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에 반대하는 기독교 (6)

권력은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수단이다.
그것이 기독교인들의 신앙이다.
권력은 그 자체가 추앙의 대상이 아니고, 그 권력 자체를 추구하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
권력은 수단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권력을 이해할때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수단이라고 철저히 한정시켜야한다.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이것은 권력을 향해서 노력하는 정치집단, 사회문화 집단의 이해와 분명히 충돌한다.

정당의 목적은 결국 권력을 잡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정당의 목적이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잡아서 자신들이 원하는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펴는 것이어야하는데, 사실을 그렇지 않다. 정당은 권력을 잡는 것 자체에 거의 모든 관심이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보는 기독교인들은,
어떤 정치집단이나 어떤 세력이 권력을 잡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한다. 철저히 그렇다.
그 세력이 권력을 잡아서 선하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통치를 간접적으로 하는 것을 비전으로 삼아야 한다.
그 세력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는 다른 문제다.
기독교인이 다수로 이루어진 어떤 세력이 권력을 잡을때 그 것이 대단히 반기독교적이거나 폭력적 파괴적인 일들이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다.

기득권에 반대하는 기독교 (5)

물론 이런 것은 구체적인 상황등에 따라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어떤 시기와 장소에서는 여전히 사회문화적으로 어떤 특정 이슈에 대해서 보수적인 것이 기득권을 점하고 있어서 그것을 깨는 것이 중요한 경우도 있고,
정치경제적으로 liberal이 지나친 힘을 너무 오래 가지는 일도 있을 수 있으니,
모든 경우에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이건 선택 가능한 모든 옵션간에 어느 하나도 매우 뚜렷한 도덕적 우위가 없다는것을 전제하고 있다.

가령, 한쪽이 사람을 집단으로 학살한 정치 집단이라던가, 아니면 내란을 일으킨 집단이라면…
웬만해서는 그쪽을 선택해서 지지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 되기는 어렵다.

그리고 여기서 명심해야할것은,
권력 (그것이 어떤 형태의 권력이든간에)을 가진 사람들이나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선의를 너무 쉽지 믿지 말아야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떤 특정 정치세력의 수장을 마치 메시아인것 같이 생각하고 추앙하는 어떤 기독교인들의 모습에 대해 깊은 걱정을 하고 있다.

기득권에 반대하는 기독교 (4)

현재,
비전문가이자 통찰이 부족한 내가 보기에는,
정치-경제분야에서는 소위 ‘보수’가,
사화-문화-교육 분야에서는 소위 ‘liberal’ 혹은 ‘progressive’가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진보가 이루어진 것이다.
불과 몇십년전만 하더라도 정치-경제-사회-문화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보수’가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나는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쨌든 지난 몇십년이 지나면서,
한국 사회에서는 (그리고 미국 사회도 얼추 비슷한 경향이라고 보는데)
정치-경제분야에서 힘을 가진 ‘보수’와
사회-문화-교육 분야에서 힘을 가진 ‘liberal’이 각각의 영역을 확보하고 싸우고 있어 보인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일반적으로는,
정치-경제분야에서는 기득권인 보수에게,
사회-문화-교육 분야에서는 기득권인 liberal에게 저항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일반적으로 적절한 포지션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내 자신은 대충 그런 어정쩡한 입장을 가져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편이다.

기득권에 반대하는 기독교 (3)

그렇게 어떤 형태로든 모든 권력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성향과,
권력은 결국 대단한 중독성과 흡입력이 있어서 권력에 취한 사람들이 멈출수 없이 권력을 추구하게 된다는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을 아주 잘 드러내는 것이 Lord of the Rings (반지의 제왕)이다.
나는 책으로는 읽지 않고 영화로만 봤는데,
도대체 거기 나오는 등장 인물들이 왜 그렇게 그 반지만 보면 다들 그렇게 눈이 돌아가는가 하는 것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사람들의 권력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그런데… 사실 그건 현실 정치/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뭔가 한번 권력을 잡고자하는 강한 욕망들, 그리고 그것에 중독되듯 빨려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들…

말하자면 권력은, 그리고 그 권력을 탐하는 인간은,
정상적으로는 그 권력을 탐닉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그 권력을 탐하여 그것을 차지한 집단이나 사람은,
그것을 깨어버리는 다른 세력이 나와야만 비로소 권력을 놓게된다는 것.

나는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민주주의가 그나마 참 잘 짜여진 제도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권력을 잃고 ‘적대적 세력’에게 그 권력을 넘겨주는 일들을 반복하게 짜여져 있으니 말이다.

기득권에 반대하는 기독교 (2)

80년대 한국에서 대학교를 다닌 내게 한국의 ‘보수’는 깨질 것 같지 않은 강력한 권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젊은 패기와 혈기로 나는 늘 그 ‘보수’에 대한 강한 비판적 시각을 가지고 살았고 그것은 젊은 패기와 혈기를 잃어버린 후에도 계속 되었다.

그런데,
결국 세상의 모든 권력에 저항하는 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라는 어제의 글에 근거해서 생각해 볼때,
(그리고 그런 나의 생각은 자크 엘룰에게서 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것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는,
적어도 정치-경제적으로는 여전히 그것이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도 같은 결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어쨌든 현대 사회에서 경제적 권력은 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정치적 보수는 일반적으로 그 경제적 권력을 ‘보수’하려는 세력과 함께 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내가 투표를 하면서 어떤 특정 정치세력에게는 단 한번도 표를 준 적이 없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쉽게 그 정치세력이 어디인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80년대 후반 기독교인이 된 내게 그런 정치적 선택은 늘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사는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생각해왔던것 같다.

