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코어 엔지니어


중학교 읽었던, 상대성 이론을 쉽게 설명한 교양서적 권을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크기의, 아주 짧고 쉬운 책이었는데 저는 책을 번씩 다시 읽으며 흥분했었습니다. 사물의 근본을, 세상의 이치를 밝혀내는 물리학에 저는 완전히 매료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제가 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것으로 생각했지만, 저는 의사가 아닌 이공계를 택했습니다. 물리학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졸업했던 대학은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자유롭게 전공을 선택하는 시스템을 택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원하는 전공을 마음대로 선택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물리학을 선택할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가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꿈꾸었던, 세상의 근본적인 원리를 파헤치는 그런 위대한 학자가 자신이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했던 모든 생각이 미숙한 것이었지만, 당시엔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나마 물리학과 매우 가까워 보이는, 그러나 순수과학 아닌 공학 범주에 드는 전공을 선택했습니다. 그렇게 공학을 선택하면, 최고가 되지 않더라도, 밥을 먹고 같다는 생각해서 결정한 나름의 타협이었습니다.


그렇게 선택한 재료공학은 제게 매우 재미있는 학문 분야였습니다.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제겐, ‘순수과학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그런 것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박사 과정 지도교수를 정할 때도 지나치게 실용적인 연구를 하는 실험실보다는 자연과학적 원리를 파헤치는 실험실을 택했습니다. 박사과정을 하는 중에도 원리를 파헤치는 것에 대한 강박은 계속 되었습니다.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내용으로 박사과정을 마무리할 있는 것을 포기하고 중간에 논문 주제를 바꾸어 가면서까지 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 몰입했으니까요. 제게 있어 공대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것은, 안정적인 밥벌이를 있는 환경 속에서 순수과학을 하는 적절한 타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실리콘 밸리에서 하드코어 엔지니어들을 만나면서 철저하게 깨어졌습니다.


제가 일하는 그룹의 디렉터는 미국의 스쿨 박사입니다. 사람의 주도 아래, DVD+RW 기술이 개발되었습니다. 학력으로나 경력으로나 소위 스펙 좋은 사람이지요. 디렉터인만큼, 아무래도 행정적인 일들을 많이 다루어야 합니다. 높은 사람들과 회의도 많이 있고요.  어느 퇴근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에 실험실에 들어가 보니 사람이 열심히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열중해서 여러 샘플들을 측정하고 있는 그에게 제가 그러고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오늘 온종일 높은 양반들과 회의를 하느라 몸과 마음이 피곤해. 정말 지루한 회의를 하느라 지겨워서 혼났어. 그래서,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조금이라도 하다가 집에 가야 스트레스가 풀릴 같아서 말이야. , 아까 네가 이야기했던 고장 실험장비 있지? 내가 그거 손봤어. 이제 거야.”


사람에게 있어 실험은 스트레스 해소를 하는 즐거운 이었던 것입니다.


저희 그룹에는 이런 사람들로 가득 있습니다. 자기 돈으로 몇백 하는 전자제품을 사서 분해를 후에 새롭게 알아낸 것을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학 때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아 전기 자동차를 자기 손으로 직접 디자인해서 만들어본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 집에 공작실(machine shop) 두고 필요한 샘플을 자기 돈으로 만들어와서 회사에서 사용하기도 합니다. – 정말 뼛속 깊숙이 공돌이들/공순이들 입니다!


이렇게 열심히, 열정적으로, 그리고 재미있고 신나게 일하는 우리 그룹 사람들에게 그렇게 열심히 일하느냐고 물어보면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 세상에서 쓰이는 신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여러 가지 필요 때문에, 논문을 쓰는 일을 하기도 하고, 학회에 참석도 합니다. 저희 그룹에도 학계에서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있어 일하는 가장 커다란 동기는 발명(invention)입니다. 발명 자체가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열심히 배우고 다른 이들과 나누었던, 창세기의 문화명령에 근거한, 소위 기독교 세계관 따르면 우리가 땅에서 하는 가운데 많은 일은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피조세계를 다스리라는 명령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에게 피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대리자(agent) 되어 창조활동을 하라는 의미를 담으셨다는 것입니다. 가령, 플렉서블 디스플레이(flexible display: 자유롭게 휘어지는 디스플레이) 세상에 만들고자 하는 하나님의 창조의지는, 그런 기술을 개발하여 발명하고 제품으로 만들어내는 저와 같은 엔지니어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대학 때부터 그렇게 열심히 기독교 세계관 스터디도 하고, 책도 읽고, 친구들과 열띠게 토론도 하고,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도 했었는데, 막상 크리스천 엔지니어로 사는 제가 그것을 삶의 현장에서 충분히 깨닫고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순수과학에 대한 막연한 헛된 동경에 사로잡혀, 그리고 기술을 개발해서 세상에서 쓰이게 하는 것이라는 공학의 원래 의미를 잊어버려, 그저 논문 쓰고 학회 가서 발표하고, 이름 내고 유명해지는 것에 목매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논문 쓰고 학회 가서 발표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적어도 엔지니어 대다수가 직업활동의 핵심과 목표로 삼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하는 일의 의미를 재발견한 이후, 저는 열심히 일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마음에 두셨던, 피조세계에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가득 차게 되는 , 그리고 예수의 삶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구체화한 창조(new creation) 땅에 구현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자신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제가 직장 생활 속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구현해나가는 일에는 많은 실제적 어려움도 있고, 여러 가지 유혹도 있습니다. 회의가 있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아 보일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직장 생활 속에서 그것을 배워가며, 지금 시점에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서 그리스도인 엔지니어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흥분되도록 신나는 일입니다!

이 시대에 엔지니어로 열심히 일한다는 것

제가 자주 들르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있습니다. 제가 그곳에 글을 쓰거나 하는 형태로 참여하지는 않지만 거의 매일 들러서 올라오는
글들을 보곤 합니다. 그곳에는, 지금 대학생으로부터 제 나이 정도 되는 사람에 이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나눕니다. 대부분은
공대생/공학자/엔지니어입니다.

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미싱공’이라고 칭합니다. 그 논리는, 60-70년대 한국의 경제 성장이 ‘미싱공 언니’들의 노동착취를 통해
이루어졌다면, 21세기 초반 한국의 경제 성장은 현대판 미싱공인 엔지니어들의 노동착취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월화수목금금금’의 생활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45세면 다니고 있던 회사 나와서 뭐 하며 살지 막막해지는
현실은 40년 전 미싱공 언니들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푸념입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이겨보겠다고, 동생들 학교 보내겠다고 시골집을 나와서 상경, 공장에 들어가 하루 15시간씩 노동에 시달려야 했던
예전의 ‘미싱공 언니’들에 비하면 물론 지금 엔지니어들은 여러 가지 처우가 훨씬 좋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엔지니어들이
느끼는 박탈감이랄까요 그런 것이 매우 심각한 수준입니다.

