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자가 속출하는 전투

어떤 느낌이냐 하면….
힘겹게 전투를 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꾸 여기 저기서 큰 부상을 당한다.

바로 옆에서, 뒤에서, 앞에서,
포탄에 맞아, 총에 맞아 쓰러져서 신음하고 있다.

전투가 힘들지 않았던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부상자가 속출하는 전투는… 정말 힘들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만…
여기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참 쉽지 않다.

힘든건….

언제부터인가

내가 조언을 구하는 사람은 많은데,
내가 조언을 구할 사람이 별로 없다.

힘들때 나를 찾아오는 사람은 많은데,
내가 힘들때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내게서 신앙의 길을 찾아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내가 그에게서 신앙의 길을 찾을 사람이 별로 없다.

사람들은 내가 믿음이 좋은 줄 아는데…
나는 믿음이 형편 없다.

Cheap

지난 몇년간 회사에서 공짜밥만 얻어먹었는데,
이번달 초부터 우리 회사가 밥값을 받기 시작했다. ㅠㅠ

회사에서 주장하기로는 한끼 식사의 비용이 대충 15불 정도 된다고 하는데,
직원들에게 8불씩받고 나머지는 회사에서 커버해주는 것이라고.

만일 내가 점심을 식당에서 사먹는다면 8불로 먹을 수 있는건… 아마 거의 없을 것 같다.
정말 최소한 15불정도는 주어야 하고, 회사식당 정도의 음식은 그것보다 살짝 더 비쌀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우아… 그 8불 내는게 그렇게 아까울수가 없다. ㅠㅠ
그래서 아침에 집에서 아침을 많이 먹고, 회사에서 공짜 커피를 두번이나 마시고,
그 외에 회사에서 공짜로 먹을 수 있는 요거트와 과일 등으로 점심을 때울 때가 많아 졌다.

아내는 자기가 그 8불 내줄테니 제대로 먹으라고 뭐라한다.

내가 한달에 office가서 점심 먹는 날이 대충 15~16일 정도 된다.
그러면 매일 점심을 회사에서 사먹는다면 한달에 120불정도 쓰게된다는 건데…

새삼 먹고사는게 너무 돈이 많이 든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ㅠㅠ

Biang Biang Noodle

Biang Biang Noodle – 민우가 영국에 갔다가 먹었는데 맛있었다고 한 중국음식이다.
나도 처음 들어본 것이어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찾아보았는데, 마침 회사에 중국 시안에서 온 친구가 알려줘서 우리 동네 음식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렇게 비싼 음식은 아니고 (어쩌면 우리 동네에서 사먹을 수 있는 것중 제일 싼 수준이 아닐까 싶다)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 같아 보이지도 않은데,
이게… 살짝 매콤한 듯한 맛에, 통통 튀는 듯한 면발, 그리고 볶은 기름이랄까 그런 맛도 좀 나는 면이다.
고온의 기름이 요리하는데 포함되어서 그런지 뒷맛에는 살짝 짜장면 비슷한 맛이 남기도 하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벌써 두번이나 사먹었는데 가서 먹고나면 양이 많아서 싸와서 먹게 되니 그걸로 한끼 더 때우게 되기도 한다.

한국에는 이걸 파는 집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동네에는 몇군데 있는 것 같고,
미국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는 것 같다.

중국에서도 시안 지방이 아니면 그리 흔하지 않다고 하던데…
그야말로 탄수화물 덩어리니, 자주 먹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에게는 쉽게 가는 외식 장소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Ownership

어디서든 일을 하다보면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하지 않고 그저 그때 그때 주어진 작은 것만 해내는 사람이 있다. 물론 전반적으로 일에 경험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조금 더 생각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귀찮거나 더 하기 싫어서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책임감, 혹은 이 일이 자신의 것이라는 소유감(?)이 없다고 할수도 있다.

그냥 여러가지 일을 할때도 그렇지만,
삶을 살아갈때도 그렇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때, 마치 이것이 내 삶이 아닌것처럼 그때그때 주어진 일만을 간신히 한다. 다른 생각은 귀찮아서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은 가득하고 자신의 위치를 일부러 축소시킨다.

