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5)

이번 집회를 통해 바라본 우리 학생 대중의 현주소는 정말 절망적일만큼 안타까웠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이야기하는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과연 이 아이들이 믿고 있는것도 기독교 신앙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전반적으로 만연해있는 반지성적 모습,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 종교화/화석화되어 있는 지역교회 속에서 abuse에 가깝게 소모당하고 있는 상황, 미래에 대한 불안을 복음이 아닌 종교로 해결하려는 모습, 세속적 욕망을 종교적으로 포장하고 있는 모습…

도대체 이걸 어디에서부터 손을 보아야하는 걸까 하는 암담함이 마음을 무겁게 눌렀다.,

이런 학생 대중을 우리가 복음으로 섬기는 일은,

거대한 산을 숟가락으로 옮기려는 시도처럼 무모하게까지 느껴졌다.

학생들을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종교지도자들에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몇가지 희망을 보았다.

첫째,

그런 와중에도, 소망을 둘 수 있는 아주 소수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가능하면 학생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노력을 많이했는데 (그렇지만 내가 원하는 만큼 많이 하지는 못했다.) 그런 대화 속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소수가 분명히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어떻게든 이 어그러진 세대에서 지켜주셔야 합니다… 하는 기도가 절로 나왔다.

둘째,

짧은 대화를 통해서도 생각과 방향을 조금씩 바꾸는 가능성을 보았다.

아직은 어린 학생들이므로, 조금 direction을 제시해주면, 영향을 받는 모습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학생들을 그냥 다시 돌려보내려니 정말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했다.

그렇지만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째,

이런 학생들을 향한 애끓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몸이 부서져라 섬기는 간사들을 보며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구석에서 그 파란조끼들의 모습을 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은 마음이 한두번 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 마구 따지면서 기도했다. 하나님,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섬기는데, 이 학생들을 그냥 이 상태로 두시렵니까.

학생들을 헌신적으로 섬기는 강사님들을 볼 수 있는 것도 가슴뛰게 하는 일이었다.

20년 코스타를 참석해오신 내 룸메이트 강사님(ㅎㅎ)이, 학생들 사진을 열심히 찍으시는 모습은 정말 감동이었다. 한때는 머리 숱도 많으시고 훨씬 파릇파릇하셨는데… 정말 한결같으신 분이시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진통제를 먹어가며 섬기시는 분도 만날 수 있었다. 목요일쯤 되어서는 눈에 피로가 가득해졌음에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달려드시는 분들을 보는 것은 분명의 소망의 한 자락이었다.

역시, 20대 초반의 학생들이므로, 찬양의 열기가 달랐다.

그야말로 방방 뛰며 찬양을 하면서도 지칠줄을 몰랐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맨 뒤에 서서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또 다른 세대를 그냥 보내실수는 없습니다. 이 친구들을 꼭 붙들어 주십시오. 이 친구들이 이렇게 뜨겁게 찬양하는 것 처럼 당신을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로 세워주십시오.

이 친구들 그냥 포기하지 말아 주십시오. 꼭, 꼭, 꼭… 좀 붙들어 주십시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4)

나는 방언으로 기도할때가 있다.

그러나 보통 그 방언기도를 많이 누리거나 사용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방언기도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인 것 같다.

가령, 혼자서 기도를 할때 방언기도를 하는 경우는 참 드물다.

그런데 그런 시간이 지속되다보니, 최근에는 방언기도 자체가 잘 나오질 않았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나는 방언기도를 추구하는 그런 스타일의 신앙인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런걸 추구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방언기도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내 기도가 많이 메마르고 있다는 표지처럼 생각되었다.

특히 앞에서 이야기하는 영적외로움과 관련되어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KOSTA 집회에 참석해서 간사들과 함께 기도를 하면서 참 오랜만에 방언으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나는 방언기도에 대해 아주 무지한 사람이므로,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번 집회가 내게도 의미있는 집회가 되게 하시려나보다”

앞에서 쓴대로,

영적 메마름과 영적 외로움에 힘들어하던 내게,

하나님께서는 내가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주셨다.

그 선물은,

소위 뜨거움을 회복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여러 종류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하셨다.

그 많은 생각들을 ‘깨달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자신이 없지만, 적어도 내 외로움의 내용과 근거, 그리고 해결책에대한 작은 힌트를 찾을 수 있었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3)

이번에는 ‘말씀’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준비를 해야 했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사실 이미 다른 세팅에서 했던 것이었으므로 내용을 준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full script를 다 써가며 말씀을 준비하는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큰 줄기만을 잡아놓고, 청중의 반응과 상태를 보아가며 내용과 방향을 조절하는 스타일이어서, 어떤 의미에서 내가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얼굴을 보고 만나기 전에는 ‘발동’이 안걸리기도 한다.

