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의 논리와 을의 논리

지금 우리 회사에서는 performance review를 하고 있는 중이다.
나도 당연히 그 자료들을 모으고 document를 쓰고 있는데…

어제 내 manager와 이야기를 하다가 생각해 낸게,
나는 소위 ‘vendor’라고 부르는 하청업체들과 일을 많이 하니까,
내가 얼마나 잘 하는지 하는 평가를 그 업체들에게 부탁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 평가의 내용이 우리 회사의 ‘공식적인’ performance review에 포함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내가 그 하청업체들과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들어본다는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관여하고 있는 회사 몇개에 지금 일하고 있는 project에 대한 그 사람들의 생각과 함께,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하는 review/평가를 부탁을 했다.
그리고 내게 사전에 상의하지 말고 내 manager에게 그 review를 보내라고 부탁했다.

나는 한편으로는 이 일을 하면서 함께 그렇게 일하는 회사들에게 잘 대하려고 정말 엄청나게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인데…
이 회사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를 해줄지 궁금하다.

‘갑’이 ‘갑’이 되는 이유는, ‘갑’이 ‘을’을 평가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평가는 ‘을’의 상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러나, ‘을’이 ‘갑’을 평가한다는 것은 살짝 exciting한 일인 것 같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쓰고나서… 난 참 좋은 갑이야…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참 꼴불견일거다.

갑은, 갑이되는 그 자체로 폭력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갑이 되려고 노력해도, 갑인 이상은 좋을 수가 없는 거다.
갑으로서 더 영향력이 있으니까 선한 영향력을 더 확산 시켜야지… 라는 방식으로 이야기하는건 여전히 갑의 논리이다.

갑이 갑의 논리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좋은 갑이 될 수 없다.
갑이 갑의 을의 논리로 상황을 이해하려 할때에야 비로소 아주 약간의 희망의 빛이 있는 거다.

어제 내가 해보기로 한것을 가지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사랑할 수 있다면 행복한거다

민우가 겨울방학을 마치고 어제 다시 돌아갔다.
민우는 학교공부가 무척이나 재미있다고 한다. 자기가 듣고 싶은 과목을 이번학기에 듣는다고 잔뜩 흥분되어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기말고사, final peper 그런 것들은 스트레스 였던 것 같다.
집에와서 며칠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잠만 잤다.
그리고 나선 집에 와서 먹고 싶었던 것들 – 주로 아주 단순한 한국 음식들-을 잔뜩 먹고 갔다.
된장찌게, 차돌배기 구이, 미역국에 조랭이떡 넣은 것, 호박전, 곰탕, 김치, 짜장면…
그리곤 California에 많은 버블티, crepe 같은 것들

민우는 가기 전날 까지도 완전 게으름뱅이 모드였다. 그래서 짐도 잘 안 싸고 있다가 가기 전날 잠을 쬐끔만 자면서 짐을 싸가지고 갔다.

잠이 덜깬 아이를 공항에 내려주면서 꼭 껴안고 사랑한다고 해 주었다.
민우는 나보다 조금 더 길게 나를 안고는 놓지 않았다.
(엄마는 일 때문에 집에서 포옹을 하고 나왔다.)

민우는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괜히 마음이 싸~ 해지면서 눈물이 고였다.

지금 내 나이가 거의 50이 다 되어 가는데,
어쩌다 한국에 출장이라도 가서 부모님 댁에 들려 지내다가 나올때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나처럼 딱 그러신다.

나는 우리 부모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
뭐 나를 많이 사랑하신다는걸 머리로야 이해하지만.

인스탄트 짜장밥 같은 것들을 가방이 터지도록 넣고는 그걸 들고 사라지는 민우는,
내가 얼마나 민우를 사랑하는지 잘 모를거다.
내가 우리 부모님의 사랑을 잘 모르는 것 처럼.

그래도 내 아이를 사랑한다는건 그것으로 참 큰 행복이다.

요즘은 그래도 조금 한가한 편

요즘은 회사일이 조금 여유가 있는 편이다.
내가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이 정도로 여유가 있었던 건… 2010년쯤 이후 처음이 아닌가 싶다. ^^

왜 회사일에 여유가 있느냐 하는건 살짝 회사 기밀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어서 다 밝히긴 어렵지만,
현재로서는 일종의 폭풍전야와 같은 여유로움이다.
아마도 한두달 이후에는 다시 좀 바빠져서 또 다시 출장 많이 다니고, 빡빡한 deadline에 맞추어서 살고 하게 될 것 같다.

일이 살짝 널럴해지는 바람에 요즘에는 WFH (work from home)도 한주에 한번정도는 하게 되고, 일찍 퇴근(~4시)해서, 집에와서 일 마무리를 짓는 경우가 많다.

살짝 적응을 잘 못하고 있다. -.-;
여유가 생기니 그냥 게을러져 버렸다.


