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적 세계관 (2)

한국 선교초기,

시어머니로부터 심하게 시집살이를 당하는 며느리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아마도 여자라는 이유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도 못했을 터이고,

그야말로 인격적 대우를 받는 삶 자체가 박탈당한채,

가난을 온 몸으로 싸워냐야하는 상황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여인이 권서인(勸書人)을 통해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결국 남편몰래 얘배당을 출석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자.

이 여인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 여인에게 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현대 기독교가 흔히 접근하는대로, 

그 여인을 기독교적 상담을 통해 치유하는 일을 하는 것이 ‘정답’일까?

내 생각에는,

이 여인에게 있어서 신앙은,

현실을 ‘하찮은 것으로 만드는’ (trivialize) 통로가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하면,

현실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어쩌다 시어머니와 남편의 눈을 피해 몰래 교회 예배당에 와서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치며 기도를 하는 일을 통해,

‘광대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 하나님과의 대면(encounter)가 너무나도 웅장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문제가 오히려 상대적으로 가볍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 여인에게 있어서, 

실은 단기적으로, 심지어는 장기적으로도, 개선될 여지가 거의 없다.

이 질긴 목숨 끝내고 나면 저세상 가서는 편할 것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너무 젋다. 아직 챙겨야할 아이들도 있다.

상담이나 마음을 터놓는 대화 등과 같은 therapeutic한 방법으로 ‘치유’가 이루어 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분이신지, 예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하는 것을 그야말로 감당할 수 없이 마음속에 담는 ‘초월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과 나는 간데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는’ 경험을 하는 것이… 이 여인이 경험하는 신앙의 요체일 수 있다.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며 살기 위해 세상을 변혁해나가는 것이라던가,

같은 소망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는 것과 같은 모델은,

이 여인에게 적용되기 대단히 어려운 것 같아 보인다.

나는,

지금 이 시대에,

지금 이 여인과 같은 위치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도 생각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렸다.

생활을 위해 돈을 벌기위해, 이를 악물고 직장에 다니는 직장인들이 대부분이다.

여러가지로 사방에서 짓누르는 압박을 견디지 못해 우울증과 같은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대단히 많다.

그리고, 이것을 현실적으로 개선할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 힘도 없다.

이런 이들에게,

‘그것은 너희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거야’

세상은 변혁해라.

산위의 동네를 만들어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오히려 위에서 이야기한 여인과 같이,

교회 예배당에서 가슴을 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초월'(transcendence)을 이야기하는 것이,

다소 역설적이지만, 이들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은 아닐까.

6 thoughts on “초월적 세계관 (2)”

  1. 지난 몇년동안 우리가 함께 얘기했던 여정의 변화를 겪으신 분들도 위에서 말씀하신 ‘초월적 세계관’의 어느부분에 맞닿아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물론 목졸님이 의도하신바는 그 분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

    이런저런 일들로 힘빠지는 요즘입니다.

  2. 법륜스님이 근친상간 폭행을 당한 이를 상담한 글을 http://well.hani.co.kr/144374 보면서 그 경우에 어떻게 위로해주고 기도해주나 생각해보게 됩니다.

    ‘초월적 세계관’에 따르면 그런 이에게 기도하며 발견하는, 크신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라 이거죠? 그런데 초월적 세계관으로 용서와 치유 (회복) 소망이 어떻게 설명되나 궁금해요. 나중에 씨리즈 중에 나오나요?

    1. 그 글은,
      아주 전형적인 불교적 해결책을 제공해준 것 같아.
      ‘그런 일은 결국 허상이다. 없었던거다…’ 이렇게 정리가 되고 있으니.

      기독교적 해결책과는 정말 많이 다르더군.

      용서, 치유 등의 이슈는,
      첫째, 실체가 아닌 만들어진 이슈를 자기 안에서 잔뜩 키워놓은 경우도 많고,
      둘째,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결국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을 놓아야 해결될 수 있는것인데…

      결국 그것은,
      그 문제들이 ‘상대화’될때 가능한 것 아닐까.

      상대적으로 그런 이슈들이 trivialize되는 거지.

  3. 남편의 설명은 general case 의 용서와 치유를 얘기한듯 하지만.
    법륜스님 상담 케이스 속의 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을 듯하요. 첫째, 실체가 아닌 만들어진 이슈가 더 크다. 둘째, 네가 ‘붙들고 있는’ 거 내려놔라 .. 흠… 그런 말을 직접해 주지 않더라도 그런 생각이 그 ‘여인’을 상담해 주는 이의 맘에 있다면… 그거 좀 심각한대요. 그건 godly 를 떠나 inhumane 하게조차 느껴지는데요?

    역시 한 가지 관점으로 모든 걸 설명하긴 한계가 있는듯. 일편에 얘기했든 reductionism 은 항상 주의해야할 듯 하네요.

    또 모든 기독교 세계관의 중심엔 십자가 사건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건 아직 설명안된듯 해요.

  4. 정말 공감가는 글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시대이든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과 고난속에 처해 있을때는 사실 많은 경우 하나님과 하나님나라의 초월성을 붙잡게 되는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기독교 초기와 거의 70년대 초반까지도 그랬던 것 같고..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우리주님 오시기를 고대합니다…..”

    또 말할 것도 없이 흑인노예였던 신앙의 선배님들도 그랬던 것같아요.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나의 슬픔알까….” “아름다운 수레 집으로 날 데려가네…”

    그것이 얼마나 강하게 그들을 사로잡고 그분들의 신앙과 삶을 지탱해 주었을까를 새삼 생각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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