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에 흐르는 저주

한때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는 이야기가 교회에서 많이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조상의 죄나 행동이 대를 이어서 불행한 영향력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고 그것과 결별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내용 전반에 당연히 동의하지 않는다.
가계에 흐르는 어떤 ‘영적인’ 저주가 있다고 당연히 믿지 않고,
그것에 대해 예수의 이름으로 무슨 선포를 한다고 그게 단절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건 기독교 믿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주술적 믿음인것 같다.

그러나,
어떤 가정이든 그 가정이 가지는 한계와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어떤 가정은 지나치게 성공과 출세를 중요하게 생각해왔을 수 있다.
늘 자기의 몇대할아버지가 높은 벼슬을 지냈고, 누가 어디 장관을 했고, 어떤 사람이 대기업 사장을 했다는 식의 내러티브가 넘쳐나고, 각 개인도 그렇게 출세를 해서 가문을 영광스럽게 해야한다는 데까지 이야기가 나아가기도 한다.

또 어떤 가정은 지나치게 돈에 집착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돈을 버는 것에 대한 가르침에 집중하고, 사람을 판단하는 가치기준이 그 사람이 얼마나 돈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고, 돈을 벌기위해 다른 integrity를 희생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가정의 분위기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자라온 가정 환경은, 그래도 비교적 건강한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는 그것에 대해 내 부모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연히 어떤 가정도 완벽하지 않고, 내가 자라온 환경 속에서도 그런 한계가 있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내 가정 환경에서는 그것이 ‘공부 잘하는 것’이었다.
내 부모님이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 하셨고,
우리 삼남매가 다 그래도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었고,
결국 그렇게 공부하는 것으로 내 두 동생은 먹고 살고 있다. 나도 공부를 꽤 열심히 오래 많이 했던 편이고.

공부를 잘하는 것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그것이 다른 모든 가치를 희생시킬만한 것은 아니고,
게다가 모든 사람을 그 사람이 얼마나 공부를 잘했느냐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마 나도 우리 아이를 키우면서 그렇게 공부 잘하는 것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하지 않았나 싶고, 돌이켜보면 우리 민우에게 많이 미안하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가르쳐주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우리 민우가 더 나이가 들면서는 점점 나의 그런 그늘에서부터 자유로워지게되길 바란다.

사람에게 실망할때

나도 사실 별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다른 사람들이 조금 더 예수님을 잘 알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도록 도와주려고 하는 편이다.

그러다보면 참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내가 가장 깊게 좌절하는 순간은,
그 사람에게서 더 예수님을 알고자하는 바람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때이다.
그건 정말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없다.

그러기위해서 격려하거나 자극하는 이야기를 해보기도 하고,
뭔가 감정적으로 동요하도록 만들어 보기도 하지만,
그건 그 사람의 근본적인 desire를 바꾸지 못한다.
그저 잠깐 반짝 그런 자극에 반응할 뿐이다.

사람들을 격려하고, 감정적으로 돌보고, 자극하는 일을 하면서 내가 느끼는 가장 큰 자괴감은,
이것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절망감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믿음의 성장에는 stage가 있기 마련이고,
또 삶의 경험이나 정황에 따라서 특별한 배려나 안정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렇지만, 진심으로 예수님을 더 알고, 하나님 백성의 풍성함을 더 알고자하는 마음 자체가 결여되어 있으면, 정말 잠깐 인간적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으쌰으쌰하면 잠깐 반짝하다가 그 자극이 없어지면 흐지부지 무너지고 만다.

정말 수도 없이 그런 실망을 경험해왔고, 수도 없이 그런 실망을 지금도 경험하곤 한다.

이제는 익숙해질만도 한데…. 그러려니 할만도 한데….
아직 기대와 소망을 버리긴 쉽지 않은 듯 하다.

아마 이 기대와 소망을 내가 놓아 버리면,
소위 ‘성경교사’로서의 내 노력도 그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때가 진짜 은퇴가 되겠군.

