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탈근본주의 여정 (4-1)

더가까이 형님께서 지난 11일(화요일)자 글에 아주 좋은 comment와 토론거리를 던져주셔서,
거기에 답글을 다는 것 보다 여기서 아예 썰을 풀어보는게 낫겠다 싶어.. 여기 씁니다. ^^

더가까이 형님의 멋진 지적들 감사합니다.
제가 모든 것을 다 커버할 수 있는 깜냥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제가 말씀하신 것들에 대해 제 나름대로 답을 할 수 있는 것을 해보겠습니다.
좀 길어질 것 같은디… 쩝.. ^^

우선, 저… 뭘 별로 그렇게 중요한 사람도, 영향력이 많은 사람도 아닙니다요. ^^
더가까이 형님은 늘 제 실체보다 절 더 잘봐주시는 경향이 있으셔서… 쩝…  많이 민망합니다…

1. 우선 역사 비평이 계몽주의에 근거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우선 역사비평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이유로서, 그 근본이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반감을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음도 인정합니다. 저도 사실 그렇게 많이 공감하고요. ^^

그런데요… 가령… 예를 들어… 현재의 민주주의는 계몽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걸 다 거부하지는 않지요.  현대의 민주주의가 완벽한 체제는 아니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제일 잘 작동하는 비교적 공정한 체제라고 여겨지고 있고요.

우리가… 계몽주의 자체를 이성을 깨우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여길 수 있지는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의 많은 결과물 역시 하나님의 선물이고요.

아, 물론 그 결과물을 잘못 사용해서 삼천포로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
문제는 그것을 효과적으로 혹은 제대로 잘 사용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지요.

깨어진 세상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은, 세상이 깨어져 있기 때문에 늘 어두운 그늘이 있을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그 하나님의 선물을 늘 나쁜 쪽으로 활용하고 싶어하는 유혹도 받고요. 그렇다고 그 선물 자체를 버리는 것은 자칫 우리를 코너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봅니다.

계몽주의적이라고 해서 모두 반대하는 식의 접근은, 자칫 반지성주의적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사실 근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에 대해 반대하면서 반지성주의적이 되어버리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고요.

2. 역사비평의 열매가 건강하지 않다는 비판에 대해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일견 동의하면서, 한편 약간 생각을 달리합니다.

자유주의자들이 범했던 것은, 역사비평이건 문서비평이건 간에 그런 하나님의 선물 자체를 절대화 해서 하나님을 버려버리는 실수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역사비평을 사용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역사비평이라는 tool을 사용하면서 인간이성을 절대화하고 초월성을 무시/포기했던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동네 깡패들중에, 도루코 면도날로 친구들을 협박하며 돈을 뜯는 놈들이 있다고 합시다.
그 친구들은 그 도루코 면도날의 힘을 믿고 폭력으로 친구들을 지배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깡패들이 쓰는 도루코 면도날이 문제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면도날을 쓰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문제지요.

말씀하신, 자유주의의 폐혜는, 인간 이성을 절대화 한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지, 역사비평을 사용한 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3. 현재의 상황에 대해

20세기 초반이라면…
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등장했기 때문에, 그것과 싸워야할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참 열심히 잘 싸웠죠. 그러는 과정에서 그렇게 싸웠던 사람들은 스스로 근본주의라는 괴물이 되어버렸다고 봅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실상 자유주의라는 신학체제는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지금 복음주의에 있어 최대의 적(enemy)은 자유주의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속화, 혼합주의 뭐 그런 것들이겠죠.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리가 싸워야할 적이 자유주의라고 생각하고 그 agenda에 묶여 있으면, 더 이상 앞으로 가면서 이 시대을 복음으로 읽고 대안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마치… 레닌-스탈린식 공산주의가 여전히 우리 자유주의/민주주의의 최대 적이라고 여기고 계속 공산주의자 색출에 모든 힘을 쏟는 것과 같이…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는 거죠.

자유주의와 싸우느라 잠시 유보해두었던 고민을 다시 끄집어 내어서 rigorous하게 다루어야할 때가… overdue가 아닐까 싶습니다. ^^ 그것이 지금 특히 한국과 미국 복음주의의 위기를 가지고 오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고요.

