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spel Presentation (7)

기독교가 욕을 많이 먹는다.
그렇게 욕먹는 것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잘 못 represent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가령 기독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이기적이고 율법적이고 judgemental한 기독교인들 때문에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사랑을 잘 발견하지 못한다. 그냥 위선적이고 답답하고 나를 정죄할것만 같은 곳이 교회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렇게 기독교가 mis-represent한 것들 때문에 비기독교인들은 기독교에대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
사실 그 오해를 푸는 것이 참 만만치 않다.

게다가 Christendom의 시대에는 그 구성원들이 일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기본적인 기독교에 대한 이해들이 있었다.
‘신’이란 어떤 분인지, ‘죄’란 무엇인지 등등.
그런데 지금은 그 기본적인 개념 자체가 모호해져 버렸다.

가령 현대인들에게 ‘당신이 이해하고 있는 신이 어떤 분인지 이야기해보라’고 한다면 매우 다양한, 그러나 기독교적 개념과는 다른 신개념들을 이야기 할 것이다.

Post-Christendom에서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기본 개념들을 이해하고 있을 것이라고 assume하지 말아야 한다.

Gospel Presentation (6)

아무래도 이렇게 그냥 쭉~ 나가면 오해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약간의 신학적 논의들에 대한 설명을 더 덧붙여야겠다.

‘복음'(유앙겔리온)이란 말은 로마시대에 종교적으로 사용되던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당히 정치적인 말이었다.
대개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이라던가, 황제의 생일 등과 같이 제국의 위용을 더 드러내는 사건에 대한 뉴스를 ‘복음’이라고 불렀다.

초대교회성도들이 로마제국하에서 예수님의 탄생과 선포와 죽음과 부활을 ‘복음’이라고 불렀다면,
그것은 죄-예수-구원의 framework에서 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매우 정치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유앙겔리온’이 되려면 예수님 사건은 무엇으로 이해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로마제국의 통치와 대비되는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땅에 임했다는 것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다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유앙겔리온’이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통치를 회복하신다는 것에는 물론 ‘죄-예수-구원’의 스토리를 포함한다.
그렇지만 그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Gospel Presentation (5)

사실 구약을 보면 죽음의 문제를 그렇게 많이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죽음이라는 것을 그냥 자연스러운것으로 다루고, 죽음을 극복해야하는 것으로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실제로 우리가 ‘복음을 전할’때 이야기하는 ‘사망’에 대한 이야기는 요한서신들과 바울서신들에서 주로 다루어진다.
복음서에서는 의외로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많이 다루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오히려 복음서에는 ‘복음’이라는 어떤 event가 일어났다는 왁자지껄함이 가득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다루는 것은 복음의 진수로 들어가는 여러가지 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구약에서와 같이 쩨데카(공의)와 미쉬파트(정의)라는 주제를 통해서도 복음의 진수로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신구약중간기과 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루어졌던 ‘부활’과 같은 논의들도 복음의 진수로 들어가는 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복음의 진수로 들어가는 여러 문들을 통해 복음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나면,
그 안에 사망을 이김, 공의, 정의, 부활 등등의 이야기들이 더 높은 곳에서 조망하는 것과 같이 이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질문 자체가 매우 shallow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역설적으로, 죽음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다가 복음의 진수 안으로 들어오게 되면…
오히려 그 사람은 자신이 씨름하고 있던 것이 죽음의 문제와 제대로 마주하지 않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수도 있을 것이다

Gospel Presentation (4)

물어보지 않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죄-예수-구원은 어떤 질문에 대한 대답일까?
나는 그것은 아주 기본적으로는 ‘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닐까 싶다.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매우 중요한 질문들을 던지게 한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가치있는 질문들이다.
인간이 누구나 죽음을 대면하게되기 때문에, 죽음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은 모두에게 relevancy를 분명히 갖는다.

그러나…
죽음만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질문의 전체는 아니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실제로 인간이 던지는 질문은 ‘죽음’으로부터 비롯되기 보다는 ‘삶’으로 부터 비롯되는 것 같아 보인다.

나는 그것이 현대에 기독교가 relevancy를 잃고있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죽음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지 않던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매우 가치있는 일이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인간의 궁극적 문제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죽음의 문제를 매우 진지한 핵심으로 다룬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럼 복음이라는 것이 의미 없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죽음의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다루지만, 그와는 다른 문제들도 아주 많이 다룬다. 그리고 그중 어떤 것들은 현대인들에게 매우 relevant한 질문들을 던져준다.
그리고 그들을 정말 ‘복음’에 다가오도록 만들어준다.

Gospel Presentation (3)

그럼, 복음을 제시한다고 할때,
죄-예수-구원을 복음 제시라고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그건 뒤에 조금 더 다루겠지만 딱 그렇지도 않다.

