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춤도 좀 추고, 울기도 하면 안될까?

그들은 마치 어린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다. 누가복음 7:32

왜 그때 그 사람들은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그렇게 배척했을까?
일종의 금욕주의적 자세를 가졌던 세례요한도,
전통파괴자와 같이 보였던 예수님도 그렇게 배척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사람들은 세례요한이나 예수님보다도 그저 자신을 지키는데 급급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다른건 모르겠고, 그냥 나는 이대로 나를 지키고 있으련다 그런 자세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있지는 말자.
이렇게 주저앉아 아무것도 안하고 있지는 말자.
춤을 춰도 좋고 울어도 좋다.
뭐라도 하자.
정말 뭐라도 하자.

때로 죽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죽어있는 교회들을 향해,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을때가 참 많이 있다.

리더를 제비뽑아서 선출하는 공동체는

Thanksgiving 휴가기간에 정말 잘 쉬었다.
매일 늦잠도 자고 (그래봐야 아침 8시이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하면서 보냈다.
책을 전투적으로 읽는다거나 뭔가 이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려는 노력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냥 쉬었다.
오랜만에 집에온 민우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고, 많이 바쁘게 사는 (그리고 연말에 정말 장난아니게 바빠질) 아내도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빈둥빈둥 누워서 youtube 보고, 음악듣고, 낮잠자고…

그러던중에 Stanley Hauerwas의 짧은 인터뷰 clip하나가 youtube ‘추천’에 떴기에 보았다. 10년쯤 전의 인터뷰인것 같은데. (링크)

Stanley Hauerwas같은 사람은 대답이 때로 불교 고승의 선문답같이 느껴질때가 있다. 워낙 대답이 함축적이고 짧은 말에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 한마디의 짧은 대답을 가지고도 아주 오래동안 곱씹을 것이 나온다.
위의 인터뷰에서 짧게 이야기한것 중에서 한가지가 유난히 내 마음에 남았다.

어떤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그 리더를 제비뽑기로 뽑는다. 지금도 어떤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는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렇게 리더를 제비뽑기로 뽑을 수 있으려면 그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여야 할까?

리더십, 공동체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비가 왔다

이렇게 시꺼면 것들이 공기에 있었던 거다.
비와 함께 이것들이 씻겨내려오니 좀 숨을 쉴 것 같다.

그동안 이곳 Bay area는 세계에서 가장 나쁜 수준의 공기 오염이 있었다.
근처(?)에서 일어난 큰 산불 때문이다.
아직 산불이 다 꺼지진 않았다.
이렇게 비가와서 산불도 공기오염도 좀 해결이 되었으면 한다.

때로,
아무리 버둥거리고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건 하늘에서 비가 내려야만 해결되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만이 진정한 해결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Smart Contact Lens

지난 금요일 우리 회사의 공식 블로그에 glucose sensing smart contact lens 개발을 멈추기로(shelf) 했다는 내용이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발표를 읽는 사람들의 몇가지 반응이 있는 것 같다.

1. 하나는 아… 안타깝다… 이다.
실제로 아주 genuine하게 이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안타까운 거다.

2. 두번째는 그거 잘됐다… 이다.
이건 뭔가 Verily가 잘되는 것이 배가 아픈 사람들인 듯. ^^ 실제로 이쪽 어느 뉴스 미디어는 유난히 우리 회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가짜뉴스’를 많이 배포해서 우리 회사 리더십이 좀 골치를 썩기도 했다.

3. 세번째는 그럴줄 알았어… 이다.
사실 눈물 속의 혈당량과 피 속의 혈당량의 상관관계가 어떨 것인가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바가 희박했다. 우리는 이 device를 만들어서 그 상관관계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이기도 했는데 그개 잘 안된거지.

나도 이 프로젝트에서 한 부분을 담당했다. 내 책상 서랍과 책상 위에도 이런 저런 종류의 샘플들이 무지하게 많이 쌓여있다.^^

그런데 혹시나 이쪽을 좀 아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더 드리자면…
Verily에서는 이 혈당 측정용 smart contact lens를 포함해서 최소한 3종류의 smart contact lens를 개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걸 비밀로 지켜왔는데 우리 회사 블로그에 떴으니 나도 써도 되는거지.)
실제로 비슷한 technoogy를 사용해서 이것들을 개발하고 있다.
그래서 혈당측정용 smart contact lens를 그만둔다고 해서 Verily가 smart contact lens 자체를 그만두는건 아니다. 내부적으로는 꽤 바쁘게 다른 contact lens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다.

생각같아선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럴수 없으니… 뭐 이정도만 설명을 해야 할 듯.