저는 수년 전 KOSTA/USA 집회에서 손봉호 교수님께서 하셨던 한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제가 그때까지 씨름했던 학문/직업세계와
신앙의 통합에 관하여 가장 명쾌한 그림을 그려주는 말이었습니다. 손봉호 교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 이 땅의 모든 것들을 그분의 주권 아래 회복하시는 그때가 되면 (하늘나라에 가면), 그곳에서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과 함께 열심히 땀을 흘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노동의 기쁨이 그때는 회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도인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올 세상의 삶 (life to come)의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서 삶과 사역과 선포와 죽음과 부활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치, 새 창조가 이제 이 땅에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고 그 가치대로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월화수목금금금’을 하며, 자신의 상황에 절망하는 21세기 초반의 엔지니어들에게,
예수께서 선언하신 이 새로운 세상, 새 창조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그 고민을 가지고 실제 삶을 살아내는 일은 이론적으로 단순하게 이야기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제가
대학생 때, 대학원생일 때 열심히 배웠던, 창조-타락-구속의 소위 ‘기독교 세계관’의 틀은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이 너무 벅차게
느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적용 가능한 이야기이긴 한 걸까 하는 좌절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 세계관을
이야기했던 이들은 다들 교수님이 아니었던가. 정말 ‘세상’에서 뒹구는 공돌이-미싱공들의 현실에는 그저 맛있어 보이는 자린고비의
굴비는 아닐까.

제 나름대로 1980년대 후반 소위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을 접하면서 그야말로 가슴이 벅차게 뛰는 경험을 했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이원론의 극복이라는 가치를 끄집어내서 살다 보니  심하게 세속화되어버린 저 자신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소위 ‘빡센’
세상을 접하면서 그 기독교 세계관(혹은 개혁주의 세계관)의 프레임워크가 정말 유효하긴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도 하였고요.

물론 제 나름대로 이에 대하여 정리해가는 생각이 있긴 합니다만, 그리고 기회가 되면 이곳 eKOSTA 에서도 그런 내용을 나누며
많은 다른 분들의 생각을 듣고 싶기도 합니다만, 오늘의 글은 이 정도에서 애매하게 맺어보려고 합니다. (혹시 댓글 등으로 제
생각에 ‘딴죽’을 거시거나 추가 설명을 요구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그렇게 좀 더 이야기를 진행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제가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은, ‘회복된 그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즐겁게 노동할 것이다.’라는 그 그림입니다. 도대체
지금 이 시점에 엔지니어로 열심히 사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고 어떤 분들이 제게 물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땅에
살면서도 저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저 영원한 나라가 품는 가치 가운데에는 온전하게 회복된 노동도 있다고,
그리고 비록 여러 가지 현실이 여전히 어그러진 모습 속에 있지만, 나는 그 속에서 그 회복된 가치가 마치 지금 현재의 가치인 것
같이 살아내는 특권과 책임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렇게 대답을 할 것 같습니다.

http://www.ekosta.org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작년이었던가요, 제가 어떤 지방에 가서 다른 교회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gpKOSTA를 마치고 제가 아는 어떤 분이
담임목사님으로 계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제게 주일 예배에서 간증해 달라고 하셨는데, 저는 제 간증을
하는 것을 늘 불편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간증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어서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님께서 워낙 완강하게
말씀하셔서 울며 겨자 먹기로 간증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형편없는 간증 동영상이 제 아내에게 입수된 것이었습니다. 제 아내는 그 간증을 듣더니 다시는 다른 곳에 가서
이렇게 이야기하지 말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도 듣기 어려웠다나요.

그 간증의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습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했다.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공허함이 있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그 공허함이
해결되었다.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잘했던 공부를 어렵게 하심으로써 내가 하나님 나라 백성다움을 갖추어나갈 수 있게 해
주셨다.’

제 아내가 문제로 삼은 것은 간증의 전반부였습니다. 소위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식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반감만 주기
쉽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 아내의 생각이 맞습니다.

eKOSTA에서 제게 ‘직장생활’에 관한 글을 써 보라고 권유했을 때, 저는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 생활을 하는 여러 가지 고민과 기쁨과 좌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 이야기가 마치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와 같은 식으로 들릴 수 있다는 우려를 깊이 하지 않은 채 글쓰기를 허락한 것 같다는 우려가 그 후에 닥친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미국에서 소위 ‘명문학교’로 일컬어지는 곳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좋은 직장’으로 여겨지는 곳에서
일하였고,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실리콘 밸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직장의 안정성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시대를 사는 다른 분들에 비하면 꽤 안정적인 환경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하는 내용도 소위
‘첨단’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직장생활에서의 만족도도 매우 높습니다.

그런 제가 제 사는 이야기를 쓴다면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지요. 이렇게 미리 언급해둠으로써, 제가 엘리티시즘을 추구하는 것이라든지, 혹은 제 자랑을 하려고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은 것인데, 제대로 전달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얼마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런 자기소개와 변명이 뒤섞인 애매한 글로 제 eKOSTA 글쓰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제
직장생활에 대한 글을 쓰면서, 제 스스로 제 생각을 정리해볼 기회를 얻기 원함도 있으나, 무엇보다 다른 분들의 충고와 조언,
질책과 코멘트를 듣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인터렉티브한 대화가 오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http://www.ekosta.org

===
얼마전부터 eKOSTA에 정기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주에 하나… 적어도 두주에 하나 정도는 쓰겠다고 결심하고 시작했는데, 자꾸만 글쓰기를 미루게 된다.
앞으로는 가능하면 매주 월요일은 eKOSTA 글로 여기 내 블로그에 올리겠다고 결심하고 해야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는 효과가 있을 것 같아…
일단 처음 두편을 여기에 올린다.

KOSTA/USA-2009 집회를 기대하며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동민이는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아니, 그저 군대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 그에게 군대 이야기를 처음 해 주었던 동네 아저씨에게서 들은 군대는 사람이 지낼
만한 곳이 아니었다
. 죽음의 위협을 느낄만한 고된 훈련, 아주 열악한
생활환경
, 끊임없는 구타 등이 군 생활의 일상이었다. 그 허풍쟁이 아저씨가
해준 무용담은
, 높은 절벽에서 병사들을 무작위로 떨어뜨려 살아남은 사람만 제대하게 했다든가,
정기적으로 산에 가서 곰이나 호랑이와 같은 야생짐승을 맨손으로 잡은 사람들이 진급하게 된다든가, 맨손으로 독사를 잡아 가죽을 벗기고 날로 먹도록 훈련을 받는 다든가 하는 살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 아저씨는 큰 악의 없이 8살짜리 꼬마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던 것이었지만,
꽤 나이가 들어서까지 군 복무에 대한 비합리적인 두려움은 동민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대공황 이후 최대의 경제위기라는
현재 상황에서
, 세상을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지도 모른다
. 당장 매우 급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두려움이 그저
8
살짜리 꼬마의, 군 복무에 대하여 잘못된 두려움과 같은 것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잔인한 일일 것이다
. 그러나 이 8살 꼬마의 이야기로부터 우리가 배울
것은 없을까
. 그 아이가 가진 두려움이 실체혹은 진실을 잘못 파악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지는 않을까
. 그리스도인들이 소유한 영적 실체에 대한 바른 지식이 그들을 두려움으로부터 해방할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서의 어려움을 만나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지한 질문들을 우리 자신에게 묻게 된다
.

