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기 (4)

예전에 Tim Keller가 어떤 설교에서 한 예화.

교회에서 전쟁으로 엉망이 된 어떤 나라에 정신과 의사들을 봉사단으로 보냈다고 한다.
아마 전쟁이 있었고, 그곳의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트라우마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그 사람들을 돕겠다는 의도였다.
그런데 막상 그 정신과 의사들이 갔다가 거의 대부분 그냥 돌아왔다고.
막상 갔더니, 그 사람들의 상황을 끔찍하고 비참했지만, 그 사람들에게 어떤 정신적인 문제는 없는 것으로 보였단다.

그 이유는,
그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어려움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닌데, 도저히 일어나지 말아야할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

나는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사는 매우 중요한 팁을 그곳에서 얻었다.
그것은, 망가진 것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서구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뭔가 내게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해내기 위해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한다.
어떤 사람을 고소하기도 하고, 많은 돈과 자원을 들여서 문제 해결을 추구한다.

그것이 가치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살고 있는 삶 속에서 무너져있는 어떤 것들을 그저…
그러려니… 이것이 내 삶의 일부이려니…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사는 팁이 아닐까 싶다.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기 (3)

망가진 세상을 살때 흔히 하는 일은,
그 망가진 것에 눈을 감고 회피하는 것이다.

그게 꽤 잘 먹힌다.
다만, 그렇게 눈을 감고 회피하지 못할만큼 그 망가진 것이 내게 고통으로 다가오기 전 까지는.

갑작스러운 사고,자연재해 등과 같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문제로부터,
인간관계의 문제, 심각한 질병, 경제적 문제 등과 같이 내가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닥치면 그것을 감당하기 너무 힘든 문제 등은 결국 어떻게든 나로 하여금 이 ‘깨어진 세상’을 해석하라는 압박을 가한다.
아주 무지막지한 압박이다.

그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그 문제를 감싸고 있는 전체 frame을 이해하고, 그것을 해석해내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할때도 많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면서 그 망가진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참 어렵지만 맞닥드려야하는 숙제인 듯 하다.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기 (2)

내가 어릴때 생각했던 것 같이,
‘어제보다 나은 내일’이 늘 현실이 아니라는 깨달으면서 정말 나는 마음이 어려웠다.
대충 대학을 마칠때쯤부터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름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방황’도 했었다.

한국에서 석사과정을 하는 동안,
나는 연구를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

뭐 학과 공부는 그냥 하던대로 수업듣고 시험보면 무리하지 않고 잘 할 수 있었지만,
실제 시간을 들이고 생각을 쏟아야하는 연구에는 그렇게 애를 쓰지 않았다.

실험실에 가서 열심히 ‘일’을 하긴 하는데,
정말 억지로 하는 일이었고, 의미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내가 적극적으로 생각을 하면서 연구를 하는 일들은 그렇게 잘 하지 못했다.

망가진 세상을 해석해 낼 수 없었던 나의 유치함 때문이었다.

망가진 세상 속에서 살기 (1)

나는 그래도 어릴때 별로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커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고,
그렇게 열심히 살면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노력하고 정직하고 착하게 살면 내가 사는 세상은 아름다울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부끄럽게도 나는 꽤 나이가 들때까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 꿈이 그냥 유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아마 30대가 들어서였던 것 같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세상의 아픔에 대한 지적 동의는 있었지만,
그것이 내 삶의 일부라고 인식하면서 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아니 왜 내게 이런 일이?’ 라고 이야기할만한 것들을 만나면
놀라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나는 여전히 10살짜리 어린아이의 순진하면서 유치한 생각으로부터 충분히 자라지 못한 것 같다.

이번학기 성경공부 진행중 (7)

어쨌든 지금 이 성경공부중에 나를 지탱해주는 것은, 그 성경말씀 자체인것 같다.

그래서 가능하면 성경공부를 하면서 나도 새롭게 배울 수 있는 본문을 선택해서 해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나름대로 꽤 많은 시간동안 그 본문과 씨름하고 따로 공부하고, 여러가지로 생각하면서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공부는 아직도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이다.

때로 정말 바빠서 죽을 것같이 stress 많이 받을때,
성경을 열고 그것을 숙고할때 마치 내 영혼이 갈증 속에서 냉수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때가 있다.

