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경험을 상대화 하기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 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뜨거운 물에 한번 데인 사람은, 뜨거운 것을 조심하는 것을 인생의 모토로 삼는다.
어려서 가까운 사람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는 것을 경험했던 사람은, 무병장수가 인생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 하려는 모습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많이 발견된다. 특히 자칭타칭 믿음이 좋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그래서 아마도 생각이 조금 다른 부분을 함께 포용하지 못하고 다투는 모습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 같다.

가령,
기도를 통해서 신앙의 깊이를 경험한 사람은 말씀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메말랐다고 비판한다.
혹은 말씀의 오묘한 맛을 깨달았던 사람은 기도에 빠진 사람들을 무식한 반지성주의자로 매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나이가 들어가면 갈 수록 더 심해지는 듯 하다.

나도 물론 역시 이런 면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내 경험을 절대화해서 다른 사람들을 재단하고, 비판하는 모습은 내가 스스로 조심하려 해도 쉽게 나타나는 내 죄성이다.

바라기로는,
나는 나이가 들면 들어갈수록,
내 경험을 상대화할줄 아는 지혜를 배울 수 있으면 좋겠다.

그것은 아마도,
하나님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하지 않는 자세와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

30대 중반을 지나 30대 후반을 향해서 가는 나이에,
정말 이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허풍떨기

내가 철 모르던 어린시절,
나는 우리집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줄 알았다.
정말 부자였냐고?
글쎄… 뭐 그리 가난하진 않았지만, 부자라고 까지야….

국민학교 1-2학년 무렵이었나….
내가 우리반 친구 하나에게,
야… 우리집 되게 크다. 우리집은 진짜 커서 우리동네에서 제일 커!

정작 그 친구가 우리집에 와서 보고나서 던진 한마디…
‘애게…’ -.-;

—–

삶의 즐거움의 어려움, 기쁨과 슬픔들을 겪으면서…
때로 나는 내가 아직도 그 어린시절의 나로부터 벗어나 있지 못함을 발견한다.

내가 겪은 기쁨이 세상에서 제일 큰 기쁨인 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겪는 어려움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것으로 생각하고,
내가 겪는 깨달음이 세상에서 제일 값진 것으로 생각한다.

언젠가 내가 조금 더 성숙해져서,
지금 내가 겪는 기쁨이, 아픔이, 깨달음이,
참으로 ‘별것 아니었음’을 알게 될때,
내 삶의 경험으로 인해 호들갑 떨었던 내가 얼마나 부끄러울까.

그리스도안에서의 성숙함을 지니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위대함과 내 경험의 천박함을 인지하고,
허풍떠는 빈도를 줄여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어느 허풍장이이의 생각

내 인생에 영향을 미친 10사람

내 인생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10사람을 뽑아보면,
내 인생이 어떻게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보인다고…

그래서 나도 한번 뽑아보았다. (무순)

1. 김수영 자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 이 사람을 통해서 나는 인생이 내가 생각해온 것 이상의 dimension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2. 내 부모님
I have the best parents in the world! 나는 이분들에게서 ‘정신’이 ‘물질’에 우선하는 것을 배웠다.

3. 김교신 선생
이분의 무교회 사상에 100%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분의 영향은 내게 매우 컸다.

4. 김인수 교수
개인적인 대화를 나누어 볼 기회가 불과 3-4번정도에 불과했는데, 그러나 이분이 나누어주신 삶의 자세와 하나님에대한 시각은 정말 탁월했다.

5. 장성욱 목사
Steve
Chang 이라고… 한국말을 잘 못하시는 1.5세 당시 전도사님. 내가 석사1년차때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임시 목회자로
섬기셨는데, 나 하나를 위해 새벽에 서울에서 차를 몰고 오셔서 나와 함께 아침 7시 QT 모임을 하셨던 것을 잊을 수 없다.

6. 팽동국 교수
나는 동국이형에게서 기도를 배웠다!

