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Contra Mundum

일상을 긍정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기독교적 접근이 나는 늘 불편하다.
나는 일상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상에서 의미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일상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해보지 않은채,
그 일상 자체를 긍정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독교적이지 않다.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을 잃어버린 채 일상을 긍정했을 중세의 어떤 음악가는…
면죄부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었을 것이다.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을 잃어버린 채 일상을 긍정했을 일제시대의 그리스도인은…
신사참배를 정당화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거슬러 사는 것을 잃어버린 채 일상을 긍정하는 이 시대의 어떤 사람은…
어떤 황당한 삶의 정황을 만들어내며 살게 될까.

Apathy

그들은 마치 어린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서로 부르며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것과 같다. (누가복음 7:32)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기독교 신앙으로는,
apathy는 신앙이 없는 것의 표징이다.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도,
이웃에 대한 사랑도,
죄와 싸우는 처절함도,
나를 둘러싸고있는 시대정신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다면…
그래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해도 울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앙의 부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apathy는 안타까워해야할 모습이지만 apathy 자체를 꾸짖거나 지적함으로써 그것이 개선되지 않는다
apathy를 다루는 방법은 열정을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Youtube HQ에서 총격 사건

어제 Youtube HQ에서 총격사건이 있었다.

1.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나는 정말 아주 막 심한 욕을 해댔다. 아주 쌍욕을 했다. 그건 총격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향한 분노라기 보다는 그 evil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그 evil을 그대로 놓아두는 썩어빠진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 그런 정치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한 분노였다.

2. Google 내의 Christian들의 메일링 리스트가 있다. 몇명이나 그 리스트에 있는지 보니 1520명이 들어있다.
그런데 Youtube에서 사건이 터지자마자 이들중 소수의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이 아주 나는 인상적이었다.
– 일단 계속해서 기도한다는 일종의 기도체인이 만들어졌다.
–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바로 Google hangouts으로 만나는 ’30분짜리 기도미팅’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간에 함께 들어와서 기도하자고 요청을 했다.
– 그러면서도 어떤 사람은 이런 시기에 Christian group 밖을 향한 기도를 하자고 요청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는 그런 기도와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주목하자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성숙하면서도 신중하지만 매우 재빠르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3. 나도 사방에서 괜찮느냐고 연락이 와서, 오랜만에 facebook에 나 괜찮다~고 포스팅도 했다…

출장이 힘든이유

나는 유난히 출장 기간에는 더 힘들어 하는 것 같다.
음…. 힘들어 한다고 하기 보다는,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다고 해야 할까.

시차 때문인가,
뭔가를 짧은 시간에 이루어야하는 부담감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일이 많아서 일까…

이번 출장은,
일본과 한국의 여러 도시들을 다녀야 했다.
그러니 일 자체가 많았기 보다는 기차나 차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주 많았다.

쿄토에서 아침 6시 반 기차를 타고 쿄토에 가서 미팅을 하고,
바로 기차를 타고 와서 오후에 오사카에 가야하는 일정도 있었다.
식사는 왔다갔다 편의점에서 해결하고.

한국에서도 그랬다.
여러 도시들을 다니면서 미팅들을 쭈루룩~ 하고 다녔다.

그런데,
이게 왔다갔다 하는 게 많아서 그렇지,
이동시간이 많다보니 오히려 일하는 절대 양은 많이 적은 일정이었다. (의도적으로 좀 널럴한 일정을 짜기도 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부담이 큰 미팅들이라기 보다는, 내가 관리하는(?) 회사들을 둘어보는 일정이었으니… 비교적 stress도 적었다.

그래도 뭔가 출장을 와서 눌리는(?) 기분은 그대로였다.
왜 그랬을까?

내가 이번 출장에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나는 그렇게 사람을 많이 만나는 일이 에너지를 많이 쓰는 일인 것이다.
내가 introvert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보통 한 회사에 가서 미팅을 하면,
나는 혼자서 가고, 저쪽에서는 많으면 10여명, 적으면 5~6명 정도가 앉아있게 된다.
그럼 나는 계속 다대일로 대화를 해야하고, 그 사람들을 많은 경우 내가 어떤 말을 하느냐게 아주 촉각을 세운다.
그러니 많은 말을 해야하고,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많은 신경을 써야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다대일로 계속해서 사람들과 대화하고 미팅을 하는 것이 아마 내게 힘든 일인 모양이다.

