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dog을 응원하는 재미

Boston Red Sox가 86년만에 World series를 우승했을때 나는 Boston에 있었다.
그야말로 온 도시가 잔치였다.
매년 Yankees에 막혀서 기를 펴지 못하다가, 2004년에는 마침내 우승을 한번 한것이다.

교수들도 8-9월이 되면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꼭 Red Sox 이야기를 했고,
교회 설교에서도 Red Sox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Boston에서는 #1 Radio station이 Sports talk 채널이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만큼 온 도시가 열정적이었다.

그런 큰 이유가운데 하나는,
Red Sox가 underdog이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아주 저 예산 팀에 비하면 그래도 돈을 많이 쓰는 팀이긴 했지만,
그야말로 매년 돈을 팍팍 써가며 최고의 선수를 사 모으던 Yankees에 비하면 사실 늘 underdog인게 사실이었다.

나는 그렇게 underdog을 응원하는게 좋았다.

그런데,
금년에 Red Sox가 무지하게 잘한다. mlb 전체에서 power ranking으로 계속 부동의 1위이다. 승률도 제일 좋고.
선수들이 진짜로 빵빵하다.
그도 그럴 것이 Red Sox가 mlb에서 payroll이 1위다! link

얼마전,
캐나다 사는 조카가 Red Sox와 자신이 응원하는 Blue Jays 경기를 보았는데 Red Sox가 이겼다고 슬퍼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큰아빠는 좋겠다. 라고 했다고…

더 이상 underdog이 아닌 Red Sox를 응원하는건 사실 재미가 덜하다.
돈으로 승리를 사는게 뭐가 재미 있겠나.

그래서, 마음 속으로 나는 요즘 Blue Jays를 응원해보려 하고 있다. 우리 조카가 좋아하는 underdog 이니까. ㅋㅋ

외로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미숙함

1.
내가 이 블로그에서 내 ‘영적 외로움’에 대해 아주 여러번 썼다.
사실 내 영적 외로움을 아주 많은 각도에서의 외로움인데, 그 외로움을 다 이 블로그에서 썼던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냥 많이 외롭다는 이야기를 꽤 많이 썼다.

이건 친구가 없다던가, 말 상대가 없다던가, 뭐 그런 종류의 외로움과는 매우 다른 종류이다.
나는 내게 말 걸어오는 사람들도 많고, (솔직히 어떤땐 너무 많고)
말 상대도 많다. (역시 어떤땐 너무 많다.)
그렇게 사람들이 많음에도 풀리지 않는 영적 외로움이 있다.

2.
그런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가 하는 시도 가운데 하나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서 나와 함께 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건 생각해보면 아주 바보같은 짓이다.
생각이 다른데 어떻게 함께 할 수 있겠는가.

3.
내가 가진 아주 고질적인 잘못된 습관은,
사람들이 모두 나와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좋은 점과 나쁜 점 모두를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때가 정말 많다.)
이만큼 살면서 그토록 많이 그것 때문에 실수도 하고 좌절도 겪었다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은 나와 같지 않다는 것을 좀 알아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그걸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다.
내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 나와 함께 하자고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들이 나와 같을 것이라고 너무 쉽게 assume하기 때문이다.

4.
때로는 꽤 오랫동안 저 친구는 나와 생각이 같으려니… 하고 여겼다가 어떤 순간 그 친구가 나와 아주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부분에서 생각이 다름을 알았을때,
그 친구와 내가 생각이 같다고 생각했던 건… 내가 늘 하는 그런 잘못된 버릇에서 비롯된 실수라는 것을 알았을때,
그래서 어떤 소중한 것을 그 친구와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때가 있다.

5.
그런 순간에 나는 그 친구와 함께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그림을 접어야 하고,
그 친구와 함께 함께 싸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싸움에서 물러나야 하고,
그 친구와 함께 뛸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경주에 기권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 영적 외로움을 피크를 찍는다.