사실 여기서 살짝 고민이 좀 된다.
이걸 신학적으로 제대로 설명하려면 아주 길고 (어쩌면 지루한) 내용이 여기에 담겨야 하는데…
그렇게 하는게 이 블로그에 적절할까 하는 것 때문이다.
잠깐 고민을 하다가… 그 논의는 좀 과감하게 skip하기로 마음 먹었다. ^^

좀 길고 복잡한 논의를 다소 쉽게 설명하려고 시도를 해보겠다.

복음이란,
선한 창조의도로부터 벗어나 있는 인간과 세상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스토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물론 그 스토리의 클라이막스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그런데 이 큰 스토리는 그 스토리가 이야기되는 시대에따라 다르게 비추어지거나 다르게 강조되는 모습이 있을 수 있다. (이거 잘못 이야기하면 이단 비슷하게 되기 때문에… 이 비유가 좀 아슬아슬하긴 한데… ㅠㅠ)

가령, 이렇게 생각해보자.
모든 병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이 있다고 하자.
그 만병통치약은, 모든 병의 근원이 되는 가장 근본적인 것부터 해결을 하기 때문에,
그 약만 먹으면 에이즈로부터 무좀에 이르기까지 고치지 못하는 병이 없다고 하자.

그런데 그 만병통치약은 어떤 사람이 그것을 원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작동할 수 있다.
어떤 우울증환자에게는 새로운 활력을 주게되고,
어떤 두드러기환자에게는 가려움을 없애준다.
어떤 심장병환자에게는 심장 박동을 찾아주고,
어떤 관절염환자에게는 관절의 고통을 없애준다.

그러면 그 약을 심장병약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렇지만 그 약을 심장병약이라고만 하면 안된다.
심장병 약이라는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심장병약이라고 하면 그것은 관절염 환자에게 적용되지 않는 약이 되어버리고 만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사셨고 처음 복음이 선포되었던 그 시대를 포함해서,
어떤 시대이던간에 그 시대가 특별히 가지고 있는 문제와 질문은 있기 마련이다.

어떤 시대에는 추상적 진리가 시대의 관심사이기도 하고,
어떤 시대에는 인권이 시대의 관심사가 될수도 있다.
어떤 시대에는 전쟁없는 세상이 모든 이의 바람이 되기도 하고,
어떤 시대에는 끝을 모르는 쾌락추구의 파괴성이 그 시대의 화두가 될수도 있다.

복음은 기본적으로 이 모든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다.

Gospel Presentation (2)

‘복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앞글에서 이야기한것 처럼,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예수님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것일까?
(이것을 앞으로 죄-예수-구원 이라고 줄여서 쓰겠다.)

나는 죄-예수-구원이 복음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분명히 확신한다.
그리고 죄-예수-구원이 의미하는 것을 다 믿는다.
그러나, 복음을 죄-예수-구원으로만 이야기하면 복음에 대한 어떤 왜곡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에 쓰는 이야기들은 당연히 나 혼자의 주장이 아니고 여러 신학자들의 주장이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이 내용이 새롭게 다가오는데 더 구체적인 독서를 원하는 분들은 연락을 해주시길.)

우선, 1세기 신약백성들이 이해했을 ‘복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한번 살펴보자.

여러 성경구절을 찾아볼 수 있지만, 신약과 구약에 동시에 나와있는 본문을로서
로마서 10장과 이사야서 52장에 함게 나와있는 대로,
복된 소식을 전하는 발길이 아름답다고 이야기한 본문을 생각해보자.
이사야서에 기술된 그 복된소식(복음)의 내용은 죄-예수-구원이 아니다.
이사야서에는 그 복된 소식의 내용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사야서의 그 본문에 따르면 복음은 죄-예수-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인 것이다.

Gospel Presentation (1)

‘복음을 전했다’라는 표현을 교회에서 듣는다.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다행히도(?) 그런 표현을 별로 쓰지 않는다.
나는 정말 복음을 전해야한다고 믿는다. 나 개인적으로도 ‘구령의 열정’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복음을 전한다’라고 이야기하는 데에는 오해가 많이 있는 것 같아 그것을 교회에서 사용하는 것을 볼때 좀 불편하게 여겨질때가 있다.

복음을 전했다고 이야기할때는 대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너는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를 위해서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분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나는 위에 써 있는 말중 동의하지 않는 말이 하나도 없다.
나는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완전 적극적으로 공감/동의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죄인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도 완전 동의하고, 그것때문에 무한히 감사하다.
그리고 그분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도 완전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편하다.

왜냐하면,
일단 그것은 ‘복음’이라는 것을 너무 좁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그게 잘 먹히지 않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별의 별것을 다 배운다

나는 재료공학을 전공했다. (내가 제일 하고자 했던 전공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꽤 재미있어 했다.
대학때는 오죽해야 시험보는게 재미있을 정도였다.
진짜 재미있게 공부했다.
전공과목 배우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혼자서 다른 전공과목들을 독학하기도 했다.

