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 후기, 2018 (6)

예전부터 KOSTA 관련된 일을 하면서 제일 골치가 아픈 것 가운데 하나는 어떤 분들에 대한 ‘의전’이었다.
소위 강사들이나 어르신들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미국 KOSTA는 버릇이 없다” 라던가 “미국 KOSTA는 교만하다”는 식의 반응과 소문이 돌게되었다.
그렇게 하다보면 실제로 KOSTA에 참석해야하는 소중한 사람들을 섬기는데 써야할 에너지들이 그런 분들 대접하는데 많이 쓰여지게 된다.

KOSTA 이외에, 지역교회나 지역 모임의 세팅에서 나도 수양회를 열어보기도 했고,
또 수양회 강사가 되어서 다른 지역에 가보기도 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아주 ideal한 강사는, 그 수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최상의 것을 주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되면 수양회를 개최하는 사람과 수양회 강사는 ‘팀(team)’이 된다.
수양회 참석자를 섬기는 ‘팀(team)’이 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적어도 내가 KOSTA를 섬기면서는, 강사들이 정말 나와 함께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었다.
강사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contents들을, 어떻게든 그분들을 잘 대접해서 KOSTA에 참석하는 사람들을 위해 잘 뽑아야겠다고 생각만 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들은 KOSTA의 resource이긴 했지만 KOSTA의 동역자는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몇년동안 그 trend가 많이 바뀌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KOSTA 강사들이 젊어진것과도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다.

가령, 김성환 목사님은,
자기 돈을 들여서 목재를 다 구입하고, 자신의 목공 도구들을 가방에 무겁게 가지고 와서 학생들을 섬겼다.
게다가 금요일 밤을 새우며 평가회를 하고 있는 간사들을 위해서는 coffee도 사주셨다.
이런 분들이 강사로 와 계시면… 아… 정말 이분과는 같은 team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KOSTA 후기, 2018 (5)

내가 보기에,
금년을 거치면서 지난 몇년간 KOSTA에서 많이 노력해온 ‘새로운 세대의 강사’ 개발의 열매들이 아주 가시적으로 무르익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작년 전체집회 강사님들중 나보다 월등히 나이가 위신분은 딱 한분이셨다. 나머지는 나보다 젊거나 나와 같은/비슷한 연배의 분들이셨다.

올해 전체집회 강사님들은 살짝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 계셨지만, 그분들의 감각이 젊기도 하고,
금년에는 평균연령을 왕창 낮춘 여성 간사님 덕분에 분위기가 젊은 분위기였다.

세미나, 멘토, LGS 등의 강사진도 확~ 젊어진 느낌이었다.
그러다보니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전반적으로 강사들의 dynamics가 젊게 느껴졌다.

첫날 저녁 강사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강사님들이 자기 소개를 하시는데,
이제는 많은 강사님들이 ‘코스타 출신’이셨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인디 코스타 출신’이셨다!
완전 긍정적인 사인이다.
그리고 여성 강사의 비율도 그리 섭섭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금년에는 KOSTA 최초로 한국인 여성 강사가 전체집회 설교를 하기도 했다.

우리 간사들이 이걸 위해 엄청 노력 많이 한걸로 아는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그림이 만들어졌다는게 참 감사했다.

KOSTA 후기, 2018 (4)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은혜’라는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었다.
도대체 그 은혜라는게 무엇인지, 왜 은혜가 필요했는지, 은혜가 어떤 방식으로 주어진 것인지를 더 듣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그 내용을 몰라서 그런게 아니다.
그냥 그 이야기는 내 평생 반복해서 내 귀에 들려졌으면 하는 것이다.
내가 평생 그 이야기를 다시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또 되새기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 은혜가 정말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는 그리 많이 나누어지지 않았다.
은혜의 적용, 은혜의 consequence, 은혜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그래도 좀 나눈 것 같은데, 은혜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이 나누어지지 않은 것 같이 느껴진다.

