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2부)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의 사회 내에서의 선행 – 이 시대 기독 지성인들의 할 일
권오승

최근 필자 개인의 모습과 우리 공동체 여러 지체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신앙의 모습이다. 자기 자신의 문제를 놓고서는 매우 열심히 기도도 하고 고민도 하고 나름대로 체계적인 생각의 틀도 정리해 나가는데 반해 ‘세상’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더 잘 이루어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모습이 적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 민족, 선교, 세계를 위해 하는 중보기도는 주로 ‘면피용’의 구색 맞추기 식의 기도일 때가 많고 대부분의 기도는 우리 개인의 지극히 작은 문제들 – 이성 친구 문제, 가족 문제, 장래 진로 문제, 인간 갈등 문제, 학업의 문제 -로 채워지고 있다. ‘과연 이 사람이 내 짝이 될 수 있습니까’(이건 그래도 좀 낫지. ‘꼭 이 사람하고
짝이 되게 해 주세요’가 사실 대부분이다.)의 기도 제목으로는 수십일 ‘작정 기도’를 하면서도 북한의 굶어 죽어 가는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한끼 금식기도가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 믿음의 현 주소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필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을 인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던 사도 바울의 고차원적 신앙의 모습이 함께 떠올라 몹시 괴로워진다.

우리 시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상의 많은 일들을 ‘가이사의 것’으로 여기고 그런 것들에 신경을 쓰는 것을 경박한 것으로 여기거나 터부시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생각을 구체화시키기 위해 1992년 대통령 선거 당시 (1992년 한국 대통령 선거에 참여한 지체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있는지 잘 알지 못하겠지만) 스스로 믿음 좋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였을 전형적 모습 몇 가지를 생각해 보자. – 1997년 대선을 예로 들지 않은 것은 현 대통령의 치적이나 업적 등이 아직 쌓여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선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유형의 사람은 대통령 선거는 ‘세상의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상관할 바가 되지 못한다고 하여 기권을 하거나 별 생각 없이 그날 기분에 따라 아무 후보나 선택한 사람이다. 또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은 그 당시 상태로 만족하고 있었던 사람으로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해서 집권당의 후보를 선택한 사람이다. 또 다른 유형으로는 모 후보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그 후보를 선택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그저 ‘우리가 남이가’의 투철한(?) 지역감정으로 자기와 출신 지역이 같은 후보를 지지했을 수도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기준으로 선택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고, 감봉을 당하는 등 경제적인 아픔을 겪고 있다. 한국에서 파송한 수많은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보내오는 선교비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것을 감당하지 못해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고 있다. 여러 가지 사회의 문제와 개인의 문제에 대한 아픔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있다. 과연 그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참고로 이 글을 통해 특정 정치 집단을 비난하거나 지지하려는 의도가 없음을 명백히 하고 싶다.)

대통령 선거에서 바른 투표를 하기 위해서는 매우 잘 정립된 생각들이 있어야 한다. 각 후보에 대한 도덕성, 정책(공약), 제시된 비전,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인맥, 정치적 노선 등을 그리스도인의 시각과 관점으로 바르게 평가하는 식견과 안목, 통찰력과 판단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안보 (통일), 외교,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답’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 그 전체가 기록된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 모든 가르치는 바에 전혀 착오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에 있어 유일하고 정확 무오한 규준임을 믿는다. – We affirm the authority of both Old and New Testament Scriptures in their entirety as the only written word of God, without error in all that it affirms, and the only infallible rule of faith and practice.) 그저 개인적인 ‘뜨거움’만으로
해결되어지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실제로 한국 사회의 부패가 무섭도록 심각하게 진행되어온 지난 50여 년 동안 교회의 양적 팽창이 거의 경이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할 때, 그저 ‘불길 같은 주 성령’의 찬송을 부름으로 앞으로 나아갈 때 모든 것이 해결되어지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특히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은 더욱 그러한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구조 조정’을 담당할 사람들은 사회의 opinion leader가 될 지성인들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조적 병폐 속에서 개인적 ‘거룩’을 아무리 잘 실천하려 하여도 구조적으로 이루어지는 죄악을 피할 수 없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탈세를 하는 상황에서 그 기업의 물건을 애용하며 비판하지 않는 것은 그 탈세에 대한 책임을 일부 갖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그러한 탈세로 인해 특정 계층을 위한 정당하지 못한 소위 ‘비자금’이 조성되고 결국 그러한 검은 돈은 국민 경제를 어둡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므로 그 피해자는 결국 소비자가 되고 만다. – 특히 이러한 피해는 소외된 계층에 집중되기 쉽다. 결국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역동적 경건의 행위에 역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고지론’(사회의 높은 자리를 정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저지론’(사회의 기반을 파고들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미답지론’(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이 적은 분야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영향력을 행사하자는 논리) 등이 모두 적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해야하는 일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의(righteousness)의 목표와 근거, 방법과 수단 등을 잘 알기 위해 노력하고 공부, 연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선배들은 불행하게도 성경적 근거를 가진 정의의 모습들을 구현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실체가 어떠한 것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부분 설정해 놓지 못하고 있다. 그 일은 바로 우리 세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성경공부와 묵상을 통해 이루어 져야 한다. ‘백성들의 눈물을 씻기시는’ 하나님은, 친일의 잔재들이 청산되고 정경유착의 고리가 끊기고 80년 광주의 눈물이 씻겨지고 IMF의 아픔이 치유되는 그런 세상을 우리를 통해 이루길 원하신다.