Inner voice

현대 영웅의 이야기는 가족이나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극복하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귀기울여 진정한 자신을 찾는 이야기이다.

한편 의미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궁극적 해답을 내면에서 찾으려하는 것은 참으로 답답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현대기독교가 인식해야하는 철학적 싸움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선호, 자신의 느낌을 지나치게 긍정하여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꺾는 일이 사라져버리는 기독교를 보는 것은 참으로 비극적이다.

돈, 돈, 돈

지난주에 우리 회사가 $1 billion dollars (한국 돈으로 1조원+)을 투자받았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제 생긴지 3년정도 된 회사인데, 참 웬만한 돈은 돈도 아니게 느껴진다.
(뭐 그게 내 돈은 물론 아니지만 ^^)

그래도 silicon valley에서 지낸 시간이 좀 오래 된 엔지니어가 보기에,
우리 회사가 하는 어떤 일들은 … 완전 신박하고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아… 이건 아닌데… 싶은 것들도 있다.

그런데 내게 보이는 여러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리 회사는 왜 ‘잘나가고’ 있는 걸까?

결국은 ‘돈’이다.

우리 회사는 워낙 빵빵한 재정적 뒷받침이 되어있고, 정말 돈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부어가며 일들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들이나 단점들을 그냥 돈으로 발라버리며 해결해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가만히 보면…
이렇게 결국은 이 회사는 성공하게 될 것 같다.

물론 돈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모든 회사가 성공하는건 아니다.
많은 돈을 쏟아 부어서라도 성공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엄청난 돈의 힘으로 무지하게 성공을 향해 돌진해가는 탱크에 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냥 마음 한 구석이 휑~ 하다.
정말 바빌론 왕궁에 포로되어 온 다니엘과 같은 느낌.

목회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 평신도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자

작년 한해동안 이 블로그를 통해서 한번 써보고 싶은 가장 큰 주제의 글은 ‘평신도’에 대한 글이었다.
얼떨결에 목회자에 대한 글을 작년 연말에 쓰기 시작하는 바람에 평신도가 목회자를 까는 것 같은 구도가 되어 버렸지만, 사실은 더 많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목회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평신도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목회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그런데 워낙 꼭 쓰고싶은 주제의 글 시리즈가 되어서,
막상 그건 뭔가 더 생각을 정리해서 써야할 것 같다는 부담이 있고…
그런데 생각을 정리해가며 글쓸만한 여유는 없고…
그래서 평신도에 대한 이야기는 써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왜 뜬금없이 목회자에 대한 글을 썼느냐고, 평신도에 대한 글을 좀 써달라고 묻는 독자가 있어서…
그것도 언젠간 써보겠노라고 애매모호한 약속만 한번 날리는 바이다. ^^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13)

그래서 현실적으로 다음과 같은 것들을 제안해본다.

1.목회자가 성도들을 ‘목회’한다는 생각을 조금 약화시키고, 목회자가 세상 속에서 사는 성도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을 조금 더 강화시키면 좋겠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지식으로 세상을 사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아직 알지 못하는 삶의 형태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자세를 가지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나라 복음은 한편 선포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살면서 발견해가는 것이고…
그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의 contents자체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

2.목회자가 성도들의 이야기를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많이, 정말 많이, 들어라.
도대체 어떤 상황에 있는지 지루할만큼 많이 들으면 좋겠다.
아니 왜 저 얘기를 지겹게 자꾸만 하는걸까… 를 넘어서서 더 많이 들으면서 그 상황 안에 함께 목회자가 들어가려는 시도를 하면,
성도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지겹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무지해서가 아니라 교회에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임을 발견할때도 있을 것이다.

3. 목회를 목회자와 평신도가 함께 하면 좋겠다.
과감하게 목회자가 가지고 있는 권한을 평신도들과 나누고 평신도들이 목회의 대상이 아니라 목회의 주체가 되도록 평신도들과 목회자들이 partnership을 가지게 되면 좋겠다.
그렇게 해야만 세상과 교회와의 접점을 놓치않고 목회하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싶다.

4.신학교 출신이 목회자가 되는 경직성을 좀 재고해보는 것도 좋겠다.
이건 여러가지로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렇게 신학교 졸업생이 아닌 목회자를 인정하는 기독교 내의 여러 모습들이 이미 존재한다.
그 그룹들은 이걸 어떻게 다루어내는지 잘 살펴보면 좋겠다.

5. 목회자들이 정말 공부를 많이 하면 좋겠다.
그냥 옛날 신학교에서 배웠던거 똑같은거 자꾸 공부하는거 말고, 진짜 인문학적 소양도 좀 갖추고, 폭넓게 사고하는 방법도 자꾸 익혀나가면 좋겠다.
목회자들끼리만 만나면서 그 안의 언어에 함몰되지 말고, 그 밖의 넓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빠르고 풍성하게 발전하고 있는지도 좀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12)

그럼 도대체 대안이 뭔가?