하여간 걱정(?)할건 아니고, 우리 회사 내부에서는 뭐 당연히 그런거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솔직히 궁금한건 왜 이 시점에 그걸 announce했는지 하는것이긴 하다.)

집으로

1.
민우가 감기에 걸려서 아프다.
열도 좀 있고 그래서 지난 주말에는 그냥 많이 잤다고 한다.
불쌍한놈…

안그래도 많이 안타까웠는데 민우가 우리에게 text를 하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썼다.
아… 거기서 완전 마음이 무너졌다.
우리 아가가 아파서 집생각이 나는구나.

오늘밤에 집에 온다. 오면 많이 안아줘야겠다.
(우리 민우는 스무살이 된 아직도 아빠와 엄마에게 안기는걸 참 좋아한다.)

2.
그런데,
살면서 우리도 많이 아프다. 때로는 그게 우리의 잘못 때문일때도 있고, 우리가 능력이 부족해서일수도 있고, 우리 잘못 하나도 없이 억울하게 아플때도 있다.

그럴때 하나님께 드릴수 있는 killer 기도는…
“하나님 아파요. 하나님 품이 그리워요. 안아주세요.” 가 아닐까 싶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면 정말 그렇게 꼭 안아주시는 것 같다. 그게 어떤땐 당장 그렇게 하신다고 느껴질때도 있지만 어떤땐 나중에야 하나님께서 안아주셨다는걸 알게되기도 한다.

살면서 지치거나 낙망하거나 좌절하거나 아플때,
하나님의 품으로 가고 싶다고 이야기해보자.
빨리 낫게 해달라고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안아달라고 이야기해보자.

3.
우리 민우가 오늘 밤에 집에 온다.
아직 감기가 다 낫지 않았을 텐데, 오면 많이 재우고, 많이 안아줘야겠다.
민우가 좋아하는 갈비도 사 먹이고, 버블티도 함께 먹고.
오늘 밤 민우가 SFO에 도착하기까지 오늘 하루는 몹시 길 것 같다.

바쁜 한주가 지나고 있다

이번주는 좀 더 많이 정신이 없었다.

아침7시 뭐 이렇게 일찍 첫 미팅을 하는 날이면, 그 밤에는 미팅을 잡지 않는게 그래도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보지만,
그런게 마구 망가지는 주였다.
그래도 나는 좀 낫지. 내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은 1am-8am 미팅이 있었다. (영국과의 conference call) 그리고 나서 아침 10시부터 다시 미팅들이 잡혀 있으니… 완전 팀 전체에게 인정사정없이 몰아치는 주였다.

엄청나게 돈을 많이 벌어오는 일과,
엄청나게 돈을 많이 쓰는 일 두가지로 모두 바빴다.

사람들과 엄청 이야기 많이 하고,
사방에 전화하고, conference call 하고, 새로운 사람들 무지하게 만나고,
크고 중요한 meeting들 organize도 하고,
특허도 쓰고,
새로운 특허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도 하고,
그러면서 그냥 또 일상은 일상대로…

이번주에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 때문에 나는 자다가 한밤중에 깨어서 이런 저런 생각을 더 정리해야 하기도 했다.
오늘 미팅 몇개 넘기고 나면 주말인데…

I need a break.
이번 주말에는 혼자서 밀린 공부들을 좀 하면서 relax 할 여유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바울을 생각하며

N T Wright이 바울 전기를 썼다.
참, N T Wright은 정말 엄청나다. 이 사람은 내가 읽는 속도보다 이 사람이 책을 쓰는 속도가 더 빠른 것 같다.
어떤 소문에 의하면, N T Wright은 양쪽에 타이핑을 하는 두 비서를 앉혀두고서 양쪽의 사람들에게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해주면 두 사람이 타이핑을 하고 그렇게 한번에 두권의 책을 쓴다고… (설마 그럴리가!)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이 책이 나온걸 보면서 잠깐 바울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다.

바울은 가만보면 정말 완전 goal-oriented person이다. 완전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고, 완전 열정 넘친다. 강한 신념도 있고, 고집도 세다. 그래서 충성심도 엄청나다. 아마 바울은 군대에가서 기합을 주면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받았을 것 같다.

