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ong Audience

지난 주에는 Tim Keller 목사가 한국에 가서 강연을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분에게 참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분의 생각에 여러가지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그렇지만, 실제 그분이 한국에 가서 right audience와 소통을 했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회의적이다.

facebook을 통해서,
그 집회에 참석했다고 열심히 사진을 올리는 사람들도 보았고,
뭔가 더 주목을 받는 사람들의 사진들도 보았다.

어떤 분들은 건강한 입장을 가지고 분투하시는 분들이었지만,
정말 다수는, 아주 다수는…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될만한 분들이었다.

작년에는 John Piper 목사를 한국의 한 대형교회에서 초청을 해서 집회를 열었다.
내가 이해하고 있는 대로라면, John Piper가 그 대형교회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 교회를 아주 신랄하게 비판할 상황이었다.
참…

역시 그것도 wrong audience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전하는 message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는 일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Tim Keller나 John Piper의 한국 방문은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그냥 그 news feed를 보면서 나는, 마음이 많이 무거웠다.

민우가 시위에 참여하다!

민우는 gap year를 하면서 근처 community college에서 class를 한개 듣고 있다.
어제는 그 class를 마친 후에 ‘walk-out’에 참여하고 늦게가겠다고 text를 해 왔다.

비가 살짝 왔는데, 비도 좀 맞았던 것 같다.

민우는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중요한 이슈에 왜 아이들이 다들 그렇게 참여를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기특한 놈.

이제는 거의 어른이 되어가고 있지만,
민우가 더 생각과 마음이 성숙해져가면서
약자의 편에 설 줄 알고, 정의를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길 정말 간절히 바란다.

교회는 세상 안에 없고, 세상은 교회 안에 있는…

기독교의 문제를 한줄로 표현한 글이다.

“교회는 세상 안에 없고, 세상은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

이원론의 문제와 세속화의 문제를 동시에 지적하는 통쾌한 표현이다.

지난주 국가 조찬기도회에서,
‘비개신교인’인 문재인 대통령의 말씀과,
(자칭) ‘개신교 대표’ 소 아무개 목사의 말을 비교해보면 그게 너무나 잘 드러난다.

Facebook에서 손태환 목사님은 이렇게 쓰셨다.

“정치인의 연설이 더 종교적이고
종교인의 설교가 더 정치적이다.
목사가 할 말을 정치인이 하고
정치인이 할 말을 목사가 한다”

참…

급변

요즘 하루에도 몇개씩 대형뉴스들이 터지고 있다.
와, 정말 뭔가 역사의 흐름이 바뀌는 변곡점에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뉴스나, 여성의 인권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고통스러운 과정에 관한 뉴스들, 그리고 과거의 잘못된 정치세력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지고 있는 뉴스들을 보다보면, 정말 뭔가 세상이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낙관적 생각을 갖게도된다.

그런데,
사실 내가 요즘 가장 많이 주목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그러나 별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는)
과연 신자유주의가 끝날 것이냐 하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보호무역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가는 것 같아 보인다.
한국 신문에서는 이것 때문에 다들 난리이지만…
(그리고 한국에도 어떻게든 타격이 있겠지만…)
내가 정말 관심있는 것은,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알리는 서곡이 될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쇠락이, 어쩌면 미국 패권의 쇠락으로 연결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나는 진심으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든 좀 쇠락의 길을 걷게되길 바란다. 그것은 대단히 비인간적인 결과를 전 세계에 가져왔다.
그러나 만일, 정말 만일, 신자유주의의 쇠락과 미국 패권의 쇠락이 급격하게 이루어질 경우…
그로인한 공백이 결국 혼란과 무질서와 폭력을 불러오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기도 하다.

나는 경제도, 정치도 잘 모르기 때문에…
내가 뭘 생각한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정확한 진단이겠느냐 싶지만…

내 개인적으로 현대 기독교 최대의 적가운데 하나를 신자유주의로 뽑아온 나로서는,
그 몰락을 은근히 바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몰락이 가져올 혼란에 대한 두려움도 있고.

지역교회

7~8년 전애 쓴글.
그후에 지금 나는 개척교회에 참여해서 다니고 있지만,
막상 이런 교회에 대한 생각을 같은 교회 사람들과 나눌 기회는 없다. 좀 안타깝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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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달동안,
‘지역교회’에 대한 많은 생각들을 하고 있다.

