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적 희망 (10)

내가 하는 일이 이렇게 하찮은 것 같은데,
뭔가 의미있는 것 같지 않은데 이게 그래도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통치하는 행위라고?

이걸 받아들이는데 또 다른 장애는,
노동소외의 문제다.

현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개인이 일하는 것이 지나치게 큰 시스템의 부품과 같은 모습으로 되어있고,
자신의 앞길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이 도대체 큰 그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고,
그래서 자신의 역할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건 큰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로부터 아주 자주 듣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가 이 회사에서 이렇게 일하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그런 사람에게 네가 하는 일을 그럼에도 의미가 있다..고 이야기하는게 참 잘 먹히질 않는거다.

이 고민은 나도 역시 20대부터 계속해왔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80년대 후반, 90년대 후반에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걸 공부하면서 노동의 가치에대한 이야기를 들었을때 처음 듣고는 하..참 좋다… 이렇게 반응했지만,
곧이어… 아니, 그런데 지금 당장 내가 있는 이 현실에서 그게 잘 안보이는데 어쩌라는거지? 라는 답답함에 맞닥들일수 밖에 없었다.

20는 학생으로 보냈으니… 당연히 내게는 이 공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게 큰 문제였다.

회심의 경험을 하고 마음이 뜨거워졌지만, 그것에 걸맞을만큼 내가 하고 있는 공부가 그렇게 의미있다는 생각을는 것이 참 쉽지 않았다.

대안적 희망 (9)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그 놀라움을 어떻게 이야기해야할까.

우리가 사실은 하나님 안에서 그렇게 가치있는 사람이라는걸,
싸구려 자기중심적 아이디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중심이 되시기 때문에 인간이 마침내 가치있게 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나는 여기서 한가지 좀 볼멘소리를 해보고 싶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
정말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비록 그 신학이 완벽하게 잘 서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회심이라는 경험이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송두리채 흔들어버리게 된다.

이것은 회심이 어느 한순간에 충격적인 사건이어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회심의 경험이 그 사람의 ‘구원’여부를 확증짓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유한한 사람이 무한한 신을 만나는 경험,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라는 분에게서 드러났다는 사실,
그분이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사랑을 보여주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이 악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것…
이것이 어떻게 도대체 가볍게 여겨질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게 정말 그렇게 엄청난거라면,
평생을 이 이야기만 하고, 하고, 또 해도 지치지 않을만한 이야기가 아닌가.

이토록 정말 그렇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음을 믿는다면,
시시때때로 그 사랑과 은혜의 스케일에 압도되어 감정을 추스릴수 없을만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나라가 가져다주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되는,
그래서 새로운 소망을 갖게되는 일은,
궁극적으로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가져다주시는 어떤 ‘경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냥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 진리가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May the Truth be Real.

대안적 희망 (8)

더 큰 내러티브에 삶을 투신해야 의미가 생긴다는 이야기는 자칫 신앙을 소영웅주의로 몰아갈 수 있다.

뭔가 대단한 것을 해야 신앙이 의미가 있다는 것.

그래서 해야하는 중요한 포인트는,
그 부르심의 대상, 부르심의 목표가 부르심의 형식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통해서 온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것이 우리의 부르심의 핵심이고,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삶은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사소하고 지루한 일상을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소한 일들, 집안 청소를 하거나, 아이 기지귀를 갈거나, 다른 사람 심부름을 하는 것등도 모두 하나님의 통치행위를 하는 중요한 일들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복음이 주는 매우 독특한 삶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삶이 대단할 필요가 없다. 그 삶이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다면,
심지어는 그 사람이 스스로 대단한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삶은 대단히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
금방 쉽게 직관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다.
여전히 내 삶은 지루하고, 여전히 내 삶은 별볼일 없다고 느껴질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삶의 의미와 이유가 대안적 희망의 매우 중요한 key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쉽지않다.
이게 실제로 희망으로 여기며 사는것에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다……

대안적 희망 (7)

요즘 젊은이들의 최대 희망이 ‘정규직’이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참 마음이 아프다.