7. KOSTA 간사 팀
이 사람들을 생각하면 ‘전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피부로 다가온다.

8. Francis Schaeffer
이분의 생각에 지금은 100% 동의하지는 않지만, 내가 삶의 모토로 삼고 있는 Contra Mundum 은 이분의 삶의 자세에서 배운 것이다.

9. Martyn Lloyd-Jones
역시 이분의 생각에 100% 동의하는지 하는 것에 자신은 없지만, 이분이 가졌던 ‘기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10. John Stott
사실은, 이분이 내게 준 가장 큰 영향력은, ‘로잔언약’을 통해서였다. 로잔언약을 접한 것은 내 신앙과 삶의 큰 도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나를 ‘양육’하는 입장에서 있었던 분은 이 가운데 장성욱 전도사님 한분 뿐이네…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분들이 대개는 내가 간접경험을 통해 접한 분들이라는 사실은, 내게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내게 큰 약점이기도 하다.

내 바램은…
내가 이 생을 마치고 나서,
내 후배, 내 아래 세대의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분들과 같은 사람이면 하는 것이다.

돈, 명예, 권력등과 관계 없이,
내 인생이 다른 이들에게 진리를 바라보게 하는 등대가 된다면,
내가 헛된 인생을 산것은 아닐텐데…

“반윤리적” 기독교

해적선장 이야기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신실한’ 신자들의 모습을, 해적선장이라는 비윤리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신실함을 지켜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비유한 내용이다. 과장이 되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 모습은 어쩌면 아주 전형적인(typical) 한국적 그리스도인의 슬픈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A군의 직장생활 이야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A군은 한국의 어느 국가출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었고, 지역교회에서도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A군은, 직장에 가서도 신우회 활동등을 통해 ‘직장 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직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직장에서 A군이 부딪혀야했던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있는 회식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 늘 부담이 되었다. 한약을 먹는다, 개인적으로 술이 안받는다, 운전을 해야한다는 등의 핑계도 이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 주일마다 나와서 일을 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도 A군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다. 교회에서 여러가지 일로 섬기고 있는 터에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 A군은 이 원칙을 깨지 않으려 정말 힘들게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A군을 또 힘들게 하는 것은 가끔 ‘전문가 초청’ 가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가끔 세미나를 부탁한 전문가가 세미나를 펑크내면, 그냥 그 세미나가 열린 것으로 보고서를 써 내고 거기서 나온 경비로 연구실 회식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 보고서로 회식이 마련되면 A군은 또한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회식에 빠지려 노력하였다. 부정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 직장 상사에게 피치못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늘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일이 밀려 기한내에 끝내지 못하면, 일을 이미 다른 부서로 넘겼는데 그쪽에서 아직 넘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몇번 둘러대곤 했는데 이런 사소한 거짓말에도 A군은 심하게 마음이 찔렸다. 매일의 삶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정정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기도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A군은 힘들지만 매일 새벽기도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어다. 이런 성경구절들이 A군의 QT 노트에는 자주 적히게 된다.

이것은 가상의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며 분투하는 모습. 그러나, 이 모습을 위의 해적선장 이야기에 대비시켜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반윤리적인 기독교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비판의 소리 가운데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비리와 부정축재, 당회장의 권력을 투명하지 않은 절차를 통해 아들에게 물려주는 문제, 교회가 다른 ‘사업’을 벌이면서 터져나오는 각종 탈세 혹은 비리 의혹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질 때 마다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교회의 집사, 장로, 권사, 목사님들. 이런 우리의 자아상이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서 일까, 어떻게든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사명감에서일까, 아니면 함께 싸잡아서 욕먹는 것이 못내 분해서일까, 우리 안에서도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목소리들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노라고. 적어도 세상의 상식 수준의 도덕만이라도 우리안에서 회복하자고. 사실 우리는 얼마나 교회나 기타 기독교 관련 단체 혹은 집회 등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길 도전받는가.
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과 정직, 청렴, 사랑, 자비와 같은 ‘윤리적 규율’ 등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지키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윤리 기준은 세상의 타락한 가치기준보다 우월하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기반에서 미국내의 불법 이민자들, 미혼모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들을 보았는가. 이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에 일부러 흑인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에 가서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박봉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도덕기준보다 과연 기독교의 도덕기준이 얼마나 더 우월하단 말인가.

자크엘룰(Jacques Ellul)에 따르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반윤리적’인 종교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방해물로 나타나는 모든 도덕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도덕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도덕도 만들지 않는다. 계시된 진리들(자유, 진리, 빛, 말씀, 거룩)은 어떤 것도 도덕과 관계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 진리들이 일깨우는 것은 존재 양식과 삶의 모습이다. 그 삶의 모습은 지극히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위험에 처하지만 항상 새롭게 되는 것이다. 도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의 금지이며 장애물이고 또한 그 안에 정죄를 내포한다. 정확히 예수께서 모든 도덕적 인물들에의해 어쩔 수 없이 정죄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비극들 가운데 하나는 이 자유한 말씀이 도덕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크엘룰, 뒤틀려진 기독교, p120-121,대장간 199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윤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윤리적으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을 비그리스도인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전적타자(全的他者)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간극(gap)이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같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절대적으로 인정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상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들어진 윤리적 강령들 심지어는 도덕적 강령들이 절대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을 흔드는 심각한 도전이다.

