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진짜로? (4)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의 발명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고,
2차 산업혁명은 전기가 사용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고,
3차 산업혁명은 반도체로 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증기기관, 전기, 반도체 이것들은 모두 customer의 need로 인해서 개발된 것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증기기관, 전기, 반도체등이 발명되었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까 하는 여러가지 생각들을 통해 그것이 대중화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뭔가 소비자들이 원하는게 있고, (때로는 그것이 잘 define되지 못하는 때도 있지만)
여러 기술과 산업과 예술과 비지니스의 요소들을 잘 섞어서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innovation이 entrepreneur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 내 앞의 글과도 연결이 된다.

그러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1~3차 산업혁명과 같은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걸까?

4차 산업혁명, 진짜로? (3)

그럼, 큰 회사들이 왜 이런식으로 innovation을 하는걸까?
우선은 R&D의 risk를 줄이기 위해서 그렇다.

당연한 얘기지만 연구개발이라는게 정말 될지 안될지 잘 모르는거다. 연구를 한다고 해서 꼭 잘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그러니, 내부적으로 연구개발을 하는 team을 만들어서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게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는거다.
대신, startup company들이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개발해놓은 것이 있으면 그걸 그냥 후딱 사버리면 되는거다.
그러면 이게 될지 안될지 하는 risk를 감수해야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누가 대박은 터뜨리게 되는지를 보면… 결국은 그 startup company의 ‘주인들’이다.
다시 말하면 entrepreneur들이다.
그 startup company의 engineer들은 오히려 다소 적은 월급을 받으며 대신 혹시 대박이 터질지 모르는 주식으로 부족한 월급부분을 받는 형식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engineer들이 그런 과정에서 약간 돈을 벌기도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reward는 entrepreneur들에게 돌아간다.

그러다보니… startup의 innovation은 inventor에의해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entrepreneur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물론 entrepreneur와 inventor가 같은 경우도 있다. 혹은 entrepreneur와 inventor가 손을 잡고 이걸 함께 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결국은 entrepreneur가 짱이다!

innovation이 entrepreneur에 의해서 주도되다보니, 그 innovation은 대단히 entrepreneurial 하다.
innovation들이 geeky하기 보다는 대단히 fancy하다.
innovation의 technical한 요소 이외에도 다른 요소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들이 중요하다.
패러다임을 바꾸는 innovation보다는 improvement라고 할 수 있는 innovation이 대부분이다.

기술발전이 혁명적이라기보다는 혁신적인 특징을 갖는다.

4차 산업혁명, 진짜로? (2)

나는 어릴때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그때 그렸던 과학자는… 뭔가 큰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흰색 가운을 입고 연구에 매진하여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요즘은 큰 연구소에서 그렇게 이루어지는 innovation이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Apple이라는 회사와 거기서 나오는 product가 innovative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former Apple employee로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지만 Apple이 말하자면 대중들이 보기엔 innovation의 상징과 같이 여겨지므로 Apple의 예를 들어보자.

Innovation이 정말 Apple에서 얼마나 이루어지는가?

사실 대부분의 진짜 새로운 기술들은 Apple에서 오랜시간을 걸쳐 흰 가운 입은 박사님들이 개발을 하는게 아니다.
대부분 start-up company들이 큰 risk taking을 해가면서 개발을 한 것들이다.

가령, Apple의 Siri 라던가, multi-touch screen 이라던가, mp3 player라던가, fingerprint sensor라던가…
생각해보라. 다들 그걸 개발한 회사를 홀딱 사버리거나 그 회사의 기술을 사서 쓰는 것들이다.
Apple의 retina display같은 건 한국의 LG display와 삼성 display, 일본의 Sharp 같은데서 만드는 거다.
Apple이 잘하는건 그런 기술들을 적절하게 잘 모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적어도 hardware쪽의 innovation은 많은 경우 그렇게 이루어진다.
그렇게 큰 회사들에 다니는 engineer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정말 technical detail을 의외로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왜냐하면 진짜 technical detail은 그 하청업체나 startup company들을 가지고있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 진짜로? (1)

한국의 뉴스를 보다보면 다들 4차 산업혁명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정말 4차 산업혁명이라는게 진짜 지금 이루어 지고 있는 거라는건 다 그냥 믿는 건가?
그 4차 산업혁명의 내용에 대해서도 다들 대충 동의하는 건가?

