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focal 안경!

최근,

밤에 책을 읽는 것이 좀 풀편했다.

그래서 어제 눈 검사를 받았다.

이런 저런 검사를 해보더니만, eye-doctor가 내게 하는 말이,

Bi-focal 안경 쓰는걸 생각해 보란다!

(원래 안경의 아래쪽에 돗수가 다른 부분이 함께 섞여있는 그런 안경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지금 쓰는 안경이 괜찮은데,

가까운 것을 볼때나 책을 읽을 때는 돗수를 약간 낮춘 것이 좋다고…

이제 ‘노안’이 시작된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뭐 특별히 어떤 감상이 없는데,

다만 책읽는 일이 다소 번거롭고 불편해지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웬지 좀 안타깝다고나 할까.

이럴줄 알았으면, 눈이 더 좋을때 책을 더 많이 읽는 건데 말이다…

Introvert

나를 대충 아는 사람들이 나를 일반적으로 판단하는 것과는 달리…

나는 introvert 이다. ^^

나는 천명이 넘는 사람 앞에서 presentation을 할때, 보통은 긴장하기 보다는 신이 나고,

다른 사람과 여러 생각을 나누는 것을 즐기고,

적극적으로 여러 사람과 여러 대화를 나누지만,

그러나 나는 여전히 introvert 이다.

어릴때, 친구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소위 발표력이 좋은 아이로 분류되었었고,

비교적 친구를 쉽게 사귀는 아이였지만,

그러나 나는 여전히 introvert 이다.

내 사춘기 시절, 나는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본다거나, 가계에서 가격을 물어보는 것 조차 힘들어 했었다.

그럴 바예는 내가 차라리 좀 더 고생을 하는게 낫다고 늘 여겼었다.

대학교 때 연극을 열심히 하면서,

나는 말하자면 이 성향을 극복하고자 많이 노력했었다.

일부러 연극 홍보를 위해, 캠퍼스를 연극 의상을 입고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바락 바락 지르기도 했었고,

일부러 여자 속옷을 파는 가계에 들어가서 이것 저것 가격을 물어보고 나오는 훈련(?)을 하기도 했었다. ^^

예수님을 만난 이후,

교회에서 여러가지 형태로 섬기기 시작하면서,

모르는 사람이 처음 교회에 나온걸 보면,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그 사람들에게 가서 말을 붙이곤 했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내 introvert로서의 부정적 성향이 많이 나아졌던 것 같다.

(아, 물론 introvert가 좋은 점도 참 많다! ㅎㅎ)

왜 내가 여전히 introvert라고 스스로 생각하냐고?

나는, 혼자 있을때 에너지가 충전된다.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언제나 에너지가 소비된다.

예전보다는 그 소비되는 정도가 많이 감소하긴 했지만…

특히 아주 많이 extrovert한, 그렇게 가깝지 않은 사람과 오래 이야기를 하면…

꽤 많이 지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때로 내가 더 적극적이 되어야 할 때에는,

많이 ‘오바’해가면서 노력을 하기도 한다.

내가 하고싶지 않은 일이어도, 그게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렇게 ‘오바’해서 노력을 할때면, 귓볼이 살짝 뜨거워지거나 빨개지곤 한다. (이게 반복되는 노력으로 많이 나아지긴 했다. ㅎㅎ)

심지어 매우 열광적으로, 열정적으로 사람들과 생각을 나눈 후에나,

격렬한 토론을 한 다음이나,

혹은 중요한 presentation 같은 것들을 끝낸 후에,

나는 그것을 다시 ‘복기’해보며 가만히 혼자서 있는 시간을 참 많이 즐기는 것 같다.

(좀 성격 이상한 사람인가… -.-;)

아주 많이 지쳐있을 때엔,

내가 좋아하는 오디오 북, 설교, podcast, 혹은 음악을 들으면서…

이제는 20년도 더 된 컴퓨터 게임을 혼자 하는 것을 즐긴다. (수호지라고… 옛날 XT 시절에 나온 게임인데 ㅎㅎ)

아주 괴상한 stress 해소법이다. ㅎㅎ

내 아내는, 아니, 그 똑같은걸 그렇게 많이 하면 재미있냐고 신기하게 물어본다. ^^

돌이켜보면,

지난 1-2년 동안, 그렇게 혼자서 무언가 들으면서 그 게임을 했던 시간이 예전보다 더 많았던 것 같다.

