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우상된 교회 (5)

사람은, 기본적으로 신뢰의 근거로 삼을만한 존재가 아니다.

(신뢰의 관계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다. 죄로 인해 어그러진 인간의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어 놓으면, 그 우상은 언젠가는 실망을 줄 수 밖에 없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한국이든 미국이든…

유명한 목회자, 설교가, 저술가의 facebook, blog 등등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며 무서워질때가 있다.

아… 

이렇게 사람을 높여 놓으면….

상대적으로 하나님의 자리가 없어지는데…

혹시라도 이 사람이 무너지고 실패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무너지게 될까.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퍼맨을 만들어 넣고,

그 수펴맨이 제대로 못하면 그 수퍼맨을 비난하는 악한(그리고 연약한) 대중.

그리고 그 악한 대중의 그 flattering에 취해서 기뻐하는 영적 지도자들.

대단히 위험한 구조이다.

사람이 우상된 교회 (4)

다른 이를 우상으로 만들면,

자신은 막중한 부담/책임으로부터 빠져나올 구실을 만들게 된다.

우선,

영적 부담, 책임, 권위를 그 우상에게 돌려버리기 때문에,

자신이 져야하는 부담, 책임, 권위를 피할 수 있다.

혹시 다른이들로부터 비난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그 수퍼맨이 이렇게 하셨다…는 식으로 돌려댈 수 있으니 매우 편한 피할길이 생기는 셈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영웅이니까…

그렇지만 나는 그런 영웅은 아니야. 그러니까 난 못해…

이렇게 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게 정당화된다.

물론,

특별히 아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어떤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이들을 ‘다른 기능을 가진 지체’로 보지 않고,

‘영웅’으로 만들어 버리면…

사람들이 그 흐름 속에서 하나님과 대면할 chance를 놓쳐버리게 되고,

지도자는 타락하고,

사람들은 성장을 멈춘다.

결국… 그저 지도자에 종속되는 second-class-citizen이 양산된다.

사람이 우상된 교회 (3)

어제 쓴 글에서,

누구 하나를 수퍼맨으로 만들어놓고 그 권위를 이용해 먹으려는 시도는,

단지 local 공동체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가령,

기독교 변증을 잘 하는 사람을 하나 찾아내면,

그 사람의 논리를 잘 앵무새와 같이 따라하면서… 그 논리를 숙지한다.

그리고 그 변증가를 우상화한다.

그 후에, 다른 이들과 대화를 나눌때… 그 우상화한 변증가가 위대하다고 추켜세워가며,

앵무새와 같이 숙지한 그 논리를 쭈루룩 펼쳐낸다.

이것은 사람을 너무 높여내는 잘못을 범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앵무새와 같이 논리를 읖조려내는 사람에게 깊은 damage를 준다.

그 사람의 신앙이 대단히 superficial, 혹은 shallow 해지는 것이다.

많은 책을 읽고 지식을 풀어놓는 사람들 -그리고 그 지식의 압박으로 논쟁에서 이기기 좋아하는 사람들 – 은,

그야말로 자기가 하는 이야기를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 채,

멋진 이야기를 하는 자신을 (마음 속에서) 어느새 그 원저자의 수준에 올려놓는 우를 범한다.

그러면서, 더 이상 깊어지지 못하고… superficial한, 혹은 shallow한 지식을 쌓는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서만 깊어질 수 있는 기회를…

‘다른 사람 영웅만들기’ 작업을 하는 바람에,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우상된 교회 (2)

현대의 복음주의는,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위대한 사상가, 신학자, 설교가등에 열광한다.

누가 무슨 얘기를 했다더라 하면 그 책/강연/설교에 대중이 몰린다.

나는 그런 현상 자체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부족하게 지켜내고 있는 신념을, 매우 강력한 방법으로 살아내거나 선포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묘한 흥분과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보면서… (물론, 여기에 나도 포함된다,.)

