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내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과 저자들 (7)

20세기 후반에 20대를 보낸 복음주의자라면 거의 대부분 깊게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존 스토트, CS 루이스, 제임스 패커 등등.

나는 이분들의 책들을 그래도 꽤 읽었고, 어떤 것은 그 책을 읽는 독서 모임을 인도하기도 했었는데…
이상하게 이분들은 내게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고 생각해왔다.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 라던가,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같은 책들은 꽤 두꺼운 데도 꽤 열심히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다.

이분들의 책을 읽으면…
매우 자주,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읽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이거 이미 다 알고 있는 거잖아. 이걸 왜 이렇게 다시 이렇게 써야 했을까….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가 이분들이 쓴 그 책들을 읽으며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했던 큰 이유는,
내게 신앙과 성경을 가르쳐준 선배들이 이미 이분들로부터 깊게 영향을 받았던 것이었고,
그분들을 통해서 배운 내용들이 결국 그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나중에야 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20세기 후반의 이들 복음주의자들의 영향을 매우 깊게 받았던 것이다.

나는 20대에 내가 가지고 있던 신학적 입장으로부터는 많이 발전해왔다.
그리고 그때의 신앙과는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내 생각은 바뀌기도 했고 변화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내가 스스로를 ‘복음주의자’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는,
20대에 받았던 이분들의 영향이 지금까지 내게 남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여전히 내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과 저자들 (6)

이 사람은 내가 한때 거의 광적으로 좋아했던 분이지만,
그 후에 조금 더 넓은 시각을 갖게 된 이후 이분에게 깊게 실망했던 분이다.

프란시스 쉐퍼.

20대 초반에 읽었던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책은 나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그 책에서 파생되어나온 여러가지 철학적 사조, 여러 사람들의 책들, 여러 자료들을 찾아가며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22살때였다. 예전에 그저 건성으로 알던 여러 철학적 사조들을 조망하면서 드디어 신앙과 철학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하기시작했다.
그 이후 나름 여러가지 철학책과 글들을 읽으며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것들을 배워보려고 엄청 노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공부하면서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리고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 , ‘거기 계시는 하나님 (The God Who Is There)’같은 책들이 20대 초반의 내게 미친 영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덕분에 나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프란시스 쉐퍼의 많은 생각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분이 이야기했던 어떤 것들에는 그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대충 30살쯤… 나는 프란시스 쉐퍼를 떠나기 시작했고, 35살쯤에는 거의 완전히 그와 결별(?)했다.

그럼에도,
결국 그분이 내게 미친 영향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내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과 저자들 (5)

내게 큰 영향을 주었고 지금까지도 그 영향이 계속되는 또 다른 사람으로는 마틴 로이드-존스를 들 수 있다.

20대중후반에 주로 내가 만났던 분이었는데, 지금 그분의 생각에 예전과 같이 많이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요즘도 가끔 한번씩 내가 뭔가 다시 나를 추스려야할때 나는 마틴 로이드-존스에게 찾아가서 질문을 하곤 한다.

1990년대 후반, 코스타에서도 그랬고, 내가 다녔던 교회에서도 그랬고, 내가 코스타를 비롯한 여려 경로로 만났던 미국의 다른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그것은 일종의 ‘부흥’에 대한 소식들이었다.
그것이 정말 ‘부흥’이었는가 하는 것은 잘 모르겠다. ‘부흥’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도 사람마다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96부터 98년정도까지 나는 참 여러 경로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성령의 일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미국의 꽤 여러곳 흩어져 사는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내가 탐닉했던 책이 마틴 로이드-존스의 ‘부흥’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때 그것이 부흥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심지어 마틴 로이드-존스의 부흥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도 지금은 내가 100% 동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만난 마틴 로이드-존스를 통해서 내가 깊게 배운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기준’에 대한 것이었다.

로이드-존스는 웬만한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고 이야기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라면 정말 엄청나게 대단할 수 있다고, 그 기대를 포기하지 말자고 이야기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논리적으로 사람들에게 설득했다기 보다는 감성적으로 설득했던 분이었던 것 같다.

정말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면, 정말 성령께서 충분히 교회를 깨우신다면, 정말 설교자가 성령에 사로잡힌다면…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일어난적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이정도 하면 충분하지. 이정도하면 하나님께서 충분히 하신 것이지…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분을 만나면서 내가 받은 느낌은…
뭐랄까…
이분은 마치 그랜드 캐년과 같은 장관을 본 이야기를 듣고서는, 동네 뒷산에가서 이걸로도 충분히 자연은 아릅답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진짜 너희가 보고 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장관이 있다고 설명하는 사람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분은 설교자로서 자신을 보면서도 늘 안타까워했고 목말라했다. 이걸로 충분하지 않은데… 정말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이것과는 차원이 다른 설교나 나오게 되는건데….

나는 그 ‘포기하지 않는 기준’을 마틴 로이드-존스로부터 배웠다.

마틴 로이드-존스를 만난 이후 그래서, 나는 늘 목이 마르다.

