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ransitions (1)

금년을 시작하면서,

‘새해 결심’ 시리지의 글을 통해서,

내가 일종의 어떤 ‘transition’을 겪고 있는 것 같다고 쓴적이 있었다.

정말, 나는 지금, 확실히 어떤 transition을 겪고 있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아주 일방적으로 나를 drive 해나가시고 계시다는 느낌이다.

몇번의 글을 통해서, 내가 겪었던 transition을 설명하고, 지금 내 transition을 이해해보려는 시도를 해보려고 한다.

1.

내가 겪은 가장 큰 transition은 무엇보다도 회심이었다.

89-90년에 걸쳐 일어났는데,

성경을 연구하다가 겪게 되었다.

은혜, 사랑, 소망, 회복, 하나님 나라, 구원, 성숙 등의 개념등에 사로잡혀,

그야말로 밤낮으로 눈물을 쏟아내었다.

기존에 살았던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일종의 ‘멘붕’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 아직 새로운 가치관은 제대로 다 세워지지 않았는데, 기존의 가치관은 와르르 무너져내려버렸으니 그럴만도 했다.

2.

두번째로 겪은 transition은, 좀 작은 scale이었는데 92-93년에 일종의 ‘영적 침체’를 겪으면서 였다.

새롭게 받아들이 복음의 뜨거움이 아직 살아 있는데, 하나님이 예전과 같이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나름대로 말씀 연구, 각종 종교활동등에 열중하기도 했고, 새로운 시도 (신비주의 계열의 기도모임)를 하기도 했었다.

이것은 내 연약함을 잘 깨닫게 된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신앙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넓은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나는 ‘사역자’가 되어갔다.

거대담론의 missing link?

‘고난’과 그 고난 속에서의 ‘소망’에 대해 거대담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현재의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지로부터 벗어나 있는 상태이다.

그 왜곡 때문에 인간을 비롯한 전 피조세계는 고통을 당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왜곡과 고통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그 피조세계를 회복/구원시키신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를 이땅에 보내셨고, 예수의 선포와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제는 회복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지금 비록 고통과 왜곡 속에 살지만, 그것은 이제 회복의 역사 속에서 해결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소망이 주어졌다.

음…

그런데,

이거 좋은데…

깨어진 세계, 그 속에서 회복에의 소망… 

그렇다면, 현재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냥 이 피조세계의 회복이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에…

그냥 이 고통/왜곡을 견디어내며 살도록 던져진 것인가?

흔히 타락을 회복시키시는 것으로만 복음을 설명할때의 missing link는 ‘현재’이다.

과거(타락)과 미래(회복)은 설명을 해 주는데,

현재가 어중간하게 잘 설명이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복음이 이야기하는 ‘현재’에 대한 스토리는 이것이다.

임마누엘. God with us.

하나님께서 그 고통속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동행, 그 안에서 그 백성 다운 모습으로 만들어짐,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남 

(그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표현이 이럴땐 더 좋은 것 같다.)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그 눈물 속에 함께 하고 계신다고 이야기한다.

자유

내가 20여년 전 처음 복음을 내것으로 받아들였을때,

내 본질 자체를 깊이 흔들었던 몇가지 개념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은혜, 하나님의 통치, 회복, 절대적 사랑 등등의 개념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깨달음을 통해서 내게 찾아왔던 가장 깊은 기쁨의 내용은 바로 ‘자유’였다.

나는 정말 복음을 알고 얼마나 자유로왔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자유케 하는 복음 이라는 내용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도 많고, 부족한 신앙의 깊이에 비해서는 경험도 많고, 그리고 하고 싶은 말도 많다.

그리고… 물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도 정말 많고.

지난 10여년의 기간 동안,

매년 코스타의 주제를 한해씩 묵상하면서 나는 참 여러가지 신앙의 성숙과 성장을 경험했었다.

어떤때는.. 아니 이런건 좀 묵상 덜해도 될텐데… 싶은 경우도 있었는데,

그럴때도 하나님께서는 여러가지 환경과 사람들과 생각등을 통해서 주제를 묵상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많이 나를 들들 볶으셨다. ^^

내가 요즘, 예전과는 좀 다른 color의 묵상을 많이 하고 있는데,

그런 묵상이 ‘자유’라는 내용으로 향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좀 든다.

올해는 아마… 내가 코스타 집회에도 참석을 못할 가능성이 많고,

간사들과 fellowship을 나누는 것도 거의 전혀 못하고 있고…

그래서 그런가… 하나님께서는 올해 유난히 심하게 들들 볶으시며 여러 내용들을 묵상하게 하신다.

