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기분 좋은 꿈

나는 별로 꿈을 꾸지 않는데,

어제 밤에는 매우 생생한 꿈을 꾸었다.

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꿈이라기 보다는, 이 아침에 일어나서 무척 기분이 좋은 그런 꿈이었다.

꽤 큰 강당과 같은 곳이었는데,

나는 커다란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무슨 준비위원이나 진행위원 그런거 아니고, 그냥 참석자였다. ㅎㅎ

오후에 약간 쉬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나는 뭔가 좀 더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생각에 그 큰 집회 장소에 갔다. 혼자 기도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데 신기한건, 하나 둘 사람들이 그 쉬는 시간에 모여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금새 그 큰 장소를 가득 채웠다.

부랴부랴 한 사람이 기타를 들고 찬양을 인도하며 찬양이 시작되었고, 앞에 앉아 계시던 ㄱㄷㅇ 간사님께서(!!) 성경을 뒤적이시더니 설교를 하셨다.

말씀을 듣고, 함께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찬송을 불렀고, 곧 이어서 기도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 장소를 가득 채운… 아마 수천명은 된 것 같았다… 그 청년들과 함께, 나는 찬송, 말씀, 기도에 푹 적셔지는 경험을 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 예배가 아닌,

정말 함께 하는 사람들과 깊이 그 예배 자체에 빠지는 그런 예배를 드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눈물로 기도하다가 잠에서 깨었다.

아… 참 깨고 싶지 않은 꿈이었다.

이 아침부터,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함은 찬송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참 멋진 아침이다.

이런 후보들이 나오는 대통령선거라면?

어떤 사람들이 대통령 후보로 나오는 선거라면 내가 참 기쁘게 그 과정을 지켜볼 수 있을까?

한국도 미국도 대통령선거전이 한참이어서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적어도 나는 한국과 미국의 보수정당의 후보들은 지지하기가 참 어렵다.

그런데, 만약… 원래 보수가 가져야하는 올바른 가치를 주장하는 후보가 보수 후보라면 어떨까?

가령, 자유, 인권, 정의, 법치, 공동체를 위한 헌신 등등.

만일 그렇다면 나는 누구에게 투표할까?

가만 생각해보면, 아마 나는 그렇다면 정말 많이 고민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는 진보가 더 잘 되어서 집권을 하는 것 보다는…

보수가 좀 제대로 건강해져서 내가 보수에게 투표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을 그런 상황이 되는 것을 더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친일, 군사쿠데타, 독재, 구식 이데올로기, 부패, 정경유착, 지역주의, 대북 강경주의, 신자유주의, 승자독식, 불균형, 불평등, 인권탄압… 등등의 비합리적, 비도덕적, 비상식적, 비민주적, 비평화적… 모습..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라 수구이니 말이다.

보수(保守), 그야말로 무엇을 지키고 보존하는 입장이어야 하는데,

적어도 한국의 현재 보수 정치세력은 잘못된 것을 지키고 보존하고 있는 듯.

엘리트!?! – 덧붙여서

주말동안, 지난 금요일에 썼던 내용을 곱씹어 생각해 보았다.

‘내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뭐랄까 너무 objective하게 써서 뭔가 제대로 내 고민이 풀어진 것 같지도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또, 내가 이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적이 별로 없었구나 하는 사실에 나 스스로 많이 놀라기도 했다.

내 이야기를 풀자면 이렇다.

나는 꽤 어릴때부터 나를 ‘엘리트’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늘 공부를 잘했고, 소위 반장 같은거 안빼먹고 계속 햇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늘 리더였다.

고등학교, 대학을 거치면서 그런 나 자신에 대한 평가는 더 견고하게 되었다.

사회적 교육의 영향이었을까, 부모님의 가르침이었을까…

나는 내가 가진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이용해서 세상에 이롭게 하도록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늘 했었다.

나, 엘리트, 사회에 대한 책임…. 이것이 내게는 계속 하나로 엮여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복음을 알게된 후에 생겼다.

