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탈근본주의 여정 (5)

아직은 내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할지 좀 자신이 없지만, 전통적인 관점과는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차원에서 고민을 하고 있는 내용들도 있다.

이건 잘못 나가면… 무슨 이상한 이단처럼 될 수도 있고… 이게 글로 썼을때 자칫 단편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므로 이건 리스트를 나열하지는 않겠다.
(혹시 정 궁금하신 분들은 내게 이메일을 보내시라! ㅎㅎ)

그런데, 이런 과정을 겪으며…
당연히 꽤 많은 공부를 해야만 했다.
책을 읽으며 다양한 관점을 따라가기도 했고,
그 관점이 정말 성경의 지지를 받는가 보기 위해 성경공부도 열심히 해야만 했다.

나는,
소위 ‘자유주의’라는 신학적 흐름은,
기독교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일정부분 긍정적인 영향도 있었다고 보지만,
결과적으로 그 자체로는 실패한 사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자유주의가 실패했던 이유는,
절대화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절대화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 이성에 대한 절대 신뢰, 그리고 그 당시 철학적 사조에 대한 절대 신뢰등이 결국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한다.

탈근본주의의 여정을 겪으며 자유주의자들이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은…. 꽤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나의 탈근본주의 여정 (4)

이렇게 성경을 역사비평적으로 접하다보니…
도저히 축자영감설은 내가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만 쓰면 약간 논리의 비약이 좀 있긴 한데… 그 과정을 다 설명하자면 너무 장황해지는 것 같아서…

이런 과정을 통해 내 나름대로 다다르게된 탈근본주의적(?) 성경해석의 단편들을 몇가지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각각의 내용에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것들이지만, 일단 그 결론적 내용만을 적어본다.)

(1) 나는 천지창조의 기사가 과학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것을 과학적 기술로 해석하는 소위 ‘창조과학자’들의 반진화론적 창조론은 성경을 무리하게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믿으며, 그것이 내 신앙과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2) 나는 아담과 하와가 실제로 존재한 인물이 아닐수도 있고, 마찬가지로 창세기등의 어떤 이야기들이 실제적으로 역사적 사건이 아닐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실제 역사적 사건이라하더라도 물론 괜찮다. ^^
나는 구약의 그런 기사들은, 그것을 기록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고백으로 봐야 한다고 믿고, 그것을 문자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무리한 것이라고 믿는다.

(3) 성경의 기자들이 잘못된 생각이나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썼을 수 있고, 그것은 성경에 그대로 드러날 수 있다고 믿는다. 가령 신약성경중 초기 문서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시기적으로 곧 있을 것이라고 믿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문서를 기록할 당시 그 기자가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4) 남편이 가정의 머리, 혹은 리더가 되어야 한다는 에베소서의 가르침 역시, 역사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현대에서 남편이 머리, 아내가 그것에 순종하는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에베소서가 쓰여진 역사적 context를 무시하고 성경을 읽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5) 세상의 모든 민족이 (ethnic group이 되었건, linguistic group이 되었건…) 복음을 들으면 그제서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보지 않는다. 나는 지금이라도, 내일이라도 주님이 바로 다시 오실 수 있는 모든 여건은 이미 다 갖추어져 있고, 다만 주님께서는 긍휼의 마음으로 그 시점을 delay 시키고 있을 뿐이라고 믿는다.

이 외에도.. 쓰자면 뭐 한참 많지만…
뭔가 읽는이들이 금방 catch 할 수 있는 것들만을 좀 추려서 적어보자면 이렇다.

나의 탈근본주의 여정 (3)

위에서 언급한,
(1) 구약의 폭력성을 포기하고 고백주의를 지키는 것과,
(2) 고백주의를 포기하고 구약의 폭력성을 받아들이는 선택 가운데…

나는 (1)의 선택이 더 합리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고백주의의 관점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아 성경이 지지하고 있는 관점이라는 내 확신이 있었고,
구약의 폭력성을 해석해내는 방법은 소위 ‘역사비평’이라는 관점으로 풀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비평 그러니까 뭔가 좀 대단한 것 같지만,
골자는, 그 본문이 쓰여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을 감안하여 그 본문을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의 안경을 쓰고 몇천년전의 기록을 읽으려하면 해석에 무리가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가령, 이스라엘 백성의 정복 전쟁 때, 하나님께서 다른 민족을 다 죽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1) 그 당시 전쟁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culturally acceptable 한 것이었고,

(2) 그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그분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 보다는 믿음의 순수성이라는 내용을 강조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셨다고 이해했다.

