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덜 쓰며 살기

내가 생각하기에 소비에 예속되게하는 것이 현대 자본주의가 갖는 가장 강력한 독성 가운데 하나이다.

가령, ‘통신비’를 생각해보자.
우리집은 TV도 없고, 집전화도 없다.
(아 TV라는게 physically 있긴 하지만, TV service를 subscribe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 사람이 모두 cell phone을 쓰고 있지만, 나는 회사에서 대주기 때문에… 사실상 두 사람이 쓰고 있다.

두 사람 cell phone + 집 internet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한달에 150~200불 정도 사용하는 것 같다.
내 cell phone까지 내가 낸다고 생각하면 이게 200불이 넘게 될거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세 가족이 cell phone을 쓰고, 집에서 fast internet을 사용함으로써 만들어내는 ‘가치’가 한달에 200불 어치가 될까?
음… 아닐것 같다. -.-;

그렇다고 cell phone이랑 internet 없이 살 수 있을까?
음… 아주 불가능한것은 아니겠지만, 무지하게 불편하겠지.

편의나 기호를 위해서 사용하는 액수가 사실 대단히 큰데, 그 편의나 기호를 위해서 비정상적으로 지출하도록 요구받으며 살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추가의 가치는 그 지출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

편의나 기호를, 기술 개발을 통해서 계속 더 추구하도록 만들고,
그로 인해 창출되는 추가의 가치가 그 소비를 정당화 할 수 없음에도 계속 돈을 쓰도록 ‘강요’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나 할까.

요한복음을 읽으며 드는 의문들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질문들이 많이 생기는데, 이런거 누가 좀 잘 가르쳐 주면 좋겠다. ^^

1. Johannine 전통과 Synoptic 전통이 초대교회에 어떻게 각각 존재하고 있었을까? 두 전통은 서로 많이 교통이 있었나?
요한복음을 읽으면, 공관복음과 거의 다른종교가 아닐까 하고 느껴질만큼 다르게 느껴진다.
이렇게까지 다른 관점이 같은 종교안에 함께 있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2. 요한복음은 정말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게 맞는걸까?
영지주의는 결국 2-3세기정도나 되어야 제대로된 형태를 갖추었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요한복음이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 보이는 것들이 사실 너무 많다. -.-;
보수적인 신학 입장을 가진 분들이 보기엔 불경스러운 질문이겠지만서두.

사실 영지주의의 사상들이 많이 퍼져있고, 그것에 대해서 기독론을 변증하기위해서 요한복음을 썼는데, 아무래도 그 영지주의적 관점을 고려해서 쓰다보니 그 언어와 사상들을 많이 차용하기도 하고… 말하자면 영지주의와 ‘대화하면서’ 요한복음을 썼다고 보면 참 잘 맞아떨어지겠다…고 생각이 드는 곳이 많은데 말이야.
영지주의가 더 일찍 발현이 되었다거나, 요한복음이 왕창 더 늦게 쓰여졌을 가능성은 없는 걸까?

3. Johannine 전통이 교회사 속에서 어떤 형식으로 더 develop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결국 사막의 교부들이라던가… 이런쪽으로 더 연결되고 영향을 주었을까?
말하자면 Synoptic 전통과 Johannine 전통이 그 후로 어떤 계보를 만들었을까?
Johannine 전통이 바울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4. 요한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요한이 요한복음을 쓴것이 아니라면 요한복음을 쓴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실제로 유대교적 전통과 헬라문화에 각각 어떻게 노출되어 있던 사람이었을까?

혹시 아는 분들 좀 제게 알려주시길…. -.-;

블로그 잠깐 쉽니다. (20-22일)

월요일에 회사가 쉬고 해서 이틀 더 휴가를 내서 쉬려고 합니다. ^^
저희집의 three girls (아내, 딸내미, 강아지) 데리고 운전해서 눈 있는 곳에 다녀오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목요일에 (혹시라도 휴가 가서 심심해지면 그 이전에라도?) 다음글 올려보겠습니다.

회사일이 살짝 급한 것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laptop을 가지고 가긴 합니다. ㅋㅋ

대신 실없는 joke하나 투척~ ^^

밥 벌어 먹고 살기 (10)

밥 벌어 먹고 사는 것은 현실이다.
그리고 법 벌어 먹고 사는 유일한 수단은 직업이다.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 다른 대안을 생각해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것을 ‘상수’로 두고 방정식을 풀어보아야 한다.
일단 밥은 벌어 먹고 사는데…
거기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 백성 다운 것인지를 풀어보아야 한다.

그러면,
승진을 하지 못하더라도 사랑을 포기 하지 않는것,
월급이 적더라도 탐욕에 빠지지 않는것,
자아성취보다는 다른이들을 살리기 위해 일 하는 것,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위하고 아끼는 것…

이런 것들이 따라오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직장을 변혁하고, 세상을 변혁하고, 세상이 잘 돌아가도록 섬기는 일들이 포함될수도 있겠다.