이게 잘못설명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라… 이렇게 이야기하는게 적절하게 잘 된 설명인지 모르겠습니다. 쩝.

4. 역사비평의 필요성에 대해서

우리가 성경을 성경 그대로 받아들인다, 성경 그대로 읽는다 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이 마치 꽤 순수한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 말은.. 성경을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해하겠다는 arrogant한 선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성경에서 그렇게 쓰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려면, 내가 가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의 옷이 아닌… 그 당시 그 문서가 쓰여졌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배경의 옷을 입는 일이 매우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예이지만요,

사실 70-80년대 부흥사들은 요한계시록의 붉은용을 소련, 공산주의, 핵폭탄 뭐 그런식으로 막 해석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 요한계시록이 쓰였을 당시의 독자들이 붉은 용이라는 말을 읽었을때 어떻게 이해했을까 하는 것에 대한 고민 전혀 없이… 그저 내가 가진 세계관과 문화로 읽어내면 된다는… 뭐랄까… 일종의 오만에서 비롯된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글에서 예로 든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것도요…
에베소서의 같은 단락이라고 볼 수 있는 곳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한 후에,
조금 후에 바로 상전과 종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이 글을 보고, 그대로 읽으면, 상전과 종의 노예제도/계급제도를 바울이 지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남편이 리더이고 아내가 follower라는 가부장적 체제를 지지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흔히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계급제/노예제는 거부하면서, 남편과 아내의 불평등한 관계는 그냥 받아들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게… 일관되지 못하다고 보고 있고, 역사비평적으로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에 생긴 삐걱거림이 아닐까… 뭐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 에베소서가 쓰여졌을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의 맥락에서 그 본문을 읽어야 하고,
여기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가부장적 체제나 노예제를 옹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깨어진 관계, 잘못된 문화 속에서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살아내는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거지요.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세계관 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제한된 사람이고, 그 세계관의 틀을 통하지 않고는 현실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해석하지 않고 그냥 믿는다,.. 고 하는 것은 그냥 내 세계관에 성경의 본문을 맞추겠다… 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오히려, 차라리 정직하게… 내가 가진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까내어 드러내고,(그러기 위해서는 내 세계관에 대한 정직한 분석과 비판이 있어야 하겠죠.) 이런 세계관, 이런 방법, 이런 tool을 사용해서 보니까 본문이 이렇게 보인다… 적어도 이것이 내가 볼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다는 거죠.

역사비평은 그런 과정을 많이 도와주는 것 같습니다.

아.. 그런데 이렇게 쓰면… 성경이 마치 학문적으로만 접근해야하는 그런 문서인 것 같이 생각될 수 있는데요,
그렇게 주장하는건 물론 아닙니다. ^^
저는 렉티오 디비나 뭐 그런거 좋아합니다. ㅎㅎ
마음에 말씀이 다가올때까지 조용히 한 문장을 곱씹는거 뭐 그런거 참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pneuma)으로 지어진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문서가 가지는 초월성이 있음을 믿고요.

다만 초월성에만 의존하여 반지성주의로가는 것이 건강하지 않다고 볼 뿐입니다.

5. 귀납적과 연역적인 성경읽기에 대해서.

저는 연역적 성경읽기가 필요하다는 데 깊이 공감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성경읽는 것을 매우 즐깁니다. ^^

그렇지만, 연역적으로 성경을 읽어내려면…  초기 가정, 초기 명제, 그 연역적인 것의 근거가 되는 가치 뭐 그런게 잘 잡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 초기명제는 귀납적인 연구 방법을 통해서 얻어내야 하는 것이고요.
말하자면, 연역적인 성경읽기를 제대로 하려면, 귀납적인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귀납적 성경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인 연역법을 적용하는 극단적인 예가 cult들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뭐 너무 극단적인 예지만요.

