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9)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라.
자신의 이름 뒤에 자신의 직업을 붙여서 스스로를 부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변호사등과 같이.
가령 나 같은 사람을 @@@ 엔지니어 라고 부르지 않는다. ^^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직업을 함께 이름에 붙여서 부르게 되는 직업들은 대개는 사회적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들이 많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이름 뒤에 자신의 직업을 가장 많이 넣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내 생각엔 목사님들인 것 같다.

그냥 이메일에 이름만 써도 될 것 같은 때에도 많은 목사님들은 꼭 @@@ 목사 라고 쓴다. 그 사람 목사인거 다 알고, 그냥 목사라는거 안써도 될 것 같은 때에도… 목사님들은 굳이 @@@ 목사라고 꼭 쓴다.

나는 솔직히 왜 그러는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목회자로서 갖는 특별한 사명감 때문인지,
아니면 일종의 특권의식이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이런식으로 목회자들이 스스로를 목회자라고 indentify해가면 갈수록, 목회자들은 세상의 언어를 잃어버리고 자신들만의 내부논리에 더 함몰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아, 정말 그러고 싶진 않았는데… 새해를 넘겨서야 이 글을 마무리 할 수 있을 것 같다. 새해엔 주로 ‘대안’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8)

이 세상의 어느 그룹이나 단체나 사람들의 모임이나 그 나름대로의 ‘내부논리’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때로 그 그룹내에서 통용되는 일종의 ‘언어’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내부논리가 지나치게 강화되면 그 외부와 소통이 불가능해져버리는 일들이 나타난다.

나는 목회자 그룹을 대할때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도 나름대로 교회 생활도 오래 했고, 다른 평신도들에 비해서 여러 목사님들을 많이 만나본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목사님’들에게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쓰거나 할때에는 그분들께만 특별히 사용하게되는 언어가 있다. -.-;
나도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목사님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그렇게 되어버리곤 했다.
그게 언어만 그런게 아니고 논리도 그렇게 되기도 한다.

가령 예를 들면,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은, 목사님들에게 이메일 쓸때 써주면 완전 잘 통하는 말이다.
소위 ‘주의 종’이라는 말은 다른 곳에서도 비판을 한것들이 많이 있으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표현을 가지고 한번 난도질을 해보자.

교회가 주님의 몸된 공동체라는 말이 성경에 사용되었을때, 나는 이것이 주로 ‘보편적 교회’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목사님들이 섬기는 각각의 개교회가 각각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보는 것에는 나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적어도 주님의 몸된 교회라는 표현이 나와 있는 신약 성경의 구절을 보면 그렇다.

그렇지만 만보를 양보해서, 각 지역교회가 주님의 몸된 공동체라고 하더라도…
나는 목사님들이 교회를 ‘주님의 몸된 교회’라고 이야기하는 데에서 논리의 왜곡이 일어나는 것을 참 많이 보아왔다.

대개 지역교회 담임 목회자들은, 소위 ‘개혁적인’ 목소리나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많이 너그럽게 넘어가다가도… 그 사람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것을 보면 확~ 틀어져버린다.
예전에 나는 이걸 제대로 읽지 못해 많이 혼란스럽기도 했었다.
아니, 이 목사님은 왜 이 사람은 좋다고 하고, 저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신학을 가졌다고 비판을 하는데… 그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거지?
그게 헷갈릴 경우, 결국 그 목사님의 nerve를 결정적으로 건드린 것은 대부분 교회에 대한 비판이다. 신학적 논리 전개가 아니다.

자신이 섬기는 일의 정당성을, 자신이 처한 상황을 glorify함으로써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있는 목회자이므로 자신이 하는 일은 중요하고, 따라서 자신도 중요하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 전개가 목회자들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사업가도, 연예인도, 운동선수도, 엔지니어도, 예술가도… 그런거 다 있다. 자신이 하는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자신이 하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
내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런 모습에서 목회자들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 짧은 글에서 많은 예를 들어가며 지적하지는 않겠지만, 목회자들에게는 이런식의 내부논리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그런 내부논리들이 이제는… 너무 많이 게토화 되어서 외부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모습을 너무 많이 본다.
M.Div. 졸업하고, 교회 안에서만 계속 있는 목회자들이 갖는 한계가 아닐까 싶다.