여전히 내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과 저자들 (4)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으로 김교신 선생을 들 수 있다면, 가장 큰 영향을 준 책으로는 자크 엘룰의 ‘뒤틀려진 기독교’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91년이었던가… 뒤틀려진 기독교라고 쓰여있는 책을 내가 다니던 교회의 book table에서 보고 제목에 이끌려서 읽었다.
이게 원본은 불어로 되어 있는 것인데, 내가 읽었던 번역본은 아마 불어 –> 영어 –> 한국어로 번역된, 그러니까 불어 원본을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 번역본을 한국어로 번역했던 것이었던 것 같다.
번역이 그렇게 잘 된것은 아니어서 (그때 사실 한국의 기독교서적 번역이 대충 그런 것이 많았다.) 읽는데 애를 좀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내가 접했던 그 책은 정말 충격이었다.
기본적으로 나는 그때 프란시스 쉐퍼에 푹 빠져있었을 때였다. 그런 내가 접했던 자크엘룰은 뭐랄까… 한단계 더 높은 레벨의 고수같은 이지미랄까… 하여간 뭐라고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압도적인 분석이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콘스탄틴 황제로부터 시작된 Christendom에 대한 비판을 처음 접한 것이 그 책이었고, 그야말로 하나님 이외에 그 모든 권력을 다 모두까기 하면서 거부하는 그 범접할 수 없는 포지션은 압권이었다.

그 이후 자크엘룰의 다른 책들도 조금 더 읽어보긴 했는데, 내가 처음 접하면서 큰 충격을 받은 탓이었을까… 이 책만큼 강력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자크 엘룰을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무정부주의자’ (Christian anarchist)라고 부른다. 무정부주의자라고 여겨질만큼 권력에 대한 강한 거부가 기독교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분의 충격적 선언은 그 이후 35년동안 계속해서 내게 깊게 영향을 끼쳐왔다.

80-90년대 소위 기독교 세계관을 주장했던 사람들중 많은 이들이 그 이후 한국과 미국에서 기독교 우파 혹은 극우로 변질되는 일들을 많이 보았다. 위에서 언급한 프란시스 쉐퍼가 어쩌면 그 대표선수일수도 있겠다.
미국의 소위 ‘복음주의자’들이 트럼프 지지세력으로 변질된것, 한국에서는 김진홍등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극우로 변질된것을 보면 나도 그런 식으로 흘러가게될 위험이 아마 있었을 거다. 나와 같은 교회에 다니던 선후배중에도 그렇게 된 사람들이 있다.

여러가지 분석을 해볼 수 있겠지만 그렇게 사람들이 변질되게된 큰 이유로는 리차드 니버의 기독교 현실주의같은 입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나는 그 분석에 동의하는 편이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빠지지 않도록 나를 지켜주었던 것은 결국 자크엘룰을 내가 일찍 만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내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과 저자들 (3)

그런분들중 아마 가장 먼저 내가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은, 김교신 선생일 것 같다.
20대 초반, “김교신 평전”이라는 한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아마 복음과 상황에서 김교신이 언급된 것을 보고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이후, 아마 90년대 초반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김교신 전집이 발행되어나왔다. 나는 그것들을 접하면서 김교신 선생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우석대 박상익 교수님의 블로그를 알게 되어서 그분의 글들을 참 열심히 읽기도 했었다.
그리고 그분의 여러가지 생각에 혼자서 무릎을 치며 공감을 했다.

나는 꽤 충실한 캘빈주의자였는데, 김교신 선생과 그분을 따르는(따르던) 분들의 생각을 접하면서 내가 진성 장로교인이 되기는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대충 40대 초반이 되면서, 주로는 애나뱁티스트적 관점에 조금씩 눈을 뜨고 그쪽의 생각들을 배워가면서 기독교를 민족의 종교로 여기고자하는 김교신 선생의 생각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게되었다.
그리고 나도 역시 미국에 오래 살게 되면서 “예수를 만난 조선의 선비”라고 여겨질 수 있는 김교신 선생이 내게 주는 의미를 많이 잃어버리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면 김교신 선생은 지금 내가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방식, 내가 내 자신과 삶을 생각하는 방식에 아주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분의 성서연구 모임에 자극을 받아, 나도 어떻게든 그렇게 여러가지 형태로 성경공부 모임들을 계속해보려고 노력했다. 교회 system 안에서 그걸 해보기도 했고, 교회 안이지만 system 밖에서 그것을 하기도 했다. 학교 캠퍼스에서, 직장에서, 지역에서, 아는 사람들끼리, 그리고 요즘 하고 있는 온라인 성경공부까지… 계속 그렇게 성경공부 모임을 인도하는 사람으로 살게된데에는 김교신 선생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리고 그분이 성서조선에 연재했던 ‘공개일기’를 보면서 나도 뭔가 그렇게 하고싶다는 생각에 이 블로그를 하게 되었고, 이렇게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이 벌써 거의 한 20년쯤 되었으니…
김교신 선생은 내게 role model이 되셨던 것 같다.