(3) 아직 인권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develop 되지 않은 상황 이라는 그 당시의 상황을 지금의 세계관으로 직접 해석해내려하면 무리가 따른다는 것도 추가할 수 있겠다.

(4) 그리고, 그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은 인종청소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구별됨이다. (조금 오해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면…) 그 본문을 기록한 기자(들)이, 하나님 백성의 구별됨을 명확하게 쓰기 위해 어떤 강조법을 사용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째… 좀 제대로 깔끔하게 설명을 못 한 것 같은 찜찜함이…)

이렇게 역사비평적으로 성경을 읽으며… 그리고 귀납법적 성경연구라는 tool를 그 역사비평과 함께 사용하면서 나는 성경이 그야말로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입체로 드러나게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구약의 text 뿐 아니라, 신약의 많은 내용도, 그 당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두고 읽어내는 것이 참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나의 탈근본주의 여정 (2)

내가 처음 탈근본주의의 여정을 걷게 된 기초는,
내가 내 신앙의 가장 중심으로 삼고 있는 ‘고백주의’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지,
크리스찬으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개인이 지적, 정서적, 의지적 판단과 결정을 통해 믿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고백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크리스찬이 된다고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떤 개인에게 국가나 단체나 사회나 혹은 또 다른 개인이, 신앙을 강요하는 것은,
반기독교적이라고 믿는다.

이런 시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사에서 만나는 많은 사건이나 주장들은 나를 몹시 불편하게 했다.
“개인적인 양심의 자유”, 그리고 그에 따른 “신앙의 자유”는 고백주의의 입장을 가진 나로서는 당연히 다다를 수 밖에 없는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런 시각에서 보아 나는 두가지가 불편하였다.

첫번째로, 소위 열심있는 교회의 사람들이 대외적으로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신앙을 강요하는 모습이었다.
신앙의 열심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폭력적이거나 억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적이지 않다는 것이 내 conviction이다.

그리고 두번째로, 구약에서 드러난 종교의 폭력성이 불편하였다. 그리고 많은 경우 위에서 언급한 열심있는 폭력적인 사람들은 이 구약의 폭력성을 행동의 근거로 제시한다. 나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든 해결점을 모색해야만 했다.

내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구약의 폭력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내 고백주의를 포기하던가,
내 고백주의의 입장을 견지한채 구약의 폭력성을 재해석하던가… 두가지 뿐이었다.

나의 탈근본주의 여정 (1)

KOSTA에서 얼마전에,
한국의 한 젊은 교수님에게 강사 초청을 보냈다.
그랬더니 그 교수님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답을 보내왔다.

요즘 저는 기독교관련 모든 모임에서 강의하는 일을 멈추었습니다.
말하자면 탈근본주의의 과정을 겪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KOSTA에 참석하면 여러가지로 KOSTA가 어려움을 겪을 수 있을 것입니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분이 겪고 있는 탈근본주의의 여정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그분하고 좀 얘기좀 많이 나누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길게보면 지난 10년 정도, 짧게보면 지난 2-3년 정도 사이에 나는 탈근본주의의 여정을 겪어왔다.
앞으로 3-4번(?)에 걸쳐서 쓰게 될 이 글은 아마 어떤 이들에게는 읽기 불편한 것이거나 놀라운 것 일수도 있겠다. – 매번 쓰다보면 글이 길어져서… 3-4번을 넘길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반갑거나 신선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이게는 애개,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할수도 있겠다. (솔직히 말하면 대단한 얘기는 아니다. ^^)

지난 일년여 동안은,
꽤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많이 해왔던 말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복음주의자로 불리고 싶지 않다”

는 것이었다.