우리에게 과연 안정(security)을 가져다주는 궁극적 실체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가
?”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하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 이러한 질문들은 비그리스도인들과
얼마나 다를까
?


KOSTA-2009의 주제문의 일부를 다시 한번 읽어보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그러진 질서에 거스르는,
하늘의 가치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내는 일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때로는 우리에게 밀어닥치는 그릇된 가치가 두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
그 두려움으로 말미암아 좌절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안전하다고,
또 많은 물질을 소유하면 평안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그릇된 사상에 우리는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무시하며, 효율을 위해 덜 중요해
보이는 사람들을 희생시켜야 한다고 속삭이는 유혹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낼 수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고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승리가 주어졌기에
, 그를 통한평화’(Shalom)가 현실화되었기에 할 수 있다.


그렇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려움과 두려움이, 허풍에 속은 8살짜리 꼬마가 가지는 수준의, 가벼운 것은
분명히 아니다
. 그러나 우리에게는 세상이 갖지 못한 그 무엇이 있지 않은가.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없는 소망이 외부로부터 (extra
nos
) 주어져 있다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하늘과 땅이 만났던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를 통해
,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평화(Shalom)를 주셨고, 그 평화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 2,000여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조가 바로 그 평화와 용기로 세상에 대하여 승리를 선포하지 않았던가
.


이런 맥락에서, 이번 KOSTA/USA-2009 집회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소망한다.


첫째, 참된 평화(Shalom)
만들어낼 근거가 우리 안에 없음을 가슴 시리도록 깨닫게 되기 원한다
. 우리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어떤 이들이 이야기하는 것 같이 우리가 노력해서 세상의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없음을 발견하기 원한다. 우리 안에 소망의 근거가 없다는 간절한 목마름 속에서, 그 평화의 근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아오게 되기 원한다
.


둘째, 예수의 평화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더 깊이 이해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이 세상이 잃어버렸던, 그러나 예수께서 이루신 일로 인해 우리가 그 안에 거할 수
있게 된 평화가 무엇인지 알게 되기 원한다
. 마치 참된 보석 앞에서 모조품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이,
참된 예수의 평화를 보게 될 때, 우리가 의지하고자 했던 거짓 평안을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


셋째, 그 평화의 감격에 흠뻑 적시길 원한다. 세상이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평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평화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깊이 깨닫고 그 안에서 함께 모여 우리 모든 힘을 다해 함께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 있기 원한다
. 그 큰일을
이루신 하나님의 사랑에 눈물 흘리며 감사하길 원한다
. 우리가 흘리는 감사의 눈물과 함께, 우리가 기대고자 했던 거짓된 안정에 대한 환상도 함께 씻겨져 나가게 될 것이다.


넷째, 내 삶, 내 가정,
내 결혼, 내 진로, 내 꿈,
내 소유, 내 직업 등에 매달려 자기중심적 삶을 살고 있던 천박한 모습에서 벗어나,
세상에 주신 예수의 평화라는 거대담론(Meta-Narrative)에 우리 자신을
헌신하게 되길 원한다
. 내가 주인공이 되는 삶의 이야기에 생명력이 없음을 발견하고, 이제는 예수의 평화라는 새로운 이야기전개(Storyline) 안에서 나를 발견하게 되길 원한다.
그런 과정을 거칠 때에야 비로소 세상을 향한 참된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한 놀라운 용기를 가질 근거가 우리에게 이미 주어졌음을
발견하고 그 용기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로 헌신하게 되기 원한다
. 우리를 둘러싼 여러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생존할 수 있을까 하는 수준의 삶이 아니라
, 세상을 이기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 깨닫고 그렇게
살기로 결단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 그리고 세상이 그렇게도 목말라하는 평화와 용기가 바로 예수 안에 있음을,
우리의 삶을 통해 밝히 드러내겠노라고 함께 목청 높여 선언하는 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지난 24년간 KOSTA/USA
통해서 일하셨던 주님의 신실하심에 기대어
, “예수의 평화, 세상을 향한
용기
가 선포되고 선언될 천국 잔치를 기대해본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말한 것은, 너희가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복음 16:33, 표준새번역)

KOSTA/USA-2008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그렇다면, 이 땅에서 치열하게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초월해서 영원을 갈망하며 살고, 한편 초월적인 가치를 가지고 살면서도 이 땅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균형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비복음적 세상의 흐름 속에서 삶의 방식에 대한 그 길을 찾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해답을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을까?

거시적 관점에서의 헌신은 옛날 얘기?

한 달 남짓 전에 미국 서부의 어느 지역에 사는 한 동역자가 직장일로 필자가 있는 동네를 찾았다. 함께 식사를 나누고 저녁 시간을 보내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가운데 하나는 요즘 젊은 학생 세대에게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제는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서정적인 신앙만이 강조되고 있는 요즘의 추세 속에서 신앙도, 헌신도 모두 개인화되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함께 그러한 현실에 깊이 동의하며 안타까워했다

그 저녁의 대화 이후 필자의 머릿속에 맴도는 질문이 있었다. 그것은, 정말 이제 그러한 세대는 지나갔는가 하는 것이다. 이 세대는 함께 부를 노래도, 함께 외칠 구호도, 함께 흔들 깃발도 잃어버린 그런 세대가 되어 버린 것인가. 그리고 이제는 다시 이 세대를 움직일 그 무엇은 개인적, 서정적 신앙 이외에 대안이 없는가.

미래의 꿈은 정규직? 

