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사한 짓

회사에서 치사하거나 졸렬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다.
어느 인간사회든지 그런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은, 아… 자기가 올라서기위해 저렇게 까지 하나 싶은 일들은 한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험담 퍼뜨리기,
공개적으로 다른 사람들 망신주기,
몰래 뒤에서 사람들을 자기편 만들어서 멀쩡한 사람 뒤통수 치기 등등.

그런데, 그런 짓을 하는 사람들의 90% 이상은 사실 실력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실력으로 안되니까 그렇게 해보려는 것일까.

회사든, 정치든 어찌 그리 똑같을까.

비가역적 개혁

Obama가 대통령일때,
Obama care를 정말 아주 열심히 밀어붙였다.
여론도 그렇게 좋지 않았다.
보수 언론과 보수 정치인들은 Obama care가 사회주의라고 비난했고, 가짜 뉴스도 떠돌았다. 그것에 영향받은 대중은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이러다 우리 망한다며 반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이번에 다시 뽑히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개혁은 해야한다며 그 개혁을 지지했던 민주당 의원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Obama care는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그 민주당 의원들중 많은 사람들은 그 중간선거에서 떨어졌다. 민주당은 다수당의 위치를 잃어버렸다.
(나는 그렇게 떨어진 민주당 의원들이 unsong hero라고 생각한다.)

그 후에 Trump가 Obama care를 뒤집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 그렇지만 Obama care를 뒤집기란 그리 쉽지 않아보인다. Obama는 비가역적 개혁을 이룬 것이다.

Obama care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이전의 상태보다는 큰 진보를 이룬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그 진보와 개혁은 비가역적이 되었다.

요즘 한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들을 읽으며,
지난 밤에 이곳 시간으로 한밤중에 자다 깨다 하며 청문회를 보다가,
잘 보지 않던 facebook에 들어가서 new feed를 읽으며,
극렬한 반대와 극렬한 찬성 사이에 고성이 오가는 것을 보며,
이 와중에 광을 팔고 있는 한국의 어느 권력집단을 보며,

Obama care와 비가역적 개혁을 생각한다.

비가역적 개혁에는 희생에 동참하도록 요청할수 있는 자신감있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비가역적 개혁은 누군가가 그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
비가역적 개혁은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러나 비가역적 개혁은, 비가역적이다. 역사는 그렇게 진보한다.

겸손과 자기성찰

겸손은, 나를 작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 덜 생각하는 것이다.
Humility is not thinking less of yourself, but thinking of yourself less

CS 루이스가 한 말이다.

내가 보기엔 두 종류의 자기 성찰이 있다.
한 부류는 ‘나’라는 존재만 자꾸만 파서 ‘나’에 집중하는 것이다.
다른 한 부류는 ‘나’라는 존재를 세상,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나는 전자의 부류로 자기성찰을 하는 사람은 겉보기에 겸손해보인다 하더라도 매우 이기적이면서 교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후자의 부류로 자기성찰을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어떻게 보이던지에 관계없이 겸손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늘 자신에 대해 생각하며 살기 마련이다.
아니, 자기 자신에 대해 obsession이 있다.
문제는 그 자기자신에 대한 생각을 자기 자신안에 가두느냐, 아니면 자기 밖의 더 큰 세상/존재와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덜 생각할 수 있는 key는,
나를 내 밖의 더 큰 세상/존재와 연결시킬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돈 보내주세요~

민우는 돈이 필요할때면 그냥 따로 전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문자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Venmo로 request 하나 틱~ 보낸다.
아래 것은 새 학기가 되어서 textbook을 샀다고 내게 돈을 보내달라고 요청한거다.

고연놈 같으니라고.
이렇게 돈이 필요할때 당당하고 뻔뻔하게 요청하다니. ㅋㅋ

민우는 이번학기에 듣는 과목들이 재미있다면서 아주 신이 났다.
세익스피어도 듣고, creative writing도 듣고, 연극 과목도 듣고, political science도 듣고, history도 듣고, 게다가 요가까지.

이 고연놈에게 열심히 번 돈을 이렇게 보내주는건 나로선 기쁨이다.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어릴때부터 정말 겁이 많았다.
겁이 조금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지나치게 과하게 많았다. ^^

꽤 클때까지 세발자전거를 타는걸 무서워 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살 어린 여동생이 세발자전거 앞에 타도록 하고, 나는 뒤쪽에 쪼그리고 앉았다고 부모님이 말씀해주셨다.
내가 5살이나 되었을때였고, 내 동생은 4살 정도 되었을 때였겠지.
세발자전거도 겁이 많아서 타지 못하는 아이.

학교다닐때 나는 시험때만 되면 하도 가슴이 뛰어서, 뒤로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쿵쿵쿵쿵….
대학입학시험 보는 전날, 나는 겁이 나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어 한두시간 정도 쪽잠만 자고 시험을 봤다. 순전히 겁이 많아서 그런거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겁이 많다.
나이가 들어 아닌척 하는 기술이 많이 늘었지만,
정말 엄.청. 겁이 많다.

그런데 살아오면서, 신앙을 갖게 되고…
바로 그 신앙 때문에, 신앙이 아니었다면 하지 않았을 위험한 선택과 결정을 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중 어떤 것들은 그 결정 이후의 내 삶의 형식 자체를 완전히 바꾸는 결정이었다.

그렇게 했단 결정들을 친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그 친구들은 내가 꽤 용감한 것으로 생각한다. -.-;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세발자전거 타는 것을 무서워하는 다섯살짜리 아이와 같다.

여전히 나는 사는게 많이 무서울때가 많다.
그냥 불확실성이 많이 두렵다.
이렇게 겁이 많은 내 성격은 하나도 바뀌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가끔 나는 내가 가진 신앙 때문에 내 성격이라면 하지 않을 결정을 하고 살아가기도 한다.

