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라, 힘!

나는 비교적 꽤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해내는걸 어느정도는 하는 편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multitasking을 잘하는것 같지는 않고, 다만 많은 일들을 시간을 쪼개가며 나름대로 내 시간사용을 최대한 optimize하는 것을 어느정도 할 줄 아는 것 같다.
이런 능력(?)이 길러진건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닐때 부터였다.

예수님을 믿고 마음이 뜨거워져 성경공부도 더 많이 하고 싶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조금 더 자라나고 싶어 좌충우돌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는데, 한편으로는 학교 실험실에 묶여서 해야하는 일들이 아주 많았다.
하루 12시간정도는 학교 실험실에서 일을 해야 했는데… 그러면서 어떤때는 한주에 3개인가까지 성경공부를 했었다. 그중 대부분은 내가 만들어서 했거나 인도했던 것이었고.
그러면서 주말에는 교회에서 시간을 보냈고, 근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돌보는 곳에 가서 봉사도 했었다. 크지 않은 교회이지만 청년부를 막 셋업하는 일도 했었고.
예전에 체력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회사에서 일이 너무 많아 지난주에는 살짝 멘붕이 왔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이 한꺼번에 떨어지는데 정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게다가 회사일 말고도 당연히 하고 있는 다른 일들이 많이 있으므로 그것들을 다루는데 버겁하는 생각을 했다.

20대초반부터 나는 이렇게 내 시간과 자원을 쪼개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 그냥 내게 주어진 것이라고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지난주엔 마음이 조금 흔들리면서 살짝…에이… 힘들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힘이 달려서 허덕허덕하는 사람에게 ‘힘내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꽤 잔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내겐 지금 그렇게 힘내라고 더 세게 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한 것 같다.
더 이상 20-30대의 체력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니 예전처럼 그렇게 달릴수는 없다 하더라도 내가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되는 사람으로 살 수 있는, 적어도 내가 찾아낸 방법은, “막~ 달리는것”인것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그것이 내가 20대부터 발견해온 나의 부르심이라는 생각이다.

밤에 일이 끝나고 나면 힘이 빠져 머리를 쓰는 일을 할 만한 힘이 잘 나질 않아 그냥 맹~하게 버리는 시간이 꽤 많다. 아직 조금 더 힘을 내어볼 여력이 있는 듯.

올해 초, 말씀 묵상을 하면서 그러한 나의 부르심에 더 충실하게 살자는 결심을 했었다.
이번주를 지내며, 올해 초 그 결심을 다시 되새겨 본다.

하박국

매일성경의 순서로 말씀묵상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난 월말의 묵상 본문이 하박국이었다.
하박국은 폭력이다! 라고 소리치고,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하박국이 충분히 납득할만한 풍성한 설명을 해주시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큰 그림을 설명해주시고 그 그림에 하박국을 초청하신다.

여기에서 그 유명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도 나오고,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도 나온다.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일어난 즈음에 함께 읽었던 하박국은 언뜻 내게 큰 도움이되지 못했다.
그게 나는 화가났다.
어찌보면 이런 상황속에서 잘 맞아들어야하는 말씀인건데 이렇게 내 마음에 겉돌다니…

하박국 묵상을 마친지 며칠이 지나, 다시 그 말씀을 조금 곱씹어보니…
상황에 대한 일차적 해결을 당장 원하는 마음으로 하박국을 읽으면 도움이되지 않는게 맞다.
하나님께서 고구마 100개 드신듯한 말씀을 하시니… 복창이 터질 지경인거다.

그렇지만 어쩌면, 이게 구조적 악과 싸우는데 궁극적으로 남는 힘과 용기를 주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잠시 끓어오르는 분노가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조금 지나면 자신의 문제에 파뭍혀 이것이 잊혀져버릴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이런 상황속에서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한 그림, 하나님의 공의가 마침내 이루어지는 그림… 그런걸 그리게된다면,
이 잠시 끓어오르는 분노가 조금 사그러진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오래 남을 수 있을 것같다.