나 개인적으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기술발전의 모습들에는 오히려 ‘혁명적 변화’를 막고 있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엔지니어로서 그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변화들을 다 가치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대단히 급격한 기술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부인하는 것도 당연히 아니다.

다만…
현장에서 나름대로 innovation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engineer로서 내가 현장에서 느끼고 있는 몇가지를 한번 적어보고 싶은 것이다.

참고로 나는 지금 Verily Life Science 라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Verily는 Google이 만든 medical device 회사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내가 involve되어있는 project들 중에는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있고, 대외적으로 무지하게 많이 알려진 smart contact lens 와 같은 것들도 있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것들 중에서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들을 몇개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Smart contact lens: contact lens에 무지하게 작은 microprocessor, bluetooth chip, battery, sensor 같은 것들을 넣어서 눈물로부터 혈당을 측정하는 contact lens이다.
– Another smart contact lens: contact lens가 자동적으로 눈의 작은 근육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lens의 도수를 바꾸어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안(presbyopia)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 렌즈를 끼면 가까운 것과 먼 것을 다 볼 수 있다.
– Miniaturized CGM (Continuous Glucose Monitoring): 아주 작은 패치를 몸에 붙이면 그 패치가 지속적으로 혈당을 측정해서 smartphone이나 기타 다른 device에 data를 보내준다. 당뇨병환자들에게는 병의 manage하는데 이게 아주 유용한 data가 된다.
– AIMD (Active Implantable Medical Device) : 아주 작은 전자제품을 몸속에 수술을 해서 넣고, 그 전자제품이 몸속에서 신경에 자극을 가한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여러가지 병을 고치거나 control한다. 몸속에 들어가는 flexible electronics를 만드는 셈이다. (요즘은 주로 이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것 이외에도 두세가지정도 더 다른 project에 약간 관련이 되어 있다.

지금 job 이전에는
Flexible display
iPad의 screen에 들어가는 터치센서
Flexible fingerprint sensor
등등을 했었다.

이 정도면 그래도 innovation에 대해서 한마디쯤 해볼만한 자격은 되지 않겠나.

본질, 의미, 변질

본질과 의미가 일치할때가 있지만 그렇지 않을때도 있다.
가령,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본질이 있다고 하자.
그 본질은 그러나 때에따라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자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home base의 의미를 줄수도 있다.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해주는 building block과 같은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인간이 가지는 가장 헌신적 사랑의 예로 활용되어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guiding light의 역할의 의미가 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의미를 잘 모아서 본질을 재구성하기는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의미는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만들어지고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사랑의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자녀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 사회를 구성하는 building block, 사랑의 헌신, 등등의 내용을 다 설명하고 그것을 모은다고 해도, 원래 본질이 부모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재구성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때로, 의미가 변질되는 것은 본질 없이 의미를 추구하다가 그렇게 된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본질이 자녀를 위해 최선의 교육을 제공함 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자.
어느순간 부모의 사랑이라는 본질이 없어진채 자녀를 위해 최선의 교육을 제공한다는 의미만 남게되면, 그 자녀를 위한 최선의 교육을 제공한다는 의미 자체도 변질되어서 자녀를 들들 볶으며 과외를 시키고 자신의 성공의 대리품으로 자녀를 생각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게 된다.
본질이 없이 의미만 남게되어 그 의미가 변질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신앙에 있어서도 이런 것이 꽤 많다고 생각한다.
부활에 대한 것도 역시 그렇다.
너무 쉽게 부활이 가지는 현대적 의미, 부활이 가지는 적용점… 등등에 뛰어들게되면, 부활이 원래 가지는 본질에 대한 생각이 옅어지게 되고…
현대 사화에서 부활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의미 자체도 변질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이런 절기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신앙의 가장 깊은 본질로 돌아가서 그것으로부터 의미를 다시 세워내는 일을 반복해서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부활절을 지내며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부활

