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생 처음 BMW를 몰아보다!

지난 월,화 출장을 갔을때다.
우리 회사는 national rental car를 주로 이용하는데, 그냥 mid-size 차를 하나 예약을 해 놓았다.
national rental car는 좋은게 가서 자기가 원하는 차를 고를 수가 있다.
자기 차 class에 맞추어서 원하는 차를 몰고 가면 된다.

그런데 나는 national rental car에서도 executive club인가 뭐 그런거여서…
mid-size 차를 예약하고서도 더 높은 등급의 차를 빌리는게 가능하다.

하여간,
그래서 차를 픽업하려는데 음.. 그중 하나가 BMW X3 였다!
나는 아니, 이런 차가 왜 여기에 있지? 이 사람들이 실수한거 아닌가? 생각하면서 그래도 한번 해보자… 싶어 그냥 그 차를 몰고 exit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그걸 몰아도 된다고…

덕분에 나는 난생처음 BMW를 타게 되었다.
히야… 좋긴 좋더라.

보통 내가 운전을 할때, 고급차가 속력을 팍 내면서 앞으로 끼어들면… 확~ 하고 열받는 일들이 있었는데,
막상 그런 차를 몰아보니, 그냥 웬만하면 그렇게 속력이 팍 나더군.
그 사람들은 그냥 정상적으로 차를 몰았던 것 뿐이야.

내가 그렇게 잘나가는 차를 몰아본적이 없으니 몰랐던 거지.

나는 그렇게 잘나가는 차를 운전하는 것을 막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가속이 어떻게 핸들링이 어떻고 하는거 잘 모른다.
아마도 BMW 3 series 같은 세단은 내가 몰았던 X3 보다 훨씬 더 ‘운전하는 맛’이 나겠지.

내가 생각한 것들
– BMW 좋긴 좋더라. ^^
– 이런 차는 내게는 ‘개발에 짚신’이다. ^^ 물론 좀 좋긴 하지만, 실제로 detail한것들을 다 즐길만한 taste와 지식이 내게 없다.
– 좋은차 타고 다니는 사람들, 운전 팍팍 하는거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야 겠다. 진짜 그 사람들 차는 그렇게 잘 나가는 거다.
– National rental car 좋다!

양자물리와 철학적 사고

1.
나는 비록 물리학을 전공하지 못했지만, (이론) 물리학을 참 좋아했다.
내가 이론 물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내가 이론 물리학을 제대로 잘 할만큼 머리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물리학이 정말 재미있어서, 나중에 따로 물리과 학생들이 배우는 교재를 가져다가 혼자서 독학을 하기도 하였다.
대학교 수준의 quantum mechanics는 독학으로 해볼만 했었다.

2.
요즘 Google x (요즘은 그냥 X 라고 부른다)에서 Stanford의 유명한 물리학자 Susskind 교수를 데려다가 10주짜리 quantum mechanics 강의를 하고 있다. 일주일에 2~3시간짜리 강의를 매주 하고 있는데…
당연히 그걸 매주 들어갈만큼 시간이 있지는 않지만, 시간이 되면 녹음된 강의 video를 조금씩 보면서 나름대로 ‘덕질’을 하고 있다. -.-;
참 재미있다.

3.
특히 quantum physics나 relativity theory 같은 것이 정말 재미있는 이유는, 그것이 대단히 철학적이기 때문인 것 같다.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근본적인 view가 그 안에는 담겨 있다.
가령, quantum physics는 현상을 확률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확률로 설명되는 현상이 때로는 가역적이지 않기도 하다.
이게 가만 생각해보면 완전 심오하다.
진짜 철학적이다.

실재로 이 강의 시리즈를 하고 있는 Susskind 교수는, string theory를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에 따르면 우주가 어떤 다른 ‘실체’로부터 투영된 홀로그램이라고 한다. 참…내…

4.
내가 예전에 물리학을 그렇게 좋아했던 것은, 물리학이 가지는 수학적 정밀성이나 치밀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지는 철학적 함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렇다.
철학을 개뿔도 모르면서, 나름대로 추상적인 논리적 전개를 해보는 것은 즐기고… 솔직히 말하면 그것이 내게 남은 거의 유일한 취미생활인듯 하다.

