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5)

죄와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아주 큰 사명이자 특권이다.
사회적 죄와 싸울뿐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죄와도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형태로 내 안에 들어있는 왜곡된 욕망을 잘 발견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불편한 confrontation을 피하지 말아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죄와, 왜곡된 욕망과 계속해서 싸워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왜곡된 욕망의 민낮을 보는 것이 중요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왜곡된 욕망이 폐혜를 피하기 위해서 욕망 자체를 대폭 용납하고 허용하고자 하는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자아실현과 성화 중 어떤 것이 더 우선되는 개념일까?

나는 이 두가지가 거의 비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성화이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그 백성이 하나님을 닮은 백성이 되는것, 그리고 세상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이 그 부르심의 핵심이다.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지나치게 자아실현을 높은 가치로 두면서 죄와 싸우는 성화의 소중함을 잃어버리고 있다는게 내 생각이다.
(아마 다음주에는 이와 관련된 다소 controversial한 이야기를 더 던져볼 생각이다. 아마 어떤 분들은 심지어 다소 upset할 수 있을 만한 ^^)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4)

그런데 교회에서는 흔히…

종교적 언어로 사탕발림된 욕망을 긍정해준다.

돈 많이 벌고 싶다는 욕망을, 주님의 비전을 찾는다는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을때,
목사나 교회의 자도자들은 그 사람이 정말 주님의 비전을 찾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 역시, 속으로는 그래서 그 사람이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다만,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나, 기도를 해주는 사람이나 모두,
왜곡된 종교적 언어로만 소통할 뿐,
솔직한 욕망의 언어로는 소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쪽팔리니까. -.-;

이건 정말 좀 역겨운 일이다.

가장 바람직한 모델은 다음과 같다.
기도를 부탁하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욕망의 언어로 표현하되, 그 욕망을 넘어서는 거룩한 바람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령,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이것이 내게 허락되지 않더라도, 나는 그것을 잘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그리고 물론, 기도요청을 받은 사람 역시 그렇게 투명한 언어로 기도한다.
이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합니다. 혹시 그것이 이 사람을 파괴시키지 않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게 허락해주시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정도를 공급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과정 속에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점차 돈보다 하나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더 깊게 알게되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것에 대해 쉽게 정죄하지 않으면서도,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구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언어가 투명하다. 욕망을 종교적 언어로 채색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신앙의 피상성을 많이 피할 수 있다.

리차드 포스터가 이야기했던 것 처럼,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3)

그런의미에서,
이런 왜곡된 욕망의 긍정은 좀 투명해질 필요가 있다.

뽀대나는 직장에 다니고 싶은 욕망이 있을때,
그것을 내세우는 것이 뭔가 쑥쓰러워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 라던가,
비전을 주시옵소서… 기도 한다거나…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는 돈을 많이 벌고 싶다.
나는 무슨 무슨 회사에 가서 남들이 부러워하는 시선을 받고 싶다.
나는 얼굴이 예쁜 남편/아내를 맞아 결혼하고 싶다.

이렇게 솔직하게 욕망은 욕망을 제대로 설명하는 언어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마치 숭고한 목표라도 되는양 사탕발림을 하는 것은 상당히 역겹다. -.-;

그러기 위해서는,
욕망 자체를 추구하는 것을 너무 쉽게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누가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한다면,
그냥 그 사람에게 돈을 많이 벌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는 것을 자신과 주변 사람이 그대로 보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욕망 자체를 모두 긍정하라는 뜻을 결코 아니다.
요히려 여러가지 욕망들 가운데 대부분은 왜곡되고 어그러진 욕망이고, 따라서 죄의 component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해야한다.

다만,
그 욕망이 우리 모두에게 있고,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더럽고 오염된 욕망의 바다에 빠져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2)

교회에서 흔히 ‘기도제목을 나눈다’는 표현을 한다.
난 이 표현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

기도를 요청한다, 내가 기도하는 내용을 나눈다 등등으로 표현을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표현일텐데 말이다.

하여간, 각설하고…

그렇게 교회에서 ‘기도제목을 나눈’ 리스트를 쭉 보면…
결국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에 적절하지 않을 경우, 그 상황이 바뀌어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고 이룰 수 있기를 바라는 것들이다.

병이 낫기를 바란다거나,
좋은 학교에 진학을 하거나,
좋은 직장을 잡거나,
결혼을 하거나,
아이가 잘 크거나….

아, 물론,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이걸 그냥 내가 이걸 하고 싶다… 이렇게 저렴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주님을 뜻을 알기 원한다거나,
비전을 세우고 싶다거나,
인도하심을 구한다거나…

이런 대단히 종교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자신의 욕망을 포장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기독교의 본질이 그런 것일까?
내 욕망을 추구하여 이루는 것일까?
그걸 좀 적나라하게 추구하는 신앙을 오히려 기복신앙이다, 번영신학이다 해서 비난하고 비웃지 않는가.

