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생에게 미국은 무엇인가

국민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다. (현재는 ‘초등학교’라 해야 맞는 표현이지만, 동민이가 어릴땐 ‘국민학교’였으므로 이 명칭을 그냥
쓰도록 한다.) 동민이는 하얀색 모시 한복을 입고 시민회관에 모인 많은 청중 앞에 섰다. ‘전국어린이 반공 웅변대회’에 출전한
것이었다. 어찌나 열심히 웅변을 했는지, 6.25 전쟁 당시 북괴군을 도운 소련을 성토할 때와 우리 자유대한을 도운 미군을 높일
때엔 눈물도 찔끔 났다. 많은 박수를 받은 동민이는 결국 최우수상을 받았고, 많은 선생님들로부터 ‘반공 어린이’로 칭찬을
받았다. 동민이는 작은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했다. 하루빨리 커서 북괴를 물리치고 빨리 우리 나라를 미국과 같은 잘사는 나라로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노라고.

중고등학교 때에도 동민이는 유난히 미국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왠지
영어는 더 재미있었고, 미국의 50개나 되는 주 이름을 다 외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 자랑거리였다. 뭐든지 미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기면 친구들은 동민이에게 물어보곤 했다. 학교에서 늘 좋은 성적을 유지하던 동민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는
꿈을 꾸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공부한 결과 동민이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인 우수대학교에 좋은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 시절을 시작하면서 우연히 만난 어느 여학생의 권고로 학교 내 성경공부 동아리에 가입했고,
동민이는 두달여의 성경공부 끝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였다. 내내 공부만 알던 동민이가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동민이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비로소 ‘세상’에 대한 진지한 사랑의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동민이에겐 새로운 갈등이 생겼다. 사회
정의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친구들의 ‘정의로운’ 목소리에는 언제나 ‘반미(反美)’ 구호가 끊이질 않는 것을 보았다. 여태껏 자신이
알고 있는 미국과는 너무 다른 얼굴을 한 미국에 대해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과연 어떤 미국이 진정한 미국이란 말인가.
자유와 평화와 풍요의 나라, 그리고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복음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 나라. 그 미국은 과연 우리 민중의
적이란 말인가.

대학교를 마칠 무렵, 많은 고민과 기도 끝에 동민이는 미국 유학을 결심하였다. 동민이가 공부하고
있는 무선 통신 분야는 미국의 연구가 많이 앞서 있는데다 어려서부터의 꿈인 미국 유학을 꼭 이루고 싶다는 욕심도 이 결정을
하는데 큰 동인이었다.

미국 유학 생활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매일 쫓기는 실험 스케줄과 지도교수로부터의
압력, 경제적 압박, 장래에 대한 불안 등 여러 종류의 스트레스가 언제나 동민이를 사로잡았다. 그나마 매일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겨우 자기 생활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 버겁게 느껴지곤 했다. 이런 힘든 환경은 동민이를 현실로 자꾸만
몰아세웠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에 와서 동민이는 미국에 대해 어려서부터 가졌던 관심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과연 미국은 유학생들에게 무엇인가?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기회의 나라이자, 신앙의 나라인가? 아니면 제3세계 빈곤을 만드는, 이기적인 거인인가?

미국에 대해 생각하면서 몇가지 주의해야 할 점들을 생각해보자.

우선 미국에 대해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자세이다. 미국의 모든 것은 앞서있고, 미국의 모든 것은 선하고, 미국의 모든 것은
신앙적이라는 입장들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적으로 한국을 포함한 모든 것은 그보다 열등한 것이라는 생각도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과연 미국은 기독교적 기반으로 세워지고 운영되는 ‘선한’ 나라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미국을 초기에 형성한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온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리고 미국 사회 곳곳에 기독교적 문화가 적어도 한국에 비하면 많이
침투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의 국가 운영이나 사회 전반에 흐르는 사상의 조류나 문화, 그리고/또는 경제적 체제 등이
성경적 기반 위에서 형성되어 운영된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오히려 미국의 많은 부분은 성경적 기반 위에서 형성/운영되고
있다고 보기보다는 인본주의적인 기반 위에서 형성/운영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으로서 미국의 인본주의적인 흐름을 기독교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큰 오해로부터 비롯된 실수를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미국을 선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람이 이번 WTC 테러 공격에 대해 보일 반응을 생각해 보면
아주 명확하다. 그것은 ‘선’인 미국에 대해 ‘악’인 이슬람이 공격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대한 반응으로 ‘악’인 이슬람
국가들을 공격하는 것은 성전이 된다. 그러나 미국이 취해온 대외 정책과 반미의식의 원인 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채
무차별하게 기독교 = 미국= 좋은 나라, 이슬람 = 나쁜 나라의 공식을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하겠다.

