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공부

최근 교회에서 조직신학 시리즈 강의를 해오고 있다.
총 6번에 걸쳐서 하는 것인데, 2번은 다른 사람들이 하고 4번은 내가 하고 있다.

평신도를 위한 조직신학쯤 되니까, 아주 쉽게 하고 있고…
어려운 철학 개념같은건 하나도 다루지 않고 넘어가고 있다.

이제 다섯번의 강의가 끝났고, 한번 더 남았는데 그건 우리 목사님이 하신다고 했다.

지난 주일의 강의가 그래서 내가 했던 이번 시리즈 마지막 강의인데…
그래서 조직신학을 공부하는 것에대해 ‘잔소리’를 좀 넣어서 이야기했다.

내가 어릴때에는 교회에서 교리공부를 꽤 했었다.
세례를 줄때는 교리공부를 그래도 했었고, 나는 그걸 다소 지루하게 생각할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교리공부를 체계적으로 할 기회들이 꽤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교리공부들이 교회에서 많이 없어졌다는 느낌이다.
대신 사람들의 필요에 맞춘 공부를 하거나, 성경본문을 가지고 하는 공부들을 주로 한다.
나는 사람들의 필요에 맞춘 공부나 성경본문을 하는 공부를 좋아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교리공부역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전에는 본문 성경공부를 하면 그래도 기초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그 본문을 해석해내고 토론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요즘은 본문 성경공부를 하면 ‘지나치게 참신한’ 이야기들이 튀어나와 감당하기 어려울때도 있다.

점점 교리공부가 교회에서 사라져가는 것이 우려스럽기도 하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금년에 본 영화 중에서 내가 최고로 꼽는 영화이다.
2011년에 나온 일본영화인데, 그 영화를 보고는 한참 싸~한 마음의 감동이랄까 그런게 있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아이들이 주인공인데,
기차가 서로 지나갈때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믿고 그 소원을 빌기 위해서 아이들끼리 여행을 떠난다.
이혼한 부모가 함께 살게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던 아이는,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에 화산이 터져야 부모가 함께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소원을 빌러 갔다.
죽은 강아지가 살아나게 해 달라고 그 강아지 시체를 가방에 넣어간 아이도 있었고,
달리기를 잘 하고 싶은 아이도 있었고,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은 아이도 있었다.

결말이 어떻게 되었느냐는 여기서 스포일러를 날릴건 아니지만…
당연히 이 영화가 무슨 환타지나 SF 혹은 호러 영화가 아닌 바에야 죽은 강아지를 살리는 일은 없지 않겠나. ^^
당연히 그 소원들이 다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렇게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드러나는 그 아이들이 마음이 정말 아름다웠다.
(혹은 소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드러나는 마음도 예뻤고.)

우리가 살면서 바라는 것들이 다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속에서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삶이 아름답게 그려질 수 있는 것 같다.

이건,
내가 이 성탄에 자꾸 곱씹어보고 싶은 생각이다.

싼타 할아버지

나는 싼타 할아버지를 한번도 믿었던 적이 없던 것 같다. -.-;
내가 기억이 나지 않는 아주 어린 시절에는 그런걸 믿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나는 한에는 싼타 할아버지를 믿었던 기억이 없다.

내가 어릴때는 지금처럼 싼타 할아버지 마케팅이 활발하지 않았던 때였기도 했고…
우리 부모님이 적어도 내 기억에는 싼타 할아버지가 있다는걸 적극적으로 내게 홍보(?)하셨던 것 같지도 않기도 하지만,

나는 싼타 할아버지가 없다고 믿었던 나름대로의 확실한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 친구들 중에서 싼타로부터 선물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은 것이었다.
분명히 착한 친구인데, 그 친구는 싼타가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르고 있었고…
혹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 중에서도, 자신이 막상 그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 아이들이 많았다.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가 특별히 더 가난한 아이들이 많은 학교는 아니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한… 국민학교때에는, 특히 국민학교 저학년때에는…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가 꼭 반에 한명이상은 있었다.
착한 아이들 몇명이 함께 모여서 밥을 먹으며 그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기도 했고,
어떤 아이들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그 아이가 점심을 싸오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되기도 했었다.