현대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의 욕망은 대단한 것이고,
그 욕망 자체를 종교적 언어로 정당화해서 사용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설교를 통해서나 기도를 통해서, 곡조로 부르는 찬양을 통해서 모두 욕망의 추구, 욕망의 성취는 반복해서 강조되고, 조장되고, 설명된다.

욕망을 긍정하는 기독교 (1)

몇년전에 ‘욕망해도 괜찮아’ 라는 책을 읽었다.
아주 재미있었다.
재미있을 뿐 아니라, 내게 아주 깊이 공명이 있었다.
당연히 그 책은 내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김두식 교수가 그 책을 썼던 이유를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대로 정리하자면…

욕망을 규범적 자세로 억누르기만하면 그것이 왜곡되기 때문에, 그 욕망에 대해서 투명하고 정직해지자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는 완전 동의한다.

그 책에서 구체적으로 들어있는 어떤 예(anecdote)들은 내가 일부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지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 책에서 김두식 교수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을 아주 많이 공감하고, 지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욕망에 대해서 정직해지자는 것과,
그 욕망을 그대로 추구하자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그리고, 김두식 교수도 모든 욕망을 그 자체로 모두 긍정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왜 갑자기 이 책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앞으로 몇번에 걸쳐서 이 욕망과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 이야기를 써 가면서, 내 관점이 그저 딱딱하고 고루한 18세기 청교도 윤리적 관점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기 때문이다. ^^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11)

나는 하나님 나라 신학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 전체를 꿰뚫는 어쩌면 가장 확실하고도 중요한 theme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 스스로를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에 속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다.

내 말이 옳다고 해서, 저쪽의 말이 반드시 틀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신학이 매우 convincing하고 relavant하다고 해서,
십자가 신학이 그것의 subset이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지도 말고,
십자가 신학이 치우쳤다고 치부해버리지도 말고,
내 주장이 저쪽보다 우월하다고 너무 쉽게 자만하지 말고…

겸손과 사랑의 마음을 가져보자는 것이다.

내 말이 옳다고 해서, 저쪽의 말이 반드시 틀릴 필요는 없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10)

앞에서 조금 언급한 것과 다소 겹칠 수는 있겠으나…

나는 기독론이 결여된 하나님 나라 신학은 자칫 비인격적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죄를 극복해야할 현상으로 본다거나,
하나님을 의의 화신정도로 이해한다거나,
예수께서 하신 일이 통치를 선포하는 것이라는 강조에서는 기독교의 인격성이 빠지기 쉽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것,
예수께서 마지막까지도 그 사랑을 놓지 않고 고통을 감내하셨다는 것,
내 안에 있는 죄를 개인적으로 아파하고 그것과 개인적으로 싸우는 것에 대한 중요성,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헌신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으로서의 헌신…
등등이 자칫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서 결여된 것 같아 보일때가 많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의 어떤 사람들의 신앙에는,
따뜻함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9)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 나라 신학은 기본적으로 종말론에 중심을 둔 신학 전개이다.

별로 학문적으로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그리고 나는 학문적으로 깊이 고민해볼 역량이 없기도 하다 ^^) 내가 보기에…
현대 하나님 나라 신학이 꽤 많이 갖추어진 형태로 정리된 것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이전에 주로 자유주의진영과 진보진영쪽에서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그리고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사실상 종말론에 아주 방점을 두고 있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유주의 진영에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고 할때도, 예수를 Apocalyiptic prophet이나 개혁자 정도로 그리고 있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나라 신학의 무게중심은 종말론에 있다는 것이다.

반면, 십자가 신학의 무게중심은 당연히 기독론에 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이 십자가 신학을 포함하는 더 큰 개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종말론이 기독론을 포함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에 있는 어떤 사람들은,
기독론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져야하는 상황 속에서… 무리하게 종말론적 관점을 끄집어 내어 억지로 해석/적용을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 딴지 걸어보기 (8)

어린이 동화를 들려주고 그것의 교훈을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대부분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단편소설이 되면 그것보다 살짝 더 복잡해지고, 장편소설은 그것보다 더 어려워진다.

어떤 narrative를 한가지의 theme으로 설명해내는 일은, 여러가지 유익이 있다.
그러나 어떤 narrative를 한가지 theme으로 설명하면 자칫 더 복잡하고 다양한 것을 지나치게 축소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환원주의(reductionism)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

큰 narrative를 간단한 main theme으로 정리 -> main theme을 가지고 다시 큰 narrative를 해석 -> 어쩌면 main theme이 다 담아낼 수 없었던 detail 자체를 main theme으로 무리하게 억지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함.

성경을 어떤 하나의 theme으로 정리하려고 할때는 이런 환원주의적 오류를 범하지 않는지 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하나님 나라 신학 진영에서는, 십자가 신학 진영을 향해서 지나치게 환원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해왔다.
(그리고 나는 그 비판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나라 신학 진영에서, 자신의 신학적 tool을 가지고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잘 살펴볼필요가 있지는 않을까.

우리의 theme은, 너희의 theme보다 더 큰 것을 이야기하고 있고, 우리가 더 큰 개념이다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는 것은 자칫 이성적 교만함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