한때는 젊은이들이라면 달라진 세상을 꿈꾸고, 더 큰 가치에 자신을 던져보겠다고 이야기하는 기상이 있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바꾸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젊은이의 기상이라는게 이젠 그냥 철 지난 구호처럼 들려버리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무조건 윽박을 지르면서 너희들 더 힘을 내야지~ 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꼭 해줘야하는 한가지 이야기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네 삶을, 너만을 위해 살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삶의 의미를 자신 내부로부터 찾아내려는 포스트모던적 시도는 삶의 기준을 자신에게 두도록 요청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삶의 의미와 동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 삶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대안적 희망을 이야기할때 매우 핵심적이고 중요한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Lordship에 대한 이야기가 잘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주님’이 되신다. 그것은 그분이 내게 어떻게 살라고 명령하실 수 있음을 의미한다. 내가 주님에게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스스로 삶의 의미를 찾다가 지쳐버린 이들에게, 그 의미가 외부로부터 주어진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기에 생경하게 느낄수 있겠지만…
결국 그렇게 해야 이들이 다시 삶의 의미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나의 선호(preference)’ 가 내게는 진리(truth)가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나는 어떤 음식을 좋아해. 그러니까 나는 그 음식을 먹어야해.
나는 어떤 종류의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그러니까 나는 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야해.

자신의 입에 맞는 음식을 찾는것이나, 자신이 더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찾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릴때 그 사람은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게 된다.
자신의 선호를 Lordship(예수님의 주되심)앞에 굴복시키는 어려운 결정을 할때야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게될 수 있다는 것이다.

Lordship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렵게 느껴진다.
복음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차라리 이게 전혀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에 나을수도 있다.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들에게, 그것으로부터 깨어나와야 네가 정말 자유로와질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훨씬 훨씬 훨씬 훨씬 더 어렵다.

10년, 20년, 심지어는 50년이상 그렇게 자기중심적 신앙으로 살아온 사람에게,
당신의 신앙이 심각하게 병들었다는 이야기가 잘 먹히겠는가.

대안적 희망 (6)

첫째 살아가는 의미에 대한 새로운 발견.

1930년, 시골에서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청년이 독립투사를 만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룻밤을 지내면서 독립투사가 해주는 역사 이야기, 독립에 대한 소망의 이야기,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냥 평범하게 농사를 짓던 이 청년은 그 독립투사의 이야기를 듣고서 마음에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결국 이 청년은 망설이던 끝에 자신도 조국 해방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다.

이 시골 청년이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갖게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건, 자신이 살고 있는 내러티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더 큰 내러티브가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복음이 제공해주는 것이 이런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삶에 커다른 의미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었는데,
복음을 알고 나니 자신이 사는 것이 하나님나라 라는 커다란 내러티브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이야기하는,
“네 마음의 목소리를 찾아라. 네 꿈을 이루어라” 와는 꽤 다른 삶의 방식이다.

오히려 복음을 통해서 파편화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통합해내는 것이 된다.

내가 만나는 제한된 그룹의 사람들을 보면,
일종의 영적 우울증에 빠져있는 것 같아 보일때가 있다.

우울증은, 감정이 우울한 것이 아니라, motivation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신앙의 motivation 자체를 잃어버린채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때가 정말 많다.
그것을 다루기위해 상담도 하고, 공감도 하고, 함께 울어도 주고…
나는 이런것들이 모두 가치있고 때로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더 궁극적으로는 혹은 더 기본적으로는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이 이들의 삶을 던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더 해줄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정말 복음의 내러티브를 알고 나면 그런의미에서 새로운 motivation이 생기게되고,
무기력감으로부터 벗어나서, 전에 없었던 활기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Tony Camplo가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다.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떠나는 것은 기독교가 너무 어려워서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기독교를 너무 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말 동의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교리를 더 복잡하고 어렵게 설명해야한다는 의미가 당연히 아니다.
기독교를 가볍게 여기고 그저 자신의 가벼운 life style 선택정도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때로…
그 안에서 안정을 찾고 그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삶 전체를 던져야만하는 더 큰 헌신의 대상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대안적 희망 (5)

의미를 성취에서 찾는 것이 문제이고,
그것은 자신을 뛰어넘는 기준이 제공되지 못한 상황에서 자기중심성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지금 더 큰 문제가 된다 앞글에서 적어 보았다.

이것에 대한 치료는 두가지가 병행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살아가는 의미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다.
현대 사회에서 제공해주는 성취에 의한 자아실현에 대비되는 대안적 의미가 가능하다는 것이 보여져야 한다.

두번째는, 자기가 스스로 가치의 중심이되어버리기 때문에 의미를 상실해버리는 문제를 다루어야한다.
자기 내부에서 의미를 찾는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대안적 희망 (4)

왜 가치가 아닌 성취를 추구하는 세상이 되었나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그중 한가지의 이유로 가치의 해체를 이야기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밀하게 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적 자기중심성이라고나 할까.

