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6)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강조하는 개념은 연속성이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이 현실적으로 연속적으로 개선되어야 하고 개선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입장에서는 이 땅에서 이루어진 열매들이 앞으로 오게될 하나님 나라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문화, 정치, 경제 뿐 아니라 개인적 성품 같은 것까지도 연속적이라는 강조가 담겨 있다.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가 강조하는 개념은 불연속성이다.
앞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지금과 다르다는 강조가 크다.
퀀텀 점프를 해서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 땅에서의 모든 왜곡이 사라지고 백성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게 된다는 것.

이미 어느정도 인권, 경제, 문화등이 이루어지고 있고 발전의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연속성이 더 중요할거다. 어떻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의 왜곡을 다루어 낼 것인가 하는 이야기를 할때 하나님 나라라는 목표는 참 의미있다. 하나님의 통치가 펼쳐지는 일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이루어내는 것을 꿈꾸며 그렇게 연속적으로 더 개선해내가는 추구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극단적인 고통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연속적 개선의 희망이 없다.
그저 세상이 뒤집어져서 전혀 다른 세상이 되는 것이 차라리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서 공산주의가 했던 것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뭔가 획기적으로 달라지는 새로운 세상.

이건 사회적으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마찬가지다.

개인적으로 개선과 발전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연속적인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더 의미 있을 것이고,
개인적으로 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연속적인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가 더 의미 있을 것이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5)

다시 내가 이 시리즈의 첫글에서 썼던 선교사 형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그 형은 내가 이야기했던 하나님 나라 이야기가 지나치게 선진국 친화적 담론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그 가난한 나라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별로 적실성이 없다고.

그 형의 그 관점에서 다시 내가 썼던 이야기들을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들 역시 지나치게 배부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그리고 정직하게 그 형의 문제제기에 대해서 나는 그 형의 말이 맞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그 당시에는 반발했지만 이제는 그 형의 이야기를 훨씬 더 수긍하고 공감한다.)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도 어느정도 살만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가령, 전쟁통에 극도의 가난에 극심한 혼란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저 이 끔찍한 현실이 어떻게든 기적적으로 끝나거나 이 현실로부터 떠나서 새로운 어떤 곳 (내세,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으로 가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 되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극심한 고통이나 혼란 속에서도 그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이 땅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선지자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담론은 폐기되거나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 상황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대중에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그저 너무 현실과 동떨오진 자신과 상관 없는 이야기이고 오히려 앞으로 임할 하나님 나라가 훨씬 더 의미있게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국이 가난하던 시절, 왜 그렇게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우리 선배들에게 의미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더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4)

80-90년대 한국에서 유행했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면서 나는 그 근본토대가 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다.

내가 흥분하면서 받아들였던 하나님 나라는 과연 흠이 없는 생각일까. 나는 어떤의미에서 왜곡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서 내가 다다르게 되었던 생각의 긴장 포인트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이원론과 세속화에 대한 문제였다.

과연 이 시대에 (그리고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내게) 무엇이 더 문제냐 하는 것이냐는 질문이었다.
전통적(?) 기독교 세계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원론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했고,
반면 또 다른 그룹의 사람들은 이제는 이원론 보다는 세속화가 더 큰 문제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고민과 논의속에서 이원론 보다는 세속화가 더 큰 문제라는 생각을 하는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생각했던 것은 세속화라기 보다는 자기중심성이 더 큰 문제라고 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면, 이원론 극복이라는 차원에서 받아들였던 하나님 나라 스토리는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된다는 말인가. 그때 내가 가졌던 일종의 혼란이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3)

하나님 나라와 함께 접했던 것이 적어도 내겐 ‘기독교 세계관’이었다.
그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펼쳐진다는 이야기를 네덜란드의 개혁파 신학전통에 맞추어서 풀어낸 한가지의 담론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게 하자는 일종의 운동이었고, 그것은 내게도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때 열정적으로 접했던 것은 프란시스 쉐퍼였고, 나는 쉐퍼에 열광했다.
그 책을 가지고 사람들을 모아서 책읽기 모임을 하기도 했고,
그 내용으로 친구들과 토론을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이야기했던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풀어내는 한가지의 방법이었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그것이 THE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에 탐닉했었다.