문제는 내가 만들어 놓은 contents에 ‘마음’이 담기지 않는다는데 있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이야기해주고 싶고, 그래야 하는데…

내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맛 없는 음식을 만들어놓고, 그 음식이 맛있다고 이야기하며 음식을 내어놓아야 하는 주방장같은 모습이 내 모습이었다고나 할까.

이런 증상은 이번 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1월에 신시내티의 한 청년부 수양회 말씀 준비를 할때도 마찬가지였다.

내용을 다 준비했는데, 도무지 그 내용이 내 마음에 담기질 않았다.

그 말씀을 보아도 내 마음이 뜨거워지질 않았다.

막상 말씀을 나누는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보니 그 뜨거움이 일부 다시 회복되었으나,

뭔가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현장에서 막 오바를 했다. 감정적으로 청중을 manipulate 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것은 내게 대단히 나쁜 영향을 미쳤다. 

아… 결국 이렇게 manipulate하는 싸구려 말씀을 전하고 말았구나 하는 자책이 나를 괴롭게 했다.

이번에 말씀 준비를 하면서, 그리고 conference에 참석할 준비를 하면서 나는 그게 참 두려웠다.

그래서, 내 마음이 담기지 않아도 좋으니 manipulative하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여러번 했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일도 가능하면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냥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결심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정말 간절히 기도했다. 나를 false manipulation으로부터 지켜달라고.

하나님께서,

이번에 내 기도를 잘 들어주셨다.

참 감사한 일이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2)

최근 나는 외로웠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은, 내게 늘 가슴을 불타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물론 그렇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기쁨이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런 모습의 flip side는, 내가 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깊은 목마름이 내게는 늘 있다. 요즘 나는 이런 목마름이 더 깊은 상태였다. 왜 나는 더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걸까.

내가 만나는 Christian들은, 다음의 몇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1) 위에 내가 기술한 신앙을 공유하는 사람들

(2) 위에 내가 기술한 신앙을 갖기를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

(3) 위에 내가 기술한 신앙을 갖기 원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

(4) 위에 내가 기술한 신앙을 갖기 원하지도 않고, 내 신앙을 보며 우려하는 사람들

그런데 내가 만나는 Christian들의 빈도를 보면 대충 이런 순서였다.

(3) > (4) > (2) >>(넘사벽)>> (1)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마음을 나누면, ‘그건 그냥 네 스타일일 뿐이다’ 라는 반응을 참 많이 듣곤 했다. 심지어는 너의 그런 신앙은 문제가 많다는 반응도 참 많이 있었다.

정말 그런걸까.

이건 그냥 내 스타일의 신앙인걸까. 혹은 내 신앙은 문제가 있는 걸까.

이번 conference에 가기 전에, 

더더욱 나를 힘들게 했던 것은, 그나마 내게 있던 그 불타는 마음이 식어가는 것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desire는 여전히 크지만, 막상 내가 그렇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스스로 바라보며 참 많이 마음이 무거웠었다.

KOSTA/USA-2014 Indy conference 후기 (1)

이번 인디 컨퍼런스에서는 정말 다양한 역할을 맡았었다.

우선, 내가 늘 편하게 생각하는 ‘간사’의 자세로 참석했다. 간사들의 모임에 거의 다 참석했고, 간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나 간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많이 남는다.)

jj 수양회와 미들그룹 세션의 강사의 역할을 맡았었다. 이 블로그에 쓰긴 했지만, 준비하면서 참 힘들었었다. 

내가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 같아 많이 불편했었다.

솔직히 다시 그런 역할을 맡을 수 있을지, 맡는 것이 좋을지 지금도 자신이 없다.

몇가지 땜빵을 맡았다.

기도의 밤을 인도하는 일, 간략하게 복음을 설명하고 구원초청을 하는일까지 맡았다. (허억…)

금요일 아침에 구원이란 무엇인가 세미나도 하나 했다.

그 외에,

가능하면 중보기도실에 많이 있으려 노력했고… (이건 별로 그러지 못했다.)

몇명 학생 상담을 했었고,

식사때마다 조모임에 들어가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

이번에 내가 작정을 하고 달려든 일은, 책을 파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학생들이 책을 좀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싶어, 호객행위를 하며 학생들을 모으고, 책 추천을 해주는 책방 아저씨 역할을 맡았다.

(덕분에 두란노에서 오신 분과 참 많이 친해졌다. ㅎㅎ)

그런 와중에,

내가 개인적으로 고민하던 이슈들에 대해 몇몇의 강사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 또한 갖을 수 있었다.