얼마 전 본 한국의 어느 TV 드라마에서 본, 대학을 가기 싫어하는 어떤 고등학생과 그 학생에게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를 설득하는 부모의 대화가 생각난다. 학생이 대학을 왜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부모는 대학을 가서 네 꿈을 펼쳐야 하지 않겠느냐는 논리로 설득하려 했다. 그러자 그 학생은 느닷없이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째 취업 준비생으로 있는, 옆에 있던 삼촌에게 미래의 원대한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취업 준비생 삼촌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자신의 꿈은 ‘정규직’이라고 답했다. 그 고등학생은 바로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나더러 대학졸업 후 장래 희망을 정규직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대화를 더 극적으로 그리고자 과장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할 사람도 있겠다. 그러나 캠퍼스와 지역교회에서 만나는 학생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 학생들의 꿈도 이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좋은 배우자 만나고, 좋은 직장 잡고, 좋은 교회에서 좋은 신앙생활 하는 것. 여러 가지 다른 형태의 꿈을 이야기하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결국은 그 꿈이 ‘정규직’인 것이다. 경제적 안정을 확보하는 일,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는 일, 사회적 인정을 추구하는 일들은 따지고 보면 장래희망을 정규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의 약간 세련된 표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물론 정규직이 되거나,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좋은 직장을 잡고, 좋은 교회에서 좋은 신앙생활을 하는 일이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 때문에 그것을 얻고자 하느냐, 그것을 얻고자 하는 뒤에 숨어 있는 동인(motivation)과 세계관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 잃어버릴 수 없는 꿈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이야기할 수 없는 세대가 정말 되었다고 한다 하더라도, 과연 그럼 이제는 그 거시적인 관점에서의 헌신을 언급하는 일 자체를 포기해야 할까? 하나님과 하나님을 따르는 신앙을 서정적, 개인적 영역에만 제한시킨 채 그 관점에서 얻을 수 있는 최상의 것만을 추구해야 할 것인가? 절대 그럴 수 없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자 했을 때 처음 이야기했던 것,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면서 선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는 우리 신앙의 핵심이 아닌가. 그 핵심가치를 위해 지난 2000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헌신, 희생하였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를 붙들지 않았던가.

그리고 삶과 신앙의 현장에서 만나는 젊은 학생들에게서, 바로 그들의 삶 전체를 꿰뚫어 통합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한 목마름을 여전히 볼 수 있지 않은가. 20세기에 만났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띠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삶과 인생을 던질 수 있는 그 무엇에 대한 간절함이 있지 않은가. 하나님 나라는, 포기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우리 모두의 궁극적 꿈이자 희망이 아닌가. 문제는 하나님 나라와 같은 거시적인 관점에 헌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같은 핵심 가치가 더는 이야기되지 않는 데 있는 것은 아닐까

KOSTA/USA-2008 집회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KOSTA/USA-2008 집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기대해 본다

첫째, 삶을 의미 있고 아름답게 통합하여 살아갈 가치가 우리 안에 있지 않음을 깊이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이미 가진 삶의 길에 대한 내용이 얼마나 심하게 비뚤어져 있는가 하는 내용을 보며 함께 애통해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둘째,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삶의 길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기를 기대한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우리 안의 거짓되고 어그러진 가치관들이 상대적으로 더 초라하게 드러날 것이고 하나님 나라를 통해 제시된 궁극적 삶의 가치들을 우리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목마름이 우리 안에 생길 것이다

셋째, 하나님 나라를 통해 제시되는 삶의 길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아직 그 가치 자체를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운 궁극적 삶의 길을 내 것으로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고, 이미 그 가치를 알고 있으나 삶 속에서 통합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제 삶을 지배하는 원리로서 새롭게 정리하고 결단하는 일들이 있기 원한다. 유일한 삶의 바른길,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변화가 있기 원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치를 알지 못하는 세대에서 유일한 삶의 바른길을 선포하고 전하는 일들에 많은 이들이 함께 헌신하기 원한다. 세상이 그토록 목말라 보고 싶어 하는 올바른 삶의 길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내고, 이제 우리에게 함께 부를 노래가, 함께 외칠 구호가, 함께 흔들 깃발이 있음을 선언하기를 원한다

KOSTA/USA-2008 집회를 통해 큰 감동을 하고, 집회가 성황리에 마쳐지는 것은 분명히 이 집회를 준비하고 참석하는 모두가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집회를 통해 부어주실 큰 은혜에 대한 기대 이상으로, KOSTA/USA-2008 집회 이후 하나님께서 미국 내 한인 청년 학생 디아스포라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 그로 말미암아 바로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선포되고 확장될 것인지 하는 것에 대한 기대가 우리를 흥분시킨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그 길을 보게 하시고, 그 길을 살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허락하시며, 그 길을 살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KOSTA/USA-2007 연차 수양회를 기대하며

KOSTA를 섬기다 보면, “KOSTA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참 많이 받는다. KOSTA를 만난지 12년째가 되는 필자로서도 어떤 의미에서 매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KOSTA란 무엇일까, 무엇이 KOSTA를 KOSTA 되게 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을 하기위해 딱딱한 파워포인트
슬라이드를 넘기며 설명을 할 수 있지만, 여러가지 내용을 정리해보았을때 사람들이 흔히 KOSTA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선입관과
매우 다른 KOSTA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KOSTA는 집회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서의 KOSTA

많은 사람들이 KOSTA를 여름에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에서 여는 집회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것은 KOSTA가 원래 추구하고 있는 것과 다소 차이가 있다. 물론
KOSTA는 집회를 포함한다. 그러나 KOSTA는 집회라기 보다는 KOSTA의 핵심가치(core value)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만드는 운동(movement)이다. KOSTA가 집회가 아닌 운동으로 규정(describe)하는 것은 KOSTA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신다고 우리가 믿는 소망의 내용때문이다. 만일 KOSTA가 많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일회적인
집회를 통해 소부흥(mini-revival)을 경험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KOSTA는 집회로 규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KOSTA가 꿈꾸는 것은 KOSTA에 참여한 청년-학생들이, (1) KOSTA가 추구하는 핵심 가치에 동의하게
되어 (2) 그 핵심 가치를 가지고 각자의 삶에 살 뿐 아니라 (3) 그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4) 그러한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인정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고 (5)
그들이 몸을 담고 속해 살고 있는 피조세계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이 선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데 여름에모여서
함께 하는 집회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KOSTA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집회가 아닌 KOSTA, 2007년에는

집회를 앞두고 왜 갑자기 집회가 아님을
강조하고자 하는가. 그것은 금년 주제가 갖는 특수성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금년
KOSTA/USA의 주제는 “이 세대롤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아” 이다. ‘변화(transformation)’가 금년의
키워드이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변화는 우리가 알다시피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시작되는 성령의 일하심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리스도인들을 조차도 대량생산하고 싶어하는, 효율성을 중시하는 풍조가 덕(virtue)로 여겨지는 시대에 이 집회를 통해서
효율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완전한(complete) 변화를
경험할 수 있으면 참 감사한 일이겠으나, 우리가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변화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집회를 통해서, 코스탄들이 진정한 변화가 얼마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가
하는 것을 깊이 인식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진정한 변화가 어떤 이들에게는 시작되는, 어떤 이들에게는 한단계 큰
도약을 하는, 어떤 이들에게는 새롭게 갱신(renew)되는 일들이 있기를 기도한다.

