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아젠다가 될때…

‘사랑’은 참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사링은 그것이 ‘아젠다’가 될때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내 딸을 사랑하는 것을 예를 들어 풀어보자.

나는 내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이를 위해서 최선의 것을 주고 싶어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 삶의 많은 부분을 그 아이를 향한 사랑에 맞추게 되고…

그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기도 하고, 사랑과 충돌하는 다른 아젠다들을 없애 나가기도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 딸을 사랑하는 사랑은, 내 삶의 다른 아젠다들과 대결구도를 형성하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내 딸을 향한 내 사랑은 하나의 아젠다가 되어 버린다.

즉,

딸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해야하는 high-priority to-do list에 들어가게 되고,

나는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런 과정을 겪게 된다.

그렇게 되면, 너무나도 자주…

내 사랑에서… 내 딸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요소가 희석되게 되고,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가치가 핏기 없고 차가운 아젠다로 전락하게 된다.

글쎄,

모든 사람이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너무나도 자주 사랑을 아젠다로 환원시켜버리는 우를 범하곤 한다.

내가 목숨을 다해 사랑한다고 늘 마음에 두고 있는 내 아내나 민우를 향한 사랑도 그렇고,

다른 가족을 위한 사랑이나,

내가 섬기는 사람들을 위한 사랑,

공동체나 사역을 향한 사랑…

더 나아가서 주님을 향한 사랑 까지도…

나는 자주 내 아내에게,

나는 너를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사랑한다…

이렇게 항변하는데,

내 아내는 그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아마도,

생명 넘치는 사랑을,

아젠다로 환원시켜버리는 내 못된 습성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용서를 위해서는 잊어야 하는 걸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용서가 이루어 지는 걸까?


여러가지 인간적인 오해가 논리적으로 풀려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내게 해를 가한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을 갖게 되어서 해결되기도 하고,

혹은 시간이 지나 그 사건/사람/관계 등을 잊게되어 용서하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리스도인들은… 

내 죄를 용서받은 것이 너무 크기 때문에, 나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하면 은혜에 대한 깊은 인식 때문에, 나도 은혜를 베풀게 된다는 것인데…



나는,

유난히 한번 화가 나면 잘 풀지 못하고,

내게 잘못한 것을 용서하지 못하는 편이다.


그래서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용서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참 많이 하면서 신앙생활을 해 왔는데…


물론 내가 은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다른이들에게 그 은혜를 베풀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말 용서의 과정을 밟게되는 것을 가만히 살펴 관찰해보면,


결국은 내가 받은 은혜의 크기가 너무 커서,

내게 돌아온 불이익, 피해, 억울함 등등을 trivialize하게 되고,

그래서 그 상처의 날카로움이 ‘잊혀지는’ 과정을 통해서 용서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아들여 용서를 하는 과정 역시,

‘망각’이 용서의 핵심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즉, 용서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 날카롭게 찔린 것을 ‘망각’하느냐 하는 것인데…

강력한 은혜가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고.


나는 잘은 모르지만,

미라슬라브 볼프가 이야기하는 용서도 바로 이런 mechanism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그런데 분명한건,

자세한 mechanism은 잘 모르겠는데…

내가 은혜에 대한 인식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따라서 용서가 더 잘 이루어지기는 한다는 것이다.

위험한 상황에서의 마음의 평안

아주 좁고 꾸불꾸불한 낭떠러지 길을, 

매우 빠른 속도록 운전해서 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자.

(뭐 뒤에서 악당이 쫓아오는 것과 같은 진부한 예를 들어도 좋겠다. ㅎㅎ)

그럴때,

다음 세가지 경우 가운데 어떤 경우에 가장 마음이 불안할까?

(1) 나와 운전 솜씨가 비슷한 친구가 운전을 하고 있고 나는 그 옆자리에 앉아있는 경우

(2) 그래도 꽤 운전솜씨가 괜찮은 내가 운전을 하고 있는 경우

(3) 세계 최고의 운전사가 (그래서 사고 날 가능성의 0%인) 운전을 하고 있고 나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경우.