그건 내가 너무 ‘구세대적 감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KOSTA 후기, 2018 (3)

보통 ‘은혜’라고 하면,
그 은혜에 대한 감격이 거의 바로 따라나오게 된다.
그 이유는, 그 은혜의 개인적(personal)인 성격에 대한 강조 때문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의 주어는 ‘나’이다. ‘세상’이나 ‘우리’가 아니다.
그래서 개인적인 죄에대한 강조가 충분히 이루어진 상태에서 주어지는 은혜는 자연스럽게 뜨거운 감사로 연결되게 된다.

그런데,
이번 KOSTA 전체집회에서는 죄의 개인적 차원에서의 강조는 그렇게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녁 설교에서 좀 언급이 되기는 했지만, 그것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사람들로부터 은혜에 대한 감사의 반응이 보여졌다. 내게는 상당히 흥미로운 관찰이었다.
그런데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메커니즘은 이렇게 보여졌다.

– 세상이 망가져 있다.
– 나도 그 망가진 세상의 일부이다.
– 망가진 세상의 일부로서 그 망가진 모습의 피해를 내가 당하고 있다.
– 하나님께서는 망가진 세상의 악한 영향력으로부터 나를 건저내시는 분이시다.
– 물론 당장 직접적으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궁극적이면서도 영속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
– 그러므로 감사하다.

나는 이런 방식의 은혜에 대한 감격을 다른 어느 책에서나, 다른 어느 설교등에서 접해본 기억이 없다.
(혹시 아는 분이 있으면 내게 말씀을 해주시길…^^)

전통적으로 은혜는 개인적, 서정적이었다면,
이번 KOSTA에서 이야기된 은혜는 공동체적, 서사적이었다.

이번 KOSTA 전체집회에서 이루어진 여러가지 presentation은 그런 의미에서
신학적으로 상당히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KOSTA 후기, 2018 (2)

어제 쓴 글을 약간 더 부연설명 하자면,
냅킨전도/true story의 gospel presentation 방법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한글 비디오
영어 비디오

개인의 죄에대한 강조를 통해서, 그 개인이 복음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이야기하는 대신에,
세상이 죄로인해 망가져있다는 강조를 하고,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개인과 더 나아가서 세상 전체를 회복하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일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경 전체의 narrative를 생각해 보았을때,
또 하나님 나라 신학의 관점에서 보았을때,
더 align이 잘 되는 gospel presentation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깨어진 것인 ‘세상’이라는 강조를 주로 함으로 말미암아,
‘개인’이 죄로 망가졌다는 이야기가 약화될 우려가 있다.

나는 이번 KOSTA 전체집회에서 이야기된 은혜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런 true story 식의 gospel presentation과 잘 align이 되어있는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나라 신학의 관점과 더 잘 align되긴 하지만,
은혜의 개인적 영역에 대한 강조가 약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KOSTA 후기, 2018 (1)

10년이 조금 더 지난 일이다.
처음 ‘냅킨전도’ 혹은 ‘true story’ 이야기를 들었을때 나는 마음이 불편했었다.
내가 예전에 배웠던 gospel presentation과는 다른 접근을 했기 때문이었다.
결국은 ‘죄’에 대한 개념을 너무 약화시키고, 죄의 개인적 측면에 대한 강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과연 복음이 복음답게 전달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들었었다.

그러나,
처음 내가 가졌던 거부감과는 달리, 실제로 그런 접근법은 ‘젊은 세대’에게 꽤 relevant하게 전달되는 경험을 개인적으로 했었다.
지금은 내가 흔히 하는 gospel presentation에서도 그래서 냅킨전도식의 이야기를 많이 차용한다.
(물론 거기에 죄의 개인적 측면에 대한 강조를 나름대로 조금 더 넣으려고 노력을 하기는 한다.)