5.
이런 추상적 개념적 사고를 즐기는 사람이, 실리콘 밸리에서 완전 현장에서 뛰는 일을 하면서 일하고 있다. 아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plan을 짜고, data를 모으고, 그 data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역시 이 일을 때로 즐기는 이유는, 이 일을 통해서 추상적 개념적 사고를 할거리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것을 나는 현장에서 살아내는 이야기가 모여서 하나님 나라의 내러티브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6.
이번 thanksgiving 휴가 기간 동안에는, Google x 에서 한 Susskind 교수의 강의시리즈를 한번 쭉~ 따라가보고 싶다.

가을!

나는 가을을 꽤 많이 탔었다.
대학때 가을을 타면 연극이 많이 보고 싶어 졌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주말에 서울에 올라와 대학로 소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기도 했었다.

내가 사는 캘리포니아에는, 별로 찐하게 가을을 느끼기 어렵다.
아, 물론 이맘때쯤 되면 날씨가 그래도 좀 쌀쌀해져서 외투를 입어야 하고, 특히 day light savings time이 끝나고 나면 해가 일찍 져서 밤이 확~ 길어지긴 한다.

그래도 사계절이 뚜렷한 곳 보다는 훨씬 더 가을이 살짝 온다.

옛날처럼 가을을 별로 타지도 않고,
가을을 탈만한 날씨도 아니고,
가을을 탈만한 여유도 없는데…

이번주에는 미국 중부로 출장,
다음주는 미국 남동부로 출장,
그리고 11월 마지막주는 미국 동부로 출장 한번이 잡혀 있어서…
이번 가을엔 어쨌든 ‘여행’을 많이 하게 되긴 하겠다.

출장 중에라도 뭔가 확~ 가을 기분 내는 걸 해보겠다고 살짝 결심을 해 보는데…
출장중에 뭐 그런거 할 시간이 잘 없기도 하고,
막상 뭐 할만한 것도 없고 해서…

대학때 가을타면 많이 들었던 동물원 mp3 file이나 내 전화에 넣어놓고 들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 그게 뭐 대단하게 시간 드는 일이라고… 그 음악 file 전화로 옮겨놓는 것도 계획만 세우고 있다…. 쩝)

사랑할 여유가 없이 바쁘다면

나는 늘 바쁘다.
어떤땐 정말 몸이 많이 바쁘고,
사실 더 많은 순간엔 마음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바쁘다.
몸이 덜 바쁜 순간에도 늘 쫓기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

내가 이 블로그에서 몇번 쓰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 많이 생각해온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랑할 여유가 없을만큼 바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정말 도무지 사랑할 여유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할 여유도, 주변 사람들을 사랑할 여유도 없다.
정말 이건 문제다.

사랑할 여유가 없이 바쁘다면… 그것은 분명 잘 못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100만큼 능력이 있다면, 60~70만큼만 활용하면서 살아야 비로소 사랑할 여유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제 늦게 호텔에 들어와서, conference call을 하고, report 좀 쓰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오늘은 이곳 Dallas에서 중요한 meeting이 있다. 그리고는 저녁비행기를 타고 가면 오늘 밤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가겠지.

사랑할 여유가 없이 바쁜 것은, 잘 못 살고 있는 것이다….. -.-;

당장 physical한 시간을 비우는 노력도 정말 필요하지만,
내 마음의 여유를 더 찾아내는 노력이 정말 많이 필요하다.

검소한 출장

대부분 내 세대가 그렇듯이, 검소함은 큰 미덕이었다.
그래서 약간의 절약을 위해서 몸이 고생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였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1,2학년땐 한방에 혈기왕성하고 땀냄새나는 10대 후반 ~ 20대 초반 남자아이들 네명이 함께 살았다.
그렇게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서인지, 그냥 돈 안쓰고 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아무 잠자리에서나 자고, 아무거나 잘 먹고, 긴 시간 여행도 잘 했었다. 정말 불편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5년여 기간동안, 회사일로 출장을 많이 다니면서 본의아니게 upscale 여행을 좀 하게 되었다.
여러 항공 회사의 business class를 경험하게 되었고, 여러 나라의 꽤 좋은 호텔에서 묵을 때가 많았다.
또 식사도 역시 내 돈 내고 사먹으라고 하면 먹지 않을 음식들을 먹기도 하였다.