20대 초반, 내가 부모님 차를 몰고 나갔다가 앞차를 아주 살짝 들이박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쪽에서는 거의 뒷목을 잡고 나오더니 고함을 쳤고, 나중에 우리집에 전화해서는 욕설을 퍼부어가며 난동을 부렸다.
어머니께서는 그 사람들과 전화하고 만나서는 그 고약한 사람들을 한편 달래고 한편 조용히 타이르시면서 일을 해결하셨다.
생각해보면 그때 어머니는 지금 내 나이보다 더 어릴때였다.

어머니가 그렇게 하셨던 이유는 아직 사회생활 경험이 부족한 내가 이 일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셔서 자신이 감당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었을 거다. 그래서 그 유쾌하지 못한 일을 나서서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감당해서 하셨던 것이다.

그게 ownership이다. 삶과 상황에 대한 책임과 무게를 내가 지겠다고 나서는 것.

그건 내 삶의 방향에 대한 결정을 할때도 그렇고,
내가 맞닥드리게된 고통이나 어려움을 대하는 모습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
맞닥드린 상황 속에서 먼지를 툭툭 털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그것을 마주하는 ownership.

나이가 꽤 들어서까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어른들을 꽤 많이 본다.
그리고 그런 모자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Jordan Peterson vs 20 Atheists

최근(?)에 Jordan Peterson이 20명의 무신론자들에 둘러싸인채, 그 사람들과 1:20으로 논쟁(debate)하는 이벤트를 한 모양이다.

나는 그 전체 video를 보지는 못했는데, 정말 Jordan Peterson은 내가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러각도로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이 사람의 논증은 흔히 CS 루이스같은 부류의 기독교 변증과는 매우 다르다. 혹은 알빈 플랜팅가 같은 철학자들이 하는 접근과도 다르다.
철학적 변증을 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인 철학적 개념으로부터 신의 존재 기독교의 정당성등을 논증하려고 하고,
CS 루이스는 현상적 경험으로부터의 추론을 가지고 논증하려고 한다고 생각하는데…
Peterson은 뭐랄까.. 딱 찝어서 이야기하기는 어려운데… 뭔가 반대쪽 끝에서부터 접근해 온다는 생각이 든다.

Peterson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공개적으로 울컥 하면서 이야기했던 것은 내게 꽤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Peterson의 사상이 어느정도 맞는다면 그는 철학적/신학적 foundation으로부터 따라와서 신을 발견했다기 보다, 지금 신이 없이는 세상이 설명되지 않는다는, 어찌보면 다소 포스트모던한 접근을 통해서 신과 만난것 같아 보인다.
그래서 아마 이 사람이 무신론자와 논증할때도 그런 입장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내가 잘 이해 했다면)

지난 1~2년동안,
나는 소위 ‘변증’이라는 것에 대한 일종의 회의랄까 그런 걸 가지고 있었다.
기독교가 변증의 대상일까, 변증이 과연 기독교를 증명해내는데 도움이 되는걸까 하는 질문 때문이었다.
그런데 Jordan Peterson식의 접근은 그런 내 질문과 회의에 완전 다른 커브볼을 던지고 있다.

Jordan Peterson의 생각에 내가 다 동의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 입장을 다 이해한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믿음에 접근하는 것이 내게 매우 신선하기도 하고, 어쩌면 post-modern generation에게 일종의 돌파구가 될수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지고 있다.

요한복음

요한복음을 공부해보고 싶은데…
영 어렵다.

내가 20대 초반에, 같은 교회에 있던 약간… 뭐랄까… 좀 도사같다고나 해야할까… 그런 스타일의 형이 있었다.
그 형은 약간 신비체험같은 것도 많이 했었고, 기도도 좀 독특하게 하는 형이었다.
그 형은 나를 보면 늘, 너는 요한 스타일이야… 라고 말하곤 했었다.
그 형이 보기에 나는 공관복음적 믿음을 가지고 있기 보다는 요한복음 스타일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그때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공관복음이 뭐고 요한복음은 뭐야… 그냥 다 복음서지.

그런데 실제로 나는 요한복음을 좋아하긴 했다.
그게 읽으면 유난히 더 잘 읽혔고, 요한복음 15장의 다락방 강화나… 21장의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시 만나는 장면은 정말 하루에 몇번을 읽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후 성경공부라는걸 조금 더 하게 되면서 나는 점점 요한복음 보다는 공관복음을 좋아하게 되었다.
특히 지난 10~15년 정도는 더 그랬다.
아마 historical Jesus라는 토픽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더 그렇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요한복음과는 좀 소원해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지금은 요한복음을 어떻게 잃어야 하는지 그 감을 잃어버린 듯 하다.
요한복음이 어렵다. ㅠㅠ
잘 이해가 안된다.