이래저래, 충전의 시간이 많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Resume

내가 처한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요즘은 내 resume (혹은 CV)와 linkedin의 profile을 시간날때마다 update 한다.

publication이나, 우리 그룹에서 학회 발표한 것들은, 언제 했었는지 다 기억도 안나서…

그냥 대충 하다가 말았다. -.-;

(아, 물론 내가 잘한거라기 보다는 우리 그룹사람들이 잘 한것에 내 이름도 끼워준게 대부분이다. ㅎㅎ)

그래도 생각했던 것보다는 publication이나 conference presentation도 꽤 있고,

했던 경험들, project들, 새로 배운 지식과 skill, 각종 결과물… 이제는 이것 저것 꽤 누적되어 있는 것을 보는데…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resume가 이야기하는 사람보다 더 괜찮은 qualification을 가진 사람인가,

그렇지 않으면 resume로 보면 번지르르한데 실제로는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인가.

나를 직장에서 잘 아는 사람이,

내 resume를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아… 이거 참… 이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하는게 막상 여기 잘 들어나질 않았네.

이 친구의 passion과, 사려깊음과, 겸손함과, 성실함 등등은 여기에 어떻게 쓸수가 없는 거잖아.

이 친구랑 일하면 늘 좋은데, 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되다니…

내 전체적인 qualification이 내 resume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면 좋겠다.

내 contribution이, 내가 받는 recognition보다 훨씬 더 큰 사람이 되면 좋겠다.

특히,

resume를 뻥튀기지 않아도 직장을 잡을 수 있거나, 자신이 일하는것보다 보수를 더 적게 받아도 생활이 가능한 사람들에게는…

위의 내용은 그저 권장사항이 아니라,

꼭 감당해야하는 사명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이 깨어진 경제체제, 세상에서 말이다.

직장 고민 (3)

지금 A사와 관련해서 내가 고민하는 생각들은 대충 다음과 같다.

(1) 지난 일년여 동안 내 삶을 성찰해 보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내가 사람을 키우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많이 노력을 기울이며 지난 15년 정도를 살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점점…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사는 삶을 깊이 있기 이야기하기에는, 내 삶이 충분히 치열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런 고민을 더 많이 하던 차였다.

내가 선호하는 것을 갖추어놓고 그것 안에 안주(?)하는 삶 보다는, 내 한계를 깨뜨리는 치열한 삶 속에서만 할 수 있는 하나님과의 다이나믹한 교제, 깊이있는 깨달음 등등이 내게 더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다.

그런데 A사의 이 일은, 어쩌면 그런 것과 잘 맞아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2) 그런데, 또 다른 요인은…

이쪽이 돈을 더 많이 주는 것 같다. 아직 offer letter는 못받았지만, 대충 알아본 바에 의하면… 뭐 대충 그렇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내가 이게… 돈때문에 내가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타협하는건 아닌가 뭐 그런 고민이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3) A사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온 느낌은…

마치 내가 MIT에 가서 사람들을 처음 만났을때의 느낌 같았다.

매우 talented group이고, 야망도 크고…

MIT에서 지내면서 나는 그 사람들을 많이 동경하기도 했고, 시기하기도 했고, 모방하려 하기도 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많이 단련되고 훈련도 되었지만 한편 많이 내면이 망가지는 결과도 가져오게 되었고.

지금 나는… 이제는 그런 환경에 다시 던져지더라도 망가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걸까.

이제는 내가 충분히 그렇게 성숙한 걸까.

한편 그걸 좀 테스트 해보고 싶기도 하고, 한편 그것이 좀 두렵기도 하다.

(4) 지금 A사의 이 position은, 해외여행이 많다.

많으면 최대 40% 까지 travel 할 수도 있다고 한다. 대충 전체 시간의 20-30% 수준이라고 하긴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 가족은?

또, 내가 섬기고 있는 여러가지 일들은?

내가 섬기고 싶어하는 여러가지 일들은?

민우에게 아빠가 A 사에서 일하면 어떨것 같아? 그러니까 cool! 이라고 한다.

그런데 많이 travel 해야하는데… 그러니까 그럼 하지마! 라고 이야기한다. ㅎㅎ

의외로 아내는, 그렇게 하는 것도 감당할 수 있단다. (아마 나를 격려하는 입장에서 한 이야기일수도 있겠지만.)

(5) 지금 내가 있는 회사에서는, 일이 많고 바쁘고 stress가 많기도 하지만, 내 일정을 내가 조절하는 것이 가능하다. 아무리 바빠도 내가 언제는 꼭 휴가내야한다고 이야기하면 뭐 딴지 거는 사람이 없다. ^^

그래서 코스타 같은 것도 자유롭게 섬길 수 있고, 지금 내가 local에서 꾸며볼까 기도하고 있는 일들도 할 여유가 생긴다.