그게,
그렇게 여행을 하면서 뭔가 뽀내나게 다니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실제로 출장을 가서 가장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가령, 토쿄의 중심가 몇개 회사에서 며칠에 걸쳐서 meeting이 있다면,
웬만하면 그 meeting 장소에서 가까운 곳에 호텔을 잡는다.
그건 그렇게 해야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면 하루밤에 300~400불이 훨씬 넘는 고급 호텔에서 자게되기도 한다.
또 저녁에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서 따로 좀 싼 식당을 찾아다니지 않고 그냥 그 호텔의 식당에서 혼자 부페를 먹을때도 있다.
그것도 역시 그렇게 해야 시간이 제일 절약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한끼에 100불 넘는 식사를 한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몇번 다니다보니,
이코노미 seat이 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별 두개까지 호텔이 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식사도 fast food나 편의점에서 사먹는 음식 정도로는 뭔가 만족스럽지 못하게 느껴진다…
음… 이건 아니다.
내 수준보다 더 high class에 익숙해져버리는건 재앙이다.

금년 말이 되기까지,
최소한 3번의 출장이 남았다.

오늘 그중 하나를 출발한다.
이번에는 좀 검소하게 해보려고 한다. ^^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10)

욕망 자체를 죄악시 하려는게 아니다.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형태로든 욕망 자체도 분명히 창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선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욕망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어그러진 세상 속에선, 역시 어그러져 있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다고 느끼는 것이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정말 그 안의 궁극적 만족이 하나님 그분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시는 것이 내게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체가 내게 만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무한정 사랑하는 것이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에서는,
바로 이런 기독교의 모습을 찾기가 정말 어려워 보인다.

내가 속해있는 이 현대 기독교에서는,
어쩌면 그래서 내가 믿고 있는 이 기독교에서는,
궁극적 만족이 인간적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는 듯 하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9)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돌맞을(?) 이야기 계속… ㅎㅎ

내가 또 좀 까보고 싶은 것은, ‘취미활동’ 혹은 그와 비슷한 활동들이다.
자, 여기서 역시 나는 취미가 긍정적일 수 있다고 믿는다. 아니 오히려 취미가 건강하게 작동하면 대단히 긍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취미활동, 자신만의 기호에 맞는 여러가지 활동등에 현대인이 유난히 집착하는 것 같아 보일때가 있다.
분명히 도저히 그럴만한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데, 특정한 취미활동을 위해서 무리한 소비를 하는 것을 아주 흔히 본다.
어떤 특정 활동이나 기호식품등에 과하게 시간을 많이 쓰는 것도 아주 많이 본다.
이게 내가 살고 있는 실리콘밸리가 유난히 더 심한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럴까?

나는 이것 역시, 욕망에 대한 긍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계속 해서 추구하는 것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건강한 밸런스를 넘어가고 있는 수준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처음엔 어떤 취미나 기호활동등의 예를 좀 들면서 글을 써보려 했는데… 그러다보니 주변에서 다 뭔가 하나씩 하고 있는 것들이 많아서… 뭐라도 하나 쓰면 그 누군가를 까는 글이 되어버린다. -.-;
그래서 뭐 딱 예를 하나 들기가 참 머시기 하다.
그래도 이렇게 써도 무슨 의미인지는 전달이 되겠지… ^^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8)

자, 그럼 진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이야기를 한번 풀어보겠다.

여성이 추구하는 ‘성공’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먼저 내가 분명히 할것은,
나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모두 세상에서 공정하고 평등하게 여겨져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리고 지금의 시대는 여성과 남성이 그렇게 공정하고 평등하게 대해지지 않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런 불평등과 불합리함은 나를 화나게 한다.
(이걸 꽉~ 미리 한번 써 놓고…)

여성이 남성들과 같이 경쟁했는데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게 취급받아서 같은 reward를 받지 못한다거나, 똑같은 성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우선, 일차적으로, 그 불평등에 대해 분명히 주목하고, 그 불평등이 정의롭지 못함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런 접근이 자칫 욕망을 긍정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지는 많이 경계하고 조심해야 한다.

남자와 여자가 둘 다 성공과 자아성취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둘다 그래서 똑 같이 일했다.

그런데 남자가 더 큰 자아성취를 얻고 성공을 얻는다.
여자는 그보다 못한 성취와 성공을 얻는다.

그러면 여기서…
여자가 갖는 자아성취의 욕망 자체의 죄성에 대한 충분한 언급없이…
그 불평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balance된 접근일까?