음….

뭔가 어그러져 있다고 느껴진다.

자신이 잘 못하는 것을 잘 해내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수도 있고,

자신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모습을 통해, 일종의 확신을 얻고싶어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마치 자신이 그렇게 우뚝 서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하는 것일수도 있다.

흔히,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산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많다.

“아, 그 A선배 있잖아. 그 선배 참 대단해. 어떻게 그렇게 헌신해서 사시는지. 지난 15년간 성경공부 인도 한번도 안빠지셨대잖아. 하루에 매일 2시간씩 말씀 묵상 하시고. 그렇게 바쁜 직장 생활 속에서도 그 많은 사역들 어떻게 다 해내시는지 몰라. 책도 많이 읽으시고, 게다가 지역교회도 섬기시잖아. 이메일로 뭐 여쭈어보면 거의 그 즉시 답변해주시더라. 꼼꼼하게 일처리도 잘하시고. 정말 그렇게 헌신한 모습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니까.”

이런식으로 분위기를 만들어가면,

후배들로 하여금, 자, 저기 저 선배를 봐라. 저렇게 하는거다. 하면서 이끌어가기엔 참 편하고 좋다.

누구 하나를 우상화해 놓으면, 그 대상에게 많은 영적인 짐을 지우고 편하게 갈 수 있는 거다.

내가 참 즐겨썼던 방법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것은 참 비겁한 방법이다.

사람의 진정한 변화를, 

예쁘게 치장한 쇼 윈도우의 마네킹을 따라하라면서 이루어보려는 것과도 같다. (너무 비유가 심한가.)

내가 속한 선교단체, 지역교회에 이렇게 멋진 사람이 있으니, 

나도 그런 부류의 사람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 말 잘 들어라…

사람이 우상된 교회 (1)

꽤 오랫동안 미루어온 주제로 3-4번으로 나누어서 글을 써보고자 한다.

이것은, 다른이를 향한 비판의 글이라기보다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나 자신에 대한 회개와 반성의 글이다.

‘모델’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일

사실 모델을 만들면 참 편하다.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화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모델은 추상적인 개념을 축소시키는 위험을 또한 가지고 있다. 좀더 나아가면 환원주의에 빠질 우려도 있다.

현대의 복음주의는,

(그리고, 그곳에 속한 나는)

모델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다.

새로운 신학적 개념을 펼쳐나가는 지역교회의 모델.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평신도의 모델.

하나님 나라가 이땅에서 승리해가는 것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모델…

우선,

이렇게 모델을 만드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는 것일까 하는 것에 대해…

최근 나는 깊은 회의를 가지게 되었다.

모델을 만드는 방식 자체가 전면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모델을 만드는 방식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 선포의 매우 제한적인 보조자료이지, ‘몸통’이 되기 어렵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모델은… 본질을 추구할때 나타나게되는 부산물이지, 그것이 목표가 되면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본질에 뿌리박은 부산물로서의 모델만이, 역설적으로, 진정한 모델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도.

그.런.데…

적어도 내가 접하는 복음주의 지성인들중 너무 많은 사람들은, (물론 나를 포함해서…)

‘모델’을 만들어 내는 일이 답답한 현실을 타개해내는 돌파구가 된다고 믿고 노력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면서… 모델을 만들어내는 작업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정작 본질을 도외시하는 경향도 보인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물론 

그래도 내가 뭐 좀 중요한 contribution하나는 해야지… 하는 명예욕이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다.

내가 무엇을 함으로써 내 significance를 확보하려는…

이런 내 모습을 보며, 내 동지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무겁다.

내 탓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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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oodykos.tistory.com/859] [내 탓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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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고내용 : 명예훼손 게시물 삭제 요청 

•  조치일자 : 201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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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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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된 원글은 다음과 같다.

도대체 이 글의 어디가 그분들의 심기를 거슬렀을까?

