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3)

설사, 목회자라는 직분이 성경에 어느정도 prescribe되어 있다고 믿는다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이 목회자가 ‘신학교’를 졸업한 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목회자가 되었건, 교사가 되었건 간에…
교회에서 교육과 양육과 훈련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그것에 맞는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한다고 완전 강력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M.Div. 3년 공부한게 정말 충분한가? 그나마도 3 년동안 진짜 엉터리로 공부한 사람들이 목사가 되는거 완전 많이 봤다.
가끔 어떤 목사님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아니, 저분은 신학교 3년을 다녔는데 어떻게 이것도 잘 이해를 못하지??? 하고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 많다. -.-;
나 같이 신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사람보다도 신학적 지식, 성경지식이 부족한 사람이 M.Div.과정을 마쳤다는 이유로 ‘권위’를 갖는다고 생각하는게 정말 맞는 걸까?

예전 직장에서, 내 manager는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대학에서 학부만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MIT 박사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 바닥에서 딩굴면서 배운 경험과 지식이 정말 완전 넘쳐났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그 사람과 맞장떠서 토론해보면 내가 밀릴때가 더 많았다. ^^
나는 그 사람을 기꺼이 내 manager로 인정하고 그 사람의 lead를 따랐다.
MIT에서 박사 교육 받았다는 것이 자동으로 나를 직장에서 리더로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면 안된다.
그런데 왜 교회에서만 그런방식이 허용되어야 하는건가?

그리고, 솔직히 교회에서 리더가되어 사람들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은 ‘지식’을 3년 습득하는 것으로 준비되지 않는다. 정말 사람을 대하는 방법, 여러가지 인생의 지혜 등등이 필요하고,
개인적으로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는 자세, 몸에 배어있는 성숙한 습관과 성품 등등이 모두 필요하다. 이것들을 M.Div.과정중에 잘 훈련받는다는 이야기를 거의 들어보지 못했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2)

성경을 prescriptive하게 보지 않고 descriptive하게 본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가령,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가 사랑과 복종이라는 관계로 그려지고 있다. 
이걸 가지고 여러가지 신박한 성경해석방법들을 가지고 사실은 그게 아니고…. 식의 해석을 하는 것들을 많이 본다. ^^ 왜냐하면 이 구절이 현대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을 할꺼냐 하는 것 때문에 그렇겠지.

그런데 나는 이 구절을 이렇게 본다.
남편과 아내의 동등하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서로 순종하는 관계라는 어떤 ideal한 모습이 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는 그게 잘 이루어지지 않을수 있다. 1세기 로마시대라면 그 평등하면서도 건강한 부부관계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 남성우월적 문화였을 것이다. 
그런데 남성이 우월하다는 사상과 그로부터 비롯된 그 당시의 문화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도 완전히 뛰어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 세상의 누구도, 자신이 살고 있는 문화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건강한 부부관계의 idea를 현실속에서 적용을 하려다보니 그게 사랑과 복종이라는 형태로 기술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에베소서의 그 내용은, 남편과 아내 관계가 어떠해야한다는 prescription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부부관계의 idea를 현실속에서 구현하는 한가지 모습을 descriptive하게 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구절을 바탕으로 남편은 사랑, 아내는 복종을 주장하는 것은 왜곡을 가져올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이런 관점으로 목회자에 대한 기술이라고 된 구절들(사실 따져보면 그리 많지도 않다)을 한번 보라. 
현실적으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그 공동체를 돌보는 리더들이 있었고, 그 리더들에게 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섬기라는 지침을 준것들이지…
성경이 목회자라는 직분을 prescribe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1)

Controversial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disclaimer.

나는 지금 건강한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목사님이 계신 교회에 다니고 있고, 그분과도 좋은 관계이 있다. ^^
지금 내가 출석하는 교회도, 완벽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잘해보려고 노력하는 교회이고, 교회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입장이 매우 건강하다고 자부한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면…

우선, 적어도 내가 성경을 읽는바에따르면 ‘목회자’라는 직분이 성경에 prescribe되어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바울서신등에 목회자로 인식될만한 직분들이 언급된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그냥 교회의 지도자로 해석해도 무관한 경우가 많고, 그 당시 상황에 비추어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있었고, 그 사람들을 바울이 기술하는 과정에서 목회자라는 직분이 설명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목회자라는 직분이 무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말 좋은 목회자들이 계시고,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분들도 많이 계신다. 나도 역시 나름대로 긴 시간 교회생활을 해 오면서 내게 좋은 목회자가 되어주셨던 목사님들이 계신다. 지금도 그분들께는 참 감사한 마음이 크다.