앞의 A군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물론 A군이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열정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A군이 지키려 했던 주일성수, 금주와 같은 종교적 강령들이나 정직, 성실과 같은 윤리적 강령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때, A군의 노력은 매우 소모적인 것이 될수도 있다. 또한, 경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반복해서 종교적, 윤리적이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계속 점검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가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을 강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고난 (박해 : Persecution)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이 소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순종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성경의 예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결과는 고난 혹은 박해(persecution)였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필연적으로 갖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발견했을 때, ‘나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쌓아왔던 모든 전제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계관의 사람들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도무지 담을 수 없어 그리스도인들이 사자밥이 된 것, 세속화된 중세교회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받았던 박해도 이 세계관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과 초기 신도들이 받았던 박해 역시 구한말의 유교 봉건적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이 복음적 세계관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것이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이상 그러한 박해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의 근본적인 뿌리가 세계관의 충돌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꺼이 받아야만하는 박해의 내용들을 조금 자세히 볼 수 있다. 매우 치열한 충돌과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도 별로 그렇지 못한 예를 몇 개만 들어보자.

(1) 경쟁 하덕규씨가 노래했듯이, 우리 시대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 혼자 살아남는 것을 배우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살아간다면, 비록 그것이 정정당당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 패배자가 된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산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 혹은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면으로 대항하는 ‘박해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것같이 공감하며 함께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다가 어쩌면 자신도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쩌면 진정으로 시대에 대항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을까.

(2) 성공주의 모두가 성공을 하고자 바둥바둥 하면서 사는 세상이다. 서점의 기독교 섹션에 가보아도 ‘성공’에 대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진열되어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모두가 ‘성공’을 향해 매진해 갈 때, 아내 혹은 남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양보하고 스스로 한 단계 내려 앉는 삶을 선택했다면, 그 후에 주변에 자신과 함께 ‘성공’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어떤 성취와 성공을 과시할 때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비교하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성공’만을 향해 달려갈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나간다면 이 사람 역시 성공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맨몸으로 맞서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3) 직업선택 어떤 직업이 가지는 수입에는 두가지 결정 요소가 있다. 하나는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다. 즉, 그 일의 사회적 기여의 정도에 따라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시적 혹은 장기적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수입의 정도를 가지고 직업선택을 할 때, 임금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선택을 한다면, 혹은 자신의 임금 수준이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가치보다 더 많이 정해져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그 잉여 부분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면, 이런 선택 역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예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사는 가장 좋은 예들을 선별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따라야할 지침들은 물론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각 사람에 맞게 어떤 길로 부르시고 그 부르심은 때로 세상의 시스템에 깊숙히 들어가서 사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전략적으로 겉보기에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해서 사는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 순간이 정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자세가 아닐까.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거대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과 맞서 싸우다 낙오하고 ‘박해받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낙오하는 것은 과연 실패일까. 여기에 공동체의 중요성이 있다. 물론 세상에 맞서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낙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단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저항할 때,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주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의 양심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로마의 권력이, 시대 정신이,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던지 간에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해야만하는 일들은 반드시 하고야 말았다. 성경말씀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해적선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해적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가치기준들을 외면한채 개인적인 종교적 윤리적 경건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해적선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인 비교가 되겠으나, 성적순결을 지키는 해적선장과 난봉꾼이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해안경비대장 가운데 누가 더 유익한 사람이겠는가.