이번 인디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인디 컨퍼런스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참 생각한 것들이 많았다. 

내 개인적인 문제로 부터 시작해서, 내가 섬기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 코스타에 대한 생각,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여러 신학적 이슈, 좀 더 크게는 한국 교회, 복음주의의 미래 등등에 대한 생각도.

과연 그것들을 다 이 블로그에서 담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싶을만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할 수 있는 한, 앞으로 몇번이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 생각을 정리해서 담아보고자 한다.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5)

마르슬라브 볼프는,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나서… 소위 ‘인종청소’가 이루어진 지역에서 자란 사람이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했던 그 상황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모두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 상황에서 화해, 용서는 십자가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을 진지하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볼프는,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피해자의 아픔을 품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해자의 죄까지도 resolve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도대체 누가 선이고 악이라는 것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정도로… 총체적으로 망가진 세상 속에서,

결국 그 사람들을 다시 구속해내고 회복해내고 화해하게 하는 것은,

십자가라는 것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참 마음에 들지 않는 십자가 해석이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런 approach 말고 다른 대안이 있을까?

나는 이런 도식을,

지금 이 상황에서 너무 성급하게 적용하는 것은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1. 이 상황에서 일어나는 내 안의 분노가 ‘공의로운’ 것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 열어두고,

2.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향해 깊은 사랑과 관심을 보이고,

3. 이 아픔을 통해 드러난 ‘백성’들의 아픔과 눈물에 공감하며,

4. 깨어진 system이나 사람의 문제들을 잘 짚어내면서 그것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되,

5. 재를 뒤집어 쓰고, 시대의 죄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써 회개하는 일들을 해야하지 않을까 싶다.

이것들은, 모두 중요한 덕목들이고,

이것들 가운데 한두가지만 했다고 해서 의인이 된 것 처럼 나대는 것은 결국 자신을 파괴시킨다고 생각한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어떤 특정한 집단이 거의 독접하다 시피 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이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어디에서도 비슷한 voice를 듣기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처음 이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썼지만,

나는 이 사건에 대해 전문가적 시각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쓰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지만…

적어도,

내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가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정리해보고 싶었다.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4)

나는,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잘못이었는지, 무엇이 문제였는지 하는 것에 대한 아주 적극적이고 활발한 discussion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상황에서 신앙을 개인적인것으로 가두어버리고자 하는 시도는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Having said that…

20-30대에는, 선과 악의 기준이,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선의 편에 서는 것이 옳다고 여겼고, 그 반대편에 있는 악을 define하고 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선과 악의 기준이 나를 가르고 있음을 본다.

돈을 더 벌기 위해 규정을 어기고 무리하게 배를 운영한 사람들,

허가되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허가를 내어준 사람들,

리더로서 책임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비난만 하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

책임지는 일을 만들지 않기 위해 소극적으로 움직인 무능한 사람들,

아이들을 살리지 않고 배를 포기한 어른들…

등등이 정말 악한 모습이고 그것에 분노해야 하지만…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임을 인정하고,

심지어는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 사람들과의 일종의 ‘연대의식’을 가지고 재를 뒤집어 쓰는 모습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규칙을 속여서 이익을 취하는 모습.. 바로 내 모습이 아닌가.

책임을 피하고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모습… 바로 내 모습이다.

아이들이 죽더라도 나만 살면 된다는 어른들의 욕심이 지금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 있지 않은가.

벌써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한국의 남북나눔운동에서, 소위 ‘다니엘 기도’라는 것을 design해서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남북 상황의 깨어짐을 만들고 있는 죄의 모습이, 

바로 나의 죄, 우리의 죄라고 인정하고 기도하라고 촉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그렇게 기도하던 청년들은,

신사참배가, 독재정권에 협력한 것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정말 ‘우리’의 죄라고, 좀 더 좁혀서는 ‘내’ 죄라고 고백하며 눈물흘려 기도했다.

그리고는 인간 띠 잇기를 하면서 우리의 개인적 신앙의 공적인 표현을 해내었다.

사회적 악을 향한 공분,

이 사건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

이런 것들이 다 중요하고, 모두 해야 하지만…

이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만이 할 수 있는 또 한가지 일은,

재를 뒤집어 쓰는 일이 아닐까 싶다.

나는 아직…

그렇게 하자고 이야기하는 voice를 듣지 못하고 있다.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3)

돌이켜보면, 내가 어릴때는 사람들이 싸우고 욕하는 모습을 늘 거리에서 많이 봤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시절은 결국 70년대 초반이니까, 

전쟁 후 20년이 지났지만 그로부터 회복되지 못한 세상이었다.