기득권에 반대하는 기독교 (1)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왕이심을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온 세상의 왕이 되고자하는 다른 왕들을 거부하고 배격하는 것은 당연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그 어떤 형태의 권력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정치적 권력, 사회적 권력, 문화적 권력, 경제적 권력 등등.

그런의미에서 기독교는 아주 많은 경우 다수가 아닌 소수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강한 목소리보다는 약한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기존의 기득권에 대항해서 떠오르는 새로운 권력에 관심을 갖는 것이 많은 경우 옳은 선택일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소수의 목소리나 약한 목소리나 새로운 권력이 늘 옳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온 세상을 지배하려고하는 권력을 제어하는 방법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기독교가 어떤 특정 정치집단이나 사상에 결합해 있는 모습은 매우 건강하지 못하고 배격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정사와 권세와 공중의 권세잡은 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그저 영적인 표헌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존재하는 다양한 형태의 권력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예수 이름으로 다시 생긴 병 (10)

지금 약간 새롭게 앓고 있는
예수 이름으로 다시 생긴 병….
이걸 어떻게 다루어내어야 하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단기적으로, 중장기적으로 어떻게 이것을 풀어야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내 선후배, 친구들중 내게 조언을 해줄 수 있는 분들이 있으면 환영!

그렇지만,
이것도 또한 내 삶의 여정의 일부이고, 이 경험을 통해서 내가 다시 어떤 지점에 다다르게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속 씨름하면서 지내볼 생각이다.

다만,
시간과 체력이 부족해서 그걸 잘 할 수 있을지 약간 좀 고민이 되긴 하지만,
어떻게든 잘 manage해가면서 내게 주어진 숙제들을 풀어보려고 하고 있다.

30년전 예수 이름으로 생긴 병에 걸려 10년간 앓고나서 나름 해답을 찾았다면,
지금 이 상황에선 10년까지 그렇게 오래걸리지말고 어떻게든 길을 잘 찾아내보고 싶다.

예수 이름으로 다시 생긴 병 (9)

그래도 다행인것은,
내가 20년전에 나름 고통 속에서 세워놓은 내 나름대로의 원칙 – 성실함과 integriry는 계속해서 나를 지켜주고 있다.

어떻게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 나의 유익뿐 아니라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살려고 참 많이 애쓰고 있다. 쉽지는 않지만.

그러니 지금은…
아주 열심히 성실하게는 살지만 그 성실함의 이유를 놓쳐버린 상황이라고나 할까.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걸까.
이것이 나와 이웃과 세상에 무슨 도움이 될까.
그런 고민을 참 많이 하고 있다.

예수 이름으로 다시 생긴 병 (8)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중요한 key는 ‘생각’이다.
이걸 약간 종교적인 언어로 묵상이라고 써볼수도 있겠지만
그냥 ‘생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은 것 같다.

삶에서 경험하고,
성경을 읽으며 공부하고,
성경을 묵상하고,
책을 읽으며 해석의 방법들을 배우고,
그렇게 하면서 삶을 해석해가는 작업을 반복해가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세상 속에서 내 믿음이 과연 어떤 형태로든 차이를 만들어 내는가라는 질문에 턱 막혀있는 나는,
요즘 그 생각을 펼치면서 지내지 못하고 있다.
내 생각의 흐름이 몇달, 혹은 몇년 째 턱 막혀있다고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요즘 나는 너무 바쁘다.
아침 6부터 밤 10시까지 일하는 경우도 많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도 하지 못한채 computer 앞에 앉아서 일을 하다보면 아예 회사 office로 갈 시간 조차 부족해서 그냥 그 자리에서 아침부터 붙어앉아 밤까지 일하게 될때도 많이 있다.

그러다보니 따로 읽고, 공부하고, 생각을 곱씹고, 고민해보고, 상상해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리듬이 깨어진것 같기도 하다.

예수 이름으로 다시 생긴 병 (7)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내게 그 병이 다시 돌아왔다.

요즘은
일하는 것이 정말 큰 의미가 없게 느껴지곤 한다.

왜 이 병이 돌아왔을까?

이제 나는 naiive한 이상을 가질만큼 젊지 않다. 경험도 그래도 좀 있고, 회사와 사회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약간은 나름대로의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세상은…
크게 두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우선 지금 세상은 과거의 어느때보다도 풍요롭고 정의롭고 자유롭다. – 아… 지금이 매우 괜찮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연히 지금 정치도 문제가 많고, 사회에 부정도 만연하고, 억울한 사람들이 참 많다.
그렇지만 불과 몇십년전, 100년전, 200년전과 비교해보더라도 세상은 참 많이 좋아졌다.
나는 몇십년전, 100년전, 200년전의 사회체제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의 발전된 모습은 참으로 놀랍다.
그런데 이렇게 발전된 세상을 더 좋게 바꾸어가는 일에 내가 믿고있는 신앙이 기여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어보인다. 그리고 조금 더 좁게 보면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나와 내 주변의 삶을 더 좋은 모습으로 만들어내는데 거의 영향이 없어보인다.

그리고 두번째는, 이 세상의 부조리함과 정의롭지 못함과 깨어짐이 너무나도 공고해보인다.
심하게, 심각하게 망가져 있는 모습들이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지 정말 막막해 보인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이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되어 있다.

그러니….
도대체 내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나 하는 회의가 계속 들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