물론 지성 사회의 복음화(전도)는 지성인들의 주된 몫이다. 그것을 등한히 해서는 안될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기독 지성인들에게 그들에게 허락하신 ‘지성’의 대가를 요구하신다. 구조적인 죄성(structural sinfulness)을 극복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작성한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ant)’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의 내용을 인용하고자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신 동시에 심판주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압박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관심에 동참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종, 종교, 피부색, 문화, 계급, 성(性) 또는 연령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은 천부적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서로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우리는 등한시하여 왔고, 또는 종종 전도와 사회참여가 서로 상반된 것으로 잘못 생각한 데 대하여 뉘우친다.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는 아니며, 또 사회 참여가 곧 전도일 수는 없으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정치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 부분임을 인정한다. 이 두 부분은 모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교리와, 이웃을 위한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필수적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부정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것을 공박하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사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의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행17:26,31 ; 창18:25 ; 사1:17 ; 시45:7 ; 창1:26,27 ; 약 3:9 ; 레19:18 ; 눅6:27,35 ; 약2:14-26 ;
요3:3,5 ; 마5:20 ; 6:33 ; 고후3:18 ; 약2:20)

“We affirm that God is both the Creator and the Judge of all men. We therefore should share
his concern for justice and reconciliation throughout human society and for the liberation of men from every kind of oppression. Because mankind is made in the image of God, every person, regardless of race, religion, color, culture, class, sex or age, has an intrinsic dignity because of which he should be respected and served, not exploited. Here too we express penitence both for our neglect and for having sometimes regarded evangelism and social concern as mutually exclusive. Although reconciliation with man is not reconciliation with God, nor is social action evangelism, nor is political liberation salvation, nevertheless we affirm that evangelism and socio-political involvement are both part of our Christian duty. For both are necessary expressions of our doctrines of God and man, our love for our neighbor and our obedience to Jesus Christ. The message of judgement upon every form of alienation, oppression and discrimination, and we should not be afraid to denounce evil and injustice wherever they exist. When people receive Christ they are born again into his kingdom and must seek not only to exhibit but also to spread its righteous world. The salvation we claim should be transforming us in the totality of our personal and social responsibilities. Faith without works is dead.” (Acts17:26,31 ; Gen.18:25 ; Isa.1:17 ; Psa.45:7 ; Gen.1:26,27 ; Jas.3:9 ; Lev.19:18 ;
Luke6:27,35 ; Jas.2:14-26 ; John3:3,5 ; Matt.5:20 ; 6:33 ; 2Cor.3:18 ;
Jas.2:20)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3부)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한다
권오승

어느 목사님의 글 가운데 ‘고려는 불교의 타락으로 망했고, 조선은 유교 때문에 망했고, 만일 이제 대한민국이 망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때문이다’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기독교가 이 사회에 대해 그 책임을 다 하고 있지 못한데 대한 자책의 변이었으리라.

최근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의 지도적인 모 목사님의 각종 부정(?) 사례들이 TV 방송에 보도된 것을 접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내용인즉 그 목사님의 축재 수준이 수십억대에 이르고 교단 내의 선거에서 일인당 수백만원에 이르는 돈을 뿌리며 부정 선거를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불륜도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의 진위를 떠나 그러한 보도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특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있는 내용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필자에겐 더욱 더 큰 충격이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낮은 도덕적 수준을 비난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왔고 그때마다 구원은 선행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교리를 내세우며 방어해왔던 우리에게 과연 그러한 방어전술이 얼마나 먹힐수 있을 것인지하는 생각에 약간의 패배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100%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것은 필자 자신의 신앙고백이자 신념이다.)

지난 3월 24일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를 또 살펴보자.
‘아말렉작전.’ 구약성서에 나오는 성전(聖戰)이 북풍유도 작전의 암호명이었다. 기독교 장로인 권영해(權寧海)전안기부장은 스스로 이 특급비밀작전의 이름을 짓고 지휘봉을 잡았다고 털어놓았다. 아말렉족은 사막지역에서 거주하던 고대유목민족. 이집트를 탈출하는 히브리족을 공격했다가 모세가 훗날 후계자로 지명할 정도로 총애했던 여호수아에게 크게 패했다. 무찔러야 할 적(敵)의 상징이 바로 아말렉족이 되고 말았다.
-( 중략 )-
윤씨 기자회견을 아말렉작전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는 뭡니까.(신부장검사)

윤씨 기자회견은 각 당의 지나친 대북연계활동에 대한 경종이자 좌익세력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구약성서에 모세가 여호수아를 내세워 아말렉족을 물리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제(모세)가 부하들(여호수아)을 시켜 좌익세력(아말렉족)을 물리치려 한 상황과 유사하지 않습니까.(권전부장)

대통령 선거전 와중에 특정후보(당시 김대중후보․DJ)를 비방하는 허위 기자회견이 좌익세력과의 전쟁입니까. 당신은 결국 구여권을 여호수아로 내세워 DJ를 아말렉으로 삼고 싸운거 아닙니까.(신부장검사)

말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권전부장)
신부장검사와 권전부장은 몇시간 동안 아말렉논쟁을 거듭했다.

-( 중략 )-

밤샘 조사는 오전 4시에 일단 끝났다. 조서에 대한 확인과 몇군데의 수정작업이 뒤따랐다.
이어 오전 4시40분. 조사실에 수사관 1명만 남은 것을 확인한 권전부장이 화장실로 들어갔고 5분 뒤 요란한 파괴음과 함께 비릿한 피냄새가 문 밖으로 퍼져 나왔다.

위의 기사는 한국에서 각종 선거가 있을 때 마다 대표적 부정선거의 방법으로 사용된 소위 ‘북풍’ 혹은 ‘공안 정국’의 진상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 책임자였던 권영해 전 안기부장에 관련된 기사이다. 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그 책임자는 기독교 장로였다. 주위에서 대형 부정 비리 사건이 터질 때 마다 그 사건의 핵심에는 항상 그리스도인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게되는 것이 이제는 별로 충격으로 받아들여 지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왜 이렇게 까지 되었나…

우리는 이러한 일이 터질 때 마다 기성세대를 비난하며 손가락질 한다. 그리고 이 세대를 한탄한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이것이다. : 과연 앞으로는 나아질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우리 세대가 저 자리에 서면 그런 일이 없게 될 것인가.