복음은 원천적으로 모든 권력과 모든 권세를 뒤집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권력이 돈이건, 정치 권력이건, 사회적 통념이건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것을 뒤집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세상의 경쟁주의, 성공주의, 배금주의, 인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여 그것을 뒤집는 예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태클을 걸며 유일한 하나님되신 그분의 뜻 이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정치권력, 금전권력, 쾌락주의, 사회적 통념등과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만들어내는 구차한 변명들을 얼마나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많이 접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당당하게 거부하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타협함없이 지키는 진성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낙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 나가는 모습을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일들이 편만해 지길 소망한다. 그렇게 할 때 이땅의 우리 공동체들은 천박한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에 얽매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를 세상에 벤치마킹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사족

이 글은 아직 미숙한 한 유학생의 묵상 글입니다. 많은 분들의 조언, 충고, 첨언들을 기대합니다.

gpKOSTA-UT

Thanksgiving 휴가 기간 (25-27일)동안
Utah 에서 gpKOSTA를 합니다.
gpKOSTA는 지역의 학생들 leadership training program 입니다.

Utah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몰몬들이 ‘성지’로 여기는… 몰몬의 주(state)입니다.

정말 영적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야말로 고군분투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알고 나서…
제 마음 속에서는 깊은 부담과 애정이 생겼었습니다.

대도시가 아니므로,
많은 resource를 접할 수도 없고,
한국 사람들이 많아서 좋은 Korean Christian community를 구성할 수도 없고,
학생들도 잠시만 있다가 떠나기 때문에 정착해서 학생들을 복음으로 섬길 여건도 열악하고…
게다가 주위의 몰몬들에 의해 intimidate 될만한 환경.

이번엔,
제가 그쪽에서 organize 하는 것을 KOSTA contact person이 되어서 돕고,
가서 강의도 하고 여러가지로 섬기게 됩니다.

현지의 학생 준비위원들이 정말 열심히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것이 정말 얼마나 제 마음을 깊이 움직였는지 모릅니다.
퀄리파잉 시험을 앞두고도 대표로 섬긴 자매님을 비롯해서…
힘든 중에도 교회들을 다니며 홍보하고,
fundraising하고,
사람들을 만나서 참석을 독려하고…
그리고 기도하고.
새벽 시간이 되도록 함께 전화를 붙들고 기도하면서 고민하고…

하나님께서 Utah의 이 소중한 형제 자매들을 향해서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지 저는 알수 없지만,
이분들이 이번 gp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기대를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간절합니다!

gpKOSTA는,
보통 지역마다 돌아다니면서 그 지역의 지역교회, 캠퍼스 모임의 리더들을 훈련시켜주고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지역 모임인데요…

KOSTA를 섬기는 제가 보기에,
gpKOSTA에 ‘투입’되는 분들은… 정말 KOSTA가 가진 최고의 resource들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령 이번에 함께 가서 말씀으로 섬기실 간사님들은
그분들이 제게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제가 그냥 믿을만큼 제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신뢰하는 분들입니다!
다들 소중한 thanksgiving 기간에 가정을 포기하고(^^) 학생들을 섬기려는 마음으로 가시죠.

불과 40여명의 학생들이 모이는 수양회를 위해서,
KOSTA의 ‘드림팀’이 투입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낭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경험합니다.

눈에 보이는 파급효과로 봐서야…
대도시에서 사람들 많이 모으고,
찬양팀 빵빵하게 조직해서 집회 하는 것이 훨씬 더 크겠지만요…

이렇게 resource가 낭비된다고 보여질만큼
하나님께서는 각 지역의 학생들 한사람 한사람에 말 할 수 없이 깊은 사랑을 가지고 계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모르지요,
이번에 섬기게 되는 형제 자매님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들을 더 행하실지!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잠깐 시간을 내어서… 30초만이라도 gpKOSTA/UT를 위해서 기도해주세요.

http://gp.kosta.ws 로 가시면 자세한 정보를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롤러 코스터를

롤러 코스터를 타는 것은 재미있다. 물론 그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for example, 우리 어머니^^)

롤러 코스터를 탈때 느끼는 머리 뾰쪽 서는 느낌은 일종의 무중력감이다. 중력과 함께 낙하를 하기 때문에 잠간동안이나마 중력을 경험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중력감을 느끼는 다른 event가 있다면, 고층빌딩에서 자살하기위해서 낙하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롤러 코스터는 재미로 타지만 아무도 자살을 재미로 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은, 롤러 코스터는 안전함을 믿지만, 자살은 한번 떨어지만 끝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만든 불완전한 롤러 코스터도 이렇게 재미있게 탈진대,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인생의 롤러 코스터는 어떠한가?


