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이상주의자의 변절

나는,
내 스스로를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해왔고,
다른 이들도 나를 그렇게 보아왔던 것 같다.

나는 내가 이상주의자임에 자부심을 느껴왔고 그 ‘순수성(?)’을 지키려 많이 노력했었다.

그런데,
요즈음, 내가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의 한계와 벽을 많이 실감한다.

1. 적어도 내게있어, 이상주의는 교만함과 tightly coupled 되어 있었다.
특히 신앙적 이상주의의 경우에 그랬다.
하나님 안에서의 순수함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은 좋으나, 내가 가지고 있는 ‘dogma’를 ‘옳은 이상’으로 설정해 놓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나 자신을 포함한)을 정죄하였다.
그 교만함은 다시 내 이상주의를 강화시키는 positive feedback 으로 작용하고, 결국은 나와 내 생각과 내 행동에 파과적 효과를 가져오는 듯 하다.

2. 이상주의는 현상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킨다.
현실적으로 어떤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이유가 있는데, 적어도 내가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는 그 복잡한 내용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는 (over-simplfying) 문제가 있었다.
내가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고,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고,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그랬다.
마치 내가 제시하는 어떤 문제 하나만 해결되면 그 시스템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그렇게 상황을 설정해 버리는 오류를 종종 범해왔음을 본다.

3. 이상주의는 종종 all-or-nothing의 approach로 가게된다.
소위 ‘혼합’이라는 것을 견디지 못하므로… 조금이라도 그 이상에 도달하지 않을경우에는 신랄한 비판만을 남긴채 아예 발조차 담그려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럴경우 결국 그러한 비판은 내가 아래에 쓴… ‘비판쟁이’를 양산하는 mechanism으로 작용한다.

4. 이상주의는 자주 사랑의 부족에서 기인한다.
‘고결한(?) 이상’만을 추구하기엔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 대상이 너무나도 많다.
사회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그 사회 속에서 진정으로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한다든지,
교회를 비판하면서 정작 그 속에서 당장 눈물을 뿌려 섬겨야할 영혼들을 생각하지 않는 부조리를 흔히 보게 된다.
가령… 교회가 타락했다고, 모든 교회의 문을 다 닫고 때려부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에는 그 안에 있는 영혼들이 너무 귀하다.
정말 한 영혼 한 영혼을 향한 눈물이 있는 사람이라면, 손을 더럽혀가며 현실과 싸우는 노력이 있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아직도 나는 ‘이상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열거한 내 결점들을 보면서… 어쩌면 여태껏 견지해왔던 스타일의 이상주의자로부터는…
내가 변절을 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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