나름대로 현재까지 정리한… 나름대로의 ‘지역교회론’을 풀자면 다음과 같다.

지역교회는 다음의 두가지만 만족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첫번째는,
우주적교회/보편적교회 (Universal Church, Catholic Church)의 일부로서 지역교회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에는, 사도의 전통에 따른 신앙고백, 선교적 사명 같은 의미들이 당연히 포함되게 되거니와…
또한 지역교회 = 교회로 일컬어지고 있는 현대의 심각한 왜곡을 피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두번째는,
‘가족’이 되는 구성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한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것은, 결혼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혼인이라는 언약으로 엮어진 가족/부부는,
인간으로서 추구할수 있는 모든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처한 상황 속에서 제한된 가치에 더 무게를 두게된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한 가치도, 가족/부부라는 관계보다 더 우선할수는 없다.

함께 ‘지역교회’를 구성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우주적교회의 신앙고백이라는 넓은 틀 안에서, 내가 저 사람이라면 함께 살아보겠다… 내가 저런 그룹의 사람들이라면 함께 살아보겠다… 라고 결심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새로 지역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는 사람도 그렇게 ‘한몸’이 될 것으로 헌신해야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는 기존의 지체들도, 그렇게 새로 함께하는 그 사람과 이제는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함께 하는 결정이라면… 그것이 우주적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지금까지 내가 머물러있던 가치를 포기할수도 있는 것을 의미한다. – 그것이 ‘선교적 교회’가 되었건, ‘성경공부 많이 하는 교회’가 되었건, ‘새벽기도 매일 하는 교회’가 되었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소위 교회의 비전에 동의하여 함께 지역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고 본다. 함께 하는 사람들과… 그렇게 함께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지역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동기이자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So Many Olympians!

평창 올림픽이 끝났다. 패럴림픽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몇주동안 Google의 직원용 내부 이메일 뉴스레터(?)에서는, Google 직원으로서 올림픽에 출전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 올렸었다.
정말 무지하게 많았다.

아, 물론 Google이 큰 회사이긴 하지만 아주 다양한 분야의 선수들이 많았다.
수영, 체조, 피큐어 스케이팅, 스키, 육상, 조정 등등…

그 중에는, 내가 자주 만나는 우리 회사 사람도 있었다!
우리 회사에서 특허 관련한 일을 하는 변호사인데, 92년과 96년 올림픽에 스페인 수영 대표선수로 출전했단다.
그냥 회사에서 만나는 software engineer나 변호사들이 놀랍게도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들이었고, 그중에는 심지어 금메달을 비롯해서 각종 메달을 딴 사람도 꽤 있었다.

올림픽 출전선수가 된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긴하다. 말하자면 전 세계에서 그쪽 분야에 손꼽히는 운동선수라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보면 나는 아주 어릴때 운동을 하면 공부를 포기하거나, 공부를 하면 운동을 포기해야하는것 처럼 주입받았던 것 같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내가 중학교때 체육 선생님이 나보고 육상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어본적이 있었다. ^^
중학교 2학년때 100m를 12.8초에 뛰었고 제자리 넓이뛰기를 280cm 정도를 뛰었으니 꽤 잘하는 편이긴 했다.
그런데 나는 당연히 ‘나는 공부해야하니까 운동은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 그때 그래서 내가 육상을 더 했으면 지금쯤 올림픽에 나갔겠느냐고? 당연히 아니다. ㅋㅋ
나는 그렇게 운동에 재능이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내 머리속에,
생활체육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었고,
엘리트체육은 나와 관련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를 해야헸으니까.

그렇지만 미국이나 서구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생활체육을 하는 사람들중에서 진짜 잘하는 올림픽 선수가 나오기도 하는 것 같다.
어려서부터 체고, 체대 다니지 않고, 그냥 자기 공부하면서 짬짬이 훈련하고 노력해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거다.

