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동안 감사했습니다!

한해동안 저의 부족한 블로그에 들려서 글도 읽어주시고,
좋은 말씀도 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모두에게, 평화의 왕이 주시는 평화가 가득한 성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저도 며칠 블로그 쉬고, 새해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

성탄 묵상 (5)

아마 나에게,
누군가에게 성탄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하라는 이야기를 하라고 하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것 같다.

  1. 우리의 어그러지고 깨어진 세상, 그 속에서 깨어진 나.
  2. 깨어진 속에서 사람들의 탄식 – 이스라엘 백성의 탄식의 역사를 이야기해주고
  3. 그 속에서 사람들이 가졌던 소망 – 1세기 유다주의가 가졌던 소망들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여서, 그리고 지금 사람들이 가지는 소망에 대한 이야기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소망들.. 그리고 개인의 꿈, 성취, 안정등에 대한 소망)
  4. 망가진 세상 속에서 소망의 망가짐 – 가능하면 시간을 들여서, 그 소망들의 fragments가 궁극적 소망이 되지 못함을 이야기하고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그냥 인류의 역사속에서, 개인적 차원에서)
  5.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소망의 부조리함 – 보잘것 없는 마을의 마굿간에서 태어난 아이가 세상의 희망이 된다는, 얼핏 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3~4)에서 논의했던 소망보다 더 강력한 소망이 되는 역설
  6. 성육신에 대한 신학적 설명 – 성육신이 성도 개인에게 주는 의미를 주로 중심으로 하여
  7. 도무지 뒤집힐수 없을 것 같던 세계질서를 뒤집고 그 백성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시는 하나님의 거대 프로젝트
  8. 지금 우리 안에서 깨어져있는 소망을 다시 한번 돌이켜보고… (사회적, 개인적)
  9. 그 소망이 깨어져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성탄이 소망이 된다는 이야기
  10. 그리고 혹시 가능하다면 그 예수님에 대한 터져나오는 찬양으로 마무리.

아마 나 같은 평신도가 성탄절에 ‘설교’를 할 기회가 있게되지는 않겠지만,
지난 두어주 성탄에대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이 소식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잘 이야기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참 많이 들었다.

성탄 묵상 (4)

첫번째 크리스마스가 이야기하는 소망이 그렇게 부조리한 모습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성탄의 소망역시 그렇게 부조리한 것이 허용된다.

종교가 썩었고, 건강한 복음 자체가 죽어있고, 사회는 하나님 없이 미친듯이 광기에 사로잡혀있고, 지금 우리의 상황이 나아질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속에서도…
그렇게 보잘것없는 말밥통에 태어난 어린아이가 이 상황 속에서의 소망이라는 부조리가 오히려 위로가 되는 것이다.

성탄이 슬프지 않다면, 그것은 아마도 충분히 세상을 읽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탄이 슬픔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복음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성탄은 그렇게 부조리한, 하나님의 승리와 우리의 소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성탄 묵상 (3)

성탄의 의미가 정말 깊게 마음에 담기려면,
우선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대한 깊은 애곡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분이 다시 우리를 찾아오실 수 있는 걸까 하는 간절한 고대.

마카비 혁명도 실패로 돌아가고, 로마의 통치가 계속 되고 있고, 그 와중에 헤롯이라는 미치광이가 유대를 다스리고 있는 상황.
종교지도자들은 종교적 헌신이 소망이라고 이야기하고,
열심당원들은 폭력에 의한 해방을 꿈꾸는 와중에,
그저 이제는 그런 고상한 꿈 다 버리고 현실에 타협해서 살아야 하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승승장구 하는 세상.
그래서 사회적 정의도, 개인적 소망도, 무엇보다도 하나님에 대한 갈망도 모두 엉켜버린 실타래와같이 되어버린 상황.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이 첫번째 크리스마스의 상황을 잘 곱씹어 보면,
이렇게 가슴이 턱 막히는 막막함이 전반적으로 드러나 있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의 어려움, 잃어버림에 대한 자각을 통해,
1세기 유대지방의 상황 안으로 우리가 들어가보아야 성탄의 의미가 잘 새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탄 묵상 (2)

그래서 나는 모닥불이 평화롭게 타고 있고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면서 화기애애하게 사람들이 둘러앉아있는 성탄의 모습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늘씬한 몸매를 가진 젊은 여자가 빨간색 미니스커트에 싼타 모자를 쓰고 신나는 음악에 맞추어 멋진 춤을 추는 모습이 너무나도 shallow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성탄은 그저 잠깐 이웃의 필요를 돌보는 날이라며 의례적으로 시간을 내어 봉사를 하거나 기부를 하는 행동에 무엇인가 빠져있다고 느낀다.

