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 I look that bad?

내 youtube feed에 재미있는 비디오가 떠서 봤다.
아마 TV 시트콤인것 같은데,
미국 사람이 프랑스에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냥 이 사람이 미국 사람인걸 바로 아는 거다. 불어로 뭘 물어보면 영어로 대답해주고.
“내가 미국 사람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너 옷 입은 꼴이 그렇다’는 표정.
그래서 파리의 옷가게에서 옷을 사서 입었더니 그제서야 사람들이 불어로 말을 하더라는…

내 생각에 나는,
미국 기준으로 보더라도 좀 심하게 옷을 아무렇게나 입는 것 같다.
많이 허름하게.
그런데 이게 나만 그런게 아니고, 우리 회사에서 나와 가까이 일하는 사람들은 대충 다 그렇긴 하다.

나는 한국에 가면 사람들이 흔히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
인천공항에서 내게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보다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보통 훨씬 더 많다.

아마 그 사람들이 속으로 그러는 것 같다.
‘너 하고 다니는 꼴이 그렇다…’

기독교와 관용

돌이켜보면 내가 정말 20대 ‘복음의 열정’에 불타올랐을때, 내게 관용은 매우 부족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기본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방식이, 내가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워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또, 또 내가 배웠던 복음은 늘 ‘타협함이 없어야’한다는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20대, 내 신앙의 영웅은 Francis Schaeffer였다. 그분은 로잔언약마저도 성경의 무오성을 지켜내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던 사람이었다.

그 불관용의 복음을 그야말로 밤낮으로 묵상하고 지냈으니, 내게 관용이라는 것이 자리잡기 매우 어려웠을 것.

그런데….
만일 내가 그때 타협함이 없는 복음에 대한 강조를 묵상하지 않고,
사랑과 포용과 은혜의 복음에 대한 강조를 묵상했다면…
아마 내 20대 이후 지금까지의 삶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물론 내 기질적으로, 논리적인 계층구조가 다 해결되지 않았는데 포용하는 것은 여전히 힘들었을 테지만.

Oh, I Want To Know You More

“오 주님 알기 원하네” 라고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영어가사의 맛을 정말 잘 살리지 못했다. 아마 번역을 하되 원래 운율에 맞추다보니 어쩔수 없었겠다 싶지만…

요즘 이 노래를 많이 혼자서 부른다.
참… 가사가 좋다.
내 나름대로 직역에 가까운 의역을 한번 해 보았다.

(1절)
내가 내 자신에게 빠져있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
내가 세상의 부에 내 마음이 빼앗겼다고 느끼는 그 순간에,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나는 그것이 성령님의 부르심임을 안다.
그리고 내 세상적인 방황은 그분의 사랑 안에서 녹아져 내린다.

(코러스)
오, 당신을 더 알고 싶습니다.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당신을 더 알고 싶습니다.
오,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심장을 느끼고, 당신의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당신의 눈을 바라보면 내 마음 안에 소용돌이가 생깁니다.
외칩니다. 오 당신을 더 알고 싶습니다.

(2절)
내 매일의 행동때문에 주로 생명과 노래를 잃어버릴때,
내 가슴에서는 피가 흐르고,
그분에 대한 민감함이 사라집니다.
내가 열심히 살지만 내 자신만의 모습으로 살아,
망가진 영혼을 마주하게 될때,
부드러운 예수님의 팔이 완전해지고자하는 내 바람을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마무리 부분)
내가 마지막 숨쉬는 때까지,
당신의 죽음과 부활안에 있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오 당신을 더 알고 싶습니다.
오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더 알고 싶습니다.
오 당신을 더 알고 싶습니다.

이해관계자를 적으로 돌리지 않는 개혁

한국에서 의대정원 확대건으로 꽤 시끄러운 뉴스가 들려온다.
나는 한국에 구체적으로 의사 수가 적절한 수준인지 아닌지 하는 data를 이야기하고자 하는건 아니고…. (내가 알기론 현재 의사수가 그냥 통계 data상으로는 비슷한 수준의 다른 나라들보다 적다고..)

뭔가 일을 하려고 할때, 그 이해관계자를 적으로 돌리거나 어떤 한 이해당사자를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하는건 참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의사가 공정한 수준보다 훨씬 더 높은 소득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타도해야할 기득권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사람들이나, (주로 좌파)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표를 얻으려고 의사 집단의 생각을 무시한채 비합리적이거나 비상식적인 방식으로 일을 밀어붙이는 사람들이나 (지금 정부)
궁극적으로 더 좋은 의료현실을 만드는데에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어쨌든 그 이해관계자가 함께 노력해서 하도록 더 창의적이면서도 발전적인 방법을 연구해서 해야하지 않을까.

