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됨

상당히 놀랍게도…
내가 국민학교때 무슨 신문사였나… 주최하는 전국 어린이 글짓기 대회에서 2등인가 3등인가 했던 적이 있었다. 그 와중에 시를 써서 상을 받았다.

오래 시간이 지나서 그 시 자체는 잊어버렸고…
원고지나 공책이나 뭐 어디 그런데 쓰여져 남아있는 것도 없지만,
대충 내용은 독서에 대한 것이었고,
책을 읽으면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내용의 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충 국민학교 3~4학년때가 아니었다 싶은데,
그때 나는 그 시를 쓸 때 당시의 생각을 명확하게 기억한다.

상을 받으려면 이렇게 써야햐지 않을까…
딱 그런 생각으로 썼다. ㅠㅠ

어린이의 상상력, 그것을 담아내는 적당한 어휘, 그러나 너무 화려하면 어린이 답지 않으니까 다소 쉬운 단어들을 써가면서… 그렇게 쓰는게 좋겠다고 생각을 했고, (나름 치밀한 작전이었다.)
내 작전이 잘 맞아들어갔다.

나는 책을 읽으며 그 책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한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독서를 그렇게 즐기는 아이도 아니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새로운 셰계에 들어가는 신비가 있어 좋다는 시를 썼고 그것으로 상을 받았다.
그냥 그 시 자체가 다 구라였던 거다. 어린 놈이, 심사위원들이 무엇을 좋아하겠다 싶은 내용을 머리를 굴려 써 놓은 구라였다.

나는 그 이후 ‘시’라는 장르에 완전 흥미를 잃었다.
구라가 통해서 상을 받게된다는게 그냥 완전 별로였다.

그런데… 만약…
그렇게 구라를 치는것에 많은 보상이 따라온다면 어떻게 했을까?
가령 시를 잘 쓸때마다 엄청나게 칭찬을 받는다건가, 많은 맛있는 과자를 선물로 받는다던가, 내가 좋아했던 조립식 장난감을 많이 받을 수 있었던가 했더라면?
어쩌면 그랬다면 나는 계속 구라를 치면서 시를 더 썼을지도 모르겠다.
어느순간 뽀록이 났겠지만.

신앙을 이야기하며,
구라를 치는 것은 참 쉽다.
그냥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이야기를 풀어놓는거다. 그게 내 이야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뭔가 멋진 신앙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구라를 치지 않도록 하는 가장 강력한 예방책은,
구라를 쳐서 얻어지는 유익이 없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장난감을 주면 엉터리 시를 쓸 수 있었듯,
구라를 쳐서 떨어지는 떡고물이 있으면 구라를 치는것 자체 때문이 아니라 떡고물 때문에 계속 구라를 치게 되는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성경공부를 할때나 다른 신앙의 이야기를 할때,
나를 칭찬해주는 것을 듣는 것을 아주 심하다 싶게 피한다.

10살이 조금 지난 나이에 구라를 쳐서 상을 받은 경력이 있는…
아주 약아빠진 놈이 아직도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Back to the office?

정말 COVID-19 터널의 끝이 보인다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같다.
회사에서도 office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 꽤 진지하게 나오고 있다.

적어도 COVID-19이 시작할때 어떤 정부나 단체보다도 가장 신속하고도 적절한 반응을 했던 곳이 실리콘 밸리의 회사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회사들이 COVID-19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내게는 이 상황 전개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판단기준이다.

역시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office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회사 뿐 아니라 다른 회사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
꽤 다수의 회사들이 그래서 office로 돌아가는 여러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물론 실리콘 밸리에서 영구적으로 집에서 일하는 것을 허락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회사의 많은 수는 Google같은 큰 회사와 경쟁해야하는 작은 회사들이고,
좋은 사람 뽑는 경쟁에서 그런 회사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일하는 장소에대한 유연성(flexibility)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수도 있겠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1. COVID-19 터널의 끝이 가까와오고 있는 중이 아닐까 싶다.
2. 의외로 permanent work-from home 을 받아들이지 않는 회사들이 많이 있을 것 같다. – 심지어는 직원들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

한국인

민우에게 친구중에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 잘 모르는 친구가 있느냐고 물어보면 그런 친구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민우가 보스턴에서 초등학교를 다닐때는 그런 친구들이 있었단다.

나는 미국에 처음 온곳이 보스턴이었고, 내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육수준이 높았으므로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면 한국이 어디냐고 물을 정도의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냥 한국이라는 이름 이외에 더 이상 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지금 나는 이곳 미국 실리콘 밸리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국인이라는게 꽤 이익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을때 한국의 회사들에게 연락을 해서 빨리 일이 되게 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회사와 일을 할때 내가 중간에서 의사소통이 잘 안되는 것을 풀어주는 경우도 꽤 있었다.

