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신학을 옹호함?

어린아이에게 복음을 이야기하고자 할때,

하나님의 통치라는 개념에 근거한 하나님 나라,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주권,

성경본문의 역사성과 초월성…

뭐 이런것들을 다 풀어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복음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위의 개념 이외에도 더 많은 복잡한 개념들을 잘 설명해 주어야 하지만,

아직 지적 인지능력과 사고능력, 그리고 경험이 짧은 어린아이에게는…

그저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신다…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서 돌아가셔서, 너는 이제 구원을 받는다. (구원이 뭐라는거 또 썰 풀기 시작하면 한이 없지만… -.-;)

뭐 이렇게 단순하게 얘기해줘야 할것이다.

나는,

어른중에서도, 심지어는 고등교육을 많이 받고, 경험과 나이가 충분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아주 단순한 유년주일학교식 복음을 넘어서는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한참 설명을 해 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도… 잠시 후에 얘기를 들어보면… 복창이 터지는…

번영신학에 근거한 기복신앙은,

그것이 신앙이 종착점이라면 참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아주 유치한 수준의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공급자가 되신다는 것을 이야기해주는 몽학선생으로서 번영신학을 이해해볼수는 없을까?

하나님에 대해,

복음에 대해,

초월적 가치에 대해…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이 천박한 세대를 향해서,

그래도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로 풀어서 번역해 낸 (그러나 오역이 참으로 많은…) 그런 복음이라고 이해해 볼수는 없을까.

40대 아저씨들의 이야기

지난 주말,

이 동네에서, K 간사 리더쉽 모임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소중한 사람들과 여러 이야기를 하고, 토론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참 복되었다.

그리고,

주일 밤…

뭐 그냥 저녁 먹고 E-S 간사 집에 다들 삼삼오오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I 선교단체 대표로 섬기시다가 그만두시고 미국에 오셔서 이제 다시 우리 K 간사로 오랜만에 복귀하신 K 목사님,

K 간사로 10년 섬기시다가, 하나의 씨앗교회 개척 담임 목사님이 되신 A 목사님,

그리고 나…

이렇게 세사람의 40대 중반 아저씨들이 삶과 하나님 나라와 헌신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K 목사님은,

자신이 I 단체 대표로 있을때, 한 6개월 동안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어려울 만큼…

급격한 ‘갱년기’ 증상을 겪었다고 이야기해주셨다. 홀몬 변화도 크고… 삶에 대한 불안, 자신에 대한 회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불만 뭐 그런 것 까지 포함해서…

A 목사님도,

이제는 40대 중반이 되어 자신이 덜 날카로와 지셨다고 이야기해 주셨고,

한편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해 더 편해지셨다고 하셨다.

나는…

뭐 내가 요즘 이 블로그에 쓰는 여러가지 고민들, 생각들 이런걸 또 나누었고,

그런데 나는 뭐 홀몬의 변화 그런런 못느끼겠다고…

눈물이 나온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생각하며 가슴이 뛰는 건 마찬가지라고 말씀을 드렸다.

30대 중반의, JL, HK, EK 간사들은(그리고 잠시 후에 join한 JK간사도) 이 40대 중반 아저씨들의 이야기를, 옆에서 정말 열심히 들었다.

그리고 30대로서 자신의 고민들도 좀 이야기해 주었다.

다소 즉흥적으로 시작된 이야기였는데,

나름대로 K, A 목사님의 스토리를 듣는 것이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도움이 많이 되었고,

30대 중반의 간사들이 나름대로 하고 있는, 인생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고민과 생각도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음…

이런 얘기…

이렇게 마음 잘 맞는 사람들과 더 자주 할 수 있으면 좋겠다.

QT 안하기

20년 넘게,  

QT는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기둥과 같은 것이었다.

삶에서 중요한 순간을 지날때 마다, QT는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금년들어, 아니… 작년 후반 즈음부터…

나는 그 QT를 안하고 있다.

대신 말씀을 통독을 하고, 조금 깊이 기도를 하고…

하나님과 세상과 신앙과 나에 대해 깊이 이리저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한 이유는 다음의 몇가지이다.

1. QT를 하면서… 너무 자주 나는 자의적으로 말씀을 풀어 그것에서 위안을 얻는다. 파편적으로 말씀을 보나보니 문맥에 벗어난 해석과 적용을 하는 일이 너무 많아, 과연 그런 해석과 적용이 제대로 된 것이었나 하는 것에 의구심이 많이 들었다.

2. 교회 전통 속에서, 성경 반장 정도를 가지고 그날의 적용점을 찾아내는 일은… 사실 없었던 것이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성경을 통독을 하거나, 렉티오 디비나 식의 말씀 읽기를 하거나, 기독교 고전을 읽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말씀을 연구하는 일을 했지…. 

말씀 조금을 떼어나가  3P (personal, practical, possible) 식의 적용점을 찾아 그날의 양식으로 삼는 일은… 정말 아주 최근 사람들이 고안해낸 방법이라는 생각을 했다.

