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반윤리적 기독교

돌이켜보면, 이 글을 썼을 즈음부터, 지금의 내가 가지고 있는 입장과 위치로 향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지금은 이때의 생각보다는 좀 더 발전되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쓸 당시, 내 수준에서는 꽤 많은 생각과 독서를 하고 있었고,
KOSTA의 주제와 관련해서 많은 묵상을 하고 있었다.

이 글을 썼던 것은,
내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turning point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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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선장 이야기

어느 해적선이 어느날 크게 약탈을 하는데 성공하였다. 수많은 보화와 진귀한 물건 뿐 아니라, 여러명의 아름다운 처녀들도 납치해 오는 큰 성과였다. 해적선상에서 이를 축하하는 잔치가 열렸다. 잔치가 한참 무르익었을 무렵, 선원 몇 명이 해적선장 앞에 아리따운 처녀 몇 명을 데리고 왔다. 재미있게 한탕 놀아보자는 것이었다. 그때 해적선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네 이놈들, 너희들은 내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기는 크리스천임을 몰랐단 말이냐! 나는 결코 이 여자들에 손대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해적선장은 잠자리에 들기 전, 무릎을 꿇고 자신이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이 이야기는 복음주의권에서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신실한’ 신자들의 모습을, 해적선장이라는 비윤리적인 자리에 있으면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신실함을 지켜내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비유한 내용이다. 과장이 되어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이 모습은 어쩌면 아주 전형적인(typical) 한국적 그리스도인의 슬픈 모습을 그려놓고 있는지도 모른다.

A군의 직장생활 이야기

신실한 그리스도인인 A군은 한국의 어느 국가출연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학생으로 있으면서 캠퍼스에서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었고, 지역교회에서도 성실한 일꾼으로 인정받던 A군은, 직장에 가서도 신우회 활동등을 통해 ‘직장 복음화’를 이루겠다는 꿈에 부풀어 직장에 들어갔다. 그런데 직장에서 A군이 부딪혀야했던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번꼴로 있는 회식에서 여러가지 이유로 술을 거부하는 것이 마음 늘 부담이 되었다. 한약을 먹는다, 개인적으로 술이 안받는다, 운전을 해야한다는 등의 핑계도 이전 거의 떨어져 가고 있다. 주일마다 나와서 일을 하라는 압력을 받는 것도 A군에게는 심각한 도전이다. 교회에서 여러가지 일로 섬기고 있는 터에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세우고 있는 A군은 이 원칙을 깨지 않으려 정말 힘들게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 A군을 또 힘들게 하는 것은 가끔 ‘전문가 초청’ 가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가끔 세미나를 부탁한 전문가가 세미나를 펑크내면, 그냥 그 세미나가 열린 것으로 보고서를 써 내고 거기서 나온 경비로 연구실 회식을 하는 것이었다. 거짓 보고서로 회식이 마련되면 A군은 또한 여러가지 핑계를 대고 회식에 빠지려 노력하였다. 부정에 동참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가끔 직장 상사에게 피치못할 거짓말을 하는 것도 늘 마음에 걸렸다. 어쩌다 일이 밀려 기한내에 끝내지 못하면, 일을 이미 다른 부서로 넘겼는데 그쪽에서 아직 넘어오지 않아서 그렇다고 몇번 둘러대곤 했는데 이런 사소한 거짓말에도 A군은 심하게 마음이 찔렸다. 매일의 삶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다가오는 도전들에 정정당당하게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기도 외에는 없다는 생각에 A군은 힘들지만 매일 새벽기도에 나갈 것을 결심한다. 거짓말하지 말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 지어다. 이런 성경구절들이 A군의 QT 노트에는 자주 적히게 된다.