나는 성경에서 ‘명문’을 찾으라고 하면 거의 주저하지 않고 고린도전서 15장을 든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신학적 contents도 탄탄하고, 논리의 전개도 뛰어나고, 지성과 이성을 모두 터치하고, 게다가 문장의 흐름도 좋다.

아… 바울이 천재이고, 게다가 이건 성령의 감동함을 받은 text이니, 당연히 문장이 좋을것이다….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겠지만…

1. 부활의 역사성
부활이 아주 든든한 eye witness account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실 부활의 역사성은 기독교 변증에서 비교적 잘 develop된 이야기이다.
가끔 변증 중에서는 좀 무리수를 두는 억지 논리들이 있을때도 있는데,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eye witness account에 근거한 부활에 대한 변증은 꽤 탄탄하다.

2. 부활이 갖는 신학적 의미 – 개인적 영역
개인적 영역에서 부활이 어떤 신학적 의미를 갖는지를 잘 다루어주고 있다.
죄가 사해졌고, 죽음에 대해서 승리했다는 선언은 속이 시원하기까지 하다.

3. 부활이 갖는 신학적 의미 – 거시적 관점
부활이 전 피조세계에 어떤 것을 가져다주는지 이야기하는 거시적 관점이 개인적 관점과 잘 조화를 이루며 논증되고 있다. 흔히 어떤 한가지 관점을 이야기하면서 다른 관점을 깎아내리는 우를 범하기 쉬운데 여기서는 그 두가지가 다 강조되고 있다.

4. 부활의 consequence
부활하였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 역시 대단히 흥미롭다. 게다가 그 삶의 방식은 위의 2,3에서 언급한 신학적 의미에 깊이 뿌리 박고 있다는 것이 아주 속시원하다!
맨 마지막에 ‘여러분의 수고가 헛되지 않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신학적 의미를 충분히 담아서 풀어낸다면 정말… 아… 하고 탄성이 나오게 된다.

5. 가슴 벅찬 부활
부활을 informative하게 강의하거나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가슴에 그 내용이 담기도록 이야기하고 있다.
읽다보면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난다.

가끔은…
내가 정말 믿고 있는 내용을 누가 좀 가슴에 팍 박히게 반복해서 이야기해주었으면 하고 바랄때가 있다.
그래서 인터넷 설교를 뒤적이거나… 좋은 신앙의 고전들을 다시 찾거나… 그래 보는데,
내가 보기엔 고린도전서 15장은 그런 효과를 내는 일종의 끝판왕인 것 같다. ^^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절에 한 5~10번쯤 읽어야 한다.
잘못된 신학과 죽어있는 신앙이 기독교를 점령한 시대에,
설교라는 이름으로 허접한 억지가 선포되고 있는 시대에,
고린도전서 15장은 일종의 detox가 되는 것 같다.

Christ is Risen! He is Risen, indeed!!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죽으신 구주 밖에는 자랑을 말게 하소서
보혈의 공로 입어서 교만한 맘을 버리네

