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식

나는 천식이 있다.
천식과 같은 chronic disease가 있는 사람은 그걸 많이 신경쓰고 살아야 한다.
가령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무지하게 노력한다. 왜냐하면 한번 감기에 걸리면 그로부터 두어달 기침을 하게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피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지난 겨울 이곳 캘리포니아는 대단히 비가 많이 왔다.
이건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캘리포니아는 계속 많이 가물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비가 많이 온 탓에 요즘 여기는 매우 드물게 사방에 꽃이 피고 덕분에 무지하게 꽃가루들이 많이 날리는 모양이다.
나는 그래서 요즘 천식 증상으로 고생중이다.

그래도 워낙 약이 좋아서 증상있을때 약 잘 먹고 열심히 관리하면 사는데 별로 지장은 없다.
동생이 호흡기 내과 전문의이기 때문에 내 천식에 대해 아주 참견을 많이 해준다. 매우 고마운 일이다. ^^

영적 성장도 비슷한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의 약점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약점을 잘 관리해가며 그 사람이 그래도 뚜벅뚜벅 걸어가도록 여러가지 도움을 얻을 수도 있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애니어그램이니 MBTI니 하는 것이 유용할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오남용되면 그 사람에게 걸어가지 못하는 핑게거리만을 제공해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천식환자라는 것을 잘 아는 것이 내가 삶을 잘 살도록 도와주듯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그 사람이 잘 살도록 도와주어야한다.

자신을 돌아보며 그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것은 천식을 탓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자기연민이다.

Korean Food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회사의 같은 팀 사람들과 점심을 나가서 먹을 때가 있다.
중국 음식점도 가고, 인도 음식점도 가고, 이탈리안 음식점도 간다.
지난번에 함께 음식을 먹고 나서는 사람들이 내게 다음엔 한국 음식점을 가자고 했다.
음… 나는 한국 음식점 회사 근처에 뭐 있는지 잘 모르는데…

그래서 그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들이 먹고싶은 한국 음식이 뭐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Korean BBQ를 꼽았다. 그리고서 비빔밥, 중국 애들중 일부는 순두부찌게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한국에서 늘 먹고 자랐던 한국 음식은 딱 그런 건 아니었다. ^^
밥, 국, 반찬, 찌게가 있는 그냥 그런 음식.
그리고 밖에서 먹더라도 찌게, 탕(설렁탕, 곰탕 등등)이 많았고, 면 음식도 있었고.

사실 Korean BBQ를 ‘가장 일반적인 한국음식’이라고 이야기하긴 좀 어렵지 않나?

한국은 내가 태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일인당 국민소득이 200불 수준이었다. 나는 국민학교때 돈이 없어서 점심을 싸오지 못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랐다.
그런 한국에서 고기를 불판에 구워먹는게 제일 일반적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내가 어린시절을 보냈던 1970년대 한국은 어쩌면 단군이래로 가장 빠른 경제적 발전을 이루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니 그것보다 훨씬 더 먹을 것이 귀했던 20세기 초반이나 그 이전의 시절에 일반 백성들이 불판에 고기를 늘 구워 먹었을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나는 Korean BBQ를 전통적인 한국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을 만날때마다,
한국은 불과 60여년전에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이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래서 진짜 한국음식을 먹고 싶다면 그런 배경속에서 백성들이 먹었을 국밥이나 탕, 면 같은 것들이 차라리 더 그 사람들이 누릴 수 있었던 음식에 가까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준다.
그리고 덧붙이는 이야기는 그런데 이제는 한국이 세계에서 몇번째 안에 드는 선진국이 되었고, 한국 사람들도 고기를 불판에 구워먹는게 일상인 나라가 되었다고 해준다.

그래서, Korean BBQ는 contemporary Korean food라고. 그렇지만 대중적인 traditional Korean food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이렇게 긴 설명을 해주고 나면 사람들은 쭉 듣다가…
“그래서, 근처에 맛있는 Korean BBQ 집이 어딘데?” 라고 묻는다. ^^
괜히 긴 설명을 해줬나.

