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검사

KOSTA는 때로 내가 일년동안의 숙제를 검사받는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일년동안 충분히 영적건강을 지키며 살았는지.
그래서 내가 KOSTA에서 하는 일들은 그 일년동안 내 영적인 상태가 잘 투영된 결과로 나타나게 되는지, 아니면 억지로 짜내서 일주일 지내게 되는지.

일년동안 나는 충분히 여러가지를 고민하고 생각했는지.
그래서 나는 새롭게 생각하고 고민한 것들을 가지고 KOSTA에 가고 있는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예전에 했던 고민들을 뽑아서 또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각과 고민을 사람들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일년동안 나는 또 여러가지 공부를 잘 했는지.
늘 뵐 수 없는 강사님들에게 내가 일년동안 공부한 것들중 궁금한 것들을 여쭈어보고 도움을 얻을 준비는 하고 가는 것인지.


솔직히 지난 한해, 열심히 살았던 것 같기는 한데….
건강하게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예수님을 따르며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흩어지고 무너졌던 순간들도 꽤 길었던 것 같고,
닥치는 것들에 휩쓸려가며 주도적으로 살지도 못했고,
내 영혼을 잘 가꾸며 살지도 못했다.

이번에 가서 숙제검사 받아보면 점수가 나올 것 같은데,
그리 높은 점수가 나오지 않을수도 있겠다….. ㅠㅠ

참된 그리스도인을 알아볼 수 있을까?

나는 천재가 아니지만, 천재를 꽤 많이 만나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반에서 1등, 전교에서 1등, 유명대학교 입학 그러면 천재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천재는 전혀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천재들은 어떤 의미에서 정말 급이 다르다.
가령 다들 전교1등만 하는 그룹을 모아 놓았을때,
남들이 다들 하루에 5시간만 자고 죽어라고 공부해서 80점 받을때,
혼자 팅팅 놀면서 하루 30분만 공부하고 혼자 A 받는 사람들이 진짜 있다.
그게 그냥 보통 사람들만 모아 놓은 것이 아니라… 모두 다 IQ 150이상에 전교1등들만 모아 놓은중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다. 전교1등이 아니라 전국 1등들만 모아놓은 중에도 그렇게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래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보기도 했고,
함께 공부를 해보기도 했고,
그런 사람들과 일을 해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진짜 뭐 유명한 대학에서 박사받고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유난히 천재성이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나는 정말 천재를 어느정도 알아보는 눈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웬만큼 머리 좋은 사람들을 보아서는 나는 크게 감동(?)받지 않는다.
워낙 천재들에 비하면 뭐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게 정말 그렇게 참 그리스도인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있을까?
내가 정말 참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만나왔고,
그런 사람들로부터 배우기도 했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기 때문에…
딴건 몰라도 진짜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좀 안다… 그렇게 내가 이야기할 수 있을까?

또 그런 기준으로,
바로 나는 참된 그리스도인일까?

뭐 그만그만…
종교성 깊은 사람들 사이에서,
정말 급이 다르게 드러나는 깊음과 풍성함을 뿜어내는 그런 그리스도인.
그래서 고만고만한 종교성들이 다 너무 shallow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그런 그리스도인.

개인 경건생활

나는 딱 뭘 잘하는게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뭐든 시키면 성실하게 하는 편이긴 하다.

그러다보니 KOSTA 같은데서도 뭐든 내게 사람들이 시키는 일들이 좀 있기도 하고,
계획하다가 뭔가가 빵꾸나 나면 누군가는 그걸 메워야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내가 뭘 해야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이번에도 내 원대한 계획은,
가서 주로 기도실에서 기도 많이 하고, KOSTA cafe에서 커피 봉사하고 뭐 그렇게 하는 것이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되지 않다보니 또 이것저것을 하게 되어 버렸다.

지난 두어주는 정말 회사일이 정말 정신이 없었던데다가, 가족일로 한국에 잠깐 다녀올 일도 있었고, 이번에 맡았던 것을 준비하는데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썼다.
이제 이번주에는 내가 뭔가를 준비하는데 필요한 모든 자료들이 다 모아져서, 폭풍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소위 ‘개인경건생활’ 이라고 하는 아침 말씀 묵상, 짧은 기도 그런것들이 좀 소홀해졌다.

그래도 어쨌던 성경본문가지고 계속 씨름은 많이 하고 있고 (LGS 준비 때문에)
전체집회 강사님들 설교 script를 보면서 많이 많이 곱씹고 있다. (기도회 준비 때문에)

이렇게 ‘공적인’ 일을 위해서 말씀을 보는 것이 과연 내 개인 경건생활을 대체할 수 있는 걸까?

예전에는 그럴수 없다고 생각을 하는 편이었는데,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일정 기간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오히려 일정기간 그렇게 하는 것은 꽤 건강할수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있다.

