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기의 기억

역대하 6~7장에 나오는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와, 연이어지는 하나님의 임재 이야기는 참 스케일이 크다.
아마도 귀환 공동체가 그리는 모습을 솔로몬의 기도와 그 이후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본문이기도 하다. 이 본문을 붙들고 기도를 많이 하기도 했고)

솔로몬의 시대가 정말 유대민족의 황금기 였을까?
그렇다고 평가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객관적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백성들의 역사적 기억 속에서 솔로몬의 시대, 성전 봉헌의 장면은 다시 돌아갈 황금시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 이 백성들의 정체성에 매우 중요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 백성들이 수백년전 왕의 시대로 돌아갈수는 없다.
페르시아의 강력한 제국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 솔로몬의 통일왕조는 현실적으로 돌아갈 지점이 되지 못한다. 세계질서와 여러 환경이 진화해왔고, 몇백년전의 상황이 지금 적용될수는 없다.

내게도 신앙의 황금기라는 것이 있었을까?
한때 나는, 내게도 그런 신앙의 황금기가 있었다고 생각했었다.
주로 내가 젊었던 20대였다. 나름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따르려 노력했던 시절.

그렇지만,
20대의 믿음은 더 이상 내게 relavant하지 않다.
그때 순수하게 가능했던 것들이 있었고, 지금도 그것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기도 하지만,
그 20대의 믿음이 내게 다시 온전히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역대기는 유대인의 성경에서는 제일 뒤에 배치되어 있는 책이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돌아갈 황금시대를 그렸던 것이었겠다.
그러나 그 황금시대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도 내 기억속에만 존재하는, 어쩌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황금시대에서 배울 것이 있기 하겠지만…
그 황금시대로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거나 마냥 그것을 그리워하는 것으로는 내게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이 뒤집어진다

요즘 미국이 정말 이상하다고 이야기한다.
이전의 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있고 여러가지 혼란이 있게 될 것이라고.

이쪽 분야 비전문가로서 내가 생각하는 것 몇가지.

첫째,
현재의 상황 (status quo)는 분명 무너지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언제나 status quo가 무너질때는 혼란이 있게 된다.
나는 현명한 정치가 이런 혼란의 시기에 고통을 최소화하는 준비와 대비를 잘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마 공정한 세상을 바라는 종교인이라면 이럴때 일수록 더 큰 피해를 받게되는 약자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둘째,
status quo는 철저히 미국 중심, 유럽 중심의 패권이었다.
평화는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누구이든 어떤 특정세력, 정치권력, 국가 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결국 폭력에 의한 평화이다.
평화가 깨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꼭 해야하는 일이겠지만,
Pax Americana가 깨어지는 것이 세상의 종말은 아니다.
미국 중심, 유럽중심의 패권이 아닌 다른 세계가 어떻게 가능할까? 그런 세계에서 평화가 가능할까?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러니 status quo가 무너지는 것이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status quo가 선(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차악(次惡)정도가 될 것이다.
status quo의 붕괴가 세상의 종말은 아니다.

셋째,
이 상황에서 벌어지는 악에 대해서는 분명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이 뒤집어지는 상황에서는 선과 악의 기준 자체가 흔들려버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status quo를 지탱하는 수단으로서 활용된 거짓 선이고, 무엇이 조금 더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선일까… 하는 기준이 정말 필요할것이다.
나는 결국 철학과 종교등에서 그 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내가 접하는 대부분의 기독교에서는 그런 능력과 의지가 없어보인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그런 고민과 생각을 하고 있기를 바란다. ㅠㅠ
나 같은 비전문가도 그런 고민을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는 설교자들이나 말씀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에게서는 그런 고민의 아주 shallow한 수준조차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넷째,
무너지는 질서를 성경에서는 apocalyptic language를 사용해서 표현하곤 한다.
해가 어두어지고, 어둠이 덮이고, 온 세상에 재앙이 오고….
그리고 그것을 어떤 이들에게는 끔찍한 일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새로운 희망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쨌든 공고한 status quo는 우상이 되고, 그 우상은 사람들을 착취하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Time management

지난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내 일정이다.
보통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을 하는 셈이고,
아마 3월 이후에는 이것보다 조금 더 바빠질 것 같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없을때도 많고, 이건 순전히 meeting을 하는 시간이니,
실제로 내 일을 하는 시간도 당연히 필요하다.
대개 오후 3시부터 5시까지는 가능하면 다른 미팅을 잡지 않고 그때 조금 더 붙어 앉아서 해야하는 일들을 하려고 하는 편이지만… 대부분 시간이 부족하고,
그러다보면 8am-8pm 일과중에 일을 끝내지 못하고 밤에 하게될 경우가 많이 있다.