참 놀랍게도,
본문의 역사적 맥락, 여러가지 신학적 관점의 비교, 원어 문법을 보면서 따져보는 것 같은 딱딱하고 dry한 작업을 통해서 도달하는 본문에는 매우 자주 생명수가 자리하고 있다는 경험을 하곤한다.

어떤형태로든 그래서 나도 성경공부를 내 힘이 닿는 한 계속 해보려고 하고 있다.

이번학기 성경공부 진행중 (6)

다른 사람들도 그렇겠지만 나도 하나님을 더 알고 싶은 깊은 목마름이 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를하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것이 해소될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목마름은 점점 더 깊어진다.

교회 내에서 그 목마름을 해결해보려는 노력을 많이 했지만,
늘 교회내에서 쉽지 않았다.

목회자들을 비롯한 교회의 다른 리더들이 그 목마름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교회생활에서 무엇인가가 채워지기 보다 교회에서는 그저 내가 뭔가를 하는 functional unit을 존재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곤 했다.

그냥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교회에서 제대로 하지 못한채,
그냥 그때그때 교회 목회자나 다른 리더들이 내게 요구하는 것을 하면서 교회생활을 할때가 많았다.
그러니 교회생활은 늘 나를 지치게하는 것이었고 나도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온라인 성경공부를 해보겠다는 생각이 결국은 그런 내 상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던 것 같다.

지금 그래서 이 온라인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것이 채워지고 있는가?
교회생활 속에서 뺑뺑이 도는것보다는 조금 더 낫긴 하지만, 그 목마름이 채워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지금 온라인 성경공부 역시,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면 그것에 맞추어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하는 형태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온라인 성경공부가 의미없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여러가지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이번학기 성경공부 진행중 (5)

온라인으로 성경공부를 시작한 것은 covid-19때문에 사람들이 다 집에 있어야했던 상황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냥 한 3~4명이라도 모이면 그 사람들하고 쿵짝쿵짝 성경 본문을 살짝 깊게 보면서 함께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몇가지점에서 내가 처음 계획했던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우선,
사람들이 많아졌다. 내가 매학기 성경공부를 한다고 광고를 하는 메일링 리스트가 있는데 그 숫자가 계속 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광고를 하면 그중 꽤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참석한다.
제일 많이 했을때는 3 그룹을 했었고, 거의 30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석했었다.
이번 학기에는 조직신학 그룹에 11명, 빌립보서 그룹에 7명이 참석하고 있다.

그리고 두번째는,
원래는 매니아들의 작은 그룹을 해보려고 했으나,
오히려 깊은 성경공부에 익숙하지 않지만 조금 더 성경을 공부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주로 참여하는 그룹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뭔가를 계속 ‘가르쳐주는’ 것이 많은 그룹이 되었다.
이건 사실 내게 꽤 부담이다. 아니 내가 뭐 얼마나 가르쳐줄 수 있다고… ㅠㅠ

그럼에도 어쨌든 형식은 계속해서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공부한 내용들을 미리 올리고 그걸 바탕으로 함께 나누는 방식을 하고 있고, 그건 어떻게든 유지해볼 생각이다.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형태로.

그리고, 세번째는…
이건 내가 정말 예상하지 못한 것인데,
순전히 이 성경공부에 관심이 있어서 나와 기존에 다른 접점이 없는데 참석하는 분들이 조금씩 있다.
성경공부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아는 사람들을 초대해서 들어오기도 하고,
하다못해 이 블로그를 통해서 들어온 사람도 있다.
그중 어떤 분들은 현재 있는 상황 속에서 Christian fellowship을 나눌 여건이 전혀 되지 못해서, 이렇게 하고 있는 온라인 성경공부가 그나마 유일한 Christian fellowship인 경우도 꽤 있는 것 같다.

온라인 성경공부의 특성 상, 개인의 이야기를 하기가 쉽지 않고, 친밀함을 가지기도 쉽지 않아서..
어쨌든 현재 성경공부는 개인적인 나눔 그런거 별로 안하고, 그야말로 ‘공부’에 초점을 맞추어서 하고 있는데…

어떻게든 개인적인 나눔, fellowship의 need를 소화할수 있도록 해야하나 하는 고민을 많이 해보고 있다.