내가 기존에 생각하던, 사회적 책임을 지는 엘리트라는 framework이, 내가 새롭게 받아들인 복음에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급격히 나는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엘리트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고 고쳐나가는 작업을 했지만, 그와 함께 내 ‘커리어’의 차원에서보면 엘리트로서의 조건을 더 많이 쌓아나가는, 어찌보면 이율배반적인 path를 계속해 나갔다. 영역주권론에 근거하여, 엘리트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약간 다시 귀를 기울이며 내 학업/전문성의 이유를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근거한 영역주권론 자체에 일부 회의를 갖게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전반적으로 엘리트로서 내 책임에 대해 비중을 두기보다는, 같은 시대에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과의 연대성을 갖는 것에 비중을 두고 내 직장생활, 전문분야 활동을 해왔다. 그런 생각 때문에, irreversible한 직업상의 선택을 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아닌 사람과 나를 동일시 할 수 없다는 것을 많이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하더라도,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내 background (학력, 경력, 능력 등등) 때문에, 나는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과 같아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나보다 낮은 학력이나 경력을 가지는 사람들보다 내가 우월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core belief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나는… 내가 아닌 사람들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역사를 엘리트가 만들어 가느냐, 대중이 만들어 가느냐,

역사와 사회 속에서 엘리트가 감당해야하는 역할은 무엇이냐…

그런 거창한 scale의 질문을 던지면서 해답을 찾으려 하면 좀 막막한데,

실제 그런 질문이 현실적인 고민이 되는 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질문에 답을 찾으려하니, 여전히 막막하긴 하지만, 막연하지는 않다. ^^

적어도 현재까지는,

엘리트주의 혹은 반엘리트주의 양쪽 극단에 다 치우치지 않고,

그때그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서 self-positioning을 해나가고 있는 셈이다.

엘리트?!?

내가 대학교에 다닐때만 하더라도, (그게 이제 25년 전이군. ^^)

대학생은 엘리트였고, 그 엘리트가 해야하는 역할은 아직 충분히 깨지 못한 ‘민중’을 데리고 함께 미래로 가는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 같다.

운동권들은 그 가야하는 미래를 사회주의로 보았고,

보수적인 학생들은 자본주의적 번영으로 보았고.

그런의미에서 엘리트는 참 중요한 역할이라고 여겨졌고, 그 엘리트 반열에 들어있는 사람들 역시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의 무게를 어느정도는 인식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우선, 그 엘리트 그룹의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심지어는 소위 명문대를 마친다 하더라도 그 엘리트 그룹에 편입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엘리트 그룹이 나머지 사회에 가지는 책임감이나 역사의식 같은 것이 사실 별로 보이질 않는다.

그저 기득권 이라는 차원에서 자신이 가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 같아 보인다.

과거 엘리트가 아직 생존의 어려움을 겪는 민중을 함께 이끌고 가야한다는 고민을 했다면,

지금 그 사람들은 스스로 사회나 체체의 피해자가 되어 생존에 매달리고 있게 되었다.

그런 변화하는 시대를 지난 20+년 살아오면서,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복음을 받아들여 진정한 의미에서의 역사의식과 소명을 발견한, 그리고 발견하고 있는 나는,

나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규정하며 살았던 시기도 거쳤고, 의도적으로 그것을 거부하려고 했던 시기도 거쳤다.

지금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고민을 많이 해본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는 과연 엘리트로서의 소명과 책임을 느끼며 살아야하는 입장일까? 

그렇지 않으면 나도 역시 ‘민중’의 한 사람으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적절한 현실 인식일까?

만일, 내가 그런 엘리트 위치에 있다면,

나는 underprivileged 사람들과의 연대성을 더 깊이 느껴며 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내게 그들을 이끌고 가야하는 소명이 주어진걸까.

위에 대한 해답은 아마 ‘somewhere in the middle’ 이 되겠지만,

요즘 나와 내 아내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며 기도하는 와중에,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 상황, 의미, 소명을 많이 고민하게 된다.

How to Be Evangelical Without Being Conservative

어제, “How To Be Evangelical Without Being Conservative” (by Roger Olson) 이라는 책을 한권 끝냈다.

정확하게 말하면 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audio book을 사서 들었다. (노안… ㅋㅋ)

우아, 대박!

저자는, 보수적이 되지 않으면서도 복음주의자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을 너머,

오히려 보수적이 되는 것이 복음주의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아주 명쾌하게 풀어나간다.

Introduction : Who’s an “Evangelical” and What Does “Conservative” Mean?