때로는 이런 긴 설명을 별로 듣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괜히 긴 설명을 해주려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2019년, 교회 (13)

글을 시작하면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쓰다보니 정말 organize되지 않은 아주 난잡한 글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렇게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생각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은데…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것들이 워낙 많아서… 그걸 좀 조리있게 풀어서 써내려가는게 아주 힘들다.

뭔가 좋은 질문들과 대화가 있다면 애매하게 풀어낸 이야기들을 clarify할 기회들이 좀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마도 이 블로그를 읽는 많은 분들의 주된 관심사가 아닌건지… 내 글이 워낙 난잡해서 딴지를 걸만한 포인트를 딱 하나 골라내는 것이 어려워서인지…
하여간 online과 offline에서 많은 feedback들을 받지는 못했다. ^^
사실 웬만하면 내가 내 블로그 읽어달라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지 않는데…
이번에는 몇사람에게는 꼭 읽고 생각을 나누어달라는 부탁까지 했음에도 별로 말씀들이 없으시다. -.-;

그래서 정리되지 않는 생각을 무리하게 더 풀어서 쓰는건 일단 오늘로 맺어보려고 한다.

나는 뭘 잘 아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긴 하다.
그래서 교회를 생각할때마다 나는 많이 흥분하고, 또 많이 아프다.
이 허접한 글을 맺는 지금도 많이 그렇다.

2019년, 교회 (12)

나는 거의 10년쯤 전에 혼자서 여러생각을 하면서 만일 내가 지금 어떤 지역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두가지를 뽑아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1. 보편교회(Universal Church)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지역교회
  2. 그 지역교회내에서 서로 지체에게 헌신한 구성원들

로 정리했었다.

우선, 보편교회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지역교회라는 말에는, 그 교회가 믿는 신학을 포함한다. 사도적 전통에 근거한 교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성경의 신적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와 보편교회를 존중하는 자세는 coherent하게 함께할수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보편교회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지역교회라는 말에는 그 교회가 가지는 어떤 특정한 신학적 바운더리에 대한 기술을 포함한다.
그와 함께 그 교회가 스스로를 위해존재하는 교회가 되지 않는 다는 것도 역시 포함한다.
소위 어그러진 형태의 개교회주의는 이런 속에서 발을 붙일 수 없다.

그리고 두번째로 서로에게 헌신한 구성원이라는 것은 그 교회가 cosumerism을 배제하는 공동체 지향적임을 의미한다.
공동체 내에서의 투명한 거룩한 헌신이 norm으로 여겨지는 교회라는 의미이다.

나는 이런 교회가 결국 살아남을 수 있는, 그리고 그 존재가 앞으로 20~30년 뒤에도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교회의 한 형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19년, 교회 (11)

지난달에 느헤미야서를 묵상하던 교회의 한 친구가
‘느헤미야를 묵상하면 뭔가 공감이 안된다. 느헤미야는 너무 완벽하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한편 동의했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그렇다면 왜? 라는 질문을 놓을 수 없었다.
이 본문은 왜 그렇게 느헤미야를 ‘넘사벽 영웅’으로 그리고 있을까?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보았지만, 내가 잠정적으로 머무르게된 생각의 지점은, 결국은 그런 헌신된 리더가 난세를 구해내는 pseudo-messianic story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아, 물론 뭐 어디 주석을 찾아보고 공부하고 그럴 여유가 있지는 않아서 혼자 한 생각이므로 그런 거 잘 아는 분들이 좀 가르쳐주셔도 좋을 것 같다.)

나 개인적으로도,
도대체 이렇게 교회가 무너져내리고 있는 시대에 도대체 어떤 break-through가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져보면…
물론 하나님께서 하셔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결국 그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식은, 그래도 어떤 사람들이 더 헌신하고, 더 힘내고, 더 희생해서 이루어지는게 아니겠나 하는 대답에 이르게 된다.

느헤미야도 그렇고, ‘말과 함께 달리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명명하신 예레미야도 그렇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거의 불합리해보이는 수준의 헌신과 희생을 당연하게 요구하시기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들의 불합리해보이는 헌신과 희생이 결국 어떤 break-through를 마들어 내게되고.