사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거부했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이 이해하고 있던 연역적 전제에 충실한 연역적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귀납적 성경읽기를 제대로 못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

그런데… 아쉬운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연역적으로 신앙을 접근하긴 하는데, 그 초기 명제, 초기 전제가 어디서 나왔는지 물어보면 대답을 못하기도 하고… 또 그 초기명제를 잘못 가지고 있을때도 많다는 겁니다. 쩝… 뭐 저도 그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사실 자신이 없지만요. -.-;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것일 수 있는데요,

연역적 성경읽기를 잘 못 할 경우 빠질 수 있는 오류는 ‘환원주의(reductionism)’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했더니 아는 한 분이, 신앙은 결국 환원주의 적인거라고 항변하더군요. -.-;

그건 전 참 위험한 생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이 그렇게 이야기하시니… 더 이상 대화를 계속할 수 없어 그냥 거기서 멈춘적이 있었지요. 그냥 많이 안타까워 하면서…

뭐 하여간, 저는 연역적인 성경읽기와 귀납적인 성경읽기가 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무엇 하나도 버릴 수 없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6. Tony Campolo, John Stott에 대한 언급에 대해

저는 어떤 누구도 인간인 이상 완벽한 신학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 가진 어떤 신학적 입장을 건강하게 비판하며 받아들이는 것과 그것을 완전히 내치는 것과는 매우 다른 자세라고 봅니다.

저는 CCC나 YFC에서 Tony Campolo를 이단이라고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참 많이 가슴이 아픕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로 Campolo를 이단이라고 이야기했는지는 조목조목 봐야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뭐 Campolo를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입장을 못들어본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는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youtube에선가… 꽤 유명한 미국의 어느 목사님이 Tony Campolo의 설교를 한 센텐스씩 끊어가며 이건 이게 잘못이고 저건 저게 잘못이고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다소…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 논거가 매우 빈약했기 때문이죠.

한 20년쯤 전에… 합동측 교회의 어떤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통합측은 이단이다고 선언(!!) 하시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때 물론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만… -.-; 생각해보면 참 많이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아 물론 이단이 없다는건 아닙니다. ㅋㅋ 통일교, 정명석, 뭐 이런 사람들 다 이단이죠. ㅎㅎ 아주 죄질이 나쁜.

제가 Tony Campolo나 John Stott, 또 D.A Carton 같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이유는, 그 사람들의 신학이 완벽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이런 사람들이라면 넓은 의미에서 복음주의권에 있다고 함께 포용할 수 있겠다고 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더가까이 형님처럼, John Stott의 어떤 견해에는 좀 껄쩍지근~ 한 마음이 있고요, 특히 Don Carson에 대해선 개인적으로 상당히 비판적입니다. ^^ ( 제가 많이 힘들어하는 신학적 입장을 가진 신학자/목회자들이 사실 참 많은데요…)

그렇지만, 저는 그들과 저를 모두 함께 ‘복음주의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짤라버려야하는 이단이나 적(enemy)가 아니라 함께 가야할 동지(fellow)로 보는 것입니다.

좀 다른 각도의 예 이지만, 저같은 반고지론자가, 고지론자 원조 목사님을 존경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런겁니다.

가끔 당황스러운 것은,
저는 이들을 동지로 여기는데… 이들이 저를 적으로 여기는 것 같은 상황을 만날때 입니다.

뭐 물론 저는 그렇게 비중있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므로.. 적당히 제 입장이나 관점을 잘 무마해가며 잠수를 타거나 가면을 써버리면 되죠. ^^ 그렇지만 마음이 아픈건 사실입니다.

근본주의가 범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내가 다른 신학적 입장과 무엇을 공유하고 있느냐를 거의 무시한채, 무엇이 다르냐를 부각시켜 동지를 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에 권위를 두고 성경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핵심적인 가치이지만,
어떤 특정한 성경 해석에 권위를 두고, 그 성경 해석 자체를 신격화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심지어는 폭력적이기 까지 하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근본주의자들은 이런 형태의 폭력성을 가지고 있고요…

7. 마지막으로,

이 시리즈의 글을 쓰면서,

제가 왜 근본주의자가 아닌지, 근본주의로부터 어떻게 벗어나고 있는지 하는 것을 쓰기 때문에,
부득불, 근본주의자들과 저와의 차이점을 많이 부각해서 쓰긴 했습니다만,
저는 자유주의자들보다는 근본주의자들에 훨씬 더 가깝습니다. ㅋㅋ
상당히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복음주의자입니다.