내가 바울과 같은 성품의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건 사실 좀 자신이 없다. 워낙 바울은 넘사벽의 넘치는 에너지가 있어서…
그런데 적어도, 나는 바울과 같은 성품을 매우 동경하고 추구하는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나는 바울의 논조가 정말 마음에 든다.
가령 로마서 8장같은 건 정말 읽으면서 가슴이 뛴다. 바울이 심장박동이 정말 들리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15장 같은 것도 숨이차도록 몰아쳐 한번에 읽으면 마치 내 가슴이 터질것 같이 느껴진다.
에베소서 1장의 기도같은 것도 그렇고, 빌립보서 2장도 그렇고…

그런데,
바울과 같은 성품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혹은 바울과 같은 성품을 그렇게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 본문들을 그렇게 읽을까?
오히려 그런 본문들은 살짝 부담스럽고, 대신 요한일서 4장 후반부같은 것이나, 아니면 시편23편같은 것이 훨씬 더 마음에 다가오지 않을까.

바울은 어쨌든 신약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무지하게 중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복음을 이해하는데 엄청나게 중요한 사람이다.
그런데 읽는 사람의 성품이 그 바울의 성품과 잘 match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이는것 자체가 더 힘들지는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정말 중요하지만, 성경이해를 위해 바울에 몰빵하는 것에는 그런 위험성도 있는 것은 아닐까?
또, 바울을 그렇게 좋아하는 내가 이해하고 있는 복음은 그렇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일정부분 치우치거나 왜곡되어있지는 않을까?

기복신앙과 고난

지난 주말에 교회 소그룹에서 기복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나는 그룹에서 함께 기복신앙에 대해서 나눈 이야기가 뭔가 계속 찜찜하게 내 마음에 남아 있었다. 정말 꼭 되어야하는 이야기가 되지 않은 것 같은 생각.

그래서 기복신앙에 대해 며칠 더 생각하면서, 기복신앙이 설명해낼 수 없는 가장 헛점은 어둠의 시기 / 고난 이라는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난/어둠의 시기를 지나면서 마음이 망가진다. 그렇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고난이 그 사람을 더 튼튼하게 만든다. 기복신앙은 이걸 설명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난/어둠의 시기를 지날때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생각한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걸까, 이곳에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그렇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고난의 시기를 지날때 하나님에게 이야기한다.
(Instead of talking about God, he/she talks to God)
기복신앙은 이걸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난/어둠의 시기를 지나며 얻고자하는 최상의 것이 그 문제의 해결이다. 그렇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어둠의 시기를 지나며 얻게되는 것이 하나님 그분이다.
욥이 고난의 끝에 이야기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잘 나타내어준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기복신앙에서는 이것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고난의 시기에, 중심에 자신을 가져다놓고 그로부터 생각을 펼쳐나간다.
그렇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은 고난의 시기에, 자신을 객관화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절대화하는 것으로만 가능하다.
기복신앙은 자기중심성의 산물이지만,
진정한 신앙은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신자를 해방시킨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지난 주말,
내가 좋아하는 형과 짧게 카카오톡을 주고받았다.
잘 지내냐, 뭐 그런 안부도 없이 그냥 틱~ 요건만 간단히 ^^

그 형이 내게 무슨 부탁(?)을 하는 것이었는데,
뭐 그래도 괜찮겠느냐는둥, 해주면 고맙겠다는둥 그런 말 없었다.

오승아,
이거 네가 좀 해야겠다.

그리고 나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그 형이 부탁한대로 했다.

그 형이 그렇게 내게 이야기한건,
그냥 아주 당연히… 그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친한 사람에게 당당하게 그렇게 하라고 이야기할수 있는거다.
명령조가 되어도 좋고, 그 사람 사정 다 봐가면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는 거다.

나도 그 형이 그토록 사랑하는 그 하나님을 눈물 핑 돌도록 사랑하고,
그 형도 내가 마음 다해 섬기는 그 하나님을 고집스럽게 섬기고 있으니까.

그런 형이 있어서 참 좋다.
그런데 그런 형이 너무 멀리 있어서 아쉽다.

순교와 일상

기독교는 순교의 종교이다.
특히 신약성경이 쓰여지던 당시에는 이미 박해와 순교가 시작되고 있었고, 신약성경에는 그 순교에 대한 이야기가 그대로 살아있다.

나는 신앙의 일상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사실 나는 그 신앙의 일상성이라는 모토가 내 신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일반적으로 신앙의 일상성을 이야기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왜냐하면 신앙의 일상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앙을 상수로, 일상을 변수로 놓고 방정식을 푸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변수로, 일상을 상수로 놓고 방정식을 풀려고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한히 일상을 긍정하고, 이미 형성된 일상에 신앙을 녹여보려는 시도를 한다.

나는 묻고 싶다.
그런 신앙과 순교의 신앙은 과연 병립가능한 것인가?

당연히 모든 사람이 순교자가 될 필요는 없다.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의 연장이 순교라는 논리적 전개가 불가능하다면,
나의 일상은, 그리고 나의 신앙은 변질되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