특히 한국의 의료체계에서는, ‘수가’를 조정하지 않는 한, 절대로 지금 상황이 개선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비현실적인 수가조정이 어떻게든 이루어져야 모든 의대 졸업생들이 서울 강남에 피부과나 성형외과를 하려고 하는 상황이 개선되지 않을까.

정말 생명을 살리는 의사로서의 자부심과 자존심이 잘 세워지도록,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그렇게 개혁이 좀 이루어지면 좋을 텐데…

Just say “Yes” or “No”

내가 미국에서 회사생활을 하면서 제일 불편한것은,
“과장된 위선”이다.
이건 내가 만든 표현인데…

“absolutely”, “super excited”, “best ever”
이런식의 엄청 과한 표현들이 넘처나는데,
(가령 apple의 새로운 제품이 나왔을때 present하는걸 보면 잘 알수 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잘 되고 있지 않더라도 그걸 마치 매우 좋은척 하면서 이련 표현을 쓰기도 하고,
분명히 잘못된 결정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데, 대단히 훌륭한 결정이라고 칭찬을 하기도 한다.

나는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일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이 되지 않는데…
그 사람이 그 자리에 가는건 잘못된 선택이라고 생각되는데…
이건 그런 결정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건데…

그럴때 남들이 다 하듯이,
나도 대단히 기쁘다, 완전 훌륭하다고 떠벌리는게 정말… 너무… 어렵다. ㅠㅠ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복음 5:34-37)

“And don’t say anything you don’t mean. This counsel is embedded deep in our traditions. You only make things worse when you lay down a smoke screen of pious talk, saying, ‘I’ll pray for you,’ and never doing it, or saying, ‘God be with you,’ and not meaning it. You don’t make your words true by embellishing them with religious lace. In making your speech sound more religious, it becomes less true. Just say ‘yes’ and ‘no.’ When you manipulate words to get your own way, you go wrong. (The Message, 마태복음 5:34-37)

50대 중반에 생각해보는 죽음

1.
세종대왕님이 52세에 돌아가셨으니,
지금 나는 세종대왕보다 오래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역사기록을 보면, 세종대왕은 건강이 좋지 않아 44세부터는 세자에게 국정을 아예 맡기고 사실상 국정에서 많이 물러났던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국정에서 물러난 시기에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

2.
지금 찾아보니 미국의 기대수명이 미국은 76.3세이다. (한국은 83.5세)
만일 내가 미국평균 수명대로 산다면 앞으로 20년 조금 더 남은 것이고,
한국평균 수명대로라면 앞으로 그보다 7년 더 남은 것이다.

3.
지난 20년, 혹은 지난 30년 정도를 생각해보자.
20년 전에 나는 bay area로 이사오기 직전이었고,
민우가 preschool에 다니고 있었다.
30년전, 나는 미국에 오는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게 있어 지난 20년, 30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러니 앞으로 20년, 30년도 역시 후다닥~ 지나가겠지.

4.
죽는날까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내 평생 이루어나가야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리스도를 더 닮아갈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5.
몇년전 빌립보서를 공부하면서 바울이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은 ‘finish well’이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고, 정말 깊게 내게 다가왔었다.
정말 내 삶을 던져서, 내 삶을 드려서, 내 삶을 이용해서, 내 삶을 통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살아가고 싶은데…


Execution, Efficiency, and Creativity

Silicon Valley는 뭐든 다 비싸다.
정말 뭐든 다 비싸다.

그러니,
Silicon Valley에서 하는 일로 돈을 벌려면 비싸게 하더라도 Silicon Valley에서만 할 수 있는 무엇을 해야한다.
무지막지한 execution과 efficiency를 통해서 다른 곳에서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방식이 있다. (그런 회사에 다녀보았다.)

아니면 다른 곳에서 할 수 없는 creativity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는 일들을 하는 방식이 있다. (그런 회사에도 다녀 보았다.)

그런데,
뭔가 점점… creativity로 하는 일이 Silicon Valley에서 동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Silicon Valley에서 엄청난 creativity로 뭔가 새로운 것이 이루어진 것이 언제였던가. Google의 search engine이 나오고, Smartphone이 나온 이후 사실 그 이후에는 그렇게까지 획기적인 것이 나오지는 못하고 있다.