6.
생각해보면 내 영적 외로움은 내 영적 미숙함의 열매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말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일하는지 안다면…

최근에 알게된건데 한국의 리크루터중 어떤 분들은 내 블로그까지 들어오는 것 같다. -.-;
그렇게 들어오시는 분들이 정말 내 글을 어느정도 읽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내가 이직을 고민하는지 하는 것 정도는 아는 것 같다.
(최근에 어떤 분이 내가 이직을 고민한글을 읽었다며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아, 대단하다…

그런데,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은…

정말 내 블로그를 제대로 읽는다면,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일하는가 하는 것도 어느정도 알 수 있을텐데,
그래서 내가 회사에 최대의 이익이 되도록 일하지 않을때도 많다는 것도 알 수도 있을텐데…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을 뽑고 싶을까?

그냥 resume를 모아서 인터뷰까지 연결시키는 사람들이야, 그냥 profile 좋은 사람들 많이 모아오면 그걸로 좋겠지만…
정말 진지하게 나 라는 사람을 뽑을까 말까 고민하는 어떤 회사의 높은 사람이, 내 블로그 글들을 정말 읽는다면…
나 같은 사람을 뽑고 싶을까?

이렇게 시작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정말 내가 일하는 자세를 어떻게 가져야하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나는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무엇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가, 무엇이 가장 가슴아픈가, 무엇에 가장 크게 기뻐하는가 등등.

그래서 정리되는 생각들.

1. 일반적인 통념으로 보았을때, 회사에서 다루기 쉽지 않은, 그래서 어찌보면 그걸 안다면 뽑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돈이나 승진 등으로 control이 불가능하다면 그런 사람은 결국 ‘가치’를 가지고 승부해야하는 건데, 솔직히 그건 윗 사람 입장에서 보아 다루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2. 정말 나는 그런 사람일까?

3. 이 블로그를 닫거나 옮겨야 할까? ^^

비행기표를 사려고 하는데…

9월에 갈 출장일정을 또 짜고 있다.
대충 2주 정도 갈 것 같은데, 또 워낙 많은 회사들을 거쳐야하다보니 여러 회사들과 이야기하면서 일정을 맞추는게 늘 쉽지 않다.
게다가 출장 일정이 한국이나 일본의 휴일과 겹치지 않게 하려다보니 그것도 또 제약이 되고.

그런데,
회사에서 출장갈때 사용하는 여행사 website에서 다음과 같은 일정을 ‘추천’해준다. 이게 싸다고 -.-;
인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덴버로 갔다가, 다시 산호세로 오는… 허걱.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일정도 나온다.
샌프란스시코에서 일본에 가는데, 몬트리올에서 갈아타는 것. 후아… 진짜 완전 후덜덜 돌아가네.
(이걸 확~ 끊어서 몬트리올 공항에서 후다닥 내려서 동생네 찍고, 30분 얼굴보고 다시 공항 돌아오는건 어떨까 그런 생각도 살짝 해보았다. ㅋㅋ)

나는 보통 round-trip 비행기표를 끊지 않고, 여러 곳을 거쳐서 가는 multi-leg으로 비행기표를 끊는데,
이런 것들이 꽤 자주 나온다.

비행기표 가격이 어떻게 정해지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KOSTA 후기, 2018 (21)

KOSTA를 오래 섬기면서 나를 붙들었던 가장 큰 가치는,
KOSTA를 섬기는 것이 내게 아무런 개인적인 유익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KOSTA에서 그렇게 섬기면서 몸에 밴 ‘정신’은 사실 내 전반적인 삶의 자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KOSTA를 다녀보면 여전히,
KOSTA를 섬긴것이 자신의 자랑거리가 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아이러니칼하게도 KOSTA 섬김의 핵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수록 그런 모습은 더 자주 보게 된다.
아니, 이게 뭐라고 여기서 뭐 한게 그렇게도 대단한 거라고…

어쩔수 없이 나는 어찌 하다보니 KOSTA에서 꽤 오랫동안 소위 ‘inner circle’의 사람이 되어 섬겨왔다. 솔직히 inner circle의 사람이 되어서 섬기는거야 뭐 하라면 할 수 있는데… 그게 일종의 ‘권력’이나 ‘명예’가 되어버리는 모습은 정말 나를 힘들게 했었다.