이게 내 나름대로 요즘 내 생각이 다다르고 있는 지점이다. ^^
(이 시리즈 끝~)

밥 벌어 먹고 살기 (9)

나는 현대 기독교에서 ‘직업’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높여졌다고 생각한다.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고, 직업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고, 직업을 통해서 자아를 실현하고, 직업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그래서, 직업을 위해서, 커리어를 위해서 더 소중한 것을 버리는 것을 너무 쉽게 정당화 해버린다.

직업을 위해서 정직이라는 가치를 버리기도 하고,
직업을 위해서 경건이라는 자세를 버리기도 하고,
직업을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하고,
직업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가꾸는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보이고 싶은 탐욕,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탐욕,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자 하는 탐욕… 등등을 ‘하나님의 뜻인 직업’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포장해 버린다.

나는 직업을 de-glorify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을 통해 자신의 꿈을 이루기위해 가족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죄다.
직업의 성공을 위해서 정직을 잠시라도 포기하는 것은 죄다.
더 연봉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가꾸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완전 바보짓이다.

이런 얘기를 좀 더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내 안에 있는 헛되고 왜곡된 자아실현의 욕망을 죄로 인정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

직업은 밥벌어 먹는 도구로서 자리잡는게 적당하다.

밥 벌어 먹고 살기 (8)

(1) 낮은 차원에서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는 다음과 같다.
– 세상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아래 두어야 한다.
– 모든 영역들을 나눈다.
– 각 영역별로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찾아서 행동강령을 마련한다.
– 그것을 실현한다.

그러나,
(2) 높은 차원에서 이원론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세는 다음과 같다.
– 세상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주권아래 두어야 한다.
– 세상의 모든 영역, 하나님의 주권 등등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그 의미를 찾는다.
– 이미 존재하는 여러 영역들에 그 고찰한 아이디어를 유연하게 적용하는 것이 어떤 것일까를 고민한다.
– 하나님의 주권을 행동강령으로 이해하지 않고 궁극적 이상으로 이해하고 현실에서의 유연함을 유지한다.

다르지 않은가?

말하자면,
북유럽 국가들이 사람을 더 존중하는 살기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1)의 방법을 취하기 보다는 (2)의 방법을 취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의 사랑, 자비, 공의, 인애 등등을 더 깊이 받아들이고,
그 ‘개념’을 궁극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적당한 현실적 방안들을 찾아내는 것이다.

반면,
(1)의 방법을 취한다면…
성경적 경제 체체를 이루기 위해
성경적으로 은행을 하는 방법을 찾아서 구현하고
성경적으로 세금을 운영하는 방법을 찾아서 구현하고
성경적으로 이자를 조정하는 방법을 찾아서 구현하고…
이런식을 접근 하는 것이다.

(1)의 문제는,
2000년도 더 된 문서 속에서 21세기에 적용가능한 성경적 은행 운영의 원칙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어렵고 왜곡의 위험이 크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근본적인 생각들에 대한 더 깊이 있는 이해를 한 후에,
현실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현실을 감안해서 더 유연하게 해야하는 것이다.

소위 ‘성경적 직업관 = 변혁’ 이렇게 등식을 마련한 것은 (1)의 방법을 취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적 직업관 = 변혁’ 이렇게 하지 않더라도,
‘성경적 직업관 = [x]’ 라고 해놓고, x에 어떤 것을 넣어도 같은 위험성이 있다.

성경적 직업관을 논하기 전에, 정말 성경의 기본적 아이디어가 무엇인가를 더 깊이 고찰하고…
그것을 현실(직업=밥벌어 먹기) 속에서 잘 적용해나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밥 벌어 먹고 살기 (7)

한참 전의 일이어서 정확하게 출처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와 관련해서 생각에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가 있다.
(혹시 독자들 중에서 출처를 아시는 분이 있으면 알려주시길…)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유럽(스칸디나비안 국가들), 독일 등의 국가들은 종교개혁을 지나면서 루터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스위스등의 일부 남유럽 국가들과 영국/스코틀랜드 쪽은 캘빈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미국이 궁극적으로 그 영향을 많이 받았고.)

루터와 캘빈은 소위 ‘세계관’에서 꽤 큰 차이가 있었다.
루터는 흔히 ‘두 왕국 이론’으로 알려진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왕국 이론은 세상이 움직여지는 통치원리와 영적인 영역이 움직여지는 통치원리가 다르다는 내용을 포함한다.
(대단히 이분법적 생각이다.)
반면 캘빈은 제네바에서 사실상 신정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했던 것을 보면 이분법적 생각을 거부하고 일원론적 아이디어를 추구했었다.

예전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했던 사람들에게 ‘이원론’은 ‘dirty word’이다. 배격해야할 prime enemy이다. 그래서 그런 관점에서 루터의 두왕궁론은 완전 비판의 대상이다.

그러나,
루터의 영향을 받았던 국가들은,
캘빈의 영향을 받았던 국가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인권의식이 발달했고 더 복지국가가 되었다.
말하자면 이원론적 사상으로 다스려진 나라들이 더 ‘살기좋은 나라’가 되었다는 말이라고 할수도 있다.