그런데, A사로 옮기면 그런 상황이 되기가 어려울 것 같다.

갑자기 어느어느 나라로 출장가서 3주 있다 와야하는 상황이 터지면 당장 그 다음날 비행기 타야하는 뭐 그런 상황이 될수도 있다.

내가 아주 싫어하는 stress 많이 받는 스타일의 삶이다. ^^

그런데, 그런 속에서… 내 계산과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더 경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함께 이땅을 사는 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런데… 내가 그런 삶을 살아야 그들에게 이런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가지로 섬길 길도 열어주시는걸 경험했다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지 않을까?

(6) 이 일의 nature에 대해서, 그곳에서 나를 인터뷰했던 사람에게 물어보니…

어떤 일정기간 너는 어떤 다른 회사 그룹의 총 책임자, 혹은 더 큰 스케일의 총 책임자 역할을 임시로 맡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을 여러 회사를 상대하면서 하게 된다. 뭐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주었다.

뭔가 더 exciting하게 들리게 하기위해서 그런 얘기를 해준건지…

(7) 내가 섬기고 있는 일들, 그리고 내가 어쩌면 섬기게 될 일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키우고, 말씀을 전하는 일들을 하는 것에 아무래도 제약이 좀 있게 될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지난 한 15년 정도 하나님의 사람을 키워내는 일이 내 primary task인 것 같이 살아 왔다면…

이제는 뭔가 치열하게 세상 속에서 사는 경험을 해야만.. 내가 50이 넘어서 지금 40대의 사람들을 키워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그런 고민을 많이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인도하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8) 또 한가지는, 코스타를 섬기는 일이나, 지금 local에서 가능성을 찾아보고 있는 새로운 일이나 모두… 너무 내가 힘이 많이 들어가 있어,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내가 좀 힘을 빼고, 후배들이, 다른 이들이 step-up할 chance를 마련해주시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든다.

내가 아니어도 정말 되는 건데 말이다.

결국 오늘 오후,

그 A 사의 사람들을 또 만나기로 약속이 잡혔다.

그쪽 일은 정신없이 진행되는데… 참 부담은 크다.

주말을 지내며 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성찰해보아야겠다. 아내와도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이상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지 않고…

열정을 가지면서도, 성급하지 않는…

그런 균형이 필요한 것 같다.

(싸구려 어줍잖은 훈수는 사절합니다만 ^^ 제게 조언 주실분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많이 말씀해주십시오.)

직장 고민 (2)

우선, 현 직장과 관련해서 내 고민은 대충 다음의 몇가지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1) 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는 정말 소중한 가치를 잘 공유하고 있고, 그 가치를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가며 제대로 펼쳐보겠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다. 지금 일하고 있는 기술도 꽤 괜찮은 기술이고, 덕분에 나도 여기저기 학회에 invited talk도 많이 불려다녔다. invited talk을 다 갈 시간이 없어서 최근엔 그냥 대충 거절해왔다.

이건 내가 뭐 각종 학회에 invited talk을 불려다닐만큼 대단해서라기 보다는… 훌륭한 그룹에 있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이 그룹에 있다는 것 때문에 말하자면 내 ‘몸값’ 이랄까 그런게 높아졌다고나 할까….

정말 좋은 그룹에서 일하면서 많이 덕을 봤다. 나는 뭐 별로 대단히 하는 것도 없는데…

(2) 처음은 그냥 뭐… 일년정도만 일단 좀 있다가 어디 다른데 가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이 회사에 join 했고, 우리  manager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일년이 후에는 나도 다른데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고, 우리 manager도 내가 다른데 가지 않으면 좋겠다고 해서 있게된 것이 이제 7년 반이 되었다.

말하자면 아주 뭐 임시직으로 그렇게 시작해서, 나도 뭐 무슨 야망 그런거 없었고, 그냥 그야말로 일에만 열중했다. 누구든지 이상하다 싶으면 막 대들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잘보이겠다는 생각이나 승진 뭐 그런건 아예 관심이 없었고.

7년 반이 지난 지금, 나는 어찌어찌하다보니… 그룹에서 leadership을 공유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렸다. 사실상 회사에서 No.2 라고 할 수 있다. CEO의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 lab director에 이어서.

