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학기 성경공부 진행중 (1)

이번학기에는, 내가 주말에 out of town 일정이 워낙 많아서 차분히 매주 본문 성경공부를 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걸 준비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이번학기에는 아예 성경공부를 쉴까 하는 것도 고민을 하긴 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내 개인적인 사정으로 KOSTA를 끝나고 follow-up을 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follow-up 세션을 아예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작년에 비해서 참석자가 많이 늘었는데, 막상 follow-up offering은 작년보다 줄어서, 내가 짧은 class을 offer해서 조금 부담 적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을 받아야, demand를 소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주짜리 짧은 것을 열었다.

그런데…
기존에 성경공부를 하던 분들이 계속 이번학기 성경공부 안하느냐고 독촉을 해오기도 하시고,
이번에 foll0w-up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어떻게든 follow-up끝나고 뭐라도 하면 자기도 하겠다고 하는 분들이 있어서…
정말 내 나름대로 무리를 많이 해서 이번학기 성경공부를 하기로 했다.

가능하면 내가 이전에 했던 내용으로 해서 내가 준비를 좀 적게 해서 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는 생각이었는데…

80~90년대 모델 vs 2010~20년대 모델 (2)

80~90년대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성경적 가정’을 꾸미려 노력했던 사람들중 사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건 그 사람들의 부족함이기도 했지만, 그 사람들이 자라온 환경, 그로부터 형성된 그 사람들의 인격형성등을 고려할때, 그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수 없는 목표이기도 했다.

좋은 모델이라는 것은 그것이 모델로서 작동할때 좋은 것이지,
모두가 따라야할 모범/규범으로 작동할때 그것자체가 폭력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모범과 규범으로 규정한 상황속에 놓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좌절감만을 안겨줄 수 있다.

‘성경적 가정’이라는 모델을 교회에서 강조하기 시작하면,
많은 경우 교회 내에 위선이 넘처나게 된다.
현실은 그렇지 못한데 나누어지는 규범이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80~90년대 모델 vs 2010~20년대 모델 (1)

내가 복음을 받아들였던 80~90년대에는 ‘성경적 가정’이라는 말이 참 유행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경적’으로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교회 내의 모델들이 소수 존재했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이끄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는 그것이 80~90년대에 유용했다고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존중에다한 기본적인 가치없이 가정 내에서도 dynamics가 형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남편의 아내에대한 자세는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이 있지 않다하더라도 폭력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건강한 모델을 제시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접근이었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말해서 ‘성경적 가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지금은 자칫 시대착오적이거나 위험할 수 있다고 본다. ‘성경적’ 가정이라는 것이 어느 한가지 정형화된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Rekindle (9)

그래서…
내게 있었던/아직 남아있는 어떤 ‘불’을 다시 활활타도록 하는 일을 하기위해 새해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조금 더 열심히 해보려고 한다.

첫째,
내 자세를 고쳐 잡는다. 기본적으로 성령께 더 의존적이 되려고 노력하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 성령의 음성에 적극적으로 순종한다.

둘째,나를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게 했던 소중한 개념들 (은혜, 사랑, 회복, 의미) 등등에 다시 천착해본다. 이것은 그 내용들을 더 공부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그 개념들을 그야말로 깊게 곱씹어가며 다시 그 의미들을 깊게 새겨보는 노력을 하겠다는 의미이다.

세째,
신앙의 일반화를 추구하는 노력을 조금 줄이고, 내게 있어 의미있었던 주관적 신앙의 경험들을 다시 되새김질 해본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내가 신학적으로 다소 더 narrow해지는 것을 의미할수도 있겠다.

다섯째,
기도를 조금 더 깊게, 자주 한다. 그리고 기도를 조금 더 배운다.

Rekindle 이것이 나름대로 내 새해의 결심이다.

Rekindle (8)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그리도 또 역시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도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기질/성품과, 내가 경험한 신앙 경험들, 내 눈이 열려 보게된 진리의 어떤 내용들은 매우 내게 unique한 것일 수 있다.
그러니 내 신앙에 있어 rekindle하는 작업을 할때는 일반화된 신학적 설명으로부터 출발하기 보다는 다소 주관적인 내 신앙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지난 몇년동안 내 신앙을 일반화하려는 시도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렇게 했던 큰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신앙을 나와는 다른 사람과 나누며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꽤 의미 있는 열매들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 속에서 혹시 내가 나의 ‘주관적 신앙경험’들을 너무 쉽게 구석에 버려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해본다.

내가 새해들어 rekindle이라는 keyword를 가지고 새해 결심을 정리해보면서 과거 내 신앙 경험들, 내게 있어 복음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곱씹어보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Rekindle (7)

내가 처음 복음에 눈을 떴을때 내게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은혜’라는 개념이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엔 세상 어느곳에서도 완전한 ‘은혜’라는 것을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었는데 그런 것을 주장하는 성경이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내게 충격적이면서 감동적이었던 것은,
그 십자가가 은혜의 십자가라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예수님께서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했던 것을 읽으며 나는 정말 전율을 느꼈다.
그때 그 군중 속에 내가 있다고 정말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강력하게 그 은혜를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던 사람이었고, 여전히 그 은혜를 받아들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인데… 아니 그런 내게 은혜라니…

그래서 그 ‘은혜’를 받아들인 나는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를 보면 나는 어느새 내 생각 한 구석에… 나는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은혜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건… 어쩌면 내가 ‘불’을 잃어버리게된 가장 큰 원인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있다.