그래서 그렇게 미팅들을 하고 저녁에 호텔에 돌아오면 대개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저녁을 많이~ 먹고 잔다.
그러니 출장을 다니면서 자꾸만 살이 찌게 되고.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 이게 일인 걸…

잃어버린 고난주간

고난주간은 내게 늘 특별한 특별한 시간이 되었다.
일년에 한번, 십가가의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묵상하는 것은 일종의 내 신앙의 루틴이 되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묵상하는 일은,
내 신앙의 흐름을 가장 중요한 기본으로 리셋하는 효과가 있었고,
혹시 신앙 사색이 길을 잃지 않도록 만드는 닺(anchor) 과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매년 고난주간에는 내 마음과 생각을 십자가에 집중시키도록 아주 많은 노력을 들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고난주간 기간에 out of town이 되는 바람에,
차분히 십자가를 묵상하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뭔가 out of balance가 되어버린 것 같은 느낌.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7)

요한복음 19:30
“다 이루었다”

정말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마치 아직 무엇이 덜 이루어진 것 같이 생각될때도 있지만, 이제 정말 다 이루셨다. 죄에대한 궁극적 심판도, 내 죄에 대한 속죄도, 피조세계의 회복의 시작도, 이제 다 이루어졌다.

이제는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게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세상이 감히 상상할수도 없는 소망이 주어졌다.

부활절에는 이제,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 라고 마음껏 죽음을 향해 조롱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

주님께서 다 이루셨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나의 나된 것은, 정말 주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가 이룬 것이 아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주님것이다. 주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나에대하여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

주님께서… 정말… 다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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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몇가지 내가 몇가지 더 생각하게 된 것들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다음의 것들로 환원(reduce)시켜서 생각하지 말자는 것이다.

첫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지식으로 환원하지 말자.
한국 교회의 몰락을 보면서, 복음주의의 쇠퇴를 보면서…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파서, 그 해결책을 자꾸만 knowledge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을 많이 반성했다. 물론 지식을 매우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식을 해결책으로 접근하게 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리게되고, 따라서 매우 절망적인 생각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는 것 같다.

둘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passion으로 환원하지 말자.
비록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직도 참 많이 미숙한 수준이긴 하지만… 주님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내 삶을 그분께 기꺼이 드리고 싶은 깊은 열망이 내게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열망(passion) 혹은 헌신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이렇게 말해야한다는 당위 혹은 윤리적 강령으로 기독교복음을 바라보고자 하는 ‘습관’이 내게 깊이 배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passion이나 헌신은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내 identity를 define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identity를,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를 일주일동안 묵상하면서, 내 생각의 중심이 많이 ‘나’로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늘 나밖에 생각할줄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이긴 하지만… 특별히 그런 경향이 더 심화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로부터 관심을 돌려서 ‘그분’께 관심을 갖지 않으면… 매우 인본주의적인 (그래서 어쩌면 매력적으로 보이는) 거짓 복음으로 내가 함몰되어 가기 쉬운 것 같다.

보통은, 운전을 하면서 audio book을 듣거나, podcast를 듣거나, 설교를 듣곤 하는데, 이번주에는 헨델의 메시아를 듣게 되었다. 아… ‘할렐루야’ 코러스가 터져나오는 순간 내 눈에서는 눈물이 함께 터져나왔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전투적 그리스도인, 성경 연구자, 사역자, 하나님 나라 일꾼… 그런 가치들이 정말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십자가를,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저 그 앞에서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엎드려 그분을 경배하는 것이 정말 그 모든 것을 통합해내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

예수께서는, 내 모든 것을 드려 찬양드리실 수 있는 분이시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6)

누가복음 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참 길고 긴 하루가 마무리 되고 있다.

목요일 밤에 붙잡히신 후에, 밤새 고문을 당하시고, 새벽녘에 엉터리 졸속 재판을 받으시고, 또 다시 각종 모욕과 극심한 고문을 당하시다가 “해골 언덕”에서 나무 십자가에 대못으로 몸을 박아버리는 잔인한 처형을 받으시는… 정말 긴…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다.

온 인류의 죄를 그 한몸에 모두 담당하시고, 어그러진 세상을 다시 제대로 만드는 광대한 작업의 시작이 이제 완성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그때, 예수께서는 ‘아버지’께 영혼을 맡기신다.

십자가의 외로운 처형을 경험하시면서 참 아버지가 많이 보고싶으시지 않으셨을까.
만세전부터 함께 하였던 그 아버지와의 fellowship이 참 그럽지 않았을까.
이제는 그 아버지의 사랑이 마치 끊긴 것 같이 느껴지는 순간인데.

금요일 낮시간이 지나면서는, 예수께서는 이제 고통을 소리쳐 표현할 힘도 다 없으셨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하루, 내 옛 사람이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깊이, 아주 깊이… 눈물과 함께 내 마음 속에 담고 싶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5)

요한복음 19:28
“목마르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라고 쓰고 있다. 그것은 시편 69편이라고 여겨지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정말 목이 마르셨다.

우리의 죄가 처절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이 하필이면 왜 이런 육체적 고통이었을까? 꼭 이렇게까지 잔인한 처형 방법이어야 했을까?