내가 그리는 그림은 이런 것이었다.
KOSTA에서 무엇무엇을 했다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한에는,
(KOSTA가 건강하게 유지된다면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고)
KOSTA의 inner circle에 있는 사람들이 더 nobody가 되어야 KOSTA가 건강하게 유지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자랑거리가 넘쳐나는 욕조의 작은 drain과 같이,
그 가장 핵심이 되는 사람들이 스스로 nobody가 되어야만,
운동의 건강함이 계속 지켜진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정말 영광을 다 받으셔야 하지만,
혹시라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일이 있어야 한다면 그건 KOSTA inner circle에 있는 사람들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박수를 받는 것도 강사들과 다른 섬기시는 분들이 많이 박수를 받고,
inner circle의 사람들은 기둥 뒤에 숨어서 그저 KOSTA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했다는 것이 유일한 reward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막상 KOSTA를 오래 섬겨온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마치 자기가 KOSTA를 좌지우지해온것처럼 떠벌리는 사람들도 만났었다.
소위 KOSTA 간사를 ‘사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KOSTA를 오래 섬겨온 사람들일수록 자신이 nobody가 되는 그런 spirit을 자연스럽게 체득했었고,
그걸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떠벌리는 사람들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블로그에 이렇게 길게 KOSTA 이야기를 쓰는 것이 살짝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블로그야 뭐 들어와서 읽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고, 그나마도 다수가 KOSTA ‘관계자’들이므로… 이렇게 편하게 써본다.

(아마 조만간 관련된 글을 쓰겠지만, 사실 최근에,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의외의 사람들이 이 블로그를 follow 해서 내 ‘동태’를 살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정말 이 글쓰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사실 쓰고 싶은 말들이 아직 더 많긴 하지만,
이걸로 벌써 한달 가까이 코스타 컨퍼런스 관련된 글만 쓰고 있어서…
일단 이 정도로 금년에는 마무리 해보려고 한다.

나는 금년에 집회가 끝나고 나서 다시 한번 내 결심과 헌신을 점검해본다.
나는 KOSTA에 헌신한적이 한번도 없었다. 나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헌신한 것이다.
그래서, KOSTA에 헌신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많이 기쁘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헌신한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많이 눈물이 난다.
이번에 나는 어떤 사람들의 헌신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다.

KOSTA 후기, 2018 (20)

목요일쯤 되니까 여러가지로 힘이 많이 떨어졌다.
특히 목요일날 아침에 LGS를 마치고 나니, 이번엔 잘 하질 못했구나… 하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기도 했다.
목요일에 점심을 먹지 않았는데도 저녁시간에 입맛이 없었다.
그냥 몸과 마음이 좀 늘어지는 것 같았다.

마지막 저녁에 헌신과 기도를 인도해야하는데 힘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잠깐 들었는데, 주변에 빨간조끼를 입은 간사들이 몇명 서 있었다.
많이 피곤해 있는 상태여서 그랬는지 뭔가 비몽사몽 비슷하기도 하고, 뭔가 정신이 clear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그림이 그려졌다.
내가 몸과 마음이 피곤해서 축 늘어져 있는데, 그런 나를 빨간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둘러싸고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는 나는 갑자기 힘이 났다. 웬지 모르겠는데 정말 갑자기 힘이 났다.

감사하게도 그래서 무사히 저녁 기도 인도를 잘 마칠 수 있었다.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잠깐 피곤했었고, 그런데 옆에 간사들이 서 있는걸 보고 힘을 얻었다… 이건데…
나는 이 그림이 유난히 계속 머리 속에 남는다.

우리 간사들을 생각하는 내 마음은 늘…
짠하다. 고맙다. 미안하다.. 그런 것들이었다.

그런데 금년에는…
장하다. 자랑스럽다. 등의 생각이 많이 들었다.