우리라고 다르지 않다. 우리도 여전히 남을 위해 사는 것 보다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같이 배고프고 힘들 때 내배부터 채우려 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함께 커가는 것 보다는 내가 크기를 원하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돈에 연연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도 여전히 큰집에 살기를 좋아하고 좋은 차 타며 좋은 옷 입는 것을 내 희생보다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지 않는가.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한 것이라거나 민족과 시대와 역사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내 자신의 편안함과 부요함에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 우리는 과연 영적인 순결함을 지켜나갈 수 있겠는가.
과연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부정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그런 환경에서 나만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며 그 부정한 ‘체제(system)’을 대항하여 싸울 힘과 용기와 동기(motivation)가 자연스럽게 나를 인도하겠는가? 우리도 이 상태로 그 자리에 가면 전혀 시대와 역사를 복음으로 바꿀 힘이 없는 나약하고 부정(不貞)한 세속적 그리스도인(worldly christians)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망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썩어가는 세상에 대해 그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하지 못한 것만이 책임이 아니라 (물론 그 역할 조차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그 썩어가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청년적 열심이 무엇을 향한 열심이어야 하는지를 연구하고 공부해야 한다. 하루 하루의 삶을 말씀에 비추어 생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 우리 삶의 목표와 소망으로 삼아야 한다. 말씀의 힘이 아니고는 우리는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그대로 타협하지 않고 지키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이
시대를 타락으로 이끄는 주범들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믿는 복음과 같은 복음을 믿었던 일제시대 청년 김교신이 부르짖었던 슬로건이 생각난다. ‘조선을 성서위에’. 우리는 이 시대와 민족과 역사를 성서위에 세우는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우리가 그 일을 감당하지 못할 때 이 시대는 기독교로 인해 멸망하게 될 것이다.

세살 반 딸래미와의 대화

민우 : 아빠, 민우 지금 자전거 타고 싶어요

아빠 : 민우야, 지금은 밖에 비가와서 자전거를 타러 나갈 수 없어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비가올때 민우가 자전거 타러 나가면 민우 옷이랑 머리랑 자전거랑 다 물에 젖어 척척해 지잖아.

민우 : 어, 왜 비가와?

아빠 : 음… 그건, 하늘의 구름에서 물들이 뭉쳐서 땅으로 내려오는 거예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만일 비가 땅에 오지 않으면, 나무들도 다 목말라 하고, 민우도 먹을 물도 없고 그렇게 되잖아.

민우 : 어, 왜요?

아빠 : 음… 그건 나무랑 사람들이랑 민우랑 다 물을 마셔야 살 수 있거든

민우 : 어, 왜요?

아빠 : 그런 나무랑 사람들이랑 민우랑 다 살아가는데 물이 필요하도록 만들어져 있어서 그래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어요.

민우 : 어 왜요?

아빠 : …

민우 : 아빠, 왜 그래요? 응?

아빠 : ….

민우 : 아빠아~ 왜 그래요?

아빠 :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며) 민우야 그럼 아빠가 민우 아이스크림 줄까?

민우 : (까맣게 잊고) 예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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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교훈

1. 최종 근원을 ‘하나님’이라고 그냥 말해버리는 것이 옳은 것이긴 하지만, 일종의 논리적 도피일수도 있다.

2.
그러나 최종 근원이 ‘하나님’ 이라는 것도 일종의 ‘전제’이다. 마지막에 “그냥 자연이 그런거야” 라는 자연주의적 대답을 한다고
해도 대화 흐름의 형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는 것이긴 하지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세계관의 기초 전제를 ‘하나님’으로 이야기하면서 언젠가 내 사랑스러운 딸이 스스로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인정하게 되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아빠로서 해야할 의무이다.

4. 세살 반짜리에게 과학과 신앙의 통합은 어려운 주제이다. 아이스크림이 훨씬 더 attractive 한 주제이다.

기독유학생의 엘리트주의

유학을 한다는 것,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 자신을 던져 더 나은 학업환경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험을
감수하는(risk-taking)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을 나온 유학생들 가운데에서 그러한 모험 감수(risk-taking)를
하고서도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나선, 적극적, 진취적, 모험적 엘리트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허들을 뛰어 넘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성향을 가진 유학생들이기에
그들이 보이는 삶의 방식과 태도도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 그것은 그들이 매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며 행동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학위’로 상징되어 질 수 있는 어떤 ‘성공’을 바라보지 않고서 대부분의 유학생들에게 이러한 모험 감수는
그 자체로 절대로 매력적인 것일 수 없다.

이러한 이들의 삶의 방식은 매우 자주 그리스도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든 유학 생활 도중에 만난 사람이건, 이미 유학을 오기 전에 그리스도인이었건 간에 이들의 신앙
행태는 매우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회심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질이나 성품
등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러한 기질과 성품도 분명히 ‘거듭나야’함을 생각해 볼 때 유학생들의 일반적인
신앙의 모습들은 한번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목표 지향적 자세의 문제

긍정적인 목표
지향적 자세의 모델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빌립보서 3:14)을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표 지향적인 자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목표가 어디에서
기인했느냐, 그리고 그 목표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거의 모든 기독 유학생들의 ‘목표’는 비기독 유학생들의
목표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저 ‘공부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허울 좋은 합리화를 한다는 것을 굳이 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목표 지향적 자세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목표를 학문적/직업적 성취로 설정해
놓고 있는 유학생들에게 신앙 훈련/신앙 교육의 필요를 인식시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유학생들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신앙 훈련이나 성경공부도 자신의 목표를이루는 장애물로 여기지기 십상이다.

