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4)

아마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였던 것 같다.
나는 무조건 학교에서 기숙사 방이나 내가 살던 아파트 방으로 돌아오면,
그 당시 가지고 있던 아이와 카세트/CD 오디오세트를 켜고 잘때까지 음악을 들으면서 보냈다.

나는 정말 노래를 좋아했다.
늘 노래를 끼고 살았고, 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살았다.

좋은 시절에도, 어려운 시절에도, 노래를 계속 불러댔다.

어쩌다 노래방에 가더라도 나는 내가 부르는 노래들의 가사를 볼 필요가 없었다.
이미 가사를 다 알고 있었다.
늘 듣고 부르던 노래들이니까.

운전을 하다가 차 안에있는 카세트 플레이어를 통해 노래를 듣고, 그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운전을 할때가 많았다. 뭐 나 혼자 운전을 할때면 과하게 소리를 크게 내며 노래를 불렀다. 창문 다 닫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니 뭐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 없었다.

그래서 내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은 그런 노래가 있는가.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간에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신앙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모두 노래를 잃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노래를 어떻게 다시 찾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노래를 부르지 못하는 것이 많이 아쉽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많이 그립다.

노래 (3)

두란노 경배와찬양이 시작된 것이 87년일거다.
그리고 80년대 후반에는 송정미, 최덕신, 최인혁, 손영진, 박종호 등등의 많은 가수들이 앨범을 내고 활동을 했었다.

그렇게 막 교회 내에서 찬송가 이외에 다른 노래들이 들어오면서 청년부에서 참 열심히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에서도 캠퍼스 선교단체에 속한 사람들이 벤치등에 삼삼오오 앉아서 점심 시간에 기타를 치며 몇몇이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뭐 전도를 하겠다는 그런 생각으로 했던 것도 아니었고, 무슨 계획과 조직을 미리 해서 한 행동들도 아니었다. 그냥 점심 먹고 잠깐 시간 나니까 몇몇이 기숙사에서 기타 가지고 나와서 날 좋을때 그냥 그렇게 노래를 한 것이었다.

교회 청년부에서 MT같은 걸 가더라도 밤이면 기타 하나를 들고 함께 둘러 앉아서 여러 노래를 불렀다.
누가 찬양 인도를 한것도 아니었다.
누가 기타 치다가 손이 아프면 옆에 아무나 그 기타를 잡고 이어서 쳤다.
그냥 그렇게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에 대한 노래를 함께 불렀다.

그런데 요즘 20대도 그렇게 하나?

요즘 대학/청년부가 거의 교회마다 없어지고 있기도 하지만,
그저 한 열댓명 모이는 모임에도 앰프와 믹서와 마이크가 준비된다.
그리고 악보를 프로젝터로 벽에 쏘면서 그렇게 노래를 한다.
찬양 인도자와 찬양팀이 그 노래를 인도한다.

물론 그 속에서도 자신에게 맞는 노래들을 찾아 그 노래들이 그들의 삶의 곡조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거창한 장치 없이도, 그저 친구들끼리 마음에 맞으면 함께 부르는 믿음의 노래….

그래서 내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은 그런 노래가 있는가.

노래 (2)

나도 그랬지만 나와 가까웠던 친구들도 모두 참 노래를 좋아했다.
기숙사 방 두개 건너 하나씩은 기타가 있었고,
그냥 그 방에 가서 아무나 그 기타를 치기 시작하면 애들이 하나둘씩 모여 함께 노래를 불렀다.

80년대 후반 그 당시 유행했던 여러가지 노래들이었다.
나름 엄청 인상 써가며, 혹은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를 질러가며, 심지어는 괜히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하며, 그렇게 노래를 함께 불렀다.

친구중 누가 여자친구와 헤어지면 그 친구와 함께 실연의 노래를 불렀다.
나는 대학때 연극을 했는데, 연극 공연 즈음엔 늘 연극과 관련된 노래들을 불렀다.
밤에는 괜히 밤 하늘을 보면서 애들과 함께 밤에 부를만한 노래들을 불렀다.
나는 술을 잘 마시지 않았지만, 술에 취하면 애들이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때 불렀던 노래들은 지금도 거의 대부분 가사를 기억하고 있다.
한 30년 넘게 부르지 않은 노래들도,
지금 다시 그 노래를 떠올리면 그럭 저럭 가사를 기억해서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대중가요는 그렇게 부를 수 없는 노래들이 대부분이다.

BTS나 블랙핑크나 Billie Eilish나 Taylor Swift의 노래를 무슨 수로 따라 부르나….
조금 따라 부르기 쉬워야 할 것 같은 악동 뮤지션이나 아이유의 노래도 완전 난이도가 장난 아니거나 따라부르는 용도의 노래는 아닌 것 같이 느껴진다.

그래서 내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은 그런 노래가 있는가.