나는 특별히 ‘나쁜 아이’는 아니었으므로,
아마도 선물을 받을 자격이 된다고 스스로 생각했었지만,
그렇게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중 정말 착한 아이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싼타를 알지도 못했다.
그 아이들이 선물을 받는다는 건 상상도 못했다.

성탄이 한주도 남지 않았다.
나는 ‘착한 아이’가 아니다.
지난 일년, 별로 착하지도 않았고, 물론 아이도 아니다.
아마도 싼타는 내게 선물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선물을 받지 못해 싼타를 믿지않게되는 아이들이 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싸~ 하다.

어제 밤에는,
인터넷을 뒤져서 충동 donation을 했다.

내가 은근히 덕후인 것들

나는 일반적으로 쇼핑을 즐기지 않는다. 오히려 쇼핑은 해야만하는 일종의 chore인 경우가 많다. ^^
그렇지만 내가 심히 tracking하는 item들이 있다.
인터넷 등에서 여러가지 제품 review를 보기도 하고, 여러가지 가격 비교를 하기도 하고, 좋은 제품이 나올때마다 부지런히 주목해서 보는 것들이다.

1. Backpack
요즘 backpack을 정말 무지하게 보고 다닌다. ^^
나는 나름대로 ‘좋은 backpack’에 대해서 꽤 까다로운 기준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그 기준들은 나름대로 부지런히 비행기를 많이 타고 다니고, 여기저기 뻔질나게 다니면서 체득한 것들이다.
꽤 괜찮아 보이는 backpack이 30불대에서부터 300불대까지 꽤 다양하다.

2. 자동차
나는 운전을 아주 즐기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정말 새로운 자동차들에 대한 여러가지 review는 무지하게 보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대충 차종별로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알고 있다. 적어도 미국에서 파는 차들에 대해서는.
(아, 롤스로이스나 벤틀리 그런건 잘 모른다. 내 관심 영역 밖에 있는 것이어서… ㅋㅋ)
특히 자동차가 요즘은 거의 tech device라고 불릴만큼 여러가지 전자장치들이 많이 달려 있다. 그것들을 비교해가며 분석해보는 것도 꽤 재미가 있다.
나는 자동차 review를 해주는 podcast등도 subscribe하고 있기도 하다.

3. 전자기기 Charger
출장을 다니다보면 여러개의 전자기기들을 밤새 충전해야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최소한 4개, 때로는 그 이상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하나의 charger를 이용해서 한꺼번에 charge가 가능한 charger를 열심히 보는 편이다.
출장을 다닐때 사실 charger를 여러개 가지고 다니는게 부피와 무게도 많이 차지할 뿐 아니라 서로 엉키고… 영 머시기하다.

4. 발가락 양말
이건 엄밀한 의미로 ‘덕후’ 수준은 아니긴 한데…
몇년전부터 발가락 양말을 사서 신었다.
한때는 발가락 양말만을 신었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주로 그냥 양말을 신고, 가끔 여러가지 이유로 발가락 양말을 신을 때가 있다.
나는 그래서 어디든 가다가 신어보지 못했던 발가락 양말이 눈에 뜨이면 그걸 한두개 사서 신어보곤 한다. (주로 일본이나 한국 출장을 갔을때 시간이 나면 산다.)

5. Cell phone, tablet
한때 cell phone과 tablet을 만드는 일을 했던 탓에, 그것들에 관심이 많다.
그런것 관련된 각종 review podcast를 듣기도 하고, 주말에 어떤땐 그런 review video만 youtube에서 뒤져서 볼때도 있다.

이것 이외에도 때때로 item을 바꿔가면서 덕질을 할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research 하는 것들은 대개 다른 사람들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하는 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긴, 누가 내게 자동차를 선물하겠느냐마는… ㅎㅎ)

그리고 열심히 덕질을 하더라도,
막상 사지는 않고 그저 여러가지 trend만을 따라가는 것을 더 즐긴다고 할 수 있으므로… 꼭 사야 맛은 아니다.

그리고 번외로…
덕질을 해보고 싶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아 포기하고 있는 영역은.