이게..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 없이… 그냥 그렇게 되어버렸다.

그렇게 되는데에는, 우리 lab director의 배려가 참 컸다. 가끔은 가서 당돌하게 따지기도 하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하는 나 같은 사람을 그래도 붙들고 잘 있어준 것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다보니 내 역량보다 회사에서 너무 과대평가를 받고 있다는 부담도 사실 꽤 있다.

특별히 옆에서 우리 lab director를 보면서, 사람을 격려하면서 세워주는 leadership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참 많이 배웠다.

오죽해야 내가 그 사람에게 아예 가서, 나는 네 일거수 일투족을 매일 다 관찰하고 있고 그걸 통해 여러가지를 배우고 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 내게 늘 constructive criticism을 많이 해주고, 내가 너를 계속 그렇게 지켜보면서 배우는 것을 허락해달라… 며 아주 당당하고 뻔뻔하게 이야기도 했었다. -.-;

어쨌든… 참 많이 배웠다.

(3) 그런데, 최근 한 1-2년 정도는.. 돌이켜보면 특별히 내가 더 배우고 성장했던 것이 그렇게 많이 없었던 것 같다. 아…참… 다른 회사와 기술 협약 맺는 것에 좀 involve 되면서 아주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지는 법률용어들을 좀 더 많이 배웠다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협상을 하면서 밀고 땡기고 하는 것도 겪었고, 겉과 속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만났다.

지난 1-2년은, 내가 좀 성장을 했다기 보다는… 뭔가 돌파구를 마련하는 일에 involve 되면서… 어찌보면 내 특기가 아닌… 각종 business discussion에 많이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야 했다. 뭐 그걸 통해서 그런 쪽으로 성장하고 훈련받았다고 할수도 있겠지만… 내가 계속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까 하는 것에 대해 사실 확신이 없다. 그러다보니 그것이 낭비로 생각되는 것 같다.

(4) 게다가, 여러가지 회사 사정이 어렵다보니… 계속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뭐 그러면서… 사실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월급은… 좀 적은 편이다. -.-;

물론 뭐 지금 우리 회사의 지분을 좀 가지고 있긴 하지만…

(5) 나는 뭐 늘 여기저기 땜땅을 하는게…. 내 천성인가보다. 혹은..뭐 시쳇말로 팔자인가 보다. ^^

그 세팅이 교회가 되었건, 친구들 사이의 모임이 되었건, 아니면 코스타나 뭐 다른 어떤 상황에서도 생각해보면 늘 그렇다.

회사에서, 뭔가 일이 되어야 하는데 잘 안된다 싶으면 그냥 뛰어들어서 내가 그 일을 하고…하고 하는 바람에, 지금 내가 cover하고 있는 부분이 어느새 꽤 많아져 버렸다. 아주 애매한 형태로 leadership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실제로 우리 lab director가 나를 많이 의지하고, 자기가 힘들때 내게 그 힘든것도 털어놓고… 뭐 그런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뭐랄까 지금 회사에서 확 내가 발을 빼가기 아주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금방 누구에게 넘겨줄 수 있는 상황도 물론 아니고.

(6) 그런데, 최근… 내가 좀 더 많이 가지게 된 회의는… 

어쩌다보니 내가 회사에서 꽤 중요한 일들을 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정말 내가 이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일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운영 방안이, 결국은 성공하게 될 적절한 전략에 근거한 것인가 하는 것에도 좀 회의가 생겼다. 게다가 그 방향으로 가도록 만드는 일에 내 역할이 중요한 상황이라면……….

나는 사실 이런 일들을 잘 해낼 전문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많이 들고 있다.

선머슴이 사람 잡는다고… 뭐 잘 모르고 달려들어 이렇게 내가 하는 것이 결국은 나와 우리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안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 고민을 참 많이 하고 있다.

(7) 그리고 또한,

내가 지금 이 start-up company에 함께하고 있는 나름대로의 논리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 블로그에서도 시리즈로 글을 적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생각했던 것이 그저… 현실성 없는 naive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충분한 현실성에 기반하지 않은 이상주의적 발상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내가 이 start-up company에 함께 하고 있는 그 근본적 rational에 회의도 생기고 있는 것이다.

(8) 지난 월요일에, 우리 lab director와 이런 이야기를 아예 터놓고 했다.

우리 lab director는… 

만일 네가 떠난다면 아마 우리가 돌파구를 마련해서 계속 진행하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냥 모두 함께 이걸 포기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 같다.