Albert

회사 팀에 Albert라는 사람이 있다. (가명)
우리 회사는 지금 태국에 있는 어떤 회사를 CM(Contract Manufacturer)로 계약해서 일하고 있다.
그러니 뭔가 중요한 것을 만들때에는 늘 태국에 많은 사람들이 가서 있곤 한다.

Albert는 비교적 젊다. (아마도 30대 초반) 그리고 single이고.
또 Albert는 여행을 몹시 좋아한다.

그러다보니 이 사람은 보통 한번 태국에 가면 2-3달씩 계속 그곳에서 지낸다.
그러면서 주말에는 근처 다른 나라를 여행도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보니 태국을 중심으로 주로 많은 아시아 나라들을 주말에 다니는데, 그 리스트가 아주 화려하다.

태국, 베트남을 비롯해서, 한,중,일, 말레이지아, 싱가폴, 대만, 등등 많은 나라의 여러 도시를 주말마다 여행을 한다.

계속 출장중인 셈이니,
세끼를 모두 회사돈으로 먹고 있고 (게다가 꽤 좋은 음식들을)
잠은 호텔에서 자고, (보통은 꽤 좋은 호텔에서)
주말에는 자유롭게 여러 나라 여행을 하면서 다니고 있으니
어떤 사람들은 Albert를 꽤 부러워하기도 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매우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누군가가 계속 현장에 있고, 필요한 것들을 현장에서 하고 있으니…
나도 수시로 Albert에게 네가 거기있어서 참 좋다는 이야기를 해주곤 한다.

한국에서 보면….
어디 한달살기 뭐 그런것들 하는 것 같던데…
그런 사람들에게는 Albert의 삶이 환상적으로 느껴지겠지.

나 같으면 얼마 있다가는 좀 힘들것 같다. 심지어는 내가 젊고 결혼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렇게 사는건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그 친구는 아주 즐겁게 그렇게 살고 있다.

생일

고등학교때부터 기숙사에 살았기 때문에 나는 15살부터 생일을 약간 띄엄띄엄 보내는 때가 많았다.
남자애들끼리 사는데 살갑게 생일 챙기고 그런거 별로 없었다.

나는 내 생일을 대단하게 보낸적이 별로 없기도 했고,
솔직히 말하면 그거 시끄럽게 떠벌리는걸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다.
(어릴때 집에 아이들 초대해서 함께 짜장면 먹었던 기억은 있다)

나는 가능하면 다른 사람이 내 생일이 언제인지 잘 모르도록 하면서 살고 있다.
별로 마음에도 없는 축하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생일에 선물을 하는 사람은 아내와 딸이다.
나는 그것도 괜히 돈쓰고 시간쓰는게 싫어서,
생일 얼마전에는 내가 원하는 일상용품을 사달라고 아예 이야기를 한다.
금년에는 운동할때 쓰는 모자와 수염 trimmer를 사달라고 했다. 대충 10~20불정도.

어릴때부터 미역국을 많이 먹고 자라서인지 나는 미역국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늘 집에 미역국이 있었고, 미역국이 생일에 먹는 건지도 꽤 어른이 되어서까지 잘 몰랐다.
그러니 생일에 미역국 먹고 어쩌고 하는 것도 나는 별로다.

나는 누구든 내게 그렇게 생일에 번잡스럽게 하는게 그냥 불편하다.

그런데…
그러다보니 아내와 딸도 딱 그렇게 한다.
케익이라도 사려고 하면 그거 하지 말자고 하고, 선물 같은거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
생일에 그냥 간단하게 집에서 불고기 구워서 먹고 작은 조각 케익 하나 나누어 먹는 정도 하곤 한다.
그건 좀 내 마음에 잘 차지 않는다. 그래도 그것보다는 살짝 좀 번잡스럽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하는데…

내 생일 즈음이 되면 제일 먼저 생일 축하를 하는 것들은, 주로 쇼핑몰이다. 생일을 기념해서 5불짜리 할일 쿠폰 같은걸 보내온다.그 정도는 그래도 괜찮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내 생일은 축하하는 날이라기 보다는,
내가 감사하는 날이라는 생각을 더 많이 하게 된다.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에 대한 감사,
나와 함께 자라준 형제 자매에 대한 감사,
나의 선생님들, 친구들에 대한 감사,
내가 여태껏 만나온 많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내게 주어진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한 감사.