가능하면 하루중 1시간 이상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아침에 조금 더 일찍 일어나게 되고, 저녁에 조금 더 늦게 잠자리게 들곤 한다.

대개 토요일 오전은 성경본문을 연구하고, 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시간으로 쓰려고 노력하고 있고,
조금 짬이날때 한 30분 운동하는 시간을 찾아서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정말 지쳐서 거의 아무것도 더 하고 싶지 않을때가 많이 있다.
나는 너무나도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다.
그러니 아무리 바빠도 발버둥을 쳐가면서 하나님을 붙들어야 살 수 있다.
아마 내게 예수님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보다 더 많이 성공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망가져 있었을 것이다.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 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예전에 많이 고통스러웠을 때,
밤 3~4시. 정말 아무도 없는 공원의 빈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간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그때 타고 다니던 오래된 차의 문을 모두 잠근 채,
아무도 없는 깜깜한 주차장에서 혼자,
차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시편 23편을 외웠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시라는 것이 하나도 믿어지지 않을 때였다.
나는 삶의 바닥에 있다고 느꼈고,
하나님의 도우심따위는 내게 전혀 없다고 느꼈다.

그렇게 한 밤중에,
아무도 내 고함을 들을 수 없는 곳에서,
나는 얼굴이 뻘개지도록 고래고래 시편 23편을 반복해서 암송했다.

그리곤 땀에 젖어서, 지쳐서, 혼자 멍하게 주차장 구석에 켜 있는 가로등을 바라보았다.

때로는 기껏 할 수 있는 최상의 기도가 그럴 수도 있다.
내 맨정신으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조차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고,
그저 답답함과 불안함 속에서 하나님께 그렇게 따지듯 외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럴때…
시편 23편이 있다는건 참 감사한 일이다.

지난 주일 QT 본문은 시편 23편 이었다.
내게 시편 23편은 그런 시다.

믿음없는 불안함

윤xx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완전 나라가 거덜나고 있을때,
심지어는 재작년말 게엄이 선포되었다가 해제되고 그 이후 혼란이 지속될때에도…
나는 분노하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지만, 나름 믿음이 있었다.
한국 국민의 수준이 결국 그런 저급함을 이겨낼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아마도 그건 불과 40년쯤 전에 일어났던 한국의 민주화의 승리에 대한 경험때문이었을 거다.
87년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독재의 잔당들이 있었고, 그 이후 제대로된 민주국가가 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내가 경험했던 한국에서는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가 승리하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보면서는,
나는 훨씬 더 불안하다.
미국 시민들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이 별로 없다.
이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가 반민주에 대항해서 승리했던 역사적 기억이 전무하다.
일반적인 미국 시민들에 대한 믿음이 별로 없을 뿐 아니라,
미국 엘리트에 대한 믿음도 별로 없다.

불의한 힘에 저항하는 내공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내게는.

그래서… 더 안타깝고 불안하다.

Counter cultural religion?

예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다수가 인도 사람인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은 내게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이가 좀 많은 사람이었는데, 뭔가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좀 일하는게 답답하다고 느껴졌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꼭 누구를 만나면 그 사람의 이름을 묻고, 누구든 그 이름으로 불러주곤 했다.
시간을 써가며 사람을 조심스럽게 대했고, 그렇게 하다보니 일하는게 덜 빠릿빠릿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 agenda를 상대방에게 설득시키거나 심지어는 강요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실리콘밸리의 문화 속에서, 그 사람은 매우 자주 멈추어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게 했다.

그 사람은 나름 힌두교를 practice하는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사람의 힌두교적 사고방식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counter cultural한 모음을 가지게 했을까?

요즘은 태국 사람들과 일을 많이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일하는게 좀 답답하다고 느껴질때가 많이 있다.
이 사람들도 사람들과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는게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 보일때가 있다.
뭔가 미팅을 빠릿빠릿하게 해야 하는데, 쉽게 다른 이야기로 빠지기도 하고,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일상을 나누는데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쓴다.

내가 알기로 태국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교신자다.
혹시 이 사람들의 그런 성향이 혹시 그런 종교적 배경으로부터 비롯되었을까?

지난주 태국에 가서, 그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뭔가 살짝 느린 템포로 서로 웃으며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어쩌면 그들 나름대로의 counter cultural한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자리에서 나는 어떻게 counter cultural하게 살고 있는 걸까?

감당하지 못할 시험

 여러분은 사람이 흔히 겪는 시련 밖에 다른 시련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0:13)

예전에 내가 꽤 확신을 가지고 믿었던 구절이다.
나는 이걸 개역성경으로 암송하기도 했었고.