다시 어떻게든 그 충격적으로 은혜라는 개념을 맞닥드렸던 그때의 내 모습을 회복해야한다. 여전히 은혜라는 것이 내게 충분히 충격적인 것이고, 그렇기에 내 마음 한 구석에 계속 마치 내가 어떤 자격이 있는 사람인 것인양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가증스럽게 여겨야 하는 것.

그리고 역시 적어도 내게있어 그 은혜의 궁극의 표현은 십자가다.

은혜의 십자가. 다시 rekindle되어야 하는 또 다른 영역.

Rekindle (6)

나는 내 성향이나 성품에 비해서는 기도와 관련된 경험들이 그래도 좀 있는 것 같다.
이건 한편 하나님께 참 감사하는 점이다.

기도를 하다가 다소 신비한 일종의 체험 같은 것들도 좀 있는 편이고,
한동안 새벽기도를 그래도 좀 열심히 할때 그 시간에 특별히 성령님께서 부어주시는 어떤 은혜가 있었다.

지금도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기도를 하다가, 평소의 나와는 조금 다른 어떤 ‘상태’에 다다르게 되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게… 말로 잘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그런 ‘상태’가 되면 그냥 기도가 확~ 잘 된다.
뭐 기도가 잘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 말고는 어떻게 표현할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기도가 잘 된다.

그렇게 기도가 확~ 열리는 때가 되면 한 30분 기도하는 것이 후다닥~ 3~4분 같이 지나가는 경험을 할때도 있었다.

또 침묵기도, 센터링기도, 관상기도 라고 부르는 경험들도 나름대로 조금 있다.
이것도 나는 훈련이 많이 부족해서 그런 기도를 하면서 늘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닌데…
가끔은 Celtic 크리스천들이 부르는 ‘thin place'(하늘과 땅의 경계가 매우 얇은 곳)에 다다르는 경험을 할때가 있다.
대개는 그럴때도 꽤 긴 시간 기도를 했는데도 그 시간이 매우 짧게 느껴지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좀 속되게 말하면 복불복이고, 조금 더 경건하게 말하면 성령의 일하심에 달린 것이어서… 늘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지난 몇년간은 그런 기도를 거의 하지 않아서 그나마도 이런 경험을 한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다.

나는 기도에 관한한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이 너무 많고,
더 조금 더 깊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지만 아주 작긴 하지만 어떤 ‘불씨’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긴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영적 게으름과 무지로,
그나마 있던 작은 불씨까지도 꺼뜨리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기도와 관련된 불씨들을 다시 살려내고 싶다. Rekindle 이다.

Rekindle (5)

성령께 순종하는 것도 역시 내겐 매우 중요한 ‘불’의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계속해서 내게 말씀하시는 성령을 인정하고,
그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려고 많이 애썼고,
그것이 참 많이 좋았다.

그 과정은 꽤 자주 ‘싸움’이었다.
내 안에 있는 나의 음성과, 역시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음성 사이에서 고뇌하며,
조금씩 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나를 복종시키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

그런데…
이건… 벌써 꽤 오래전부터 내게서 거의 사라져버린 ‘불’인것 같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잘못된 목소리로 성령의 음성을 눌러버리는 일들이 정말 너무나도 많다.
그것 때문에 가시가 돋친 말을 쏟아내기도 하고, 불합리하게 화를 내기도 하고, 지나치게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하기도 한다.

성령의 음성에 순종해가며 그분께서 나를 잘 다드리도록 내어놓 모습,
그리고 내 안의 거짓된 음성과 싸우며 내 뜻을 꺾어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은 정말 내가 꽤 오랫동안 잃어버린, 다시 붙여야할 ‘불’이 아닌가 싶다.

Rekindle (4)

내게 있어 처음 다가왔던 그 불은,
내가 control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게 눈이 열린거다. 어떻게 열렸는지 설명하기도 어렵고, 그걸 내가 막 만들어 내려고 해서 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눈이 열려 예전에 잘 보이지 못하던 것이 보이게 된 것이었다.

그런의미에서 내게 있던 ‘불’의 아주 중요한 핵심은 성령의 조명 (성령께서 깨닫게 하심)이었다.

그게 내 성격이나 성향 때문이었을까.
내게 그 깨닫는 가장 중요한 대상은 성경이었다.
성경 말씀이 막 이해가 되는거다.

아, 물론 그때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성경은 그후로 여태껏 나름 꽤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왔는데, 아직도 계속 더 깨닫고 있는 중이긴 하다.

다만, 그 ‘불’의 핵심이 성경공부는 아니었다.
성령의 깨닫게 하심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은 그 중심이 성령의 깨닫게 하심보다는 성경공부쪽으로 옮겨간 것이 아닌가 싶다.

아마 내가 다시 불을 붙여야 하는 (rekindle)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다.

Rekindle (3)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나?

내게있어 기독교 신앙이 내게 주는 기쁨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갖게되는 것과는 다소 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더 깊은 성경 공부를 통한 지적 만족,
더 효율적인 사역을 통해서 열매가 맺히는 것,
신앙의 가치를 삶에 적용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거나 경험을 축적하는 것 등에 더 무게중심이 옮겨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그런 것들이 나쁜것들은 아니다.
모두 다 좋은 것들이고, 내 신앙이 더 깊어지고 성숙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가져왔던 ‘불’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예수님과 동행하기 때문에 새롭게 나와 세상을 바라보게 되는 그 불은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동행하는 것이 과거에는 신앙의 핵심이자 목표였다면,
이제는 그것이 너무 자주 신앙의 도구로서만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렇다면…
그 ‘불’을 다시 켜는 것, rekindle이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