삶을 찍어 누르는 가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그것에 눌린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에게 눈을 부라리며 싸우고 했던 것이었겠지.

나는,

이번에 이 사고를 접하고 사람들이 보이는 분노에 찬 반응들이,

마치 그런 것 같아 보였다.

삶 속에서 마음이 척박해져서…

그야말로 독기를 품고 증오를 표현하는…

아,

사람들이 정말 많이 힘들구나.

사람들의 마음이 정말 많이. 많이… 눌려 있구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 이후, 지긋지긋한 가난을 겪어내던 시절,

복음은 그들이 눈을 열어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해 주는 역할을 했다.

도무지 견디어낼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무게를 느끼는 사람들이, 예배당 찬 마루바닥에 앉아서 ‘천국복음’을 듣고 눈물로 기도하며 세상을 이겨나갔다.

지금 이 시대에,

이 아픈 사람들에게 복음이 정말 소망을 주는 것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개인적인 위로를 공급해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회적인, 공적인 복음의 영역에 대한 강조도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은,

개인적 신앙을 강조해야할 보수 기독교는 개인적 정죄만을 남발하고 있고,

공적 신앙을 강조해야 할 진보 기독교는 사회적 정죄만을 남발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개인적 신앙을 강조해야 할 보수 기독교가, 이 땅을 초월해내는 신령한 믿음, 하나님을 신뢰하는 개인적 믿음에 대한 강조를 하고,

공적 신앙을 강조해야 할 진보 기독교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심에 대한 강조를 해야 하지 않나.

이렇게 많이 아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많이 마음이 상해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주는 생기가 공급되는 간절한 소망이 더 커졌다.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2)

이런 사건을 보고 가슴아파하지 않거나 분노하지 않는 것 자체가 아마 죄일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의 분노는 모두 ‘공의로운 분노’일까?

이 상황에서 그 아이들을 생각하며 울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의인이 되는 것일까?

인터넷을 보면서 내가 불편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사람들이 이 상황 속에서 많이 마음이 힘들다.

그리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 오른다.

그런데…

그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은… 

그냥 평소에 자신이 미워하던 그룹이다. -.-;

그냥 ‘박근혜’를 미워하던 사람들은,

이걸 기회로 잡아 박근혜를 까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그리고 그것이 공의라고 믿고 있고)

이걸 바탕으로 ‘사회 기강을 흔드는 종북좌파’가 문제라고 보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을 비난하는데 총력을 기울인다.

보수 기독교가 문제라고 보는 사람들은 보수 기독교가 이 문제를 대하는 방식에 분노하고 있고,

공직자들이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공직 system의 문제를 부각한다.

지금 우리가 발견하고 있는 분노는 그 대상을 정확하게 설정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가들에 대해 비판을 해야하고, 그들이 책임지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한다.

깨어진 system에 대한 이슈를 제기해야 하고 필요한 경우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황망한 사태를 만난 김에, 

내가 기존에 미워하던 그룹을 왕창 더 미워하자… 그 사람들을 많이 많이 비난하자… 는 식의 접근은 사태에 크게 도움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저들’을 악인으로 만들고 ‘나’ 혹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된다.

나는, 누군가가…

“이 상황에서 분노하는 것으로 당신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야기를 좀 해주면 좋겠다.

@ 물론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는 한국의 현 정부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이다. 거의 이 정부가 ‘악하다’라고 보는 입장에 가깝다. 또 악할 뿐 아니고 무능하기까지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나의 분노도 역시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를 향해 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가슴 아픈, 너무나 가슴 아픈… (1)

고난주간에, 

이 뉴스를 들었을때…

나는 마음이 막막해져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서,

곧 이어 도저히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 올랐다.

솔직히 말하면 그 ‘분노’가 무엇을 향한 분노인지, 그 분노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하는 것 조차 명확하지 않았지만…

나는 끓어 오르는 분노에 주체를 할 수 없었다.

혼자 있는 장소에서는 알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쌍욕을 내 뱉기도 하였다.

이걸 어떻게 소화하고 처리해야할지 하는 것도 분명하지 않았고,

인터넷에서 접하는 여러가지 뉴스와 주장이 그저 어지럽게만 느껴졌었다.

많은 사람들이 봤다는,

사진이나 동영상들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도무지 그걸 볼만큼 마음이 단단하지 못하다.

인터넷 사이트에 그저 작게 보이는 사진에 비추어진 모습들만으로도,

내 마음을 추스리기가 쉽지 않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절대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솔직히 누가 어떤 해답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