노래 (1)

내가 대학교 1학년이었던 1987년, 대학가에는 노래가 가득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새로 생긴 작은 지방 학교였기 때문에 대단한 흐름이랄까 그런것이 있지는 않았지만,
바로 옆에 있던 큰 국립대나 내가 서울에 가서 보는 학교들 앞에서는 늘 대학생들이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중 어떤 것은 지금은 거의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중 어떤 것은 국가 기념일 행사에서 대통령이 부르기도 한다.

1987년 6월은 정말 대단했다.
나는 그 큰 흐름에 내게 기여했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부끄러운 작은 지방대의 학생이었지만,
거기서도 학생들이 과모임등으로 술을 마시면 꼭 다 함께 그렇게 노래를 불렀다.

임을 위한 행진곡,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마른 잎 다시 살아나, 아침 이슬, 흔들리지 않게, 그날이 오면 같은 노래들은 딱 운동권이 아니더라도 기숙사에서 아이들과 기타를 치며 함께 부르기도 했다.

그건 정말 시대의 노래였다.

그 노래들은 그 이후 한국 사회가 민주화 되면서 제도권의 노래가 되었고,
그 노래를 부르던 사람들도 제도권에 들어와 한국 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그 노래들은 한편 한국을 바꾸어낸 노래들이었다.

아직 스무살이 되지도 않았던 그때 처음 배웠던 그 노래들은 그 당시 사회 문제에 깊게 관심을 갖지 못했던 나 같은 사람에게도 여태껏 의미있는 노래로 남아있고,
그 노래를 들으며 지금도 가슴이 뛰거나 눈물이 핑 돌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내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은 그런 노래가 있는가.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12)

도대체 거대 담론은 어떻게 개인적인 상황과 연결시킬 수 있을까?
이게 나 같은 386세대에게는 더 쉬웠다.
그냥 깃발을 들고 노래를 함께 부르면 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의 20-30대에게는 그렇게 되는 것 같지 않다.

나는 이것을 담아내는 중요한 고리가 ‘삶’이라고 생각한다.

가령, 나 같은 비전문가가 2차원 도면에 그려져있는 설계도를 보고 3차원의 집을 미리 상상해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에게는 모델하우스 같은 것이 참 도움이 된다.
잘은 모르지만, 평생 건축을 해온 사람들은 아마도 2차원 도면을 쓱~ 보면 3차원이 자연스럽게 머리 속에서 그려질 것이다. 그러니 그런 전문가들이 내게 너는 왜 이것을 이해못하느냐고 다르치는건 어떤 의미에서 공평하지 못하다.

하나님 나라의 담론을 치우치지 않게 (이미와 아직의 균형, 거대담론과 개인의 균형을 모두 가지고) 이해하고 그것을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그 복잡한 거대담론을 visualize.하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정말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의 인격과 삶의 여정이 거대담론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모델하우스 같은 역할을 해준다는 말이다.

듣고 배우거나 읽고 배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지금의 20-30대에게는 보고 배우도록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

하나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로마서 14:17)
이 성경말씀이 딱 그거다.

하나님 나라는 제사 음식에 바쳐진 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 하는 것 같은 논쟁거리가 아니라 (예전 우리나라 예송논쟁 비슷한 ㅠㅠ)
실제로 복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에 대한 것이라는 말.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11)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
처해있는 상황, 살고 있는 사회의 발전상,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반응등을 고려해서 균형잡히게 강조해야 결국 사람들이 그것을 모두 통합하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게 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 개인 신앙에 대한 강조의 균형 역시 매우 중요하다.
세대, 문화, 공동체, 개인적인 상황등을 잘 고려해서 지혜롭게 강조해야
결국 사람들이 개인 없는 거대담론을 갖게되거나 거대담론 없는 개인에 머무르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적어도 지금의 young millenial이나 Gen Z들을 생각했을때,
그들 앞에서 겸손하게 그 이야기를 잘 들으며,
하나님 나라 담론에 대한 조금 더 높은 레벨에서의 통찰을 가지고,
지혜롭게, 그러면서도 그들의 말을 겸손하게 들으며 소통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절대로 내가 옳으니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통해서 이 하나님 나라의 웅장한 스토리로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young millenial이나 Gen Z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거대담론을 이해시키는데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개인적인 상황과 거대담론을 연결시키는데도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10)

나는 앞에서,
연속성을 강조하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앞으로 임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가 시대나 상황이나 세대에 따라서 다르게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어떤 시대에는 어떤 것이 다른 것 보다 더 relavant하다는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앞으로 임한 하나님나라는 두개 다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것들이다.
다만 그 강조를 상황에 맞추어서 해야만 결국 대중이 (내 관심으로는 젊은 이들이) 그 두가지를 균형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곳에까지 다다들 수 있게 된다고 본다.

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일반적인 강조 역시 그렇다고 본다.
거대담론을 어렵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거대담론을 교조적으로 들이대면서 이걸 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식의 접근은 건강하지도 않고 통하지도 않는다고 본다.