이번 KOSTA에서 다루어진 ‘은혜’라는 것이 내게는 다소 그렇게 느껴졌다.
전통적인 관점으로 보면 이번 KOSTA 전체집회에서 다루어진 은혜 이야기는 뭔가 충분히 파야할 것을 파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들수도 있다.
죄에대한 강조 없이 과연 은혜를 제대로 이야기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내게도 그런 의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죄, 처절한 절망을 맞닥드리지 않는다면 은혜가 충분히 은혜로 다가오기 어렵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번 KOSTA 전체집회에서 나누어진 이야기들을 조금 더 refine 하면, 은혜에 대한 ‘냅킨전도식’ 접근을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은혜라는 개념은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그게 시간이 지나면서 일부 변질되기도 하고, 일부 고루하게 여겨지기도 하면서… 더 이상 전통적인 개념으로 은혜를 이야기하는 설교등을 듣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그러면서 은혜를 충분히 적실성을 가지고 present하는 것 자체도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fresh한 approach로 은혜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argue 할수도 있겠다.
나는 이번 KOSTA 전체집회의 전반적인 흐름에서, 그런 가능성을 살짝 보았다.

많이 울 수 있으면 좋겠다

하나님 앞에 서서
감사의 눈물,
서러움의 눈물,
감격의 눈물이 없다면 내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감사의 눈물,
안타까움의 눈물,
아픔의 눈물,
감격이 눈물이 없다면 내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많이 울 수 있으면 좋겠다.

‘영감’에 의존하는 두려움

나는 일반적으로 ‘준비’를 꽤 열심히 하는 편이다.
미리 미리 하는걸 좋아한다. 그건 내가 일반적으로 두려움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령 회사에서 일을 할때는 몇년후에 일어날수 있는 일들을 미리 예상해서 그것에 대한 대비책을 미리 세워놓는 일들을 할때도 많다.
이걸 de-risking이라고 하는데, 이런 de-risking을 나는 좀 많이 하는 편이다. 그래서 회사에서 일이 많은지도 모르겠다. -.-;

그런데 Christian ministry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그게 잘 안되거나, 그게 불가능한 경우가 있다.
심지어 나는 ‘설교’도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내용을 준비해 가지만, 실제로 듣는 사람들의 표정과 반응을 보기 전 까지는 어떤 내용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하는지 하는 것이 정해지기 어렵다.

기도모임을 인도하는 것도 비슷하다. 때로 기도모임을 하다보면 사람들의 기도요청이 그야말로 럭비공 튀듯이 튈때가 있다.
그건 그 현장에서만 다루어 낼 수 있는 일이다.

이게 어떤건 그냥 ‘순발력’이라는 개인기로 해결하는 경우가 있지만,
정말 어떤땐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 순간을 지나서 돌이켜보면, ‘아니 그때는 내가 그런 얘기를 다 했었네’ ‘그때는 이런 글을 썼구나’ ‘그때는 어떻게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을까’ 등의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그게 그 순간뿐 아니라, 가령 어떤 설교를 준비할때에도, 어떤때는 그야말로 생각과 말씀이 쏟아져들어올때가 있다. 그러면 대부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쏟아져 들어온 생각들을 설교라는 세팅에서 다 풀어내지 못하곤 한다.

아, 물론 늘 그런건 아니다. 그럴때가 있다는 거다.

Christian ministry를 하면서 나는 그렇게 ‘순발력’이라고 표현할수도 있고, 또는 ‘영감’이라고 표현할수도 있는 것에 의존하여 일하는 것을 그렇게 즐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만일 상황에 닥쳤는데 그 영감이 떠오르지 않으면 어떻게 하라고?
그래서 나는 대개 과하게 준비를 할때가 많다. 그런데 그렇게 과하게 준비를 하더라도 늘 ‘승부수’는 순발력/영감으로 부터 비롯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열심히 치밀하게 준비한 것을 다 쏟아 부어도, 아… 이건 뭐 그냥 내가 열심히 한거구나… 그렇게 생각될때가 있고,
어떤땐 그냥 그야말로 ‘튀어나온’ 어떤 말이나 생각이 듣는 사람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일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내 성품으로 보면 나는 순발력/영감에 의존하여 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님보다는 나를 더 신뢰한다.
그렇지만 결국 어떤 상황에 닥치면 내가 열심히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해주셔야한다는 생각을 많이 많이 하게 된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이기 때문이다.

