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주의로부터 배운다? – 고난에 대하여

베드로전서의 고난의 이야기를 읽다가 문득 든 생각.

Disclaimer: 나는 영지주의를 절.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니다. 영지주의를 인정할 수 없는 이유는, 참~ 많다.

피조세계가 깊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면,

그리고 그 안의 사람들도 아주 깊이 망가져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육체’는 그것 자체로 칭송받기에 매우 어려울만큼 죄로 물들어 있는 존재이다.

만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그 예수의 육체의 고통을 통해, ‘육체’ (혹은 피조세계)에 물들어 있는 죄를 소멸시키시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 역시, 고난을 통해 그 예수의 사역에 동참하고, 죄악된 육체를 소멸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것이라면…

어떨까?

그러면 다음의 성경의 내용들이 훨씬 더 잘 설명된다.

– 우리의 고난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운다는 개념

– 고난을 통해서 선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자체가 선이 될수 있다는 개념

– 아무런 자신의 죄와 무관하게 받는 고난에 대해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 질병, 상황의 변화 때문에 겪는 고난 등등)

혹시 시간이 좀 있다면,

소위 ‘주류’ 신학에서 육체를 악한것으로.. 정말 많이 악한 것으로 여기고, 그 육체의 죄를 소멸하는 과정으로서 고난을 설명한 입장이 있는지 좀 찾아보고 싶은데…

혹시 이런 것에 대해 좀 아시는 독자가 계실른지? ^^

2 thoughts on “영지주의로부터 배운다? – 고난에 대하여”

  1. 틀릴 수도 있지만 그런 부분에서는 청교도들이 가장 고민과 사색이 깊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존 오웬이나 조나단 에드워즈의 글들은 어떨런지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목졸님이 늘 조나단 에드워즈의 그 유명한 설교제목을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나는군요. ^^

    저도 주말에 좀 뒤젹여 볼께요.. ^^

    1. 그렇게 생각해보니,
      청교도들이 죄에 대해 인식했던 것으로부터 어떤 insight를 가져볼수도 있겠네요.

      어느 책에서였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요,
      조나단 에드워즈같은 사람이 가지고 있었던 속죄론은,
      penal substitute라기 보다는,
      government view에 가깝다고… 뭐 그런 얘기가 기억 납니다.

      죄에대한 인식과 고민이 아주 깊은 나머지,
      그것을 해결하는 해결책을 하나님의 통치 차원에서 풀어보려고 했던 것이었을까.
      뭐 그런 생각이 좀 들기도 하고요.

      하여간,
      전 계속, 죄, 고난 뭐 이런쪽의 고민과 생각이 참 많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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