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움이 없는 사랑이 가능할까?

내가 부모인데, 능력이 없어서 자녀에게 교육을 제대로 시켜주지 못한다고 하자.
그런 상황이라면 내 능력없음을 말로 다 할수 없이 한탄하며 안타까워할 것이다.

내 자신을 자책하는 것이 그 상황에서 유일한 해결책은 물론 아니지만, 그리고 그것이 꼭 건강하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지만…
자신에 대한 자책, 그리고 안타까움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대해 더 해줄 수 없다는 것에 근거하고,
그런 감정은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
내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런 상황 속에서 안타깝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영적리더들이 진심으로 자신이 섬기는 사람들을 사랑하는지를 알아보는 판별식으로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사용하곤 한다.

(물론 이것은 나 자신에게도 비추어 적용해보는 기준이기도 하다.)

이 귀한 말씀을 가지고 이렇게 밖에 설교하지 못했다면서 안타까워 눈물을 쏟는 설교자에게서는 사랑이 보인다.

갑질 (5)

그럼 나는 이런 환경 속에서 어떻게 내 일을 하느냐…
글쎄, 결론부터 말하면 그냥 잘 못하는 것 같다. -.-;
이런 환경 속에서 나를 과대평가하지 않고 겸손하지만 분명하게 내가 할 일을 성실하고도 정직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잘 해내는게 그리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내가 나름대로 해본 몇가지의 생각이 있다.

우선,
갑질을 하지 않아도 되는 vendor/supplier를 찾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갑질이 많아지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함께 일하는 vendor의 실력이 부족하거나 성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게 여건이 주어진다면, 내가 하는 일에 관한한 실력이 뛰어나면서 성실한 partner를 찾는데 매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 그렇게하면 그 vendor를 믿고 그쪽에 더 많은 자율권을 줄 수도 있고, 더 서로 존중하면서 일하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이런 과정에서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일이 되게하는 것을 추구한다.
사실 세상에는, 하고 있는 일보다 자신의 self-promotion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일이 되는데 필요한 것은 서로 논리적으로 동의해서 일하기가 가능한 반면,
self-promotion을 위해서 data를 더 얻어내거나 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요청을 마치 중요한것인양 포장을 하는 일도 해야하고.

세번째는,
그렇지만 때로는 과감하게 불편한 관계를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비대칭적으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 정보를 안다면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내 생각에 동의할 가능성이 많지만…
사정상 그 정보를 다 나누지 못할 경우가 많다.
그러면 어쨌든,…. “나를 믿고 좀 같이 가자”고 요청을 해야할수도 있다.
그쪽이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을 살짝 더 밀어붙여야하는 경우도 있다.
일시적으로 욕을 먹는 일을 감수하는 일이 때로는 불가피하다.

마지막으로,
함께 일하는 회사/사람들에게 credit을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러려면 그건 이 사람들이 한거야.. 내가 한게 아니야… 라고 이야기를 해야할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나를 낮추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높이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이게 손해인것 같아 보이는데,
그렇게 계속 일을 하면 결국 나와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더 의욕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갑질 (4)

이런 환경 속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내가 정말 ‘갑질’을 하게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제는 Silicon Valley에서 꽤 오래 일한 엔지니어가 되었다.
그러면서 정말 갑질을 무지막지하게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시아의 회사에,
20대의 젊은 엔지니어가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가서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그 회사의 높은 사람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따지는 것도 보았다.
자기가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회사 내에서 보여주려고 자기가 담당한 회사 사람들을 마구 쥐어짜서 꼭 필요한 것 이상으로 data을 얻어낸 후에 그걸로 회사에서 승승장구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안타깝게도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힘있는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그 회사 직원이라는 이유 때문에 어떤 ‘권력’이 주어지는데…
그 권력을 그 권력의 범위만큼만 행사하는 사람을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다.
거의 99%의 사람들은 그 권력을 가지면 자신이 그 권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보다 더 낫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그 권력을 권력의 범위 이상으로 남용한다.

갑질은
Silicon Valley의 언어인듯 하다.

