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fair burden

일을 하다보면, 아니 그냥 살다보면…
중요한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물론 나 일수도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이고, 충분히 이해할만 한 것이라고 생각이 되는데도,
그럴 이해시키는 것이 정말 어렵게 느껴질때가 있다.

그런데…
그렇게 뭔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과 함께 살려면,
어쨌든 그 사람에게 그 중요한 것을 이해시켜야 함께 뭔가를 해 나갈 수 있다.

그럴때,
그것을 이해시키는 부담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래서 그 중요한 내용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것이 중요한 것이니 꼭 들어봐야한다는 것을 설득하는 것조차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는 경우가 정말 많다.

복음도 마찬가지다.
복음을 알지도 못하고 있고 관심도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중요하고 좋다는 것을 설득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건… 사실 공평하지 않다.

공평하지 않은 burden을 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China risk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 China risk는 실재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중에,
우리가 만드는 제품을 계약생산해줄 회사를 찾고 있는데,
중국에 있는 회사를 선택하는데는 사람들이 주저한다.

단순히 그 최종 조립회사가 중국에 있는 것을 꺼려할 뿐 아니라,
부품을 중국에서 받는것도 조심스러워할때가 많이 있다.

그 이유는,
우선 미국과 중국의 관계때문에 어떤 핵심 부품들을 중국으로 보내는 것이 매우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있고,
또 중국에서 오는 물건들이 때로는 미국의 세관에 붙잡혀서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고,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이유로 갑자기 중국정부가 무슨 정책을 바꿔서 하고 있던 것이 바뀔 수 있다는 우려등이 섞여 있다.

이 분야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도,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많은 회사들이 중국에 supply chain이 있는 것을 꽤 우려하곤 한다.

미중의 de-coupling이 정말 제대로 이루어진다고 까지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정말 본격적인 de-risking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확실하다.

도대체 해결책은…

지난주 꽤 큰 ‘trade show’라고 해야할까, exhibition이라고 해야할까…
그런걸 다녀왔다.

그러니까, 넓은 장소에서 의료기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 장비, 각종 서비스 회사들이 다 모여서 자신의 회사를 홍보하고, 나 같은 사람은 가서 함께 일할 수 있는 회사들을 찾아보는 그런 이벤트였다.

이런데에 가면 몇가지 특징이 있다.

일단 90%의 사람들은 백인 아저씨들이다.
대개는 약간 과체중이거나 비만이고, 나이는 대충 50대정도가 많다.
그런 사람들이 주로 이런 trade show같은데에 계속 돌아다니면서 세일즈를 하는 사람들인건데…
주로 출장을 다니면서 과식을 하곤 하고, 운동할 시간이 부족하기도 할 수 있으니 대개 그렇게 과체중 혹은 비만이 되는 것이겠지.

나는 백인은 아니지만,
50대에 과체중인 아저씨로서, 대충 그 demography에 맞아들어가는 사람인 셈이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곳의 booth에 ‘매력적인’ 금발의 젊은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서서 홍보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런 곳에는 사람들이 모이기도 한다.

물론 그런 사람을 고용할 정도로 큰 회사의 booth이니 사람들이 모이는 것일수도 있겠고,
아니면 그냥 그 매력적인 여성을 보려는 50대 아저씨들이 그렇게 모이는 것일수도 있겠으나…

아니면 그렇게 짧은 치마를 입은 그 여성이 의외로 그 분야의 전문가여서 그곳에서 여러가지 필요한 대화를 나누는 담당자일수도 있겠고…

그냥 나는 50대 아저씨들이 바글바글한 그런 세팅에서,
젊은 여성이 짧은 치마를 입고 그렇게 서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그런 상황이 영 편하지는 않았다.

이런 것을 보고,
그런 옷차림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 도덕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비난하거나,
그런 옷차림의 여성에 끌려서 모여드는 50대 아저씨들이 추하다고 비난할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그렇게 하는 것이 50대 아저씨들의 관심을 끄는데 어느정도 성공을 하는 것을 보면,
무슨 도덕적으로 무엇을 비난하는 것이 뭔가를 이해하거나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냥 나는 혼자 마음이 불편…

사순절

‘공식적’으로 사순절이 이번주 수요일 (Ash Wednesday)부터 시작이다.
그런데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서는 사순절 묵상 프로그램을 버얼~써 시작했다.

나는 그걸 깜빡 잊고 있다가 오늘에야 부랴부랴…

https://www.bible.com/reading-plans/43544-lent-the-path-of-surrender

그런데,
금년 교회의 사순절 묵상의 주된 theme이 surrender 라는게 참 좋다.
내게 정말 부족한 것이기 때문.