나는 지금도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힘들고 어렵고, 그래서 헌신하면 더 힘들고 더 어렵지만,
그렇기 때문에 헌신과 희생이 더 불합리하고 영양가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그것이 주어진 삶의 방식이라고 인식하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어떤 사람들이 결국은 이 시대에 break-through를 낸다는 말이다.

나는 내가 지난 한주동안 열나게 설명했던 교회는,
그렇게 break-through를 내는 교회의 한 모델이라고 생각한다.

힘들다, 어렵다, 두렵다 그러지 말고, 정말 똘기 넘치게 그렇게 용기내고 힘내는 어떤 사람들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나름대로의 절박한 마음이 그런 생각을 하게 한다.

교회로 보면 그렇게 불합리한 헌신을 하기로 결심하는 바보같은 교회들이 좀 있어야 하고,
그런 교회가 되려면 그 속에서 불합리한 헌신을 하기로 결심하는 바보같은 사람들이 좀 있어야 한다.

2019년, 교회 (10)

솔직히 말하면 이번주에 계속 쓰고 있는 이 ‘해답을 찾는 강소교회’가 내가 지금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를 생각하면서 머리속으로 많이 생각해보는 모델이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좀 해보면, 사람들에게 잘 이해되도록 내가 설명을 잘 못하는 모양이다. ^^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런 생각을 하루이틀만에 뚝딱 해낸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오랜시간 많은 생각의 타래들을 엮어서 한 것이기 때문에 쉽게 도식화해서 설명하는게 쉽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런 개념들을 이렇게 하루에 10분씩 시간들여서 쓰는 이런 허름한 블로그 글을 통해서 풀어내려니 그것도 참 만만치 않다. -.-;

그래서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도대체 저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하는 생각이 들 가능성이 많이 있는데, 그런 분들과도 좀 많은 대화를 하면 좋겠다.
내 글쓰기의 한계때문에, 제대로 잘 풀어내지 못하는 생각을 그런 대화들을 통해서 더 잘 한번 풀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있다.

그런데 그것도 만만치 않은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이런 대화를 하자고 하면 별로 반응이 없다. -.-; 그냥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아야 하는 건가 하는 좌절을 하게될때가 많이 있다. ^^

뭐 그래도 이렇게 한번 생각을 써보는 거지 뭐.

2019년, 교회 (9)

이렇게 해답을 찾는 강소교회를 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선택이 전제되어야 한다.

우선,
매우 헌신된 평신도 그룹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모든 멤버가 모두 다 엄청나게 헌신되어있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치열한 고민과 사색은 그 중에서도 소수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전체가 그런 치열한 사색과 해답찾기가 우리 교회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라는 동의가 있어야 하고, 그렇게 살아내는 사람들을 더 배워나가려는 방향으로 함께 해야한다.
당연한 것이지만 여기서 헌신된 사람들이라는건, 교회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활동보다는 세상에서 살아내는 치열함을 잃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헌신된 그룹은 어느정도 post-Christendom era의 신학에 대한 기초적인 학습이 되어있으면 좋다.
스스로 성경을 해석해내는 어느정도의 기초가 있어야 하겠고, 그 해석의 다양성과 입체성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shallow한 교조적 해석을 넘어서는 고민이 가능하다.)
그리고 가령 Christopher Wright의 ‘하나님의 선교’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던지, Anabaptist들이 갖는 반체제성(?)과 현대 자본주의와의 긴장 등에 대한 insight가 있다던지,
신자유주의 체제의 한계와 문제들에 대한 고민이 있다던지… 하는 등의 신학적,인문학적 소양이 집단적으로 형성되어 있으면 좋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런 사람들의 치열한 삶의 context를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것으로 여기고 함께 고민해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평신도들이 상황에 함몰되어버리지 않도록 계속 격려하는일이 중요하지만, 또한 상황을 너무 가볍게 여기거나 단순화시켜버리는 우를 범하지도 말아야 한다.
계속해서 고민과 나눔을 격려하고 organize하고, 신학적 insight를 제공하는 일을 해야한다.