아, 물론 여기서 남자가 더 성공과 성취를 얻었으므로,
그 남자가 어쩌면 더 많이 가지고 있을 그 성공과 성취에 대해서 많이 경계하고 지적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서 불평등의 이슈를 다루어 내면서, 그리고 그 불평등의 이슈를 시정하기 위해서 자칫…
어그러진 욕망 자체를 모두 긍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안된다는 것이 내 주장이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차별을 그냥 받아들이자는게 아니다.
차별을 다루어 내지만, 그러면서 자칫 욕망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기독교 페미니즘이 분명 가능하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재 기독교 페미니즘이 이런식으로 욕망의 정당화 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진심으로 우려한다.
여러 형태의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접근이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을 기독교 내에서 아주 많이 발견한다.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사회정의’를 이야기하면서 가끔은 이런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 한번 생각해본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7)

성공/번영하고자 하는 욕망을 어떻게 볼 것인가?
나는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치중립적으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몇가지의 이유가 있다.

– 성공의 동기가 결국은 강한 자기애(self-love)에 기인하고 있을 가능성이 거의 100%이다.
–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의 성공은 그 성공의 그림자로 인해 어떤 사람들에게 고통이 되기 십상이다.
– 성공/자기성취는 많은 경우 그 사람의 궁극적 관심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버린다. ‘하나님 없이도 사는 것’이 가능해지게 된다고 착각하게 되어버린다.

물론,
돈을 버는 것, 성공을 하는 것 자체를 모두 죄악시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성공이나 번영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공과 번영과 명예등을 향한 욕망은 그것을 쉽게 가치중립적이라고 여기기 대단히 어렵다고 본다.

기독교 내의 건강한 영성신학자/영성가 들이 성공/번영/명예 등등에 대해 경고하고 또 경고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그렇다.

우리 시대에 돈은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돈 자체가 갖는 어떤 영적 power가 있다…
이렇게 리차드 포스터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성공/자기성취/번영/명예 등은 정말 개인과 공동체가 지극히 조심하면서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 내가 살고 있는 삶의 context에서는 더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6)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것을 참기 힘들어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가볍게는, 무엇을 먹고 싶다 (craving)을 참는 것을 힘들어 하기도 하지만,
조금 더 심각하게는, 내가 무엇이 되고 싶다, 어떤 일을 하고 싶다, 어떤 lifestyle을 가지고 싶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참 어려워한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 부모님 세대는, 자신이 무엇을 이루겠다는 꿈이나 자신이 무엇을 누리겠다는 생각보다는 훨씬 더 우리 가족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으로 사셨던 것 같고,
자아실현보다는 생존을 위해 사셨던 것 같다.

그러나 요즘은 생존을 위해 살기보다는 자아실현을 위해 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흔히 직장생활 이라는 것을 그릴때, 힘들고 아니꼽고 사표쓰고 싶지만 가족을 위해 참으면서 열심히 일한다는 식의 그림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것을 포기하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생존하지 못해 안타까워하고 힘들어하기 보다는 자기의 자시 자신에 대한 욕망을 충분히 채우지 못해 힘들어 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왜 그럴까.
아마도 생존의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이 되니까 ‘자아실현, 자기 만족’에의 욕구가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이겠지.

나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가며 가족이나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우리 부모님 세대의 특성과,
내 꿈, 내 욕망을 채우는 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요즘 젊은 세대의 특성,
이 두가지를 모두 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내가 젊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주 묻기도 하고, 더 많이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어떻게 네 자신의 욕망에 대한 확신을 그렇게 강하게 가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정말 내 스스로의 판단을 신뢰하는 것이 어렵다.
특히 그 이해 당사자가 나 자신일때는 더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어떤 결정을 할때면, 처절하게 이기적인 모습으로 하기가 너무 쉽고,
그런 이기적인 결정은 왜곡되고 비뚤어진 내 죄성에서 비롯되기 너무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내 이해에 관련된 어떤 결정을 하려 할때는,
정말 내 의도가 얼마나 선한 것인가를 아주 여러번 점검하려 노력하고,
그렇게 한 후에도 내 판단이 충분히 선하다는 것을 정말 믿기 어려워서 힘들어 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의 욕망에 따라 쉽게 어떤 결정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