흥미롭게도/아니면 자연스럽게도,
그때 그렇게 그런 식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 후 정치적 신학적 극우가 되어버리는 일들이 많이 있었다.
그건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당시 내가 접했던 하나님 나라 운동 혹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신학적 논리적 구조가 가지는 본질적 문제였다.

다시 말하면 그 논리를 계속 따라가다보면 결국 다다르게 되는 것은 신학적 근본주의 / 정치적 극우가 되어버린 다는 것이다.

90년대 한국에서는 그런 기독교 세계관을 비판하는 담론들이 많이 형성되었고, 나는 그런 기독교 셰계관 운동에 대한 비판을 비판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런 지적에 적극적으로 공감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생각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심정적으로 많이 지지하게 되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2)

이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내가 복음과 기독교에 대해서 눈을 뜨고 예수님을 알게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체계를 알게되기 전이었다.

그렇지만 말하자면 일종의 ‘회심경험’을 하게된 20대 초반,
혼자서 에베소서를 읽으면서 받았던 일종의 충격이 있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새로운 백성이 만들어내는 세상에는 다른 질서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하나님 나라를 어렴풋이 처음 접하게 된것은 그런 것이었다.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 세상과는 다른 세상.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과는 달리 이 땅에서 살아가는 대안적 방식.

그때 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충분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그 후 이어질 많은 생각의 시초가 되긴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에베소서에서 발견했던 그 ‘비전’은 내가 기독교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 (1)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야기, 즉 Already but not yet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이다.

처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접한 것은 내가 대학생 때였다. 아마도 1990년이었던 것 같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 나라의 이해’라는 책이었다.

그 이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들을 탐닉하듯 읽었고, 역시 80-90년대 한국에서 막 유행(?)이 시작되었던 기독교 세계관 관련된 책들을 정신없이 읽었다.

그러면서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매료되었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다짐하고 그랬다.

그후 몇년이 지나서…
가난한 나라에 선교사로 가 있던 아는 형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만나서 대화를 나누었는지, 이메일등으로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하나님 나라’에 대하 열을 내서 이야기하니, 그 형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네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는 어쩌면 부유한 나라에서는 통하는 이야기일수도 있겠지만, 내가 있는 그런 가난한 나라에서는 별로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다”

나는… 그 형의 그 이야기가 충격이었다.
그 형은 선교사로 가기 전 하나님 나라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공부하던 형이었는데…
그 형이 그렇게 이야기하는건 정말 다소 충격이었다.

정말 내가 이야기하는 ‘하나님 나라’는 그저 선진국에서나 이야기할만한 걸까?

성경공부 고민 (11)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보면,
내가 하고 있는 성경공부 고민의 뿌리는 결국 지역교회의 붕괴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건강한 지역교회들이 감당해야할 것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필요의 빈자리를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선가 찾고자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우선은 지역교회들이 갖고 있는 건강한 신학과 신학적 자세의 부족함이다.
그건 성경에 대한 건강한 자세와 시각, 그리스도 안에서의 균형잡힌 인격적 성장, 하나님과 나를 바라보는 건강한 관점,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올바른 관심과 고민 등등이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하는 이런 허접한 성경공부에도 그렇게 사람들이 참여해서 어떻게든 그 필요를 채워보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어쩌면 조금 더 큰 문제는,
지역교회가 공동체로서 작동하는 일을 멈추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공동체에서 충족받아야할 정서적 교류,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유대감, 서로의 아픔과 고민에 참여하는 공감 등등이 지역교회에 건강하게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교회 밖에서 찾으려고 하니 이게 정말 쉽지 않은 것 같다.