왜 그럴까?

이게… 소위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할때, 좀 더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낮은 차원에서의 노력만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내일 조금 더 이어가보겠다.)

밥 벌어 먹고 살기 (6)

예전에는 그래도 변혁 모델이 조금 더 relavant하다고 생각되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이유는 그럼 무얼까?

우선 엘리트의 비율이 현저하게 줄었다.
앞글에서 이야기했지만 변혁 모델은 엘리트들에게 적용할때 제일 잘 맞는 모델이다.
그런데 현대에는 그 엘리트가 현저하게 줄었다.
신자유주의체제로 인해서 빈익빈 부익부가 심해져서 경제적 파워를 가진 집단이 극소수가 되었고, 그와 더불어 따라오는 권력 역시 소수의 전유물이 되었다.
한국에서 예전에 소위 명문대를 졸업하면 그래도 엘리트이고 뭔가 한자리 할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이 그리 허무맹랑하지 않았는데… 요새 어디 그런가.
명문대 졸업해도 결국 금수저들 명령 받아 일하는 사람들되는게 제일 흔한 코스 아니던가.

그리고 또한 자본의 집중과 권력과 특권의 집중이 심해지면서 그들이 누리는 권력의 부패도 더 심해졌다고 본다. 견제받지 못하는 권력이 부패한다는 것은 당연한 원리이다.

그래서 사회 전체가 더 ‘악해졌다’고 나는 판단하고 생각하고 있다.
부와 권력의 집중이 사회를 더 악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가 악하기 때문에 노력으로 그것을 개혁해 내는 것이 더 어렵게 되었고.

개혁의 주체인 엘리트가 줄어들어서 약화되었고,
개혁을 막는 저항은 더 강해졌으므로 당연히 개혁이 어렵게 되어버린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살기 (5)

어떤 모델이 얼마나 좋은 모델이냐 하는 것은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는,
그 모델이 얼마나 많은 경우에 적용되느냐 하는 것이다.

변혁을 위한 직장생활이라는 모델을 그런 기준으로 한번 보자.

변혁을 위한 직장생활이라는 모델은,
엘리트, 금수저 등에는 잘 맞는다.
아니 이 사람들은 변혁모델을 따르는 것이 오히려 옳다고 이야기할수도 있다.

그러나,
직장에서 능력이 없어서 맨날 구박받는 사람은 어떨까?
직장에서 짤린 사람은?
남들이 잘나가는 회사에 다닐때 나는 빌빌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면?

이런 사람들에게는 변혁의 힘 자체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 된다고?
그 일에 충실한 능력 조차 없는데?

신앙을 생각할때,
그 신앙을 통해서 이루어야하는 목표/성취를 설정해 놓으면 결국 이런 한계에 부딛힐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 신앙의 본질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과정’의 중요함이다.

가령, 우리는 구직을 할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직장을 잘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신앙의 본질의 입장에서 보아서, 구직을 할때 더 중요한 것은, 그 구직의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래서 잘 풀릴때도 있고, 그래서 잘 안풀릴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구직의 열매가 직장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신앙의 과정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그분 말고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직장생활 역시 그렇다.
때로는 죽어라고 힘들고, 때로는 열나는 일도 있고, 가끔은 의로운 일도 하고, 어떤때는 승진을 하기도 하고, 일이 재미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변혁보다 훨씬 더 본질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은 신뢰하고, 직장을 돈버는 소중한 수단으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 변혁의 모델보다는 더 광범위하게 적용되는 모델이라고 보는 것이다.

밥 벌어 먹고 살기 (4)

개혁주의/변혁주의적 관점에서 직업을 바라보는 또 다른 문제점은,
세속주의/혼합주의에 오염될 위험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대기업에 들어간 새내기 직장인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다.
때로는 C&C man (Copy and Coffee man – 복사기 돌리고 커피 뽑아서 돌리는) 정도에 만족해야할때도 있다.

세상은 변혁시켜야하겠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를 여기 보내신 사명은 이루어야 하겠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그럼 어떻게 되느냐?
승진(!) 이 목표가 된다.
그래야 뭔가를 할 수 있게 때문이다.
변혁이 목표이기 때문에 고지를 점령해야 하는 것이다.
고지를 점령해서 영향력을 키워야지.

그런데 이게…
2년, 3년, 5년, 10년, 그렇게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부지런히 뛰다보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의 역량은 고지를 점령하는데 집중되게 되고,
고지 점령의 원래 목적인 변혁의 꿈은 점점 희미해진다.

이것이 변혁주의자들이 걸어가는 매우 typical한 변절의 모습이다.

내가 80년대 대학을 다닐때
그렇게 세상을 변혁시키는 기독교를 이야기하던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변혁을 위해 고지를 점령해야 했고,
그러면서 결국 너무 많은 사람들이 변절해버리지 않았던가.

나는 변혁의 모델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시대의 상황이나 어떤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매우 적절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하기 매우 어려운, 어쩌면 위험하기까지 한 모델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