뭐라고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금년의 이런 경험은 아마도 내가 코스타에 참석하는 자세나 간사들을 대하는 자세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

KOSTA 후기, 2018 (19)

작년 가을에는 버지니아의 어느 학부생 모임의 수련회에 강사로 갔었고,
금년 봄에는 노스 캐롤라이나의 어느 대학원생/포스트닥 모임에 수련회 강사로 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모임 사람들을 엄청 많이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아, 물론 그 모임들은 모두 다 KOSTA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분들이 인도하는 모임들이다)

그리고 그 외에도 그 이전에 내가 강사로 갔던 다른 수련회에서 만났던 사람들도 그 후에 꾸준히 다시 만나는 사람들도 있다.
이번에 ‘예전에 저희 교회 오셨을때 뵈었어요’라며 와서 아는척 하는 사람들도 또 만나기도 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해 보았다.
어떻게든 이렇게 비슷한 spirit을 공유하는 여러 모임들을 KOSTA 차원에서 더 support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이런 모임들을 효율적으로 묶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 모임들이 서로 더 큰 힘을 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런 비슷한 spirit을 가진 모임들을 더 많이 찾아서 발굴하고, 그 그룹들을 함께 어떻게든 엮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아직 다 죽지는 않았다.

1942년 성서조선에 김교신 선생이 쓴 “조와”라는 글이 떠올랐다.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다. 층층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연못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연못 속에서 솟아나 한 사람이 꿇어 앉아서 기도하기에는 하늘이 마련해 준 성전이다.

 

이 반석 위에서 때로는 가늘게 때로는 크게 기도하고 간구하고 찬송하다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연못 속에서 바위의 색깔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 속에 큰일이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새로 온 손님에게 접근하는 친구 개구리들. 때로는 5,6 마리, 때로는 7,8마리.

 

늦가을도 지나서 연못 위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하더니 개구리들의 움직임이 날로 날로 느려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연못의 투명함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고막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소식이 막힌 지 무릇 수개월 남짓!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 틈의 얼음 덩어리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개구리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연못 속을 구부려 찾아보았더니 오호라, 개구리 시체 두세 마리가 연못 꼬리에 둥둥 떠다니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연못의 적은 물이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얼어죽은 개구리의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가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KOSTA 후기, 2018 (18)

LGS를 마치고 개인적으로와서 성경공부를 더 하고 싶은데 도움을 달라는 사람들도 있었고,
후에 이메일등으로 연락을 해서 성경공부에 도움을 달라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 모임에 나를 초대해서 성경공부 방법론에 대해 물어보는 조들도 있었다.

내가 LGS에서 했던 건 대단한건 아니고,
그냥 전후 문맥을 가지고 성경본문을 이해하는 연습을 짧게 했을 뿐인데,
그리고 내 생각엔, 그건 너무 간단하고 쉬운 것이어야 하고, 왠만큼 교회에 다녔으면 당연히 접했어야 하는 것 같은데…
그게 신박하다면서 와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이 가슴이 아팠다.

KOSTA conference 후에 따로 이메일을 해오신 어떤 분은,
그동안 말씀을 보는게 많이 dry 했는데 성경을 보는 새로운 excitement가 생겼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예전에 했던 여러가지 강의 녹음, 설교 등을 몇개 급히 찾아서 보내드리면서 꼭 성경공부 잘 해보시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걸 보면 어떤땐 상당히 화가 난다.
아니, 왜 교회에선 성경공부를 시키지 않는 걸까.
아니, 왜 이렇게 성경을 보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보게 하지 않는 걸까.
성경을 조금만 풀어주면 이렇게들 좋아하는데, 도대체 설교에서 왜 성경을 풀어주지 않는 걸까.

KOSTA 후기, 2018 (17)

성경공부를 인도해보면 그것에 반응하는 몇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크게 나누어서는 3부류, 그리고 거의 만날 수 없는 한 부류의 사람들)

첫번째, KOSTA에 참석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어느정도 있다. 그렇지만 그 어느정도 있는 지식이 왜곡되어 있거나 약간만 파고 들어가면 그게 자신이 제대로 알고 있는 지식이라기 보다는 그냥 들은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어떤 내용을 이야기했을때, 그 내용에 대해 조금만 더 파고 들어가서 질문해보면 대답을 하지 못한다.
대개 이런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대단히 ‘종교적’이다.
본문과 거의 무관하게 자신이 알고 있는 종교적인 대답을 내어 놓는다.