그런데,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감당하기 불가능해보이는 시험을 주시기도 하시는 것 같다.
그렇게까지 여러가지가 겹치면 저 사람이 결국 무너저버릴텐데…. 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그 사람이 무너져버리는 것을 보게되는 일이 있었다.

능력 이상으로 시런을 겪는 것을 하나님께서 정말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그런데 이 고린도전서 앞뒤 맥락을 보면, 여기서 시험이라는건 시련이라기 보다는 유혹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다. 하나님께서 감당하기 불가능한 유혹을 주시지는 않는다는 것.
그러나 어떤 사람이 그 유혹에 빠져들어버려서 자신을 망가뜨리고 나면 그건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겠고.

어려운 일이 닥칠려면 정말 막 닥칠 수 있다.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만큼 힘든 상황을 겪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그 속에서도…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그 사람을 지탱하게 하는 것 같다.
이것보다는 더 어려운일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아니라.

Can I trust myself?

필립 얀시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뉴스는 내게도 꽤 큰 충격이었다.
물론 나는 그분의 성품이 어떤지, 그분의 삶이 어떤지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글을 통해서 만난 그분은 정말 그러지 않을 것 같았다.

올해 76세이고, 지난 8년간 불륜 관계를 맺었다고 하니, 68세부터 시작된 관계라는 것.

분명히 고백에 나타난 이분의 잘못은 명백하다. 그렇지만 나는 이분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분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어쩌면…. 일방적으로 비난할 자격이 없다고나 할까.

나는 내 스스로를 생각할때,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너무 겁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는 편이다.
그 범죄가 드러나게 될때 겪게될 여러가지 문제들이 두려워서 성적인 범죄를 짓지 못하는 것.
그런데 그건 내가 하나님에게 충성되기 때문에, 혹은 내 도덕적 기준이 더 높기 때문에, 아니면 내가 내 integrity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인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적인 범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두려움에서 피하고 있다는 말.

지난주 긴시간 비행기를 타면서 혼자 여러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존경받는 그리스도인이었던 그가 불륜 관계를 8년이나 지속해오면서 어떤 생각의 흐름을 갖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정당화 했을까.

요즘 나는 Encounter with God 을 따라서 성경묵상을 하고 있다. 요즘 한참 산상수훈을 지나고 있는데…
마태복음에 나타나 있는 다른 방향의 삶의 모습들을 읽으며, 한때 나는 매우 흥분했었다. 내게 이런 새로운 삶의 길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몹시 기뻤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살기위해 노력했고, 아주 단기간에 나는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다른 삶의 모습들에 더 이상 흥분하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그저 그런 것… 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것…이라며 단념해버리고 살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제는 내 묵상 note에… 도대체 나는 어디서부터 길을 잃은 것일까…. 라고 적었다.

필립 얀시 뉴스를 접하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도대체 나는 다를까? 나는 충분히 무너질 수 있는 상태에 놓여 있음에도 그저 겁이 많아서 무너지고 있는 비겁한 상태는 아닐까? 혹시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내 자신을 신뢰 할 수 있을까?

우울한 출장

지난주, 태국에 출장을 다녀왔다.
처음 절반은 방콕에, 후반부에는 파타야에 있는 호텔에서 묵었다.

나는 평소 태국음식도 좋아했고, 태국은 가보지 않은 나라여서 기대를 그래도 조금 했다.

그런데, 다음의 몇가지가 내겐 좀 우울하게 느껴졌다.

첫째,
나는 그래도 꽤 좋은 호텔에 묵었다. 그리고 대개 돌아다니면서 식사를 할 시간이 없으니 호텔 혹은 호텔 근처에서 아침과 저녁을 해결하고 점심은 공장에 가서 먹었다.
그런데, 내가 먹었던 식사가 결코 싸지 않았다. 호텔 저녁부페는 고급이었으니 비쌀만 하다 싶기도 했지만 현지 가격으로 1800 THB까지도 되었다. (거의 58 USD)
매일 그렇게 먹었던 것은 아니고, 대부분 호텔과 붙어있는 쇼핑몰 같은데 가서 먹었는데, 거기서 조금만 골라 들어가서 먹으면 한끼에 400~500 THB (13~16 USD)가 되었다. 태국의 일인당 국민소득이 미국의 10분의 1 수준인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비싼 거다.
그런데 듣기로는 현지 사람들이 먹는 night market같은 데서 먹거나 진짜 태국 사람들이 가는 음식점에가면 100 THB (3~4 USD) 수준에서 먹을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같은 식사인데 관광객들이 먹는 음식과 현지 사람들이 먹는 음식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현지 사람들이 느끼는 박탈감이랄까… 그런건 어떨지…

