을 견디지 못하므로… 조금이라도 그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경우에는 신랄한 비판만을 남긴채 아예 발조차 담그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경우 결국 그러한 비판은 내가 아래에 쓴… ‘비판쟁이’를 양산하는 mechanism으로 작용한다.

4. 이상주의는 자주 사랑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기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대상이 너무나도 많다.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한다든지,
교회를 비판하면서 정작 그 속에서 당장 눈물을 뿌려 섬겨야할 영혼들을 생각하지 않는 부조리를 흔히 보게 된다.
가령… 교회가 타락했다고, 모든 교회의 문을 다 닫고 때려부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에는 그 안에 있는 영혼들이 너무 귀하다.
정말 한 영혼 한 영혼을 향한 눈물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을 더럽혀가며 현실과 싸우는 노력이 있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상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열거한 내 결점들을 보면서… 어쩌면 여태껏 견지해왔던 스타일의 이상주의자로부터는…
내가 변절을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이태백에게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미국에 20세기에 왔고, 지금은 21세기 이니… 두 세기에 걸친 미국 생활 동안 한국이 많이 변한것은 틀림없으렷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심한 과정의 말인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을 들어보면 그것이 전혀 과정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이태백’ 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참 꿈을 꾸며 이상에 부풀어 있어야할 나이에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어떤 것이 될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사도행전에 나온 것 같이 ‘은과 금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이들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선뜻 이것에 대한 대답을 섯불리 열거하기 이전에 어떤 것들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1. ‘예수 믿고 (현세적, 물질적) 복 받아라’

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아닐 뿐더러, 실제 그러한 현세적 복을 잃어버린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로 사탕발림을 하려 한다면 복음은 정말 천박한 원색의 룸살롱 광고 찌라시 정도 이상의 attention을
얻지 못할 것이다.

2. 열심히 살아서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말을 돌려서 해서 그렇지, 사실 이건 ‘성공해라’ 라는 말이다. 이들이 성공이 싫어서 그러고 있는 사람들일까. 성공을 억지로 피해서 이태백이 되었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비복음적인 말에 이들이 거짓 위로라도 받을 것을 기대해 볼수 있으련만.

3. 지금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거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사실 나라도 그렇게 얘기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만 참아라.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풀어주실 테니.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앞에 두고 도박이라도 하자는 건가.

……

어설픈 좌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이태백들 가운데 다수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이다.
경쟁 사회 속에서 낙오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메시지들을 강단에서 계속 선포하며…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들만 이야기 해왔지 않았는가.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야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고지를 점령하자고.

그런데 우리가 이들 이태백들에게 ‘우리에게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근본적으로 내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 이 세상을 바라보는 frame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20년 뒤,
텅텅빈 한국의 어느 예배당에서 나와 내 아내가 예배를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태백들의 박탈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품어줄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고 싶다.

나는 절망한다

요즈음 인터넷의 ‘젊은 세대’를 보면… 대략 두부류로 나누어 지는 것 같다.

첫번째 부류는, 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미국의 Northeastern liberal들과 매우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중도 혹은 중도 좌파의 성향을 가지고,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이며,
윤리적으로는 비교적 건전하고 (적어도 표방하는 자세로는)
종교적으로는 무신론이다.
이들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낙관적이고, humanitarianist 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번째 부류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방식을 가진사람들이다.
정치적으로는 무당파,
문화적으로는 매우 개방적,
윤리적으로는 구속을 싫어하고,
종교적으로는 무신론보다는 무심론(無心論:관심이 없음)에 가깝다. 때로 다신론적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I don’t care’가 이들을 표현하는 key point이다.

나는 이 시대의 이런 흐름들에 절망한다.
적어도 현재의 성향이 5-10년정도 지속된다면 한국교회는 지금의 유럽교회만도 못해질지도 모른다.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

그 이유에 대한 분석이야 이미 많이들 되어 있으므로 내가 따로 여기에 늘어놓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을 듯 보이나…
정말 더 마음을 짓누르는 것은… 앞으로 5-10년 이내에 이런 trend를 뒤집을 가능성이라도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큰 일을 행하신다면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가보기엔 매우 희박하다.

내 딸 민우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born-again Christian 친구와의 fellowship을 누리며 인생의 계획을 나누느라 밤을 새우는… 그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절망한다…

누가복음 7:31-32
31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비판쟁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려면 그 열매를 보라고…

나의 경우엔, 나에게서 깊은 신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특히 최근으로 들어올수돌 더?) 많이 …
‘비판’적 시각을 갖는 것 같다.

비판이 갖는 건강한 순작용이 있고,
특히 어떤 사안의 경우엔 비판이 아니고는 도저히 스스로 정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는 경우도 있거니와 (그 비판의 수용여부는 물론 별도의 문제이다.)
비판이 때로 어떤사람의 ‘시각’ 자체로 고정되어 버리면 그 사람을 ‘비판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다.

어떤 이들은,
‘교회’ 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일단 비판할 거리들을 늘어놓는다.
그것이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일반적인 우주적 교회이건 간에.

어떤 이들은,
‘요즈음 학생들’ 이라는 이야기만 나오면 핏대를 세우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세속의 가치관에 물들어버려 소망이 없다는 둥, 비지성적이라는 둥…

이 ‘어떤 이들’에는 물론 나도 포함되어 있다.
나도 매우 ‘비판쟁이’이니까 말이다.

비판쟁이들은…
어떤 이야기를 꺼내도…
일단 비판부터 하고 보고…
그래서 너의 personal한 삶에서 그 이슈가 어떻게 영향을 주느냐는 질문을 하고 보면… 그냥 대화가 막힌다.

비판하는 이야기는 늘 구체적이기 보다는 추상적이고,
개인적 dimension에서의 적용이 빈약하다.
비판을 하며 가르치는 주제로는 이야기거리가 쌓여있지만,
그것을 위해 섬기는 action은 극도로 빈약하다.

비판의 소리들을 다시 분석하여 또 다시 반문하고 캐물어보면,
이들의 비판 역시 ‘들은것’ 일뿐.. ‘체득한것’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떤 대상을 위해 섬기는 크기가 그리고 기도의 크기가 그것에 대한 비판의 크기보다 항상 더 커야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이, 어떤 개인이건, 단체이건, 지역교회이건, 한국교회이건, 이 시대의 젊은이이건, 목회자이건… 누구건 간에.
그리고 내가 섬기지 못하는 중에 비판의 생각이 혹시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내 입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단속하고… 그 생각을 스스로 정화시키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로부터 신앙적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비판쟁이’의 모습을 자꾸만 갖는 것을 보면,
내가 스스로 정한 기준을 내가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가슴을 칠 일이다…

빌립보서 2:5-8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누가복음 6: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