2. 성공 지향적 자세의 문제


역시 소위 ‘성공’에의 기준과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자세의 건강함 여부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경우에도 세속적 가치관에 근거한 성공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성공 지향적 자세들이 유학생들과 같은 소위 ‘엘리트’ 그리스도인
사이에 편만한 듯 보인다.

대부분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노력(성실함)과 성공(성취)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성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분명 하지만, 모든 성실함이 언제나 성공으로
이끌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노력을
했음에도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러한 사람들은 실패자이자 낙오자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소위 ‘고지론’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기도와 믿음으로 담대히” 물리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3. 행동 지향적 자세의 문제

“40
일 금식기도 3회” 어느 ‘부흥사’의 명함에 이런 ‘경력’이 써 있었다고 한다. 40일 금식기도를 몇번 했다는 것이 신앙의
이력에 들어가는 것도 우습거니와, 어떤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일을 행했는지로 판단되는 모습은 더욱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소위 ‘엘리트’ 기독 유학생들 사이에 너무나도 많이 발견되는 모습들이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것들은 해야지’
하면서 여러 가지 신앙의 행동들을 시도해 보는 모습들. 그래서 흔히 ‘헌신’의 핵심을 ‘행함’에 두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너무나도 자주 눈에 뜨인다. 지역교회에서도 당장 이처럼 눈에 띄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여기기
마련이고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진정으로 이르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쉽게 지치게
되고, 고갈이 되고, 상처를 받게 된다.

금년 코스타의 주제를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로 잡은
것은 어찌보면 매우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유학생들의 성향에 매우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비정상적이고
비성경적인 (기독) 유학생들의 흐름이 이번 코스타 한번으로 완전히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다소 비상식적인 낙관적
기대이겠으나, 적어도 소수의 사람들이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유학생 문화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언급한 유학생들의 문화 속에서 상처를 받고 고갈된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풍성한
“치유”를 경험하는 일들이 있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크게 일하실 코스타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에 실렸던 글입니다.

텔레토비는 사탄적인가

세상에 사탄적이지 않은 것들이 있는가?!?!?!@#!$!@#%


화 속에서 뉴에이지, 혹은 사탄 문화의 성분을 구별해 내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재미있는 일입니다. 한때 저도 우리가 즐기는
컴퓨터 게임들이 얼마나 사탄적인가에 관하여 여기 저기에 기고를 하고, 사람들과 나누며 열을 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에 사탄적이지 않은 것들이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내에서 행해지는 많은 일들도 바로 이러한 사탄적인 요소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리는 어찌 되었건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으로 보아 ‘공중권세 잡은 자’가 아직은 지배하고 있는 그러나
그리스도의 주권이 “already but not yet” 선포된 이 세계에서 문화는 어찌되었건 ‘사탄적’인 것에 적어도 조금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 전체를 싸잡아서 ‘사탄적’이라고 말할수도 없는 일입니다.


령 아무 영화나, 어린이 프로그램이나, 아니면 음악, 미술작품 어떤 것이든지 뽑아 그 안의 ‘사탄적인’ 것들을 찾아내자고 해서
잘 ‘짜내면’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또다른 어린이용 프로그램인 세서미 스트리트에서
사탄적인 것을 찾아내라고 해 봅시다. 아마도 20가지 이상은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서미 스트리트가 사탄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문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낮은울타리 식의 연구와 분석이 분명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사탄적이고 저것도 뉴에이지고 식의 몰아세우기는 결국 기독교와 문화를 분리시켜 복음전파를 가로막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화속에 숨겨져 있는 잘못된 것을 조심스럽게 찾아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거친 후에 (정말,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많은
식자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채 어디에서 한마디 들은 것으로만 ‘대책없이 달려드는 무식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고개를 설래설래
흔듭니다.) 매우 절제된 언어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텔레토비에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어린이 프로그램보다 더 많이 있다고 여기질 수도 있습니다.(개인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텔레토비
자체를 ‘사탄적’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비성경적인 요소들에 대하여 수정을 통해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수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문화를 대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텔레토비로부터, 다른 어린이용 프로그램에서 보기 힘든 ‘성경적인 요소들’을 찾아보라고 해도 역시 많이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춘 점이라던가.)


리가 가진 복음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게되고, 청각장애인이 듣게되는… powerful한
복음입니다. 왜 이것도 사탄적이고 저것도 악마적이라며 피해야만 합니까? 적극적으로 세상문화의 좋은 점들을 인정하고 더 성경적인
모습이 될 수 있도록 연구,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살고있는 미국 보스턴 근교에는 Salem이라는 작은
도시가 있습니다. 미국 이민 초기에 마녀사냥이 이루어졌던 곳입니다.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몰아 끔찍한 방법으로 처형함으로
‘영적 순결함’을 찾고자 했던 그 장소가 지금은… ‘마녀 박물관’이 세워지고, 해마다 Haloween이 되면 각종 마녀 관련
행사들이 치루어지는 ‘마녀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시각으로 문화를 마녀로 몰아세울때, 문화는 영영 사탄의 것이 될 것입니다.

내면적 성전, 외면적 성전

오늘 성경공부 중에서 내면적 (보이지 않는) 성전과 외면적 (보이는) 성전의 비교가 계속 제 마음에 맴돌고 있습니다. 지금은 자정이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요.

요즈음은 자꾸만,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실 수 있는…
‘외형적 성전’, ‘율법’ 등등을 주셨을까.
그 수많은 종교적 규례를, 따라야할 법칙들, 하나님의 뜻을 ‘상징’하는 많은 물건과 예식들…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깨고자 그리도 노력하셨건만 결국 그것을 깨시지 못하시고 그 많은 종교적 규례들에 의해 오히려 accuse 되셔서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아니..
도대체 왜 그리 하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수 많은 종교적 규례들을 그리도 두셨을까.