내 삶의 모든 모습을 계수하는 날이올때,
하나님께서는 내 겁 많음을 책망하실까?
그렇지 않으면… 겁쟁이로서 그 핸디캡을 가지고 나름대로 잘 살아보려고 했던 모습들을 칭찬하실까?

여전히 나는 잘 모르겠다.

사람을 얻는 것

이익을 얻고 사람을 잃으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손해다.
근시안적인 편안함을 얻고 사람의 마음을 잃으면 그것은 회복하기 어렵다.

이익은 힘으로 얻을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힘으로 제압해서 얻을 수 없다.

힘으로 어떤 사람을 내 뜻대로 움직일때마다, 그 사람의 마음은 그만큼 내게서 멀어진다.

세상은 참 어리석다.

Overwhemled

살다보면 쏟아지는 일/상황 때문에 압도당할때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내가 해야하는 일이 많다고 느낄때,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느낄때.

그럴때 그 상황을 침착하면서도 지혜롭게 대하는 것은 성숙한 사람의 특징일 것이다.

나는 참 panic을 잘 한다.
너무 쉽게 겁을 먹고, 너무 쉽게 힘들어한다.
내가 overwhelm한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배로 열심히해서 얼른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늘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보이는데, 사실은 그게 panic해서 허둥거리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사람들이나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화를 내기도 한다.
그건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사람들에게 화가 났다기 보다는 그 상황에 대해 화가 난 것이거나, 더 나아가서는 그 상황에 허둥거리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일수도 있다.

예전에는 overwhelm되었을때 그냥 숨어버리거나 잠수를 타거나 회피하는 일들을 더 많이 했었다.
지금도 그러지 않는건 아닌데, 예전보다는 조금 나아졌다.

내가 가진 신앙은,
이런 상황에서 잘 듣는 소화제처럼 뻥 뚫어주는 것 같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냥 몸의 허한곳을 보해주는 한약같이 작동하는 것 같다.
나는 압도당해서 허둥거리는데 신앙은 신속한 효과를 내게 가져다주지 않는다.

당연히 그렇다고 해서 신앙이 무용한 것은 아니다.

신앙이 무용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매우 자주,
그 효과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I’m overwhelmed.

토론의 자세

민우는 Trump 대통령을 아주 많이 싫어한다. ^^
그리고 미국 민주주의가 많이 후퇴하고 있다면서 진심으로 걱정을 많이 한다.

두어주전에,
내가 Trump 대통령이 잘한것도 있지 않느냐고 몇가지 이야기를 했다.
아주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더니만 그럴수도 있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결국은 Trump가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보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는 조금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민우가
“I disagree” 라고 이야기했다.

내가 그래서 아니.. 그런데 말이야… 하면서 내 이야기를 더 하려고 하니까 민우가,
“I get your point, but I disagree” 라고 이야기를 했다.

가만히 보니,
민우의 토론 자세가 내 자세보다 더 훌륭했다.

나는 내 의견을 가지고 민우를 설득하려고 했던 반면,
민우는 서로 다른 의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그 대화의 종착점으로 삼았다.
단기간에 합의에 이룰 수 없는 것은 그렇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거기에 머무를 수 있어야 하는 건데 말이야.

이제는 딸아이에게서 배우는 일이 가끔씩 생기고 있다. ^^

창의성과 게으름

지난 주일에 우리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

한 형제가 시간이 조금 있다면 조금 더 창의적으로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하자,
그 아내가, 자기 생각에는 시간이 조금 더 있으면 창의적이되기 보다는 게을러지는 것 같다고.
게으름이 늘 창의성을 이기더라고.
(자신의 경험으로는 그렇더라고)

여러 대화 가운데 하나 였는데,
나는 이게 참 마음에 오래 남고 있다.
나는 내가 창조적으로 살고 있지 못하다는 불만이 늘 내게 있다.
그런데 정말 가만 생각해보면 막상 토요일 오전이라든지 시간이 살짝 나면 창조적이 되기보다는 게을러지는 내 모습을 발견한다.

내 두 가지 결심

  1. 바빠서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핑게는 대지 말자.
  2. 조금이라도 시간이 나면 게을러지지 말고 창조적이 되어보자

상상과 희망

내가 오른쪽 손가락 힘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세다고 해보자.
다른건 완전 별로인데, 딱 손가락 힘만 좋다. 힘도 좋고, 그 힘 조절도 잘한다.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 운동신경에 대해서 유난히 잘 볼 수 있는 안목도 있다고 하자.

나와 같은 팀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나보다 똑똑하고, 키도 크고, 잘생겼고, 팔 다리 힘도 세고, 달리기도 잘하고.. 하여간 짱이다.
그런데, 딱 하나 손가락 힘은 나만 못하다.

그런데, 옆팀에서 우리 팀에게 바둑 알까기 내기를 하자고 내기를 걸어왔다.
나는 내가 손가락에 관한한 자신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지 훤히 패가 보인다.
그냥 내가 하면 되는거다.

그런데,
나와 같은 팀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손가락 운동신경에 대해 이 사람들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내가 상상하는 바둑판 알까기의 화려한 세계를 상상해내지 못한다.

아…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이 상상을 이 사람들에게 전달만 해 줄 수 있다면…

나는 때로 회사에서 그런 답답함을 느낄때가 있다.
그런데, 훨씬 더 자주,
나는 교회에서, 기독교 모임에서 그런 답답함을 느낀다.
내가 보기엔 되는데, 나는 그게 보이는데, 사람들이 안된다고 하는 거다.

상상이 부족해서 희망을 갖지 못하는 거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면서 그렇게 또 답답할까?
나도 다른 누군가의 상상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희망을 보지 못하고 있는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