KOSTA를 준비하면서 스스로에게 많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싸워야 하는 대상을 잘 못 골랐어

싸워야 하는 대상을 잘 못 골랐다고 이야기하는건 무슨 조폭영화에서 나올만한 말인 것 같다.
너, 나 잘 못 건드렸어…

뭐 그럴수도 있겠는데…

살다보면 내가 꼭 다루어야만하는 어떤 문제를 만나기도 한다. 일하다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이 한발자국도 더 나가지 않게되는 이슈를 만나기도 하고.
그럴때는 정말 꼭 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그런데 그 핵심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때로는 두려울 수도 있고, 귀찮을 수도 있고, 엄두가 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면 괜히 다른 것이 문제라고 여기고 그것을 공격하거나 해결하려고 들때도 있다.
아니면 지금은 그것을 다루지 않아도 된다고 자기최면을 하면서 넘어가고 싶어할수도 있다.

그러나
싸워야하는 대상이 있다면 맞서야 한다.
그래야 문제가 해결되는 거다.

그런데 그게 쉽나. 그게 안되니 그 상황에서 panic하고, 날카로와지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주저 앉아서 멍때리기도 하고…

예전에는 내 기도가 이랬다.
하나님 내가 싸워야하는 싸움을 잘 싸우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요즘은 내 기도는 이렇다.
하나님 내가 싸우지 못할것 같은 싸움을 만났을때, 당신을 기억하게 해주십시오.

정말 큰 문제가, 마치 등에 큰 용 문신을 한 ‘형님’과 같은 모습으로 떡 하니 지켜 서 있을때,
잘 싸워야지 하고 달려들기 보다는 그 앞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는 거지.

나는 정말 이런 이야기를 지금의 20대, 30대에게 해주고 싶다.
아니, 내가 잘 해줄수 없더라도 그렇게 누군가가 좀 가서 얘기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KOSTA에서의 은혜를 갈망한다.

협상

요즘 회사에서 하는 일의 거의 70~80 % 는 협상이다.
여러 회사들과 여러 형태의 합의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 합의서에 들어가는 아주 작은 문구들을 가지고 양쪽의 변호사들이 잔뜩 redline과 edit을 넣어서 서로에게 보낸다.
어떤 것은 수천만불짜리의 합의서도 있고, 어떤 것은 앞으로 수천만개의 제품을 만들것과 관련된 합의서도 있다.
어제도 이곳 캘리포니아 시간으로 저녁 늦게까지 아시아의 어떤 회사와 conference call을 하면서 그 협상을 열심히 했다.

그런데,
그 회사쪽에서 유난히 특허와 관련된 어떤 문구를 지나치게 고집하는거다.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물어보니까, 실리콘밸리의 어떤 회사와 예전에 비슷한 형태의 계약을 맺은 적이 있었는데,
그 회사가 자신의 기술을 쪽쪽 다 뽑아가서 자기것으로 삼아버리더니 결국 그 기술을 자신의 경쟁회사에 주더란다.
그런 일들을 몇번 겪고 나서는 자기 회사와 기술을 지키기위해서 어쩔수 없이 이렇게 하는 거라고…

그런 짓을 한것으로 알려진 그 실리콘밸리의 회사는 그런 갑질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아주 유명하다. ^^
그러나 그 회사가 워낙 수퍼 갑이기 때문에 부품 공급업체들을 그렇게 어쩔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불평등 계약을 하게 되는데, 결국은 그게 다 자신의 발등을 찍는 것이 결국 되더란다.

아… 그래서 나는 이 협상을 하는데 죽을 맛이다.
우리회사쪽 변호사와 저쪽 회사 변호사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어떻게든 합의점을 찾아보려고 하고 있다.
그 수퍼갑 회사가 퍼질러 놓은 똥을 치우는 것 같은 기분이다. 진짜 그것 때문에 협상이 많이 어렵다.

어떤이의 탐욕은, 그 탐욕의 직접적 피해자 뿐 아니라, 간접적 피해자들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