나는 체육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를 하기엔 너무 문외한이기도 하고,
내가 운동신경이 뛰어나거나 운동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기도 하지만…

한국도 생활체육과 엘리트체육 사이의 간극이 좀 좁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요즘은 내가 한국에 살때보다 조금 더 나이지긴 했나..? ㅎㅎ

약자에 대한 보호가 도덕을 파괴할때

어제 쓴 상황과는 달리 그러나,
약자에대한 보호가 도덕을 파괴할수도 있다.

약자가 늘 선은 아니다.

약자를 보호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약자를 보호함으로써 그 약자가 가지는 잘못된 도덕적 관념을 인정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가령 어떤 여자가 매우 난잡한 성생활을 했고,
여러번의 낙태 끝에 이제는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되는 상황에 놓였다고 하자.

그 어린 미혼모는 분명히 약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어린 미혼모는 그 사람의 도덕적 상태와 무관하게 보호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미혼모를 보호하는 것과, 그 미혼모의 난잡한 성생활을 인정하고 승인하는 것은 다른 문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잘 못 다루면
약자에 대한 보호가 도덕을 파괴하게 되는 것이다.

도덕이 약자를 보호할 수 없을때

예전에 내가 이 블로그에 쓴 글에서,
‘혼전순결’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는 내용을 이야기 했었다. (여기 링크)

나는 성관계가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간에 이루어져야한다는 생각을 물론 가지고 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혼전순결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에는 좀 불만(?)이 있다. ^^

최근의 #MeToo 운동의 엄청난 파도가 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분들의 용기에 큰 박수와 성원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정말 지금으로부터 30~40년전과 같이 ‘혼전순결’에 대해 그렇게 완강하게 이야기하던 문화가 아직도 남아 있다면,
이 여성들이 과연 이렇게 나올 수 있었을까? 정말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성관계를 부부의 것으로 한정하는 도덕을 나는 지지한다.
그러나 그 도덕에서 파생된 ‘혼전순결’이라는 개념이 자칫 성폭행의 피해자를 더 어려운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수도 있는 것이다.

도덕은 좋은 것이지만,
도덕이 약자를 보호하지 못할때,
그 도덕은 개선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잘 못했어요…

지난 주말 North Carolina에 있는 한 학생 모임에 다녀왔다.

4번의 설교를 했고,
여러명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반적인 내 스스로의 rating은,
참 잘 못했어요.
이건 수련회중, 그리고 그 후에 그 모임의 학생들과 대화를 하면서 깨닫게 된것들이다.

1. 일단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내 message가 가리키는 그분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가 가진 technique에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였다.
하나님과 내가 동시에 다 주목을 받을 수는 없을텐데…

2. 내 설교의 내용이, 전반적으로 너무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특히 신앙의 연륜이 없거나 짧은 사람들에게는 더더군다나.
이건 아마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예수님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않은지 너무 오래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3. 내게서 눈물이 많이 말랐다.
이번 설교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아주 기본적인 내용들을 cover 하려고 노력했었다.
이런 설교들일 수록, information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것 보다는, 진리가 실제적으로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Make truth real)
그것을 위해서는 대개 그 message가 내 눈물로 적셔져야하는데, 준비하면서 그리고 집회중에 내 눈물이 많이 말랐었다.
그것은 내가 설교를 하면서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거기서 만난 학생들에게 그래서 돌아와 생각해보니,
많이 미안하다……..

건강한 신학이 신앙을 설명할 수 없을 때

나는 매우 자주,
‘건강한 신학’을 가진 분들과 이야기를 할 때, 답답함 혹은 안타까움을 느끼곤 한다.

그분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입장에 대부분 동의하기도 하고,
그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에도 공감하는데…
그분이 이해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 어떤 신앙의 개념들을 나누는 단계에 가면,
더 이상 대화가 쉽지 않음을 느끼곤 한다.

그러면,
그런 분들과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저 신학적 공감에 대한 것 뿐이다.

그런데,
어떤 분과는, 심지어는 구체적인 신학적 입장에 모두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깊이 있는 신앙의 대화가 가능하다.
그분이 경험하고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
은혜, 죄, 하나님 나라, 사랑, 세상 등등에 대하여 정말 가슴과 가슴을 오가는 대화를 나누는 경우가 있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신학이 신앙을 설명해 내는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너무 자주…
신앙인들과, 동역자들과, 교회 식구들과, 신학적 대화만을 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