못 박힌 손발 보오니 큰 자비 나타내셨네
가시로 만든 면류관 우리를 위해 쓰셨네

온 세상 만물 가져도 주 은혜 못 다 갚겠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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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대 기독교의 shallow함이 미치도록 역겹다.
그 shallow함 속의 일부가 되어있는 내 자신이 말로 다할 수 없이 부끄럽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를 할때면 늘 ‘공부’를 하는 자세로 접근하게 된다.
나는 것이 현대 기독교가 갖고 있는 아주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 공부는 중요한 요소이다.
나도 역시 열심히 공부하려고 늘 나름대로 노력하고, 사람들에게도 늘 공부하라고 이야기한다. ㅎㅎ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공부의 대상만은 아니다.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데에는 여러가지 공부가 물론 필요하다.
그렇지만 신문을 보다가 분노해서 광장에서 촛불을 드는 일,
가기 싫은 군대에 끌려가는 일,
지지하는 후보가 다른 사람과 침튀기는 토론을 하다가 언성을 높이는 일,
축구 한-일전을 보면서 대~한민국을 외치는 일,
다른 문화를 접하면서 문화충격을 경험하는 일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대한민국의 국민됨을 만들어낸다.

그러니까 뭔가를 ‘경험’해보자… 이웃을 돕는 event를 한번 해보고… 이런 싸우려 이야기를 하는게 아니다.

나는 현대 기독교는 21세기 신자유주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거의… 기독교는 21세기에서 유효기간이 지난것 같이 느껴지기 까지 한다.

이것을 돌파해내는 중요한 key는 평신도들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러니까 일상을 소소하게 잘 살자… 그런 멜랑콜리한 이야기를 하는게아니다.
실제로 세상에 대항해서 살면서 하나님나라 백성됨의 아이덴티티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기도하고,
세상에 의해 정복당할것만 같은 두려움 속에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경험을 하고,
강력한 세상의 시대정신에 대비해 기독교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절망감도 경험해보고…
이런 과정을 삶 속에서 겪어내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contents가 된다고 생각한다.

속죄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의 백성이었다. (아니, 오늘날까지도 유대인들은 계속 출애굽의 민족이다.)
출애굽이 지난지 몇천년이 지났는데도 계속 무교병을 먹으면서 그것을 기억한다.

우리로 말하면, 단군 고조선 보다도 훨씬 전에 있었던 일을… 매년 빼먹지 않고 기억을 하는 것이다.
반복해서 서로에게 그것을 기억시키고, 자녀에게 그 스토리를 이야기한다.

어제 했던 이야기와 비슷하게,
나는 현대 교회에서 이 속죄의 이야기를 제대로 이야기하는 설교를 거의 듣지 못한다.
학문적인 적확성을 가지고 설명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것을 포함할수도 있다.)
이 속죄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라고, 내 이야기라고 가슴으로 받을 수 있도록 설교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소위 ‘하나님 나라’의 narrative가 속죄에 대한 이야기를 무시하거나 축소시킨채 이야기되는 것이 나는 대단히 안타깝다. 하나님 나라 narrative에서 속죄가 빠져버리면 그 전체가 사상누각이 되고 만다. 이것은 old vs. new의 세대대결이나 신학대결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는,
절망적인 죄를 사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핵심 가운데 핵심이다.

타락, 죄

나는 타락이 역사적 사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나 아담/하와의 존재 역시 역사적 사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성경의 narrative의 beginning은,
우리의 상태가 타락한 모습이다 라는 다소 abrupt한 선언이 거의 처음에 등장한다고 생각한다.

창조는 주로 창조주의 속성과 그 창조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에 등장하지만,
타락의 전단계로서 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이 타락, 죄의 문제는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가장 핵심적인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이 타락과 죄의 문제를 보수 기독교와 진보 기독교 모두에서 더 이상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에 몹시 안타깝게 생각한다.

특히…
어떤 형태가 되었건… 죄와 타락의 상태가 얼마나 절망적인 것이었나 하는 이야기를 거의 아무도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타락과 죄의 narrative가 빠져 버리면 기독교의 존재 이유 자체가 없어져 버린다.

죄와 타락에 대해서 제대로 설교하는 설교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죄와 타락을 정말 말로 다 할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로 이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
죄를 자꾸만 쉬운 언어로 설명해버리는 (explain away) 시도들이 넘쳐난다.

나는 현대 기독교가 shallow 해진 가장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죄와 타락을 제대로 다루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