만일 너 없이 하는 길을 어떻게 찾는다 하더라도, 네가 떠나면 사람들의 사기문제가 아주 심각할 것 같다. 결국 한사람 두사람 떠나서 그룹이 붕괴되지 않을까 싶다.

뭐 이런식으로 이야기를 했다. 아 물론… 네가 떠나고 그렇지 않고는 네 결정이다. 이렇게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동료로서 친구로서 고맙다… 뭐 그런 얘기도 덧붙였다.

우리 그룹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물론 어떤 사람들은 쉽게 다른 직장을 찾을 수 있을 사람들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직장을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 지금 나는 어떻게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 있는 걸까.

내가 지금 그 사람을 휙 버리고 떠날 수는 없는 입장인 걸까.

직장 고민 (1)

지금 있는 회사에서,

지난 7년여동안, 참 열심히 일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참 좋은 사람들이었고,

일하는 내용도 재미있고 보람있었다.

start-up company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도 참 많은 것을 배웠다.

이러는 과정에서, 나는 내가 지금 이 시점에 엔지니어로 산다는 것이 하나님나라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많이 고민할 수 있었고… 여러가지로 나는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런데,

회사 사정이 계속 간당간당(!!) 하다보니… 좀 힘이 들때도 있고,

이러는 와중에, 정말 여러가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

과연 정말 우리가 이 모든 난관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이런 일을 해 낼 수 있는 걸까. 등등.

그러는 와중에,

최근 꽤 잘나가는 A사의 recruiter가 내게 연락을 해왔다.

그날은 마침, 내가 좀 마음이 지쳐있는 날이었다.

나는 뭐 그냥 한번 찔러나 볼까… 하는 심정으로 내 CV를 보냈다.

그랬더니만 그 다음날 바로 phone interview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얼떨결에 phone interview를 했더니만… 바로 그 다음날 자기 회사로 와서 on-site interview를 하자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게 무슨 속성…

나는 이건 좀 아니다 싶어… 앞으로 열흘 남짓 동안 좀 시간 내기가 어렵다… 이렇게 얘기를 했더니만, 바로… 그 기간 바로 지나고 on-site interview 날짜를 제안해 왔다.

이걸 어쩔까… 싶었는데,

에이 뭐 interview 하면서 거기선 무슨 일 하나 살펴보기도 하고, 도대체 내 ‘몸값’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알아나 보자는 뭐 그런 그런 심정으로 on-site interview를 갔다.

도대체 무슨 position인지, 뭐를 하는 그룹인지도 모른채 갔다. 세상에 이런 interview가 어디 있나. 그래서 거기 인터뷰어에게 도대체 이게 뭐하는 그룹이냐, 어떤 사람을 뽑는거냐 이런걸 물어봤더니 좀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

인터뷰를 마치고는 hiring manager가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느냐고 막 물었다. 두주후에 시작하는게 가능하냐… 뭐 그러면서.

나는… 일단 좀 시간을 벌려고, 빨라야 11월 초가 되어야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어쨌든… 이런 과정을 좀 거쳤는데,

아직 정식 offer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면서 지금 내가 있는 직장을 그만두고 정말 내가 옮길 수 있을까. 그러는 것이 좋을까. 그런 고민을 좀 하게 되었다.

창세기 1장에 대한 역사적 성경읽기

지난 주일,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는,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역사비평적으로 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아주 쉬운 언어로 풀어준 것이었다.

창세기 1장을, 아주 쉬운 언어로 이렇게 잘 풀어준 설교를 별로 많이 들어보지 못했다!

관심 있는 사람들은 꼭 들어보시면 좋겠다! ^^

여기 링크

나의 탈근본주의 여정 (7)

나의 탈근본주의 여정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우선, 내가 처음 복음의 빛을 발견했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머물렀던 근본주의가 내게 주었던 정서를 아직 근본주의 밖에서 충분히 발견하지 못했다.
가령, 눈물을 쏟아가며 열정적으로 기도할때… 내 기도의 내용은 여전히 대단히 근본주의적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며, 내 삶을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을 할때 나타나는 내 모습은 상당히 근본주의적이다.

근본주의적 관점을 가지지 않은채, 구령의 열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도 적절한 해답이 없다.

이것은 물론 오래 내가 근본주의에 머물러 있었던 관성이라고 볼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근본주의 밖에서 아직 나는 이것을 대체할만한 정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관점 자체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
충분히 안정적이면서도 통합된 view를 찾는데 아직 고전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글쎄…
내 이 여정이 어떻게 마무리될 수 있을까.
아직은 그냥 open-ended question일 뿐이다.