생을 살다보면 승리의 순간과 절망과 패배의 순간을 모두 경험한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만 확실하다면, 나는
절대로 안전하다! 그러므로 내가 빠른 속도로 높은 고지를 올라가고 있건, 가장 낮은 곳을 지나고 있건, 정신없이 빙빙 공중회전을
하고 있던 간에… 이것을 통해 내게 제공해주시는 하나님의 blessing들을 기대하고 그것에 흥분할 수 있다.

만일 up & down이 없는 롤러코스터라면 그것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up & down이 없는 인생이라면 그것이 순탄할수는 있겠으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짜릿함은 없겠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롤러코스터를 즐기자!

국가보안법 폐지가 나와 무슨 상관이람?

이데올로기의 특징은,
자신과 다른 생각 모두를 적으로 만들어 버린다는데 있다.

저쪽이 죽어야 내가 산다.
자신의 적을 무찌르는 것이 내 존재의 근거가 된다.

쳐부수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

나도 한때 이걸로 전국 웅변대회에 나가 상도 받았었다. 괴수 김일성을 이땅에서 몰아내자고 이 연사 힘차게 부르짖습니다~ -.-;

아마 나와 같은 열살짜리 꼬마애 하나는… 비슷한 시기 북쪽에서 남조선 괴뢰정권을 무찌르고 미제의 각을 뜨자고 웅변을 했겠지.

…..

국가 보안법 폐지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인터넷 등에서 읽어보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자세는 ‘증오’이다. 빨갱이에 대한 증오.

자신의 부모가 그 빨갱이들에 의해 죽창에 살해당하고, 그 빨갱이들이 쏜 포탄에 의해 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사실 그 ‘증오’를 털어내기란 쉽지 않으리라.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건… 그 전쟁을 겪지 않았던 사람들까지고 그 ‘증오’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수십년간 철저하게 실행되어왔던 ‘이데올로기 교육’ 탓이다. 아직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부터, 빨갱이를 때려잡는 것이 인생의 목표로 세뇌당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떨쳐버리도록 하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일게다.

내가 내 스스로를 평가해 보면,
‘자유’라는 가치와 ‘평등’이라는 가치 가운데… ‘자유’라는 가치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수 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억압과 빈곤으로 내몰았던 레닌 식의 공산주의를,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증오한다.

그러나,
그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아갔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를 증오한다. 자유민주주의의 신봉자임을 스스로 자임했던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고 싶다.

그리고,
그 우스꽝스러운 독재자들의 이데올로기적 논리를 가지고…
국가보안법을 지켜내고자하는 인간들의 모습에 조소를 보낸다.

어설픈 ‘자유주의자’로서,
도무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
국가보안법을 신주단지처럼 지키고 있는…
자칭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들을 보면… 우습다못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주신 존엄함을 빼앗아 갈수는 없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이건, 국가권력이건, 국가보안법이건 간에.

한국의 신문을 읽으며 참 마음이 답답하다…

The Passion of Christ –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상상력?

대히트를 친 영화

The Passion of Christ 영화에 대한 평가가 대단하다.
교회에서도 그 시리즈의 설교가 계속되고, 그 영화를 기초로한 성경공부 교재들이 나오는가 하면 전도용으로 이 영화가 사용될 기대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것을 자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영화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참 잘 만들어진 영화인가보다.
나는 보고 싶지만… 여태껏 여러가지 사정이 되지 않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이 영화의 대 성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위 ‘거룩한 상상력’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보이는 반응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고난을 매우 생생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뇌와 고난등을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내가 어릴때 부터 들었던 말은,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소설을 글로 읽으면
머리 속에서 각종의 상상을 해 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다채롭고 다양한 장면들을 그려낼 수 있는데, 일단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모든 상상력을 죽여버려 스토리가 입체적이지 못하고 단편적이 된다는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 소설 ‘소나기’를 TV 방송에서 단편 드라마로 보고나서의 내 느낌이 바로 그랬다. 그전엔 그 소설 속에 나오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 시골의 풍경 등이 이전엔 입체적이고 다채롭게 머리속에 그려졌었는데, 그 TV 방송을 보고 난 후에는 모든 등장
인물들이 해당 배우들로 고정되어 버렸고 모든 장면들이 매우 평면적으로 축소되는 경험을 했다.

혹시 The Passion of Christ 영화에 대하여 이런 우려는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거룩한 상상력

성경공부 훈련을 받다보면 성경을 읽을 때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이야기를 듣게된다. 성경의 상황과 인물들에 대하여 때로는
감정이입을하고, 때로는 논리적 분석을 하고, 때로는 상황을 상상해 냄으로써 성경의 내용을 더 사실적(graphic)으로
머리속으로 그려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매우 자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된다는 제안이다.