포스트 모더니즘은 함께 따르고 추구할 가치를 사회적으로/공동체적으로 상실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각각 가치 판단의 기준을 개인으로 가지고 오게했다.

팀 켈러가 잘 설명을 했는데,
(팀 켈러도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잘 정리해서 이야기한 것이겠고)
과거에는 영웅의 이야기는 사회적으로 함께 추구하는 가치를 자신을 희생해서 이루어내는 이야기였다. 전쟁에서 희생한 사람이라던가, 나라의 해방을 위해 싸운 사람들이라던가…

그런데 요즘 영웅의 이야기는, 사회적 통념을 깨고 자신의 꿈을 이룬 것들이다.
사회는 나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살려고 했는데, 나는 과감하게 그 벽을 무너뜨리고 내 마음 속에서 꿈틀거리는 꿈을 찾아 나서 결국 그 꿈을 이루는 것.

이렇게 각자 내면에서 삶의 기준과 가치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결국 각자 파편화된 선의 가치들을 만들어내고, 공동체가 함께 추구하는 선이라는 개념을 약화시킬 수 밖에 없다.
결국 선과 악의 기준조차도 각자의 개인이 결정하는 시스템이 되어버렸고, 더 좋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사회적 가치가 붕괴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 세상 속에서 남게되는 것은,
‘내가 원하는 꿈’을 이루는 것이고…
가치가 붕괴된 상태에서 추구하는 ‘내가 원하는 꿈’은 결국 이기적인 모습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무조건 까는 입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런식의 분석은 매우 타당하다고 본다.

말하자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성이라는 성향을 포스트모더니즘이 심각하게 강화시켜놓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안적 희망 (3)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예전에 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따를만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그 사람이 자신에게 동기부여를 하기 때문에 존경한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요즘 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부러워할만한 성취를 한 사람들을 이야기한다.
돈을 많이 벌거나,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거나, 많은 권력이나,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이다.

예전에는 자신이 길을 찾기위해 훌륭한 가치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면,
요즘은 자신이 길을 찾기 위해서 성공한 사업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것, 혹은 바라는 것이 가치가 아니라 성취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치는 누구든지 소유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성취는 누구나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는 그 사회 내에 희망을 가질 여유가 더 많이 있다.,
그렇지만 성취를 추구하는 사회는 그 사회 내에서 희망의 자리가 지극히 좁다.

대안적 희망 (2)

내가 대단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산다고 이야기할수는 없지만,
적어도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하는 절망은 심각한 수준이다.

젊은이들에게 있어 희망이란 어떤 특권층만이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중년들에게 있어 희망이란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사치이다.
노년층에게 있어 희망이란 예전에 있었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옛 이야기이다.

빈익빈 부익부, 각박한 현대 사회, 인간 관계의 깨어짐…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듣는 것은 전혀 낮설지 않다.
우리가 맞닥드린 절망의 상황을 어떤 이는 신자유주의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고,
기술 발전에 따른 자동화에 돌리기도 하고,
정의롭지 못한 정치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아니면 개인이 충분히 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중 무엇 하나가 절망의 모든 원인이라고 이야기할수도 없을테고,
이중 무엇 하나도 절망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할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 더 답답한 것은,
기독교가 이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법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주일 설교에서, 함께 하는 소그룹 성경공부에서, 아니면 다른 어떤 교회 프로그램 등에서,
이런 세상 속에서의 희망이 무엇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본 것이 언제였던가.

내가 나중에 더 풀어낼 수 있으리라 보지만,
나는 절망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무기력한 이유는 대안적 희망을 이야기할 동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본다.
기독교인들중 어떤 사람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악악거리며 외쳐대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억지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들게하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가.. 기독교 써클에서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내게는 더 큰 절망이다.

대안적 희망 (1)

대안적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고 한다.
내가 여기에서 하는 희망 이야기는
THE HOPE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A HOPE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당연히 희망에 대하여 뭔가 끝판왕의 이야기를 풀어낼만한 능력이 되는 사람이 아니다. ㅠㅠ

그러나,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희망에 대한 갈망은 어느때보다도 깊은데,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희망을 간간히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게 어째서 희망이야 싶은 것들도 많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희망들도, 자주, 이거 희망이야., 그러니까 받아들이고 믿어… 이렇게 종교적 억압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래서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고 싶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대안적 희망의 가능성이 있는 많은 것들 하나가 될까 말까 한 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대안적 희망이다.. 뭐 그렇게 거창하고 대단하게 이야기하는건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