Merry Christmas

원래는 성탄절 이전에 ‘목회자’ 글 시리즈를 마치려고 했는데,
글이 길어져서 넘기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원래는 금년까지만 블로그 매일 업데이트를 하고,
내년초 부터는 제 개인 팟캐스트를 시작하면서 블로그 업데이트의 수를 줄이고 대신 더 깊이있는 내용을 다루어보려고 계획을 했었고,
그 준비를 12월 마지막주에 쉬면서 해보려고 했었는데…
준비도 부족하고 자신도 없어서 그것도 미루게 되었습니다.

내일 부터 성탄절까지 잠깐 쉬고, 26일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몇년전부터 매년 크리스마스때면 가장 제 마음에 공명을 주는 크리스마스 뮤직을 하나 올립니다. (금년 12월에도 이걸 한 50번은 벌써 들은 것 같습니다. ^^)
모두에게 앞으로 올 소망을 현실로 인식하는 크리스마스가 되시길 바랍니다.
꾸벅~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7)

그리고 목회자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신학지식이 이제 더 이상 신학교에 가두어져 있지 않다.
마음만 먹으면 신학교 문턱 가까이에 가보지 않고도 꽤 양질의 신학교 강의에 해당하는 것들을 접할 수 있다.

나는 평신도로서 조직신학, 성서신학, 역사신학, 철학, 헬라어, 히브리어 등등을 상당한 수준으로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신학교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이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잡다하게 공부를 했기 때문에 신학적 일관성을 가지지 못했느냐 하면 그런것도 아니다. 
웬만한 목회자들보다 이런 사람들이 훨씬 더 깊고도 넓은 신학지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신학교육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교육환경이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 
실제로 엄청나게 많은 자료와 정보들이 인터넷에서 access가 가능하고, 그걸 좀 organize하고 systemize해서 교육의 형태를 바꾸어보려는 시도도 상당히 많이 이루어 지고있다.
나는 신학교육에도 그런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의미에서 그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이와 관련된 큰 문제는,
최근 수십년간 꽤 active하게 진행되어온 신학적 주제에 대해 많은 목회자들이 무지하다는 것이다.
가령 N T Wright의 신학적 입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될까?
Christopher Wright가 이야기하는 Missio Dei가 자유주의자들의 Missio Dei와 어떻게 비교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될까?
Annabaptist 신학이 현대사회에 더 relavent 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Yoder나 Hauerwas등의 저작을 공부하는 목회자들이 얼마나 될까?

평신도들 가운데 이런것들을 나름대로 공부하여 이해하고, 나름대로 강의도 하고, 여러 세팅에서 나눔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6)

얼마전에도 내가 가끔 듣는 모 교회 설교 podcast에서 그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내 역할은 여러분을 준비시켜서 세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복을 받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동네의 대표적인 큰 교회 가운데 하나이다. 목사님은 흑인 목사님이시고.)

뭐 건강하고 좋은 이야기같이 들린다. 사실 헌신해서 교회를 위해 봉사해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 보다는 더 발전되고 좋은 이야기같이 들린다. 
그런데….
나는 그 목사님에게 묻고 싶었다. 당신은 정말 당신이 성도들을 그렇게 훈련시키고 준비시킬만큼 성도들의 상황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지금 소위 ‘복음주의’가 현대의 세상을 해석해내기에 충분한 신학적 contents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모든 해답을 이미 알고 있고, 설교등을 통해 외쳐지는 해답을 줄줄 외기만 하면 세상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으로 사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Christendom을 벗어난 다원주의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M.Div. 마치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교회 안에만 갇혀있는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그 목회자들은 교인들의 진지한 질문에 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5)

지금은 지난 1700년동안 이어져왔던 Christendom이 해체되고 있다.