혼자 떨어져 있더라도 너무 뒤쳐지지 말라는 하나님의 배려일까. ㅎㅎ

내가 사는 동네도,

‘봄’이라는 시즌이 분명히 있긴 하다.

하루걸러 오던 비가 좀 잦아지고,

기온이 살짝 높아져서 낮에도 가끔 밖에 반팔을 입을 정도가 되면…

그게 봄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맞았던 봄이나,

보스턴에서 맞았던 봄을 생각해보면…

참 가슴 설레는 기대가 늘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겨울이 길고 지루한 보스턴에서…

어쩌다 3월이나 4월에 하루 날이 좋으면 사람들이 ‘오바’해서 얇게 입고 뉴베리 스트리트나, 찰스 강변에 나와는 것을 볼 수 있다.

아… 봄이구나… 그런 탄성이 나오게 된다.

내가 사는 이 동네는,

참 날씨가 좋아 감사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아니 솔직히 꽤 자주… 사계절이 그립다.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 아픔을 공감하기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내가 갖는 깊은 갈등 가운데 하나는 이것이다.

왜 도대체 나는,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는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는가.

내가 깊은 시련과 절망과 고통을 경험한 정도까지만…. 다른 이들의 시련과 절망과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 같다.

게다가 나는 내가 조금만 좀 편해지만… 그 고통에 대한 기억을 쉽게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고,

그래서 다른 이들의 아픔에 대해 깊이 마음으로 공감하는 것을 역시 까~맣~게~ 잊게 되는 것 같다.

내 개인적으로,

참 마음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겪는다거나,

마음이 많이 힘들어지는 어려움을 겪는다거나,

혹은 깊은 좌절을 경험하는 시기에야 나는…

고통받는 다른 이들을 위해 마음을 다해 기도하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언제나… 철이 들까.

그래도 잠깐 자랑질은 해야겠기에… ㅋㅋ

지난 주말,

‘동네 애들’이 모여서 하는 Math Olympics에 민우가 학교 대표로 나갔다.

작년에는 computation 분야로 출전해서 상을 받았는데,

금년에는 reasoning 분야로 출전해서 상을 또 받아왔다.

(아 ,참고로, 뒤에 리본 쌓여 있는걸 보면 알겠지만… 사실 참석한 사람의 40% 정도는 대충 상을 받았던 것 같다. 그야말로 상을 남발하는 뭐 그런 동네 대회다. 대단한건 아니고… )

감기에 걸려서 그 전전날은 학교에서 조퇴를 할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그래서 그날 아침에 겨우 일어나서 아침도 제대로 못먹고 가서 시험을 봤는데…

그래도 이렇게 상을 받고서는 기분이 좋아한다. 무진장 쑥스러워 하면서 ^^

가만 생각해보면,

나는 수학경시대회 뭐 그런것에서 상받은 기억이 없는데…

이런거… 엄마 닮은 건가. ㅋㅋ

강점으로 일하라? 부족한 점은 어쩌라고…

성도들을 성추행해서 물의를 일으킨 

J 목사가 예전에 쓴 ‘강점으로 일하라’라는 책이 있었다.

나는 뭐 그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분의 설교를 꽤 많이 들어보았으므로 어떤 내용이었을지는 대충 알 것 같다. ^^

한편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그 사람의 강점을 자꾸 더 develop해서 그것을 이용해서 step-up 해야지, 자신의 부족한 면에 집중하다보면 자꾸만 down 되어서 일을 잘 하기가 어렵다.

사실 소위 ‘self-help’ 혹은 ‘자기 계발’ 계열의 책들이 다들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강점을 잘 활용해서 성공하라고.

사람을, functional unit으로 보면 정말 그렇다.

사람의 존재 목적 자체가 얼마나 제대로 perform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다면 정말 그렇다.

그런데,

사람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귀중한 존재가 아닐까.

사람은 functional unit 혹은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위대한 존재가 아닌가.

그리고,

특히 복음을 받아들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이라면,

이제 평생 자신의 모든 인격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 그분을 닮는 길을 사는 것이고.

그렇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여정을 걸어가는데에 있어서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부족한 면을 자꾸 깊이 다루시곤 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내 경험에서는 그렇다.)

가령, 내가 참을성이 부족하면, 그걸 평생 포기하지 않으시고 내 삶속에서 끈질기게 다루어내신다.