요즈음 자꾸 드는 생각은요,
교육적 필요 때문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몇천년의 시간을 두고서 끊임없이 성전, 제사, 율법 등을 강조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기를 원하셨다는 거지요.
가령 십일조를 꼬박 꼬박 내면서, 내 수입과 재산의 모든 것이 하나님 것임을 계속 상기하고 그렇게 살라는 의미에서 십일조 규례를 주신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저는 사실… 개인적으로 그 율법적 종교적 기독교가 복음의 생명성을 죽이는 주범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때로 지나친 반형식론적 입장을 취해왔던 것 같습니다.

예배로 마음으로 드리는게 중요하지, 주일 예배라는 형식을 그리 중요하지 않다.
십일조도 내 소유의 전체가 하나님 것임을 인정하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십일조라는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기도도 하나님과 대화하고 내 마음을 올려드리는 것이 중요하지 어떤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커다란 교.만. 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요즈음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제가 그런 형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을만큼 성숙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배의 형식을 무시할만큼 예배가 제 살을 지배하는 사람도 아니고,
십일조라는 형식을 무시할만큼 제 재물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사람도 아니고,
기도의 형식을 무시할만큼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속에 살고 있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

어린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더 엄하게, 많은 rule들에 의해 control하지만
그 아이가 장성해 감에 따라 밤 귀가 시간도 점점 늦추어 주고,
때로는 부모의 credit card를 쓰게 허락해주기도 하고,
일정 나이가 지나면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는 것도 허락하는 것 처럼…

어쩌면 제 신앙의 성숙(?)에 따라 때로는 불필요해보이는 형식을 제게 일부러 덧씌울 필요가 있을 수도 있는 것인데…
너무도 그것을 무시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을을 했었습니다.

글쎄요…
정말 어떤 의미에선… 이젠 ‘짬밥’도 늘어서…
제가 배운대로 혹은 성경대로 설교가 되지 않으면 설교 자체에 귀를 닫아버리고…
어떤 사람이 성경공부 시간에 엉뚱한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뒤엎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그런 바리새인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듭니다.

정말 빌립보서의 말씀 글자 그대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이것을 뼈속 깊이 새기고 사는 것이 참 쉽지 않네요.

겸손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정직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사랑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절제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오래 참지 못하는 것으로 보나,
온유하지 못한 것으로 보나,

여러가지로 보아…
적어도 제겐 아직은 신앙생활의 많은 부분에서 ‘외면적 성전’이 때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2004년 1월,
http://www.gatebiblestudy.org 보드에 쓴 글

성전미문의 거지

오늘 QT 본문은 사도행전 3장 전반부.
성전 미문에 앉은뱅이 거지를 베드로와 요한이 ‘금과 은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는 이야기.

그런데,
정말 graduate student 로서의 내가 성전 미문의 거지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주위에 ‘잘나가는’ 사람들이 (우리 지도교수며, 우리 분야의 다른 사람등) 나를 바라보며 지나갈 때,
어떻게든 그 사람들의 attention을 끌어보려고 애쓰는…
좋은 논문을 쓴다, 학회에서 좋은 발표를 한다, 결과를 잘 낸다…. 하는 등의 framework에 가두어져서…

성전 미문에서 멀쩡하게 걸어가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하던 앉은뱅이 거지,
논문도 쓰고 학회 발표도 하면서 이 분야의 잘 나가는 사람들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내 결과를 좀 봐주세요’ 하고 애걸하는 권오승.

성전 미문 거지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돈을 좀 더 받아 볼까 하는 것,
대학원생으로서의 내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명예/돈을 더 받아볼까 하는 것.

그렇지만,
성전 미문의 거지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금과 은’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것’ 이었듯이,
내게도 정말 필요한 것은 ‘논문 몇편, 사람들의 관심사, 좋은 결과’ 등등이 아니고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는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음.

실제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전 미문의 거지 신세를 벗어나 자유롭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는 건데, 그래서 거지가 할 수 있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은 일을 더 훌륭하게 할 수 있는데…
나는 겨우 사람들의 관심이나 더 끌어보겠다고 버둥버둥 하고 있구나….

그렇게 말씀 묵상을 하고….
지도교수를 만나서 이야기 하다가… 오늘 엄청 깨졌다. ^^ 그러니 금방 엄청 비참해 지더군.

정말 나는 아직 먼 것같다…. 그래도 점점 나아지겠지. ^^

Sometimes it’s slow going, but there is knowing
that someday perfect I will be.~

Little by little bit everyday
Little by little bit everyday
Jesus is changing me.
Oh Yes He’s chaning me

2003년 9월

0일 0시 – play

0일, 0시

나오는 이 : 혁준,
혁준이의 아버지,
혁준이의 어머니.
우편 배달부 & 효과

때 : 0일 0시


대는 그리 크지 않은 소극장이 좋다. 무대 왼쪽은 혁준이의 기숙사 방, 무대 오른쪽은 혁준이 부모의 집이다. 각각의 집에는
전화가 하나씩 놓여 있다. 조명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으로 하고, 특히, 양쪽 전화 근처에만 조명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러한 모든 소품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냥 있는 시늉만 내어도 좋다. 효과음도 사람 입으로 낼 수 있다.
처음, 무대는 무척 어둡다. 차츰 무대 밝아지면 무대 왼쪽에서 혁준, 등장한다.

혁 준 : (시계를 보며 무대로 걸어 나온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부모님께 전화드릴 시간이네. 잠깐, 전화하기 전에 준비부터 해야지.
(주머니에서 전화할 내용이 적혀 있는 종이를 꺼낸다) 옳지, 여기 있구나. 자, 번호가… (다이얼을 돌린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 부모님 집쪽에서 난다. 무대 오른쪽 차차 밝아 지며 부모님 등장한다. 어머니, 전화를 받고 아버지 곁에 선다.

