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강아지이기 때문에?

dsc_0020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는,
적어도 두번이상 키우는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록이 있다.
그래서 상처가 많은지 사람들을 많이 경계한다.

지금도 주인인 우리가 엉덩이 부분을 만지면,
많이 긴장하고 몸이 뻣뻣해진다.
그리고 들어서 품 안에 안는 것을 못하게 한다.
아마 많이 abuse를 당한 것 같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앞쪽 이가 다 빠져서…
다른 개들이 그렇게도 좋아하는 뼈다귀… 뭐 그런건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 똑똑하지도 않아서,
불러도 잘 오지도 않고,
공을 던지면 주워온다던가 그런 재주를 피우는 것도 하나도 없다.

가끔은 집 안에서 실례를 할때도 있고,
유리창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라 짖기도 한다.

조금만 뛰면 금방 지쳐서 헥헥 거리고.

객관적으로…
스펙이 많이 떨어지는 잡종이다.

그래도 우리 민우는 우리 개가 참 좋은 모양이다.
그리고 하이디도 민우가 참 좋은 모양이다.
부족한대로 민우에 대해서 많이 사랑을 표시한다.

오늘은 어머니의 생신이다.
많이 부족한 아들이지만,
내 ‘스펙’에 관계 없이 나를 사랑해주시는 분.

참 감사하다.

예수를 믿고 가장 많이 후회했던 것

나는 87년 6월 항쟁이 있었을때 대학 1학년이었다.
87년 6월은 정말 대단했다.
나는 비롯 ‘지방 단과대’에 다니고 있었지만, 대전역 같은 곳도 민주화의 열기가 넘쳤었다.

그렇지만 나는 1학년때 시위같은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아마 제일 큰 이유는 겁이 많아서 였던 것 같고,
그렇게 나를 투신할만큼 가치있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89년에 복음을 받아들이고나서,
내가 가장 크게 후회했던 것은 그 격동의 시기에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진리와 정의에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못하고 그저 ‘나’만을 생각했던 내 모습이 말로 다할 수 없이 부끄러웠었다.

복음으로 눈이 떠지고 나서야 비로소 정의, 인권, 민주, 자유, 평등 과 같은 것을에 함께 눈이 떠졌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라는 생각을 가지면서 비로소,
그 세상이 망가져 있다는 것이 큰 아픔으로 마음에 다가왔었다.

…..

2016년,
지금 내가 믿고 살아가고 있는 이 기독교가,
과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런 자극과 도전을 주고 있을까?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건강한 보수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고, 그런 사람들이 당연히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를 떠나서, 정의와 인권과 같은 개념을 그냥 도외시하는 기독교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말로 다할 수 없이 힘들고 괴롭다.

시대정신에 저항하고, 그것에 맞서 싸우면서,
그렇기 때문에 치열하게 기도하고,
정의를 위해 금식하고…
정말 그런 일들이 이제는 유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
기독교가 그저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도구로 전락해버려…

내가 대학생이었던 때로부터 이제는 거의 30년이 지났으므로,
그때의 상황이 지금에 바로 적용되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세상을 뒤집는 가치인 복음이,
민중의 아편으로 전락해버린 이 현실은 어쩌면 좋을꼬…

전도서

전도서는 내게 매우 어려운 책가운데 하나였다.
지금도 물론 그렇다.

이게 논리적으로 분석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담겨 있는 글은 조금 더 차분하게 읽으며 한번 씹어야 하는데,
나는 마음이 급해서 그걸 잘 못한다.
게다가 삶과 신앙의 경험이 일천하니 쉽게 삶과 마음이 담긴 글을 풀어내는게 어렵게 느끼지곤 한다.

최근에,
성경을 통독하는 와중에 전도서를 읽었다.

우아… 세상에…
완전 눈이 확~ 크게 떠졌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봤던 솔로몬의 인생론.
그렇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꼭 들려줘야하는 인생론.

전도서가 매우 relevant하게 다가왔다.