그러나, 현상적으로 좋은 목회자가 있다는 것이, 도저히 거부할수 없는 목회자 존재의 근거가 될수는 없다. 

목회자 직분에 대한 소위 ‘성경적 근거’ (나는 이 말을 남발하는 것이 때로 불편하긴 하다. 너무 오-남용 되는 감이 있어서)를 들이대면서 봐라, 여기 목회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 같이 신약성경에 나오는 적어도 대부분의(혹은 모든) 해당 구절들이 목회자라는 직분을 prescribe했다고 보기엔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성경의 많은 부분을 prescriptive하게 보기보다는 descriptive하게 보기 때문일 것이다. 

위험한 성경묵상

(우리 교회 성경묵상 그룹에서 나눈 글입니다)

예레미야서를 처음 제대로 접해서 읽은 것은 제가 보스턴에서 박사과정을 할때였습니다. 20대 후반.그때 지도교수가 제 funding을 끊어서 학교를 나가야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있을 때였는데,그때 QT 본문이 예레미야서였습니다. 

실험실이 없으니 시간이 많이 나서, 하루에 한시간반씩 성경묵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서를 읽으면서 정말 미칠것 같았습니다.그 예레미야의 눈물이 제 가슴에 꽃힌겁니다. 하나님을 떠나버린 하나님 백성을 향한 눈물, 불의를 향한 분노,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는 것을 보는 답답함…

그래서 그때 날마다 새벽기도를 했었는데,제 지도교수 찾게해달라는 기도를 먼저 하면서 기도를 시작하면… 한 3분이 못되어서 제가 어느덧 예레미야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침마다 땀 범벅이 되도록, 교회 지하 구석에서 고함을 고래고래치면서 예레미야의 기도를 해대었습니다.
예레미야의 고백과 같이, 나도 좀 내 삶 챙기고 살고 싶은데, 이제는 이거 그만하고 나를 위해서 살고 싶은데… 그래서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고 결심도 해보는데… 그때마다 심장 속에서 주님의 말씀이 불처럼 타올라서 뼈를 녹이는 것 같았습니다.그래서 닥치는대로 사람들에게 전도도 하고, 성경공부도 가르치고, 교회와 세상의 부정과 비리를 고발하는 글도 쓰고, 사람들 모아서 기도도 하고… 때로는 설교도 하고요.그래도 그 마음 속의 불이 다 해결되지 않으면 혼자서 아무도 없는 산 속에 혼자 차를 몰고 가서 그 차 안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기도하고, 거기서 혼자 세상을 향해서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정말 예레미야가 했던 것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차라리 이렇게 힘들거면 그냥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걸… 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만한 사람도 아니고, 그걸 원하지도 않았고, 지금 당장 내 코가 석자여서 학교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왜 하나님은 나는 돌보지 않으시고 나를 사용하려고만 하시는 거지.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딱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과 같은 말씀을 제게 하셨습니다.”야, 너 걷는사람하고 경주하는 것도 그렇게 힘들어하면, 말과는 어떻게 경주할래?”(유진 피터슨이 이걸로 책도 썼죠)
저는 하나님에게… 저는 속았습니다. 저는 하나님 믿으면 제 마음의 평안도 얻고 뭔가 좀 잘 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를 부르셔서 이렇게 힘들게 하시네요. 이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살수 없도록 저를 만들어 놓으시고는… 저를 이렇게도 돌보지 않으십니까.
이거 딱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기도입니다.

이제 금년 예레미야 본문 묵상이 거의 끝나가는데…금년에도 그 말씀들이 제 심장을 녹입니다만…그렇긴 합니다만…제 손발이 다 묶여있는 것 같은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그래서 더 많이 괴롭고 힘들게 말씀을 묵상합니다.

성경묵상은 그래서 참 위험하기도 한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늘 그랬습니다…
예레미야서 묵상을 마무리해가며 그냥 여러분들과는 제 마음을 한번 나누고 싶었습니다. ^^

주말에 쉬었다!

지금 회사에선 꽤 큰 일이 하나 벌어지고 있다.
우리 회사로 보아서 꽤 중요한 계약(?) 협상을 하고 있고, 그 계약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내가 지난 2년간 한 일과 연관이 많다.
그러다보니 시도때도없이 사람들이 나를 찾기도 하고, 나도 시도때도 없이 이 사람 저 사람 괴롭히는 일들이 있게 되는데…
한참 그런 기간이 있더니 요즘은 좀 잠잠하다. 그도 그럴 것이 협상 상대가 워낙 일하는 속도가 늦어서 그쪽에 일이 다 몰려가 있는 상태이다.
그러다보니 회사일이 본의아니게 살짝 널널하긴 한데, 대신 stress 지수는 꽤 높은 그런 묘한 상태에 놓여있다.