갑질 (3)

OEM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이나 ODM (Original Development Manufacturing)은 주문자 위탁 생산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것은
– A라는 회사가 디자인을 하고,
– B라는 회사에게 그 디자인에 맞추어서 생산을 하도록 주문을 해서,
– B 회사가 그것을 생산하면
– A 회사가 그것을 사서 시장에 파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서, 볼펜하나를 만들려고 한다고 하자.
그러면 내가 볼펜을 디자인을 한다. 플라스틱 봉은 어떤 재질로 할 것인지, 지름과 길이는 얼마인지, 색깔은 어떤지, 안에 들어가는 스프링은 어느정도 세기의 스프링을 쓸 것인지, 잉크는 어느정도의 점도를 가지게 할 것인지, 볼펜 끝의 볼은 어떤 규격으로 할 것인지 등등.
그리고 그렇게 볼펜을 만드는 회사를 찾아서 그것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단순해보인다…
그런데 실상을 그렇지 않다.

볼펜회사에서는 금년 11월에 이 제품을 출시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다른 볼펜에 대해 어떤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는 필요조건도 가지고 있다.
주어진 시간 내에 이 개발이 잘 이루어지고, 원하는 규격을 다 맞추기 위해서는 그것을 개발하는 과정에서도 볼펜을 만드는 하청업체 혹은 vender와 부지런히 연락을 하면서 이 과정을 끌고 가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요즘 silicon valley의 회사들은 이 제품을 만드는 기술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뽑아서 이것을 관장하도록 한다.
그러다보니 점점 vendor가 이것을 개발하고 제작하는 과정의 자세한 내용까지도 원래의 볼펜회사가 관여를 하게 된다.
그냥 이런이런 볼펜을 만들어 주세요… 하고 그것 나중에 받는 것이 아니라, 정말 아주 구체적인 것까지도 미주알고주알 control을 하고 manage를 하는 것이다.
이게 요즘 silicon valley 회사들이 많이 하는 방식이다. 자신은 공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공장을 가지고 있는 회사들을 마치 거의 자기 회사인양 다루는 거다.

이쪽에 아주 구체적인 것 까지도 control하기로 악명이 높은 회사는 쿠퍼티노의 사과회사이다. ^^
볼펜의 예로 들자면, 볼펜을 조립하는 회사를 control 한다. 그리고 볼펜 플라스틱 봉을 만드는 회사도 control 한다. 게다가 볼펜 플라스틱 봉을 만들때 사용하는 mold 회사도 control 한다. 볼펜 플라스틱 봉에 사용되는 재료 회사도 control 한다. 구체적으로 몇도에서 이 공정을 하는지 그 공정을 +/- 몇도 이내에서 control하도록 요구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플라스틱 봉이 섭씨 50도와 -40도에도 변형이 일어나지 않는지를 테스트하도록 요구한다… 정말 끝도 없다.

하다못해 볼펜 하나를 예로 들어도 이렇게 복잡하고 많은데,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만든다고 생각해보라.
vendor들을 관리하고 control하는 일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시장의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아하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영혼까지 탈탈 털리도록 micro manage를 하고 관리를 할때가 많다.

사과회사같은 top tier 회사는, 주요 부품을 만드는 회사에 아예 십여명 많게는 수십명이 상주를 하면서 계속해서 보고를 받고 지시를 한다.
그 vendor(하청업체)들은 그렇게 와 있는 원청업체의 직원들을 정말 잘 대접한다…

갑질 (2)

갑의 위치에 있을때 갑의 위치를 그냥 방기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갑은 을을 대할때, 우리가 모두 동등하다는 것을 꼭 염두에두고 해야 하지만,
갑은 때로 갑으로써 해야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다음의 몇가지 이유 때문이다.

우선, 정보의 불균형 때문에 그렇다.
대개 갑은 을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급 정보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갑은 어떤 project를 더 high level에서 조망하게 되기 때문에 전체적인 resource allocation이나 schedule등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을에게 다 알려주기 어려울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갑은 그 정보들에 비추어서 을에게 언제까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한다는 이야기를 잘 해 줄 필요가 있다.

