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중조절

내가 체중이 늘어난 몇번의 일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한동안 엄청 출장을 많이 다닐때였다.

하루에 12시간, 심하면 15시간 가까이 일하기도 했는데,
그러면서 시차도 엉망이고, 배고프지 않은데도 식사를 하고,
게다가 호텔과 식당에서 ‘좋은’ 음식들을 많이 먹다보니 출장을 다녀오면 체중이 조금씩 불어나곤 했었다.

요즘 뻔질나게 출장을 다니면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 엄청 노력을 하는데,
최근 태국을 다녀오면서는 그게 무너졌다. ㅠㅠ

워낙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상황이기도 해서,
아침 7시에 호텔에서 나가서 저녁 8시쯤 돌아오고나면 엄청 피곤하기도 해서 대개는 호텔에서 식사를 했는데, 대개는 필요한것보다 많이 먹게 되기도 하고… 또 현지 시간으로 밤 11시~12시 쯤에 늘 미국과의 conference call이 있으니 그때까지 버티면서 뭘 먹게 되기도 해서, 음식 조절을 잘 못했다.

나는 내 외모를 잘 가꾸어야한다는 의지와 의도가 사실 거의 없긴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건강을 돌보아야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높은 스트레스 상태에서,
건강을 잘 유지하는 것이 참 쉽지는 않아 보인다.

D가 폭발해 버렸다.

태국의 회사의 program manager는 D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 일 참 잘하고 친절하고, 영어도 잘하는 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이 너무 과도하게 그 사람에게 몰렸고,
그쪽 회사에서는 D를 support하는 일이 부족하다 보니…
D가 감당해야 하는 무게가 너무 커져 버렸다.

실제로 현장에서 D를 만나는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게 너무 명확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D의 무게를 줄여주려고 노력했으나,
그게 나만 노력한다고 되는건 아니었다.

지난주,
결국 D가 우리의 conference call을 하는도중 무너져 내려 버렸다.
새로 더 meeting을 잡자고 우리쪽에서 누가 이야기를 했는데,
이미 너무 meeting이 많고, 감당해야 하는 일들이 많은데 더 이상 뭘 하는건 무리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은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이었다.

아…

D가 폭발해버리니 D에게 이것 저것을 요청하던 사람들은 순간 조용해졌고,
그 후에 우리 회사 쪽에서도 난리가 났다.

안그래도 우리 회사 project가 힘들다고 그쪽 회사 사람들이 그만두는 일이 몇번 있었는데,
D마저 그만두면 정말 큰일이다…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어떻게든 D와의 미팅을 줄이고 D가 하는 일을 줄여주자는 말이 우리쪽에서 나오게 되었다.

지난 몇주,
우리 쪽에서도 하루에 5시간 남짓 자면서 계속 일했던 사람들이 꽤 많이 있다.
나는 그 사람들도 좀 제정신으로 살아남길 조마조마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D가 참 안쓰럽다.
어떻게든 D를 더 도우려고 노력해 왔는데,
내가 했던 노력들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참 안타깝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론,
D가 그렇게 폭발해 버린 것이 감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된 것 같다.

아시아 공장에 가서 불편한 것

요즘 뻔질나게 태국을 왔다갔다 하고 있다.
이젠 시차를 그냥 쉽게 적응하고 버티기 쉽지 않아서,
요즘은 멜라토닌등 약간 약의 도움을 얻어서 도착해서 한주, 돌아와서 한주 정도씩은 보내고 있다.

아시아에 있는 공장에 갈때마다 몹시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오곤 한다.

우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일하는 환경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환경에 비교해보면, 참 쉽지 않은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회사 물건을 만드는 production line은 2 shift로 운영되는데,
한 shift가 사실상 10시간이다. 중간에 식사시간 휴식 30분.

물론, 나도 역시 하루에 10시간은 훨씬 넘게 일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 사람들은 많은 경우 일하는 환경이 훨씬 좋지 않다.

또, 그쪽 엔지니어 중에서는, 태국에서 그래도 제일 좋다는 대학교에서 박사까지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리고 일해보면 아주 빠릿빠릿하게 일 잘 하는데)
그리고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결정은 그렇게 많지 않고, 우리가 하라는 대로 그대로 일을 하는 수준이다.

그저 그 사람들은,
조금 더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이유 만으로,
더 나쁜 환경에서, 더 낮은 수준의 일을, 더 적은 수입을 받아가며 하고 있는 것.

대개 미국에서 간 우리는 좋은 conference room같은데 배정을 해주고,
그 사람들은 쉬는 시간에 복도에 나와서 전화를 보는 것 정도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일종의 계급이 나누어져 있는 것 같은 상황이다.