나 같이 별로 영향력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사람이 이 시대의 문제를 혼자 끌어안고 싸울수는 없는 일이다. 이 시대 지역교회들의 붕괴의 문제를 내가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나는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다.

그저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보자고 하는 것 뿐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런 저런 성경공부에 대한 고민을 계속 하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저렇게 다른 접근도 조심스럽게 해보려고 할 것 같고.

그런데 그 많은 것을, 내가 생업을 감당해가면서 다 할 수 있을지… 그건 잘 모르겠다.

성경공부 고민 (10)

매번 성경공부를 하면서 많이 하는 이야기이는…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 정답이 아니고,
그저 내가 바라보는 본문에 대한 내 입장이라는 것.

그런데 나는 상대적으로 많이 성경공부를 위한 준비를 해서 가는 편이다. 보통 적어도 한주에 3~4시간, 많으면 한주에 6시간까지 그주의 성경공부를 위한 본문 연구를 하는 편이다.
그런데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분들중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으니…아무래도 준비를 더 많이 한 내가 더 많이 이야기를 하게 되고, 아무래도 여러가지 공부와 사색을 더 많이 해온 내가 하는 이야기가 더 그럴듯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면 성경본문을 놓고 마치 내가 정답을 쭈루룩 이야기하는 방식이 되어버려서….
정말 흥미로운 토론이나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하면서 결국 사람들이 내 스타일로 성경을 읽고 고민하게 되는데…
내 스타일로 성경을 읽는 것이 기질적으로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은 혹시 성경을 읽는 것 자체에 흥미를 잃어버리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기도 한다.

어떻게든 그 사람에게 잘 맞는 성경읽기와 묵상의 방법을 각자 잘 찾아서 삶의 습관으로 가지게되면 좋겠는데….
내가 우다다닥 이야기를 많이 하는 세팅에서는 그런 식의 발전을 기대하기 쉽지 않다.

성경공부 고민 (9)

성경공부를 하는 기간 중에는 아무래도 그것에 많은 에너지를 빼앗기기 때문에,
나 혼자서 조금 더 깊게 말씀을 연구한다거나…
조금 무게가 있는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무래도 쉽지 않다.

지난번에 은퇴에 관한 글을 쓰면서 살짝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나는…. 그냥 그렇게 혼자서 공부를 하는 것 자체를 참 좋아하는 편이다.
책을 읽고, 모르던 것을 배우면서 조금씩 나를 채워나가는 것이 참 좋다.

그게… 그냥 그걸 좋아하는 것 뿐 아니라,
나는 사실 그게 내 신앙생활의 중요한 방식이자,
일종의 내 부르심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러가지 공부와 사색과 묵상등을 통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내 삶의 여러 경험속에 그 생각의 열매들을 통과시켜,
내 삶에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를 더 발견해 나가는 것.

물론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더 잘 읽도록 도움을 주는 것 역시 좋은 일이지만,
그건 내가 아니어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더 있지 않을까?

잘 모르겠다…

성경공부 고민 (8)

이번학기 성경공부에서 더 드러난 문제인데…
내가 ‘내 이야기’를 조금 더 하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나라는 사람에게 조금 더 관심을 보이게 되기도 하였다.

내가 어떤 신앙 경험을 했는지, 내 생각이 어떤지 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고,
또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일들도 좀 더 있었다.

내가 온라인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생각했던 것은,
나와 성경공부를 한두번 한 사람들이 성경공부에 재미를 들이게 되어서, 나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서 성경공부하는 습관과 재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나와 오래 성경공부를 함께 하는 사람들을 기대했다기 보다는,
뭐랄까… 따뜻한 국밥 한그릇 대접한다는 심정으로, 그 국밥 먹고 힘내서 각자 삶 속에서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혹시 어떤 사람들이 내게 의존적이 되면 그건 내가 감당하기도 쉽지 않을 뿐더러 그 사람에게도 별로 좋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건 정말 별로 해답이 없는 고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