문제를 제기한 한국인터넷 선교네트워크 라는 단체(?)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ㅋㅋ

(그 분들이 불편하게 생각하시는걸 보면… 써야할 내용을 쓴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ㅎㅎ)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내용이 명확하게 잘 드러나도록 글을 잘 쓰질 못했는데… 



한국에서 내가 대학때, (대학원 때였던가?)
천주교에서 ‘내 탓이오’ 라는 스티커를 배포했던 적이 있었다.

내 생각이 어린 때여서,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스티커는 또렷하게 기억한다.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가슴이 터지도록 답답한 것들을 많이 본다.
정치가 답답하고, 교육이 답답하고, 청소년이 답답하고, 무엇보다 교회가 답답하다.

(나를 포함해서)
그것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상당히 cool 해 보인다.

가령, 무상급식의 예를 들어보자.
가난한 어린이들이 상처받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야한다는 논리,
무상급식이 사람을 spoil 시키는 복지를 만들어낸다는 논리 등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이런것이 이렇게 큰 이슈가 되었는가?
이제는 ‘선진국’ 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한국에서 왜 식사를 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것이 이토록 뜨거운 이슈가 되어야 하는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우리가… 내가… 우리 사회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던가.
양육강식을 정당하게 여기고, 약자를 배려할줄 모르고, 다른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정당화 하며.. 심지어는 교회도, 그리스도인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우리 사회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 논리와 생각이 모두 고스란히… ‘내 안에’ 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청소년들이 자살을 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가 청소년들을 그렇게 키웠다. 공부만 잘해, 친구들 배려할 필요 없어, 좋은대학만 가… 라고 우리가, 내가, 우리 사회가, 심지어는 교회도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가르쳤으니… 우리가 우리 사회를 그렇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 논리와 생각이 모두 고스란히… ‘내 안에’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 사회의 리더로 여겨지는 이들의 integrity 문제,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어쩌면, 바로 내 안에 있는 그 논리와 생각을 발견해내는 일이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웃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단순히 이웃의 문제가 아니고,
그 이웃과 엮여져 있는 우리의 문제이고, 나의 문제이다.
그 이웃을 고통으로 밀어넣고 있는 그 논리와 생각이 고스란히 내 안에 있다.

이웃, 또 다른 우리.

시편이 그래도 조금 읽혀진다!

예전에… 내가 이런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도대체 시편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별로 논리적이지도 않고,

어떻게 분석해야하는지도 모르겠고…

올해들어서 계속 성경통독을 하고 있는데, (새해 결심중 하나. ^^)

원래는 올해 한해동안 2독을 하는 것을 목표로 시작했으나…

요즘 시편을 읽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1독하고 약간 시간어 더 남을 수 있을 것 같다. -.-; 쩝..)

그런데,

물론 대단한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문득, 아… 시편이 읽혀진다… 이런 느낌을 갖는다. ^^

그래도 세월이 지나면서,

내가 이제는 시편이 읽혀질정도의 깊이는 된 것일까.

뭐 아직 갈길이 까마득하게 멀긴 하겠지만서두…

사치

나는,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을 ‘사치’라고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인류 역사상 많은 사람들에 비해,

사실 정말 그렇다.

내가 대단히 부자는 아니지만,

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현재 이 지구상의 모든 인류에 비하면 여전히 대단히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셈이고…

모든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교육의 기회를 얻었고,

모든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문화적 혜택, 사회적 자유 등등을 다 누리고 있으므로.

그런 시각으로 보면,

나를 포함해서 소위 ‘서구사회’ 혹은 ‘선진국’에 사는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이기적이고 몰인정한 사람들이 된다.

