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KOSTA 후기 (1)

우선, 내가 처한 상황 부터.
6월 초에 내가 여태까지 하던 project가 사실상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
우리 회사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고, 내 회사에서의 입지(?)때문이기도하고… 하여간 복잡한 이유로, 내게는 약간 불안(?)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이리저리 회사 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을 회사 내에서 앞으로 얼마의 기간 동안 찾지 못하면 나는 다른 job을 알아봐야 할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회사 내에서 ‘cooking’하고 있었던 project는 잘만되면 꽤 커질 수 있는 project 였다. 그리고 잘만 되면 industry 자체에 꽤 큰 impact를 줄 수 있는 project였다.
그걸로 회사에 상당히 큰 액수의 돈을 벌어다줄 수 있는 것이기도 했고.

그래서 나로선 일종의 ‘도박’을 걸었다.
이것에 나름대로 확~ 몰빵을 하면서 달려들었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되면서 회사를 나가야하나 하는 그런 상황이 되어버린 거다.
(지금도 그게 다 정리가 되지는 않았는데, 현재도 다른 회사를 계속 알아보고 있기는 하고… 우리 회사 내에서는 다른 project의 일부 일을 아마 맡아서 하게될 것 같긴 하다. 당장 다른 job을 알아보아야하는 건 아닌데, 이왕 이렇게 된거 다른 job을 알아볼까? 하는 마음에 나름 조금씩 찔러보려고 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아마 KOSTA 후기 시리즈 이후에 조금 더 써볼 수 있을것 같다.)

나는 이런 회사 상황 말고도 나는 이번 KOSTA 집회에 참석해야할까 말까 하는 것으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다른 이유는 역시 이 글타래에서 나중에 한번 다루어 보겠다.)

내 회사에서 이런 일이 터지고 나니, 당연히 마음이 많이 복잡한 상태였다.
솔직히 불안한 마음도 있었고. (‘두려움’이라고 표현을 해야할까?)

내 마음 속의 이런 복잡한 두려움의 상태때문에,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이번에 집회에 참석하기로 막판에 마음을 먹었다.
이런 상태라면 가서 ‘두려움과 믿음’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집회의 현장에 내가 좀 있고 싶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마일리지로 비행기표를 사고, 회사 휴가를 내고,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2019년 KOSTA 후기 (0)

이번에 KOSTA conference에 참석해서 살짝 놀란게 있다.
그건 내가 잘 예상하지 못했던 분들이 내 블로그를 보신다는 거였다. -.-;
내가 보기엔, 아니 저런분이 이런 허접한 글을 뭐 가치있다고 보시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그러다보니 여기 글쓰는게 살짝 더 부담스러워졌다.

뭐 그래도 하던 거니까, 이번 2019년 KOSTA conference 를 지내면서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역시 허접하게 좀 적어보려고 한다.

월요일부터 제대로 써 볼 생각이지만,
너무 오래 블로그를 비워서 하루 일찍 프롤로그 차원에서 하나 올려본다.

참 신기한 일이다

적어도 미국 코스타에서 주제를 정하기 위해 간사들이 brain storming을 하기 시작했던 것은 아마도 2001년 “낮아지신 예수, 섬기는 그리스도인” 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후 이래저리 주제를 정하는 작업에 직접, 간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왔었다.

그러면서 지난 20년정도의 기간동안, 코스타의 주제들은 내 신앙과 신학을 define하는 역할을 해 주었다.
매해 그 주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공부와 묵상을 꽤 열심히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이게 그냥 논리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깨달음이 올때가 많이 있었다.
이상하게 집회를 준비하면서 7월 초에 가까와지면 그 주제에 대한 여러가지 깨달음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경험을 자주 하곤 했다.
무릎을 탁 치며 감탄을 하기도 하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전율을 느끼기도 했었다.
왜 꼭 이 기간에 그런 깨달음들이 몰려들어오는지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냥 하나님께서 섬기는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특별한 은혜려니… 하는 것 이외에는.

금년에는 마지막까지 이번 집회를 참석할까 말까를 놓고 고민이 많았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직장문제가 좀 걸려 있는 것도 있고. (직장 문제에 대한건 다음주 지나고 이 블로그에 한번 정리해서 써보려고 생각중이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비행기표를 끊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지난주 초가 되어서야 마일리지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건,
비행기표를 끊은 그 날 밤부터 갑자기 ‘믿음’에 대한 여러가지 깨달음이 몰려오는 거다.
때 마침 이어지던 히브리서 말씀 묵상을 통해서, 어떤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우연히(?) 듣게된 어느 선교사님의 선교 보고를 통해서…
정말 마치 소나기가 내리듯 그렇게 깨달음들이 몰려들어왔다.