내가 비록 지난 2~3주 계속 encouter with God 말씀 묵상을 따라가지도 못하고 있고,
기도도 영 부실하긴 하지만,
여전히 내가 공적인 일을 위해서 말씀을 붙들고 있는 것이… 제한된 기간 중에는 오히려…
내 시각을 나로부터 돌려서 더 큰 것을 바라보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로마서 8장

지난 주일부터 교회에서 로마서 8장 설교가 시작되었다.
세상에 로마서 8장이라니!

몇주에 걸쳐서 성경공부 방식으로 할 예정인것 같은데,
음… 살짝 좀 실망. ㅠㅠ

그냥 전통적인(?) 관점에서 (old perspective on Paul) 그것도 매우 단순하게 정리된 관점에서, 꽤 많이 reductionistic하게 풀어냈다.

나는 기본적으로는,
로마서 7장에 나오는 ‘곤고한 사람’은 ‘일반적인(?) 유대인’을 가리키는 바울의 문학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8장 처음에 therefore (그러므로)라고 나오는 이후는 그 전제하에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8장은 일반적인 이방인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다기 보다는,
유대주의와 유대문화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사람들이 God-fearer라고 보는 분들도 있는 것 같던데, 그건 나도 좀 생각이 왔다갔다 한다.

그렇게 하고 8장을 읽으면 지난주 설교와 같은 내용으로 이해하기는 좀 어렵다는게 내 생각이다.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예전에 했던 생각, 이제는 나와 다른 생각의 관점에서 하는 설교이지만,
뭐 교인으로서 동의하지 않는(?) 설교도 열심히 들어야 하겠지… ㅠㅠ

God is the only explanation

몇주전 Bryan 목사님의 은퇴 설교에 나왔던 말.
God is the only explanation for what happened so far.

1996년부터 KOSTA에 참석해왔다.
솔직히 처음 그렇게 큰 기대를 하고 간 것은 아니었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수양회/수련회에 대한 큰 기대가 일반적으로 별로 없는 편이다.
사람의 변화와 성숙은 훨씬 더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게 참석하기 시작해서,
어떤 해에는 내가 이번에 뭔가 확실하게 나를 불살라서 제대로 한번 하고 와야겠다고 호기롭게 가기도 했다.
어떤 해에는 정말 크게 가고 싶지 않은데, 어떤 의무감과 책임감에 참석하기도 했다.
어떤 해에는 대단히 소망없는 마음으로 참석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기도 했다.

나는 나를 그래도 어느정도 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계산이 빠르다. 특히 시간을 쓰는 것을 대단히 아까워한다.
겁이 많고, 소심하다.
나를 드러내는 것을 몹시 좋아하고,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참을성이 부족하고, 대부분 냉소적이거나 비관적이다.

그런 내가 지난 28년동안 이런 저런 모습으로 KOSTA에 참석해 왔다.
집회 자체에 참석하지 못한 적이 두번인가 있었지만 96년이후 지금까지 그저 늘 나는 KOSTA의 일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토록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교만하고 겁이 많고 냉소적인 내가,
이렇게 계속 그래도 이렇게 꾸준할 수 있었던 이유는…

God is the only explanation what happened in last 28 years.

올해도, 나름대로 지금까지 준비과정에서 했던 일들도 꽤 있었고,
현장에서 해야하는 일들도 꽤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God is the only explanation.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사람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산다고 이야기하자면 마치…
거창하게 살아야 할 것 같다고 느끼곤 한다.
Shane Clairborne같이 살아야 한다거나, 직장을 때려치고 자선활동에 매진해야한다거나… 뭐 그런.

그런데,
막 전국구로 유명하거나 그렇지는 않지만,
막상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듣다보면,
아… 이 사람은 정말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구나…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뭐 당연히 완벽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영역 속에서,
충실하게, 그렇지만 많이 고민하면서, 또 새로운 시도를 해 가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두주전이었던가,
그런 사람중 한 사람과 짧게 전화통화를 했었다.

그 사람과의 짧은 전화통화가 마치 내 영혼을 맑게하는 것 같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 사람과의 짧은 전화의 약발이 내게 생생하게 살아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일을 잘하기를 기대하기, 일을 잘 하면 감사하기, 일을 잘 해도 그저 그냥 그렇게…

어떤 직업이나 자리나 위치는, 그 일을 잘하더라도 뭐 그냥 그저 그렇게 여겨지는 경우가 꽤 많다. 어떤 의미에서 대부분의 직업이 그런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사하는 대부분의 직업들은 대개 그렇다.

어떤 직업이나 자리나 위치는, 그 일을 잘 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래서 잘 못하면 크게 비난을 받거나 어려움에 처하거나 큰 책임을 지게된다.
가령, 정치인, 많은 리더들,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 의사 등등은 그런 부류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직업이나 자리나 위치는, 그 일을 잘하면 크게 주목을 받고 박수를 받기도 한다.
특별히 용감하게 일을 한 소방관이나 경찰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하는 응급실 staff들 등등.