이것은 가상의 어떤 ‘경건한’ 그리스도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고자 노력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담겨져 있다. 하루하루의 삶에서 작은 것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노력하며 분투하는 모습. 그러나, 이 모습을 위의 해적선장 이야기에 대비시켜보면서 뭔가 석연치 않은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반윤리적인 기독교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여러 가지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큰 비판의 소리 가운데 하나는, 한국 기독교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비리와 부정축재, 당회장의 권력을 투명하지 않은 절차를 통해 아들에게 물려주는 문제, 교회가 다른 ‘사업’을 벌이면서 터져나오는 각종 탈세 혹은 비리 의혹들. 그 외에도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질 때 마다 항상 단골로 등장하는 교회의 집사, 장로, 권사, 목사님들. 이런 우리의 자아상이 우리 스스로 부끄러워서 일까, 어떻게든 하나님의 교회를 바로 세워야한다는 사명감에서일까, 아니면 함께 싸잡아서 욕먹는 것이 못내 분해서일까, 우리 안에서도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쏟아내는 목소리들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노라고. 적어도 세상의 상식 수준의 도덕만이라도 우리안에서 회복하자고. 사실 우리는 얼마나 교회나 기타 기독교 관련 단체 혹은 집회 등에서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길 도전받는가.
주일성수, 금연, 금주, 십일조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과 정직, 청렴, 사랑, 자비와 같은 ‘윤리적 규율’ 등을 나열하면서 이것들을 지키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그리고 우리 복음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윤리 기준은 세상의 타락한 가치기준보다 우월하다고. 그러나, 정말 그런가. 철저히 인본주의적인 기반에서 미국내의 불법 이민자들, 미혼모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들을 보았는가. 이들은 그들과 하나가 되기 위에 일부러 흑인 저소득층이 사는 지역에 가서 자기 자녀들을 교육시키며 박봉으로 그들의 어려움을 온 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다. 이런 이들의 도덕기준보다 과연 기독교의 도덕기준이 얼마나 더 우월하단 말인가.

자크엘룰(Jacques Ellul)에 따르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반윤리적’인 종교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방해물로 나타나는 모든 도덕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사랑은 어떤 도덕에도 굴복하지 않고 어떤 도덕도 만들지 않는다. 계시된 진리들(자유, 진리, 빛, 말씀, 거룩)은 어떤 것도 도덕과 관계하지 않으며, 또한 도덕을 탄생시킬 수 없다. 그 진리들이 일깨우는 것은 존재 양식과 삶의 모습이다. 그 삶의 모습은 지극히 자유로우며, 끊임없이 위험에 처하지만 항상 새롭게 되는 것이다. 도덕이란, 그것이 어떤 것이든간에, 하나의 금지이며 장애물이고 또한 그 안에 정죄를 내포한다. 정확히 예수께서 모든 도덕적 인물들에의해 어쩔 수 없이 정죄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독교 역사상 가장 근본적인 비극들 가운데 하나는 이 자유한 말씀이 도덕으로 변형된 것이다.” (자크엘룰, 뒤틀려진 기독교, p120-121,대장간 1990)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윤리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혹은 윤리적으로 누가 우월하고 열등하냐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을을 비그리스도인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원리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다.

즉, 전적타자(全的他者)로서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간극(gap)이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하나님같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절대적으로 인정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에 대하여 모두 상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만들어진 윤리적 강령들 심지어는 도덕적 강령들이 절대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복음의 근본을 흔드는 심각한 도전이다.

앞의 A군의 예를 다시 생각해 보자. 물론 A군이 성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열정은 분명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A군이 지키려 했던 주일성수, 금주와 같은 종교적 강령들이나 정직, 성실과 같은 윤리적 강령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때, A군의 노력은 매우 소모적인 것이 될수도 있다. 또한, 경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이 반복해서 종교적, 윤리적이되는 이유도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이 계속 점검되지 않기 때문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가 비윤리적, 비상식적인 모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을 강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강조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고난 (박해 : Persecution)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이 소모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부터 출발하는 순종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성경의 예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그 결과는 고난 혹은 박해(persecution)였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외치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필연적으로 갖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박해는 세계관의 충돌에서 비롯한다. ‘나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이 아님’을 발견했을 때, ‘나를 하나님’이라고 여기며 쌓아왔던 모든 전제들은 더 이상 이 새로운 세계관의 사람들을 담아낼 수 없는 것이다. 로마시대의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세계관을 도무지 담을 수 없어 그리스도인들이 사자밥이 된 것, 세속화된 중세교회에서 성경적인 메시지를 선포하려했던 초기 종교개혁자들이 받았던 박해도 이 세계관의 충돌로 이해할 수 있다. 한국 선교 초기에 선교사들과 초기 신도들이 받았던 박해 역시 구한말의 유교 봉건적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을 참아낼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한다. 그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의 시대정신이 복음적 세계관과 충돌할 때 일어나는 것이 박해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충돌은 어디에 있는가? 이 문제는 많은 연구와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더 이상 그러한 박해는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의 근본적인 뿌리가 세계관의 충돌임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기꺼이 받아야만하는 박해의 내용들을 조금 자세히 볼 수 있다. 매우 치열한 충돌과 갈등이 있어야 하는데도 별로 그렇지 못한 예를 몇 개만 들어보자.