이런 교회는 아마도 대개는 의도하지 않게 ‘문턱이 높은 교회’가 될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사색과 토론과 고민의 깊이가 깊을 가능성이 높고,
헌신의 모습이 radical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소위 seeker-friendliness는 그런 의미에서 많이 포기해야할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모델이 작동하려면, 그 공동체안의 radical한 친밀함과 투명함이 필요하다. 서로 자신의 한계를 내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서로 서로 잘못된 모습을 사랑의 마음으로 지적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가령 서로의 수입과 돈 씀씀이를 공개하는 것이 필요할수도 있고, (적어도 동의하는 소수만이라도)
어려운 상황속에서 살리기 어려운 모멘텀을 그런 친밀함을 바탕으로 한 헌신으로 돌파해내는 것이 가능해야한다.

2019년, 교회 (8)

나는 어떤 강소교회는 이렇게 해답을 찾아가는 일에 몰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많은 강소교회들이 그렇게 하면 좋겠다.
그것이야말로 그 강소교회의 존재가 후대에 유익이 되는 길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해답을 찾는 강소교회의 모습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1) 헌신된 사람들이 세상속에서 하는 여러 경험을 깊은 사색으로 담아낸다.
(이것은 매우 자주,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들을 포함할 것이다.)

(2) 그리고 그런 여러가지 경험에 바탕한 사색을 공동체로 가지고 온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함께 그 사색과 경험들을 깊게 나눈다.
그리고 토론하고, 기도하고, 공부하고 격려한다.

(3) update된 contents를 가지고 다시 세상 나가서 세상에서 여러 경험들과 시도들을 한다.

위의 (1)~(3) 과정을 반복한다.

이렇게 하면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며 해답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스토리들이 모여서 그 공동체의 스토리가 되고, 그것이 그 공동체가 가지는 복음의 contents가 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contents는, 교조적이기보다는 서술적이고 과거지향적이기보다는 미래지향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시도하며 살아낸 삶의 스토리들은 그것 자체로 하나님나라의 복음이 될 것이다.

2019년, 교회 (7)

현대의 교회가 내가 이전의 글에서 언급한 질문들(그리고 그것보다 더 광범위한 더 많은 질문들)에 대해 답이 없다면, 그 답을 어떻게 찾아갈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있어야 한다.

나는 아주 기본적으로는, 그 답을 찾는 과정을 아주 길~게 생각하고 접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이 몇년안에 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10~20년, 혹은 그것보다 더 길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접근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의 ambiguity를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ambiguity속에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일부는 치열한 신학적 사색과 연구가 있겠지만, 매우 많은 부분은 post-Christendom에 들어가버린 세상과 engage해가며 찾는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진리’이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리’는 아주 구체적인 level에서의 행동강령을 자세히 prescribe해주기보다는 아주 큰 선언을 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 선언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해낼 것인가 하는 것을 살면서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은 매우 긴 과정이 될 것이고,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할 것이다.
또 많은 trial-and-error가 있을 수도 있고, 매우 부끄러운 실패를 경험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2019년, 교회 (6)

만일 현대교회가 지금 세상을 해석해낼 수 없다면 배워야한다.
교회가 마치 있지도 않은 해답이 있는 것 같이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흔히 교회에서 설교등을 통해서 “세상에서 믿는대로 살아라” 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런 질문들을 한번 던져보자.

  • 도대체 세상이라는게 뭔가? 세상을 어느정도 긍정해야하나? 세상을 어느정도 거부해야하나? 세상을 변화시키는게 가능한가? 어떤 부분이 변화가능하고 어떤 부분은 변화를 포기해야하는가?
  • 도대체 믿는다는건 뭔가? 믿는건 예수믿고 천당가는 건가? 그게 믿음의 contents라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믿음과 무관한 것이 아닌가? 믿음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하는 신념인가, 그렇지 않으면 경계표지인가, 아니면 다른 무엇인가? 고대문서인 성경본문을 해석해내는 방식은 어떤 것이 적당한가?
  • 산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세상과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engage해야 하는가? 특히 타종교인이나 다른 전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가? 전도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하는 것인 적절한가?

언뜻 떠오르는 질문들을 ‘세상’, ‘믿음’, ‘살다’라는 세가지 keyword를 중심으로 던져 보았는데,
현대교회는 이것들에 대해 정말 해답이 없다.
해답이 없다는 것을 좀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겸손해져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