슬픔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해답이 될 수 있는 이유들

어제 우리교회 ‘하나님 나라’ class에서 잠깐 나눈 이야기.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슴아픈 일들에대해… 기독교가 (이상한 기독교 말고, 제대로된 기독교가) 해답이 될 수 있는 네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첫째, 인권(human right)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는 유대-기독교적 가치가 아니라면 그 이론적 근원을 찾기 어렵다.
다른 세계관에서는 인간의 존엄성 자체가 그 세계관이 가지는 논리적 결과로 도출될 수 없지만,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이것은 다른 종교인들이 비윤리적이라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다만 그 윤리의 근원적 논리적 바탕이 기독교적 전통에서 solid하게 발견된다는 의미

둘째, 기독교의 하나님은 고통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십자가의 예수님. 신 혹은 신적 존재가 인간을 위해 고통받는다는 것은 기독교 밖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고통 속에 하나님께서 어디계시느냐고 물으면, 기독교적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 속에 계신다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나아질 것 같지 않아보이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는 다른 세계관이 제공해주지 못하는 관점을 제시한다.

셋째,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것은 내가 특별한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이룬 내 성취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함의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이런 상황 속에서 겸손할 수 있다. 내가 뭔가 해답을 가지고있다고 나대지 않고, 이 아픔을 일차적으로 느끼는 흑인 형제 자매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 사람들의 뒤에 따라 서는 것을 할 수 있다.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최악의 솔루션은 훈장질이다.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사실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그래서 다른 이들의 아픔안에 함께 머물며 내가 뭔가 급하게 해답을 주어야한다는 헌된 중압감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한다.

넷째,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이 땅은 하나님의 땅이다. 내 아버지의 나라다. 세상의 아픔은 내 아버지 나라의 아픔이다. 이 땅이 내 아버지 나라인한, 그리고 그 땅에서 아픔이 있는 한, 기독교인들은 그 속에서 그 깨어짐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할 수 밖에 없다.
내 작은 영역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 agenda가 성취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야말로 그치지 않는 동인(motivation)을 가지고 계속 살아가게 된다.

미국의 상황이 절망스럽게 느껴지는 두가지 이유

George Floyd가 경찰의 부당한 폭력에 희생당한 것으로 인해 미국 이곳 저곳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있다.
내가 사는 곳 근처도 도시에 따라서 저녁 8시정도부터는 대개 통행금지령이 내려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건 정상적인 이성과 감성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 상황에 분노하고, 아파하고, 고민하는 것은 그냥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할 일이다.

그런데…
한국의 ‘선진 시위’와 비교되기 때문일까.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습은 참 안타깝기 그지 없다.

일단, 적어도 내가 아는바, 이곳에서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가게를 부수고 물건을 빼앗아가는 폭도는 아니다.
오히려 시위에 참여하는 틈을 타서 그런 일을 하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위가 평화롭지 못하다는 것은 그 상황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것으로 비추어져버린다.
1992년에 그랬던 것 같이 흑인에 대한 공권력의 폭력 –> 정당한 분노 –> 무질서와 약탈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 공식이 되어버리면 그건 흑인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요구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정의를 요구하는 시위에따라 생긴 공권력의 공백이 이런 폭력배들의 약탈로 이루어지는 고리가 끊어지기가 쉽지 않아보인다. 적어도 미국의 상황에서는.

그리고,
이런 상황에 대해 정말 분노하는 ‘정의로운 보수 백인’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가령, 남부의 백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중에 양심있는 사람들이, 이것이 잘못되었다. 미국 정부의 현 대응은 잘못되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그냥 흑인들과 ‘좌파 백인’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이렇게 보이는 내 판단이 틀리기 바라고, 정말 정의로운 보수 백인들의 등장이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별로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인다.

나는 늘 사회의 변화가 자주 그렇듯이, 결국 세대가 지나가야 느껴지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음세대가, 보수 백인의 가정에서 자라는 다음 세대가, 이 사건을 어떻게 보느냐… 이것이 궁금하긴하다.