둘째,
사방에 왕실 사람들 사진이 걸려 있었고, 그 앞에는 뭔가 그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위한 장식(?)들을 해 놓았다. 이게 특히 작년에 왕대비 (지금 왕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 사람을 추모하는 사진들이 많이 있어서 더 심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왕의 존재가 없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라고 살고있는 나로서는, 그 가난한 나라에서 왕으로 군림하면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을 그 나라의 국민들이 추앙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좀 불편했다. 왕실 모독죄 같은 게 아주 엄격해서 뭘 어떻게 해보기도 어렵다고 들었고.
사실 태국은 내가 알기로 예전에는 한국보다 더 앞서있는 경제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전쟁에 파병을 하기도 했고.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태국은 군부의 부패와 왕실의 무능 등이 겹쳐 계속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그런 왕실을 온 국민이 떠 받들고 있는 상황은…. 그냥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셋째,
파타야는 완전 환락의 도시였다.
호텔 앞에 조금만 나가면, 나이 많은 백인 아저씨가 젊은 야하게 입은 아시아 아가씨와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
나는 호텔과 공장 사이만 왔다 갔다 하느라 파타야 도시 자체 여기저기를 다닐 기회를 갖지는 못했지만,
호텔에 가까운 곳에도 아마도 성매매를 하는 사람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호객행위를 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자신들이 선택하지 않은 가난한 환경 속에, 부패한 부자나라의 늙은 돈이 들어오면서, 그저 추한 모습이 만들어 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도덕적이냐 그렇지 않으냐를 떠나… 그저 그냥 많이 마음이 불편했다.

넷째,
태국에서는 여러곳에서 불상 혹은 불교 관련된 장식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탔던 모든 택시에는 다 불상이 dashboard에 있었고,
도시 구석구석에 복을 비는 작은 사원같은 것들이 있었다.
나는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불교의 심오한 명상이나 참선 같은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진지하게 구도를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일종의 respect가 있다.
그러나, 불상을 부적으로 생각하고 가지고 다니거나, 그저 부적 앞에서 자신의 복만을 비는 식의 종교행위는, 특히 사회적 경제적 부조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런 종교행위는, 그저 안타까운 모습일 뿐이었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은, 아… 그래… 그게 지금 한국이나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의 모습인건데…

앞으로 태국에 조금 더 자주 가게 될 것 같고,
계속 태국 사람들과 일하게 될것 같다.

잘 알지도 못하는 외국인이 자신의 문화를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걸 듣는다면 아마 많이 불편할 것 같다.
그러니 지난주 내가 이렇게 불편하게 생각하게된 것 조차 어쩌면 어설프게 잘 못 아는 외국인의 교만한 판단일수도 있겠다.

앞으로 태국 사람들과 계속 더 일 하면서, 그 사람들로부터 더 배우고, 그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경험이 더 있게되면 좋겠다.

새해 바라는 것들 – 나만의 비밀을 늘려가기

1. ㄱㄷㅇ 간사님은 내게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신다.
“네가 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말아라”
나는 예전에는 그 말씀에 많이 동의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그 말씀에 더 동의하게 되어갔다.

2. 매일 이렇게 블로그에서 ‘공개일기’를 쓰고 있고,
매주 2~3개씩 온라인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고,
가끔 여러 세팅에서 강의나 설교등을 하고 있기 때문에,
늘 내 생각과 마음을 여러가지 형태로 표현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생각을 많이 표현할때 빠지기 쉬운 함정은,
내 경험과 생각과 마음을 지나치게 쉽게 일반화 하는 것이다.
내가 이랬으니 누구나 이럴 것이다….

3. 그냥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을 공적으로 나누게 되는 잘못을 범하는 일들이 어떻게 생기게 될까?
우선, 내 개인적인 것들을 절대화하거나 일반화해서 너무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뭔가 공개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할 얘기가 마땅치 않고, 적절한 예가 그저 내 경험과 내 주변 사람의 경험에만 한정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4. 이 문제의 해결책 가운데 하나는,
내 사색의 폭과 양을 많이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색의 영역 가운데 일부는 그냥 나만의 영역으로 한정시켜 놓는 것이다.
혹은 하나님과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의 영역으로 남겨 놓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실 나이가 들면서 (그리고 어쩌면 약간은 더 성숙해 지면서) 하나님과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의 영역들이 더 넓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혼자 하는 개인 기도가 아니면 하지 않는 말들이 있고, 생각들이 있다.

바람은 그런 영역을 더 넓히고 싶다.
그저 하나님께만 말씀드리는 어떤 이야기들, (기쁜 이야기, 속상한 이야기, 후회되는 이야기, 자랑스러운 이야기, 감사한 이야기, 외로운 이야기, 아픈 이야기 등등) – 그 영역이 조금씩 넓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