두번째, 실제로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이 꽤 있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출석을 하고, 신앙의 연차가 좀 된 사람 중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꽤 많다.
특히 최근에는 과거에 비해서 이런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이다.
사실 가만히 보면 요즘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한다거나 성경을 읽는다거나 하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많은 청년부는 찬양집회후에 짧은 설교, 그리고 ‘교제’를 나눈다.
그나마 많은 설교들은 그냥 종교적인 terminology만을 쏟아놓으며 종교적 열심을 더 내라는 내용이다.
성경을 풀어서 설명해주는 설교를 찾기가 점점 더 어렵다.
그러니 교회에 다니는 일반 대중이 무식해질 수 밖에.

그러나 세번째 부류는,
실제로 성경공부에 관심도 있고, 성경 공부를 시도도 했으나 잘 안되어서 고민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성경을 더 알고 싶은데 어디서 배울데도 없고, 교회에서는 그 필요가 공급이 안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나는 이런 사람들이 꽤 많다고 느낀다. 내가 제일 한편으로 안타깝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도대체 교회에선 왜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 건가!

그리고 마지막 부류는,
사실 내가 거의 만나지 못하는데…
성경연구에 대해서 나와 맞장떠서 대화가 되는 사람들이다.
나름대로 성경연구의 경험도 있고, 신학적인 어느정도의 background도 있어서…
실제로 성경연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왠만하면 거의 만나질 못한다.
내가 제일 답답한 것은… 아니, 기본적으로 적어도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같은 교회 지도자들은 나같은 ‘근본없는’ 평신도 보다는 성경을 좀 더 알아야 하는거 아닌가?
나처럼 하루 종일 죽어라고 직장생활 하면서 성경공부하는 사람들보다, 매일 죽어라고 성경연구를 해야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더 모른다면 그건 좀 문제 아닌가?
그런 차원에서는 좀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한편 좀 암울하게 느끼기도 한다.

KOSTA 후기, 2018 (16)

이번에 LGS를 인도하면서 다소 흥미로운(?) 경험을 했다.
내가 맡았던 그룹은 이제 막 결혼을 한, 90년대생 신혼부부로부터, 60대이상의 어르신까지를 포함하는 그룹이었다.
그 그룹 전체를 하나의 discussion group으로 삼아 성경본문 공부를 인도해야하는 일이 만만치는 않았다.

게다가 내 그룹에는 소위 ‘신학조’라고 KOSTA 내부에서 명명하는…
신학생들과 목회자들로 이루어진 소그룹들이 모두 들어오도록 배정되어 있었다.

문제는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discussion을 독점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나이많은신 분들이 때로는 그분들의 의견을 다소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일들이 좀 있었다. 그중 어떤 목사님은, 내게 “성경을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영으로 읽어야지, 그렇게 세속적으로 앞뒤 문맥 봐가며 역사적 맥락 봐가며 그렇게 읽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살짝 꾸짖기도(?) 하셨다. ^^
참여하셨던 어떤 목사님들은, 평신도인 내가 성경공부를 그렇게 인도하는 것이 좀 불편하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살짝 들기도 한다.

모든 분들의 참여를 discourage 하지 않으려고 그분들의 의견을 끊지 않고 계속 받아드렸는데, 그게 어떤 다른 젊은 참석자들에게는 bother가 되기도 했던 것 같다.
어떤 분들은 아예 session이 끝나고 나서, 그렇게 ‘딴지’를 거시던 목사님(?)에게 가서, 우리는 좋았는데 왜 그렇게 딴지를 거느냐고 오히려 항의를 하는 일이 있기도 했다.

아마 내년 LGS에서는 이런 것들을 잘 감안해서 더 잘 design 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