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3)

정치가 종교가 되어버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은 양극단화 (polarization)이다.
양 정치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자신의 정치집단을 지지하면서 반대 정치집단을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것을 부축이는 것이 더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대화하고 타협해서 함께 일을 만들어나가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는,
더 대립하고, 더 선동하고, 더 혐오하는 것을 부축인다. 그리고 그들은 더 그렇게 행동하고 말한다.

그것으로 인해 정치는 더 양극화가 되고,
양쪽 정치집단을 종교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은 더 열성적인 종교인이 되어버린다.

계속되는 이런 positive feedback을 멈출 장치가 없을때,
정치의 종교화와 정치의 양극단화는 함께 매우 빠른 속도로 함께 극대화 되게 된다.

미국과 한국에서 매우 선명하게 보고 있는 현상이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2)

정말 지금 미국에서는, (한국도 그렇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버렸다.

주일에 목사님이 설교에서 그 판별식을 잘 설명해주셨다.

영적인 패배와 함께 정치적인 성공을 거두는 것과, 영적인 승리와 함께 정치적인 패배를 하는 두가지 경우를 생각해 보았을때, 정치적인 성공을 포기하고 영적인 승리를 택하겠는가.

실제로 미국의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승리를 위해서 자신의 신앙을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기도 하고, 이미 자신의 신앙을 타협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결국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자신에게 가장 으뜸의 가르침 즉 종교(宗敎)가 되어버렸다는 말이다.

실제로 어떤 정파를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어떤 기독교인이,
막상 주기도문이 무슨 내용인지 조차 모르더라는 말.
십계명을 학교에 계시하는 것으로 정치적인 투쟁을 벌이던 사람에게, 십계명의 내용을 물었더니 막상 그건 모르더라는 말.
이런식의 이야기들이 정치가 종교가 되어버린 현실을 잘 드러낸다.

내가 판단하기에 나이 40이상의 사람들에게있어서는 그래도 자신들이 믿고있는 종교와 새로 믿게된 정치라는 종교를 함께 따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데,
더 젊은 사람들중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유일한 종교가 정치가 되어버린 것 같아 보인다.

정치가 종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1)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기쁜 일이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절망, 패배, 좌절일 것이다.

특히 미국의 정치지형이 대단히 나누어져 있어서 (polarized) 서로를 잡아먹지 않고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것이다.

우선,
어제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가 참 좋았다.

이 시리즈의 글을 쓰기전에 우선 좋은 설교 한편

‘불편한’ 환대 (6)

나는 환대가 참 좋다.
내가 환대를 받으면 정말 따뜻하다고 느낀다.
나도 그렇게 환대를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쩌면 나같이 마음이 폭력적이고 배타적이고 전투적인 사람에게 환대는 매우 필요한 가치와 자세일 것 같다.

그렇지만
때로 환대라는 말이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랑의 공동체라는 말이 환대의 공동체라는 말로 치환되고,
서로를 사랑하라는 말이 서로를 환대하라는 말로 치환되고,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환대의 하나님이라는 말로 치환되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질때도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결여된 것은
환대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불편한’ 환대 (5)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
그렇지만 서로에게 ‘nice’ 한것은 예절 혹은 문화의 영역이다.

Stanley Hauerwas가 미국의 어떤 특정 교단의 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비꼰적이 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이 nice하다고 믿습니다.” God is nice.

그런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이고, 그분의 은혜가 크고, 그분의 헤세드 (loving-kindness)는 그분의 성품을 이야기하는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nice한것 같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은 그렇게 nice하지 않을때도 많다.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독선적이라고 느껴질때도 있다.

그럼에도 그분의 사랑은 끝이 없다.