Kpop도 그 위세가 대단하고, 삼성, LG, 현대/기아 등이 한국 회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작년에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다수 받으면서 뜨기도 했고, 금년에는 미나리라는 영화가 한참 인기다.

이곳에서 만나는 미국 사람들도 고추장이라는 소스를 아는 친구들도 있고,
fried chicken이라면 당연히 korean fried chicken을 먹어야한다면서 이 동네의 한국 치킨집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들을 만나게되기도 한다.

한국 기술, 한국 문화, 한국 음식 등등이 그냥 신기한 외국것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의미있게 존중받을 만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국민학교때 밥에 보리를 넣었는지를 검사했던 기억, (나라에 쌀이 부족해서.. 혼식을 반강제적으로)
낮기온이 영하 5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으면 교실에 난로를 때지 않았던 기억,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이런 새마을 노래를 불렀던 기억,
학교에 점심을 싸오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친구들이 늘 있었던 기억…

나만 하더라도 우리나라가 정말 ‘가난한 나라’였을 기억이 분명히 있다

그러니… 한국인이라는게 advantage로 여겨지는 이런 상황이 내게도 참 신기하다.

아이러니

한국 밖에서 존경받는 신학자, 목회자 등이 한국에 방문면서 이상한 행보를 하는 것 같이 보이는 경우가 있다.

번영신학이나 기복신앙에대한 신랄한 비판을 해온 P 목사가,
적어도 내가 생각하시엔 번영신학과 기복신앙을 아주 열심히 이야기하는 교회에가서 집회를 한 뉴스를 본적이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상’의 개념을 잘 분석해내고 그것에대한 비판을 잘 했던 K 목사가 한국에 가서는…
자기중심적 신앙과 신학을 견고하게 지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가 왔던 것을 본적이 있다.

그런데 참 흥미로운 것은,
번영신학을 그렇게 비판하는 P목사의 메시지를,
번영신학을 추종하는 그 사람들이 ‘은혜롭게’듣는다는 거다.

그리고 자기중심성을 비판하는 P목사의 이야기를,
자기중심성이 신앙의 중심이라고 설교하는 사람들이 아멘으로 듣는다는 거다.

이건 멀리서만 발견하는 건 아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신학자라고 이야기하면서 어떤 신학자를 자주 소개하는 어떤 신앙인이,
사실은 그 신학자의 관점과는 매우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이건 정말 이상한거다. 아이러니다.

그러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나는 그런 아이러니로부터 자유로울까? 내가 열심히 읽고, 듣고, follow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는 정말 이해하면서 그렇게 follow 하는 걸까

Global shortage

나와 같이 이런쪽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신문등을 통해 일부 접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각종 기본 재료, 소자등이 엄청나게 부족한 상태이다!

자동차용 반도체가 부족해서 자동차를 제대로 만들지 못하기 시작했다는 뉴스는 좀 나오는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사실 하다못해 PCB 기판 같은 것도 엄청 물량이 부족하다.

여러가지 반도체 소자가 부족한 것은 말할것도 없고,
그나마 PCB 기판을 구한다 하더라도 PCB 회로를 만들기위한 여러가지 기초재료/소자들도 엄청나게 부족하다. 작은 부품들이나 구리판등도 구하기가 정말 힘들다.

평소 3~4주 면 만들 수 있는 간단한 전자제품들이 그래서, 3달이상 걸리는 경우도 많다.
또 가격도 엄청나게 비싸졌다.

지금 상황이 왜 이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조금씩 분석이 다른것 같다.
제일 많이 나오는 분석은 COVID-19때문에 집에서 소비되는 여러가지 전자제품의 소비가 늘었는데, 그것을 제대로 공급해주는 여러 공급망(supply chain)이 COVID-19때문에 제대로 돌아가지 못해서 이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COVID-19이전에도 일부 소자들이 조금 구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제한적이지만 조금 있어왔다. 내가 피부로 느끼기에는 대충 2018년정도부터는 조금씩 여기저기저기에서 소자/재료 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 여파로 꽤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고 꽤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흥미로운 것은,
전반적으로 가격이 올라가고 재료구하기가 어려워지니까, 공급망을 local에서 해결해보려는 시도들이 조금 있는 것 같다.
아주 큰 스케일의 생산을 미국이나 유럽등에서 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약간 작은 volume의 생산-공급망중 일부를 local에서 해결해보려는 시도들이 일부 조금씩 보인다.

COVID-19이 과연 이런 식으로 globalize되어있는 여러가지 공급망을 새롭게 재편하는 역할을 하게될까?