허걱… 이게 무슨…

뭐 대단한 커밍아웃을 하는 것이라던가, 꽤 깊은 신학적 통찰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길을 찾아온 과정을 그냥 좀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간이 부었나…

꽤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재 우리 회사의 사정을 다 설명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것을 다 설명하는건 우리 회사에게 득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지금 현 상황에서는 매우 다양한 business partner와 복잡한 형태로 deal을 하고 있는데,

이대로 가면, 꽤 큰 스케일의 deal이 이루어지면서, 우리 엔지니어들이 control 할 수 있는 portion은 매우 작아진다. 큰 회사들이 우리 회사의 지분의 많은 부분을 갖게 되므로 아무래도 우리 엔지니어들이 갖는 지분이 작아지게 되는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회사를 하면서 대박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갖지도 않고 있고, 그것은 오히려 건강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지분을 더 갖고 부자가 되는 것에 목을 매고 있지는 않다. 다만 지분을 더 가지고 있어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우리 엔지니어들이 함께 지분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워낙 현재의 business deal이 복잡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보니…

에이 차라리 이걸 다 깨버리고.. 

아주 작은 scale의 business deal을 하되 대신 우리 엔지니어들이 지분의 다수를 가지는 형태로 가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도 하게 된다.

현재 우리가 얽혀 있는 상황을 다 깨버리는 것은, 사실 대단히 위험한 선택일 수 있다.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몰릴수도 있는 선택이다. 그럼에도… 그런 선택이 자꾸만 매력적으로 보이는건… 내가 현실감각을 잃고 간이 부었기 때문일까? ^^

어제는 오랜만에 하루종일 실험을 재미있게(!!) 할 수 있었다.

급하게 무언가를 만들어 내야하는 일이 적어도 이번주에는 없기 때문에, 이번 주 중에는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실험들을 좀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어제 새로운 실험 하나를 시작했다.

실험/process를 design 하고, 그것을 해서 결과를 보고, 분석을 하는 일들을 하면서…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이렇게 실험하고 문제 해결하는게… 제일 내게는 재미있는 일이구나… 싶었다.

어떻게든 이 복잡한 business deal이 마무리 되어서,

나는 그저 실험에만 열중할 환경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보지만,

간이 오그라들었다, 간댕이가 부었다 하는 일들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은,

내가 이 회사에서 일하는한… 그건 그저 희망사항일 뿐일 수 있겠구나… 싶어 좀 마음이 좀… 

애고, 애고…

내 이럴줄 알았다.

간사 수양회 message…

마음만 앞서고 잘 organize도 못하고… 말도 버벅거리고… 한말 또 하고 한말 또하고…

해야할 말을 빠뜨리고,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은 괜히 하고…

준비가 많이 부족해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수양회 당일 BWI 공항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설교 직전까지도 계속 손을 봐야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대접을 못한 것 같아 많이 미안하긴 하지만,

그러나 한편 이 사람들이니까 허물없이 내 속마음 이야기할 수 있지…. 싶어 참 감사하기도 했다.

부담 만빵 간사 수양회

이렇게 부담 많이 되는 간사 수양회는 처음이다. -.-;

간사 수양회 혹은 각종 이런 저런 간사모임에 참석한 것이 못잡아도 20-30번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정말 부담 만빵이다.

수양회 설교를 하는게 처음도 아니고,

간사들에게 무슨 강의나 presentation을 하는데 처음도 아닌데,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정말 무슨 얘기를 해 주어야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걸까 하는 것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늘 간사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고, 지금도 참 많긴 한데…

막상 그 이야기를 간사들에게 해야하는 건지 하는 것에 대해서는 내 마음 속에 참 갈등이 크다.

그렇지만,

우선 내 생각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 사람들에게 하길 원하신다고 여겨지는 생각을 모아서 하도록 노력을 했고,

내가 개떡같이 이야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먹을 사람들이므로 또한 안심이 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뭐 이게 내 일인가. 주님 일이지. 주님이 잘 맡아 주시겠지. (이번 설교 성경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 )ㅎㅎ

귀한 사람들 만날 기대가 된다.