건강한 혼란과 무질서를 기대하자

집회를 전후하여 이번 인디애나폴리스와
시카고의 집회에 참석하는 코스탄들에게는, 결단의 기도 이전에, 뜨거운 찬양 이전에, 감격이 있는 말씀 이전에 올해의 주제를
붙들고 고민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고민의 시작은 바로 혼란과 시작되어야 한다. 혼란은 무질서이다. 혼란은
불확실성이다. 혼란은 미확정이다. 혼란의 상태에서는 아무런것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혼란은 좌절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에게, 우리의 마음과 심령에 그런 혼란이 필요하다. 이런 혼란의 상태는 이 세대에서 벗어나기 위한 우리들 자신의 몸부림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마음을 새롭게 하기 위한 첫 삽이 되어야 한다. 이런 혼란은 변화의 열매를 맺기 위한 씨앗이 되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의 말처럼, 창세기 1: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니)의 혼란이 있어야 1:3 이후의 창조의 열매가 있는 것이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열매와 결단으로 연결되는 집회가 되었으면 한다. 혼란으로 시작하여 새로운 마음과 창조와 질서로 끝맺음을 하는
코스탄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을 넘어서는 집회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여러가지 내용들이
그대로 이루어 진다 하더라도 그저 우리가 준비한 모든 것들이 순서대로 진행되어 우리가 예상한 것들만이 일어나는 집회라면 그것은
진정 우리가 바라는 집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심지어는 위에서 이야기한 것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아도, 우리의 예측과 생각이
모두 잘못된 것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것을 너머서 더 크게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에대한 기대감을 우리가 포기한다면 이 집회의
주인공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을 놓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진정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기를 갈망하고,
그러한 변화에의 길에 들어서서, 다른 이들과 전 피조세계를 그 변화로 이끌어내는 KOSTA/USA-2007를 향한 하나님의
바람이, 이번 집회를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일어나길 기도한다.

“반윤리적” 기독교

해적선장 이야기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신실한’ 신자들의 모습을, 해적선장이라는 비윤리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신실함을 지켜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비유한 내용이다. 과장이 되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 모습은 어쩌면 아주 전형적인(typical) 한국적 그리스도인의 슬픈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A군의 직장생활 이야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A군은 한국의 어느 국가출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었고, 지역교회에서도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A군은, 직장에 가서도 신우회 활동등을 통해 ‘직장 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직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직장에서 A군이 부딪혀야했던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있는 회식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 늘 부담이 되었다. 한약을 먹는다, 개인적으로 술이 안받는다, 운전을 해야한다는 등의 핑계도 이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 주일마다 나와서 일을 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도 A군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다. 교회에서 여러가지 일로 섬기고 있는 터에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 A군은 이 원칙을 깨지 않으려 정말 힘들게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A군을 또 힘들게 하는 것은 가끔 ‘전문가 초청’ 가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가끔 세미나를 부탁한 전문가가 세미나를 펑크내면, 그냥 그 세미나가 열린 것으로 보고서를 써 내고 거기서 나온 경비로 연구실 회식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 보고서로 회식이 마련되면 A군은 또한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회식에 빠지려 노력하였다. 부정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 직장 상사에게 피치못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늘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일이 밀려 기한내에 끝내지 못하면, 일을 이미 다른 부서로 넘겼는데 그쪽에서 아직 넘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몇번 둘러대곤 했는데 이런 사소한 거짓말에도 A군은 심하게 마음이 찔렸다. 매일의 삶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정정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기도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A군은 힘들지만 매일 새벽기도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어다. 이런 성경구절들이 A군의 QT 노트에는 자주 적히게 된다.

이것은 가상의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며 분투하는 모습. 그러나, 이 모습을 위의 해적선장 이야기에 대비시켜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반윤리적인 기독교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비판의 소리 가운데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비리와 부정축재, 당회장의 권력을 투명하지 않은 절차를 통해 아들에게 물려주는 문제, 교회가 다른 ‘사업’을 벌이면서 터져나오는 각종 탈세 혹은 비리 의혹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질 때 마다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교회의 집사, 장로, 권사, 목사님들. 이런 우리의 자아상이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서 일까, 어떻게든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사명감에서일까, 아니면 함께 싸잡아서 욕먹는 것이 못내 분해서일까, 우리 안에서도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목소리들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노라고. 적어도 세상의 상식 수준의 도덕만이라도 우리안에서 회복하자고. 사실 우리는 얼마나 교회나 기타 기독교 관련 단체 혹은 집회 등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길 도전받는가.
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과 정직, 청렴, 사랑, 자비와 같은 ‘윤리적 규율’ 등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지키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윤리 기준은 세상의 타락한 가치기준보다 우월하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기반에서 미국내의 불법 이민자들, 미혼모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들을 보았는가. 이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에 일부러 흑인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에 가서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박봉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도덕기준보다 과연 기독교의 도덕기준이 얼마나 더 우월하단 말인가.

자크엘룰(Jacques Ellul)에 따르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반윤리적’인 종교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방해물로 나타나는 모든 도덕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도덕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도덕도 만들지 않는다. 계시된 진리들(자유, 진리, 빛, 말씀, 거룩)은 어떤 것도 도덕과 관계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 진리들이 일깨우는 것은 존재 양식과 삶의 모습이다. 그 삶의 모습은 지극히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위험에 처하지만 항상 새롭게 되는 것이다. 도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의 금지이며 장애물이고 또한 그 안에 정죄를 내포한다. 정확히 예수께서 모든 도덕적 인물들에의해 어쩔 수 없이 정죄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비극들 가운데 하나는 이 자유한 말씀이 도덕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크엘룰, 뒤틀려진 기독교, p120-121,대장간 199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윤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윤리적으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을 비그리스도인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전적타자(全的他者)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간극(gap)이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같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절대적으로 인정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상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들어진 윤리적 강령들 심지어는 도덕적 강령들이 절대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을 흔드는 심각한 도전이다.

앞의 A군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물론 A군이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열정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A군이 지키려 했던 주일성수, 금주와 같은 종교적 강령들이나 정직, 성실과 같은 윤리적 강령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때, A군의 노력은 매우 소모적인 것이 될수도 있다. 또한, 경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반복해서 종교적, 윤리적이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계속 점검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가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을 강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고난 (박해 : Persecution)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이 소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순종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성경의 예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결과는 고난 혹은 박해(persecution)였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필연적으로 갖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발견했을 때, ‘나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쌓아왔던 모든 전제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계관의 사람들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도무지 담을 수 없어 그리스도인들이 사자밥이 된 것, 세속화된 중세교회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받았던 박해도 이 세계관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과 초기 신도들이 받았던 박해 역시 구한말의 유교 봉건적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이 복음적 세계관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것이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이상 그러한 박해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의 근본적인 뿌리가 세계관의 충돌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꺼이 받아야만하는 박해의 내용들을 조금 자세히 볼 수 있다. 매우 치열한 충돌과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도 별로 그렇지 못한 예를 몇 개만 들어보자.

(1) 경쟁 하덕규씨가 노래했듯이, 우리 시대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 혼자 살아남는 것을 배우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살아간다면, 비록 그것이 정정당당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 패배자가 된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산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 혹은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면으로 대항하는 ‘박해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것같이 공감하며 함께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다가 어쩌면 자신도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쩌면 진정으로 시대에 대항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을까.