나의 탈근본주의 여정 (4-1)

더가까이 형님께서 지난 11일(화요일)자 글에 아주 좋은 comment와 토론거리를 던져주셔서,
거기에 답글을 다는 것 보다 여기서 아예 썰을 풀어보는게 낫겠다 싶어.. 여기 씁니다. ^^

더가까이 형님의 멋진 지적들 감사합니다.
제가 모든 것을 다 커버할 수 있는 깜냥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제가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제 나름대로 답을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겠습니다.
좀 길어질 것 같은디… 쩝.. ^^

우선, 저… 뭘 별로 그렇게 중요한 사람도, 영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요. ^^
더가까이 형님은 늘 제 실체보다 절 더 잘봐주시는 경향이 있으셔서… 쩝…  많이 민망합니다…

1. 우선 역사 비평이 계몽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우선 역사비평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이유로서, 그 근본이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감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음도 인정합니다. 저도 사실 그렇게 많이 공감하고요. ^^

그런데요… 가령… 예를 들어… 현재의 민주주의는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걸 다 거부하지는 않지요.  현대의 민주주의가 완벽한 체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제일 잘 작동하는 비교적 공정한 체제라고 여겨지고 있고요.

우리가… 계몽주의 자체를 이성을 깨우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여길 수 있지는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의 많은 결과물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고요.

아, 물론 그 결과물을 잘못 사용해서 삼천포로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
문제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혹은 제대로 잘 사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지요.

깨어진 세상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은, 세상이 깨어져 있기 때문에 늘 어두운 그늘이 있을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그 하나님의 선물을 늘 나쁜 쪽으로 활용하고 싶어하는 유혹도 받고요. 그렇다고 그 선물 자체를 버리는 것은 자칫 우리를 코너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봅니다.

계몽주의적이라고 해서 모두 반대하는 식의 접근은, 자칫 반지성주의적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사실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대해 반대하면서 반지성주의적이 되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고요.

2. 역사비평의 열매가 건강하지 않다는 비판에 대해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일견 동의하면서, 한편 약간 생각을 달리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이 범했던 것은, 역사비평이건 문서비평이건 간에 그런 하나님의 선물 자체를 절대화 해서 하나님을 버려버리는 실수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비평을 사용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역사비평이라는 tool을 사용하면서 인간이성을 절대화하고 초월성을 무시/포기했던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동네 깡패들중에, 도루코 면도날로 친구들을 협박하며 돈을 뜯는 놈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 친구들은 그 도루코 면도날의 힘을 믿고 폭력으로 친구들을 지배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깡패들이 쓰는 도루코 면도날이 문제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면도날을 쓰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문제지요.

말씀하신, 자유주의의 폐혜는, 인간 이성을 절대화 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지, 역사비평을 사용한 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3. 현재의 상황에 대해

20세기 초반이라면…
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것과 싸워야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 열심히 잘 싸웠죠. 그러는 과정에서 그렇게 싸웠던 사람들은 스스로 근본주의라는 괴물이 되어버렸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실상 자유주의라는 신학체제는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지금 복음주의에 있어 최대의 적(enemy)은 자유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속화, 혼합주의 뭐 그런 것들이겠죠.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리가 싸워야할 적이 자유주의라고 생각하고 그 agenda에 묶여 있으면, 더 이상 앞으로 가면서 이 시대을 복음으로 읽고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레닌-스탈린식 공산주의가 여전히 우리 자유주의/민주주의의 최대 적이라고 여기고 계속 공산주의자 색출에 모든 힘을 쏟는 것과 같이…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거죠.

자유주의와 싸우느라 잠시 유보해두었던 고민을 다시 끄집어 내어서 rigorous하게 다루어야할 때가… overdue가 아닐까 싶습니다. ^^ 그것이 지금 특히 한국과 미국 복음주의의 위기를 가지고 오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고요.

이게 잘못설명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게 적절하게 잘 된 설명인지 모르겠습니다. 쩝.