물론 아마 불안한 것부터 평안한 것까지 순서대로 차례를 매기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 (2) > (3)

대개는,

(상황이 어느정도 manageable한 경우에)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으면 나와 비슷한 운전솜씨의 친구가 운전을 하고 있을때보다 더 마음의 평안이 있는 것 같다.

내가 control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런의미에서 더 마음에 평안을 주는것 같다.

그렇지만 그 운전대를 잡은 사람의 솜씨가 절대적이라면, 그 경우에 훨씬 더 마음에 평안이 있을 것이다.

경제적인 문제로 힘들어 하거나,

진로의 문제로 힘들어 하거나,

기타 여러가지 위기와 난관을 만났을때 역시…

이와 비슷한 것 같다.

내가 아무런 control을 잡고 있지 않은 경우 가장 불안하고,

그나마 내가 약간의 control을 잡고 있는 경우 좀 덜 불안하지만…

결국 그 난관을 움직이시는 절대자를 신뢰하는 것만큼 마음에 평안을 주는 option은 없는 것 같다.

이 과정을 가는데 있어서…

절대자의 신뢰를 찾는 과정이…

(1)에서 (3)으로 바로 건너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2)의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3)으로 가게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자신의 상황에 불안감을 가지곤 하는 겁쟁이 내게 가끔 이렇게 호통을 친다.

야 임마.

좀 일어나서 정신차려!

그리고 뭐라도 좀 해봐.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럼 당장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깊은 골짜기로부터는 나올 수 있을꺼야.

그리고 나서 차차 눈을 들어,

네 삶을 주관하고 계신 절대자를 좀 바라봐.

그렇게 하지 않는 한,

네 걱정을 끊이질 않을꺼야.

들개가 된 토끼

나는 어려서부터 참 겁이 많았다.

꽤 커서까지, 세발자전거를 탈 용기가 나지 않아, 한살 아래 여동생이 타면 그 뒤에 쪼그리고 앉아서 탈만큼 겁이 많았다.

그렇게 겁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늘 ‘안정’을 추구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내게 있어서 ‘안정’을 보장해주는 가장 중요한 key는 공부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거나, 성취감을 느끼거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공부했다기 보다는,

그것이 내게 안정을 가져온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나서, 그러나… 

나는 대단히 큰 혼란을 겪었다.

그렇게 안정을 제공해준다고 믿었던 공부가,

내 궁극적 소망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한동안 사실 나는 그 새롭게 보게된 진리를 인정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살아온 관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여러 경험들과 깨달음을 통해서 나는 조금씩 조금씩 야성을 갖게 되었다.

내 궁극적 안정성의 근거가 내게 있거나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지/정/의의 차원에서 인정하며 배워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요즘 내 자신을 보면서…

나는 아직도 여전히 겁이 참 많긴 하지만,

예전에 토끼와 같이 겁이 많았던 모습에서 이제는… 

야수와 같은 모습 까지는 아직 되지 못하다고 해도, 적어도 들개 수준을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복음은…

정말 사람을 바꾸는 것 같다.

하나의 씨앗교회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그야말로,

정말…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것과 같이 시작하고 있는데,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은 작업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관심 있는 분들은,

많이들 물어봐주시길… ㅎㅎ

그리고 많이 기도해주시길!

http://www.hanaseed.org

며칠동안…

대략 지난 두주 정도 동안,

아침 7시에 집에서 나가서 밤 12시쯤 돌아오는 일정을 계속 반복하였다.

주말에도 내내 빈 office에서 혼자서 일을 해야할만큼 일이 많았다.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 중에,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참 쉽지 않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아주 바쁜 일들중에 그야말로 ‘단순 노동’을 해야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렇게 단순노동을 하고 있는 중에는,

여러가지 설교, 강의 등등을 들으며 했었는데…

그러던중,

작년 youth KOSTA 세미나 강의중 다 듣지 못한 것들을 마저 들었다.

듣다가,

그 어린 친구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해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한 강사의 passion이 느껴져서,

혼자서 눈물을 흘렸다.

꿈틀…

초월적 세계관 (12)

(1)번 글에서 썼던 것 같이,

나는 기독교 세계관의 한가지 해석 방법이 복음 전체를 설명해 내는 것과 같이 접근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내가 여기서 언급한 초월적 세계관이 복음의 요체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어떤 이들에게는  개혁주의적/영역주권론적 세계관이 유용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평화주의적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언급한 세계관의 접근이 혹시…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한채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약간의 가이드를 제공해주는 것이 될수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몇번의 글을 써 보았다.