반대의 극단은 절대적인 반미(反美)의 입장이다. 제3세계 대부분의 빈곤은 미국의 주도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에 기인한
것이고, 미국의 패권주의는 힘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악’이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여전히 민중의 적인
자본주의의 총 본산으로서의 미국은 타도 혹은 극복의 대상이라는 좌파적 생각이 이런 입장을 취할 수 있겠다. 이런 입장은 자주
설득력을 가지고 있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내용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미국에 대한 증오가 큰 나머지, 미국의 모든
것을 악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지난 WTC 테러 공격 이후 일부 인터넷 게시판 등에서 볼 수 있었던 반응 가운데에는 통쾌하다,
잘됐다, 속 시원하다는 식의 내용들이 있었는데 어찌보면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인한 생각이다. 무고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희생된
사건에 대해 통쾌해 할 수 있는 것은 어찌보면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편향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어느 개인을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주신 은사와 특징이 있듯이 민족 혹은 족속에도 그러한 것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미국의
모든 것이 ‘선’ 혹은 ‘악’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미국의 장단점을 타산지석으로 우리 민족의 은사와 특징을 잘 계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한국과 같이 폐쇄적이고 획일적인 사회 속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비교, 분석하여 발견하기 어려우나, 미국과 같은
다인종 다문화 사회 속에 있는 우리 유학생들은 이러한 일은 하기에 아주 적절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가 될 것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이슈일 것이다.

미국은 기독교 문화가 널리 깔려
있는 나라, 그러나 결코 기독교적이지 않은 나라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20세기의 탁월한 사상가 프란시스 쉐퍼도
미국에게 있어 다시 돌아갈 ‘Golden Age’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 미국에 대해 혹은 서구 문화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편견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1901년 태어나 1945년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난 김교신이라는
신앙의 선배를 생각해본다. 김교신은 암울했던 시기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며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울 꿈을
꾸었던 신앙적, 민족적 선각자였다. 그는 그 당시 우리 나라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던 강국(强國) 일본에 유학했던
유학생이었다. 그가 <성서조선>을 통해 나누었던, 그리고 그의 일기를 통해 비추어졌던 그의 사상은 그를 ‘100년이
지나도 그리운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김교신은 일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고, 무교회운동의
창시자이자 반군국주의자였던 우찌무라 간조로부터 성경을 배웠다. 따라서 그의 문집을 보면 많은 일본사람들과 매우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더구나 우리 민족과 일본 민족을 비교하면서 우리 민족의 부족한 점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모습들도
잘 나타나 있다. 일본 유학생으로서 일본으로부터 배울 것들에 많은 관심이 있었던 모습이다. 그러나 또한 ‘박물학자’였던 김교신은
<조선 지리 소고>와 같은 글에서 우리 지리를 고찰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는데 노력을 하는 등 민족적인
자존심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성서적 입장에서 일본이 반드시 망할 것과 조선이 반드시 독립할 것을 이야기 하였고, 이는 일본
경찰들도 혀를 내두른 점이었다. 1945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교사직에서 쫓겨난 뒤, 함흥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돌보다가 세상을 떠난 진정으로 ‘낮아져서 섬긴’ 유학생이었다. 우리 나라와 일본, 그리고 세계 많은 나라에 대한
‘성서적’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성서적’ 입장에서 각 나라와 민족의 장단점을 볼 수 있었던 선각자였다.

어쩌면
매우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유학생인 동민이와 (그리고 내 자신과), 우리 신앙의 선배인 김교신을 비교하며 몹시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다. 이제, 21세기 ‘강국’인 미국에 유학하고 있는 우리 역시 편향된 반미 혹은 친미가 아닌 ‘성서적’ 시각을 제대로
갖추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우리 민족의 장래에 대해 치우치지 않은 비전을
제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더운 여름날 냉수 한 사발 같이 시원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1년 10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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