그런데 박사는 재료공학이라보 보기 어려운 쪽으로 하게 되었다. (내가 꼭 하고자 하는 분야는 아니었다.)
내 지도교수는 전자과와 화공과 겸임교수였고,
내가 한건 물리-화학-화공의 중간쯤 되는 애매한 분야였다.
그런데 하면서 참 많이 배웠다.
박사 졸업할때쯤엔 그것도 왕창 재미있어 했다.
생각도 해보지 못했던 복잡한 미분방적식들을 풀어가며 빡쎄게 했다.

그런데 졸업후 직장은 그것과는 또 다른 일로 빠지게 되었다. (내가 꼭 하고자 하는 분야쪽에서 job을 찾을 수 없었다.)
어찌어찌하다보니 ‘디스플레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꽤 열심히 했는데, 그것도 진짜 재미있었다.
왕창 배웠다.

그리고나서는 또, 디스플레이쪽이라고 보기엔 좀 어려운 다른 분야의 일들을 했다. (디스플레이쪽을 계속 하고 싶었으나 적당한 job이 없었다.)
roll-to-roll 이라는 방법으로 manufacturing을 하는 것에 뛰어들었고,
그걸 가지고 여러가지를 만들었다.
완전 빡쎄게 많이 배웠다.

지금은 난데없이 medical device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원래 지금 회사에 온건 이런걸 하려고 온게 아닌데…. 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어제는 밤 늦게까지 brain surgery를 하는데 들어갔다. -.-;
지금 만들려고 하는 device가 brain에 연관된 것인데, 그 수술과정을 봐야 device를 제대로 디자인 할 수 있게 때문이다.
다음주에는 cadaver를 가지고 해부하는 session을 출장을 가서 하루종일 하게 된다.
사람 시신을 해부하면서 여러가지를 배우는 거다.
허걱… 나는 평생에 내가 이런걸 배우게 될줄은 정말 몰랐다.

내가 계획하고 생각한대로 일이 늘 풀리는 것도 아니고,
뭔가 좀 배워서 그쪽을 좀 안다… 싶으면 분야가 바뀌어서 새것들을 계속 배워야하는 일을 30년째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은데….
나는 좀 진득하게 한분야에서 계속 일하고 배우고 싶은데…
아주 머리가 터질 지경이다.

이런걸 보더라도, 하나님은 나랑 참 취향이 맞지 않는 분인 것 같다. ^^

허름한 옷의 갑질

나는 보통, 내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의 가격을 다 더해서 50불이 되지 않을때가 많다.
셔츠 – 20불
청바지 – 20불
양말&속옷 – 5불
뭐 이렇게 되지 않을까.
요즘같은 겨울에는 그 위에 외투를 입으니, 50불이 넘을 것 같다.

나는 출장을 갈때도 대개는 그렇게 입고 간다.
일본 토쿄 중심가의 높은 층의 office에 미팅을 하려 들어가면,
나는 혼자 청바지에 허름한 셔츠를 입고 있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장에 넥타이 다 메고 쭈루룩~ 앉아 있는 경우도 있다.

너무 그렇게까지 차이가 나지 않으려고 그럴때는 살짝 조금 더 낫게 입으려고 노력을 할때도 있긴 하다.

그런데….
내가 출장을 다닐때도 그렇게 하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내가 ‘갑’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그 사람들에게 잘보여야 하는 입장이라면, 옷도 더 단정하게 챙겨입어야 하는 거다.

내가 옷을 허름하게 입고 다니는게 갑질이라는 생각에 많이 불편해졌다.

불편한 비행기 자리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내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가 음… 최소 250파운드(114 Kg) 는 되어보이는 거구였다.
나는 복도쪽 자리에 앉았고, 그 아저씨는 중간자리에 앉았는데…
자신의 체격이 크다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앉자마자 팔장을 끼고는 웅크려 가능한 자신이 차지하는 부피를 줄이려 노력을 했다.
그러나 워낙 그 아저씨가 거구여서, 당연히 팔걸이도 그 아저씨 것이었고,
내 자리의 상당한 부분을 그 아저씨의 옆구리가 넘쳐 흘러 들어왔다.

나는…
당연히 불쾌했다.
아니, 어쩌다 이런 자리에 걸려서…

한 시간이 조금 넘는 짧은 비행시간이었기에 그냥 나는 불편하게 어정쩡하게 몸을 기울여 앉은 채로 왔고, 그 아저씨는 그 아저씨대로 몸을 잔뜩 웅크린채 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그 아저씨 잘못은 아닌거다.
그냥 그 사람은 체격이 그렇게 큰걸 어쩌란 말인가.

옆에 있는 어떤 사람의 존재가 불쾌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참으로 불쾌한 기분이다.
그 사람의 존재가 불쾌한 것 보다도…. 한 사람의 존재를 그렇게 불쾌하게 느낀다는 사실이 불쾌한 것이다.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내 경험이야 그분의 경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감히 동등하게 비교할 것은 못되지만.

한 사람을, 그 사람의 존재를 감사할줄 아는 것은…
여유가 있을때는 쉽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정말 존중할줄 아느냐 하는 것은 여유가 없을때 제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내 마음의 여유없음은, 여유 없는 비행기 자리만큼이나 빡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