민우는 자신의 세대에서 눈에 띄는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적어도 자기가 만나는 자기 세대의 사람들과 대화해보면 자신과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이 절대 다수라고 이야기하긴 한다.

민우의 친구 집단이라는게… 아마 bias가 있을 테니…

어쨌든,
많이 화도 나고, 많이 안타깝기도 하고, 많이 답답하기도 한데…
변화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려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더 마음이 무겁다.
내 예상이 틀리길 바란다.

꼰대 (3)

나는 고등학교가 3기, 대학교가 2기여서 선배가 별로 없었다.
공부하는데는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대학교 3학년때 복음에 눈을 뜨고나서는 이 어마어마한 것을 좀 따라 배울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아주 절실하게 내가 따라 배울 사람들을 찾았었다.

어떤 분들은 참 배우고 싶었지만 너무 멀리 있었고, 어떤 분들은 가까이 있었지만 따라 배울 만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몇년에 걸쳐 참 고마운 신앙의 선배들도 그래서 좀 만날 수 있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미친듯이 책을 찾아 읽어 책을 통해 얻은 간접 지식들도 쌓을 수 있었다.

내가 선배를 찾았던 것은 꽤 절실할때도 있었다.
내가 발견하기 시작한 이 복음의 신비를 나보다 조금 더 고민해본 사람들과 치열하게 대화하면서 배워보고 싶었다.

그때 나는, 누가 내게 그 사람의 생각을 좀 강요해도 좋으니, 그래서 내가 많이 불편해도 좋으니, 그래도 누가 내 선배가 되어 주길 많이 원했었다.

다시 말하면 누가 내게 꼰대질을 해서라도 내가 성장에 이르도록 도와줬으면 하고 바랬던 것이다.

꼰대 (2)

젊은 세대가 꼰대를 극혐하는 것과 대비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멘토’를 찾는 다는 것이다.
이게 지금의 20대까지 적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한대로는, 지금의 30대까지는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얼핏 생각하면 꼰대는 권위주의적이고, 멘토는 공감하며 끌어주는 차이가 있다고 하겠지만 실제로는 그 경계가 매우 모호하다.

실제로 어떤 사람이 권위적이냐 그렇지 않느냐는 그 내용보다는 형식에 달려있어보기도 하다.
사실 대화하는 내용은 결국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다만 그 형식을 부드럽게 하고 약간의 feedback 받는 여유를 남겨두면 그런 사람들은 꼰대로 여겨지지 않기도 한다.

반대로 이야기하는 내용은 일방적이지 않은데 이야기하는 방식이 권위적으로 느껴지면 그 사람은 그냥 꼰대가 되어버린다.

이게 어떤 사람의 조언을 받는 입장에서도 구별하기 어렵지만, 어떤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는 경우에도 내가 이렇게 하면 꼰대가 되나 하는 것을 구별해내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실제로 내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이야기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도 만나 보았고,
왜 저 사람이 저렇게까지 공격적으로 이야기를 할까 하면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도 만나 보았다.

꼰대가 되지 않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그냥 어떤 사람의 기분을 상하지 않고 내용을 잘 전달하는 일종의 대화의 기술 수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시편 23편

내가 개역성경을 보지 않은지는 꽤 오래되었다.
새번역을 내 주된 한글성경으로 삼고 읽은지 20년이 넘지 않았나 싶은데…
그럼에도 시편 23편을 암송할때 나는 늘 옛날 개역성경으로 한다.
그러니, 내가 시편 23편을 처음 외운 것은 적어도 20년이 더되었다는 말이다.

살면서 많이 힘들어서, 불안해서, 앞길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몸을 움직이는 것 조차 버겁고 힘들게 느껴질때..
어떤때 나는 차를 몰고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공터 주차장에 혼자 차를 세워놓고 그 안에서 목이 터져라 이 시편 23편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몇번이고 암송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라는게 믿어지지 않으니… 그렇게 하나님께 따져보는 것이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신다고 했는데, 그 지팡이와 막대기를 좀 찾아보고 싶은 절박함이었다.