4. 역사비평의 필요성에 대해서

우리가 성경을 성경 그대로 받아들인다, 성경 그대로 읽는다 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이 마치 꽤 순수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 말은.. 성경을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해하겠다는 arrogant한 선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성경에서 그렇게 쓰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려면, 내가 가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의 옷이 아닌… 그 당시 그 문서가 쓰여졌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의 옷을 입는 일이 매우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예이지만요,

사실 70-80년대 부흥사들은 요한계시록의 붉은용을 소련, 공산주의, 핵폭탄 뭐 그런식으로 막 해석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 요한계시록이 쓰였을 당시의 독자들이 붉은 용이라는 말을 읽었을때 어떻게 이해했을까 하는 것에 대한 고민 전혀 없이… 그저 내가 가진 세계관과 문화로 읽어내면 된다는… 뭐랄까… 일종의 오만에서 비롯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글에서 예로 든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도요…
에베소서의 같은 단락이라고 볼 수 있는 곳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한 후에,
조금 후에 바로 상전과 종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이 글을 보고, 그대로 읽으면, 상전과 종의 노예제도/계급제도를 바울이 지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남편이 리더이고 아내가 follower라는 가부장적 체제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흔히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계급제/노예제는 거부하면서, 남편과 아내의 불평등한 관계는 그냥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게… 일관되지 못하다고 보고 있고, 역사비평적으로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생긴 삐걱거림이 아닐까… 뭐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 에베소서가 쓰여졌을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의 맥락에서 그 본문을 읽어야 하고,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가부장적 체제나 노예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깨어진 관계, 잘못된 문화 속에서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살아내는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거지요.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세계관 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제한된 사람이고, 그 세계관의 틀을 통하지 않고는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그냥 믿는다,.. 고 하는 것은 그냥 내 세계관에 성경의 본문을 맞추겠다… 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히려, 차라리 정직하게… 내가 가진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까내어 드러내고,(그러기 위해서는 내 세계관에 대한 정직한 분석과 비판이 있어야 하겠죠.) 이런 세계관, 이런 방법, 이런 tool을 사용해서 보니까 본문이 이렇게 보인다… 적어도 이것이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거죠.

역사비평은 그런 과정을 많이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아.. 그런데 이렇게 쓰면… 성경이 마치 학문적으로만 접근해야하는 그런 문서인 것 같이 생각될 수 있는데요,
그렇게 주장하는건 물론 아닙니다. ^^
저는 렉티오 디비나 뭐 그런거 좋아합니다. ㅎㅎ
마음에 말씀이 다가올때까지 조용히 한 문장을 곱씹는거 뭐 그런거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pneuma)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문서가 가지는 초월성이 있음을 믿고요.

다만 초월성에만 의존하여 반지성주의로가는 것이 건강하지 않다고 볼 뿐입니다.

5. 귀납적과 연역적인 성경읽기에 대해서.

저는 연역적 성경읽기가 필요하다는 데 깊이 공감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성경읽는 것을 매우 즐깁니다. ^^

그렇지만, 연역적으로 성경을 읽어내려면…  초기 가정, 초기 명제, 그 연역적인 것의 근거가 되는 가치 뭐 그런게 잘 잡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초기명제는 귀납적인 연구 방법을 통해서 얻어내야 하는 것이고요.
말하자면, 연역적인 성경읽기를 제대로 하려면, 귀납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귀납적 성경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인 연역법을 적용하는 극단적인 예가 cult들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뭐 너무 극단적인 예지만요.

사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거부했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연역적 전제에 충실한 연역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귀납적 성경읽기를 제대로 못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

그런데… 아쉬운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연역적으로 신앙을 접근하긴 하는데, 그 초기 명제, 초기 전제가 어디서 나왔는지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기도 하고… 또 그 초기명제를 잘못 가지고 있을때도 많다는 겁니다. 쩝… 뭐 저도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사실 자신이 없지만요. -.-;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일 수 있는데요,

연역적 성경읽기를 잘 못 할 경우 빠질 수 있는 오류는 ‘환원주의(reductionism)’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했더니 아는 한 분이, 신앙은 결국 환원주의 적인거라고 항변하더군요. -.-;

그건 전 참 위험한 생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그렇게 이야기하시니…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할 수 없어 그냥 거기서 멈춘적이 있었지요. 그냥 많이 안타까워 하면서…

뭐 하여간, 저는 연역적인 성경읽기와 귀납적인 성경읽기가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무엇 하나도 버릴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6. Tony Campolo, John Stott에 대한 언급에 대해

저는 어떤 누구도 인간인 이상 완벽한 신학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가진 어떤 신학적 입장을 건강하게 비판하며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완전히 내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자세라고 봅니다.

저는 CCC나 YFC에서 Tony Campolo를 이단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 많이 가슴이 아픕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로 Campolo를 이단이라고 이야기했는지는 조목조목 봐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뭐 Campolo를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입장을 못들어본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youtube에선가… 꽤 유명한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Tony Campolo의 설교를 한 센텐스씩 끊어가며 이건 이게 잘못이고 저건 저게 잘못이고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 논거가 매우 빈약했기 때문이죠.