이번학기 성경공부 진행중 (4)

재작년과 작년에 걸쳐서 접하면서 공부한 John Barclay는 내가 가지고 있던 바울에 대한 시각을 꽤 많이 바꿨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바꿨다기 보다는 더 많이 develop 시켰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전에 생각하지 않던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바울서신을 읽는 내 접근도 새로워진 것들이 당연히 있다.

가령,
빌립보서를 읽는데 영향을 준 가장 큰 것은,
바울이 얼마나 반제국적이었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당연히 바울이 친제국적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전에 생각했던것 만큼 바울의 사상의 중심이 반제국이 들어가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해 고민을 더 해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빌립보는 little Rome이라고 불릴만큼 제국의 가치에 충실한 도시였고,
그 문화속에 있는 교인들에게 쓴 빌립보서는 과연 바울이, 그리고 빌립보서가 얼마나 반제국적이었느냐 하는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된다.

그리고 바울을 반제국적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일종의 신학적 정치적 agenda가,
나로 하여금 바울을 반제국적으로 보고싶어했던 것인가 하는 반성도 더 많이 해보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빌립보서의 ‘언어’는 바울이 최소한 비제국적이었다고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번학기 성경공부 진행중 (3)

조직신학 책을 다시 읽으면서는,
아… 내가 이렇게까지 모르는 것이 많았구나 하는 것을 새롭게 보고 있는 중이다.
아니, 나야 뭐 비전문가이니 당연히 모르는게 많을 수 밖에 없겠지만,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98년인가 99년정도쯤 되었던 것 같다.
그 당시 2nd edition을 사서 읽었는데, 참 쉽고 재미있게 읽기도 했고,팍팍 이해가 잘되어서 좋다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읽으니, 그때 이해가 잘 되고 넘어갔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에 턱턱 걸린다.
아니…나는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래서 그렇게 궁금한 것이 나올때마다 다른 자료들 찾아가며 내 궁금점들을 채워나가다보니, 우아… 시간이 너무 오래 결려서 그렇게 할수는 없겠다 싶다.

오히려 이번에는 후다닥 읽으면서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을 살짝 더 들여다보되,
정말 궁금해서 못견디겠다 싶은 것들 중심으로 더 파보는 방식으로 해보려고 하고 있다.

무식해서 용감했구나.
나는 잘 몰라서 안다고 생각했구나.

이번학기 성경공부 진행중 (2)

이번에는 금요일 저녁에는 조직신학 책을 함께 읽으면서 조직신학 공부를 함께 하는 그룹을 하고 있고
토요일 저녁에는 빌립보서 본문을 보면서 빌립보서를 함께 보는 그룹을 하고 있다.

조직신학은 Alister McGrath의 Christian Theology를 함께 읽고 있다.

원래 이렇게 했던 것은,
내가 예전에 Alister McGrath 책을 중심으로 몇주 강의를 했던 자료가 있기도 했고,
빌립보서 본문도 3년전에 나름 열심히 공부하면서 성경공부를 그룹을 했던 적이 있어서…
준비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Audience가 바뀌면 그것에 맞추어서 수준이나 내용도 바뀌어야 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훠얼씬~ 많은 시간을 이 두 class 준비하는데 보내고 있다.

Aliter Mcgrath의 책이 6판으로 가면서 순서와 내용이 꽤 많은 변화가 있기도 했고,
내가 몇년전에 이 내용을 정리해서 강의했던것으로부터 나도 생각이 많이 develop되어서 그걸 어떻게든 담으려하다보니 준비하는데 꽤 많은 시간이 들고 있다.

빌립보서 본문 역시,
불과 3년전에 했던 공부인데도 그 사이 내 생각이 많은 development가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3년전에 생각했던 바울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바울 사이에도 꽤 큰 차이가 있고,
그래서 이 바울서신을 읽는 시간과 자세가 달라지다보니 빌립보서 역시 매우 새롭게 읽히고 있다.
그러니 예전에 했던 자료들 봐가며 후루룩 쉽게 준비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
한참 시간 부족하고 빡빡한데…
준비하는데 드는 시간은 다른 학기에 비해서 더 들고 있는 중.

예측실패때문에 고생을 좀 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