우리를 하나님과 동급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겠지만,
기독교의 문화가 뻔지르르한 niceness로 정의된다면 그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서로를 불편하게 하기도 하고,
서로의 공간을 존중하기 보다는 그 공간을 허물어버리는 일들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런 과정은 nice하지도 않고, 환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불편한’ 환대 (4)

두번째로,
환대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가령,
노예 해방 이전, 미국 남부의 southern hospitality (남부의 환대)를 생각해보자.
이 사람들 자신이 부리는 노예들에게 잔인하게 대하거나 최소한 정의롭지 못하게 하면서,
자기들끼리 거하게 음식을 나누고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문화가 있었다.

나는 모든 미국 남부 사람들을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고,
모든 미국 남부의 southern hospitality가 가식적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환대는 그 뒷면에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나 가식이나 정의롭지 못함이 머무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사랑은 그렇지 않다.

‘불편한’ 환대 (3)

내게 환대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몇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환대는 충분히 급진적이지 않다.
환대는 일종의 사람간의 좋은 관계를 위한 social skill에 머무를 수 있다.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에 비해 훨씬 더 낮은 단계에서 머무르는것이 가능한 개념이다.

폭력성, 전투성, 배타성의 정서에는 그것만큼, 혹은 그것보다 더 급진적인 무엇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이미 기독교에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우리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있다고.
그것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다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주실만큼 그분의 사랑은 크고 급진적이라고.

폭력성, 전투성, 배타성은 그 사람들이 환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불편한’ 환대 (2)

나는 그분들이 왜 그렇게 환대를 이야기하는지 이해한다. (적어도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지금 한국과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의 전투성, 배타성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래서 전투적이고 배타적이기 보다는 친절하고 포용적인 기독교를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었을 것 같다.

나도 동의한다.

전투적이고 배타적인 보수 기독교는 정말 매력없다. ㅠㅠ
그리고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도 아닌 것 같다.

자신들의 ‘신념’ (나는 신앙이라기보다는 신념이라고 생각한다)에 맞지 않는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배척하고 공격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지 말고 다 좀 친절하게 하자는 이야기는 꼭 해주고 싶다. 그 사람들은 잘 듣지 않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적 환대에 대한 이야기는 필요하다.

그런데,
내 질문은 이것이다. 그것에 대한 반대로 ‘환대’를 이야기해야 했을까?
정말 환대라는 가치가 지금 상황에 대한 해결책일까?

내가 환대라는 가치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는 있으나,
나는 폭력성, 배타성, 전투성의 반대로 환대를 잡은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폭력, 전투, 배타성의 반대는 환대가 아니라 사랑이다.

환대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환대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불편한’ 환대 (1)

환대의 영어단어인 hospitality의 뜻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the friendly and generous reception and entertainment of guests, visitors, or strangers.

한국어 사전으로도 역시 비슷한 뜻이다.
찾아온 사람을 반갑게 맞아 정성껏 대접함.

당연히 엄청 좋은 말이다. 환대가 넘치는 세상은 참 좋은 세상이다.

그런데,
한 10년정도 되었을까…
기독교 써클에서, 특히 한국 기독교계에서, 이 ‘환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다.

특히 그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은,
기독교 비주류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더 젊은 복음주의 계열이라고 해야할까…
그런 분들이었다.

그런 분들은 대개 내가 그분들의 생각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 그런 분들이다.

통치자들과 권세자들 (5)

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서 6:10-13의 내용을 그런 관점에서 읽어보면,
어쩌면 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은, 그냥 그야말로 정치권력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보면 훨씬 더 자연스럽게 본문이 읽혀진다.

Tom Wright이 정치에 대해 자주 하는 말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요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어떤 정치집단을 지지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막상 누군가가 선출되면 그 사람이 실제로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는다.

Tom Wright의 이 말은,
결국 교회가 하는 중요한 역할은, 어떤 정치 집단의 agenda를 분별해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 정치권력에 꼿꼿하게 맞서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기독교는 세상을 뒤집는 힘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민중의 아편이 되어버렸다.”
라고 이야기하는 자크 엘룰의 말은 정말 옳다.

나는 그렇게 된 큰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절대반지를 추구하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중 누구와 한편을 먹어야 하나를 고민하는 기독교를 생각해보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