(2) 성공주의 모두가 성공을 하고자 바둥바둥 하면서 사는 세상이다. 서점의 기독교 섹션에 가보아도 ‘성공’에 대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진열되어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모두가 ‘성공’을 향해 매진해 갈 때, 아내 혹은 남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양보하고 스스로 한 단계 내려 앉는 삶을 선택했다면, 그 후에 주변에 자신과 함께 ‘성공’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어떤 성취와 성공을 과시할 때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비교하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성공’만을 향해 달려갈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나간다면 이 사람 역시 성공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맨몸으로 맞서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3) 직업선택 어떤 직업이 가지는 수입에는 두가지 결정 요소가 있다. 하나는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다. 즉, 그 일의 사회적 기여의 정도에 따라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시적 혹은 장기적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수입의 정도를 가지고 직업선택을 할 때, 임금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선택을 한다면, 혹은 자신의 임금 수준이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가치보다 더 많이 정해져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그 잉여 부분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면, 이런 선택 역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예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사는 가장 좋은 예들을 선별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따라야할 지침들은 물론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각 사람에 맞게 어떤 길로 부르시고 그 부르심은 때로 세상의 시스템에 깊숙히 들어가서 사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전략적으로 겉보기에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해서 사는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 순간이 정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자세가 아닐까.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거대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과 맞서 싸우다 낙오하고 ‘박해받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낙오하는 것은 과연 실패일까. 여기에 공동체의 중요성이 있다. 물론 세상에 맞서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낙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단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저항할 때,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주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의 양심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로마의 권력이, 시대 정신이,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던지 간에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해야만하는 일들은 반드시 하고야 말았다. 성경말씀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해적선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해적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가치기준들을 외면한채 개인적인 종교적 윤리적 경건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해적선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인 비교가 되겠으나, 성적순결을 지키는 해적선장과 난봉꾼이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해안경비대장 가운데 누가 더 유익한 사람이겠는가.

복음은 원천적으로 모든 권력과 모든 권세를 뒤집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권력이 돈이건, 정치 권력이건, 사회적 통념이건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것을 뒤집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세상의 경쟁주의, 성공주의, 배금주의, 인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여 그것을 뒤집는 예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태클을 걸며 유일한 하나님되신 그분의 뜻 이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정치권력, 금전권력, 쾌락주의, 사회적 통념등과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만들어내는 구차한 변명들을 얼마나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많이 접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당당하게 거부하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타협함없이 지키는 진성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낙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 나가는 모습을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일들이 편만해 지길 소망한다. 그렇게 할 때 이땅의 우리 공동체들은 천박한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에 얽매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를 세상에 벤치마킹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사족

이 글은 아직 미숙한 한 유학생의 묵상 글입니다. 많은 분들의 조언, 충고, 첨언들을 기대합니다.

The Passion of Christ –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상상력?

대히트를 친 영화

The Passion of Christ 영화에 대한 평가가 대단하다.
교회에서도 그 시리즈의 설교가 계속되고, 그 영화를 기초로한 성경공부 교재들이 나오는가 하면 전도용으로 이 영화가 사용될 기대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이 살인을 저지른 것을 자수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영화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린다.

참 잘 만들어진 영화인가보다.
나는 보고 싶지만… 여태껏 여러가지 사정이 되지 않아 보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한가지 이 영화의 대 성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소위 ‘거룩한 상상력’에 대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보이는 반응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고난을 매우 생생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에 그 영화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고뇌와 고난등을 다시한번 깊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내가 어릴때 부터 들었던 말은, 소설을 영화로 만들면 그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소설을 글로 읽으면
머리 속에서 각종의 상상을 해 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다채롭고 다양한 장면들을 그려낼 수 있는데, 일단
그것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모든 상상력을 죽여버려 스토리가 입체적이지 못하고 단편적이 된다는 것이다.

중학교 교과서에
나온 소설 ‘소나기’를 TV 방송에서 단편 드라마로 보고나서의 내 느낌이 바로 그랬다. 그전엔 그 소설 속에 나오는 소년과
소녀의 모습, 시골의 풍경 등이 이전엔 입체적이고 다채롭게 머리속에 그려졌었는데, 그 TV 방송을 보고 난 후에는 모든 등장
인물들이 해당 배우들로 고정되어 버렸고 모든 장면들이 매우 평면적으로 축소되는 경험을 했다.

혹시 The Passion of Christ 영화에 대하여 이런 우려는 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거룩한 상상력

성경공부 훈련을 받다보면 성경을 읽을 때 ‘거룩한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이야기를 듣게된다. 성경의 상황과 인물들에 대하여 때로는
감정이입을하고, 때로는 논리적 분석을 하고, 때로는 상황을 상상해 냄으로써 성경의 내용을 더 사실적(graphic)으로
머리속으로 그려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매우 자주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을 보게 된다는 제안이다.

예수님을
10년쯤 믿은 고학력의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가정하자. 이 사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몇번이나 묵상했을까. QT, 성경공부, 설교, 기타 다른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적어도 일년에 2-3회 정도는 이 내용을
접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20-30회 정도 같은 내용을 묵상했다는 이야기인데…

소나기와 같은 소설을 10년에
걸쳐 20-30번 반복해서 읽었다고 생각해보자. 그것도 그냥 가볍게 읽는 것이 아니고 밑줄도 그어가면서, 고민도 해가면서, 내
삶에 적용도 해 가면서, 소설을 읽기 전과 읽은 다음 기도도 하고, 따로 노트도 작성하고.

그리고 아주 훌륭한
감독이 만든 소나기 영화를 봤다고 생각해보자. 그 영화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더 많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을까. 우아, 저기서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잠결에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는 소년의 표정이 저렇게 그려졌구나… 하면서 무뤂을 치고 감탄을 하고
그럴까. 몇 장면에서는 ‘그래 저런건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감독이 참 잘 그렸네’ 할 수 있겠지만 영화 자체가 그렇게도
충격이겠는가.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나는, 나를 포함한 현대인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방식이
어쩌면 지나치게 피상적인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내가 성경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내가 기억도 나지않는 어린시절, 아마도
성경을 읽어온지 30년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고 정기적으로 QT도 하고 성경공부도 한것은 약
15년 가량 되었다.

그런데도 헐리우드의 한 액션배우가 만든 영화를 보면서 그 내용이 너무나도 새로와서 신선한 충격을 받는 것이 정상적일 것인가.


론,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우리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 멜깁슨의 ‘거룩한 상상력’에 의해 사실적으로 그려졌으니 내 마음에 이미
가지고 있던 그분에대한 사랑이 다시 마음속에 새겨져 눈물이 흐를수도 다시 묵상에 잠길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고뇌가
너무도 새로와서, 주님의 고난이 너무도 새로와서 ‘영적 quantum junp’를 경험했다면… 한편 감사한 일이겠으나 한편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성경을 제대로 읽자. 저자이신 성령님께서 정말 그 내용을 내게 보이시도록 기도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성경을 읽자. 그저 한 종교의 경전을 읽는 것이 아니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보이신
내용으로 읽자. ‘내가 아는 누구’에게 적용되는 말씀으로 읽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골수와 관절을 쪼개는’ 말씀으로 읽자.
혹시라도 성경이 그렇게 읽혀지지 않는다면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밥을 굶으며라도 그 말씀이 내게 그렇게 다가오도록 바래야
할일이 아니겠는가.

