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 묵상 – 은혜

Tim Keller 설교중 매우 깊게 내게 남은 이야기.
(detail은 조금 틀릴 수도 있겠다)

비기독교인인 어떤 사람이 Tim Keller에게 기독교가 불편한 이유 한가지를 이야기했는데,
그것은 기독교가 ‘은혜’의 종교라는 것이었다.

신과 일종의 ‘거래’가 가능한 것이라면,
내가 헌신한 만큼 신에게서 복이 오는 관계라면,
내가 그 신에게 어디까지 헌신해야하는가 하는 기준이 그려지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는 신이 일방적으로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는 종교이다보니,
일단 그 신과의 관계를 맺고나면 그 신 역시, 자신에게 무한정 요구할 수 있게될 것 같다는 말.

다시 말하면, 신으로부터의 은혜가 무한정이니,
자신의 헌신도 무한정이어야 한다고.
그래서 기독교가 불편하다고.

John Barclay의 Paul and the Gift의 내용을 이렇게 현실에서 잘 설명한 예가 있을까싶다.

나는 내가 복음에 조금 눈을 뜨게 되었을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은혜’라는 개념이었다.
나름 공부도 열심히 하고, 부모님과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였던 내게,
그런 패러다임과는 다른 패러다임이 있다는 것은 정말 충격이었다.

그 은혜는 여전히 내게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충격적인 은혜는 내 삶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고, 지금도 흔들고 있다.

은혜는 정말 비가역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고난주간 묵상 – 시험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신 이후에 시험 받으신 이야기를 읽으며,
나도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이겨야겠다고 결심했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조금 더 공부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시험을 이기신 것은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시는 선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예수님때문에 이제 나 같은 사람도,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것.

십자가의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에게 승리를 주셨다.

고난주간 묵상 – 구속 (Redemption)

Penal substitution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도 한동안은 penal substitution 없이 십자가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고,
penal substitution 없는 믿음을 나름 거의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내가 돌아올 수 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나를 사셨다는 것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내가 20대에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penal substitution을 이해하고 있긴 하지만,
예수님의 희생이 내게 새 생명을 주셨고, 죄로부터의 자유를 주셨다는 것은 어떻게 해도 내가 피할 수 없는 어쩌면 내 믿음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살면서 내 죄에 대해 조금 더 민감하게 사는 시기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시기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도 궁극적으로 이걸 해결 할 방법이 없다는 것은 정말 너무나도 명백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내게는,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이외에 내 망할놈의 삶을 회생시킬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다.
그렇게 나를 사셨다. 핏값을 주고.

이것이 얼마나 불편하든 간에,
이것을 피할수는 없다.

고난주간 묵상 – 헤세드

하나님의 사랑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삶을 전혀 다른 차원에 가져다준다.
작년, 나는 나 자신에대한 신뢰를 잃고 힘들어했다.
내가 살아가면서 뭐 하나 제대로 한 것이 있을까 하는 회의가 몰려왔고,
부족한 내 모습에 깊은 절망을 경험했다.

어쨌든 살아보려고 나는 성경을 열었고,
반복해서 익숙한 본문들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또 익숙한 기도를 하고 하고 또 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것.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냐 하는 것과 관계 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

나는 내 감정의 기복에 따라서,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깊게 실망하거나 낙심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어디 가시지 않는다는 것.

그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의 궁극적 표현은 결국 십자가다.

고난주간 묵상 – 새 창조

내가 처음 복음에 제대로 눈을 떴을때,
그 큰 스토리는 내가 쉽게 감당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사셨다/구속하셨다는 이야기는 한편 대단히 감격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의 초대이기도 했다.
그것에 대한 기대도 있었고, 신비로움을 느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두렵다고 표현할만한 감정도 있었다.

내가 새롭게 태어났고, 이제 내가 살아가는 삶은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라는 것이 내겐 큰 흥분의 기쁨이었다.

나는 정말 새로운 사람이다!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그로부터 3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지났고,
여전히 내게 그 새로운 삶에 대한 것은 기대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예전과 같이 그저 막연한 기대는 아니다.
이제는 했더니 잘 안되더라…는 일종의 경험도 쌓였고,
무엇이 근거 없는 낙관이고 무엇이 실제로 도움이 되는 소망인가 하는 것을 구별하는 지혜도 약간 더 생겼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새로운 창조의 새 세상을 열어주셨다는 것만큼 흥분되는 소망이 또 있을까.