컴퓨터 게임이다.
이게 뭐 풍선 터뜨리기나 솔리테어 수준의 간단한 게임이 아니라 아주 serious한 게임들.
특히 role playing game.
아주~ 아주~ 옛날엔 아주 좋아 했었는데…
role playing game을 해보지 않은지 거의 20년쯤 되었는데, 요즘 보면 스토리라인이나 여러가지 graphic이 장난이 아니더군.
이건 아마도 당분간한 빠져보기 쉽지 않을 것 같다. ^^

믿음 (5)

그런 의미에서,
믿음을 갖는 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씨게~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하나님에 대해서 꾸준히 계속해서 신실하다는 뜻일 것이다.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께 계속 충성한다는 뜻일 것이다.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면서 산다는 것.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백성으로서 신실함을 놓지 않는 다는 것.

자…
믿음이라는것을 이렇게 풀어놓으면… 사실 완전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구원을 얻는 것이 믿음이냐 행위냐 라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핀트가 맞지 않는 것이 된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믿음의 핵심이 신실함이라면,
정말 믿음 = 행동이 되어버릴수 밖에 없다.

오히려 히브리적 세계관에서는 믿음과 행위가 구별되기가 더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헬라적 세계관에 투영되면서 믿음과 행위가 따로 떨어지는 일종의 왜곡과 분리가 일어난 것은 아닐까.

만일 그런 것이라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이야기하는 하박국의 (그리고 바울의) 선언,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고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자랑하지 못할 것이라는 에베소서의 말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야고보서의 이야기 등등은…

내가 여기서 좀 풀어놓았던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당연히 공부가 많이 부족한 사람의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누구든지 좋은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히 잘 받겠습니다~ 꾸벅~)

믿음 (4)

앞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구약의 히브리 민족들이 ‘에무나’ 혹은 그와 어근이 같은 ‘에메스’ 그 외의 다른 파생 단어들을 사용했을때…
그 용례가 헬라문화에서 착~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적어도 구약에서 “에무나”나 “에메스”가 사용된 용례를 보면…
좀 그렇게 보인다.

구약에서는 ‘믿음’이라고 번역을 할만한 자리에 많은 경우
‘신실함’을 집어 넣어놓고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예수님 당시에, 초대교회에서 유대문화의 배경울 가진 사람들이 피스티스로 번역해서 단어를 사용했을때…
그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faithfulness, steadfastness, truthfulness 등의 개념이었을수도 있겠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표현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 라는 의미라던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진리라고 인정한다 라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다’ 라고 할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신실하다’라고 풀어서 생각해야 더 적절하지는 않을까.

사실 생각해보면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debate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히브리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그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했다.
그것이 구약 대부분의 narrative 이고!

믿음 (3)

자, 그럼 이중에서 신약과 구약에서 모두 사용된 에무나 אֱמוּנָה 를 한번 살펴보자.
‘에무나’가 사용된 하박국 2:4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대로 인용한다. (로마서 1:17)

이것이 종교개혁의 모토가 되었던 그 중요한 구절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역시나 하박국에서의 에무나는 로마서에서 피스티스로 번역해서 사용하고 있다.

“에무나” 라는 명사를 왜 하필이면 헬라문화에서는 “피스티스”로 옮겼을까?
문화가 다르면 당연히 단어가 일대일로 match되기가 어렵다.
하다못해 한국어의 ‘친구’라는 단어와 영어의 ‘friend’라는 단어는 거의 비슷한 단어이고, 번역을 할때도 바로 엇갈려 사용하긴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문화적으로 사용하는 용례가 사실 약간 다르다.

마찬가지로,
히브리문화에서의 “에무나”는 헬라문화에서의 “피스티스”와 살짝 다른 면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바울이 하박국 2:4을 가지고 왔을 때는,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보면서 그것을 자신이 번역했기 보다는,
이미 그때 있었던 헬라어 구약성경인 70인역을 참고했을 것이다.
최소한 70인역에서 “에무나”를 번역해 놓은 방식이 직간접적으로 바울에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그 70인역을 보면 하박국 2:4의 “에무나”를 “피스티스”로 번역해놓고 있다.

아.. 물론 하박국에서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 것이라고 한 반면, 로마서에서는 <그의> 라는 내용이 빠져있다.
이건 또 다른 토론의 주제이므로 여기서는 넘어가자.

