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dache (윤리적 가르침, 교훈, 지혜)는 Kerygma(선포, 복음)에서 와야 한다.
Kerygma가 Didache로부터 올 수 없다.
Kerygma를 좀 더 잘 이해하려는 시도들 (변증, 연구) 역시 Didache의 영역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논리적 설득, 변증, 학문적 연구, 심지어는 성경연구 조차도 Kerygma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대 교회에서는 그러나,
Didache로부터 Kerygma를 이끌어 내려고 하거나,
Kerygma 없는 Didache만을 이야기 하려고 하거나,
아니면 Didache로 Kerygma를 대체하려는 일들을 많이 본다.
복음의 영광은,
Didache와 Kerygma의 관계를 명확히 할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디다케는 케리그마와 그 전달되는 방식을 달리할 뿐, 반드시 케리그마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것에는 좀 의견을 달리합니다. 복음의 생명력이 다양한 방식으로(디다케, 혹은 케리그마) 표출되는 것이지요.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히야… 바로 이런 comment를 좋아합니다. ^^
요즘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과연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시각이 무엇에서 출발해야 할까. 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내용의 골격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들이 reasoning으로 도달가능한 결론들일까… 등등의 생각들을 최근 많이 했었는데요.
하나님 나라, 인간, 하나님, 죄, 구원, 부활, 속죄, 성화 등등 중요한 개념들이 ‘설명’을 통해 주어졌다기 보다는 매우 불친절하리만큼 일방적인 선언으로 주어졌다는 생각들을 곱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용들,
그런 선언들의 consequence나 그것에 합당한 삶에 대한 것들,혹은 그것에 대한 reasoning이나 변증들… 등등이 따라오는 것이고요.
현대 교회에서,
Christian life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하는데, 막상 십자가, 하나님, 죄, 인간, 구원, 속죄등 일방적으로 선포해야하는 것들은 회피하거나 자신없어 하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Christian life, 변증, Christian ethics, life coaching, 상담 등등의 것이 점차 선포를 대체해가고 있는 것이 답답했고…
마치 그것들이 이제는 선포인양 행세하고 있는 것들도 많이 보고 있고…
‘말씀선포’라고 주보에 쓰여 있음에도 그 내용을 들어보면,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충분히 설명 가능한 것들만을 이야기하는 일들에 맥이 빠지는 때가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간…
그런 차원에서,
일방적으로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 더 상위의 개념들이고,
그 상위의 개념으로부터 다양한 가르침들이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한것입니다.
하위의 개념을 모았을때 상위의 개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요.
물론 케리그마와 디다케가 모두 복음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이 것에는 틀림이 없지만요…
오승형제 생각에 동감 한표요.
오늘 저녁에 KCF에서 할 설교 내용이 이건데…
KCF 분들은 이거 읽더라도 저녁에 message 들을땐 처음 듣는 척 해주세요. ^^
남편의 메시지 저도 궁금하네요.
그런데 전 케리그마와 디다케가 뭔지도 잘 모르지만, NT Wright 의 책을 읽다가 비슷한 의문이 들어서 그 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본 거였어요.
적어도 지금까지 읽은 초반만을 봤을 때는 과연 이것이 복음인가 궁금했었거든요. 적어도 제가 전해들은 그 분의 성향과 참 다른 종류의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그 분의 포인트는 책을 끝까지 읽어봐야 알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