아니… 이제 좀 그만좀 하시지… 하는 생각이 들정도로.. 아주 집요하게.. 하나님께서는 내 약점을 깊이 다루어내신다.

왜냐하면, 그 약점 때문에 내 전 존재가 그리스도를 닮는 여정을 가지 못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다른 강점이 잘 develop된다고 하더라도,

어떤 특정한 약점 하나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으면,

영적 성장이 한 걸음도 더 이루저 지지 않는 경우를 참 많이 경험하곤 한다.

목회자의 인간적 야망을 ‘비전’이라고 치장하는 교회에서 흔히…

‘강점으로 일하라’는 식의 message를 많이 듣게 되고,

사람의 본질적 변화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공동체일 수록,

약점을 다루어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분명 우연은 아닌 듯 하다.

용서와 망각

제가 지난주에 쓴 글중,

용서를 위해서는 잊는 것이 필요하다는 글에 대해 많은 분들이 No~를 외쳐 주셨습니다.

이에 대해 몇가지 좀 정리를 한번 해보려고요… ^^

용서는 망각을 필요로 하는가.

아직은 좀 자신이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용서와 망각이 무관하다는 입장으로 아직 후퇴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용서에 망각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에 약간의 배경 설명이 더 필요 할 것 같다.

가령,

사기꾼에게 당해서 재산을 몽땅 날린 일이 있다고 하자.

그래서 온 가족이 몇년간 혹독한 고통을 당하고, 온간 수모를 겼었다고 하자.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식들에게 모욕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이것은 그 사람에게 매우 큰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상처를 끄집어내어 확인할 때 마다 그 사람은,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을 자꾸만 생각하며 미워하게 될 것이고.

여기에서… 나는 그 사기꾼을 잊어버린다거나, 그 사건을 잊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때 그 사건이 일어났을때, 나와 온 가족이 고생과 수모를 겼었던 그 ‘상처’를 잊어버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다.

그때 얼마나 그것이 아팠는지…. 하는 그 생생한 기억이 무디어지고 희미해지는 과정을 통해서,

혹은 그 상처의 기억이 상대화되고 trivialize되는 과정을 통해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 날카로운 상처의 생생한 기억을 무디게 하는 것은 물론,

오랜 시간이 걸려 이루어 질 수도 있지만,

‘은혜’라는 강력한 해독제가 그 마음 안에 떨어져서,

생생한 상처의 기억을 무디에 만들어서… 혹은 상처의 기억을 상대화시켜서….

용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어쩌면,

아픈 기억의 상처 자체에 집중하지 않고,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의 ‘인격’을 ‘은혜’의 과정을 통해 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용서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 것이다.

계속 상처 자체에 연연해서 매달리고 있는 한,

그 상처의 생생한 기억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한,

그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뭐 자신이 없는 생각이긴 하지만서두,

혹시 좋은 comment, feedback 있으면 좀 주시와요. ^^

Hurried

예전 직장에서 일을 할때는,

일이 많긴 했지만, 내가 control할 수 있었고, 그래서 호흡 조절도 가능했었다.

그런데 A사에서 일하면서는,

내가 바쁜 정도를 내가 control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고,

그저 정신없이 위에서 벽돌이 떨어지는데 key를 눌러가며 tetris를 하는 것과 같이 살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전 직장에서 지금보다 훨씬 더 ‘쫓겨서’ 살았던 것 같다.

소위 ‘분주함’이 늘 마음 속에 있었고… 그 분주함을 manage하며 살았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바쁘긴한데,

마음 속에서 더 ‘분주함’이 넘쳐나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가만 생각해보면…

아마도 올해 새해 결심으로 내가 했던 것 중에,

“passive한 삶”과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까지는 새해 결심을 다 까멱고 살고 있지는 않은 듯… ㅎㅎ

요즘은…

요즘은,

매일 블로그에 글을 쓰고 들어올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대개는 주말에 5일분을 써놓고, 혹시 시간이 되면 들어와서 약간 수정하는 수준으로 글을 쓰고 있다.

글쓰기가 시원치 않아진게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일까.

뭔가 블로그에 활기도 없는 것 같고.. ㅎㅎ

아직은 설익은 생각을 매일 쓰는 것에 자꾸 회의가 들기도 하고…

게다가 시간도…

자꾸 글쓰기를 계속할지 고민이 많은데…

아직까지는 그저..

몸과 마음이 바빠셔 급한 일로 쫓기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려니…

생각하며 버티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