내가 그분만큼 훌륭한 사람이냐하면 당연히 그런 비교는 말도 되지 않는다.
그분의 신앙, 인품, 그 영향력은 그냥 내가 조금더 배우고 닮고 싶은 목표다.

나는 매우 자주… 일년에도 몇번씩…
내가 이렇게 애쓰면서 살아가는게 과연 무슨 가치가 있을까. 괜히 쓸데 없는 것에 열내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런 생각이 몰려오면 보통 한 한달 정도는 많이 혼자서 회의하고, 낙심하는 기간을 보내곤 한다.
내 삶의 의미없음에… 내 노력의 하찮음에… 그저 먹먹하게 그렇게 시간을 보내곤 한다.

그런데, 그럴때 내게 용기를 주는 fact 가운데 하나는,
김교신 선생의 성서조선의 구독자가 고작 200명 남짓이었다는 사실이다.
아니 세상에… 김교신 선생의 그 잡지를 받아본 사람이 겨우 200명 정도인데…
내가 뭐라고 낙담을 하나… 그런 생각에 다시 생각을 고쳐잡곤 한다.

여전히 내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과 저자들 (2)

요즘은 한달에 한권 책읽기를 하지는 못하고 있다.
언제부터 그 결심이 흐지부지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대충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때쯤 부터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름 공부에 재미를 붙인 이후 계속 공부하는 것은 내 나름대로의 취미가 되었다.
그러면서 조금더 성경 본문을 혼자서 연구하는 것도 일종의 내 루틴으로 자리잡았다.

어쨌든 그렇게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여러가지 관점과 입장들을 접하다보니,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생각의 많은 부분은 내 20대, 30대, 40대때의 생각과 꽤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열정적으로 좋아하며 탐닉했던 어떤 작가, 신학자, 철학자 등의 책과 글들에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관심을 갖지 않게 된 것도 많이 있다.

그런데 어떤 책이나 작가들은 예전에 깊게 탐닉했다가, 한동안 소원해졌다가, 이제 다시 나이가 들어가며 그 분들의 생각을 다시 곱씹게 되기도 한다.

그분들의 생각에 당연히 모두 동의하는건 아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이 살았던 배경과 상황을 고려해 보았을때 그 생각들이 여전히 내게 큰 공명을 주기도 하고, 어쨌든 여러가지로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과 나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곤 한다.

여전히 내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과 저자들 (1)

대학교때 혼자서 이런 생각을 했다.
대충 한학기에 전공과목 6과목 정도를 한 학기에 들었다.
그걸 일년으로 따지면 일년에 12 전공과목 강의를 듣게 된다.
그래서 대충 일년에 12권의 ‘textbook’을 보게된다고 계산할 수 있다.

그래서 혼자 생각했다. 전공책 1권당 여러가지 신앙서적 1권씩 읽어보겠다고.
일년에 12권이니 대충 한달에 1권정도 책을 읽는 것이 되겠다.

그렇게 나는 다소 늦은 나이(20대 초반)에 책읽기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서적’을 읽는다는 것이 ‘신앙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 후 어려운 책은 한달에 한권을 읽지 못하는 일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책읽기를 하면서 나는 그런 공부에 재미를 붙였다.

신학, 철학, 과학, 역사등의 책들을 읽었고,
그러다보니 대충 신학교 목회자과정 (MDiv) 과정에서 배우는 과목의 textbook정도는 대충 30대에 다 읽고 혼자 공부하게 되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예전에 Apple의 iTunesU 라는 platform에서 조직신학, 신약학, 구약학, 교회사, 실천신학등 여러 과목들을 열심히 들으며 공부했었다. 지금은 더 이상 available하지 않은 것 같은데, 한동안 가령 Gordon Conwell 신학교의 MDiv 레벨의 강의들이 거의 다 available하기도 했었다.

어쨌든 그렇게 공부에 재미를 붙이면서 여러 신학적 입장들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고, 나름 좋아하는 신학자, 작가들도 생기게 되었다.

가을학기 성경공부

가을학기 성경공부를 어떻게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다.
원래는 약간 어려운 수준으로 한번 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렇게하면 새로 유입된 사람들이 흥미를 잃어버리게 될 것 같기도 하고…
결국 나 혼자 재미있는걸 하겠다는 욕심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해서 고민중이다.

그리고 또한,
나와 함께 계속 성경공부를 하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이… 과연 그렇게 계속 남아 있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 건강한 것인가 하는 고민도 있다.

내가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도 뭔가를 본격적으로 나와 함께 공부하면서 배우겠다고 하면 조금 더 팔을 걷어 붙이고 열심히 해봐야 하는 것일텐데…
막상 열심히 하지는 않으면서 계속 참여만 하는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그분들에게 정말 도움이되는 것일까 하는 고민이 많다.

늦어도 다음주중에는 가을학기 성경공부 안내를 보내보려고 하는데… 주말에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