1장 Being Biblical without Orthodoxy

2장 Building Character without Moralism

3장 Celebrating America without Nationalism

4장 Seeking Truth without Certainty

5장 Taking the Bible Seriously without Literalism

6장 Being Religionless without Secularism

7장 Transforming Culture without Domination

8장 Redistributing Wealth without Socialism

9장 Relativizing without Rejecting Theology

10장 Updating without Trivializing Worship

11장 Accepting without Affirming Flawed People

12장 Practicing Equality without Sacrificing Difference

Conclusion : Toward a Postconservative Evangelicalism

이 정도의 책이면,

복음주의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정말 무엇이 복음주의인지 하는 것을 더 잘 파악하는데 도움을 줄만한 훈련교재로도 쓸만할 것 같다.

한국말로도 번역이 된 것 같다. 

“보수와 자유를 넘어 21세기 복음주의로”

영어 제목이 좀 더 마음에 들긴 하는데… ^^

많은이들에게 강추한다!

마누란 기도 스타일!

어제 아침 10시가 좀 넘어서 아내가 내게 카카오톡을 보내왔다.

우리 집에서 거의 한시간 반쯤 떨어져 있는 기도원에 갔다고!

허억. 갑자기 기도원을.

요즘 아직 일을 시작하기 직전이어서 시간이 좀 남는 편인데,

그런 짬을 이용해서 기도원에 가기로 한 모양이다.

아침에 미팅을 하나 끝내고 office에서 이런 저런 이메일을 쓰고 받고 있는데 그런 카카오톡 메시지가 온 것이다.

나는 거기서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지 간략하게 알려주었더니만,

내 아내는 거기서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는데 그게 그렇게 좋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마누란 기도 스타일’ 이라고 답을 해 주었다. ㅎㅎ

기도 스타일의 사람이 되는 것, 기도 스타일의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

깊이 연구하고 teaching 하고 싶은 성경 본문

지난번 간사 수양회를 위해서 디모데후서를 다시 한번 깊이 공부하고 묵상할 수 있었던건, 내게도 참 큰 유익이 있었다.

다시 좀 여러가지 생각을 가다듬으면서,

그동안 아, 이런 본문을 좀 여러사람과 함께 공부도 하고 강해도 하고 나누어보면 좋겠다 싶었던 책들을 좀 정리해 보았다.

다니엘서 전반부 (엘리트 디아스포라의 관점에서)

베드로전후서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누가복음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요한계시록 (하나님 나라, 제국 속의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관점에서)

사사기 (현 시대를 비추어 읽어보는 의미에서)

그리고.. 로마서 (허억! – 이건, 아주 많은 복합적인 의미인데… 쩝.)

이런 본문들이 내 마음에 많이 들어온다.

이 본문들을 좀 더 깊이보고 연구하며 사람들에게 나눌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연봉 협상

아직 내가 직장과 관련해서 어떻게 할지 100%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한쪽에서는 지금 열심히 offer letter가 만들어져서 오고 있고,

또 다른 어떤 start-up company 에서는 어떻게 내 사정을 또 알았는지 (-.-;) engineering leadership position을 채우고 싶다고 내게 연락을 해왔다.

(그런데 재미있는건, 내게 먼저 연락을 해온 쪽은 대개 많이 적극적인데, 내가 먼저 연락을 하면 대개 reply가 없다. 사실 지난주에 3-4개의 회사에 더 apply를 했는데…)

적어도 한 회사로부터는 verbal offer를 받았고 진행되기 따라서는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작업이 곧 이루어질수도 있겠다.

아, 물론 지금 현재 회사에서도 뭔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작업을 계속 하고 있기도 하다. ^^ 여전히 많은 이메일도 주고 받고 있고, 여전히 이런 저런 실험을 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구체적으로 소위 연봉 협상이라는 것을 하면서, 

어떻게든 월급을 더 받아내려고 많이 노력을 하고, 리크루터와 밀고 당기는 게임을 하는 일을 해야하나… 하는 고민을 하던차에, (사실 나는 이렇게 밀고 당기며 협상하는 것을 즐긴다. ㅎㅎ)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에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지금 내가 있는 회사에서, 나는 소위 market value보다 더 낮은 월급을 받으면서 일해왔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H사 직원들의 연봉 수준도 대충 알게 되었는데, 그룹에 대한 contribution도 형편없고, 일도 잘 못하는 사람들도 나보다 더 많이 받는 것을 알고 마음이 많이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아, 정말 fair 하지 않다…

물론, 누구나 자신을 over-estimate하는 경향들이 있으므로, 나도 역시 실제 나보다도 나를 더 잘 평가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뭐 우리 lab director도 이 부분은 확실히 그렇다고 인정 했으니…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 하다.