그것은 제가 지난달에 쓴 ‘내 신학노선’ 시리즈의 글에 보면 잘 나와 있습니다.

오죽해야 아땅님은… 이거 보면 뭐 다른 보수주의자들과 다를거 하나 없는데 왜 맨날 스스로를 그들과 다르다고 얘기하느냐고 질문을 했을 정도니까요.

원래는 오늘 이 시리즈의 마지막 글을 쓰고 끝맺으려 했는데…
더가까이 형님께서 좋은 comment로 저를 콕콕 찔러주셔서…
제 생각을 좀 더 정리해서 풀어보았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좋은 comment 있으면 언제든 주십시오. 반론도 좋고, 딴지도 좋고요, 공감이나 추임새도 좋고요. ㅎㅎ
저도 많은 분들의 생각으로부터 배우고 싶고, 그것을 정리하면서 저도 많이 생각할 기회를 얻어서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7 thoughts on “나의 탈근본주의 여정 (4-1)”

  1. 뭐도뭐도 잘 모르는 학생이 하나님의 실재과 믿음의 본질과 이성의 역할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청년과 마가복음을 같이 공부하는데 어찌하면 좋을까용? 김모 모강욱 형제이 이 심오한 질문을 위에서 다 풀어주시고 내려보내셨어야지욧 ㅎㅎ 말씀이 필요하다는 마음이 너무 귀한데 저는 커버할 역량이 안되고요 쩝. 애프터서비스로 한 번 출장 나오셔야죠?? 🙂

    1. 아, 선재네랑 연결이 되셨군요. ㅎㅎ
      크크 세상이 참 좁다니까요.
      제가 강욱형제에게 샌디애고 한번 간다간다 한게 벌써… 몇년이 되어버렸네요. 쩝. 그 친구 참 괜찮은 친구입니다!!

  2. 긴 시간 들여 정성스레 답해줘서 무척 고마와요. (엄~~청 쫄아 있었는데 노약자라 두들겨 패진 않네요 ㅋㅋ Thank you. I really appreciate it.)

    여정(4) 읽으면서 TV에서 위험한 circus보는 느낌이 좀 들었어요. 그래서 자막 넣고 싶어졌죠 “어린이 여러분들은 이런거 따라하면 위험할 수 있어요” ㅎㅎ

    전에 한참 연예인들 줄자살할 때 어떤 신학교수 한분이 뉴조에 “자살하면 지옥간다고 성경 어디에 써있냐?”는 글을 쓰셨더라구요. 지옥 갈지 안갈지는 모르겠지만, 그 분 생각에 유가족의 가슴에 대못박지 말자는 의도에 쓰신 것 같지만, 매일 자살의 유혹에 휘말리는 수많은 현대의 크리스찬들에게 그 여파가 어떻게 미칠지 생각하셨다면 그런 글 쉽게 쓰시지 못하셨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요.

    하여튼 내가 목수의 졸개님 많이 좋아하는 것 알죠? ^_^ 유모씨와도 의견과 색채는 많이 다르지만 지난 27년간 별 문제 없었어요. ㅎㅎ (응?? 자주 안만나서 그런건가??)

    1. 에이, 제가 형님 마음 당연히 알죠.
      그래서 말하자면 짜고치는 고스톱같이… 뭐랄까…. 그렇게 제공해주신 것을 기회삼아 좀더 제 생각을 풀어보았습니다. ㅎㅎ
      말하자면… 뭐랄까 tone도 약간 좀 mild하게 바꾸고 해서 말이죠. ㅋㅋ
      감사합니다.

  3. 날 잡아서 잘 읽었습니다. ^^ 목졸님의 생각은 대부분 아는바라 새로울 것은 없고, 목졸님이나 더가까이님이나 서로를 배려하면서 대화를 전개해 나가시는 “마음”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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