The Passion of Christ 영화를 본 후,
그 내용을 보면서 다시 감사하고 감동하는 기쁨이 있어야하겠으나, 혹 조금이라도 내가 이미 ‘알고’있던 성경의 말씀이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축소되는 것 같은 그런 답답함을 경험할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이야기를 풀어놓았으니… 나 스스로 그 영화를 쉽게 보러가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4년 9월호에 실렸습니다.

기독유학생의 엘리트주의

유학을 한다는 것,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 속에 자신을 던져 더 나은 학업환경을 찾아 나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모험을
감수하는(risk-taking)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을 나온 유학생들 가운데에서 그러한 모험 감수(risk-taking)를
하고서도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나선, 적극적, 진취적, 모험적 엘리트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허들을 뛰어 넘어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성향을 가진 유학생들이기에
그들이 보이는 삶의 방식과 태도도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 그것은 그들이 매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며 행동
지향적이라는 것이다. ‘학위’로 상징되어 질 수 있는 어떤 ‘성공’을 바라보지 않고서 대부분의 유학생들에게 이러한 모험 감수는
그 자체로 절대로 매력적인 것일 수 없다.

이러한 이들의 삶의 방식은 매우 자주 그리스도인 유학생들 사이에서도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든 유학 생활 도중에 만난 사람이건, 이미 유학을 오기 전에 그리스도인이었건 간에 이들의 신앙
행태는 매우 진취적이고 적극적이며 목표 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회심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기질이나 성품
등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나, 그러한 기질과 성품도 분명히 ‘거듭나야’함을 생각해 볼 때 유학생들의 일반적인
신앙의 모습들은 한번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 목표 지향적 자세의 문제

긍정적인 목표
지향적 자세의 모델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사도 바울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빌립보서 3:14)을
그리스도인의 모델로 제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표 지향적인 자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그 목표가 어디에서
기인했느냐, 그리고 그 목표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거의 모든 기독 유학생들의 ‘목표’는 비기독 유학생들의
목표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저 ‘공부 잘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허울 좋은 합리화를 한다는 것을 굳이 차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목표 지향적 자세는 또 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목표를 학문적/직업적 성취로 설정해
놓고 있는 유학생들에게 신앙 훈련/신앙 교육의 필요를 인식시키는 것이 무척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유학생들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신앙 훈련이나 성경공부도 자신의 목표를이루는 장애물로 여기지기 십상이다.

2. 성공 지향적 자세의 문제


역시 소위 ‘성공’에의 기준과 동기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자세의 건강함 여부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이
경우에도 세속적 가치관에 근거한 성공주의와 전혀 다르지 않은 성공 지향적 자세들이 유학생들과 같은 소위 ‘엘리트’ 그리스도인
사이에 편만한 듯 보인다.

대부분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노력(성실함)과 성공(성취) 사이에
하나님의 자리는 없다. 모든 노력을 기울여 성실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은 분명 하지만, 모든 성실함이 언제나 성공으로
이끌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의 간섭하심과 인도하심이 분명히 있다. 그래서 신실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노력을
했음에도 성공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도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러한 사람들은 실패자이자 낙오자일 뿐이다.

또한 이러한 세속적 성공주의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은 소위 ‘고지론’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는데 사용한다. 그리고 자신의 성공을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기도와 믿음으로 담대히” 물리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3. 행동 지향적 자세의 문제

“40
일 금식기도 3회” 어느 ‘부흥사’의 명함에 이런 ‘경력’이 써 있었다고 한다. 40일 금식기도를 몇번 했다는 것이 신앙의
이력에 들어가는 것도 우습거니와, 어떤 신앙인의 모습이 어떤 일을 행했는지로 판단되는 모습은 더욱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소위 ‘엘리트’ 기독 유학생들 사이에 너무나도 많이 발견되는 모습들이다. ‘예수를 믿으면 이런 것들은 해야지’
하면서 여러 가지 신앙의 행동들을 시도해 보는 모습들. 그래서 흔히 ‘헌신’의 핵심을 ‘행함’에 두는 모습을 흔히 발견한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너무나도 자주 눈에 뜨인다. 지역교회에서도 당장 이처럼 눈에 띄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을 ‘일꾼’으로 여기기
마련이고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에 진정으로 이르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쉽게 지치게
되고, 고갈이 되고, 상처를 받게 된다.

금년 코스타의 주제를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로 잡은
것은 어찌보면 매우 일반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유학생들의 성향에 매우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비정상적이고
비성경적인 (기독) 유학생들의 흐름이 이번 코스타 한번으로 완전히 바뀔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다소 비상식적인 낙관적
기대이겠으나, 적어도 소수의 사람들이 이번 코스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유학생 문화의 “회복”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언급한 유학생들의 문화 속에서 상처를 받고 고갈된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풍성한
“치유”를 경험하는 일들이 있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크게 일하실 코스타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에 실렸던 글입니다.

나는 흑인들이 싫다!?

흑인들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

나는 흑인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엉덩이 아래쪽에 이상하게 걸치는 헐렁한 바지에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도 싫고, 도대체
알아듣기 힘든 억양으로 하는 영어도 듣기 싫다. 한 무리의 흑인들이 번쩍번쩍 광을 낸 차에 우루루 타서, 쿵쿵 하는 베이스
볼륨을 크게 틀어놓고 이상한 손 모양을 하면서 고개를 흔들며 랩(rap)을 따라 하는 모습도 싫고, 자기들 끼리 만났을 때
Yo- 어쩌고 해 가면서 복잡하고 이상한 악수를 하는 모습도 싫다. 차를 타고 가다가 흑인들이 길거리에 주루루 서 있는 길을
지나면, 반사적으로 차 문을 잠그게 되고, 그저 그들과 눈길이 마주치는 것이 싫어진다. 컴컴한 골목길에서 어쩌다 흑인들을 만나면
얼른 그 자리를 피하거나 삥 돌아가기 일수이다.

그런데, 지난 달에 내가 출석하는 미국 교회에 어떤 흑인
목사님이 와서 설교 하셨다. 보스턴 근교의 어떤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이라고 하는데, 바로 내가
싫어하는 바로 그 흑인 억양으로 내내 설교를 하는 것이었다. 무지 알아듣기도 힘들게, 설교 내내 이쪽 저쪽을 막 돌아다니면서,
흑인 특유의 큰 몸동작을 섞어서 하는 그런 설교였다. 물론 내게 무척이나 그 모습이 거북하게 보였다. 그 가난한 동네에서
목회하는 목사가 그렇게 번지르르한 정장을 떨쳐입고 설교하는 모습도 위선적으로 보였고, 비교적 논리적이고 정리된 설교에 익숙한
나로서는 좌충우돌 뛰어다니며 감정만을 북돋우는 것 같은 모습도 눈에 거슬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설교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그 내용에 내가 깊이 빠져들어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날 때 즈음엔 눈물까지 글썽거려가며 그 설교에 공감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쨌든, 내가 흑인들을 다짜고짜 싫어하는 것은 아닌 듯 했다.