초기 기독교는 로마제국이라는 다원주의 사회를 만났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유일신을 주장하는 ‘별종’이었다. 그러나 AD4세기초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기독교 주류는 Christendom안에 살았다.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가 (nominally) 기독교적 가치였기 때문에, 교회에서 해야하는 일은 기독교적 가치를 더 많이 그냥 강조하면 되는 것이었다. 세상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세상이 기독교를 이해하도록 강요받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그러나 지금은 AD4세이 이후 최초로 기독교 본류가 다원주의세계관을 접하고 있다. 그러면서 Christendom이 급격히 붕괴하고 있고, 이미 대부분 붕괴되었다.
내가 보기에 기독교 본류는 1700년만에 만나는 이 다원주의 세계관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아 보인다.
그냥 예전과 같이 세상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고, 그냥 기독교가 뭐라고 하는지만 교회에서 계속 얘기하자는 식으로 접근하는 일들이 그냥 흔히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Christendom에서는 교회가 세상을 이해할 필요가 별로 없다. 세상이 교회에 귀기울이도록 강요받았었고, 세상이 교회의 언어를 배워야 했기 때문에 그냥 교회에서는 교회의 언어로 이야기만 하면 세상에 그 message가 전달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된다. 세상은 더 이상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있고, 교회의 언어를 이해할수 없게 되었다. 이제 정말 세상에서 통용되는 언어로 message를 이야기해주어야 하게 되었다.

이런 구조 속에서…
전문적으로 교회 안에서 전적으로 사역하는 사람이 교회의 ‘원탑’ 지도자가 되어 교회를 이끌면 교회는 점점 세상으로 부터 멀어질수 밖에 없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4)

사실 19세기정도만 하더라도, 목회자가 되기위해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다면 일반적인 성도들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한사람으로 여겨질수 있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인문학적 소양도 더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었고, 시민교양도 더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그렇게 더 공부도 했고, 게다가 공동체에서 성품과 인격이 인정된 사람이라면 매주 설교도 하고 사람들을 훈련도 시키는 일을 하기에 적절하다고 할수도 있겠다.

그런데, 현대는 딱 그렇지 않다.
목회자가 일반 성도들보다 더 인문학적 소양이나 시민교양이 더 있다고 볼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
물론 인문학적 소양이나 시민교양등이 더 풍성한 목회자들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수준으로 보았을때 목회자들이 이 분야에서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교회에서 설교를 하는 목회자가 어설프게 베스트 셀러 서머리를 설교랍시고 하는 것을 듣는다던지,
자기가 좋아하는 기독교 서적에서 읽은것 몇개를 quotation하는 것을,
인문학적 소양이 더 뛰어난 평신도들이 들으면 기가차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3)

설사, 목회자라는 직분이 성경에 어느정도 prescribe되어 있다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이 목회자가 ‘신학교’를 졸업한 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목회자가 되었건, 교사가 되었건 간에…
교회에서 교육과 양육과 훈련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맞는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한다고 완전 강력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M.Div. 3년 공부한게 정말 충분한가? 그나마도 3 년동안 진짜 엉터리로 공부한 사람들이 목사가 되는거 완전 많이 봤다.
가끔 어떤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아니, 저분은 신학교 3년을 다녔는데 어떻게 이것도 잘 이해를 못하지??? 하고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 많다. -.-;
나 같이 신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보다도 신학적 지식, 성경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M.Div.과정을 마쳤다는 이유로 ‘권위’를 갖는다고 생각하는게 정말 맞는 걸까?