나야 뭐 특별히 이번 집회 기간에 하는 것도 없고… ^^
(아, last minute에 성경공부 그룹 하나 땜빵을 이틀동안 하게 되긴 하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나는 꼭 집회를 섬기는 사람이라고 볼것도 아닐텐데….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것 보면 참 신기하다.

간절히 바라는 것은,
내가 지난 10일여동안 등골이 오싹해지도록 깨달아진 그런 경험이…
참석하는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다.

다음 한주 블로그 쉽니다.
7월 8일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꾸벅~

‘믿음’이라는 뱃지

N T Wright이 아주 자주 쓰는 말 가운데 하나는,
신약백성들은 ‘믿음’이라는 뱃지를 가진 백성이라는 말이다.

N T Wright은 믿음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통로라고 이해하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가지는 표지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정말 오랫동안 그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믿음이라는게 어떻게 표지가 되는 거지?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믿음이라는 것이 뱃지가 될 수 있음이 깨달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걸 바탕으로 지금 한참 진행중인 히브리서를 읽으니 훨씬 이해가 잘 된다!

아… 이렇게까지 이해가 늦어서야…

한편 내가 믿음이라는 것을 너무 좁게 정의하고 있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새롭게 확~ 다가오고 있다.

믿음의 기도? 기도의 믿음?

지난 주에 어떤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데 유난히 그 기도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일이 있었다.
나는 소위 ‘영적은사’ 이런게 있는 사람이 아니어서, 소위 ‘신비한’일들은 내게 잘 일어나지 않는다. ^^

지난주의 그 기도는 게다가 뭐 특별한 기도도 아니었고, 걸어가는중에 그냥 그 사람 생각이 나서…
잠깜 멈춰서서 그 사람이 하나님 마음에 합하게 잘 쓰여지게 해달라고 짧게 기도를 했었다.
그랬더니 갑자기 내 마음이 요동치면서 울컥 해지면서 온 몸에 전율이 왔다.
허 참… 이게 뭐람.

이번 주 초에 그 사람과 연락을 할 일이 있어 이메일을 하다가,
아참, 지난주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야기를 하니.
마침 지난주에 그 사람의 상황이 좋지 않았고 정말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나 같이 둔감한 사람은,
내가 기도를 해놓고도 그것도 잊어버리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기도를 원하실때 그걸 싹~ 무시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도 기도라는 신비한 방법으로 연결되게 하시기도 하고,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들을 엮고 계시다는 것을 보이실때가 있다.

그게, 그냥은 보이지 않는데… 믿음이라는 눈으로 보면 보이는 거다.

나처럼 믿음이라는 것이 체질상 잘 맞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게 참 쉽지 않다.
믿지 못하겠는데 어떻게 믿음으로 기도하라는 건가.

그러나 그 믿음과 관계 없이 그냥 기도를 하고나면,
눈이 열려 믿음의 세계가 보이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가슴에 있는 이야기

계속 ‘믿음’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주말을 거치면서 말씀 묵상 본문도 히브리서 11장을 넘어갔다.
머리 가득히 믿음에 대한 생각들을 하고 있긴 한데…
그 머리 속에 있는 생각을 풀어내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지만,
그렇게 머리 속에 있는 생각들을 정리하다가 마음에 담겨지는 것을 풀어보고 싶은 마음이 더 많이 생긴다.

그건 머리에서 입으로 뽑아내어 나오는 말이 아니라,
가슴에서 입을 통해서 터져나오는 말들이다.

믿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고,
그것이 많은 도움을 준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믿음을 가슴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하고자하는 믿음이라는 것에 큰 구멍을 낸 상태로 전하는 것일것 같다.
탄식과 눈물과 탄성과 전율이 결국 믿음을 설명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지 않나 싶다.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누어질 다음주를 생각하며…

믿음

어제 저녁,
근처 어느 교회에 NK에서 오랫동안 살고 계신 선교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분이 이야기하는 방식은 이런거였다.

사람들이 우리보고 많이 힘들거라고 했지만, 별로 그렇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들을 열어주셔서 우리는 잘 지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일들이 하나님께서 하셔서 지금은 새로운 일들이 열리고 있다.