그리고 또,
신약에서 faithful, trustworthy 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보면, 그중 대다수가 피스티스의 여러가지 파생형의 단어들이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다.
한가지 예를 들어서 달란트비유에서 주인이 돌아와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이야기할때의 ‘충성된’의 단어는 πιστός (pistos, 피스토스)이다.

헬라어단어 피스티스에도 ‘신실함’ 혹은 ‘믿을만함’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자, 그래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구약의 에무나가 신약에서 번역될때는 피스티스라는 것.

믿음 (2)

“faith” 라고 해서 영어성경 신약에서 search를 해보면 당연히 많은 본문이 쭈루룩~ 나온다.
그중 살짝 다른 의미로 쓰였다거나 하는 것들을 좀 걸러내면…
사실상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믿음(faith)는 πίστις(pistis, 피스티스)라는 헬라어 단어가 쓰였다.
그래서, 이 피스티스 라는 단어가 신약에서 쓰인 것들을 쭈루룩~ 검색해보면 대부분 ‘믿음’이라고 번역하기에 적절한 곳에 사용되어있다.
말하자면 피스티스 = 믿음 이렇게 확인이 되는 셈이다.

자, 나는 Greek 단어인 πίστις(pistis) 가 믿음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것은 이해를 했다.
그런데…
분명히 그 믿음이라는 개념은 헬라문화에서 온 것이라기보다는 히브리문화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성경에 나오는 믿음이라는 개념은 그렇다.)

자…
그러면 과연 구약에서 이 ‘믿음’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였는지를 한번 보자.

faith라는 단어를 NASB에서 찾아보면 사실 구약에서는 많이 나오질 않는다.

신명기 32:51
욥기 39:12
시편 146:6
하박국 2:4

딱 네개가 뜨는데,
그나마 신명기에 나오는 것은 믿음을 저버렸다는 문맥에서 faith가 사용되는데 히브리 단어로는 מָעַל (ma’al, 마앨)이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것은 믿음을 저버리다, 신실하지 못하다는 동사로 부정적인의미로 사용되는 하나의 단어이다.
그러니까, 일단 이 논의에서는 제껴두고…

나머지 단어들을 보면
욥기 39:12 에는 אָמַן (‘aman, 아맨) 이라는 동사 단어가 쓰였고,
시편 146:6 에는 אֱמֶת (’emeth, 에메쓰) 이라는 명사 단어가 쓰였고,
신약에도 인용되고 있는 하박국 2:4을 보면 אֱמוּנָה (’emuwnah, 에무나) 라는 명사 단어가 쓰였다.

그.런.데.
대충 눈치를 챌 수 있겠지만, 아맨, 에메쓰, 에무나는 어근이 같다.
실제로 Lexicon에서 찾아보면 같은 어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것은,
아맨, 아메쓰, 에무나 라는 세개의 히브리어 단어를 가지고 구약에서 찾으면… 히야…
완전 쭈루룩~ 많이 나온다!

이중 아맨은 동사로, 어떤 것은 believe로 번역하기도 했지만 (44번), faithful 이라고 번역된 것인 22번 이나 된다.
그 외에도 trust, steadfast, sure 등등으로 번역을 했다.

에메쓰는 truth라고 번역한 것이 92번, true 라고 번역한 것이 18번, truly가 7번으로 대충 모두 truth, true 의 의미로 쓰였다.

에무나는 faithfulness로 번역한 것이 18번, truth가 13번 faithfully가 5번으로 이것도 역시 truth, faithfulness, steadfastness 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고 하겠다.

믿음 (1)

도대체 믿음이라는건 무엇일까.

사전적으로는,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사람/인격 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등이 하는 말을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그 대상에 의탁하는 것이 될수도 있겠다.

영어로는
believe in (existence)
believe
trust

등으로 번역할수도 있겠고.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것?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
하나님에게 나를 의탁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것일까?
혹시 이 가운데 어느 한 개념이 다른 개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나는 신학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헬라어, 히브리어 당연히 이런거 잘 모르고,
아마 지금 내가 여기에서 몇번에 걸쳐서 써보려고 하는 내용들이.. 이미 누군가에 의해 다 자세히 파헤쳐저서 설명된게 어딘가 있겠지만… ^^

그냥 나 혼자서 해본 생각들 몇개를 한번 정리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