더 힘든 것은,
미국에서 간 어떤 사람들은 그걸 당연하게 여기고, 그 사람들을 막 대하는 거다.
우아…. 옆에서 정말 완전 열이 받는데….
내가 거기서 폭발한다고 뭐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아시아 나라에 출장을 가는 것은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참 힘들다.

자의적 성경묵상도 좋다

성경 본문을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가치체계로 가지고 와서, 자신에게 적용하는 일은 피해야 할 것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역사 속에서 그렇게 자의적 성경묵상을 했던 훌륭한 선배들이 많이 있었다.
내가 최근(?)에 다시 조금 살펴보게된 디트리히 본회퍼도 그렇다고 보인다.

이분은 내가 보기에는 매우 신정통주의적 접근으로 신앙과 세상을 해석했던 분 이다.
성경 text를 분석하고 그것으로 ‘귀납법적’으로 신앙을 도출해내기 보다는,
신정통주의적 사상으로 먼저 신앙의 틀을 잡고, 성경을 그것으로부터 ‘연역적’으로 읽었던 것 같다.

그분의 모든 생각에 모든 사람이 동의할 필요는 당연이 없지만,
그분의 삶과 사상은 적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모범과 이정표가 되었다.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이 본회퍼의 성경묵상을 비판할 수 있을까? – 말도 안된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자신들의 사상으로 성경과 신앙을 해석해내고, 그 불완전한 여러 생각들의 흐름을 하나님께서 역사속에서 움직이시면서 큰 그림을 만들어 나가시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
파괴적이지 않다면, 그리고 건강한 신앙 전통 속에 있다면,
자의적 성경해석, 연역적 접근도 충분히 괜찮다.
어느 누구도 그런 해석과 접근으로부터 100% 자유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12)

도대체 거대 담론은 어떻게 개인적인 상황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이게 나 같은 386세대에게는 더 쉬웠다.
그냥 깃발을 들고 노래를 함께 부르면 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의 20-30대에게는 그렇게 되는 것 같지 않다.

나는 이것을 담아내는 중요한 고리가 ‘삶’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나 같은 비전문가가 2차원 도면에 그려져있는 설계도를 보고 3차원의 집을 미리 상상해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게는 모델하우스 같은 것이 참 도움이 된다.
잘은 모르지만, 평생 건축을 해온 사람들은 아마도 2차원 도면을 쓱~ 보면 3차원이 자연스럽게 머리 속에서 그려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전문가들이 내게 너는 왜 이것을 이해못하느냐고 다르치는건 어떤 의미에서 공평하지 못하다.

하나님 나라의 담론을 치우치지 않게 (이미와 아직의 균형, 거대담론과 개인의 균형을 모두 가지고) 이해하고 그것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그 복잡한 거대담론을 visualize.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의 인격과 삶의 여정이 거대담론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모델하우스 같은 역할을 해준다는 말이다.

듣고 배우거나 읽고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지금의 20-30대에게는 보고 배우도록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

하나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서 14:17)
이 성경말씀이 딱 그거다.

하나님 나라는 제사 음식에 바쳐진 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 하는 것 같은 논쟁거리가 아니라 (예전 우리나라 예송논쟁 비슷한 ㅠㅠ)
실제로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것이라는 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11)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
처해있는 상황, 살고 있는 사회의 발전상,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반응등을 고려해서 균형잡히게 강조해야 결국 사람들이 그것을 모두 통합하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 개인 신앙에 대한 강조의 균형 역시 매우 중요하다.
세대, 문화, 공동체, 개인적인 상황등을 잘 고려해서 지혜롭게 강조해야
결국 사람들이 개인 없는 거대담론을 갖게되거나 거대담론 없는 개인에 머무르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적어도 지금의 young millenial이나 Gen Z들을 생각했을때,
그들 앞에서 겸손하게 그 이야기를 잘 들으며,
하나님 나라 담론에 대한 조금 더 높은 레벨에서의 통찰을 가지고,
지혜롭게, 그러면서도 그들의 말을 겸손하게 들으며 소통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내가 옳으니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통해서 이 하나님 나라의 웅장한 스토리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young millenial이나 Gen Z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거대담론을 이해시키는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개인적인 상황과 거대담론을 연결시키는데도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10)

나는 앞에서,
연속성을 강조하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앞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가 시대나 상황이나 세대에 따라서 다르게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떤 시대에는 어떤 것이 다른 것 보다 더 relavant하다는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앞으로 임한 하나님나라는 두개 다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이다.
다만 그 강조를 상황에 맞추어서 해야만 결국 대중이 (내 관심으로는 젊은 이들이) 그 두가지를 균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곳에까지 다다들 수 있게 된다고 본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강조 역시 그렇다고 본다.
거대담론을 어렵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거대담론을 교조적으로 들이대면서 이걸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식의 접근은 건강하지도 않고 통하지도 않는다고 본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20대부터 여태까지 내 삶을 이끌어온 중요한 narrative이다.
그러나 그것을 교조적으로 강조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대화상대가 그것에 관심이 없거나 그것이 당장 그 사람에게 의미가 없을때에는 다른 강조점을 통해서 온전한 holistic한 복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소위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런 식의 교조적인 접근을 보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 담론이 아니면 아니라는 거다.
나는 그런 방식은 결국은 ‘꼰대’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하는 방식 그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모두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