어머니 : (수화기를 들며) 여보세요.
혁 준 : (종이에 쓰여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억양도 없고 감정도 없이 읽는다)
‘잠들기 전에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비오며
내가 만일 오늘 밤 잠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나를 슬퍼해 주십시오, 나를 위하여’
어머니 : (반가운 듯) 얘, 혁준이구나.
혁 준 : (전화를 귾고,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어머니 : 얘, 얘… 여보세요? (실망하여 전화를 끊는다)
아버지 : 혁준이가 뭐래?
어머니 : 모르겠어요. 뭐라고 혼자 중얼거리더니 그냥 전화를 끊어 버리네요.
아버지 : 그래? 참 이상하네…

아버지, 어머니 퇴장. 무대 암전
다시 무대 왼쪽 밝아지면 혁준이 등장

혁 준 : 오늘도 벌써 전화할 시간이네
(다이얼을 돌리며) 이 전화 받으면 부모님이 기뻐 하시겠지.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 부모님 집쪽에서 난다. 무대 오른쪽 차차 밝아 지며 부모님 등장한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전화를 받는다.

아버지 : (수화기를 들며) 아, 여보세요.
혁 준 : (처음과 같은 식으로 전화 대화문을 읽는다)
‘잠들기 전에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비오며
내가 만일 오늘 밤 잠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나를 슬퍼해 주십시오, 나를 위하여’
아버지 : (반가와서) 얘, 혁준이구나. 잠깐만 기다려라.
(뒤를 돌아보며) 여보, 혁준이 한테서 전화 왔어.
혁 준 : (전화 끊고 퇴장한다)
어머니 : (달려 나오며) 그래요? 뭐래요?
아버지 : 글쎄, 지금 막 왔어.
(수화기를 다시 들며) 얘, 혁준아.

뚜- 뚜- 뚜- 하는 소리

아버지 : 얘, 얘? 혁준아? 여보세요, 여보세요.
(고개를 갸우뚱하며 수화기를 놓는다) 이상하네.
어머니 : 혁준이가 뭐래요?
아버지 : 몰라.
어머니 : 네?
아버지 : 그냥 끊었어.
어머니 : 지난번 같이 혼자서만 중얼거렸나요?
아버지 : 그래, 혼자서만 중얼 거렸어. 이상하네…
어머니 : 글쎄요…

아버지, 어머니, 퇴장하고 무대는 다시 암전.
무대 다시 밝아지면 혁준, 등장.

혁 준 : 오늘도 전화를 해야지. (전화 다이얼을 돌린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벨 소리 부모님 집쪽에서 난다. 무대 오른쪽 차차 밝아 지며 부모님 등장한다. 어머니, 전화를 받고 아버지 곁에 선다.

어머니 : (수화기를 들며) 여보세요?
혁 준 : (노래를 흥얼거리며 있다가 어머니가 전화를 받자 갑자기 표정과 말투가 굳어진다)
‘잠들기 전에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비오며
내가 만일 오늘 밤 잠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면
나를 슬퍼해 주십시오, 나를 위하여’
어머니 : (이번에는 혁준이가 전화 내용을 읽고 있는 도중에도 막 부른다)
얘, 혁준아. 혁준아. 잠깐만 혁준아.
혁 준 : (일방적으로 전화를 끝낸 뒤 퇴장)
어머니 : (아버지를 보며) 또 그 전화예요.
아버지 : 거참…
어머니 : (갑자기 생각난 듯) 그래, 우리 그렇게 합시다.
아버지 : 어떻게?
어머니 : 혁준이에게 편지를 쓰는 거예요. 우리와 이야기를 하자고.
아버지 : 그거 좋은 생각인데. 지금 씁시다.
아버지 : (종이에 쓰는 시늉하며) 사랑하는 아들 혁준아
어머니 : (역시 종이에 쓰는 시늉하며) 우리는 너의 사정이 어떤지 알고 싶구나.
아버지, 어머니 : (약간 큰 소리로) 제발, 우리와 이야기를 좀 하자!
아버지 : 아버지,
어머니 : 어머니가 씀.
아버지 : (편지를 접어서 봉투에 넣는다. 이때 우편 배달부 등장한다)
배달부 : (아버지로 부터 편지를 받아서 혁준이네 집까지 배달해 준다)
(무대를 2바퀴 정도 돌며 자전거 타는 시늉을 한다) 따르릉, 따르릉…
(혁준이에게 도착해서 편지를 전해준다) 편지요!
(무대 밖으로 퇴장)
혁 준 : (편지를 뜯어 읽어 보고) 이 편지는 내 성실한 전화 내용을 흩어 놓을지도 몰라. 그냥 내가 하던 대로 전화를 해야지.
(다시 수화기를 들고 전화를 건다)

따르릉 소리.

어머니 : 혁준이 전화 인가봐.
아버지 : 받아봐요.
어머지 : (전화를 받으며) 여보세요.
혁 준 : (이번에는 전화 대화문을 보지 않고 외워서 한다)
잠들기 전에 내가 당신을 부릅니다.
언제나 건강 하시길 비오며
내가 만일 오늘 밤 …
어머니 : 얘, 혁준아, 우리는 너의 사정을 알고 싶구나. 제발, 우리와 이야기를 좀 하자!
혁 준 : 내가 만일 오늘 밤, 내가 만일 오늘 밤, 오늘 밤, 오늘 밤…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이,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는 바람에 까먹었잖아.
아버지 : (어머니가 들고 있는 전화를 뺏어 들고) 얘, 혁준아, 혁준아.
혁 준 : 오늘밤, 오늘밤,… 에이 모르겠다.
(전화를 끊는다) 에이, 오늘 전화는 망쳤네. (퇴장)
아버지 : (관객을 보며) 참말로 안된 일이예요!
우리 혁준이는 전화를 할 때 꼭 하나님에게 기도하듯이 한단 말이예요…
암전…

@ 원래 이 글은 제가 어떤 책에서 읽은 것을 가지고 만든 것인데 그 원작자가 기억이 안나네요…

나는 흑인들이 싫다!?