예전 직장에서, 내 manager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대학에서 학부만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MIT 박사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 바닥에서 딩굴면서 배운 경험과 지식이 정말 완전 넘쳐났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그 사람과 맞장떠서 토론해보면 내가 밀릴때가 더 많았다. ^^
나는 그 사람을 기꺼이 내 manager로 인정하고 그 사람의 lead를 따랐다.
MIT에서 박사 교육 받았다는 것이 자동으로 나를 직장에서 리더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면 안된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만 그런방식이 허용되어야 하는건가?

그리고, 솔직히 교회에서 리더가되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은 ‘지식’을 3년 습득하는 것으로 준비되지 않는다. 정말 사람을 대하는 방법, 여러가지 인생의 지혜 등등이 필요하고,
개인적으로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자세, 몸에 배어있는 성숙한 습관과 성품 등등이 모두 필요하다. 이것들을 M.Div.과정중에 잘 훈련받는다는 이야기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2)

성경을 prescriptive하게 보지 않고 descriptive하게 본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가령,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가 사랑과 복종이라는 관계로 그려지고 있다. 
이걸 가지고 여러가지 신박한 성경해석방법들을 가지고 사실은 그게 아니고…. 식의 해석을 하는 것들을 많이 본다. ^^ 왜냐하면 이 구절이 현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을 할꺼냐 하는 것 때문에 그렇겠지.

그런데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본다.
남편과 아내의 동등하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서로 순종하는 관계라는 어떤 ideal한 모습이 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그게 잘 이루어지지 않을수 있다. 1세기 로마시대라면 그 평등하면서도 건강한 부부관계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남성우월적 문화였을 것이다. 
그런데 남성이 우월하다는 사상과 그로부터 비롯된 그 당시의 문화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완전히 뛰어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세상의 누구도, 자신이 살고 있는 문화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건강한 부부관계의 idea를 현실속에서 적용을 하려다보니 그게 사랑과 복종이라는 형태로 기술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서의 그 내용은, 남편과 아내 관계가 어떠해야한다는 prescription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부부관계의 idea를 현실속에서 구현하는 한가지 모습을 descriptive하게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구절을 바탕으로 남편은 사랑, 아내는 복종을 주장하는 것은 왜곡을 가져올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런 관점으로 목회자에 대한 기술이라고 된 구절들(사실 따져보면 그리 많지도 않다)을 한번 보라. 
현실적으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그 공동체를 돌보는 리더들이 있었고, 그 리더들에게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섬기라는 지침을 준것들이지…
성경이 목회자라는 직분을 prescribe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1)

Controversial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disclaimer.

나는 지금 건강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목사님이 계신 교회에 다니고 있고, 그분과도 좋은 관계이 있다. ^^
지금 내가 출석하는 교회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교회이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입장이 매우 건강하다고 자부한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면…

우선, 적어도 내가 성경을 읽는바에따르면 ‘목회자’라는 직분이 성경에 prescribe되어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바울서신등에 목회자로 인식될만한 직분들이 언급된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그냥 교회의 지도자로 해석해도 무관한 경우가 많고, 그 당시 상황에 비추어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있었고, 그 사람들을 바울이 기술하는 과정에서 목회자라는 직분이 설명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목회자라는 직분이 무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말 좋은 목회자들이 계시고,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나도 역시 나름대로 긴 시간 교회생활을 해 오면서 내게 좋은 목회자가 되어주셨던 목사님들이 계신다. 지금도 그분들께는 참 감사한 마음이 크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좋은 목회자가 있다는 것이, 도저히 거부할수 없는 목회자 존재의 근거가 될수는 없다. 

목회자 직분에 대한 소위 ‘성경적 근거’ (나는 이 말을 남발하는 것이 때로 불편하긴 하다. 너무 오-남용 되는 감이 있어서)를 들이대면서 봐라, 여기 목회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 같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적어도 대부분의(혹은 모든) 해당 구절들이 목회자라는 직분을 prescribe했다고 보기엔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성경의 많은 부분을 prescriptive하게 보기보다는 descriptive하게 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