(1) 경쟁 하덕규씨가 노래했듯이, 우리 시대는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 혼자 살아남는 것을 배우는’ 시대이다. 이러한 시대정신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살아간다면, 비록 그것이 정정당당한 경쟁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위해 스스로 패배자가 된다면, 아니 적어도 자신이 당연히 차지할 수 있는 것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산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된다면 이 사람은 이 시대가 가지고 있는 시대정신, 혹은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 자신의 가치관으로 정면으로 대항하는 ‘박해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쟁에서 낙오한 사람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인것같이 공감하며 함께 고통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러다가 어쩌면 자신도 치열한 경쟁에서 도태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어쩌면 진정으로 시대에 대항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러한 삶을 선택해서 살고 있을까.

(2) 성공주의 모두가 성공을 하고자 바둥바둥 하면서 사는 세상이다. 서점의 기독교 섹션에 가보아도 ‘성공’에 대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들이 진열되어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모두가 ‘성공’을 향해 매진해 갈 때, 아내 혹은 남편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신의 ‘성공’을 양보하고 스스로 한 단계 내려 앉는 삶을 선택했다면, 그 후에 주변에 자신과 함께 ‘성공’을 향해 달려갔던 사람들이 모두 어떤 성취와 성공을 과시할 때 자신의 초라한 모습과 비교하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성공’만을 향해 달려갈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삶의 모습을 지켜나간다면 이 사람 역시 성공주의라는 거대한 시대정신에 맨몸으로 맞서도 있는 사람일 것이다.

(3) 직업선택 어떤 직업이 가지는 수입에는 두가지 결정 요소가 있다. 하나는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적 문화적 가치이다. 즉, 그 일의 사회적 기여의 정도에 따라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일시적 혹은 장기적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직업이 가지는 사회적 기여와 무관하게 그 임금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직업이 창출하는 사회 문화적 가치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과 수입의 정도를 가지고 직업선택을 할 때, 임금 수준이 낮다 하더라도 더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선택을 한다면, 혹은 자신의 임금 수준이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 인해 그 가치보다 더 많이 정해져 있으므로 적극적으로 그 잉여 부분을 다른 이들과 나눈다면, 이런 선택 역시 이 시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자세일 것이다.

여기에 제시되어 있는 예들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항하여 사는 가장 좋은 예들을 선별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따라야할 지침들은 물론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각 사람에 맞게 어떤 길로 부르시고 그 부르심은 때로 세상의 시스템에 깊숙히 들어가서 사는 것일 수 있다. 이런 경우 전략적으로 겉보기에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해서 사는 형태로 살아갈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매 순간이 정말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살아내고자 하는 의지와 자세가 아닐까.

고난받는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

거대한 세상의 힘에 맞서는 일은 분명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과 맞서 싸우다 낙오하고 ‘박해받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낙오하는 것은 과연 실패일까. 여기에 공동체의 중요성이 있다. 물론 세상에 맞서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온몸으로 저항하다 낙오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경건의 영역에 그치게 된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일단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함께 비성경적 시대정신에 저항할 때, 이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그러하였다. 그들은 아주 단순히 자신들의 신앙의 양심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로마의 권력이, 시대 정신이, 사회적 통념이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던지 간에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해야만하는 일들은 반드시 하고야 말았다. 성경말씀 그대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다시 해적선장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전체가 해적선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정면으로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가치기준들을 외면한채 개인적인 종교적 윤리적 경건만을 추구한다면 우리의 모습이 해적선장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수도 있다. 조금 극단적인 비교가 되겠으나, 성적순결을 지키는 해적선장과 난봉꾼이지만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해안경비대장 가운데 누가 더 유익한 사람이겠는가.

복음은 원천적으로 모든 권력과 모든 권세를 뒤집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권력이 돈이건, 정치 권력이건, 사회적 통념이건간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을 때 그것을 뒤집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가 세상의 경쟁주의, 성공주의, 배금주의, 인본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여 그것을 뒤집는 예를 얼마나 볼 수 있는가.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대하여 태클을 걸며 유일한 하나님되신 그분의 뜻 이외에는 모든 것을 거부하는 당당함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정치권력, 금전권력, 쾌락주의, 사회적 통념등과 끊임없이 타협하면서 만들어내는 구차한 변명들을 얼마나 우리 공동체 안에서 많이 접하는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당당하게 거부하고,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타협함없이 지키는 진성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낙오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에 맞서 나가는 모습을 우리 안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공동체가 함께 고난을 기꺼이 감당해 나가는 자세를 견지하며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는 일들이 편만해 지길 소망한다. 그렇게 할 때 이땅의 우리 공동체들은 천박한 종교적 윤리적 강령들에 얽매여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공동체를 세상에 벤치마킹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으리라.

사족

이 글은 아직 미숙한 한 유학생의 묵상 글입니다. 많은 분들의 조언, 충고, 첨언들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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