말하자면 ‘count your blessing’하는 날이 아닌가 싶다.

(참고로 오늘 내 생이라던가 그런거 아님 ㅋㅋ 그냥 생일에 대한 짧은 글을 쓴 것 일뿐)

건강

나는 소위 체력이 좋은 편이었다.
20대에는 하루에 2~3시간씩 자면서 일주일동안 시험공부를 했던 때도 많이 있었고,
시험기간이 끝난 후 하루 푹 자면 피로가 다 없어졌다.

50대에 들어서기 까지 하루 5시간정도 자는 것이 내 일반적인 패턴이었고,
잠은 늘 푹 잘 잤다.

천식이 있다는 것 말고는 크게 건강에 문제도 많이 없었다. 감기에 잘 걸리는 편이긴 했지만 다른 큰 병은 걸린적이 없었고.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그게 영 그렇지 않다.

하루에 6~7시간씩은 자야 하고, 잠을 잘 이루지 못해서 많이 관리를 해야한다. 나는 내가 잠 자는 것에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예전에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살이 쉽게 찌고, 찐 살이 잘 빠지지 않는다. 출장이라도 한 주 다녀오면 살이 확~ 찌는데 그걸 관리하는게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중성지방이 높아졌고, 그거 관리하기위해 또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작년에는 갑상선에 작은 혹(?)이 발견되어서 걱정을 했지만 조직검사를 하고는 암은 아니라는 판정을 받았다.

열심히 운동해보려고 노력하는데 조금만 무리하면 관절등에 통증이 생겨서 무리하지 않게 운동을 해야 한다.

또 최근에는 목이 자꾸만 쉬어서 병원에 가서 이비인후과 내시경을 해 보았더니 reflux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이상 젊지 않은 내 육체와 잘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고 있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그렇게 배워나가는 것이 아마 점점 더 많이 질 듯 하다.

나는 천수를 누리면서 오래 오래 살고 싶은 바람은 없다.
그리고 어쨌든 나도 나이가 들면서 여기저기 아픈 곳들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잘 다루며 배워나가는 과정이 계속 될 것이고.

노화가 점점 진행되는 내 몸과 친구가 되는 지혜가 내게서 함께 자라나길 바랄 뿐이다.

죄사함의 십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에 대한 여러가지 생각들을 보통 ‘atonement theory’ (속죄이론)이라고 한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여러가지가 당연히 있지만,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무엇보다도 죄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죄가 용서받는다는 것이 너무 어느 기독교 서클에서 저렴하게 사용되는 바람에,
십자가와 죄 용서를 연결시키는 것을 마치 구시대적인 것 처럼 여기는 일들을 보곤 한다.

그런데,
그것은 인간에 대한 잘못된 신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정말 인간 안에 있는 뿌리 깊은 죄의 문제가, 나와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는데,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일인가 하는 것에 대한 적절한 강조와 가르침이 참 그립다.

자유의 핵심은 그래서 결국 죄사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쟁과 평화주의

전쟁 소식이 정말 끔찍하다.

이 침략/공격을 시작한 쪽이나, 그걸 당하고 있는 쪽이나…
모두 그 지도자 그룹을 존경할 수 없는 사람들이니,
어느 한쪽이 선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계속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나는 기독교 평화주의자는 아니다.
평화주의(pacifism)를 이야기하는 분들을 존경하기도 하고, 평화주의쪽 신학자 중 내가 많이 좋아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평화주의는 일종의 경직된 도그마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므로 경직된 도그마는 발전할수록 인간의 고집과 주장으로 발전하게 되고,
하나님 없는 세상을 가정하여 논리가 전개된다.
어떤 평화주의자들에게서 그런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런 정당성 없는 전쟁은 어떻게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평화주의는 어쩌면,
이런 absurd한 전쟁에 대한 반발로 그 주장을 더 강하게 발전해온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이런 뉴스를 접하면서는,
나도 평화주의자인척 하게 되곤 한다.