그런데,
어떤 직업이나 자리나 위치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그 사람이 그 일을 잘 한다고 칭찬할 모든 준비를 다 하고 기대하기도 한다.
가령, 세상의 모든 자녀들은 자신의 부모들이 좋은 부모이길 간절히 바라고, 웬만하면 자신의 부모들이 좋은 부모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의 교회의 목사님은 좋은 목사님이길 간절히 바라고, 웬만하면 그 목사님이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꽤 많은 경우, 학생들은 자신의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일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어한다.
이런 부류에는 삶의 길을 인도해주는 멘토, 자기가 아끼고 따르는 선배, 유난히 자신을 챙겨주는 친척 어른 같은 사람들이 될수도 있다.
많은 경우 자신의 배우자에게도 그런 기대를 갖게되기도 한다.

나는…
모든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네번째 부류의 위치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일,
어떤 부모가, 어떤 선생님이, 어떤 목사님이, 어떤 선배가, 어떤 멘토가,
나는 그런 부모나 스승이나 목사, 선배, 멘토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린다면…
그냥 그런 사람은 소망이 없는 거다.
그리고 그로인한 고통은 그 개인에 머무르지 않고,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퍼지게 된다.

나는,
어쩌어찌하다보니 아버지가 되었고, 정말 좋은 아버지일까 하는 고민을 해보지만 사실 그렇게 자신은 없다.
어찌어찌하다보니 남편이 되었고, 정말 좋은 남편일까 하는 고민을 해 보지만 그 역시 자신이 없다.
때로 ‘가르치는’ 사람이되어 성경을,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며 살기도 하지만 그것도 전혀 자신이 없다.

어제 하루 Juneteenth라는 휴일이었다.
어제 나름대로 이번 KOSTA 준비들을 몰아쳐서 하려고 했는데,
이런 무거운 마음에 막상 별로 하지도 못했다.

그들은 율법교사가 되려고 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또는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디모데전서 1:7)

내가 그런 부류의 사람이지는 않은건지…..

시차

한동안은, 다른나라로 출장가는 것을 참 좋아했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적어도 출장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일하지 않고 좀 쉴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름대로는 비행기 안에서는 웬만하면 일하지 않는다는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예전에는 시차적응도 빠르게 하고 졸린것도 커피 엄청 마시면서 견디어내곤 했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그것도 더 힘들고 해서,
내가 잘 쓰는 방법은 도착해서 그 당일에 조금 일찍 약을 먹고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내가 이럴때 잘 쓰는 약은 CVS에서 나온 Sleep-Aid Chewables 이다.
이걸 먹으면 이럭저럭 한 7-8시간 정도는 잠을 자게 되고, 그 다음날 아침 커피 잘 마시면 내 sleep cycle이 잘 reset 된다.

주일, 집에 돌아와서, 지난 이틀 약먹고 잘 잤다.
앞으로 한 3주 정도 미친듯이 보낼 준비 잘 되었다!

Metanarrative, 기독교 세계관

어제의 이야기에 살짝 더 이어서,
나는 사실 그 metanarrative에 쉽게 설득되기도 하고, 그것에 의해 잘 움직여지는 세대의 사람이다.
내 20대의 metanarrative는 성장, 민주화였고, 실제 내 동시대 사람들중 어떤 이들은 그 metanarrative에 자신의 젊음을 다 바치며 헌신하기도 했다.
그러니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metanarrative가 세상이 이야기하는 metanarrative의 대안이라고 이야기할때 어쩌면 내 세대에게 기독교가 더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대충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한국의 ‘복음주의권’에서는 소위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적 반성들이 많이 나왔다.
80-90년대 기독교 세계관을 그렇게 많이 이야기해 왔는데, 막상 그 내용과 열매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20대 초반에 탐닉했던 기독교 세계관은 metanarrative였고, 그 보다 더 자세한 각론이 빠져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metanarrative에 의해 설득되던 세대에게 기독교 세계관은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겠지만, metanarrative만으로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은 다소 공허해 보였던 것이었겠다.

metanarrative에 관심없는 사람들에게 결국 그 metanarrative를 설득해서 보여주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은, 그 스토리의 ‘example’ 혹은 ‘anecdote’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 metanarrative를 전달하고자하는 화자가 얼마나 그 metanarrative에 이미 충실해서 살아왔는가 하는 그 개인의 history에서 나오는 힘이 설득력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key factor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LGS: The Story

금년 KOSTA 주제인 The Story라는 내용을 잘 나눌 수 있는 LGS 성경 본문을 정하는게 쉽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한시간 남짓 되는 제한된 시간 내에 본문의 내용을, 전문적인 신학적 도움 없이,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본문을 찾는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 내용이 하나님나라 라는 큰 주제와 연관이 되어있어야 하고

내가 그 본문의 내용을 다각다로 많이 고민해서, LGS 성경공부 도중 나오는 여러가지 생각과 질문들에 효과적으로 잘 대응할 수 있기도 해야한다.

그런데 요즘 하게되는 더 큰 고민은,
지금 20-30대가 meta narrative에 큰 고민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라는 주제는 결국 성경이 meta narrative라는 중요한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인데, meta narraive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 meta narrative를 설명하려하는 것이 참 쉽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