나같이 세계의 여러나라의 공급망과 일을 해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현재의 상황이 하는 일을 매우 어렵게 만들긴 하지만…
나와 같이 globalized되어 있는 경제체제가 약자에게 가혹한 체제라고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혹시 이것이 어떤 이들에게는 약간의 희망을 가져다주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된다.

Getting things done

미국의 의료비가 참 많이 비싸다.
이건 뭐 워낙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게 많이 비싼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는다.
그러니까 영리를 목적으로하는 병원을 허가하면 안된다고 한국에서 이야기하는 이야기도 듣고,
사설 의료보험이 만악의 근원이라고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리고 또 미국에서도 결국은 의료보험체제를 개혁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했던 Obama care같은 것도 있었고.

원칙적으로는 나는 동의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국에서 그걸 하는데는 정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어쨌든 현실적으로 개인의 자유, 자유로운 영리추구가 훼손되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고, 그런 입장을 가진 major 정치집단이 있는 것이 사실이므로… 원칙과 이상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것 같아 보인다.

적어도 내가 지금 있는 회사에서는 그 문제를 조금 다른 방법으로 풀어보려고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의료시스템 자체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고, 병이 걸렸을때 그것을 치료하는것보다 병이 걸릴 위험을 줄임으로써 그 cost를 줄이는 쪽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에는 결국 새로운 innovation을 일차적으로 받아들여야하는 일선의 병원이나 의료보험회사의 저항이 그렇게 크지 않다.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만들면 결국 병원의 경영에 도움이 되고,
reactive(병을 치료하는 방식으로)하게 문제를 다루지 않고 proactive(병을 사전에 적극적으로 예방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어 cost를 낮추는 것은 의료보험회사들이 환영하는 방법인 거다.

그러면 이런 식으로 하면 소위 stakeholder들을 배제시키지 않고 그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게 정말 될까?
물론 나도 잘 모른다. 적어도 우리 회사에선 그걸 해보려고 이것저것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인거고.

어떤 문제에 대해서 소위 ‘이념적 (idealogical) 접근’을 하는 정치집단을 보면 좀 답답하다고 느낄때가 있다. 이념적 접근을 큰 틀을 짜서 vision casting을 할때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그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부실하면 목소리는 크고 갈등은 키우고 일을 제대로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만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진보진영이든 보수진영이든 모두 이런 우를 범하는 것을 자주 본다.

한국의 경우에는 박근혜 정부때 빛내서 집사라고 했던 거나… 문재인 정부에서 대출규제를 통해서 집값을 잡아보겠다고 하는 것 같은게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무엇인가를 execute하는 사람들은, 그냥 좋은 이상만으로 일이 된다고 생각하며 안된다.
그 이상을 현실적으로 이루어내는 창의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실행계획들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제대로 실행해내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이건 정치나 행정의 영역에서만 보는건 아니다.

교회도 그렇다.

좋은 아이디어를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소위 개혁적인 사람들에게서 자주 그런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나도 그 얘기 다 공감하고 동의하는데…
그렇게 원칙만 이야기하지 말고 뭔가 한발작 더 나가는 이야기를 좀 해보면 좋지 않겠나… 싶은 거다.

재미있는 공부

어제 오랜만에 졸업한 학교의 website에 들어가서 뒤져보았더니 박사논문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종이로 프린트 한것을 아마 학교 도서관에서 스캔해서 올려놓은 것 같았다.
(나때만 해도 박사논문을 종이로 프린트해서 내도록 되어 있었다. ^^)

내가 박사논문을 쓴건 반도체 소자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플라즈마와 고체 표면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을 수학적 모델로 설명하고 그 수학적 모델을 실험을 통해서 다시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내가 실험을 한 경우도 있었고, 이미 발표된 다른 논문에서 얻을 수 있었던 실험결과들도 있었는데…
수학적 모델을 세워놓고 그걸 컴퓨터를 이용해서 풀어서 실험결과와 잘 맞아들어가는 것을 보았을때의 그 짜릿함이란!!!

박사학위를 받은지 이제는 아주 긴 시간이 지났고,
지금 내가 하는 일은 그때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종류의 일을 하고 있다.

나는 박사공부를 할때 꽤 고집스럽게 hot한 것을 해서 뻔지르르한 뭔가를 만들어내는 종류의 일 보다는, 뭔가 일어나는 현상을 과학적으로 잘 설명해내는 종류의 내용으로 논문을 쓰고 싶었다. 그리고 결국 고지식하게 그렇게 했다.

그런데 요즘은…
박사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적어도 공학분야에선 그렇다.
공학분야에서 좋은 박사논문은 보기에 아주 hot한 혹은 sexy한 것을 해내는 것들이다.