3. QT식으로 적용점을 찾아내는 식의 묵상보다는, 통독을 통해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일을 좀 더 하고 싶었다.

이제 그렇게 하기 시작한지 반년이 훨씬 더 지나 1년 가까이 되어 가고 있으니,

뭔가 중간평가를 해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음….

아직은 QT가 그립다. ㅎㅎ

금년말 까지는 그래도 이렇게 좀 더 해보려고 한다.

헌신 중독증(?)

처음 복음을 이해하게 되었을때,

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충격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그것에 ‘올인’했다.

신앙과 헌신이 구별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헌신이라고 했던 것이 얼마나 유치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깨닫는 순간을 반복해서 경험하게 되었고,

또 내 왜곡된 헌신이 나와 다른이들을 해치고 있음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헌신중독증에 걸려있었다고나 할까.

그 증상은 다음과 같다.

더욱 더 극한 헌신을 계속해서 추구하게 된다.

헌신의 짜릿한 자극을 즐긴다.

내 자신의 헌신이 늘 성에 차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내 마음에 차지 않는다.

세상의 99% 크리스천들이 헌신 결핍증에 걸려있다고 생각한다.

미움, 경멸, 증오, 깔봄 등등이 일상화 된다.

나름대로.. 지난 1-2년간,

내 헌신중독증을 좀 치료하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데,

과연 어디까지가 건강한 헌신인지, 어디부터가 건강함을 잃어버린 병적 증세인지, 구별해 내는 것이 참 쉽지 않다.

무능함이 죄일까?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썼던 것 같기도 한데…

어떤 무능한 리더가 있다고 하자.

당연히 그 리더쉽 아래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 리더의 무능함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음…

무능한 리더쉽이라고 하니까, 사고력부족하고, 판단력 딸리고, 우유부단하고, 게으르고… 뭐 그런것만 생각하기 쉬운데… 

자신의 무능함을 감추기 위해, 철권통치를 하는 독재자 역시 무능한 리더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을 포용하고, encourage하면서 끌고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hard-drive 하는, 폭력적 리더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사실 꽤 많이 본다.

그런 리더 밑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생각할때,

그 리더의 무능함은 죄일까?

어떤 사람(A)이, 사랑에의 깊은 목마름을 가지고 있다고 하자.

자신을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그런 따뜻한 친구/동반자가 절실히 필요한 상태이다.

그런데, 이 사람의 가장 친한 친구(B)는 이 사람에게 그런 따뜻함을 제공해줄만한 여건이 되질 못한다.

감성적으로 insensitive 해서 그럴수도 있고, 어떻게 따뜻하게 대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 그럴수도 있고…

좀 더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보면 자기(B)가 심한 병에 걸려서 친구(A)를 행해 따뜻함을 베풀어 줄 수 있는 여건이 안될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친구(B)는 사랑을 주는 친구라는 역할을 놓고 보면, 무능한 것이다.

사실 인간 관계 속에서 이런 무능함은 참 자주 목격한다.

무능한 남편, 무능한 아내, 무능한 부모, 무능한 자녀, 무능한 스승, 무능한 친구…

그렇다면,

A라는 사람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사랑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무능한 B는, 과연 죄를 짓고 있는 걸까?

B의 무능함은 죄일까?

나는,

내 무능함은 죄가 아닌 것으로,

다른 이의 무능함은 죄로,

그렇게 자주 여기고 정죄하는 것 같다.

뭔가 바뀌어야 할 것 같은데…

번영신학 vs. (진보적) 하나님 나라 신학

소위 하나님 나라 신학을 표방하는 이들이 가장 경멸하는 것은,

번영신학의 입장이 아닐까 싶다.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은 ‘하나님 나라 신학’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반면,

번영신학은 혼합주의, 바알주의라고 심하게 비판한다.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로서는,

번영신학을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에 깊이 공감한다.

그런데…

지난 1년여동안 계속 나를 붙들고 있는 소위 ‘초월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번영신학과 (진보적) 하나님 나라 신학은 모두 비슷한 부류로 분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 두 입장 모두 결국,

‘이 땅’에서 뭔가를 이루어내보자는 접근인 것이다.

번영신학은, 이땅에서, 개인적인 번영을 추구하는 입장이고,

진보적 하나님 나라 신학은, 이 땅에서, 함께 잘사는 가치가 구현되는 것을 꿈꾸는 입장이 아닐까.

나는 물론 번영신학을 몹시, 정말 몹시, 싫어하지만,

또 한편… 진보적 하나님 나라 신학의 입장이, 지나치게 ‘이땅’의 것에 집착하는 것 같아… 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땅’의 것이 물론 매우 중요하지만,

‘저 하늘’의 것 역시 포기되어서는 안될 중요한 부분인데 말이다.


(늘 내가 해오던 이야기와 너무 다른 이야기인 것 같이 느껴져 놀라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텐데….)