50대 후반의 나 같은 사람에게도 말이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

응답받지 못한 기도는 없다고 배웠다.
No 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응답이라고.

그런데,
그건 아닌것 같다.
어떤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 것이다.
요청하고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것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왜 그러시는지는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는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하는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응답받지 못한 기도 끝에 울고 있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할 수 있는건…
사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그와 함께 우는 것 외에는.

말은 참 값싸다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게가 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 친구의 아픔 등은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다.

글도, 말도, 심지어는 나 같은 별것 없는 사람의 기도도,
그냥 다 너무 값싸다.

그러니 말이나 글로 무어라 표현하지 않고,
그저 나도 침묵하며 기도한다.

그냥 우는 사람과 함께 멀리서 울기로 한다.

보고싶은 드라마

나는 TV 드라마, netflix 드라마 등을 거의 보지 않는다.
주로 내가 TV 드라마를 보는건 비행기를 탈때다. 열몇시간 좁은 공간을 견디기 위해 시리즈 드라마를 보기도 한다. 요즘은 항공사에서도 드라마 시리즈의 꽤 많은 것을 올려놓기도 한다.

그중, 언젠가 한번은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없기도하고… 또 그걸 보려면 돈을 내고 봐야해서 보지 못한 드라마 시리즈가 있다.

The Newsroom이라는 드라마이다.

다음의 장면은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장면인듯 하다.

이걸 보고는 이 드라마를 정말 보고싶다고 생각한지…. 한 10년 되었다. ^^
그러니 생각만 하고 보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 지난주에 다음의 clip을 또 보게 되었다.

이 장면을 보고서는,
진짜 언젠가 한번은 이 드라마 시리즈를 보고 싶어졌다!
정말 멋지다.

어머니의 손편지

내가 15살에 처음으로 집을 떠나 기숙사에 살게 되었을때 어머니는 내게 거의 매주 손으로 편지를 써서 주셨다.

어린 아들이 떨어져 사는 것이 걱정이 되셨을 수도 있을 거고, 다른 환경 속에서 힘들어 할까봐 격려하고 싶으실수도 있었겠다 싶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사실 그 편지 내용이 모두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옛날 ‘편지지’라고 불리는 종이에 볼펜으로 써서 주신 그 글씨는 기억하고 있다.

그 편지들을 좀 잘 모아두었더라면 좋았으련만, 지금은 그 편지들을 내가 어떻게 했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어머니에게 손편지를 써본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나는 내 딸에게 손편지를 써준적이 있었던가?

왜 갑자기 어머니의 편지가 기억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아래의 그림과 같은 편지지가 갑자기 생각이 났고, 그렇게 어머니의 편지들이 생각이 났다.

사랑은 그 모든 detail이 비워지더라도 중요한것은 남게되는 신비를 가진 것 같다.

어떤 성공의 눈물은 아름답지 않다

1.
한 연예인이 엄청 뜨고 싶었는데, 그렇게 되지 못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좋은 기회가 생겨서 연예인으로서는 늦은 나이에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고, 많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그 인터뷰를 할때 당연히 성공하지 못했던 어린시절 그 과정을 어떻게 견디어었느냐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고, 그럴때마다 그 연예인은 울먹거리며 그때부터 계속 꿈을 잃지 않았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청중들은 박수를 쳤고, 그 연예인은 꿈을 잃지 않고 꾸준히 노력해서 꿈을 이룬 사람으로 각종 기사에 나오게 되었다.


2.
이런류의 이야기들은 여기저기에서 꽤 많이 본다.
그런데,
사실 그런 이야기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어린 시절을 꿈을 계속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 그 뜨게된 연예인이 흘리는 성공의 눈물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절망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꿈을 잃지 말고 노력해서 성공한 사람들의 눈물은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3.
생각해보면 사람을 성숙시키는 눈물은 성공의 눈물이 아니다.
그것은 좌절과 절망 속에서 두려움에 흘렸던 눈물이다.

나는…
신앙인들이 그런 눈물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하면 좋겠다.

이 사순절에 조금 더 곱씹어서 해볼만한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