그렇지만, I’m entitled to this… I deserve this 라는 식의 사고방식이 나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고, 심하게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불편하게 만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내게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졌으므로 그것을 성실하게 맡아 섬기는 청지기로서 살아내겠다고 하는 청지기적 자세를 많이 망가뜨리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내면적으로 많이 힘겹게 싸워야 했다.

이제 연봉협상을 하면서, 내게 비슷한 욕심이 떠오르는 것을 본다. 뭔가 밀고 당기면서 내게 최상의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마음. 한푼이라도 더 많이 받아내고자 하는 마음. 내가 그렇게도 극복하려고 노력해온 sense of entitlement.

내가 많이 좋아하는 동역자이자 친구 한 사람은, 예전에 job을 찾을때, 두가지 offer를 놓고, 자신에게 두번째로 좋아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결정을 했었다. 나는 그게 참 신선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서 소위 job market이라는 system에 자신을 팔아넘기지(sell-out) 않고, 욕심의 노예가 되는 것을 피하겠다는 의도였다.

깊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는 요즘, 

내가 sense of entitlement에 사로잡혀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하는 것 같다. 

(그것이 반드시 그저 passive하고 무기력해지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내가 잘 하는대로 목청을 높여 주장을 하기도 하고, 강경한 입장을 지키는 것도 필요하다.)

sense of entitlement에 매여 사는 삶이 아니라, 청지기로서의 삶,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그렇게 깨어있음이 꼭 요구되는 것 같다.

또, 어머니의 생신

이번주 토요일은 어머니의 생신이다.

지난주엔가 전화를 드렸더니…

내 생일이 차라리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신다.

(외할머니께서 그렇게 늘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자식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되는 것이 미안하고 부담스러워라고.

생신이라고 뭐 한번 제대로 해드리지도 못하고,

어머니 생신날 어머니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 것이 벌써 15년이 넘었는데…

(민우가 3살때였나, 어머니께서 생신 즈음에 보스턴에 오셔서 딱 한번 함께 보낸적이 있긴 있었군.)

어머니의 생신이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어머니께 감사하지만…

한편 멀리서만 축하를 드리는 내 모습이 죄송스러워,

차라리 어머니께 부담이라도 한번 드릴만큼 축하라도 할 수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든다.

욕망해도 괜찮아

Shiker 간사님이 내게 한번 읽어보라고 던져 주신, “욕망해도 괜찮아”를 어제야 결국 다 읽었다. -.-;

내가 책을 빨리 읽는 사람은 아니지만, 7월 말에 내가 그 책을 받고 두달이나 걸릴만큼 그렇게까지 심한 사람은 아닌데, 이 책은 우선 책읽기를 시작하는데 아주 오래걸렸다. ^^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내가 새롭게 취득해야하는 정보의 양이 늘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양보다 10배쯤 많다…는 압박에서 살고 있는 터라, 투자한 시간에 대비해서 충분한 효과가 있는 책이 아니라면 쉽게 손이 가질 않는데, 이 책이 딱 그런 느낌이었다. 웬지 이 책을 읽는 것이 그렇게 효율적인 시간활용이 아닐 것 같은 생각.

책을 다 읽고나서?

음… 뭐랄까…

한편 뭐, 오랜만에 읽으면서 그 문장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다시 따져봐야하는 것이 아닌 책을 읽어서… 좀 어색했지만, 결국 쭈루룩 읽어 내려갔다.

김두식 교수님…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잘 알겠는데, 나는 솔직히 그분의 결론에 좀 동의하기 어렵다.

책 맨 마지막에 나온대로, 욕망은 B형 간염 바이러스 같은 놈이어서, 그걸 데리고 잘 살면 괜찮은데, 그걸 때려잡으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글쎄…

김두식 교수의 분류에 따르면, 나는 아주 극단적으로 계(戒)의 사람인데,

그래서 그런걸까.

나는 그 욕망을 많은 경우 때려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그리고 잘못된 욕망을 건강한 욕망으로 replace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계(戒) 자체를 자신의 색(色)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한 성숙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계(戒)를 그냥 내게 주어진, 내것이 아닌 계(戒)의 상태에서 지켜내는 일을 하다보면 색(色)을 억누를수밖에 없고, 그래서 지랄총량의 법칙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지만…

그런 의미에서 무조건 계(戒)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강요받는 것은 건강하지 못한 것이지만 말이다.

내가 계속 계(戒)의 사람이어서 그런걸까.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계속 근본주의적인 사람일 수 밖에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