그럴때마다 하나님은 응답이 없으셨고, 나는 잔뜩 쉰 목을 가지고 실망감에 젖어 늦은 밤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남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을 지금 다시 돌이켜보면…
그렇게 눈물 범벅이 되어 목이 잔뜩 쉬도록 시편 23편을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외쳤던 나를 인도하셨던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였다.

그때는 그게 보이지 않았는데, 한걸음 떨어져서 그때의 나를 보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고 있는 내 옆자리에 앉아서 내 어깨를 감싸고 있었음이 여기서 보인다.

내가 가서 그때의 나에게…. 조금만 눈을 들어봐. 눈을 뗘봐. 너는 괜찮아. 주님께서 네 어깨를 감싸고 계시고, 너는 여전히 그분의 지팡이와 막대기의 안위하심을 받고 있는 거야…. 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아마도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에게 가서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더라도, 그때의 나는 여전히 주님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가 주님보다 여전히 크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시는,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때 썼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런 순간을 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주님이 함께 하셨음을 보면서 썼던 것 같아 보인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참, 신앙의 신비이다.

You are God

계속 시편을 묵상하다보면 좀 답답한 느낌이 든다.
시편은 좀 뜬금없는 (그래서 다소 공허하다고 느낄 수 있는) 하나님 찬양하는 시,
혹은 나 힘들어요… 하는 그런 시 크게 두 종류로 나뉘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나 힘들어요… 하는 종류의 시는 다시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말하자면 구조가 이렇다.
내 인생에 문제는 가득하고, 이거 어떻게 해결될지도 모르겠고… 그냥 힘들다…
이렇게 끝나는 거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힘든걸로 끝을 마무리 한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차라리 공감을 다 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해는 된다. 그냥 힘들다는 거지 뭐.

그런데 시편에 너무 자주 나오는 건 이런 방식이다.

내 인생이 꼬였고, 악인은 승승장구 하고, 원수는 나를 따라오고, 나는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런데 당신은 하나님 이십니다.

이거 정말 황당하지 않은가.
말하자면 이게 그렇게 친절하지 않다.
세상은 엉망이고, 나도 힘들어 죽겠고… 그런데 당신은 하나님이시다…

You are God 이라는 시인의 고백은 참 많은 것을 담고 있다.

당신이 정말 의로운 분이시고, 정말 창조주이시고, 정말 하나님이시라면…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이런 환경 속에서…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냥 됐다… 뭐 말하자면 이런거다.

나는 신앙인이 하게되는 아주 정상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반응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황이 해결되는 것에 시시콜콜 내가 토를 달고, 내가 걱정을 싸 안고… 그러는 모습에 매달리기 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것에만 나는 딱 달라붙어 있겠다는 자세다.

이건, 현실적인 노력을 그치겠다는 포기의 선언과는 다르다.
걱정함으로 키를 한자라도 자라게 할 수 없는 인간이,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고 그 불확실성 안에 믿음으로 머물러 있어보겠다는 고백인거다.

하나님은 참 좋은분이시다…
이 고백을, 인생의 어두운 터널 속에서, 아직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지 않을때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진수를 경험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은 아는 것이고.

You are God, and I’m not.

Long weekend!

회사에서 오늘(4월 22일)을 휴일로 정했다!
25일(월요일)이 휴일이니까, 자그마치 4일동안의 long weekend가 된 것이다.

맨날 집에서 일하는데 그게 뭐 얼마나 좋냐고 하실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서 일하다가 저녁까지 같은 자리에서만 계속일하는게 은근히 지친다. -.-;
최근에는 독일과 중국과도 conference call을 하는 일들이 종종 있어서, 아침 7시 conference call이나 저녁 늦은 confernece call들이 있기도 하기 때문에 더 지치기도 하는 것 같다.

이거 완전 배부른 소리라는 것 잘 알고 있는데…
그래도 지치는건 지치는 거다….
이번주에는 내내… 언제 주말이오나 고대하면서 지냈다.

주말에도 해야하는 일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이틀의 extra 휴일이 생겼으므로 진짜 좀 쉬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