미련 곰팅이

작년 여름즈음 왼쪽 종아리에 부상이 있었다. 말하자면 근육파열 같은 것이었는데, 다행히 잘 회복되어서 이제는 괜찮다. (영어로는 pulling muscle 이라고 하는데… 근육파열 그러니까 엄청 큰 부상같이 들리네. ㅎㅎ)
그때는 내가 layoff 당하고 새 직장을 찾는 중간이어서 insurance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조심조심 운동안하고 쉬면서 회복했었다.

그 이후에 몇달 후에, 살짝 허리가 불편해졌다.
그러더니만 어떤 순간에는 꽤 허리가 아파졌다.
카이로프랙터를 만나서 물리치료 비슷한 것도 받고, 근육 강화운동(?) 그런 것도 배우고, 근육 stretch하는 것도 배우고, 마사지도 받고…
그랬더니만 좀 나아졌다.
그래도 늘 하던 운동을 하면 다시 허리가 좀 불편해졌다.
그래서… 역시 운동 안하고 쉬면서 조심조심 허리를 달랬다.

거의 일년 운동을 소홀히 했더니만, 체중이 엄청 불었다. -.-;

그래서 이번주 초부터는,
에이… 도저히 안되겠다. 허리를 좀 잘 달래가면서 운동을 좀 해야겠다. 결심하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원래 하루에 4~5마일 달리던 것을 대폭 줄여서 하루 2마일 수준으로만 달렸다. 그것도 중간에 잠깐씩 걷기도 하면서.

허억~
그랬더니만…
이게 완전 좋다!
별로 허리나 관절에 큰 무리도 없고, 오히려 허리가 좀 더 편해지는 느낌이다.

이게…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내가 이제 하루에 한시간씩 죽어라도 달리는 운동은 하는건 무리인 모양이다. ^^
예전에 하루에 6~8마일씩 달리던 거 생각해서… 그래도 그 정도는 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운동량을 대폭 출이니 훨씬 더 살만한거다.

이련 미련 곰팅이.
내 몸이 더 이상 그렇게 혹독하게 매일 운동하는 것을 잘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었는데,
그걸 박박 끌고 다니며 혹사시키고는
다리 아프다 허리 아프다 그랬던 것이었군.

미련 곰팅이 같은 주인을 만나서,
내 몸은 고생이 많다. -.-;

마음 속의 이야기를 쓰기 어렵다

나는 이 블로그가 유명해지는 것을 그렇게 많이 원하지 않는다. ^^
이따시 블로그가 유명해질수 없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정말 깊이있는 마음 속의 이야기를 쓰기가 어려워질까 두려워서 그런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의미에서 지금도 벌써 그렇다.

언젠가부터 이 블로그에 코스타 이야기를 쓰기가 어려워졌다.
전반적인 스피릿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옛날 추억에 대한 것, 혹은 코스타와 관련된 대단히 personal한 것들은 좀 쓸 수 있지만…
가령 코스타의 현안,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내 생각, 이런건 좀 개선할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 뭐 그런 것들은 정말 쓰기가 어려워졌다.
왜냐하면 이 블로그를 읽는 ‘코스타 관계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간사들중 일부는 가끔씩 들어와서 읽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거기에다 대고 내가 detail하게 이렇게 저렇게 쓰면, 그냥 내가 쓴 글이 내 의사와 관계없이 그 후배들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 그렇게 쉽게 하지 못한다.
사실 하고 싶은 얘기도 많고, 내 나름대로의 생각도 정말 많은데… 정말 그런 얘기는 이 블로그를 포함해서 거의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다.