흑인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나는 흑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엉덩이 아래쪽에 이상하게 걸치는 헐렁한 바지에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도 싫고, 도대체
알아듣기 힘든 억양으로 하는 영어도 듣기 싫다. 한 무리의 흑인들이 번쩍번쩍 광을 낸 차에 우루루 타서, 쿵쿵 하는 베이스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이상한 손 모양을 하면서 고개를 흔들며 랩(rap)을 따라 하는 모습도 싫고, 자기들 끼리 만났을 때
Yo- 어쩌고 해 가면서 복잡하고 이상한 악수를 하는 모습도 싫다. 차를 타고 가다가 흑인들이 길거리에 주루루 서 있는 길을
지나면, 반사적으로 차 문을 잠그게 되고, 그저 그들과 눈길이 마주치는 것이 싫어진다. 컴컴한 골목길에서 어쩌다 흑인들을 만나면
얼른 그 자리를 피하거나 삥 돌아가기 일수이다.

그런데, 지난 달에 내가 출석하는 미국 교회에 어떤 흑인
목사님이 와서 설교 하셨다. 보스턴 근교의 어떤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바로 내가
싫어하는 바로 그 흑인 억양으로 내내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무지 알아듣기도 힘들게, 설교 내내 이쪽 저쪽을 막 돌아다니면서,
흑인 특유의 큰 몸동작을 섞어서 하는 그런 설교였다. 물론 내게 무척이나 그 모습이 거북하게 보였다. 그 가난한 동네에서
목회하는 목사가 그렇게 번지르르한 정장을 떨쳐입고 설교하는 모습도 위선적으로 보였고, 비교적 논리적이고 정리된 설교에 익숙한
나로서는 좌충우돌 뛰어다니며 감정만을 북돋우는 것 같은 모습도 눈에 거슬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설교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그 내용에 내가 깊이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날 때 즈음엔 눈물까지 글썽거려가며 그 설교에 공감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쨌든, 내가 흑인들을 다짜고짜 싫어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흑인 차별과 호남 차별

나는 전라도 사람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얼마든지 전라도 사람이 아닐 수 있는 전라도 사람이다. 내 아버지께서 전북
출신이시긴 하지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내가 거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에 잠깐 전주에 산 이후엔 늘 서울에 살았다.
내 말투에 전라도 사투리는 전혀 있지 않고, 오히려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직장생활을 대전에서 한 탓에 약간 충청도 사투리가 한때
내 말 투에서 배어 나왔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 때였던가, 본적도 서울로 아예 옮겼기 때문에 무슨 나의 공식적인 기록에서
전라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학교 때 이후 억척스럽게 스스로를 전라도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고 다녔다. 국민학교 2년 반을 전주에서 다닌 연고로, 어쩌다 전주 출신 사람을 만나면 좀 오버를 해가면서 반가워 했었다.

그렇게 했던 유일한 이유는, 중학교 1학년때 어른들로부터 들어서 알게된 호남 차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단지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기업에서 승진을 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 박정희 정권 이후 계속된 영남 정권이 계속 정치적인 이유로 호남 차별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등은 그래도 이를 악물고 들어줄만 했다. 그런데, ‘누가 돈의 떼먹고 달아났는데 호남사람이더라.’. ‘호남
사람하고는 사돈도 맺으면 안된다.’, ‘호남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종족이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들을 땐 아니 도대체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왔다. 거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은 모멸감까지 느꼈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호남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반쪽 호남 사람으로서 스스로 호남인임을 거부하는 것은 괜히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나름대로 호남인이
되어 성공해 보겠다는 어줍잖은 객기를 부리고 싶어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대구 출신 친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늘 나는 스스로 마치 호남인의 변호인이라도 된 양 떠들고 다녔다.

그런데, 왜 이렇게 호남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있는 것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최근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대표가 쓴 ‘전라도 혐오증’ 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호남인들에 대한 차별, 아니 차별을 넘어 혐오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호남인들이 가난하다는데 기인한다는 것이다.

전라도 혐오증’ 의 원인은 딱 하나, 전라도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돈 없고 ‘빽’ 없고 배운 것 없이 객지에 가서 그
사회의 맨 밑바닥 일을 하는 사람 들은, 그들이 특정 지역 출신이든 특정한 인종 집단이든 멸시를 받게 되어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70년대와 80년대의 우리나라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는 목욕탕
때밀이,작부,깡패,도둑놈,식모,사기꾼,노가다,노점상 등은 거의 예외없이 전라도 사투리를 했다. 시나리오 작가와 프로듀서가 전라도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실제 사회가 그랬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직업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주로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했다면
그 드라마는 ‘리얼리티가 없다’는 핀잔을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높으신 분들’께서 호통을 쳐서 당장 ‘바로’ 잡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 셋 가운데 하나가 사는 수도권에서 이런 밑바닥 직업을 거의 다 전라도 사람들이 하는데, 그들이 멸시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서울에 사는 경상도 사람들이 (다른 지역 출신도 마찬가지이지만) 보는 전라도 사람 들은 가난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행색이
초라하고, 몇 푼 되지도 않는 돈 가지고 악착같이 다투고, 대낮에도 술먹고 다니고…, 한마디로 말해서 함께 어울 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향에 가서 ‘그런 전라도 사람’ 들에 대한 험담을 주저없이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향에 뿌리박고 사는
전라도 사람들이 어떤지는 전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자기네가 본 전라도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가난한지를 따져보지도
않는다.

