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USA-2007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KOSTA를 섬기다 보면, “KOSTA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KOSTA를 만난지 12년째가 되는 필자로서도 어떤 의미에서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KOSTA란 무엇일까, 무엇이 KOSTA를 KOSTA 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위해 딱딱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넘기며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여러가지 내용을 정리해보았을때 사람들이 흔히 KOSTA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매우 다른 KOSTA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KOSTA는 집회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서의 KOSTA

많은 사람들이 KOSTA를 여름에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에서 여는 집회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KOSTA가 원래 추구하고 있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물론
KOSTA는 집회를 포함한다. 그러나 KOSTA는 집회라기 보다는 KOSTA의 핵심가치(core value)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만드는 운동(movement)이다. KOSTA가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 규정(describe)하는 것은 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다고 우리가 믿는 소망의 내용때문이다. 만일 KOSTA가 많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일회적인
집회를 통해 소부흥(mini-revival)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KOSTA는 집회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KOSTA가 꿈꾸는 것은 KOSTA에 참여한 청년-학생들이, (1) KOSTA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에 동의하게
되어 (2) 그 핵심 가치를 가지고 각자의 삶에 살 뿐 아니라 (3) 그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4) 그러한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고 (5)
그들이 몸을 담고 속해 살고 있는 피조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데 여름에모여서
함께 하는 집회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KOSTA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KOSTA, 2007년에는

집회를 앞두고 왜 갑자기 집회가 아님을
강조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금년 주제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금년
KOSTA/USA의 주제는 “이 세대롤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이다. ‘변화(transformation)’가 금년의
키워드이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변화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성령의 일하심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을 조차도 대량생산하고 싶어하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풍조가 덕(virtue)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집회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완전한(complete) 변화를
경험할 수 있으면 참 감사한 일이겠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변화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집회를 통해서, 코스탄들이 진정한 변화가 얼마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가
하는 것을 깊이 인식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진정한 변화가 어떤 이들에게는 시작되는, 어떤 이들에게는 한단계 큰
도약을 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새롭게 갱신(renew)되는 일들이 있기를 기도한다.

건강한 혼란과 무질서를 기대하자

집회를 전후하여 이번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의 집회에 참석하는 코스탄들에게는, 결단의 기도 이전에, 뜨거운 찬양 이전에, 감격이 있는 말씀 이전에 올해의 주제를
붙들고 고민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고민의 시작은 바로 혼란과 시작되어야 한다. 혼란은 무질서이다. 혼란은
불확실성이다. 혼란은 미확정이다. 혼란의 상태에서는 아무런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혼란은 좌절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그런 혼란이 필요하다. 이런 혼란의 상태는 이 세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들 자신의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한 첫 삽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변화의 열매를 맺기 위한 씨앗이 되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창세기 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니)의 혼란이 있어야 1:3 이후의 창조의 열매가 있는 것이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열매와 결단으로 연결되는 집회가 되었으면 한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마음과 창조와 질서로 끝맺음을 하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넘어서는 집회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가지 내용들이
그대로 이루어 진다 하더라도 그저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들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우리가 예상한 것들만이 일어나는 집회라면 그것은
진정 우리가 바라는 집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의 예측과 생각이
모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을 너머서 더 크게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에대한 기대감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이 집회의
주인공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진정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를 갈망하고,
그러한 변화에의 길에 들어서서, 다른 이들과 전 피조세계를 그 변화로 이끌어내는 KOSTA/USA-2007를 향한 하나님의
바람이, 이번 집회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어나길 기도한다.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여성의 고백

당시 70대 였던 그 여성은 평생동안 강한 동성애적 성향으로 인해 고민해 왔다.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바꾸려고 온갖 시도를 해 보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녀가 칠스트롬 감독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는 어른이 된 이후 평생 제가 손을 잡을 수 있고… 포옹할 수 있는 특별한 누군가를 갈망해 왔습니다. 동성애 반대자들의 기대
사항이… 얼마나 잔인한지 알게 되었을 때, 저는 기대고 마음껏 울 수 있는 자애로운 어깨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런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천국에 가면 오랫동안 주님의 품에 안겨 그 동안 허락되지 않았던 것을 보상받고
싶다는 생각이 때때로 떠오르곤 합니다. 한 평생은 사랑만큼이나 우리가 간절히 갈망하는 어떤 것을 기다리기엔 참으로 기나긴
세월입니다.

나는 이 여성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녀는 내가 존경하는 성인들의 반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녀가 오랜 세월 참고 견뎌야 했던 동성애에 대한 지각없는 비평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믿음에 기초한 그녀의
인내심과 주님의 포옹에 대한 갈망을 묵상할 때면 나는 내 자신의 여정에 필요한 힘을 얻게 된다. 내가 천국에 가게되면 그녀를
안아주고 싶다. 그녀을 통하여 동성애를 바라보는 내 태도가 더욱 부드럽고 신중해졌기 때문이다.