또,
이 블로그에 지역교회 이야기를 쓰기가 어려워졌다.
내가 다니는 작은 교회에서 이 블로그를 읽는 사람들이 좀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경우 그것이 읽는 사람에게, 특히 교회의 리더십에게 어떤 부담이 될까 싶어 참 글쓰기가 어렵다.
(참고로 나는 우리 교회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있다. ㅎㅎ 정말 완전 땡땡이 교인.)
사실 나는 교회에 대해 써보고 싶은 내용이 참 많다.
설교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고.
그렇지만, 내 생각을 썼을 경우 자칫 오해를 사지는 않을까 싶어… 언제가부터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고보니 애꿎은 직장 이야기만 많이 쓰여지게 되는 것 같다. ㅎㅎ

그럼에도 그냥 내 코스타나 교회에 대한 내 생각을 거침없이 써버리는게 좋을까?
아닌것 같다.
이렇게 많이 불편하게… 내 속 이야기 아무에게도 하지 못하면서 있는 것이 훨씬 더 여러 사람에게 좋은 것 같다.
여기에 무슨 글을 써대는 것은 자칫 매우 비겁한 행동이 될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이 블로그는 그래서 점점 더…
내 깊은 생각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장이 되어버리는 것 같긴 하다.

기도를 하다가 외로우면

기도를 깊이 하다보면 외로움에 사무칠때가 있다.

자주 그런건 아니지만, 가끔 한번씩은…
기도를 할때 내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할때가 있다.
그런 기도를 할때의 99.9999%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도를 할때이다.

제게 이런 문제가 있어요, 이것좀 해결해 주세요…
누구에게 어려움이 있어요, 그것좀 도와주세요…
뭐 당연히 그런 기도들을 할수 있고, 나도 물론 하지만… 그런 기도를 할때는 좀처럼 영혼의 눈물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기도를 하다보면 심지어는 내가 육체적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을 때라도 내 영혼이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곤 한다. 대개는 그 하나님에 대한 갈망, 하나님을 사모함, 그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이 돌아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함 등등이 섞여서 기도가 나오게 된다.

그리고,
이런 기도를 하고나면… 참 많이 외로워진다.
왜냐하면 이런 기도의 내용을 나누었을때 그것을 공감하는 사람이 대단히 드물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내 온 영혼이 눈물을 쏟는 경험을 하고 나왔는데, 그런 경험이나 그것으로 부터 파생된 생각들을 이야기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그냥 눈만 껌뻑껌뻑 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런 경험을 몇번 하고나면, 아… 그래… 이건 나누기 어려운거구나… 그냥 그렇게 받아들이게 된다.

아,
이건 무슨 내가 영적으로 우월하다거나 그런건 당연히 아닐거다.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은사와 경험들을 허락하시니까.
다만 내게는 손으로 만지는 것과 같이 tangible한 것인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면… 뭐 외로운건 당연한거지.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나를 포함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 자체에 깊이 좀 빠져들길 간절히 바란다.
이 바람과 기도는 벌써 내게 25년쯤 된 것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도도 잘 들어주시지 않는다.

이 블로그에서 내가 가끔 언급하는 (그리고 가끔은 그 형이 이 블로그에 들어오기도하고 ㅎㅎ) 어떤 형은,
나랑 스타일도 많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많이 다르고, 생각이나 삶의 방식도 많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다. 참 많이 다르다.
그런데 그 형과는 이런 기도의 내용을 이야기했을때, 아… 그래… 하고 통하는게 있다.
그 형과 함께 옆에 나란히 앉아서 기도를 해본게 20년정도는 된것 같은데… 어쩌다 몇년에 한번 만나도… 그래도 여전히 그 형과는 그런 기도의 대화가 통한다.

이런 외로움을 해결해달라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시지 않는걸 안다.
그분은 내게 그렇게 친절한분이 아니시다. ^^

그 기도의 외로움이 이젠 그냥 익숙해졌다.

어제 밤,
기도를 하다가 그 형 생각이 났다.
기도를 하다가 많이, 많이 외로웠다.

남자다운 남자, 여자다운 여자

회사에서 당연히 함께 일하는 사람들중에는 남자들도 있고, 여자들도 있다.
특히 지금 내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project들에는 여자들이 많다.
보통 미팅을 하면 절반 정도가 여자이고, 어떤땐 여자가 더 많을 때도 있다.