다시, 내가 흑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돌아가 본다. 과연 내가 흑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은 무엇 때문인가? 100 여년 이상 지속된 끔찍한 노예제도로부터 벗어나서 1900년 대 초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외형적으로나마 ‘시민’으로 대접받게 된 이들. 원래 그들을 무자비하게 ‘포획’해 온 그 땅 아프리카는 아직도 정치적 경제적
낙후성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가장 후진한 모습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반복되는 사회적 차별과 학대로 인해 어쩌면 스스로
당당한 시민으로 설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던 길고 긴 지난 역사. 이런 속에서 이들이 구조적으로 가지게 될 수 밖에 없었던
빈곤과 낮은 교육이 이들에 대한 사회적 시각을 더 악화시켰고, 나 같이 흑인들에 대해 별 생각 없이 대했던 아시아인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난 아직 단 한명의 흑인 친구도 사귀어 본 일이 없다. 정말 마음과 마음을 터 놓고 흑인과
이야기 해 본적이 없다. 호남 차별에 대해 주먹을 불끈쥐고 분개하던 “자칭 의인”은 어느덧 여기서 이번에는 가해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경상도 여자와 결혼한 전라도 남자

내 아내는 골수 경상도 출신이다. (사실 내 아내도
반쪽짜리 경상도 여자다. 왜냐하면 아주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으니까.) 내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모두 대구지역 출신이시고,
아주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신다. 처음 결혼을 해선, 처가 식구들이 쓰시는 경상도 사투리를 내 머리 속에서 ‘번역’해서
이해하는데 꽤 애를 먹었었다. 이번 대선에도 내 처가 식구들은 대부분 두말 않고 “기호 1번”을 찍었다고 한다. 내 친가쪽
식구들이 두말 않고 “기호 2번”을 찍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름래도 반쪽짜리 전라도 청년으로서 호남 차별에 대해
분개했던 것, 흑인들에 대해 매우 불합리한 가학적 편견을 가졌던 것, 그리고 이제 반쪽짜리 경상도 아가씨를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게 된 것. 마음을 열고 편견 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과, 내 불합리하고도 몰상식한 편견을
비교해 보면서 스스로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게 된다.

새해엔, 함께 복음의 감격을 나눌 수 있는, 멋진 흑인 친구하나 사귀어 봤으면 좋겠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3년 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싼타마스!? 그리스마스?!

지난 주말, 결혼한지 4년만에 처음으로 집에 크리스마스 트리를 갖게 되었다. 그동안 살고 있는 집이 워낙 좁아 트리를 놓을 자리도 없었고, 그리 비싼 것은 아니지만 트리를 장만할 경제적 여유도 없었을 뿐 아니라 결혼을 한지 1년만에 낳은 – 이제 세돌이 막 된 – 딸 아이의 안전을 위해서도 예수님 생일을 축하하는 장식을 쉽게 집안에 들여놓기 어려웠던 터였다. 그러나 금년엔 이제는 조금씩 사리분별을 하는 아이의 정서를 위해서도 예수님 생일을 더욱 드러나게 기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조그마한 인공 소나무 하나를 사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장식품들이 문제였다. 이제는 잠자리에 들기 전 눈을 꼭 감고 기도하는 훈련을 시작한 딸아이에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신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마련한 크리스마스 트리인 만큼 정말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장식들을 달고 싶었다. 반드시 “말구유에 놓인 아기 예수님”들로만 장식을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크리스마스 정신(spirit)에 맞는 장식을 하고 싶었다. 하나씩 장식을 걸며,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는 세살박이에게 크리스마스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장식품들을 하기 위해 가까운 백화점이나 할인 매장등에 갔을 때 우리는 정말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나타내는 장식을 찾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저 반짝이는 전구들, 가짜 눈, 반짝거리는 금줄, 눈사람, 산타 클로스, 루돌프, 호두까기 인형 등은 어느 곳을 가든지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나 정말 예수님의 탄생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장식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그나마 비슷한 것이라곤, 크리스마스 트리의 맨 꼭대기에 다는 별과, 일부 천사의 날개(?)를 단 눈사람 장식들이 전부였다.

결국
우리는 제법 떨어진, 그러나 제일 가까운, 기독교 서점에 가서 아주 빈약한 장식 몇 개를 살 수 밖에 없었다. Joy 라고 크게 써 있는 반짝이가 박혀있는 글자 장식과 천사 장식 몇 개… 그 가운데 내 시선을 붙들었던 장식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가 한쪽에 있고, 그 반대 쪽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트리를 받치고 있는 장식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은채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 하고 있지만 사실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다는 뜻으로 생각되었다.
비교적 단순하고 작은 장식이었지만, 나는 그 장식을 보며 눈물이 핑돌았다. 이제는 아무도 축하하지 않는 예수님의 생일에, 다른 화려한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의 참 의미를 지는 장식을 찾지 못하고 이렇게 구석의 후미진 기독교 서점의 한 구석에서라야 이렇게 작은 장식을 찾을 수 있는 현실. 어쩌면 산타클로스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고, 정작 크리스마스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구석에서 찾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이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내 자신과 내가 속한 공동체를 돌아보아도 그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꿈꾸며 기대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가 되면 같이 성경공부를 하는 사람들끼리 따뜻하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고,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말 밥통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에 흠뻑 젖어보겠다는 결심은 별로 하지 않고 있구나… 하는 생각. 교회에서도 함께 윷놀이를 하긴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것에 대한 감격으로 함께 끌어안으며 감격해 하고 기뻐하는 일들은 별로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

어느덧 모든 사람들에게 ‘싼타마스’가 되어버린 이번 ‘크리스마스’엔, 정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신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면서 기뻐해보고 싶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뒤집으시면서 (upside-down) 태어나신 왕께 내가 드릴 수 있는 감사를 마음껏 드리는 크리스마스를 갖고 싶다.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내 사랑하는 딸이 후에 성인이 된 후 기억하는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의 모습이, 다른 사람이 아닌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며 감사하는 것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