내가 hot하거나 sexy한 것을 하는 것보다는 조금 더 근본적인 원리에대해 더 해보고 싶어서 그렇게 고집스럽게 했던 것은 어쩌면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현명한 선택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나는 말하자면 비교적 hot하거나 sexy한 것들을 하면서 밥먹고 살고 있다.
그렇게 고집스럽게 근본적인 원리를 파고 싶었던 내 박사과정때의 고집은… 그냥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그 후로 다시 또 그런 종류의 연구를 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내가 아카데미아로 갔더라도 그런 연구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요즘 그런 연구에 누가 돈을 대주겠는가…

같은 실험실에 있었던 사람들 몇명을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더니,
그렇게 똑똑하게 아주 재미있는 논문들을 썼던 친구들이 지금은 다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고지식하게 그렇게 공부하고 원리들을 탐구하는 일을 좋아하는 내게,
그나마 박사과정때라도 그걸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감사한 일인거다.

여러개의 비선형 미분방정식을 컴퓨터로 풀어가며 계산을 했었지만…
지금 나는 간단한 미적분도 어떻게 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ㅋㅋ

나이가 많이 들어서 배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보고, 대학을 다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예전에 보면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젠 그런 마음이 이해가 잘 된다.
주말엔 가끔씩 내가 더 공부해보고 싶었던 양자역학 같은거라도 조금씩 공부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The Wall of Shame

예전에 박사과정을 할때,
우리 office 한쪽 벽에는 The Wall of Shame이라는 벽이 있었고, 그곳에는 여러가지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서로 잘 들어맞지않게 잘못 디자인된 실험장치,
실험이 거의 끝나갈때쯤 실수로 깨뜨려버린 실리콘 웨이퍼,
냉각수 켜는 것을 깜빡한 바람에 태워벅은 실험장비의 사진 등등.

우리끼리 우리의 실수를 희화화하면서 즐거워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때 가끔은 그걸 보면서 아…내가 저렇게 바보같은 실수를 했구나… 하는 것을 되새기며 뭔가 겸손해지는 느낌이 들때도 있었다.

당연히 그 wall of shame에는 내 실수들도 전시되어 있었으니.

내가 나를 과대평가하고 싶을때,
내 인생에도 그런 the wall of shame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 실수와 실패와 부끄러움을 모으는 일은 어쩌면 내 삶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

그러니,
현재를 살아가면서 의도적으로…the wall of shame을 장식할만한 내 부끄러움에 의도적으로 주목하며 살아가는 것이 참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삶의 부끄럽고, 어둡고, 당황스러운 순간들…
그런 순간들에 오히려 그 순간을 잘 마음에 새기고 담아내는 일들을 더 의도적으로 해야하겠다는 생각

날씨

보스턴에서 공부할때,
나보다 2년 먼저 졸업한 친구가 이곳 bay area에 직장을 잡았었다.

그 친구와 그때 이메일을 하면서 Sunny California에 사는게 어떠냐, 여기는 오늘도 3ft 눈이 왔다… 해가면서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이야기를 그렇게 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보스턴 날씨에 그렇게 큰 불만이 없었다.
보스턴 날씨가 좋아서 그런것이라기 보다는, 나는 날씨에 좀 둔감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여태껏 내가 산 지역을 쭉 따져보니, 이곳 bay area에서 산 기간이 제일 길다.
날씨에 둔감한 사람이기도 하고, 이곳에 오래 살고 있기도 해서…
이곳의 날씨를 많이 appreciate하면서 살고 있지 못하는 것 같다.

요 며칠 날씨가 꽤 좋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미국 다른 지역에서는 이상한 날씨 때문에 난리가 났는데,
둔감해서 날씨 좋은 것을 감사할줄 모르는 것도 일종의 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희망에 대한 이야기

최근에 Yale의 Center for Faith and Culture에서 하는 podcast를 발견했다.
주로 Miraslav Volf가 이야기를 많이 하는 podcast인데, 그중에 나온 이야기중 몇개를 여기에 옮긴다

미라슬라브볼프는 몰트만을 인용하면서 희망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희망과 낙관론은 다른 것이다.
낙관론은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외삽해서(extrapolate)해서 예측할 수 있는 미래에대한 예측이다. 낙관론은 그런 의미에서 논리적이다.
그러나 희망은 현재의 상황으로부터 논리적 사고를 통해서 도달할 수 없는 상태를 바라보는 것이다. 희망은 현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new thing)이다.

희망은 우리가 그렇게 희망을 가질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지 않을때 갖는 것이다. 희망은 논리에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신뢰(trust)에 근거한다.

희망은 논리적인 흐름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갖게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