지난 주말에는 일 밀린게 없으므로, 밤 늦게까지 netflix에서 ‘마음의 소리’보면서 키득키득 웃고, 낮에는 옛날에 듣던 신촌 블루스, 장필순, 동물원, 유리상자를 들으면서 빈둥빈둥 웹서핑을 했다.
주말에도 리듬을 깨뜨리지 않으려고 시간 맞추어서 자고, 아침에도 알람 맞추어서 일어나곤 했었는데 참 오랜만에 그 리듬을 깨고 쉬었다.

요즘 이렇게 쉬면 정말 좋다.
예전엔 좀 쉬면 그냥 그럭저럭 좋구나… 뭐 그런 수준이었는데, 요즘은 이렇게 쉬면 아… 진짜 좋다… 그런 느낌이랄까.

Physically 좀 덜 바쁘긴해도 아마 내가 꽤 많은 압박속에 살고 있는 모양이다.

너(나)는 성격이 그런거야

하나님을 믿는사람들 사이에는 다양한 성격이 분명히 있다.
적극적인 사람도 있고, 소극적인 사람도 있다.
불같은 사람도 있고, 차분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어떤 사람의 그 성격에 그냥 안주해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냥 원래 소극적이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냥 아무것도 안하는거다.
나는 원래 성격이 급하다고 이야기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무작정 상처를 주면서 돌아다니는거다.

어떤 사람의 성격에는 반드시 좋은점과 나쁜 점이 공존한다. 그리고 어떤 성격이 다른 성격보다 더 낫다고 이야기할수 없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은 그 성격과 성품을 그리스도 안에서 복종시켜야한다고 믿는다.

소극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기를 구하면서 특유의 세심함으로 사람들을 돌보고,
마음이 뜨거운 사람은 self-control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사모하면서 뜨겁게 헌신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의 성품이나 성격까지도 변화시키는 일들이 정말 있다고 믿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는 복음을 알고나서 훨씬 더 용감해졌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주 겁이 많았고, 지금도 대단히 겁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과정 속에서 아주 제한적이지만 약간의 ‘깡’이 생겼고, 복음의 알기 전의 내모습과는 매우 다른 모습을 지금 가지게 되었다.

나는 교회에서 사람들이 그런 변화도 좀 사모해보았으면 한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니까… 에 머무르지 말고, 정말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고 자라는 것을 미친듯이 사모해 보았으면 한다.

한계에 도전하기

나는 die-hard baseball fan은 아니지만, 뭐 어느정도 야구 보는 것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팀도 있어서 그 팀을 casually 응원한다. ^^

운동선수들은 참 대단하다. 나 같으면 그것의 100분의 일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 level의 perfomance를 지속적으로 해낸다.

투수를 예를 들어보면… 나는 이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프로 선수들 보통 시속 90마일 정도는 대충 던지는데, 이게 나 같은 사람은 꿈도꾸지 못할 속도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투수 마운드로부터 포수 있는 데까지 닿도록 던지는것도 못할거다. 그게 거의 20m쯤 되니까. (옛날 체력장할때 생각해보면, 내가 40~50m 던졌던 것 같은데… 우리반 여자아이들은 대충 20m 정도씩 던졌던 것 같고)

말도안되게 빠른 속도의 공을 한번 경기에 100개가 넘게 던진다.
그리고 그걸 4일마다 한번씩 그렇게 한다.

나는 이거 정말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사실 투수들은 부상이 많다. 어디 근육이 다쳤느니, 어디 인대가 끊어졌느니…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느다.
인체가 견딜수 있는 한계수준에서 몸이 망가질랑말랑하는 경계에서 그렇게 경기를 하는거다.

나는 때로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아니… 저 사람들은 저 분야에서 저렇게 열심히 한계수준에 이르기까지 열심히 하는데,
나는 뭐람. 그런 생각이 들때가 있다.

내 전문분야의 영역에서 정말 그렇게 한계에 이르도록 열심히 성실하 하는 걸까.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정말 한계에 도전하도록 끊임없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걸까.

존재가 폭력이 되는

최근 예레미야 묵상을하면서,
바벨론에 대한 책망의 내용으로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힌것이 들어가 있었다.

예레미야서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바벨론이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이겨서 그 지역의 패권을 장악한 상태였고,
그런 강력한 바벨론이 망할 것이라는건 상상하기 어려웠을 거다.