나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참 좋아한다. 20대부터 여태까지 내 삶을 이끌어온 중요한 narrative이다.
그러나 그것을 교조적으로 강조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대화상대가 그것에 관심이 없거나 그것이 당장 그 사람에게 의미가 없을때에는 다른 강조점을 통해서 온전한 holistic한 복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본다.

나는 소위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런 식의 교조적인 접근을 보기도 한다.
하나님 나라 담론이 아니면 아니라는 거다.
나는 그런 방식은 결국은 ‘꼰대’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해하는 방식 그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모두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

KOSTA에서도 그런 딱딱한 교조주의가 보일때도 있다. 다행히고 KOSTA를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리 보이지 않지만 KOSTA 강사나 그 외 다른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런 접근을 보기도 한다.

나는 KOSTA를 섬기는 사람들이 꼰대가 되지 않고 겸손하면 좋겠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적어도 내가 아는 한 KOSTA를 섬기는 사람들은 참 겸손하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9)

Gen Z가 극우에 열광하는것, 특히 남자들이 극우에 빠지는 것에 대한 우려가 많다.
나는 그것이 우려할 만하다고 당연히 생각하고 그것을 잘 막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극우는 결코 건강할 수 없으니.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이 그렇게 극우에 열광할까?
아마도 복잡한 자신의 상황을 매우 단순화 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가 힘든건 다 저 사람때문이야, 다 저 나라 때문이야, 다 저 그룹 때문이야는 식으로 적을 설정하고 그 적을 때리면서 복잡한 이슈를 단순화 시켜버리니 자신의 상황이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극우를 선택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어떤 의미에서 젊은 사람들이 ‘Old Gospel’에 몰리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있다.
하나님 나라 담론은 너무 복잡하다.
특히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담론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그렇게 복잡한건 잘 모르겠는데,
내가 죄인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는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운 구도인거다.
그리고 그것이 말이 되고.

그렇다고 거대담론은 포기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대담론은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그것 없이는 성경이 coherent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 핵심적인 성경의 narrative의 근본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문턱이 너무 높다면,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8)

사람들 사이에 이견이 있긴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지금 미국과 특히 영국에서 20대, 특히 그중에서도 남성의 기독교인 비율이 획기적으로 늘고 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수치가 잡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들을 찾아보면
영국 런던의 Saint Church 같은 곳은 ‘부흥(revival)’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젊은 사람들이 몰린다고 한다.
뉴욕의 Church of the City New York도 비슷한 것 같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뉴욕의 교회다.

나는 Saint Church의 예배를 youtube로 꽤 자주 들어가는 편이다.
이 교회 예배는 그냥 미국의 일반적인 nondemoninational evangalical church의 예배같이 느껴진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하는 내용은 그야말로 John Stott 식의 복음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죄와 하나님의 죄인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개인이 어떻게 용서 받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하나님 나라 거대담론은 별로 이야기하지도 않고 담기지도 않는 것 같다.

Church of the City New York의 Jon Tyson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약간 마초다.
실제로 이분은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다.
여기는 Penecotal 인데, 역시 하는 내용은 ‘전통적 복음’ (인간의 죄 – 하나님의 은혜 – 은혜에 대한 반응)에 가깝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그것에 젊은 사람들이 모인다.

역시 또 Gen Z가 열광하는 John Mark Comer를 보더라도 이분도 하나님 나라 담론 별로 없다. Personal transformation이 핵심 이야기다.

왜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거대담론이 아니라 개인 신앙에 더 끌릴까?

나는 이 사람들이 처해있는 상황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연속적인 이미임한 하나님나라의 거대 담론 보다는
도대체 what about me?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어 보이는 것 같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7)

나는 이런 적용을 세대에 따라서 다르게 해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한국에서 한국의 80년대부터 2010년대정도 까지,
미국도 2010년대정도까지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훨씬 더 의미있는 담론이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함께 더 발전시킬 여지가 있다고 보았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추구했다. 그리고 그 발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좋은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그런 사회 속에서 그 발전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한 건강하면서도 꼭 필요한 기여를 하나님 나라 담론이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이나 미국 사회속에서는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나 미국 사회에서 발전이 멈추었기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발전이 대중의 기대와 바람과 동떨어져서 소수 엘리트에 의미해서 이루어지고 있고,
그 대중은 발전의 주체와 원동력이 되기 어려운 구조가 되어가고 있어 보인다.
가령 최근의 AI의 발전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그 속에서 일반 대중은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그래서 결국 거대담론을 생각하기 보다는 개인의 생존에 집중하게 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지금의 20대에서 아주 잘 볼 수 있다.

거대 담론은 정말 이들에게 큰 의미가 없어보인다.
그것이 진리인가 하는 질문 역시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것이 내게 의미가 있는가, 내가 살아날 수 있는가에 훨씬 더 큰 관심이 있다.

그렇게 반응하는 세대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고 비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반응하도록 몰리는 세상을 살고 있는 그 세대를 바라보면 그 세대가 훨씬 잘 이해가 된다.
나 같은 세대보다 훨씬 더 힘들게 그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