KOSTA에서도 그런 딱딱한 교조주의가 보일때도 있다. 다행히고 KOSTA를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보이지 않지만 KOSTA 강사나 그 외 다른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접근을 보기도 한다.

나는 KOSTA를 섬기는 사람들이 꼰대가 되지 않고 겸손하면 좋겠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KOSTA를 섬기는 사람들은 참 겸손하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9)

Gen Z가 극우에 열광하는것, 특히 남자들이 극우에 빠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많다.
나는 그것이 우려할 만하다고 당연히 생각하고 그것을 잘 막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극우는 결코 건강할 수 없으니.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 그렇게 극우에 열광할까?
아마도 복잡한 자신의 상황을 매우 단순화 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힘든건 다 저 사람때문이야, 다 저 나라 때문이야, 다 저 그룹 때문이야는 식으로 적을 설정하고 그 적을 때리면서 복잡한 이슈를 단순화 시켜버리니 자신의 상황이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극우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어떤 의미에서 젊은 사람들이 ‘Old Gospel’에 몰리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다.
하나님 나라 담론은 너무 복잡하다.
특히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담론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그렇게 복잡한건 잘 모르겠는데,
내가 죄인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운 구도인거다.
그리고 그것이 말이 되고.

그렇다고 거대담론은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대담론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것 없이는 성경이 coherent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 핵심적인 성경의 narrative의 근본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문턱이 너무 높다면,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8)

사람들 사이에 이견이 있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금 미국과 특히 영국에서 20대, 특히 그중에서도 남성의 기독교인 비율이 획기적으로 늘고 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수치가 잡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들을 찾아보면
영국 런던의 Saint Church 같은 곳은 ‘부흥(revival)’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젊은 사람들이 몰린다고 한다.
뉴욕의 Church of the City New York도 비슷한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뉴욕의 교회다.

나는 Saint Church의 예배를 youtube로 꽤 자주 들어가는 편이다.
이 교회 예배는 그냥 미국의 일반적인 nondemoninational evangalical church의 예배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하는 내용은 그야말로 John Stott 식의 복음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죄와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개인이 어떻게 용서 받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하나님 나라 거대담론은 별로 이야기하지도 않고 담기지도 않는 것 같다.

Church of the City New York의 Jon Tyson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약간 마초다.
실제로 이분은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다.
여기는 Penecotal 인데, 역시 하는 내용은 ‘전통적 복음’ (인간의 죄 – 하나님의 은혜 – 은혜에 대한 반응)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것에 젊은 사람들이 모인다.

역시 또 Gen Z가 열광하는 John Mark Comer를 보더라도 이분도 하나님 나라 담론 별로 없다. Personal transformation이 핵심 이야기다.

왜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거대담론이 아니라 개인 신앙에 더 끌릴까?

나는 이 사람들이 처해있는 상황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연속적인 이미임한 하나님나라의 거대 담론 보다는
도대체 what about me?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어 보이는 것 같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7)

나는 이런 적용을 세대에 따라서 다르게 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국에서 한국의 80년대부터 2010년대정도 까지,
미국도 2010년대정도까지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훨씬 더 의미있는 담론이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함께 더 발전시킬 여지가 있다고 보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구했다. 그리고 그 발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좋은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런 사회 속에서 그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건강하면서도 꼭 필요한 기여를 하나님 나라 담론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이나 미국 사회속에서는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나 미국 사회에서 발전이 멈추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발전이 대중의 기대와 바람과 동떨어져서 소수 엘리트에 의미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 대중은 발전의 주체와 원동력이 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가고 있어 보인다.
가령 최근의 AI의 발전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 속에서 일반 대중은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그래서 결국 거대담론을 생각하기 보다는 개인의 생존에 집중하게 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지금의 20대에서 아주 잘 볼 수 있다.

거대 담론은 정말 이들에게 큰 의미가 없어보인다.
그것이 진리인가 하는 질문 역시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이 내게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날 수 있는가에 훨씬 더 큰 관심이 있다.

그렇게 반응하는 세대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고 비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응하도록 몰리는 세상을 살고 있는 그 세대를 바라보면 그 세대가 훨씬 잘 이해가 된다.
나 같은 세대보다 훨씬 더 힘들게 그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