음…
국민학교 이후로 나는 이런 환경은 사실 처음이다. -.-;
뭐 여자들이 더 많다고 해서 특별히 더 불편하다거나 더 좋다거나 하는 것은 없는데,
그중에는 특별히 자신이 ‘여성’임을 많이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
말투라던가, 옷을 입는 것이라던가, 손짓같은 작은 것들에서,
정말 ‘여자, 여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자만 그러느냐.
사실 그렇진 않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중에는 괜히 ‘마초’스타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앉을때도 쩍벌남하고, 말투도 괜히 터프하게 하고, 화끈하게 의리있게… 완전 그런 스타일이랄까.
싸나이~ 뭐 그렇게 외치면서 다닌다고나 할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회사에서 좀 더 편하게 지내는 사람들은,
유난히 마초인척 하는 남자라던가, 여자라는거 마구 ‘티내는’ 여자들이 아니라,
함께 있으면 이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별로 신경이 쓰여지지 않는 사람들이다.
어제도 저녁 7시가 다 되도록 미팅을 하나 했는데, 거기 참석했던 한국 회사의 방문객이 미팅 끝나고 나서 내게
‘그런데 오늘 그 여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셨죠?’
라고 물어보는데… 여자분? 누구? 하고 잠깐 멍~ 해졌다.
분명히 그 사람이 여자인건 맞는데 나는 그 Roxana라는 사람과 일을 했지 Roxana라는 여자와 일을 하지 않았구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사람이 막 못생겼다거나 그런것도 아니다. 다만 ‘여자 여자’ 하면서 지내지 않을 뿐.

왜 그럴까?
왜 나는 강한 남성성이나 여성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덜 편하게 느낄까?

몇가지 생각을 해보았는데,
아마도 professional field에서 어떤 사람의 gender가 job functionality에 영향을 주도록 행동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게 아닌가 싶다.

남자이건 여자이건 그 일을 하는 ‘동료’이자 ‘사람’으로 알고 싶은 것이지,
‘그 남자’ 혹은 ‘그 여자’로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내 성향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자,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렇게까지 어제 저녁에 생각을 해 보았지만,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혹시 내가 기득권의 gender를 가지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status quo가 불편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과연,
‘여자’라는 이유 만으로 계속 불이익을 당하는 세상이라던가,
좀 더 나아가서…
‘동성애자’ 혹은 ‘트랜스 젠더’ 등과 같은 소수자여서… 그런 자신의 gender identity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불이익이 되는 세상 속에서,
내가 약자로 살고 있다면…
그래도 나는 여전히 지금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될까?

marginality라는 이슈를 머리에 담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한번 더 해보게 되었다.

공부하고 싶은게 넘쳐나는데

음…
대개 공부 못하는 사람들은,
국어 공부할때 수학 공부 하고 싶어 하고, 음악 시간에 체력장 하고 싶어한다지.
중간고사 시험 기간에 예습하고 싶어하고, 기말고사 시험기간에는 문학작품 독서에 대한 열정이 넘친다고.

사실 난 늘 하고싶은 공부가 참 많다.
내가 믿고 있는 신앙을 정말 좀 더 제대로 공부하고 싶고, 더 알고 싶고.. 뭐 늘 그렇다.
여러가지 공부하고 싶은게 많이 넘쳐다던중에, 요즘은 ‘종교학’같은 분야가 정말 많이 궁금하고 땡긴다.
불교도 좀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기도 하고, 이슬람이나 힌두교도 대학교양과목 수준의 지식이라도 좀 얻고 싶다.

그러나 한편,
이렇게 공부가 많이 땡기는 이유는…
정말 genuine하게 공부를 하고 싶은 것이라기 보다는,
회사일에 쫓겨서 공부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라는 진단을 해본다.