기꺼이 내가 붙들고 있는 것을 주님께 내려놓는 것.

내가 주로하던 말씀묵상 스타일과는 많이 다르긴 하지만,
이번 사순절 기간중 더 열심히 한번 해볼 생각이다.

직장동료 R

이번주, 직장에서 함께 일하던 R이라는 친구가 회사에서 짤렸다.
음… 이게 layoff (구조조정?)이 아니고, 그 사람만 딱 찍어서 회사가 나가라고 해서 나갔다.
그러니 이건 fire(해고)인 것이다.

이 친구는 참 사람이 좋았다.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사람들을 소중히 대할 줄 알고.
그런데 문제는…
일을 너무 못하기도 하고, 열심히 안하는 거다.
너무 일을 안하고 못해서, 내가 한마디 하면, 엉뚱한 일을 열심히 했다.
결국 이 친구가 해야했던 많은 일들은 내가 꾸역꾸역하면서 해왔고, 어떤 것은 아예 구멍이 나기도 했다.

내가 이 친구의 직접 manager가 아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 친구가 어떻게든 좀 여기서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서 노력을 좀 하긴 했었다.
그런데, 결국 이 친구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의지도 없었던 것 같다.

이 친구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중 유일한 크리스천이었다.
이 친구가 해고 통보를 받은 후, 나는 이 친구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내가 layoff를 당했을때의 이야기, 그때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셨던가 하는 이야기, 그런 시기에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도움이 되었던가 하는 이야기 등.

그렇게 그 친구와 마지막으로 헤어지고는,
계속 나는 마음이 불편하고 어렵다.

음…
이 친구 이대로라면 다른 직장 가도 또 안될텐데…
제발 좀 돈을 덜 받더라도 일 대충해도되는 직장에 가야할텐데….
아니면 훨씬 더 단순한 일을 하는 쪽으로 커리어를 바꾸던가…
그런데 그래도 그나마 top tier 회사의 맛을 살짝 봤으니 그건 또 잘 안될테고, 능력은 잘 안되고..

이 친구가 또 연락한다고 했으니, 그때는 회사 밖에서 만나서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볼 수 있으면 좋겠다.

Confidence

내가 어릴때, 전혀 예상하지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는데,
어쩌다보니 지금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고자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 있고,
여러가지 세팅에서 말씀을 나누며 살고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기술’이 조금 더 늘어서,
어떻게 사람들의 감정선을 더 자극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더 알게 되었고,
때로는 그렇게 해서 감정을 manipulate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그런 manipulation은 결국은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 이상의 확신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표현되기 싶고, 그러다보면 결국 내가 하고 있는 이야기의 integrity가 심각하게 손상되고 만다.

가령,
나는 지난 거의 10~15년동안,
‘Lordship’애 대한 강조를 많이 해 왔다.

그런데 문득…
나는 과연 그 Lordship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진지한 성찰을 해보게 되었다.

Lordship이라는게 결국은 꽤 ‘강한’ 이야기가 나오기 쉬운 주제이고,
그러다보면 내 믿음의 한계를 벗어난 이야기를 마치 내가 믿고 있는 이야기인양 하게되는 우를 범할수도 있다.

어릴때 호기롭게 주를 위해 내 삶은 바치겠다고 이야기했던 어설픈 믿음의 외침은,
지금 보면 빈 구멍이 엄~청 많은 것이었고,
여태껏 그 어설픈 호기로움에 내가 사로잡혀 있다면 나는 여전히 미숙한 것이다.

미숙을 벗어나 성숙해가는 것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내겐 더 필요한 듯.

한 사람

어제 정말 완전 우연히,
10년전? 아니 그보다 더 전인가? 함께 성경공부를 했던 사람을 만났다.
내가 조금 빨리 걸어가고 있었는데, 뒤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오고 있는 것은 느꼈는지 그 사람이 뒤를 돌아보았고, 우리는 둘 다 어~ 하면서 깜짝 놀랐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

나는 정말 반가웠다.
그래서 그냥 아무데나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 30여분? 어떻게 살았는지 그냥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가 둘 다 잘 알고 있는 ㅎ 목사님께 마침 내게 카톡이 왔고, 그래서 ㅎ 목사님께 전화를 드리고는 졸지에 전화통화도 같이 했다.

여태껏 내가 여러가지 형태로 성경공부를 하면서 함께 했던 사람들이 몇명이나 될까…
뭐 그래도 수백명은 되지 않을까.
그중 그 그룹은 그래도 내가 짧지만 꽤 열심히 노력 했던 그룹이었고, 어제 만난 N형제도 당연히 가끔 생각도 나고, 그 온가족을 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하면서…
아, 여전히 예수님 잘 믿으려고 고민하면서 살고 있구나…
참 반갑고 좋았다.