예수님을
10년쯤 믿은 고학력의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몇번이나 묵상했을까. QT, 성경공부, 설교, 기타 다른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적어도 일년에 2-3회 정도는 이 내용을
접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20-30회 정도 같은 내용을 묵상했다는 이야기인데…

소나기와 같은 소설을 10년에
걸쳐 20-30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도 그냥 가볍게 읽는 것이 아니고 밑줄도 그어가면서, 고민도 해가면서, 내
삶에 적용도 해 가면서, 소설을 읽기 전과 읽은 다음 기도도 하고, 따로 노트도 작성하고.

그리고 아주 훌륭한
감독이 만든 소나기 영화를 봤다고 생각해보자. 그 영화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우아, 저기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잠결에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는 소년의 표정이 저렇게 그려졌구나… 하면서 무뤂을 치고 감탄을 하고
그럴까. 몇 장면에서는 ‘그래 저런건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감독이 참 잘 그렸네’ 할 수 있겠지만 영화 자체가 그렇게도
충격이겠는가.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나는, 나를 포함한 현대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방식이
어쩌면 지나치게 피상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성경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내가 기억도 나지않는 어린시절, 아마도
성경을 읽어온지 30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정기적으로 QT도 하고 성경공부도 한것은 약
15년 가량 되었다.

그런데도 헐리우드의 한 액션배우가 만든 영화를 보면서 그 내용이 너무나도 새로와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 것이 정상적일 것인가.


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멜깁슨의 ‘거룩한 상상력’에 의해 사실적으로 그려졌으니 내 마음에 이미
가지고 있던 그분에대한 사랑이 다시 마음속에 새겨져 눈물이 흐를수도 다시 묵상에 잠길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고뇌가
너무도 새로와서, 주님의 고난이 너무도 새로와서 ‘영적 quantum junp’를 경험했다면… 한편 감사한 일이겠으나 한편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성경을 제대로 읽자.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정말 그 내용을 내게 보이시도록 기도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성경을 읽자. 그저 한 종교의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보이신
내용으로 읽자. ‘내가 아는 누구’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골수와 관절을 쪼개는’ 말씀으로 읽자.
혹시라도 성경이 그렇게 읽혀지지 않는다면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밥을 굶으며라도 그 말씀이 내게 그렇게 다가오도록 바래야
할일이 아니겠는가.

The Passion of Christ 영화를 본 후,
그 내용을 보면서 다시 감사하고 감동하는 기쁨이 있어야하겠으나, 혹 조금이라도 내가 이미 ‘알고’있던 성경의 말씀이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축소되는 것 같은 그런 답답함을 경험할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으니… 나 스스로 그 영화를 쉽게 보러가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4년 9월호에 실렸습니다.

주일예배가 주는 의미

주일 예배는,
내가 생각하기엔… celebration 이어야 한다.
주일(일요일)을 안식일(토요일)을 대신하여 기념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일에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면서 서로 감격했다고…
주일의 예배는 바로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주일 예배는 ‘안식일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는 의미로서 드리는 것이 아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과 같은 그런 개념이 아닌, 정말 승리의 주님을… 비록 현재의 삶에서 모든 것이 승리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더라도…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
주일 예배는 설교를 듣고 교육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다.
물론, 설교를 통해 도전을 받고… 양육을 받고… 공급을 받는 것이 중요하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를 통해서 별로 공급을 받지 못해도, 정말 celebration이 되었다면 주일 예배를 제대로 드린 것이 아닐까 싶다.

조금 교만한(?) 이야기일지 모르나…
사실…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매일 말씀 묵상하고, 성경공부 하고, 개인 성경연구 하고… 하는 일들을 한 10년 정도 하고나면…
왠만한 설교를 가지고는 ‘공급’을 얻지 못한다!
너무나도 자주… 아침의 QT 말씀이 설교 말씀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주일 예배가 정말 celebration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조건이 있어야 할까. 내 생각에는 두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다.

1.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정말 ‘celebration’ 할 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것의 핵심적인 내용은 물론… 구원 얻는 백성으로서의 기쁨이다!