그분이 계신 곳의 특수한 상황들 때문에, 들었던 자세한 이야기를 쓸수는 없지만,
사실 객관적으로 이분이 겪었던 일들은 정말 황당하고 암울한 상황이었다.
하려고 했던 일들이 막히고, 상황이 악화되어서 당장 아주 가까운 장래도 불확실한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벌어진 상황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지만, 정말 안전할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정말 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 나 같으면, 이런 저런 상황을 분석하다가 많이 비관적이 되어 완전 기가 죽어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나라면 왕창 비관적일 것 같은 상황에서,
그분은 그렇게 많이 힘들어하지 않고, 새롭게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하나님을 그냥 신뢰했다고 이야기하시는 거다.

똑같은 상황을 두고, 나 같은 사람은 비관적인 막다른 골목으로 보지만,
그분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새로운 기회로 보는 거다.

믿음이란,
벌어져있는 상황을 다른 눈으로 해석하는, ‘다른 관점’을 갖는 것이라는 생각을 다시 되뇌이게 되었다.

그리고,
늘 내가 뭔가를 늘 control하면서 살아야하는 상황 속에서 사는 나 같은 사람은,
늘 하나님의 control을 신뢰하면서 엄청난 불확실성 속에서 사는 그 선교사님의 믿음을 갖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내가 믿음이 형편없는 것은,
한편 내가 많이 따지고 분석하는 성향이기도 하지만,
내가 평소에 살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사는 상황속에 나를 밀어넣고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한거다.

20대, 30대의 목소리 (5)

이번에 출장을 가서, 한국의 신문기사나 TV program등을 보면서 든 생각이 하나 있다.
내가 20대일때, 한국에서 ‘옛날을 추억하는’ TV program들이 물론 있었지만… 그게 main stream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한국에서는 80-90년대의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들이 너무 많이 보였다. TV program도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나는 그렇게 된 것이…
지금 그 목소리를 주도하는 것이 여전히 40대이상 50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20,30대의 목소리가 묻혀버리는 것이다.

20-30대의 목소리는… 그들의 목소리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그들의 목소리를 해석하고 대변하는 방식으로 주로 들린다.

막상 20-30대가 그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기가 참 쉽지 않다.

주눅들어 목소리를 내는 것 조차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래서 목소리를 갖고 싶다는 의지 조차도 희박한 사람들에게,
그 목소리를 찾아주는 일은 참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기독교의 초월성으로 가능할수 있다고 본다.
고아와 과부의 목소리에 천착했던 구약백성의 윤리가…. 지금 이 시대에 젊은 시대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20대, 30대의 목소리 (4)

성경에서는, 특히 구약에서는, 공의를 많이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공의는 대개 힘없는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가 무시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어쩌면 목소리가 없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갖게 해주는 것이 공의인거다.

그래서 그 시대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갖기 힘든 고아, 과부, 나그네 등을 무시하지 말고 돌보라는 명령이 반복해서 나오는 거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만드는 사회가 이런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을 심각한 죄로 정죄하신다.

나는….
지금 20, 30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그런 관점에서 본다.
나는 이들을 일종의 시대적 약자로 보고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잘 들리지 않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하는 것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20대 후반부터 쫓아다녔던 코스타에 아직도 마음을 쓰는 것에는 그런 마음이 있다.

지금 20대, 30대, 그리고 40대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을 정말 보고 싶다.
사회적으로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이 약자가 되어버린 세대에게 목소리를 주는 일이 일어나길 정말 바란다.

20대, 30대의 목소리 (3)

20, 30대가 그렇게 힘든건, 그 사람들의 잘못만으로 돌릴 수 없다.
이 사람들은 많이 노력해도 생존이 빡빡한 세상에 태어났다.
그러니 자꾸 위축되고, 더 생존에 목매달게 되어버린 거다.

사실 생각해보면, 소위 ‘성공’이라는 것을 하는건… 그 사람이 어떤 시대에 태어났느냐 하는 것에 깊게 관계가 되어있다.

물리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20세기 초반 유럽에 태어났어야 한다. 그래야 대박 성공이 가능하다. (아인쉬타인 등등)
사업가라면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태어났어야 한다. 그래야 대박 성공확률이 높다. (록펠러, 카네기 등등)
컴퓨터공학자라면 1950년대쯤 태어나면 좋다. 그래야 대박날 수 있다.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그리고 그 시대에 그렇게 뭔가 획기적인 것들이 열리는 일들이 있어야 그 흐름을 따라서 쉽게 밥벌어먹고 사는게 가능하다.

그 시대를 잘 못 맞추면,
많이 노력해도 생존 자체가 힘든거다.

나는 지금의 20, 30대가… 그리고 조금 더 보면 40대까지도 그렇게 생존이 어려운 시대에 태어난 것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