아마 회사일이 한가해지면,
이렇게 불타오르는 학구열도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

하나의 씨앗교회 추천 도서 (9월)

이달의 추천도서 목록

– 우찌무라 간조 회심기, 우찌무라 간조
–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니콜라스 월터스코프
– 성전신학, 그레고리 비일
– 세속화와 복음, 손희영
– 묵상의 여정, 박대영

책 소개를 하긴 하지만,
사실 책을 사는 사람이 많지도 않고, 호응이 많은 것 같지도 않아서…
두달에 한번 하는걸 석달에 한번으로 줄일까 하는 고민을 살짝 하고 있는 중이다. ^^

교육과 양육 – follow up

우리 목사님께서도 교육과 양육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나눈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하셨고,
더가까이님께서 교육과 양육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질문을 하시는 바람에…
깊은 생각없이 후다닥 쓴 생각에 바닥이 났다.

그래서 나름대로 좀 더 고민을 하고 생각을 해 보았는데…
여전히 얕은 바닥이다. -.-;

그래도 약간 생각을 해보자면,

가령 아이를 키운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그 아이를 건강한 성인으로 키우는 일을 할때…
어릴때는 거의 교육의 부분이 없다. 말을 해도 못 알아 먹으므로.
그때는 그야말로 잠 못자면서 밤에 젖 먹이고, 기저귀 갈아주고… 그렇게 ‘양육’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좀 더 크면서,
소위 ‘버릇’을 가르치면서 비로소 양육 안에 교육의 요소가 들어가게 된다.
어른을 만나면 공손하게 인사해라.
길에 휴지를 버리지 말아라.
신호등을 잘 지켜서 길을 건너라.
밥을 먹기전에는 식사를 하게 된 것에 대해 감사해라… 등등.

그리고 좀 크면,
학교를 보내고 학교에서 숙제를 가지고 오면 그것을 도와주는 일을 하게되고…
점차 돌보아주는 것보다는 아이에게 ‘지식’을 가르쳐 주는 일들이 늘어나게 된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 아이가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자라게 되는가, 어떤 가치관을 가지게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것은 중요한 양육의 요소이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들이 integrate되어서 지혜로 자리잡을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역시 부모가 해야하는 중요한 일일 수 있다.
건강한 식사를 하도록 도시락을 싸주는 일이라던가, 학교 왔다 갔다 ride를 해주는 일이라던가.

심지어는 대학을 가고, 더 나이가 들어도…
이때가 되면 자녀가 전공한 분야에 대해선 부모보다 자녀가 더 잘 알게될 수 있으므로 부모가 제공해줄 수 있는 교육은 더 줄어들게 된다.
그렇지만 혹시라도 남자친구에게 차여서 울고 있는 딸의 어깨를 감싸주면서 따뜻하게 격려해 주는 것이라든지,
취직이 잘 되지 않아서 좌절하는 아들에게 진심어린 충고와 함께 용기를 주는 것이라든지,
그 속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것은 여전히 부모의 양육이다.

양육은 양육자(부모)가 initiative를 가지고 피양육자(자녀)를 이끌어 주는 요소가 더 크고,
교육은 피교육자의 필요에 따라서 공급해주는 요소가 더 크다고 하겠다.

요즘 교회에서는,
영양이 결핍되어…영양실조에 걸려 아사직전에 있는 아이에게, 건강한 식단에 대한 교육을 시켜주려고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을 많이 발견한다.
당장 그 배고픈 아이를 보면서 많이 가슴아파하며… 그 아이를 내 무릎에 앉히고 죽을 먹여야 하는 건데 말이다.
그 아이가 심지어는 안먹겠다고 해도, 그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거 먹어야 너 산다… 그렇게 눈물을 흘려가며 죽을 떠먹이는게 양육의 모습이라는 거다.

내가 정형화되어있는 ‘(제자)훈련’ 같은 것들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큰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아 물론 다른 이유도 한참 더 많이 있다. ㅋㅋ)

시간이 지날수록,
그 양육자의 마음을 갖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내 안에서 그 양육자의 마음을 찾는 것이
더 희귀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고린도전서 4:15-16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