과연 구글이 망할까. 망한다면 언제 망할까.
과연 미국이 망할까. 망한다면 언제 망할까.
현대판 바벨론 제국의 백성으로 살면서, 나는 나를 보호해주고 있는 이 제국들이 망하지 않을 것을 전제하고 살아갈때가 많다.

최근 아시아의 작은 기업과 작은 project를 하다가 그쪽에서 결과가 잘 나오질 않아서 중단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 기업은 내가 추산하기로 수만~수십만불 정도의 손해를 보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 회사가 본 손해는? 거의 없다.
그도 그럴게, 그냥 이 바닥에서 일이 되는게 당연히 그렇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회사같은 회사는 수만불 뭐 쉽게 쓸 수 있지만, 그런 작은 회사에게 수만불은 그래도 훨씬 더 큰 돈일텐데.

제국은 그 존재만으로도 그 주변국가에게 폭력이 된다.
제국에 사는 사람들은 그걸 끊임없이 기억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약한 사람들을 억압한 제국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제국의 존재는, 강자의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도 폭력이 될 수 있다.

문득 든 생각

내가 hp에 다닐때, hp는 tech company로서는 최초로 $100B revenue를 넘어선 회사였다. 그리고 세계에서 제일 큰 컴퓨터 회사가 되었다.
그런데 내가 떠날때쯤 회사가 해롱해롱하다가 그 후에 회사가 반으로 나누어졌고, 지금까지도 그냥 해롱해롱하고 있다.

내가 apple에 다닐때, apple에서는 ipad가 처음으로 나왔고, 한참 apple watch를 개발하고 있었다. 해마다 revenue가 급성장하고 있었고, ipad와 apple watch에 대한 기대가 만빵이었다.
그런데 내가 떠날때쯤 apple의 revenue가 매년 성장하는 것이 주춤하는 일이 생겼다.

내가 lenovo에 다닐때, lenovo가 세계 1위의 컴퓨터 회사가 되었다. motoloa도 사서 휴대전화도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내가 lenovo를 떠날때쯤에는 내가 들어갈때에 비해서 회사 주가가 1/3 수준으로 떨어졌고, 그 후 lenovo/motolora는 계속해서 휴대전화의 market share를 잃어갔다.

음…
가만보니, 나는 회사가 막 잘 나갈때 그 회사에 들어갔고,
내가 다니다가 나올때쯤에는 늘 회사가 갤갤하게 되었군.

이 정도면,
회사에서 나를 뽑기에 기피하는 ‘기피인물’ 리스트에 올라야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 ^^

아직 오지 않은 평화를 축하하는 일

신약성경에 나타나있는 크리스마스 스토리는 읽으면 읽을수록 황당하다.
말하자면 이런거다.

사업에 망해서 파산을 하고, 가족들은 쫄쫄 굶고 있고, 자녀는 가출을 한 가족이 있다고 하자. 빚 독촉에 시달리고 있고, 당장 내일 먹을 것이 막막하다.
그런 사람에게 와서, 내가 너를 위해서 새로운 일을 행하겠다. 네게 평화를 가져다 준다.
이렇게 천사가 나타나서 이야기한거다.
그런데 그 평화라는게… 현실을 하나도 해결이 안되고 힘 없는 아이 하나 태어난거다.
그리고 결국 30년쯤 후에 그 아이는 십자가에 정치범으로 처형당하게 된다.

무슨 이따위 평화가 있어.
무슨 이따위 위로가 있어.
무슨 이따위 약속이 있어.

그 속에서 아름다운 장래를 꿈꾸던 10대의 여자아이는 남편과의 관계를 맺지 않은채 혼전임신을 하게 되었고,
(그 아이는 평생 사생아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자란다.)
그 아이를 잡으려는 독자자에 의해 한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학살을 당한다.

아니, 무슨 이따위 평화가 있어.

그런데,
그래도 성경은 고집스럽게 그걸 평화라고 주장한다.
깨어진 세상 속에 찾아오는 평화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말 눈이 열리면,
그게 평화라는걸 보게 된다.

첫번째 성탄은 아직 오지 않은 평화인데, 그걸 찌질하게 축하하는 모습이었다.
오늘날의 성탄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평화를 믿음으로 축하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여러가지 깨어짐과 불안과 어둠과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무슨 이따위 평화가 평화야! 라고 이야기할수 밖에 없는 이들에게도,
그래도 이게 평화라고 이야기해주며 손을 뻗는 성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성탄은, 아직 오지 않은 평화를 축하하는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