흑인 차별과 호남 차별

나는 전라도 사람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얼마든지 전라도 사람이 아닐 수 있는 전라도 사람이다. 내 아버지께서 전북
출신이시긴 하지만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고, 내가 거의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에 잠깐 전주에 산 이후엔 늘 서울에 살았다.
내 말투에 전라도 사투리는 전혀 있지 않고, 오히려 대학과 대학원 그리고 직장생활을 대전에서 한 탓에 약간 충청도 사투리가 한때
내 말 투에서 배어 나왔었다. 그리고 내가 대학 때였던가, 본적도 서울로 아예 옮겼기 때문에 무슨 나의 공식적인 기록에서
전라도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중학교 때 이후 억척스럽게 스스로를 전라도 사람이라고 이야기 하고 다녔다. 국민학교 2년 반을 전주에서 다닌 연고로, 어쩌다 전주 출신 사람을 만나면 좀 오버를 해가면서 반가워 했었다.

그렇게 했던 유일한 이유는, 중학교 1학년때 어른들로부터 들어서 알게된 호남 차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단지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대기업에서 승진을 할 수도 없다는 이야기, 박정희 정권 이후 계속된 영남 정권이 계속 정치적인 이유로 호남 차별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등은 그래도 이를 악물고 들어줄만 했다. 그런데, ‘누가 돈의 떼먹고 달아났는데 호남사람이더라.’. ‘호남
사람하고는 사돈도 맺으면 안된다.’, ‘호남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종족이다’는 식의 이야기들을 들을 땐 아니 도대체 너무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왔다. 거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은 모멸감까지 느꼈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호남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반쪽 호남 사람으로서 스스로 호남인임을 거부하는 것은 괜히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나름대로 호남인이
되어 성공해 보겠다는 어줍잖은 객기를 부리고 싶어졌던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가장 친하게 지냈던 대구 출신 친구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늘 나는 스스로 마치 호남인의 변호인이라도 된 양 떠들고 다녔다.

그런데, 왜 이렇게 호남
사람들에 대한 차별이 있는 것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최근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대표가 쓴 ‘전라도 혐오증’ 이라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호남인들에 대한 차별, 아니 차별을 넘어 혐오의 감정은 기본적으로 호남인들이 가난하다는데 기인한다는 것이다.

전라도 혐오증’ 의 원인은 딱 하나, 전라도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것이다. 돈 없고 ‘빽’ 없고 배운 것 없이 객지에 가서 그
사회의 맨 밑바닥 일을 하는 사람 들은, 그들이 특정 지역 출신이든 특정한 인종 집단이든 멸시를 받게 되어 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70년대와 80년대의 우리나라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는 목욕탕
때밀이,작부,깡패,도둑놈,식모,사기꾼,노가다,노점상 등은 거의 예외없이 전라도 사투리를 했다. 시나리오 작가와 프로듀서가 전라도
사람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실제 사회가 그랬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직업을 가진 등장인물들이 주로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했다면
그 드라마는 ‘리얼리티가 없다’는 핀잔을 들을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높으신 분들’께서 호통을 쳐서 당장 ‘바로’ 잡았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 셋 가운데 하나가 사는 수도권에서 이런 밑바닥 직업을 거의 다 전라도 사람들이 하는데, 그들이 멸시 받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서울에 사는 경상도 사람들이 (다른 지역 출신도 마찬가지이지만) 보는 전라도 사람 들은 가난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행색이
초라하고, 몇 푼 되지도 않는 돈 가지고 악착같이 다투고, 대낮에도 술먹고 다니고…, 한마디로 말해서 함께 어울 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고향에 가서 ‘그런 전라도 사람’ 들에 대한 험담을 주저없이 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향에 뿌리박고 사는
전라도 사람들이 어떤지는 전혀 모른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자기네가 본 전라도 사람들이 왜 그렇게 가난한지를 따져보지도
않는다.

다시, 내가 흑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 돌아가 본다. 과연 내가 흑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은 무엇 때문인가? 100 여년 이상 지속된 끔찍한 노예제도로부터 벗어나서 1900년 대 초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외형적으로나마 ‘시민’으로 대접받게 된 이들. 원래 그들을 무자비하게 ‘포획’해 온 그 땅 아프리카는 아직도 정치적 경제적
낙후성으로 인해 지구상에서 가장 후진한 모습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반복되는 사회적 차별과 학대로 인해 어쩌면 스스로
당당한 시민으로 설 기회조차 제대로 갖지 못했던 길고 긴 지난 역사. 이런 속에서 이들이 구조적으로 가지게 될 수 밖에 없었던
빈곤과 낮은 교육이 이들에 대한 사회적 시각을 더 악화시켰고, 나 같이 흑인들에 대해 별 생각 없이 대했던 아시아인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난 아직 단 한명의 흑인 친구도 사귀어 본 일이 없다. 정말 마음과 마음을 터 놓고 흑인과
이야기 해 본적이 없다. 호남 차별에 대해 주먹을 불끈쥐고 분개하던 “자칭 의인”은 어느덧 여기서 이번에는 가해자가 되어 있는
것이다.

경상도 여자와 결혼한 전라도 남자

내 아내는 골수 경상도 출신이다. (사실 내 아내도
반쪽짜리 경상도 여자다. 왜냐하면 아주 어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으니까.) 내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모두 대구지역 출신이시고,
아주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신다. 처음 결혼을 해선, 처가 식구들이 쓰시는 경상도 사투리를 내 머리 속에서 ‘번역’해서
이해하는데 꽤 애를 먹었었다. 이번 대선에도 내 처가 식구들은 대부분 두말 않고 “기호 1번”을 찍었다고 한다. 내 친가쪽
식구들이 두말 않고 “기호 2번”을 찍은 것과 마찬가지로.

나름래도 반쪽짜리 전라도 청년으로서 호남 차별에 대해
분개했던 것, 흑인들에 대해 매우 불합리한 가학적 편견을 가졌던 것, 그리고 이제 반쪽짜리 경상도 아가씨를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게 된 것. 마음을 열고 편견 없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과, 내 불합리하고도 몰상식한 편견을
비교해 보면서 스스로 얼굴을 붉힐 수 밖에 없게 된다.

새해엔, 함께 복음의 감격을 나눌 수 있는, 멋진 흑인 친구하나 사귀어 봤으면 좋겠다.

@ 이 글은 eKOSTA http://www.ekosta.org 2003년 1월호에 실렸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