한가지 더 덧붙일 것은,

아마도 현실을 피하지말고 좀더 현실에 부딛혀야 하는 사람들,

이런 초월적 세계관 보다는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이런 식의 현실초월적 세계관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진취적이어서 인본주의적이 되어버린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초월적 세계관에 한번 마음을 담그어보는 것이 더 좋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이런류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나는 세계관에 대한 논의가,

all-or-nothing 식의 접근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겸손한 방법으로 진행되면…

환원주의(reductionism)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더 많은 이들이 복음의 풍성함을 누리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초월적 세계관 (11)

초월적 세계관을 누리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또 한가지는,

하나님 앞에서 수동적이 되는 자세이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vulnerable해져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의 모습을 가지셨던 주님의 자세를 담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될 뿐 아니라 주(Lord)가 되신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과 의도와 계획은 순종하는 것이 절대적이다.


그리고 예수를 주로 삼고 따르며 사는 것은 또한,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움직이는 것을 전제한다.


피동성, Lordship, 성령…


사실,

개인적으로… 대략 10년쯤 전에,

개혁주의적 세계관이 가지는 정복주의적 성경에 많이 마음이 불편하여 대안을 생각하던중에,

나름대로 내가 생각했던 중요한 key concept은 ‘Lordship’ 이었다.

(그래서 여기저기 다니면서 Lordship 얘기를 무지 많이 하고 다녔었다. ㅎㅎ)


어쩌면,

Lordship을 정복주의의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logic의 뒤에는,

이런 초월적 세계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초월적 세계관 (10)

현실적으로,

이러한 초월성을 실천해 내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
우선 일차적으로는,
주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대담론에 근거한 복음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인격적으로 나를 다루시고 사랑하시는 인격적 복음을 깊이 마음속에 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이것을 반복해서 reminder해주는 좋은 가르침을 통해,

논리적 변증이나 가르침, 설득이 아니라 선포와 경배가 이루어지는 공적 예배를 통해,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것을 반복해서 곱씹는 개인 경건생활을 통해서 깊어지고 유지될 수 있는 것 같다.

십자가와 부활, 죄의 용서,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열심, 광대하신 하나님 등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정 기간, 예를 들면 사순절 등과 같은 시즌에 이것을 깊이 reminder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그리고 또…

나는 기도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자신의 말을 따다닥 뱉어내는 기도가 아니라… (물론 처음 기도는 그렇게 시작하곤 하지만…)

정말 깊이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수용해내는 그런 기도 말이다.

그야말로 기도를 통해서 하늘이 열리는 그런 기도.

그러나,

나는 이렇게 기도를 할때,

소위 ‘자신 안에 계시는 주님’을 찾는… 일부 contemplative prayer를 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식의 기도보다는,

초월적 하나님이 우리 밖에서 부터 (extra nos) 공급해주시는 은혜를 사모하는 기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기도가 아주 깊어지면,

밖에서 오는 은혜와 내 안의 성령께서 나를 다스리시는 기도가 만나는 경험을 할 수도 있겠지만…

초월적 세계관 (9)

그렇다면,

과연 이런 세계관은 세상과의 interaction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해주는가?

그저 세상과 격리된 ‘초월적인 경험’을 통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suggest하는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그런 면이 있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기본적으로, 이 세계관에서는,

일반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혹은 복음이 관심을 가지는 ‘약자’들은,

그들이 세상을 바꿀 힘도, 심지어는 세상을 거스를 힘도 없음을 전제한다.

물론 어떤 특별한 재능을 더 주신 이들이,

세상을 바꾸는 일에 헌신해서 일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약자들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이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일차적인 방법은,

자신이 경험하는 초월을 통해서 세상을 trivialize하는 자세를 통해서이다.

그것을 통해, 세상과 다름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그 모든 흐름을 바꾸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내가 모든 것을 바꿀 수도 없고, 바꿀 필요도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다라는… 어찌보면 passive한 생각과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