두번째, 일반적으로 갑과 을이 함께 존재하는 상황에서 을이 갑에게 기대하는 어떤 것들이 있고, 을이 갑에게 기대하는 어떤 것들이 있다. 그것은 대개 시장에서 이미 형성되어 있는 일종의 ‘일하는 방식’이다.
물론 그 속에서 나쁜 갑질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해야하겠지만, 갑이 을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하고 그것을 검사하고, 그 모든 것에대해 최종적인 책임을 지는 구조를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시장에서 통용되는 ‘일하는 방식’을 깨는 것이고, 대안적 구조를 만드는 것은 그저 한두사람의 노력으로 후다닥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번째,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게으름’이라는 함정에 잘 빠지기 때문에 그렇다.
이건 정말 tricky한 이야기인데…
내가 을의 입장에서 보아도 내 갑이 나를 부지런히 ‘관리’할때 내 productivity가 더 높아지는 경우가 분명히 있다.
그것이 너무 극단적이 되어 micromanage를 하는 지경까지 가면 오히려 productivity가 떨어지게 되지만, 절절한 순간에 일이 되었는지를 점검하고 책임소재를 분명하게 하는 일들은 일이 그냥 흐지부지 않되지 않도록 막는데 분명히 역할을 한다.

실제로, 내가 ‘갑;의 위치에 서 ‘갑’이 해야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와 함께 일하는 ‘을’과 나는 모두 함께 실패하고 낙오하게 된다.
내가 을의 입장에 있을때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나와 함께 일하는 나의 ‘갑’이 (내 manager가 되겠지) manager로서의 역할을 잘 해주어야 내가 정말 일을 제대로 잘 할 수 있다.

나는 아주 원론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현실적으로는 갑과 을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 존재를 마치 없는것 처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갑질 (1)

내가 하는 일의 특성 때문에,
‘갑질’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못되게 하는 일을 참 잘 못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내게 못되게 하는 것을 참 잘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냥 갑질 안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을텐데…
그게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앞으로 몇번의 글에서 내가 갑질에 대해 생각하는 몇가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이번주에는 또 한번 엄청 갑질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여 있어서…
한편 불편한 마음이 있고, 한편 잘해야하는 부담도 크다.

흔히 갑질이라고 하면,
갑의 지위를 남용해서 쓸데없이 을을 괴롭히는 짓을 의미하는데,
나는 갑의 위치에 있을때 어떻게 나쁜 짓을 덜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여기서 한번 해보고자 한다.

그러나 우선 clear하게 이야기할 것은,
갑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을을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볼수는 있지만 을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가 매우 중요할 것같다.
그렇기 때문에 갑으로써 잘 해보려고 노력해도 갑은 그 존재 자체가 폭력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잘 인지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을 배우기, 사랑하기

어떤 아이가 자꾸만 물건을 훔친다고 하자.
그 아이는 그냥 자기가 갖고 싶어서 옆의 가게에서 물건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채.

그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부모는,
그 아이가 물건을 훔쳐오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는 게 중요할까?
그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게 중요할까?
그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사태를 수습하는게 중요할까?

이것들이 모두 다 중요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아이에게 도둑질이 나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도둑질보다 훨씬 더 가치있고 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Therapeutic한 현대의 기독교는,
진리를 말하려 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핑게하에 사랑하지 않으려 한다.

나이가 들지만 늙지않기

나이가 이제 겨우 40조금 넘었거나, 50조금 넘었는데,
마치 ‘통달’이나 한 것 같이
“그거 해도 안되는거야”
“옛날엔 나도 그랬지”
“그건 네가 아직 젊어서 그래”
식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완전 맥빠진다.

나이가 들지만 여전히 청년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참 감동이 있다.

다음의 video는 Stanley Hauerwas가 로마서 13장에 관해 토론하는 짧은 clip이다.
2014년에 비디오가 올라온걸로 보면, Hauerwas가 74세일때의 모습인데,
분명 할아버지이긴 한데, 정말 청년의 기개가 넘친다.