N 형제는 잘 살고 있구나.

성경통독

새해 들어서 또 하나 적극적으로 하기 시작한 것은 성경 통독이다.
토요일에 대충 신약성경 책 하나 정도,
주일에 대충 구약성경 책 하나 정도 그렇게 읽고 있다.

주중에 성경을 읽는 시간을 잘 내지 못해서, 주말을 이용해서 그렇게 하고 있는데…
아 이게 꽤 여러가지로 도움이 된다.

가령 레위기 같은 책을 앉은 자리에서 그렇게 쭈루룩 읽어본건 정말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꽤 빠른 속도로 성경을 쭉쭉 읽어가니,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이 훨씬 더 한꺼번에 들어와서 참 좋다.

적어도 여태껏 내 경험에 따르면,
성경통독을 좀 열심히 하는 시즌에는 대개…
내 기도에 그 성경의 구절들이 자꾸 묻어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곤 했다.
그래서 통독이 기도에 도움이 될때가 많이 있음을 경험 했었는데…
(그럴땐 대개 하루에 5 장남짓 정도 읽곤 했었다.)

이번엔 하루에 읽는 양을 좀 많이 늘이고 나니,
그렇게 내 기도에 성경의 언어들이 막 들어가게되지는 않는데,
대신 성경에서 이야하고자하는 흐름이 조금 더 마음에 담겨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영적인 영역보다는 지적인 영역에 더 도움을 주는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이렇게 좀 더 부지런히 성경을 쭉쭉 읽어보려고 한다.
그냥… 내가 좀 살아야 겠기에…

2024년 말씀 묵상

2024년 아침 말씀묵상을 조금 바꾸었다.
작년까지는 한국의 매일성경본문을 따라서 했는데, 금년에는 미국 성서유니온의 Encouter with God의 본문 순서를 따라하고 있다.
어차피 나는 그 책들을 사서 보지도 않고, 그 해설들을 읽지도 않으니 그냥 매일 정해진 본문만 체그해서 볼 수만 있으면 되는 건데..

막상 해보니 살짝 다른 점들이 있었다.
우선 Encounter with God의 본문이 매일성경보다 조금더 짧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복음서 같은 본문은 더 짧게 끊어서 배정되어 있었고, 레위기 같은건 길게 길게 나누어져 있었다.
이게 꽤 도움이 되었다.

내가 아침 말씀묵상을 할때 가장 어려운점은 본문을 자꾸만 분석적으로 읽으려한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말씀묵상 시간에 많은 에너지를 쓰면서 길어지게 되고 내 삶을 곱씹어보는 시간을 거의 갖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Encounter with God의 신약본문은 더 짧아서 분석적으로 본문을 볼 여지가 훨씬 줄어들게 되었고, 결국 더 직관적이면서 개인적으로 본문을 묵상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반면 레위기 같은건 짧은 본문을 봐서 별로 다가오는게 없을 수 밖에 없는데,
그런 경우 한장 혹은 두장씩 길게 길게 읽으며 그 의미를 생각해보는 방식이 되어 내겐 더 좋았다.

주일에는 시편 한편씩 보도록 되어있는 것도 좋은 것 같고.

덕분에 새해에 조금 더 ‘묵상’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다시 시작… for now

한달+ 동안 블로그 쉬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나 개인적인 마음가짐에도 변화가 있었고. 나를 둘러싼 환경과 상황에도.

내가 처음 블로그를 하려고 했을때,
김교신 선생의 ‘공개일기’가 내 모델이었다.

내가 감히 김교신 선생 같은 분과 비교할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리고 내 글이 그분의 공개일기의 수준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지만,
그렇게 공개일기를 쓰면서 그분의 생각을 정리하고, 한편 그 생각을 나누었던 것을 좀 따라해보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공개일기를 썼던 그 상황과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매우 다르기도 하고,
김교신 선생과 내가 많이 다르기도 하기 때문에,
김교신 선생의 공개일기를 벤치마킹하겠다는 것이 좀 적절하지 않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조금씩 발견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어줍잖은 글을 쓰는 것이 어쨌든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계속 해 왔고,
앞으로도 상황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해보고 싶다.

지난 연말 잘 쉬고,
한달동안 정말 내 망가진 것을 다시 보수해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반성도 많이 했고.

μετάνοια
깊게 회개했다. 반성했다. 그리고 꽤 많이 돌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