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미팅

지난 이틀동안, 회사에서 아주 긴~ 미팅을 했다.

현재 하고 있는 project의 여러 document를 함께 모으는 작업이었는데,

미국 서부 출근시간부터, 중국 베이징의 퇴근시간까지 이어지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긴 미팅이 이틀 연속 있었다.

conference call line을 열어놓고, computer 화면을 함께 보면서, 미팅을 했다.

다행히도, 나는 저녁 7~8시 정도에는 퇴근을 할 수 있었지만, 

집에 온 이후에도 우리 시간으로 자정 정도까지는 계속 이메일이 오갔다.

뭐 이런 하루를 보내는 것이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므로… 뭐 그러려니… 했는데.

어제 저녁쯤 되니, 다들 피곤해하기도 하고… 지치기도 했다.

그때 우리 그룹의 한 사람이 다음의 video를 보여주어서 함께 크게 웃었다. ^^

휴가와 출장의 차이

출장을 가면,

뭐 그래도 아주 싸구려 호텔에는 잘 묵지 않는다.

대충 힐튼, 웨스틴, 하야트 수준에 묵게 된다. 별네개 정도.

그리고,

식사도 시간이 부족해서 호텔에서 먹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한끼에 40-50불짜리 저녁을 먹는 일도 허다하다. 

(소위 ‘호텔부페’를 혼자 가서 먹는…)

뭐 식사라기 보다는 그저 정신없이 입에 쳐 넣고는 나와서 일을 하는… 그런…

그렇게 출장을 가면,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밤 늦게까지 일만하다가 오게 되고,

주변의 경치라던가 뭐 그런건 아예 볼 생각도 못할 때가 많다.

이번 연초에,

짧게 시간을 내어서 집에서 약간 떨어진 캘리포니아 해안의 작은 마을에 가서 쉬다 왔다.

우리 세 여인 (아내, 딸, 그리고 하이디까지.. ㅎㅎ)과 함께 정말 쉬다 왔다.

이렇게 가 보니,

드디어 경치가 눈에 들어왔다.

그저 오가는 길에 사먹은 subway 샌드위치의 맛이 느껴졌다.

그저 저렴한 가격의 pet-friendly inn에서 자면서도, 침대의 편안함이 느껴졌다.

사랑

1.
사랑을 더 잘 하는 성품의 사람은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이 더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그렇지만 분명, 나는 그런 사람은 아니다. -.-;

2.
젊은 사람들의 ‘알콩달콩’ 식 사랑은 참 예쁘다.
그렇지만, 사랑을 그런 ‘알콩달콩’으로 이해하고 한정하는 가벼움은 정말 참을 수 없다.
내가 그런 알콩당콩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거라고?
뭐 그런지도… 그러나, 사랑이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내 주장으로부터는 후퇴할 수 없다.

3.
연민은, 대상이 나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사랑은, 대상이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래서 사랑은 연민에 비해 더 어렵다.
나는 참 오랫동안 연민을 사랑이라고 착각했었다.
지금도 연민은 훨씬 더 잘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데, 사랑은 잘 이해도 안되고 공감도 안된다.

4.
연민은, 대상을 나와 같은 모습으로 이끄는 행위에 가깝다면,
사랑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행위에 가깝다.
대상이 변화할것을 전제로 하는 사랑은, 기본적으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5.
사랑에는 희생이 동반되지만, 희생이 곧 사랑은 아니다.
때로 희생은, 사랑의 대치품으로, 혹은 사랑을 피하는 방법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희생과 집착은 함께 갈 수 있지만, 사랑과 집착은 함께 갈 수 없다.

6.
Contract의 기본 정신은, “I will be loyal as long as you are loyal”  이다.
Covenant의 기본 정신은, “I will be loyal even when you are not” 이다.
결혼은 Covenant일까, Contract 일까?
결혼이 완전한 covenant이라는 것에 선뜻 한표를 던지기에는 약간 주저하게 되는 측면이 있지만…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가장 covenant에 가까운 것은 부부관계가 아닐까 싶다.

7.
결혼 17주년,
아직 사랑을 배워나가고 있는 부족한 사람의 사랑에 대한 짧은 중간 요약이다.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과연 누구신건가?

하나님께 여쭙고 싶은 것이 늘 많다.
그런데, 요즘은 특별히 더 많이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분이시냐 하는 질문이다.

음…
질문이 너무 추상적인 것 같은데…
조금 더 풀어서 쓰자면 이렇다.

태어나서 20년동안 ‘모태출석교인’으로 살았지만, 하나님과의 encounter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그후 25년동안, 하는 하나님을 아주 깊게, 진하게 만나왔다.

소위 ‘회심’의 경험을 하면서 내 모든 세상이 뒤집히는 경험을 했고,
그 후에도 때로는 점진적으로, 그러나 더 중요하게는 대단히 disruptive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나를 만나주셨다.

그런데,
내가 경험했던 그 하나님의 경험이 너무나 커서,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그 경험의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내가 ‘만난’ 하나님의 모습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러가지 공부도 하고, 나름대로 연구도 하면서…
그 ‘내가 만난 하나님’을 객관화하고 그 설명을 체계화하는 과정을 겪어 왔지만….
여전히, 내가 만난 하나님은, 그렇게 쉽게 설명될 수 있는 분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내 경험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 내가 하나님을 경험한 것 같이 하나님을 경험하지는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것은,
뭐 소위 ‘성령체험’을 한다거나, ‘신비체험’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내가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 속에서 일종의 ‘신비체험’같은 것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대단히 부분적이다.

나의, 하나님에대한 실존적 경험…
그렇게 내가 만난 그 하나님은 과연 누구신걸까?
왜 내 encounter의 경험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취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보편적이지 않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