‘잘믿던’ 사람의 배교/타락

히브리서 6:4-6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타락하면,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이건,

신학적으로 논란이 많은 구절이라고 알고 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냐 아니냐 하는 주제를 다룰때 등장하는 key verse 가운데 하나이고.

나 역시 이런 구절에 대해 내 입장이 몇번 변해 왔었다. ^^

그런데,

최근에는 약간 다른관점에서 이 구절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한번 정말 제대로(?) 찐하게(?) 믿었던 사람이,

혹시 교만하게 된다거나,

자신을 과신하게 된다거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잊어버린다거나,

아니면 잘못된 가르침을 active하게 따르는 일을 한다거나 하면…

이런 사람은,

신앙 형식으로서의 성숙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로 그 내용이 변질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 형식이라는 뼈대가, 이 사람의 잘못된 신앙의 내용을 지탱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어,

이런 사람은 다시 돌이키는 것이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깝도록 어렵다는 것이다.

음…

이게 논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이 얼마나 잘 먹히는 것일지 하는 것에는 사실 딱 자신은 없는데,

주변을 보면, 이건 정말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정말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과 은혜가 아니라면,

타락한(?) 혹은 진리에서 떠난, 아니면 진리에서 약간 어긋난 지도자들/목회자들은… 다시 바로잡히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나 자신을 돌이켜보면,

내가 정말 한 순간 이라도 주님을 ‘잘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는 것에 딱 자신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을 나는 ‘잘 믿는 사람’으로 많이 봐 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나도 내 스스로를 그렇게 보기도 했던 것 같고.

그런 차원에서…. 나도 위에서 언급한 부류의 이런 risk가 대단히 큰 그룹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가끔은…

아… 내가 신앙 연륜이 좀 짧았더라면,

내가 주님과 함께 동행한 스토리가 좀 더 적었더라면,

내 이 잚못된 attitude를 고치는 것이 더 쉬울텐데…

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내 신앙의 이력은, 그런 의미에서,

자랑할 것이라기 보다는,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두려워할 것이 아닌가 싶다.

무지개를 찾아 다니시나요

코스타 온라인 스토어가 열려서,

나도 이제 비로소 지난 코스타 설교/강의들을 듣고 있다.

하루에 하나씩 듣는 것이 목표인데,

영 쉽지는 않다.

그중,

시카고 화요일 구원초청 전에 했던 ‘무지개를 찾아 다니시나요’ 노래가 유난히 내게 많이 마음에 남는다.

음…

솔직히 말하면,

이게 80년대 생들에게 먹힐 노래는 아니다. -.-;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선곡을 잘 못 하신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 노래는, 내가 예수를 믿고 얼마되지 않아서 배웠던 노래였다.

그리고 그때 이 노래를 혼자서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고… 기타를 치며 부르고, 친구들과 만나면 함께 기타치면서 또 부르고… 흥얼 거리고, 휘파람 불고, ‘워크맨’에 테잎을 끼워서 반복해가며 또 듣고… 뭐 하여간 그랬던 노래다.

깨진 꿈, 상한 맘, 지친 몸을 모두 주님께 드리면 슬픈 마음 기쁨으로 변한다는 단순한 가사가 그때는 정말 내게 그렇게 살아있는 고백이 되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지나면서, 내 그 순수한 고백의 열정이 점점 약해지고, 내 깨진 꿈, 상한 맘, 지친 몸을 드리고 있지 않게 되어버린 내 모습을 다시 보게 되었다.

설교를 들으며,

그리고 이 노래를 혼자서 따라하며,

울었다…

드려요, 모두다, 주님께 드려요… 

이런건 좀 들어봐야 함

지난 주말에,

윤환철 국장이 청어람에서 세미나 한 내용을 정말 정신없이 열심히 들었다.

내가 알기로,

이분 나랑 동갑이실텐데… 

아… 참… 대단하다.

이런분이 통일부장관 같은 직책 맡으시고 일좀 제대로 하면 좋을 텐데…

몇가지 든 곁가지 생각.

1. 한국 복음주의권에서, 이렇게 실력있는 전문가가 나올 수 있는건 그래도 소망인걸까.

2. 내가 알기로, 이분을 비롯해서, 한국의 실력있는 복음주의권 전문가중에서… 정말 엄청난 자기 희생을 해가며 치열하게 살고 계신 분들이 꽤 계신데…  그분들 다… 한국 교회에서 받는 support 거의 없이, 아니 솔직히 말하면 한국 교회에서 갖은 핍박을 당해가며 그 일들 하고 계신다. 

아… 그런 한국교회의 일부인 것이 부끄럽다.

3. 나 자신이 부끄럽다. 

이분 블로그가,

http://virtue.tistory.com/

이고,

혹시 facebook 친구 아니신 분들은 친구라도 맺어서 이분 글들 좀 읽어보시길 강추한다.

가령,

지난번에,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을 읽고 쓴… 관전평 글 5개인가 6개짜리 글은,

그것을 잘 읽는 것 만으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