이상,
리차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 에서 따옵니다.
7장 시민교양과 성 pp.106-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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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이의 생각

때로,
아니 너무나도 자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잔인한 정죄와 저주를 비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혹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퍼부어 놓고는…
자신의 믿음 좋음을 자랑합니다.

물론,
저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사람 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 Not to Be Conformed But to Be Transformed (KOSTA 2007 주제문)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Not to be conformed but to be
transformed 

평양 대부흥 100주년을 맞이하는 2007, 우리 민족은 100 전과는 비슷하면 서도 다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분단된 조국은 세계 여러 나라의 무자비한 세력 다툼과 세계화의 거센 바람에 둘러싸여 있고이로 인해 조국과 민족의 생존과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오늘날 우리 민족은 평양 대부흥 무렵의 어두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고난의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적인 시각으로 우리가 처한 상황을 살펴보면우리가 두려워해야 것은 시대 우리 청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비복음적 가치관임을 깨달을 있다.  자본주의적 물질주의는 이미 세계를 제패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정복해 버린 하다.
세속화와 이분법(dualism)적인 사고, 그리고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도도한 물결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까지도 삼키려 들고 있다.
통계 숫자상의 그리스도인은 많다고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이는 많지 않다.  능력과 비전은 많이 이야기되지만, 경건의 진정한 능력, 욕망으로 오염되지 않은 참된 비전은 찾아 보기 어렵다.  눈에 보이는 교회는 위엄과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고, 존경의 대상이 아닌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이제 이상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민족의 희망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물질적 풍요는 시대 청년들의 영적 벌거벗음을 가리고 진리를 향한 간절함을 앗아가 버렸다.
세계화와 무한 경쟁의 도전 앞에 시대의 청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포기한 , 앞의 생존을 위한 두려움의 노예, 또는 끝없는 탐욕의 노예로 팔려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진정한 위협은 주변 국가들과의 정치적, 경제적 긴장이 아니다.
조국의 정치 경제적 불안정이나 분단 상황 속에서의 위협도 아니다이러한 것들이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짓누르고 두렵게 하지만, 우리가 싸워야할 주된 전투는 아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우리의 마음을 두어 싸워야할 전투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그릇된 가치관과의 싸움이다.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진리를 알지만 진리대로 살기보다는 세상의 가치관에 힘없이 끌려가도록 만드는, 어둠의 세력과의 싸움이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우리 민족과 한인 디아스포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왜곡된 가치관에 의해 지배받고 신음하는 모든 이들의 문제이다.

어둠의 세력과 싸울 사람들은 누구인가?
누가 진리로 시대의 흐름에 도전하며 시대의 헛된 모습들을 폭로하고 진리를 삶으로 드러내보일 것인가복음이 예배당 안에만이 아니라 세상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보여줄 사람들은 누구인가?
무너지지 않을 듯이 견고해보이는 세상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것을 무너뜨릴 사람들을 어디에서 찾을 있을까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세대를 지배하고 있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칠 능력이 되고, 유일한 소망이 된다는 것을 보여줄 사람들은 어디에 있는가?

너희는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로마서 12:2)

희망을 잃어버린 시대에서, 비복음적 시대정신에 정복당한 세대에서 다시 진정한 희망을 외칠 있는 유일한 사람들, 그들은 바로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진리를 경험한 사람들이요,
진리로 인해 변화된(transformed) 사람들이며, 진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세속과 경건의 이중적인 삶을 사는 종교인이 아닌 성령과 진리로 인해 온전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다절대진리에 든든히 서서 세상을 거스를 있는 능력의 그리스도인들이다.
세상이 감당할 없는 사람들이다하나님은 이들을 사용하셔서 세대를 꾸짖고 심판하며 당신의 공의를 드러내실 것이다.
이들이 있는 곳에 강력한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 견고해 보이는 어둠의 세력이 무너지는 기적이 임할 것이다.

우리는 KOSTA 운동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한다.
우리에게 우리 스스로와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엎드리기를 소망한다.
100년이 넘는 한국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령께서는, 우리 민족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분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은혜를 받도록 일하셨다.
이제는 우리 민족과 한인 디아스포라를 예수의 참된 제자로 변화시켜서 시대, 세계를 어둠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를 간구한다.
그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 민족 아니라 세계를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품고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소망한다진리에 의해 온전히 변화된 우리 한민족 디아스포라 청년들이 세상을 본받지 않고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세상을 복음으로 바꾸어 나가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KOSTA 2007에서 시작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