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이태백에게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미국에 20세기에 왔고, 지금은 21세기 이니… 두 세기에 걸친 미국 생활 동안 한국이 많이 변한것은 틀림없으렷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심한 과정의 말인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을 들어보면 그것이 전혀 과정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들 ‘이태백’ 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참 꿈을 꾸며 이상에 부풀어 있어야할 나이에 절망하고 있는 이들에게 복음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어떤 것이 될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사도행전에 나온 것 같이 ‘은과 금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이들에게 어떤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을까.

선뜻 이것에 대한 대답을 섯불리 열거하기 이전에 어떤 것들이 아닌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

1. ‘예수 믿고 (현세적, 물질적) 복 받아라’
이건 아닌 것 같다. 이것이 복음이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이 아닐 뿐더러, 실제 그러한 현세적 복을 잃어버린 박탈감에 허덕이고 있는 이들에게 이러한 메시지로 사탕발림을 하려 한다면 복음은 정말 천박한 원색의 룸살롱 광고 찌라시 정도 이상의 attention을 얻지 못할 것이다.

2. 열심히 살아서 그 열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라.
말을 돌려서 해서 그렇지, 사실 이건 ‘성공해라’ 라는 말이다. 이들이 성공이 싫어서 그러고 있는 사람들일까. 성공을 억지로 피해서 이태백이 되었을까.
만일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비복음적인 말에 이들이 거짓 위로라도 받을 것을 기대해 볼수 있으련만.

3. 지금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올거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사실 나라도 그렇게 얘기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조금만 참아라.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풀어주실 테니.
그러나… 정말 그럴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앞에 두고 도박이라도 하자는 건가.

……

어설픈 “좌파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 이태백들 가운데 다수는 소위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이다.
경쟁 사회 속에서 낙오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교회는 ‘신자유주의적’ 메시지들을 강단에서 계속 선포하며…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들만 이야기 해왔지 않았는가.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우리가 야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고지를 점령하자고.

그런데 우리가 이들 이태백들에게 ‘우리에게 오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씨알이나 먹히겠는가!

교회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근본적으로 내가,
이 세상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생각, 이 세상을 바라보는 frame을 제대로 정비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20년 뒤,
텅텅빈 한국의 어느 예배당에서 나와 내 아내가 예배를 드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태백들의 박탈감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품어줄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보고 싶다.

3 thoughts on “[2004년] 이태백에게 교회가 할 수 있는 말은”

  1. 저희 학생모임에서 지난학기에 베드로전서를 함께 공부하면서 저희가 잡은 화두가 그것이었습니다.

    “고난을 앞둔 (혹은 지나가는) 자매/형제들에게 “예수그리스도”가 어떻게 답이 될 수 있는가?”
    지금 당면한 우리 친구들의 고난/어려움이 취업의 문제, 재정의 문제, 가정의 문제인데, 이것에 대한 답이/참 위로가 “예수”일 수 있을까?

    시대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세월호, 경관/흑인총격사망, 네팔…) 예수라는 답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는가?

    베드로는 구체적으로 불같은 고난을 앞둔 성도들에게 “순결하게 살자, 뜨겁게 사랑하자” 라고 권면하는데, 그것이 고난을 지나는 나에게는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이 말씀이 오늘 나에게 해답이 되지 않는다면 누가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고쳐져야 하는가…
    1. 베드로전서가 뜬구름잡는 소리 혹은 오늘 우리 (우리의 고난)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씀?
    2. 말씀을 받는 내가 새로워져야 하는 건가 (Re-orientation)?
    3. 이 시대가 어그러져서 말씀이 말씀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나?

    등등으로 한학기 매번 베드로 전서를 공부하면서 함께 고민했습니다.

    근데 뭐 10여년 전에 이런 글을 쓰셨으니, 그냥 조용히 깨갱할랍니다…..
    ————–

    근데 ‘좌파 그리스도인’은 같은 상황에 있는 청년들에게 뭐라고 메세지를 던지고 싶으세요? 교회가 뭐라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경책하고 가르쳐야 할까요?

    1. 이번에 인디에서 뵙지 못해 정말 아쉬웠습니다. -.-;
      이번에도 고생 많으셨지요?

      아마 다음주에도 예전에 제가 썼던 글 몇개를 올리려고 하는데요,
      아마 다음주의 글중 어떤 것은 질문하신 것에 대한 부분적인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지난 10여년간 글쓰기를 하면서 고민하는 거의 모든 내용은,
      결국 지금 이 청년들에게 복음이 어떻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소망을 잃어버린 세대에게
      복음이 소망이라는 것을 어떻게 이야기해줘야 하는가,
      복음이 소망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복음이 소망이라는 것을 어떻게 찾아갈 수 있을까…

      뭐 그런 질문들을 계속 하는 것이죠.

      베드로전서는, 저도 공부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베드로전서로부터 어떤 소망의 힌트를 찾아내려면,
      베드로전서를 읽고 있었을 그 당시 ‘공동체’를 많이 염두어 두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베드로전서에 나와있는 베드로의 권면들이,
      사실은 개인적인 윤리강령이라기 보다는,
      공동체적 윤리강령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중 어떤 것은,
      그냥 복음적인 일반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같은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이, 우리는 이렇게 살아보자… 라고 결의하는 형식의 윤리일 것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적 윤리강령을,
      지나치게 일반적인 ‘복음적 원칙’에서만 찾으려 하기 보다는,
      그 당시 상황에 맞추어서 적용할 수 있는 공동체적 결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수 있겠다는 거지요.
      그 공동체적 결의는 시간이나 상황이 바뀌면 바뀔 수도 있는 것이고요.

      뭐 베드로전서를 공부하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었습니다. ^^

  2. 네, 인디에서 뵐 수 있으면 참 좋았을것을요~
    그리고 거기서 고생은 무슨… ㅋㅋ 지가 좋아서 하는 일에 고생이라뇨..
    그냥 그곳에서 잘 대접 받는 것이 오히려 좀 불편했을 따름입죠..^^
    ————
    답글에 많은 생각들/질문들이 듭니다만 꾹 참고 이번주 포스팅들을 기다려 봅니다.

    맛난 것도 좀 드시고, 밖에도 좀 나가 보시고 하는 출장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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