잘나가는 회사?

우리 회사 사정은, 여전히 간당간당하다. ^^

일단 어찌어찌해서… 

9월 말까지 버틸 자금은 확보해 놓은 상태이지만,

그 이후의 사정은 어찌될지 불확실하다.

그렇지만, 잘만되면 아주 흥미롭게 상황이 전개될 가능성도 꽤 있어서 나름대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내 사정을 알기라도 하는걸까?

최근 여러 recruiter 들로부터 계속 연락을 받는다.

지난주에만 3명의 다른 recruiter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그중 하나는… 요즘 아주 아주 잘 나가는 A 사의 recruiter였다.

그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어떤 사람을 찾고 있는지 궁금해서 그저께 그 recruiter의 이메일에 답장도 하고 내 CV도 보냈더니, 즉각 어제 저녁으로 전화 인터뷰를 잡아 놓았다. -.-; 허억.

(민우도, A 라는 회사에 아빠가 다니면 어때? 라고 내가 물어보니 cool 하다는 표정이다.)

어제 전화 인터뷰를 해보니,

말하자면 나보다 훨씬 이 분야를 잘 모르는 사람이… 소위 내 지식을 테스트한다는 명목으로 이것 저것들을 물어보는데… 

저, 아저씨… 그건 질문이 잘못된거예요… 라도 이야기해주고 싶은걸 참았다. ㅎㅎ

그리곤 내일 자기 회사로 와서 만나자고… 아주 적극적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에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니… 

내 마음이 살짝 흔들린다.

그 회사에서 월급 왕창 더 주고 더 좋은 조건 제시하면 확 옮겨버릴까?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적어도 지금 내가 우리 그룹에서 그렇게 후다닥 떠나고 나면…

지금 겨우 겨우 난관을 극복해가며 나가는 상황에서… 아마 그냥 함께 주저앉아 버리고 결국 회사도 문 닫고 그룹도 흩어지게 될텐데…, 아니 최소한 아주 심각한 타격을 받고… 적어도 몇사람은 정신적 충격도 클텐데…

적어도 지금 내가 회사를 그냥 후다닥 옮겨버리는 일을 하는 일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무책임하고 심지어 무례한 일인건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가 처한 입장에서는… 지금 이 회사가 혹시 가라앉는 배가 되더라도,

이 배에서 마지막으로 내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

내가 지금 이 회사에서 이렇게 하는 소망의 내용은 무엇일까.

나는 과연 무엇을 꿈꾸고 있는 건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누구인가.

내가 뭐 회사 지분의 majority를 갖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런 내가 괜히 오지랖 넓게 행동하고 있는건 아닐까.

어제도 열심히 실험을 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성경공부는 정말 재밌다! 그러나 설교준비는…

이번 돌아오는 주말,

코스타 간사 수양회에서 Shiker 간사님이랑 나누어서 각각 두번씩 설교를 부탁받았다.

강해설교를 하기로 하고,

지난 한주 정도 정말 열공모드로 열심히 본문을 보고 있는데,

아, 정말 본문연구가 새삼 재밌다! ㅎㅎ

나는 헬라어를 모르기 때문에,

Concordance를 찾아가며 원어의 의미를 따져가고 있는데,

이런 작업도 참 재미있고,

구조 분석을 해가면서 바울의 숨결을 느끼는 작업도 참 재미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본문이 내게 해주는 말씀이 아주…

그런데 문제는,

본문연구와 분석, 묵상에 빠져 그것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 바람에,

막상 설교준비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그리고 시간이 부족해서 여러 주석들을 비교해가며 다른 이들의 해석을 참고할 시간도 거의 확보하지 못했고.

디모데후서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헌신한, 사랑하는 후배 디모데에게,

바울이 심장으로 써내려간 편지이다.

이 바울의 뛰는 심장의 역동성을,

말솜씨나 현학적 지식이 아닌…

마음으로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