나도 이에대해 대안을 실험해보고 검증할만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도 이런 것들을 인식하고 여러 생각들을 해보고 있는데 늘 그렇게 만만치는 않다.

대안을 만듦에 있어 두가지 원칙들을 먼저 좀 생각해보자

우선, 우리가 (as church) 모든 해답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겸손함을 갖자
그리고 목회자가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자
우리가 해답이 없다면 그 해답을 찾는데 매우 중요한 step은 ‘듣는 것’이다.
나는 이와 관련해서 크리스토퍼 라이트의 ‘하나님의 선교’의 아이디어가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Post-Christendom에서 살아가는 삶과 선교의 관계를 잘 풀어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와 연관된 매우 쉽고 간단한 youtube video가 하나 있다.
IFES의 Vinoth Ramachandra의 강의 clip인데 꼭 들어볼만 한다.
대학교 캠퍼스와 engage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교회가 주목해서 들어볼만한 포인트가 있다.

두번째로는 현실적으로 목회자가 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좋겠다. 웬만큼 목회자가 뛰어나지 않고서는 교회 안에 있는 목회자가 세상과의 충분한 relevancy를 확보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과의 접점을 가지고 있는 교회 내의 평신도들과 ‘함께’ 해야한다.
목회자가 ‘목회’를 한답시고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영역에 대해 자신이 가르쳐야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11)

어제 아는분과 내게 이런 얘기를 해 주셨다.
“네가 하는 얘기 다 잘 알겠고, 동의도 하지만, 그렇게 목회자들을 ‘디스’해서 되겠느냐?

당연히 나는 목회자들을 디스하는게 아니다. ^^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내가 좋아하고 존경하는 목회자들도 많이 계시고, 특히 나와 ‘친한’ 목회자들도 많이 계시다.
나는 그저 지금 현재상태로의 ‘목회자’라는 직분이 다소 건강하지 않게 지탱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 목회자들은 다 문제냐? 당연히 아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을 싹 갈아버리자는 거냐? 그것도 당연히 아니다.

나는 지금 목회자로 섬기고 계신 분들이 비 목회자 그리스도인들보다 압도적으로 월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헌신’이다.

나는 현대 교회에서, 특히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가되는 헌신을 하는 신학적 바탕이 반드시 모두 건강하다고 보지 않는다. 소위 ‘주의 종’이 되기 위해 헌신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되는 헌신은 그 내용을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처음 비교적 순수하게 헌신했다가 그 헌신의 내용이 변질되거나 이상하게 발전되는 일들을 많이 볼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신학교 원서를 넣을때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헌신을 한다.
그리고 이것은 대단히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다.
비목회자로 살면서, 목회자들이 이렇게 하는 정도의 헌신을 하는 평신도들은 사실 아주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교육이나 훈련등은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노력해서 줄 수 있지만,
헌신은 manipulate하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목회자들이 여전히 존중받고 교회 안에서 그분들의 리더십을 인정해줄수 있는 가장 큰 근거는 그 헌신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에서 목회자들을 갈구면서 딴지놓는 소위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평생 당신이 그렇게 갈구는 그 목회자처럼 당신을 온전히 헌신해본적이 인생에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아, 생각보다 글이 길어져서 많이 고민이다. ^^ 그래도 다음주엔 무조건 마무리 짓는다! ㅎㅎ)

“목회자”라는 직분이 outdated? (10)

이 시리즈가 길어지면서, 그리고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으면서 뭔가 글의 모멘텀이 흐려진 것 같은 느낌이 좀 있다.
여태까지는 현재 상태로의 목회자라는 직분이 현대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써 왔다.

이제 내가 1~9편에 쓴 논지에 대한 가능한 반론을 좀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는 대안과 제언으로 이 시리즈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내가 쓴 글에대해서 아마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잘 하고 있는 목회자들이 있지 않느냐.

맞다. 가령 팀 켈러 같은 목회자는 실제 맨하탄에서 사는 사람들의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질문이 무엇인지도 잘 파악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도 아주 통찰력있는 대답과 대안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 잘 하고 있는 뛰어난 목회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지금상태가 건강하고 좋은 상태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팀 켈러의 예를 들자면, 내가 보기에 팀 켈러는 그냥 그 사람이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팀 켈러를 벤치마킹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나 같은 사람이 축구를 배울때 박지성을 벤치마킹해서 배우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금의 상황에 어떤 문제가 있느냐를 제대로 살펴보려면 어떤 best case scenario가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worst case scenario들이 있는지를 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현대사회에서 적실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혹은 완전히 잘못 방향을 잡아 가고 있는, 아니면 그냥 세상과의 접점을 잃어버린… 그런 목회자들을 생각해보라.
그런 예를 드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