한 20년쯤 전에… 합동측 교회의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통합측은 이단이다고 선언(!!)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물론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만… -.-; 생각해보면 참 많이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아 물론 이단이 없다는건 아닙니다. ㅋㅋ 통일교, 정명석, 뭐 이런 사람들 다 이단이죠. ㅎㅎ 아주 죄질이 나쁜.

제가 Tony Campolo나 John Stott, 또 D.A Carton 같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이유는, 그 사람들의 신학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이런 사람들이라면 넓은 의미에서 복음주의권에 있다고 함께 포용할 수 있겠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더가까이 형님처럼, John Stott의 어떤 견해에는 좀 껄쩍지근~ 한 마음이 있고요, 특히 Don Carson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상당히 비판적입니다. ^^ ( 제가 많이 힘들어하는 신학적 입장을 가진 신학자/목회자들이 사실 참 많은데요…)

그렇지만, 저는 그들과 저를 모두 함께 ‘복음주의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짤라버려야하는 이단이나 적(enemy)가 아니라 함께 가야할 동지(fellow)로 보는 것입니다.

좀 다른 각도의 예 이지만, 저같은 반고지론자가, 고지론자 원조 목사님을 존경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겁니다.

가끔 당황스러운 것은,
저는 이들을 동지로 여기는데… 이들이 저를 적으로 여기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날때 입니다.

뭐 물론 저는 그렇게 비중있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므로.. 적당히 제 입장이나 관점을 잘 무마해가며 잠수를 타거나 가면을 써버리면 되죠. ^^ 그렇지만 마음이 아픈건 사실입니다.

근본주의가 범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내가 다른 신학적 입장과 무엇을 공유하고 있느냐를 거의 무시한채, 무엇이 다르냐를 부각시켜 동지를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에 권위를 두고 성경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핵심적인 가치이지만,
어떤 특정한 성경 해석에 권위를 두고, 그 성경 해석 자체를 신격화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심지어는 폭력적이기 까지 하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형태의 폭력성을 가지고 있고요…

7.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의 글을 쓰면서,

제가 왜 근본주의자가 아닌지, 근본주의로부터 어떻게 벗어나고 있는지 하는 것을 쓰기 때문에,
부득불, 근본주의자들과 저와의 차이점을 많이 부각해서 쓰긴 했습니다만,
저는 자유주의자들보다는 근본주의자들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ㅋㅋ
상당히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입니다.

그것은 제가 지난달에 쓴 ‘내 신학노선’ 시리즈의 글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오죽해야 아땅님은… 이거 보면 뭐 다른 보수주의자들과 다를거 하나 없는데 왜 맨날 스스로를 그들과 다르다고 얘기하느냐고 질문을 했을 정도니까요.

원래는 오늘 이 시리즈의 마지막 글을 쓰고 끝맺으려 했는데…
더가까이 형님께서 좋은 comment로 저를 콕콕 찔러주셔서…
제 생각을 좀 더 정리해서 풀어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좋은 comment 있으면 언제든 주십시오. 반론도 좋고, 딴지도 좋고요, 공감이나 추임새도 좋고요. ㅎㅎ
저도 많은 분들의 생각으로부터 배우고 싶고, 그것을 정리하면서 저도 많이 생각할 기회를 얻어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나의 탈근본주의 여정 (6)

근본주의를 내가 따를 수 없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자면…
근본주의가 갖는 incoherency 때문이다.
근본주의 내부에서 보았을때, 내적 논리적 통일성/타당성이 부족하다고나 할까.

가령,
사랑이라는 가치는 근본주의자들이 당연히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이다.
그런데, 근본주의자가 가지는 호전성은 이 사랑이라는 가치를 나타내는데 실패하였다.
원칙과 근본에 충실하려다보니 원칙과 근본을 오히려 포기하게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표현하면 적절하려나.

나는,
여전히 나를 ‘복음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다.
다만 현대의 미디어에서 ‘복음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과는 상당히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나,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는… 하나님과 세상과 구원과 심판과 소망등에 대해… 어쩌면 다른 부분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나의 탈근본주의 여정은,
나를 훨씬 더 성숙시켜왔다.

더 연구하고 고민하게 만들었고,
더 missional 하게 만들었고,
더 포용력을 갖게 되었고,
세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더 집중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