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를 용서하다 (2)

나는 참 영어를 못했다.
지금 내 영어가 매우 뛰어나다고 이야기하긴 어렵지만,
정말 나는 영어를 잘 못했다.

정규 고등학교 과정을 다 마치지 못한 탓이 크다고 늘 핑게를 대곤 했지만,
결국 학교다닐 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내 불성실함이 문제였다.

영어를 잘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MIT에 있는 동안 늘 기가 죽어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내가 졸업하기 전에는 그런대로 영어를 잘 하게 되었는데 처음부터 기가죽었던 나는 졸업할때까지 처음 기죽었던 것을 다 회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 영어가 부족하다고 유난히 많이 구박하고 윽박질렀던 내 이전 지도교수의 실험실 앞을 지나가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학교에 아직 다니고 있을 때에는 그 지도교수가 소리를 지르던 모습이 악몽과 같이 남아 있어서 그 앞을 일부러 피해서 멀리 돌아가곤 하였다.

성취, 효율성, 명성 등에 motivate되어 있었던 그 분이, 나를 윽박지르고 있었고,
나는 그 앞에서 안되는 영어로 더듬 더듬하면서 내 실험 결과를 항변하고 있는 모습이 떠올랐다.  내 설명을 다 듣지도 않은 채, 자기 혼자서 소리를 지르다가 나보고 나가보라고 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결국 어느날, 그 교수가 fund가 없다는 말을 했고, 나는 입술을 부르르 떨며 그 교수의 방을 나오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영어를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내 능력보다 낮게 평가되는 것이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울면서 기도했던 모습도 떠올랐다.

함께 classmate였던 아이들과 대화를 해보려고 하다가,
말이 막히면 미국 애들이 무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던 몇명의 얼굴도 떠올랐다.

나는 바보가 아닌데, 바보 취급을 당하고 있다는 굴욕감에 그렇게도 힘들어했던 지금보다 자그마치 12년이나 어린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그리 아프지 않았다.

그것은 내 잘못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주시는 것이라던가,
내가 못나서 내 성격을 다스리고 있지 못하는 것이라던가,
심지어는 내 소심함으로 상황을 극복할줄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권오승이라는 사람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한 시기에 그분의 선하심 안에서 펼쳐놓으시는 스토리였다.

사실,
나는 지금은 일반적으로 보는 한국인 유학생 출신에 비해서는 영어를 잘 하는 편이다. (내 착각인가? ^^)
그것은 아마 내가 영어로 인해 느꼈던 frustration 때문에 영어에 매달렸던 것에 기인하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서 이렇게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 하는 것은 그 스토리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선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 어그러진 세상의 질서 속에서 당신의 사람을 돌보고 계시는 그분의 손길… 바로 그것이 내가 돌아본 스토리의 중심이었다.

One thought on “MIT를 용서하다 (2)”

  1. 오승아.. 적어도 내가 들은 너의 영어는 훌륭하던데..
    난.. 아직도 영어를 잘 못한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나 역시 박사과정 내내 주눅들었고…
    영어로 설명을 못하는 순간에… ‘어.. 정말 내가 잘 모르는
    건가..’ 라는 착각까지 하면서.. 그렇게 악순환의 늪에 빠졌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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