성탄의 핵심 메시지는,
심하게 망가져 있는 세상, 그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애곡함, 그 와중에 너무나도 찌질한 모습으로 오신 평화의 왕, 그런 말도 안되는 그림이 희망이 된다는 아이러니… 이런 것들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성탄에 듣기 참 좋아하는 성탄음악이 O Come O Come Immanuel이다.

나는 성탄에 ‘기뻐하라’고 이야기하는 tone은 이곡에서 나타난 tone이 되어야하지 않나 싶다.
그렇게 기뻐하는게 뭔가 어색해보이는데, 그냥 보기엔 그렇게 기뻐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게 기쁜 사건이 되는 역설이랄까.

성탄 묵상 (1)

나는 성탄시즌에 묵상하기 좋은 주제 가운데 하나가 “잃어버린 것에대한 간절함” 혹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소망”이 아닐까 싶다.

성탄은, 기본적으로 구원자가 이 땅에 온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런데,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 성경에 나와있는 그 사건에 대한 기술들은 꽤나 음침하다.

예수님께서는 십대 여자아이가 자기 의사와 관련없이 임신하게되어 태어나게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 십대 여자아이는 예전에 꿈꾸었을지도 모를 ‘평범하지만 행복한’ 삶을 더 이상 꿈꾸어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시즌에 헤롯이라는 미치광이의 명령에 따라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몰살당한다.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사건 때문에 한 마을 전역에서 통곡소리가 나게 되었다.

말구유라는 구질구질한 환경에서 태어나신 ‘평화의 왕’을 제대로 영접한 것은 목동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사회 최하층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왕을 영접한 사람들이 결국은 그렇게 찌질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성탄이 이렇게 그려진 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엄청나게 어그러진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오히려 더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너무 망가져 있어서…
그냥 화려한, 혹은 멜랑콜리한, 혹은 고결한 방식의 soft-landing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던 거다.

어쩌면 가장 세상권력으로부터 주목받지 못하는, 그래서 가장 soft-landing에 가까운 방식으로 오셨음에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는 시즌에,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분이 고치러오신 그 세상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하는 것이 더 드러나는 방식으로 성경은 성육신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약자의 종교 (10)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 일은,
그 삶의 목적성을 찾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 목적성은 그 자신을 뛰어넘는 큰 목표가 설정될때 제대로 드러난다.
적어도 기독교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일들이 일어나는데 큰 장애가되는 것은 어떤 사람이 가진 ‘약함’이다.
그런데 그 약함은 약함을 긍정함으로써 비로서 극복해나가는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리고 때로 그 여정은 매우 길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 여정이 향하는 방향은 약함에 머무름이 아니라는 것이 이번 내 글의 주장이다.

그리고 약함에 머무르는 것은 삶에서 목표를 찾고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 연결되기도 어렵다.

그런의미에서…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기독교는 ‘약함’을 열등한 것으로 낮추어버리지 않는 매우 드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그 약함을 너머서 궁극적 영광에 이르는 큰 그림을 그려주고 있다.

그런의미에서 기독교는 약자의 종교는 아니다.
그게 내 주장이다. ^^

약자의 종교 (9)

내가 생각하기에,
기독교는 약자됨을 추구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강함과 약함의 개념이 지나치게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복음은 진정한 의미의 강함을 갖게되는 새로운, 그리고 역설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약함이다.
약함을 통해서 강해지는 것이다. – 십자가가 그것을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또한,
어떤 사람의 약함과 강함에 차별을 두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골고루 주어진다는 것이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혁명적 선언이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는 역설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설명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약함은 하나님에게 다가가는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약함은 약함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서 그 본질이 드러나게 된다.

그것은 궁극적인 영광스러움이 다가가는 과정이다.
어떤 사람이 한시적으로 그 사람의 약함에 그저 머물러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을 더 제대로 대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지만 그것은 과정이다.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약자의 종교 (8)

나는,
기본적으로 기독교가 therapeutic한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기독교 복음안에서 상처받은 영혼이 치유받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것은 많이 볼 수 있다. (나도 역시 그랬고)

그렇지만 그런 therapeutic한 성격의 기독교는 그 기독교가 지향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기독교가 지향하는 것에 다다르기 위한 과정과 도구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정말 너무 많이 상처를 받고 약해져 있어서 많은 돌봄과 치유가 필요할수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안고 있는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자신의 상처이외의 다른 것을 보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모두 그 단계에 묶어놓고 있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선포하는 일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이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고, 왕같은 제사장이고,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목적이다.
therapy안에 머물러 있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