저 아무것도 없이… 한시간 내내… 서로 인사하고 부둥켜 안으면서… 우리 주님께서… 죽음의 모든 사슬을 끊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이상 내게는 죽음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삶은 정말 다릅니다! 라는 고백이 함께
이루어 져야 제대로 주일예배가 드려지는 것일 것이다.

2. 함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 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지체의식이 있어야 한다.
서로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고…
정말 다른 사람의 영적,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재정적 상태에 대해 깊은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섬기며…
내가 아끼는 바로 그 사람을 위하여 금식을 하면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배가 될 수 있다.
만일 이런 것이 정말 있다면… 설교가 그날 ‘꽝’ 나도… 찬양을 부르는 도중에 마이크 사고가 나도, 함께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개개인이 아닌 ‘우리’로서 celebration 하는 감격과 기쁨이 있을 것이다.
나보다 훨씬 노래를 못하는 사람이 찬양을 해도, 나보다 훨씬 설교를 못하는 사람이 설교를 해도,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스타일의 기도를 해도… 정말 그 예배가 하나님께 올려지고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주일 예배를 점검해본다.

나는… 정말…
입만 살아 있는… 말만 살아있는 그런 부류의 사람임에 분명하다.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따른다는 것

내가 믿음안에서 여태껏 어떤 기간을 통해 깊이 존경하고 따랐던 사람들 (나와 개인적인 관계가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을 쓰자면 매우 많다.

Steve Chang 전도사 (지금은 목사)
이준행 전도사 (지금은 목사)
김인수 교수
Francis Schaeffer
Jams I Packer
대천덕 신부
John Stott
김교신 선생
홍정길 목사
Martin Lloyd-Jones

또.. 누가 있나…
그런데…

가령 Francis Shaeffer의 예를 들자면,
나는 어떤 사람의 신앙이 건강한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여부를 Francis Shaeffer의 입장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것에 따라 판단할 정도였다.
거의 2-3년 동안 그 사람의 책을 탐독하면서 그 사람이 제공해주는 frame으로 성경을 읽고, 그 사람의 말을 철저히 따랐다.

김교신의 경우에도,
참 철저하고도 열심히 김교신의 생각과 신앙에 동의했었다.
책을 읽으며,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으며… 때로는 신학 논문을 찾아 읽으면서 까지 김교신에 심취했었다.

한때는,
대천덕 신부님 계열(?)의 대전의 작은 기도모임에 가면서…
성령운동에 참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리고 대천덕 신부님이 이야기하는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에 완전히 푹 빠져서 그 관련된 책들을 모아 읽고, 그쪽 계열 뉴스레터(?)도 받고… (통일논단 이라고 하는…) 하여간 그랬다.

한국에서 남서울 교회에 1년간 다니면서는,
홍정길 목사님의 설교에 홀딱 빠졌었다.
정말 단어 하나하나에 빠져서 어떻게 하면 저런 설교가 나올 수 있을까 감탄했었다.

한동안은 마틴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 부흥 등에 심취했었다.

흥에 관련된 역사적 자료들을 나름대로 찾아다니며… 책을 읽으며… 로이드 존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유일한 사상이 있다면 로이드 존스가 가졌던 standard였다고 생각했었다.

지금은?

내게 그런 사람이나 사상이나 조류는… 없다.

어찌보면 안타까운 일일 수도 있으나…
가만 생각해 보면 참 다행이다.

어떤 한 사람의 설교에,
어떤 한 사람의 주장에,
어떤 한 사람의 역사에 대한 평가에,
어떤 한 사람의 삶에,

내가 믿고있는 하나님에 대한 평가를 모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나를 위험한 사람으로 만들었었나 하는 것을,
지난 내 경험을 통해서 알기 때문이다.

어떤 한 사람의 삶과 사상과 가치와 주장에 어느 기간 깊이 심취해서 연구하고 유익을 취하는 것은 매우 좋을 일이지만,
그 사람만을 내 삶과 신앙과 인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것 만큼 내 안의 하나님을 제한시키는 일도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돌이켜 보면,
내가 스스로 fan이되어 열광했던 믿음의 선배들의 그 주장들 가운데 매우 많은 부분은…
그저 그 사람의 생각이거나,
어떤 특정 상황 속에서만 적용되었어야 할 사상이거나,
매우 제한된 하나님에 대한 이해이거나,
심지어는 오류/잘못 임을 점차로 배워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사람에 심취해 있을 당시에는 주변에서 내게 무엇이라고 말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