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적 세계관 (1)

“기독교 세계관” 이라는 것은,

내가 받았던 신앙교육과 신앙훈련의 핵심이었다.

지난 20여년간,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면서 얻었던 유익은 대단히 컸다.

내 삶의 방향과 전략을 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처음 기독교 세계관 이라고 해서 접했던 것은,

개혁주의적 세계관이었다.

창조-타락-구속 이라는 framework을 기본으로 해서,

특히 ‘영역주권론’적인 관점에서,

이원론을 극복하고 피조세계의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선포해야한다는 것은,

젊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한계를 많이 느끼고,

그 대안적 세계관에 주목하였다.

대충 지난 10년여정도는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대안을 찾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싶다.

그중에는, 평화주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 세상을 거스르는 가치관 등등이 많이 포함되었었다.

80년대 한국 사회에서,

뭔가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과 소망의 tone으로

영역주권론적 세계관이 유용한 것이었다면,

지금 21세기 초반을 살아가는 한국과 미국의 기독청년들에게는,

그들의 고통과 절망을 설명해내고, 소망과 joy를 제공해줄 수 있는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나 개인적으로,

그 대안을 찾아내어 실전적용을 해보았다고 하기엔 아직 길이 멀지만,

최근 ‘초월적 세계관’ 이라고 내가 이름지은 일련의 세계관의 틀이,

혹시 대안들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세계관 논의를 할때,

이런 세계관은 옳고 다른 것들은 모두 잘못되었다는 식의 접근은 미숙한 자세로부터 비롯된다고 본다.

복음이라는 웅장한 스케일의 구조물을,

그 당시 상황에 맞도록 적용해내는 tool이 기독교 세계관이지,

기독교 세계관 자체가 복음을 함축해서 설명해내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기존의 기독교세계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범했던 잘못들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을 복음 전체인 것인양 이야기하는, 환원주의적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심지어는, 기존의 개혁주의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 그건 아니고, 이게 바로 유일한 복음적 세계관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는데… 사실 마음이 좀 불편하다.

서론이 좀 길었지만,

앞으로 몇번의 글을 통해서,

내가 요즘 고민하고 있는 ‘초월적 세계관’에 대해 좀 풀어보고자 한다.

PS 1) 아마 총 10번 정도의 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생각이 다 정리된 것도 아니고 아마 헛점도 많은 것이겠지만, 용기를 내어 한번…

PS2 ) 오늘부터, 직장에서는 죽어나는 2주의 일정이 시작된다. 내 블로그에 들어와서 댓글을 확인할 여유가 없을만큼 바쁠수도 있다. 그래서 일단 다음주 중간정도까지의 분량을 대충 써놓고, 시간이 나는대로 update도 하고 다듬어 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2 thoughts on “초월적 세계관 (1)”

  1. 오늘 아침에 갑자기 예수님이 원하시던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였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많이 이야기하는데 서신서의 공동체가 아닌 복음서의 공동체는 갑작스레 목회자인 저에게도 모호하게 그려지는 경험(?)을 했네요. 생각을 가다듬어볼 기회가 생기기는 했으나 간혹 이렇게 아주 기초적인 부분에서 뭔가 빠져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하신 세계관 논의도 이미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개념(정복과 영역주권)에서 벗어나 그 안에서 다른 개념으로 정리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아무래도 우리 세대는 ‘개념’에 익숙한 세대라 정복을 대신하는 다른 무언가가 제시된다면 좀더 마음편히,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용납하며 나아갈 수 있는 그런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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