미사일 폭격이 계속되는 그 속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을 어린아이들의 표정을 생각해보면,
폭격으로 죽은 가족을 보며 울고 있을 어머니의 눈물을 생각해보면,
삶의 터전을 다 잃고 망연자실해 있을 가족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전쟁은 끔찍하다. 정말 끔찍하다.

은퇴 (8)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의 ‘부르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어떻게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을까?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이야기하는것 처럼, 나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부르셨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할만한 무엇이 없다.
그저 내게 던져진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살고 있을 뿐이다.
20대에는 내 부르심이 무엇이라고 거창하게 이야기했지만, 지금은 내게 그런건 별로 없어 보인다.
그냥 최선을 다 해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하나님과 이웃들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그리고 여러 상황 속에서 많이 사색하고, 그 사색과 내 말씀 연구/묵상을 연결시켜 내 나름대로 발견하고 깨닫는 복음을 매일 재 발견하고, 기회가 될때 그것을 나누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

이 은퇴에 대한 글을 쓰는 동안, 지난 2월 말은 로마서 8장을 묵상했다.
그 속에서 이런 부르심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번 정리도 하고 내 생각과 마음을 다시 추스려볼 수 있었다.

아마 나는…
내 삶을 즐기기 위해 은퇴를 선택할것 같지는 않다.
그럴만큼 내가 충분히 돈이 많은 것도 물론 아니지만.

아마 은퇴를 한다면 그 속에서 또 다시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그냥 그렇게 내게 던져질 것 같다.

내가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능동적으로 내가 살아기기 보다는,
그저 그렇게 내게 던져져서 나는 피동적으로 그 속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은퇴 (7)

나는 젊을때 힘들게 일해서 돈을 모으고,
은퇴한 이후 그냥 모아둔 돈을 쓰면서 지내는 삶의 모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은퇴하고 그동안 못했던 것을 하자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은퇴를 한 이후 얼마동안 더 살 수 있을까?
아주 길면 30년까지도 될 수 있지만,
짧으면 은퇴 이후 몇년, 그냥 평균적으로 생각하면 한 10여년 더 살게되지 않을까 싶다.

10년여년 정도라면, 그건 정말 금방이다.
적어도 내가 보낸 최근의 10여년을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다.

그러니 은퇴를 엄청나게 기대하거나 은퇴를 대단히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은퇴 이후에 겸손하게 내 한계를 인정하고, 여전히 더 깊어지면서, 사랑과 지혜가 쌓여가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살짝 은퇴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은퇴 (6)

그런데,
나는 사실 직장을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참 배우는 것이 많다.

사람들과 부대끼고 갈등하면서,
때로는 화도 나고, 때로는 두렵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들을 미워하기도 하는…
이런 다양한 일들을 통해서,
나는 나와 세상에 대해 참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러면서 많이 생각하고, 반성하고, 그 생각을 더 정리하고, 발전시키기도 한다.
그 속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여러가지 책들을 읽으며 생각을 더 깊게 만들어 나기기도 한다.

그런데,
은퇴를 하면 그런 일들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고…
그러면 아마 내 사색의 깊이도 얕아지고,
내 생각의 폭도 좁아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다.

독서를 통해서 내 좁은 삶의 경험들이 일부 상쇄될 수 있을까? 그럴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니,
아마도 은퇴를 하면,
점점 내 생각의 무뎌지고, 그래서 몇년 후에는 성경을 다른 이들에게 가르친다거나,
강의를 한다거나 하는 일들도 무뎌지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해본다.

아마 은퇴 이후 최대 5~10년 정도 어느 정도의 sharpness가 유지되려나….

어쩌면 그 이후에는 조금 더 새로운 발견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과 경험한 것들을 바탕으로 더 깊게 들어가야 할 것 같긴 한데,

내가 그렇게 더 깊게 들어갈만한 충분한 자료와 자원들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일까 사는 생각을 해보면… probably not.

어느정도까지 가능할지, 어느정도까지 내게 허락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해서라도 조금 더 힘을 내서 직장을 다니며 경험과 만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