(그리고 그런 시각은 사실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미 인권, 자유, 문화 등등에 노출된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존적으로…

그것이 사치가 아니라 필수요소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가령,

어려서부터 부유한 환경 속에서 늘 자라오면서 경제적으로 절약하며 때로는 마음 졸이며 사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자라온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꽤 풍족한 환경 속에서, 여러 문화적 경제적 혜택을 누리고 살면서도… 자신이 자라온 환경과 같이 살 수 없다는 것이 큰 어려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런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느끼는 각박함과 빈곤함 때문에 힘들어 한다면,

그 사람을 그저 비난할 것은 아니다.

동생과의 대화

최근,
내 동생과 나눈 대화가 머리 속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하는 결정 자체를 그렇게 많이 신뢰하지 못하는 편이다.
아니, 좀 더 좁혀서 이야기하면, 나 자신에 데헤서 내가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 신뢰를 잘 못하는 편이다.
그것은 내 죄성, 비뚤어진 동기가 얼마나 내개 뿌리깊게 들어와 있는지 하는 것을 어느정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때는, ‘circumstantial evidence’를 내 마음 속의 확신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내가 어떤 직장으로 갈까 하는 것을 고민하며 기도할때,
내가 가고 싶은 직장, 내게 끌리는 직장 을 선택하기 보다는,
여러 환경을 보니… 이렇게 인도가 되는 것 같다 고 느끼는 선택을 하는 것을 더 편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자…내 동생은 내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오빠는 민우가 어떤 삶을 살길 원하나.
creative하고, 자신이 가진 성품과 재능을 마음껏 누리고 그것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섬기며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느냐.
하나님께서도 그렇지 않으시겠느냐.
예수를 그만큼 믿어 왔으면, ‘마음의 음성’을 좀 신뢰하고 결정해볼수도 있지 않겠느냐…

나는 내 동생에게,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내 안의 성령께서 계신것을 알지만, 내 꼬여있는 죄성에 의해 지배당하는 가리워진 agenda를 피해나갈 자신이 없다.

라고 말했다.

동생과 그 대화를 나눈지 열흘이 더 되어 가는데,
아직도 마음 속에서 참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이 맴돈다.

동생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게 참 감사하다.

Emergence

개미는,

한마리 한마리를 두고 보면 그야말로 매우 ‘멍청’하지만,

개미가 떼를 이루어 사는 개미의 집단을 보면 매우 놀라운 일을 해낸다.

놀라운 건축물을 만들기도 하고, 어린아이들을 돌보고, 질서있는 전투를 하고, 번식을 해 내가고, social order도 만들어 낸다. 

인간의 뇌를 보면,

뉴론이라고 불리우는 unit으로 되어 있다.

각각의 뉴론은 일종의 전기 신호를 주고 받으면서 머리 속에서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 내는데,

각각의 뉴론 하나 하나를 떼어놓고 보면 그야말로 전류 signal을 매개하는 작은 unit일 뿐인데, 

이 ‘멍청한’ 뉴론들이 모여서, 인간의 Brain을 만든다. 그리고 인간의 Brian  매우 복잡하고 위대한 생각을 해 낼 수 있다.

인간사회에도 이것은 적용될 수 있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주, 인간 개인보다 함께 만들어내는 인간의 사회/집단은 개인보다 더 현명하다.

또 재미있는 것은,

어떤 한 개인에게 소 100마리의 무게를 추측해봐라 라고 하면 대단히 늘쭉날쭉이라도 한다.

그런데, 100명쯤 되는 사람에게 소 100마리의 무게를 추측해모라고 한 후, 그 추측값의 평균을 구하면, 실제 값과 대단히 비슷하게 나온다고 한다.

이와 같이 능력이 없는 작은 unit이 많이 모여서,

매우 능력있는 큰 unit (집단, 모임)을 만들어 내는 것을 Emergence라고 한다.

나는 일반적으로,

일반은총 속에 나타난 법칙 같은 것을 무리하게 ‘영적 원리’로 삼아 여기 저기 apply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Emergence 라고 불리우는 이런 현상은,

혹시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관련해서 어떤 것을 시사해주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요즘 많이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