최근 AI가 엄청 뜨고 있는데,
그것 역시 대단한 creativity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많은 resource를 쏟아부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아마도, 점점 더 어떻게 더 많은 resource를 쏟아붇느냐 하는 싸움이 계속 더 될 가능성이 높고.

그래도 AI는 계속 Silicon Valley가 그 중심에 있을 것 같긴 하니, Silicon Valley자체의 존재감은 계속될 것 같긴 하지만,
이제는 Silicon Valley의 모습이 앞으로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바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지만 execution과 efficiency는 Silicon Valley가 다른 어디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당분간 execution과 efficiency로 살아남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나 같은 hardware engineer는 더더군다나 그렇고.

그냥 삶이 더 고달프게 되는 것이지 뭐.

Unfair burden

일을 하다보면, 아니 그냥 살다보면…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물론 나 일수도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이고, 충분히 이해할만 한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도,
그럴 이해시키는 것이 정말 어렵게 느껴질때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뭔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살려면,
어쨌든 그 사람에게 그 중요한 것을 이해시켜야 함께 뭔가를 해 나갈 수 있다.

그럴때,
그것을 이해시키는 부담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그 중요한 내용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것이 중요한 것이니 꼭 들어봐야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조차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는 경우가 정말 많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알지도 못하고 있고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중요하고 좋다는 것을 설득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건… 사실 공평하지 않다.

공평하지 않은 burden을 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China risk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China risk는 실재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중에,
우리가 만드는 제품을 계약생산해줄 회사를 찾고 있는데,
중국에 있는 회사를 선택하는데는 사람들이 주저한다.

단순히 그 최종 조립회사가 중국에 있는 것을 꺼려할 뿐 아니라,
부품을 중국에서 받는것도 조심스러워할때가 많이 있다.

그 이유는,
우선 미국과 중국의 관계때문에 어떤 핵심 부품들을 중국으로 보내는 것이 매우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있고,
또 중국에서 오는 물건들이 때로는 미국의 세관에 붙잡혀서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이유로 갑자기 중국정부가 무슨 정책을 바꿔서 하고 있던 것이 바뀔 수 있다는 우려등이 섞여 있다.

이 분야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도,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많은 회사들이 중국에 supply chain이 있는 것을 꽤 우려하곤 한다.

미중의 de-coupling이 정말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까지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정말 본격적인 de-risking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확실하다.

도대체 해결책은…

지난주 꽤 큰 ‘trade show’라고 해야할까, exhibition이라고 해야할까…
그런걸 다녀왔다.

그러니까, 넓은 장소에서 의료기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 장비, 각종 서비스 회사들이 다 모여서 자신의 회사를 홍보하고, 나 같은 사람은 가서 함께 일할 수 있는 회사들을 찾아보는 그런 이벤트였다.

이런데에 가면 몇가지 특징이 있다.

일단 90%의 사람들은 백인 아저씨들이다.
대개는 약간 과체중이거나 비만이고, 나이는 대충 50대정도가 많다.
그런 사람들이 주로 이런 trade show같은데에 계속 돌아다니면서 세일즈를 하는 사람들인건데…
주로 출장을 다니면서 과식을 하곤 하고, 운동할 시간이 부족하기도 할 수 있으니 대개 그렇게 과체중 혹은 비만이 되는 것이겠지.

나는 백인은 아니지만,
50대에 과체중인 아저씨로서, 대충 그 demography에 맞아들어가는 사람인 셈이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곳의 booth에 ‘매력적인’ 금발의 젊은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서서 홍보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한다.

물론 그런 사람을 고용할 정도로 큰 회사의 booth이니 사람들이 모이는 것일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냥 그 매력적인 여성을 보려는 50대 아저씨들이 그렇게 모이는 것일수도 있겠으나…

아니면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은 그 여성이 의외로 그 분야의 전문가여서 그곳에서 여러가지 필요한 대화를 나누는 담당자일수도 있겠고…

그냥 나는 50대 아저씨들이 바글바글한 그런 세팅에서,
젊은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그렇게 서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그런 상황이 영 편하지는 않았다.

이런 것을 보고,
그런 옷차림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비난하거나,
그런 옷차림의 여성에 끌려서 모여드는 50대 아저씨들이 추하다고 비난할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그렇게 하는 것이 50대 아저씨들의 관심을 끄는데 어느정도 성공을 하는 것을 보면,
무슨 도덕적으로 무엇을 비난하는 것이 뭔가를 이해하거나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냥 나는 혼자 마음이 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