요한복음이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Christology 가 혹시 치우쳐져 있다는 의미일까?
나는 성경을 균형읽게 읽는 방법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요한복음을 좀 공부해보려고 하는데…
여전히 어렵다.

나와 다른 신을 믿는 기독교인들

예전에는, 믿는 교리에서 조금 다른 것이 있으면 나와 다른 기독교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특별히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똑같이 강조하지 않는 다른 기독교인들을 불편해하곤 했다.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핵심은 의외로 별로 넓지 않아서, 그 핵심을 서로 공유하고 동의한다면 작은 차이는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요즘 한국과 미국의 정치뉴스에 등장하는 어떤 종류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와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의 교리가 나와 다르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교리와 정면으로 배치되기 때문이다.

사랑, 은혜, 정직, 낮아짐, 섬김, 투명함 등등…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소중하게 생각해야할 개인윤리가 있다.
그런데 이들은 정치적 소신 때문에 자신의 보수적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이다.

정치뉴스에 나오는 그런 사람 뿐 만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열심히 하는’ 목사님이나 교회 지도자들 역시,
그들과 대화할때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신뢰하기 대단히 어렵다.
그저 잔머리를 굴리고, 속이고, 꼼수를 써가면서 결국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들…
그러면서 자신이 보수적인 신앙인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나는 훌륭한 보수적 기독교인과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도 역시 보수적 신학을 가진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는 다른 신을 믿고 있는 듯 하다.

맥빠진 두주

지난 두어주는 약간 맥이 빠진 상태로 보냈다.
아마 육체적으로 좀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겠고, 많은 생각과 정신을 쏟아야 했던 것이 한단계 지나서 좀 정신적/정서적으로도 쉬는 것이 필요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렇게 쉬다보니 밤에 괜히 멍하게 youtube에 반복되는 뉴스들, 시덥잖은 영상들이나 보고 있고,
별로 가치있게 시간을 보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다지 쌈빡하게 잘 쉬지도 못하면서 애매하게 시간을 보낸 듯 하다.

그러다가,
아… 가을학기부터 성경공부를 또 해야하는데… 하는 생각에 여러가지 성경공부 자료들을 모으고, 나름대로 본문도 살펴보는 일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주부터 follow-up도 다시 시작하고 나니 이메일이나 카톡등으로 질문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다시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좀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부르르 떨면서 해보았다.

이제 나도 비로소 금년 PKS가 끝난 듯 하다. (PKS: Post-KOSTA Syndrome)

High maintenance

회사에서 두종류의 정말 매우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 있다.

A는, 빠릿빠릿하지 못하다. 뭘 이해하는데 시간이 오래걸리는데 이 사람이 또 엄청 detail을 챙긴다. 그리고 눈치가 없다.
그래서 이 사람이 미팅 중에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질문하기 시작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이야기하느라 소중한 시간을 다 써버리게 된다.
이 사람에게는 매우 자주, 지금 해야하는 중요한 일이 무엇이고, 오늘까지 무슨 일이 되어야 하고, 오늘 미팅의 목적은 무엇이다… 등등의 이야기를 따로 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이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는다.

B는 말하자면 지나치게 자존감이 낮다. 무슨 말을 해도 자기 변명을 하는데 오랜 시간을 쓴다.
문제는 그 사람의 변명이 전체 팀에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그 사람에게는 또 매우 자주, 네가 잘한다. 너 문제 없다. 네가 한건 중요하다 등등… 엄청 칭찬을 많이 해주어서 이 사람이 쉽게 낙심하거나 심하게 방어적이 되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 사람 역시 그리 똑똑하지 않아서 뻘짓을 꽤 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내 나름대로는,
어쨌든 그런 high maintenance 사람들 조차도 쉽게 dismiss하지 않고 여러가지로 격려하고 지지해보려 하는 것인데….
참 쉽지도 않고 에너지도 정말 많이 든다. ㅠㅠ

그런데 예수님이라면,
그런 사람들을 나처럼 귀찮게 생각하거나 그러지 않았을 테지. 그 사람들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그 사람들의 독특한 것들을 잘 세워주셨겠지….

결국 예수님 입장에서는, 나도 high maintenance인 셈이다.
그런 원칙을 자꾸만 remind 해주어야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