정말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삶을 내가 control 할 수 없음을 느낄 때

나 처럼 겁이 많은 사람은 내 삶을 내가 control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 대단한 공포를 느낀다.
그래서 어떤 형태의 변화이던 간에 모든 변화를 기대를 가지고 맞이하는 일이란 거의 없다.
특히 내가 무엇인가를 실패했다고 느낄때나, 내게 무엇인가가 부족하다고 느낄때 그런 공포는 더더욱 심하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만일 나보다 큰 초월자가 내 현재 상황으로부터 나를 끄집어내고자 한다면 어떻게 하실까?
당연히 그 상황을 변화시키거나, 심지어는 무너지게 하셔서 새로운 길로 이끄시지 않을까?

이게 이성적으로는 당연히 그렇다는걸 아는데,
겁이 많은 나 같은 사람은 그런 상황이 되면 심장이 뛰고, 얼굴이 빨개지고, 땀이 나고, 당황한다.

나 같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두가지가 필요한 것 같다.

첫번째는,
그런 경험을 반복해서 해보는 것이다.
처음엔 그러면 죽을 것 같은데, 자꾸 해보면 그래도 죽지 않는다는걸 체험적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런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전에는 들어서 알던 하나님을 얼굴을 맞대어 아는 것 같이 알게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두번째는,
나의 약한 부분을 공동체에 의지하는 것이다.
가족이 될수도 있고, 친구가 될수도 있다.
그냥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누구에게 조금 기대어 부축을 받는 것이다.
불행히도 내겐 그런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내가 패닉에 빠졌을때 내게 기댈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이 정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패닉에 빠진 사람들에게 내 어깨를 내어주는 사람이 되고싶다는 생각이 참 큰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한편 내가 적극적으로 그렇게 도움을 구하기도 해야하고, 어쩌다 도움이 살짝 왔을때 그 도움을 수용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그래, 나 같은 쫄보에겐 그런것도 용기다.

젊은 놈들!

내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시지만,
내 나이 또래나 나보다 조금 더 젊은 사람들의 부모님들을 보면 ‘극우’의 정치적 입장을 가진 분들이 많다.

그중 어떤 분들은 아주 적극적으로 태극기나 심지어는 가스통을 드시는 분들도 있다. -.-;

나는 그 어르신들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분들이 가지는 비이성적 두려움과 분노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그분들중 많은 분들은 매우 진정성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시는 것 같아 보인다.
(그걸 이용해먹는 정치꾼들은 정말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한다.)

그 어르신들은 나 같은 사람들을 보면 진심으로 ‘빨갱이’가 되었다고 걱정하실수도 있겠다.
나는 빨갱이가 보기엔 완전 반동주의자일텐데 말이다. ㅎㅎ
그 분들의 눈으로는 나 같은 사람의 입장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니들이 빨갱이를 몰라 라는 말이면 그저 대화가 거기서 더 이상 진행되기가 어렵다.

그런데….
나는 피부로 제대로 느끼지는 못하지만,
지금 한국의 젊은 세대가 이번 법무장관 임명에 관련해서 가지고 있는 분노를 각종 매체를 통해서 일부 접했다.

나는 그 사람들이 가지는 분노를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을 했다가도,
아니, 저건 합리적 분노가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 사람들의 ‘정서’가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일베를 하는 아주 극소수 20대를 이해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냥 이 상황에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정상적인 20대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 있지도 않고,
그나마 미국에서도 20대의 한인 학생들을 많이 만나면서 지내질 않으니
그 생각과 정서를 이해할 기회를 얻기란 정말 어려워 보인다.

내가 제한적으로 접한 20-30대를 보면서,
사고방식과 논리구조가 다르다는 것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그렇지만…
나는 정말 이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좀 더 이 사람들을 이해하고 이 사람들에게 공감해보고 싶은데 말이야…

우리 윗세대 어른들이 ‘니들은 빨갱이를 몰라’라는 것에서 대화가 끊기듯이,
내가 그 사람들에게 던지는 어떤 말에서 그들과의 대화가 끊기지는 않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