물론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의 죄의 consequence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아마 십자가 처형보다 더 잔인한 처형법이 그 당시 로마 제국에 있었다면, 예수께서는 그 방법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죄를 향한 진노가, 십자가에 달려있는 33살 청년 예수의 몸에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 주님을 만났을때, 정말 내 뿌리 깊은 죄의 본성이 밝히 드러나면서, 정말 어쩔줄 몰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정말 그토록 지긋지긋하게 이제는 죄가 싫은데… 그것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내가 빠져나올 수 없었던 기억들.

다른이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왜 그렇게 다루어지기 어려운 것인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사랑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왜 나는 여전히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인정에 목매고 있는 것인지.

내 자존심을 꺾고 다른 이들의 아픔을 품는 것은 왜 그렇게 힘이드는지. 왜 나는 내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을 그렇게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인지.

각종 음란함은 왜 여전히 나를 지배하는 것인지. 싸워도 싸워도 끝이 없는 것과 같은…

이런 내 안의 죄가 처절하게 다루어지는 모습이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시는 육체적 고통에 담겨있다.

내가 내 sinful nature를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발견할 때 마다, 그리고 그것과 타협하고자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할 때 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처절한 고통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내가 타협하고자 하는 이 죄 의 결과는 예수의 십자가 고통에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토록 죄는 무서운 것이다.

죄는, 그것을 토닥거리며 함께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꾸 드러내고, 토설하고, 아파하고,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이겨내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이 더 선명할수록, 죄를 다루는 내 모습이 더 당당해지는 것 같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4)

마태복음 27:46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저 들에 푸르른 솔잎을 보라” 라고 누가 썼다면, 이 노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 첫 구절을 가지고 노래 전체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80년대 학번 60년대생의 맨 끝자락에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대학 때 소위 ‘대동제’라는 곳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풍경도 생각이 나고, 노무현 대통령이 후보 시절에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부르는 clip으로 선거운동을 했던 것도 기억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노래의 첫 구절은 그 노래 전체를 떠올리게 하고, 그와 동시에 그 노래와 얽혀있는 여러가지 사건, 사상, 인물들을 떠올리게 한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는 구절은 시편 22편의 첫 구절이다.

시편 22편은 그 내용을 읽어보면 처절한 고통 속에 있는 시편 기자가 절규하는 내용,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내용, 그리고 궁극적으로 승리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극도의 고통 속에서 예수께서 이 시편의 첫 부분을 인용하셨던 것은, 지금 그 시편 22편의 첫부분 즉 극심한 고통이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앞으로 악(원수)에 대한 궁극적 심판이 곧 있게 될 것과, 예수께서 이루실 승리, 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이어지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신실함을 기억하며… 그리고 궁극적인 악에대한 심판과 승리를 곱씹을 수 있는 방법으로서는… 어쩌면 이렇게 시편 22편을 곱씹는 것 만큼 좋은 다른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사람들은 이 예수의 외침을 듣고, 엘리야를 부른다고 이야기를 하는 등…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성경이 그리고 있다.

십자가의 예수는… 정말 그렇게 고통스럽게, 외롭게, 그러나 소망을 생각하며 십자가에서 바짝 바짝 말라가고 있었다…

고난주간 묵상 – 가상 칠언 (3)

요한복음 19:26 – 27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마리아를 생각해보면, 정말 기구한 운명의 사람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10대 소녀일때, 결혼도 하기 전에 임신을 했고, 첫 아이를 타지에서 마굿간에서 낳아야 했다.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사생아’라고 생각했고, 평생 마리아는 그 멍에를 지고 살아야만 했을 것이다.

아마도 일찍, 남편 요셉을 떠나 보내고 과부로 살았고, 그나마 아들이 ‘miracle worker’로 등장하며 요란스럽게 하더니면, 이제 그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숨을 헐떡거리고 있다.

땀흘려 일한 남편이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그날 수수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해 내어 남편과 나누고,
자녀들을 다복하게 낳아 길러서 후손들도 계속 더 보고,
때로는 동네 이웃과 수다도 떨고,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도 나누고…
그렇게 가졌을 10대 소녀의 꿈은, 신적 개입 (divine intervention)으로 산산조각 부서져 버렸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께서 이렇게 십자가에서 처형 당하시고 돌아가신 이후에 부활하셨지만, 아들로서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사실상 이걸로 끝이었을 것이다.

이런데도…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복된 사람인 것일까?
그 삶이, 하나님의 광대한 계획으로 인해 완전히 쑥대밭이 되도록 망가졌는데.

아마 예수께서는 ‘엄마’ 마리아를 바라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셨을 것이다.

물론 이 처절한 고통의 끝에는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이 있고,
그로 인해 온 인류가 소망을 갖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지만…
마리아라는 한 여자의 인생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그 고통을 느끼시면서…
그 마리아를 생각하며 많이 우시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